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2007. 9. 5. 18:52선교자료/5.선교자료

- 면적

181,035평방 킬로미터로 한반도의 80%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고, 남한의 2배, 북쪽으로는 태국과 라오스
의 국경과 접해 있고, 동쪽과 남쪽으로 베트남의 국경과 접해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씨암 만(태국 해안)과 접
해 있다.
수도는 프놈펜(Phnom penh)이다.

- 인구

현재 캄보디아의 총인구는 1,300만명 정도이며, 인구의 대부분이 본토의 크메르족이 차지하고 있는데, 90%
정도이다. 나머지는 중국에서 이주 해온 화교 출신들과 인근 베트남에서 넘어온 베트남인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잇다. 소수민족은 부로 산악이나 강변에 잡해 살고 있다.

- 종교

*불교(현 국교) : 앙코르 왕조 당시 불교를 받아 들였던 배경을 바탕으로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소승불교로
발전이 되었다. 크메르 루즈 점령 전인 1975년까지 국교였지만 크메르 루즈군은 1975년부
터 1979년가지 전국 3천여 개의 사원을 파괴하고 약 8만명의 승려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
렀다. 1980년대 말 불교는 다시금 국교로 지정되었다.

*힌두교 : 불교가 도입되기 전 1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캄보디아 최대의 종교였으나, 현재는 이슬람과 함께
소수 종교로 전락하였다.

*이슬람교 : 소수 민족인 짬(Cham)족은 이슬람을 믿고 있다. 주로 프놈펜 하류의 강변에 기거를 하며, 최근
들어 시내 곳곳에 사원과 건축 등 부활하는 모습이 보인다.

*기독교 : 프랑스 통치의 영향으로 일부 지식층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어, 최근
들어서 선교, 봉사단체들로 인해 확산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 현지 시간

인근 국가인 태국, 라오스와 같은 시간대이며, 한국보다는 정확히 두시간 늦다. 공항이나 국경에 도착을 해
서는 한국의 시간보다 2시간 뒤로 돌리면 된다.

 

:: 기본정보 ::
5년 동안의 전투 끝에 크메르루즈 공산주의자들은 1975년 프놈펜을 정복하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철수하라고 명하였다. 백만명 이상의 피난민들은 사살되거나 강압적 고난으로 사망하였다. 1978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루즈는 시골로 물러나고 13년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크메르루즈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1993년의 UN이 지원하는 선거로 정상을 찾았다. 1998년 국민선거에서 형성된 연립정부으로 인하여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고 남아 있는 크메르루즈 군대는 항복하였다.
[면 적]  18만 1,035㎢ (남한의 2배)
[도 시]  
- 프놈펜(수도, 997,986명-1998)
- 도시화율 16%
[인 구]  14.1 million(UN,2003)
[일인당 GNP]  $270(World Bank, 2001)
[종 족]  크메르족이 82.5%, 토착 소수 종족 3.6% 베트남, 이민자들 11.2%
[통치자]  
- Head of state : King Norodom Sihanouk
- Prime minister : Hun Sen
[언 어]  
- 공용어 : 크메르어
- 문자해독율 35%
[평균수명]  55세(남), 59세(여)

:: 종교상황 ::
[종교분포]
- 불교 90-95%
- 회교  2.9%
- 정령숭배  2.7%
- 로마카톨릭  0.5%
- 개신교  1.5%정도

[특기사항]
불교는 15세기 이후 이 나라의 국교였다. 크메르루즈는 모든 종교를 뿌리뽑으려고 하였다. 불교 승려의 90%와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죽음을 당했다. 1978년부터는 보다 관대해진 기간이었으나 1990년 이후에나 기독교인들에게 공개적인 예배가 허용되고 있으나 아직은 2등 시민으로 취급하고 있다.
  
:: 선교사역 ::
[바울선교사소개]
- 김철환, 공혜영 선교사는 1995년에 캄보디아에 입국하여 교회사역과 장애인사역, 그리고 유치원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 정우천,서경애 선교사는 2005년에 입국하였으며 현재 현지적응과 함께 사역을 계획하며 준비중이다.

