영성위기시대의 영성

2007. 12. 12. 21:36참고자료/5,영성 자료

영성위기시대의 영성


김기홍 (복음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


이 나라의 이 시대를 무엇이라고 진단할까? 영적인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증거로 우선 신자의 숫자가 증가하지 않는다. 문을 닫는 개척교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우리 나라 기독교 신자의 수가 많게 잡아 25%가 된다 한다. 엄청난 숫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디 기독교에서 비롯한 문화가 흔적이라도 있던가!

초창기에 기독교인이 전체인구의 2%도 못되었을 때는 병든 사회를 인도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33인중에 기독교인이 16명 곧 절반이 된다. 당시의 사회 지도층 특히 정신적인 지도자들은 거의가 기독교인이었다. 술 담배와 도박과 축첩과 여성차별 등 각종 악습을 타파한 것도 기독교문화였다. 그래서 이 나라가 이 만큼이라도 살게 만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인이 어느 분야에서 모범을 보이던가? 예수 믿는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 누가 본이 되어본 적이 있는가? 예수 믿는다고 뇌물이나 부정이 줄어들었던가? 큰 교회를 인도하는 고참 목회자들은 어떠한가? 세상을 이끌었던가 아니면 권력자에게 아부했던가? 요즘 물의를 일으키는 세습제는 어떠한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상을 지배하고 이끌어가지 못하면 지배당한다. 물질적 사고가 마음과 교회를 장악한다.

요즘 교회가 그렇게 안 되는데도 대형교회는 계속 신도수가 증가한다. 신도수 증가는 좋은 것이지만 대부분이 작은 교회에서 수평 이동한다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 동네의 작은 수퍼마켓은 문을 닫고 대형 매장이 모든 소비자를 몰아가는 것과 같다. 음식은 계속 먹을 것이지만 영적 음식은 포기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장차 이 일을 어찌 하겠는가.

이러한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그리고 이것이 이 시대만의 특징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사를 통해서 여러 번 이러한 굴곡이 있었다. 문제가 클수록 변화도 크게 온다.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다.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복음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너무 뻔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 지금까지 그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1. 이 시대의 모습

중세의 모습과 비교해 보자. 중세 초기에는 교회가 사회를 이끌었다. 교회는 사회의 구세주였다. 당시 야만족의 침입으로 로마제국이 멸망한다. 찬란한 로마 문명은 폐허가 되고 모든 문화는 완전히 야만의 시대로 돌아간다. 유럽을 서서히 다시 문명화시킨 것은 교회였다. 당시 유럽은 난폭하였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으며 문화적으로는 빈곤하기 짝이 없었다.

교회는 폐허 위에 모든 것을 다시 살려놓았다. 반복되는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 속에서 사람들은 육신의 안녕을 무엇보다 갈구하였다. 신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도왔다. 굶주린 사람들과 좌절한 사람들에게 교회는 유일한 도움이요 의지할 대상이었다. 교회에는 교육이 있었고 돌봄이 있었고 소망이 있었다. 한 마디로 교회는 세상의 구세주였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는가? 교회에는 로마의 찬란한 문명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책이 있었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수도사였다. 세상의 쾌락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서 절제하고 검소하게 살며 고통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려는 이들이었다.

교회는 차츰 힘을 가지게 된다. 사람들은 교회에 많은 재산을 헌납한다. 특별히 십자군 전쟁에 나가는 귀족들이 많은 토지를 헌납한다. 전쟁에서 보호도 받고 죽은 뒤에는 천국을 원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 많은 부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리대금도 하고 땅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중세 말쯤 되면 거의 절반의 땅이 교회와 수도원 것이었다.

고위 성직자들의 삶은 사치 그 자체였다. 특별히 문예부흥을 타고 들어온 세속적 물결은 교회도 쉽게 오염시킨다. 교회는 세상의 축복을 다 거머쥔 곳의 상징이 된다. 건물 벽 한 평을 만드는데도 수천만 원이 들어갔다. 각종 대리석과 조각과 금이 사용되었다. 화려한 예식과 인테리어는 교회를 천상의 장소처럼 만들어주었다. 그럴수록 생명력은 줄어져갔다.