[기독교현황과 선교사역]
- 왕과 불교에 거슬리는 모든 일들은 잘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종교의 자유가 있고, 자국인이 전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므로 현재 기독교 세력이 소리없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 크메르 공산정권의 몰락이후 기독교는 다시 부흥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1993년 선거이후 YWAM과 OMF가 당시 정부로부터 선교단체로 허락을 받았고 선교사들은 비로소 심방과 전도 그리고 교회에서 설교 및 가르치는 사역 등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교회개척도 가능하게 되었다.

- 현재 캄보디아에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 천 만명 가운데서 약 3만명 정도로 인구의 0.03%에 불과합니다. 1994년 현재 캄보디아 고등학문연구소와 종교부의 조사에 의하면 캄보디아의 개신교 현황은 교인 21,705명, 101교회, 28학교 등이다.

- 21개 도 전지역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전도 지역이 거의 대부분이다.

- 캄보디아는 현재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 인도차이나의 복음의 교두보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모두 83명의 한국선교사가 교회개척, 고아원, 학교, 장애인사역 등의 다양한 사역을 준비하며 진행하고 있다.

[선교전략]
- 성숙한 지도자와 지도력의 부족은 서구 선교단체의 후원금을 사용하는데 다툼, 분열,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프놈펜에 성경학교가 하나 있다.

- 기독교 구제사역이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 살해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공백을 메울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하다. 복구, 고아 양육, 재건, 보건, 농업, 어업, 수자원관리, 교육 등 모든 분야에 기독교인 사역자가 필요하다.

- 문호 개방으로 그릇된 가르침이 급증하고 있어 성경공부 교재에 대한 실제적인 필요가 생겨나고 있다.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성경적 지식이 있는 신자가 거의 없다. UBS 등이 크메르어로 된 성경과 신약을 공급하고 있다. 1993년에 새로운 크메르 신약성경이 완성되었다.

캄보디아 기독교 역사


1555년

  • Malacca에서 활동하던 포르투칼의 도미니크 수도사들에 의해 카톨릭이 전해짐

1568년

  • 회심하여 영세를 받은 불교 승려가 최초의 순교자가 됨

1724년

  • Satha 2세가 카톨릭으로 회심하였으나 죽을 때까지 영세를 미룸863년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카톨릭 선교의 완전한 자유가 이루어짐

1921년

  •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CAMA) 선교사가 남부 베트남 지역에서 캄보디아어로 된 쪽 복음서(누가복음, 사도행전)을 번역함.

1923년

  • David Ellisons와 Arthur Hammonds 두 커플의 CAMA 선교사가 캄보디아에 입국
  • David Ellisons는 바탐방에서 5명의 학생으로 성경학교를 시작함(1925)
  • Arthur Hammonds는 프놈펜에서 성경번역을 시작함
  • 남부 베트남지역에 있던 캄보디아 기독교인들이 바탐방과 북서부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함

1928-29

  • 모니봉(Monivong)왕이 전도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림. 성경학교 학생들은 투옥됨.

1933년

  • Arthur Hammond가 신약성경 번역을 마침

1940년

  • 구약성경 번역을 마침. 그러나 캄보디아 성경이 출판되지는 않음

1941년

  • 일본제국이 캄보디아를 통치함. 몇몇 선교사들이 구금됨

1945-52

  • 반 프랑스 활동으로 많은 카톨릭 교인들이 순교함
  • 이 시기에 개신교인도 처음으로 순교함

1953년

  • 프랑스로부터 독립함. 캄보디아 성경이 출판됨

1965년

  • 시아누크왕의 반미정책으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강제로 출국당함.
  • 40여년의 선교 결과 천명 미만의 교인을 갖게됨

1970년

  • 론놀 정권이 세워지면서 CAMA 선교사들이 돌아오게 되고 이 시기에 약 3천명의  성도로 성장

1970-75년

  • 도시지역에는 가정교회들이 세워지고 주요 지방 도시의 교회들이 성장함

1973년

  • 대규모 야외 전도집회가 프놈펜에서 열림. 청년들과 지식인들에게 어필되게 됨

1975년

  • 프놈펜이 크메르 루즈군에 함락되고 선교사들은 탈출하게 됨. 이 때의 기독교인은  약 1만명에 이름. 기독교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은 순교하게 됨

1979-90

  • 기독교 구호 기관들과 선교사들이 태국 난민 캠프에서 사역함
  • 교회들이 지하에서 활동함.
  • 성경 및 기독교 출판물이 발간되었으나 전도는 금지됨

1989년

  • 불교가 국교로 다시 인정됨

1990년

  • 기독교가 15년만에 인정되었으나 모든 성당과 교회들이 파괴됨. 많은 교파의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이 활동을 시작함

1991년

  • 파리 평화 회담으로 UN통치를 받게 되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언어를 배우기 시작함

1993년

  • 한국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됨

캄보디아교회 현실

수도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7월 5일~6일의 내전동안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았다.
캄보디아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Cambodia)의 대표인 죤 코트렐(John Cottrell)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십자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십자가는 7월 전쟁터 한복판에 있었던 공항 가는 길 바로 옆의 하나님의 성회 본부 마당에 자리 잡은 중량감 있는 8피트 높이의 흰색 십자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는 믿음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의 목회자를 기르기 위한 신학교 건물을 포함한 5동의 건물은 전혀 피해 받지 않았다. 이 기관은 캄보디아에서 영적인 지도로부터 인도적인 사업까지 다채롭게 사역하는 많은 기독교 기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코트렐은 말한다.
캄보디아에 있는 많은 기독교 외국인 사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코트렐은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
“1985년 2월 1일, 제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주위에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Le Cambodge’라는 말 (저는 프랑스와 미국의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게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성회는 세계 전역에 교회들이 (캄보디아에도 몇 개의 교회가 있다) 있는데,
그 교회들에는 신자들이 모이고, 방언을 하고, 믿음으로 치료하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정신적인 질환을 일으킨다고 알고 있으며, 예언을 하고 귀신을 축출하고 있다.
“(귀신축출은) 매일하는 일은 아닙니다”라고 코트렐은 말한다.
이 기관의 캄보디아 지부는 두 곳의 공립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두 곳의 의료기관을 운영하며,
두 곳의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왕립프놈펜대학의 의학대학에서 영어훈련을 시키고 있으며,
지역개발을 하며, 하나님의 성회의 교회들을 세우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 NGO들이 캄보디아를 재건하는 일에 기여하고자 할 때, 교회를 세우는 것은 인도적 사업과 동일하다.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은 다리를 세우는 일과 동일한 가치가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신가 라는 것을 설명하는 일 (내부의 재건)은 학교를 건축하는 일 (외부의 재건)과 마찬가지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들의 세속적 프로젝트들은 항상 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 프로젝트들은 그것들이 공적으로 드러난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때로 결과적으로 교회들을 남긴다.
하나님의 성회의 학교들은 그 커리큘럼에 종교적 가르침을 포함하지 않지만, 이 공동체들은 자주 건축과정에서 교회들을 세운다.
“우리가 입국하려고 생각하던 1990년에, 하나님의 성회는 캄보디아정부와 협약했습니다.
우리는 학대받는 자, 상처받은 자, 가난한 자, 고아들을 도우며, 그리고 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고 코트렐은 말한다.
캄보디아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마이크 에반스(Mike Evans)일 것이다. 그는 1994년에 입국하면서 병든 자를 치유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소동이 일어났고, 그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쳤다. 코트렐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의 그의 행동 때문에 그 기관에서 축출 당하였다.
캄보디아의 95퍼센트 넘는 인구는 불교도이다. 파고다(pagoda)가 전국에 널려있다.
승려들은 자주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인구의 0.5퍼센트도 되지 않지만, 고위 기독교인들의 의미 있는 숫자와, 서구인들이 운영하는 돈 많은 기독교 NGO들과 새로운 신자들을 이끌려는 선교사들 때문에 눈에 두드러진다.
캄보디아의 기독교인 수는, 몇몇 기독교 기관에 따르면, 명백하게 증가하고 있지만, 정확히 계산하기는 매우 어렵다.
대부분 캄보디아인 들은 모든 형태의 기독교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교파들과 신학적 차이로 누가 기독교인인가에 대한 정의가 기관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캄보디아복음협회(Evnaglical Fellowship of Cambodia)는 (몇몇 기독교 교파들의 상부단체) 1994년에 100개 교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기관은 1998년 7월 현재 700 교회들과 15,000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제일 부회장인 츠혼판꽁(Chhon Phan Kong)은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를 외국종교라고 생각하는 일반인의 반응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때로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곤란합니다.”라고 츠혼판꽁은 면담동안 말하였다.