고위성직자들은 최고의 귀족이었다. 고위 정치가들과 결탁이 되어있었고 세상의 이권과도 다 연관되어있었다. 최고급 주택에 살면서 화려한 장식을 꾸미고 사치한 복장으로 왕이나 귀족들과 앉고 식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였다.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렇게 귀하게 되고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사회를 이끄는 게 아니고 거기 흡수된 것이다.

우리 나라도 이와 같은 모습이 전개된다. 초창기의 신자들은 수도사들 같았다. 그들은 스스로 절제하며 사회의 모범이 되었다. 가난하다고 깔보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대했다. 하나님의 자녀는 상놈과 양반의 차이가 없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애국자요 선각자였다. 아무 것도 안 배운 할머니라도 능력 있는 고결한 행동으로서 사람들의 감동을 불어왔다.

오늘날 신자들은 잘 살고 있다. 그러나 수도사처럼 세상을 구하며 구도하는 신자들은 드물다. 열성 많고 믿음 강하다고 할수록 교회 밖에서는 모범이 되지 못한다. 신자라고 윤리적으로 나은 것도 없고 신자라고 신용이 좋은 것도 없다. 도대체 신자와 불신자간의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신자들 자신도 무엇이 다른지 말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대교회의 문제를 조금만 말해 보자. 대 교회와 거기 담임목사는 중세의 대성당과 고위성직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목사들은 이들처럼 되고 싶어서 평생을 노력한다. 이들이 고위성직자들이 보여준 모범이 무엇이 있는지 말해보라. 정말로 세상의 십자가를 지면서 걸었는가? 성직자가 된다면 다른 신자와 아니 불신자와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노숙자에게 밥을 퍼주라거나 무슨 희생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복음적 원리로 해야 한다.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세상의 정치가들이나 오히려 비슷하다는 느낌만을 주고 있지 않은가. 이방인 간디가 말했다. \"희생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주님처럼 낮아지려는 모습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고후1:6) 모든 목적은 영혼의 구원에 있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 6:12)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고 가장 바람직한 길이라도 이것이 전도와 영혼 구원에 유익이 되는 일인지를 우선 생각해야 한다.

2. 인본주의

정신적인 분위기도 중세 말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 중에 심각한 것이 인본주의 불신앙이다. 학문적이라고 자랑하는 신학교는 거의 물들어 있다. 문예부흥시대 동방의 신문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연을 은총보다 그리고 이성을 계시보다 중요시하는 입장이 된다. 이 풍조가 사람들의 마음 깊이 자리잡게 되자 신앙은 희미해지고 도덕은 떨어져갔다.

문학과 예술이 발달한 것도 이 시대이다. 미켈란젤로, 라파엘, 단테 등 귀에 익은 거장들이 이때 나타난다. 전에는 성모를 그려도 육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영적인 실체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성모의 얼굴, 몸매 및 의상이 부각된다. 전에는 상상도 못할 나체화도 수없이 그려졌다. 사람들은 영적 축복보다는 땅의 복을 더 추구하게 된다.

남방보다 경건한 북방문예부흥의 지도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여러 저서를 통해서 당시 미신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그가 쓴 "바보예찬"이란 책에 보면 배가 난파할 때 시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 있다. 모두가 자기가 믿는 성자들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한다. "살려주시면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나이다"는 식이었다. 신앙이 아니라 기복적 회유였다.