“기독인들이 예배방식을 바꾸고 사후의 삶에 대한 신앙을 바꾸어서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줄 것 같아 매우 주의하고 있습니다.”
풀 먹인 빳빳한 셔츠와 헬멧을 착용하고 수도를 자전거로 돌고 있는 19세의 2명 1조의 선교사들로 유명한 몰몬교인들은, 1994년에 입국하여 현재 네 곳의 교회와 825명의 신도들이 있다.
천주교인들은 교리공부를 최소한 3연간을 요구하며, 매년 평균 50명의 개종자를 가지지만, 현재 20개 교회에 20,000명의 신자들이 있다.
정부는 기독교인 총수가 30,000명을 조금 넘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캄보디아 선교사들은 50,000명 채 못 미친다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캄보디아내의 외국인 기독교인들을 위해 매 주일 오후에 예배를 드리는 국제기독교회(ICF : International Christian Fellowship)의 담임목사인 그라함 �스(Graham Chipps)는 기독교인의 숫자를 산정하는 일은, 연락체계의 신뢰성과 교회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 때문에,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복음협회는 가정에서 모이는 최소 5명 정도의 모임을 기독교 공동체라 생각하는 반면에 한 곳의 교회와 3곳의 교회를 준비중인 영국교회는 좀더 공식적인 조직과 최소 20명의 모임을 공동체라 생각한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침례교인이 멀리 북서지방에 한 침례교회를 방문하였는데 그 곳에서 그가 알지 못하였던 다른 침례교회들을 발견하였습니다.
한 무리의 교인들이 이웃 마을의 친척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지요.”라고 칩스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성장을 뽈� 체제의 공포에서 캄보디아인 들을 보호하지 못한 불교의 실패와 수십 년의 내전과 빈곤에 찌들게 한 국제적 고립과 상대적인 기독교인들의 부로 설명한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상대적인 부는 미국 개신교선교사들이 쏟아져 들어오도록 론 놀 정부가 허락한 1970년에까지 소급될 수 있는 대규모 기독교 단체에서 특별히 오는 것이다.
1964년 이후 캄보디아 안팎에서 살고 있는 ‘The Cathedral of the Rice Paddy’라는 책을 쓴 프랑스와 뽕쇼(Francois Ponchaud)신부에 따르면 캄보디아는 가가호호 방문하는 개신교인들에 의해 성경과 기독교 문서로 뒤덮였다고 한다.
어떤 기독교 NGO는 기독교 신앙과 성공을 직접적으로 연결하였다.
1973년 캄보디아에서 가장 큰 NGO인 월드비전(World Vision Interntional)은 기독교인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직업을 주었다고 뽕쇼는 쓴다.
월드비전 대표인 저스틴 비워드(Justin Byworth)는 최근 그것은 더 이상 월드 비전의 정책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1970년대 초반의 월드비전 프로그램과 오늘의 프로그램은 매우 다릅니다.”며, 더 이상 이 문제를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크메르루즈가 통치하던 1975년에서 1978년까지,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직자들은 살해당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의 베트남의 지원하의 공산정권은 예배장소를 재건축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전의 교회자리에 공공건물을 건축했다.
기독교는 1990년이 되어서야 다시 공식적으로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기독교가 번창하기 시작했던 곳은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의 난민캠프였다.
“어떤 이들에게, 불교는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다.”라고 뽕쇼신부는 그의 책에 기록했다.
“다른 이들은 자선조직의 힘에 충격을 받았다. 거의 모든 것이 기독교인들로부터 왔고, 심지어는 국제 적십자사조차 십자가로서 인식되었다.”
뽕쇼 신부에 따르면 이 캠프에서 불교도의 존재는 캄보디아에서 믿고 있는 소승불교(Theravada Buddhism)와는 꽤 다른 소토 젠 불교(Soto Zen Buddhism)를 믿는 일본 소토슈 구제위원회(Japan Sotoshu Relief Committee)로부터 온 대표들과 난민들에게 즉각적인 물질적 지원보다는 파고다를 설립하는데 더 관심이 있던 태국으로부터 온 승려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동료 기독교인들 천주교와 개신교의 행동은 그의 믿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난민들에게) 당신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수하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인터뷰에서 뽕쇼 신부는 말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쌀 크리스천(rice Christians)”라는 용어는 아시아 지역에서 생긴 용어임에는 틀림없지만, 언제 어디서 처음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 용어는 물품이나 서비스를 얻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난민 캠프에서 뽕쇼 신부는 최근 인터뷰에서 그가 많은 세례증을 얻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이민 크리스천(immigration Christians)”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 종이는 출생증명서와 비슷하게 신분증명의 형태로서 작용하며, 그것을 발행한 기독교기관은 쉽게 난민들이 미국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수많은 개신교 조직들은 매우 신중하게 원조를 했다”라고 뽕쇼 신부는 그의 책에 기록했다.
“반면에 앵글로색슨의 근본주의자 전도인 들은 개종자들을 얻기 위해서 새로운 이주민들의 고난을 이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으로 쉽게 갈 수 있도록 세례증이나 종교적 가르침을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25,000명 이상의 캄보디아인 들이 세례를 받았다.
때때로 확성기를 통해서 그들의 교회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파고다의 불교승려들을 사탄의 추종자들이라며 욕했다.