이러한 비판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것과 대단히 비슷했지만 그 기본 입장마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출발점은 달랐다. 에라스무스는 이성에 비추어볼 때 교회가 부패했다고 보았으나 루터는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이성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성이 이해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성의 힘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기에 교회가 비판자들을 벌하려고 할 때 에라스무스는 자기의 입장을 철회하고 루터를 공격했다. 이성의 판단을 따라 진리를 추구했던 에라스무스는 선행으로 구원받았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등의 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인본주의가 하는 일은 우선 성경의 권위를 흔드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계시인 성경이 아닌 이성에서부터 접근하는 인식체계를 발전시켜왔다. 두어 세기 지난 뒤에 그 결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서구의 인식체계는 초자연과 영적인 세계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초자연과 영적인 세계가 사라져 감과 동시에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으로 대치시키는 작업은 19세기에 절정을 보았다. 이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죽음을 선언하고 마음대로 움직여 나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나타나는 열매는 파괴요 혼돈이었다.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히틀러주의, 실존주의가 20세기 초반부터 일어났고 세계 대전들은 수없이 많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하나님이 없는 데 영적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기에 인간은 죄악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특별히 신학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 지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땅의 것으로 인간이 얼마나 훌륭하게 사느냐에 관심이 모아진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그 안에만 참된 진리가 있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은 연구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졌던 성경은 은혜의 창고였고 영감의 보고였다. 성경을 통해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안에서 다시 하나님을 접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감격하였다. 이들의 기쁨은 연구와 함께 더욱 깊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은 그로부터 진리와 생명을 얻어내려 하기는커녕, 진노와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로 이끌고 말았다. 초자연적인 심판을 말하는 자는 전근대적이고 이원론자요 무지한자로 몰리고 말 참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받아들여질 지에 대한 관심이 없기에 그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초자연도 영의 세계도 없고 하나님도 없기에 구원의 의미조차 바뀌고 만다. 본래 기독교는 죄로 인해 지옥 갈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아 천당 가는 것을 구원으로 알았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다시 태어나서 계속 하나님의 도움으로 영성이 충만한 존재로 성화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지옥도 천당도 신화적인 이야기로 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단지 이 땅 위에서 인간들 사이의 상대적인 문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초자연이 아닌 자연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을 구원의 영역에 놓고 그것을 향해 신학의 연구는 집중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신학교육협의회에서는 공산주의, 민족, 세속화, 토착화, 민중, 민주화, 통일, 다원화 등의 준(quasi) 구원의 단어들이 유행처럼 신학의 주제로 토론을 주도하였다. 보수신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이런 주제들을 요구하였다.

이제 초자연과 영적인 영역을 버리고 하나님에 관해 무관심한 신학연구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갈증을 느낀다. 하나님과 그의 은혜가 없는 메마른 신학 교육은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건 신학의 본래 할 일인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변하고 마는 주제들이 아니라 불변하는 진리에 마음을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3. 비성서적 영성운동

영적인 면에서 혼란함 역시 중세 말과 비슷하다. 중세 교회의 의식과 미신과 율법적 신앙은 사람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오래동안 전래되어 온 신비주의 방법을 따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환상과 계시를 찾는 과격한 신비주의 집단에 빠지는 이들도 있었다. 무엇인가 분명한 기준이 없을 때 이러한 현상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요즘 미국 개신교에서 가톨릭의 영성에 접근하는 이들이 많다. 가톨릭 영성은 중세의 수도사들의 전통에서 나온다.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명상하기보다는 기도와 묵상과 고행에 집중한다. 기도하는 방법도 일단 말없이 한동안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는 묵상과 고행과 기도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름대로 영적인 체험을 얻어 깊은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경건이 얼마나 기독교적이냐는 것이다. 신비하기만하면 되는가? 병 잘 고치고 예언하면 다 되는가? 그것이 다른 종교의 신비체험과 무엇이 다른가. 불교나 힌두교의 성자와 그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의 힘으로 성화되어 가는가? 중생이나 성화처럼 영성도 그리스도의 힘으로 되어져야 한다.

말씀을 떠난 신비주의를 보자. 진리의 기준이 없다. 원리 없이 무턱대고 그냥 기도하면서 어떤 신비한 현상이 임하기를 사모한다. 오래 기도하고 금식하거나 찬송을 반복해서 부르고 춤추고 기분 나는 대로 웃어댄다. 개짖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기본적인 접근 방법은 종교일반이나 중세 수도사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는 무당이 하는 것과 같다.

아무렇게나 해도 은혜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무당이 하는 식으로 하는 게 가장 쉽게 신비한 경험에 도달할 것이다. 무조건 흔들고 떨고 정신을 잃으려고 해 보라. 반드시 신비한 체험이 나타날 것이다. 한 때 빈야드가 그런 식으로 영성운동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진리의 기준을 떠난 그런 신비 체험은 사람의 본성을 망가뜨리고 만다.

그렇게 신비 체험해 예언하고 병도 고친다고 하자. 필요한 돈 나오고 문제도 해결된다고 하자. 이러한 경험을 과연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당도 그러한 일을 하고 무당을 따르는 사람들도 신비한 경험을 한다. 사실상 어찌 보면 영분별과 예언은 무당이 더 잘한다고 볼 수 있다. 무당은 첫 눈에 보고 말할 수 있다. 신비한 체험이면 다 되는가?

산기도 갔다와서 정신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또한 그렇게 해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병도 고치지만 점점 이상해지는 사람도 심심찮게 있다. 가정제단을 쌓는다고 하면서 실제는 예수 이름을 빌어 점쳐주는 사람도 주위에 많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유익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신비한 은사를 받았어도 세속화하는 것이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이 그것으로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며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면 주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지만 길흉이나 말해주고 잘먹고 잘사는 이야기만 해준다면 복 받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이다. 기복적인 미신으로 이끌어간다. 결과적으로 그 예언의 은사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 귀신을 쫓는다고 그리고 은혜를 준다고 넘어뜨리는 일이 유행하였다. 일종의 암시요법이다. 일시적으로 기쁨을 주기도 하고 아픔도 제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본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변화는 넘어져서 되는 게 아니라 복음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능력이요 기적이라고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열심히 따라다녔다.

요즘 영성훈련이라는 이름 아래 육체 이탈이란 것을 가르치는 이가 있다. 그가 상대방의 영적인 수준을 말해준다. 애굽, 광야, 가나안으로 나누어 몇 단계라고 말한다. 그는 영서를 쓰고 그것을 해석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무당이 하는 방법이지 절대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런 식의 이적이 아니다. 그래도 그 훈련을 받으려고 얼마나 많이들 모이는지.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말하신다. 방언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라 한다. 예언도 질서 있게 하고 듣는 자들은 분변하라 한다."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며 말한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40) 무질서는 성령의 일이 아니다.

4. 율법적 영성과 복음

이것이 가장 오래되고도 가장 사람들에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영성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그냥 도덕적인 삶일 뿐이다. 유대인들이 한 것과 모양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영적인 풍성함과 여유는 없다. 분명히 도덕적으로 산다.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겸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삶이 영적인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자기의 노력으로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계명을 지키는 것도 죄 많은 내가 한다. 물론 기도도 금식도 선행도 다 그렇다. 내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특별나게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율법적 삶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동해야 하는데 말이다.

중세에 얼마나 선행을 강조했던가. 또한 오늘날 가톨릭이 얼마나 선행을 강조하는가? 낙타무릎이 요즘 나온 말이 아니다. 기도 많이 하고 선행 많이 해야 복을 받는다. 그러면 잘 산다. 그러니까 잘 사는 사람은 복을 많이 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그렇다. 교회가 크고 부자들이 모이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그래서 복은 땅에서 잘 사는 것이 되었다.

바리새인들이 잘 살며 가난한 이들은 멸시한 것도 같은 이치이다. 중세의 크고 화려한 성전과 수도원들은 모두가 축복의 상징이었다. 옷 잘입은 높은 사람들도 그러하였다. 같은 모습의 교회와 높고 잘 사는 사람들도 오늘날 같은 의미로 나타난다. 잘사는 것은 잘못된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신앙을 그런 식으로 이해해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게 잘못이다.

얼마나 기도를 강조하고 헌금 바치기를 강조하는가? 중세에 면죄부 파는 것처럼 건축헌금을 강요한다. 수도사처럼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한다. 하지만 한다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지 믿음의 내용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는 게 아니라 내것으로 하나님을 도우려는 것이다.

종교나 도덕이나 인간적인 모든 선행을 하나로 묶어서 율법이라 하자. 율법은 선행할 것을 강조하고 복음은 신분의 변화를 말한다. 율법은 말한다. "선을 행하라. 그렇게 계속하면 그 결과 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먼저 선한 사람이 되라. 그래야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선하게 만드셔야 선해진다. 그것을 믿어야 선하게 됨을 경험한다"

율법은 말한다. "진실을 말하라. 그렇게 계속하면 정직한 사람이 될 것이다." 복음은 말한다. "먼저 정직한 사람으로 변하라. 그러면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율법은 말한다. "선한 생각을 하라. 그렇게 하면 나중에 마음이 청결해질 것이다." 복음은 말한다. "먼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어야만 선한 생각이 나온다." 행동하기 전에 먼저 신분이 변해야 한다.