인도차이나 제작소(Indochine Productions)에서 통역으로 일하는 Yin Soeum은 그 캠프에서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으며 만일 그가 세례를 받는다면 미국으로 여행을 시켜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교회에 가서 평안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이민을 가고 싶은 강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기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그와 의절을 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교사들과 충돌한 가장 최근 일은 캄보디아에서 제작되었던 가장 비싼 영화인 “킬링 필드에서 1000년”을 제작한 미국에서 설립한 크리스천 방송 네트워크(CBN : Christian Broadcasting Network)에서 통역으로 일했던 지난 해였다(1998년).
지방 방송에 2회 방송되었던 이 크메르어로된 가상 다큐멘터리는 크메르 루즈 지배기간 동안 그들의 끔찍한 경험 후에 기독교로 개종한 캄보디아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촬영하면서 CBN 제작팀은 제작기간 동안 한 시점에 절 가운데에 서서 크메르어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서 있도록 하면서 그 지방 스텝을 개종시키려고 시도했다고, 그 촬영장에서 일했던 몇 사람들은 말했다.
Yin Soeum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절에서) 그들의 모자나 신발을 벗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캄보디아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갔다면 로마인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행동은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들이 영화를 통해 캄보디아를 선교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나, 다른 기독교 단체들처럼 이민이나 일자리를 약속함으로서 캄보디아를 선교대상으로 삼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몇몇 좋은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 나쁜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는 말한다.
“처음에는 영화일을 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제작이 마칠 때가 가까워오자,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캄보디아협력위원회(Cooperation Committee for Cambodia)에서 발간한 캄보디아의 국제인도주의지원(International Humanitarian Assistance) 1998년 연감은 메노나이트에서 천주교에 이르기까지 30개의 기독교 NGO(민간단체)이 있으며, 거의 2000명을 고용하고 있고, 연간 총지출은 2000만 달러이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NGO들의 협약사항은 건강관리, 도로건설, 우물개발, 고아원 운영, 영어교습등을 포함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은 항상 기독교인의 가치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에 있는 것이다.
또한, 캄보디아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상당하다. 그 2000만 달러는 만일 그들이 이곳에 있지 않다면 캄보디아가 얻을 수 없는 돈이며, 2000명의 고용인력의 대부분도 캄보디아인이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수없이 많으며, 어떤 경우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매우 귀하다.
국제 그리스도의 교회(International Churches of Christ)의 자선부문인, Hope Worldwide은 캄보디아에서 유일한 성인무료진료를 제공하고 있는 Sihanouk Hospital Center of Hope를 운영하고 있다.
캄보디아를 위한 기독교인 케어(Christian Care for Cambodia)는 프놈펜의 왕립프놈펜대학에 영어강사들을 제공하고 있다.
루터교세계봉사회(Lutheran World Service)는 깜퐁스뿌지방에서 지뢰제거를 하고 있으며, 예수회봉사회 캄보디아지부(Jesuit Service-Cambodia)는 많은 다른 프로젝트 중에서도 장애인을 위한 직업훈련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월드비전 캄보디아지부(World Vision International-Cambodia)는 1975년에 이 나라를 떠났다가 1979년에 다시 되돌아 왔다.
캄보디아 국제 인도주의 원조의 연감에 따르면 월드비전 캄보디아지부의 연간 예산은 400만 달러를 넘으며, 거의 300명의 인원을 고용하고 있다.
월드비전은 NGO 단체들 사이에 좋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자주 인도주의적 사업과 선교적 과업을 나누는 구분선을 넘어선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고용인들에 대해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1970년대 초반의 정책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월드비전은 승진의 최상한선(glass ceiling)을 가지고 있다.
“보통, 월드비전의 상위 관리자는 기독교인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워드는 말한다.
“월드비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요. 우리도 그런 사실을 비밀로 하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몇 개의 침례교 모임에서 일했던 미국인 목사인 러쎌 보워즈 2세(Russel H Bowers Jr)는 월드비전의 유일한 전임 선교사이다.
그는 6개월 전에 교회지도자들을 훈련하도록 고용되었다.
그는 “복음이 이곳에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 그는 전도를 하고 새로운 기독교인들을 만들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온 것이라고 자신이 온 목적을 말한다.