율법은 말한다. "사람들을 돕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복음은 말한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라. 그래서 자신의 변화됨을 믿으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게 된다." 율법은 "하라"하고 복음은 "받으라"고 한다. 율법은 "자신을 발전시키라"하고 복음은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 것을 받으라"한다.

한 마디로 율법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가는 구원이요 복음은 다 해놓은 것을 믿으라는 선포이다. 앞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지금 받고 구원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께서"다 이루었다"고 외치시니 그대로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고 거저 주는 선물이다. 여기에 바로 반응 만하면 모든 것은 달라진다.

혹자는 그것이 너무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구원파는 이것을 알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받은 다음부터이다. 복음을 믿은 다음의 일이다."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믿으면 사람이 달라진다. 구원의 능력이 주어진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을지 몰라도 근본이 바뀐다. 성화의 길로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5. 복음적인 영성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영성은 가능하지 않다. 칼빈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성령과 사귐이 없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 없다."(강요3.1.1) "성령은 모든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는 근원이 되는 "샘물"이며(요4:14),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행사하시는 "주의 손"(행11:21)로 묘사되었다. . .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강요3.1.3) 성령은 영성운동의 중심에 있다.

그렇다면 성령은 혼자서 역사 하시는가?"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강요3권1장 제목) 이 점은 루터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하신다. 말씀 없이 성령은 일하지 않는다. 말씀은 또한 성령의 도움으로만 깨달아진다.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는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화로 우리에게 온다.

그러기에 가톨릭과는 다르게 개혁자들은 늘 말씀과 영성을 일치시켰다. 개신교의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고 마쳐진다. 신비한 체험과 놀라운 능력과 이적 기사도 모두 말씀을 믿고 명상함으로 나타난다. 기도하고 고행하고 철야하는 것도 좋지만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그 모든 수고는 그대로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 그리고 엄청난 과업을 주신다. 이때 모세는 묻는다. "내가 누구관대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모세의 정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느냐 않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는 그 말씀을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한다. 몇 번의 기적을 경험한 뒤에 마지못해 나간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주시는 말씀대로 자신을 받아들일 때 능력도 신비한 일도 나타난다. 기도하고 울부짖어 의인이 되는가? 병고치는 능력을 받는가? 말씀을 받고 믿을 때 그렇게 된다.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때는 말씀을 명상해 영으로 받아먹는 훈련을 해야 한다. 늘 실패와 좌절 속에 살던 영혼은 한 번 하늘 양식에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탄을 이기셨던가? 저가 40일 금식했기 때문에 능력이 생겼던가? 그는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말씀을 마귀에게 주었다. "기록되었으되." 이 말씀을 듣고 마귀는 다시 도전했다. 그러자 주는 다시 "기록되었으되"하고 해당되는 말씀을 주셨다. 순전한 말씀 그것으로 마귀는 패배하고 말았다. 바울도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 하셨다.(엡6:17)

말씀 가운데서도 복음은 우리를 새롭게 정의해준다. 그대로 받고 믿어야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복음은 신비하다. 단지 믿기만 하는데도 믿는 사람에게 능력을 준다. 구원받았다고 믿으면 구원의 능력, 의로워졌다고 믿으면 의의 능력을 준다.

무엇이 영성인가? 개신교의 영성은 말씀에서 시작한다. 말씀이 정의하는 대로 자신을 정의한다. 믿는 자에게 죄사함, 구원, 능력을 주셨다고 한다. 그러면 그대로 믿어야 바른 영성이 시작된다. 누가 뭐라고 느낌이 어떻든 상황이 무엇이든 복음의 말씀은 진리요 불변하는 기준이다. 말씀이 말하는대로 기분과 감정을 만들라. 그 내용을 믿고 감사하고 기뻐하라.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신비한 체험을 바르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말씀은 하나이다. 말씀이 가지면 그가 개인적으로 우리 속에 거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말씀에게 우선권을 주면 그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다. 말씀이 속에서 지배해야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가 되신다. 말씀 따로 세상의 경험 따로 라면 영적 삶이 살아지지 않는다. 말씀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면 저절로 영적인 삶이 펼쳐진다. 이것이 영성이다.

왜 말씀을 제쳐놓고 이상스러운 체험부터 얻으려 하는가? 아니면 자기의 공로로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복음에 있다. 말씀은 복음을 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말해준다. 그 내용을 믿으면 우리의 신분이 바뀌고 신분이 바뀌면 마음도 능력도 달라진다.

왜 오늘날의 신자들이 그렇게 많아도 능력이 없는가? 복음적인 신앙에 서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믿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준다. 아무 것도 안하고 믿기만 해도 영성을 얻게 해준다. 필요하면 환상과 계시와 각종 이적도 나타난다. 믿고 손을 얹으면 병이 낳는다. 귀신이 나간다. 사도 바울처럼 방언과 예언이 나온다. 복음 말씀을 믿으면 그렇다.

6. 새시대를 위한 영성

종교개혁은 신앙의 혁명이었다. 그후 되는 나라마다 작은 개혁이 있었다. 독일의 경건주의나 영국의 감리교운동, 미국의 청교도신앙 대각성과 부흥운동 등이다. 이때는 분명한 신앙적인 원리에 의해서 개혁이 일어났다. 그것은 언제나 같은 종교개혁의 원리이다. 참으로 종교개혁의 원리는 영원한 개혁의 원리가 된다. 새시대의 영성도 이 위에 서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신교의 영성은 철저하게 성경말씀에서 시작한다. 본래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은 형식적으로는 말씀이요 내용적으로는 믿음이란 원리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기준으로 성경을 잡고 그 안에 머문다. 그리고 그 성경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내것이 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연결이 된다.

같은 성경이라도 가톨릭과 유대교는 율법만을 본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한다. 개신교 신앙은 그 반대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들을 보고 내가 감동하는 것이다. 복음은 언제그 감동의 원인이 된다. 그렇다. 부흥은 언제나 그 감동스런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사람의 변화와 참된 영성도 이때 얻어진다.

얼마나 많은 예언자들과 신비한 사람들이 나타났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불러 일으켰던가. 그러나 때가 되면 다 사라졌다. 하지만 정통 라인에 서 있는 위대한 종들은 종교개혁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진리의 기준으로 말씀을 잡고 다시 그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찾아내어 선포했다. 그것이 죄인을 의인으로 노예를 자유인으로 만들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모범이 되어야할 최고위 성직자가 어찌 준비 안된 자기 자식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물건처럼 물려주지 못해 안달인가? 하나님보다 보이는 건물과 조직을 믿는 게 아닌가!

목회자는 복음의 전파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야 한다. 건물이나 신도의 수에 따라서 교만하거나 열등감이 생긴다면 이미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복음 안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 .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당당함을 유지해야 주께서 사용할 수 있다. 물질은 영혼을 위해 있지 영혼이 물질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세상과 함께 가면 반드시 타락한다. 희랍정교는 정권과 밀착했다. 러시아의 정교도 그러하였다. 가톨릭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세상이 사치하고 세상이 타락해도 교회는 언제나 자기의 길을 바로 걸어야 한다. 교회는 건물이나 예식이나 정치보다 더 복음과 그 복음의 실천에 그리고 영혼 구원에 항상 모든 힘을 다 모아야 한다. 그것이 타락을 방지한다.

바울은 선언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이미 얻은 구원이지만 여전히 이루어나가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완전한 자녀이지만 아직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 구원도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을 필요로 한다. 구원파들처럼 이미 다 끝난 이야기로 넘기면 그것이 이단이다. 아직도 우리는 주를 의지하고 먼길을 걸어야 한다. 복음말씀이 그 힘을 준다.

아무리 세상이 급변해도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원리는 변함이 없다. 천지가 변하고 파국이 와도 절대로 변치 않는 것을 교회는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특별히 우리의 신분 변화와 능력과 새로운 삶에 대한 복음은 늘 사모하고 먹고 명상하고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영성은 그것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 영성은 복음의 내용대로 나를 만드는 도구이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어느 때 보다도 불확실하고 힘든 시대를 바라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불신앙적인 시대에 신자들은 신앙의 제약을 받는 게 아니라 새로운 도약의 도전을 받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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