그는 많은 월드비전 스텝들이 그들이 이곳에서 직장을 처음 갔었을 때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기독교를 영접했고, 그는 이 현상을 기독교인 스텝들의 “진실함과 사랑”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월드비전은 14개 시골지역에 도로건설에서 건강관리에 이르는 모든 것을 시행하는 개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선명회의 특별한 프로그램은, 거리의 아이들(Street Children)과 함께 하는 사업과, HIV/AIDS의 치료와 예방,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응훈련 및 지뢰제거 등을 포함하고 있다.
월드비전의 1998년-2002년의 캄보디아 전략의 요약보고서의 후반부는 교회관련사업이다.
그것은 그들이 일하는 지역에 이미 세워진 교회들과의 협력과 “월드비전의 기독교인 스텝들의 삶을 통한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
몇몇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월드비전의 스텝들이 그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해 왔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전도함으로서, 또는 일자리를 공급하고 공동체에 봉사하는 일들과 결합되어서 행해진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매우 동등합니다.” 종교부(Cults and Religion) 장관인 찌어 싸분(Chea Savoeun)은 말한다.
"국민들 중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에게 쌀을 선물로 주고 그들은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습니다.“ 영적인 사업과 함께 인도주의적인 일을 연결하여 추진하는 기관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더더욱 시끄럽다.
“나는 그것을 경제적 복음전도(economical evangelism)라고 부릅니다.”
미국인 소승불교 승려이며 안수 받은 감리교 목사였던 비라 아바로키타(Vira Avalokita)는 말한다. “나는 일자리가 필요했고 그래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월드비전은 개발사업 뒤에 남겨진 교회나 기독교인들의 숫자에 대한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식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월드비전의 스텝들은 꼼퐁 스뿌의 오동 군과 꼼퐁 쏨의 프라샅 발랑 군에 그들의 프로젝트로 인해 세워진 교회들을 의식하고 있다.
“우리가 프로젝트에서 기독교인 스텝을 투입하는 곳에서, 우리는 또한 스텝의 삶과 일이 그들의 신앙에 증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지역교회에 소속되기를 바랍니다.” 비워드는 말한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월드비전을 포함한 기독교 단체의 대표들은 그들이 원하는 -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들이 기독교 기관에 고용이 되었기 때문이거나, 캄보디아로부터 이민을 가고 싶어서거나, 어떤 형태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이든,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정말 인정하게 되기(they do admit)를 바란다고.
“사람들이 이 안에 그들을 위한 이용할만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보워즈은 말한다. “저는 월드비전이라는 단체가, 사람들이 시류에 편승하여 기독교인들의 숫자만 불리게 되거나 ‘쌀 기독교인(Rice Christians)’만 만들어내지 않도록, 이런 가능성들을 피하기 위해 사업을 잘 추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캄보디아 교회를 위한 최근의 한 기도회가 뚤꼭에 있는 OMF(the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센터에서 매주 목요일에 열리고 있는데,
예닐곱명의 기독교인 사역자들이 어떻게 인도주의적인 사업들과 영적 사업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들의 신앙체계에 의하면 양쪽 다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보다 어떤 다른 이유로 기독교를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캄보디아의 문화입니다.”
기도회 후의 인터뷰에서 칩스목사는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보호자를 찾는 보호자 의존자 관계성 문화(patron-client relationship culture)입니다. 그들은 보호자에게 충성합니다.
저는, 그들을 돕는 기독교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보호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캄보디아 사람들의 끊임없는 생각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호자 의존자 관계성의 형성하지 않고 캄보디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호자 의존자 관계성이 형성된다는 의미는, 당신이 나를 금전적으로 물질적으로 돌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믿는 것은 무엇이든 나도 믿을 것입니다.”
기독교 NGO들은 현재 외무부가 추진하고 있는 표준협정서(the Standard Protocol Agreement)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력 중의 하나이다. 캄보디아협력위원회(Cooperation Committee for Cambodia)의 실행대표인 캐롤 스트릭클러(Carol Strickler)는 표준협정서가 인도주의적 사업으로부터 영적인 일들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아닐 것이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NGO들과 정부 사이의 계약 특별히 선교사업의 금지령으로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비워드는 어떤 나라에서 일하든지 간에 월드비전은 항상 법을 준수한다고 말한다.
“어떤 것이 받아들여질 만하고 어떤 것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지를 좀더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NGO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고 정부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고 그는 말한다.

수백명의 외국인 기독교 사역자들의 모임인 ICF(International Christian Fellowship)의 주소록에는 24명의 사람들만이 그들 자신을 선교사나 교회개척자 혹은 그들이 불리기 원하는 그런 이름으로 스스로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보워즈는 지도력개발 조정자(leadership development cordinator)로서 기록되어 있다.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몰몬교는 프놈펜 일대를 자전거를 타고 도는 26명의 선교사들이 있다.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은 종교부에 등록하도록 되어 있지만, 종교부는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캄보디아에서 종교의 교통을 담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찌아 사분은 말한다. “우리는 종교들을 적절한 방법들로 관리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종교의 무질서가 나타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어떤 기독교인 사역자들 (외국인과 캄보디아인)은 정부가 그 자유가 공중질서와 안전을 위배하지 않거나 다른 종교적 신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황하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캄보디아 헌법의 43조항과 충돌하지 않고 선교사의 사업들을 규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침례교인인 스티브 하이드(Steve Hyde)는 2세대 선교사이다. 월드비전의 Bo보워즈와 캄보디아의 다른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처럼 그는 이미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한 캄보디아인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이곳에 있다.
하이즈에 따르면, 복음전도자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외국인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외국인에 의해서 전해지는 기독교는 외국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는 외래로부터 침략을 당한 나라입니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외국으로부터 온 어떤 것에도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크메르인의 것을 지키는 것에 매우 방어적입니다.많은 경우에 그들은 기독교를 프랑스나 베트남의 것으로 봅니다. 벌써 우리는 2번이나 공격을 당했습니다.”
필리핀에 살고 있었을 때, 그는 매일 집집마다 방문전도를 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이곳에서 일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단지 그가 있음으로 인해 주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명함에 그는 “캄보디아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준비되도록 돕는” 단체인 생명의 말씀(Words of Life)의 조정자(the cordinator)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아이오와의 한 침례교회를 통해서 대부분 그 자신의 기금을 조성한다.
그는 매주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 - 또한 고아원인 선한목자 선교회(the Good Shepherd Mission)의 본부인 -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영어공부와 예수찬양(learn-English-and-praise-Jesus) 모임을 이끈다. 그는 많은 수가 고아원에서 살고 있는 주로 청소년모임에 있어 탁월하다.
모임참석자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고 있는 그들의 친척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이드의 지난 12월의 한 설교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모든 사람들은 구주를 믿기만 한다면 이 나라에는 결코 가난, 전쟁이나 불안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5년전에 도착했고, World Relief를 포함한 몇 개의 기독교 인도주의 NGO들에서 일했다.
그렇지만, “생명의 말씀(Words of Life)”은 그가 시작한 것이다. “저는 마치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의 교회들을 더 많이 돕도록 인도하시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성장하는 교회들도 있고 이제 시작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교회들은 모두 아직 매우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종교라는 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일 뿐이지만, 기독교는 캄보디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캄보디아의 희망은 더 많은 도로 건설하는 것과 주민들의 생활(을 현대화하는 것)을 갖추게 되는 것에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는 말한다. “선진국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진 모든 문제들을 보십시오.” 하이드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때까지는 어떤 것도 캄보디아에서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하이드는 말한다. “이미 하나님은 주께로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미 캄보디아를 벌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의 지도자들을 택하십니다.”
1975년에서 1978년까지의 크메르루즈 기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나쁜 상황을 만드셔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신 시간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싫어하십니다. 캄보디아를 보십시오. 모든 단독주택에는 우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견지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하시고, 주님과 다시 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렸고,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과 다시 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예정(ordained)하셨을 것입니다.”

천주교 당국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천주교는 불교도인 부모를 둔 아이는 18세가 될 때까지는 세례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선교사들은 특별히 아이들을 선교대상으로 삼는 듯이 보인다.
버지니아에 기반을 둔 국제기독교선교회(International Christian Mission)에 의해서 운영되는 선한목자선교회는 고아의 부모가 불교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지라도 불교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영화사에서 일했던 통역인 Yin Sodium은 말한다.
“그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개종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은 다르죠. 그건 쉽습니다.”
지난해 극동성경대학출판부(the Far Eastern Bible College Press)를 통해 “킬링필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in the Killing Fields”라는 책을 발간한 지미 림(Jimmy Rim)은 그의 20년간의 선교사업의 가치에 대한 설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위대한 야망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1000명 고아를 위한 직업훈련학교를 세우기를 원했다.
그는 나이든 캄보디아인들은 그들의 삶이 불교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섬기기가 너무 어렵다고 기술했다. 그의 계획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해왔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선교사들을 배출할 희망을 가지고, 성경공부에 기초한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이 책은 Concern Worldwide와 혼동하지 말아야 할 Concern International이라 불리는 한 단체로 기부금을 보낼 수 있도록 프놈펜의 주소를 싣고 있다.
그 책의 발행인인 티모시 토우(Timothy Tow) 목사에 의하면, 지미림은 의료치료를 받기 위해서 홍콩에 있어서 지난달 인터뷰에 응할 수 없었다.
만일 정부가 인도주의적 사업과 종교적 사업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단체들은 가장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미국으로부터 국제기독교선교회를 운영하며 기금의 대부분을 모으고 있는 러쎌 홀(Russel Hall)은 전자우편(Email)을 통해서 말한다.
“저는 현재 선한목자선교회를 후원하는 교회와 개인들이, 기독교가 가르쳐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되어도 계속 그렇게 후원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에 와서 사람들을 개종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24살인 프놈펜의 시클로 운전사 Chum Saray는 말한다.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 대해 제기되는 가장 큰 불만은, 인구의 95%이상이 믿고 있으며 국교인 불교에 대한 존경심의 부족이다.
“우리는 교회 선교사들에게 정부의 정책적인 강령들과 존중해 줄 것과, 다른 종교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그들의 종교를 가르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종교부 차관인 다욱 사른(Dauk Sarin)은 말한다. “그러나, 어떤 선교사들은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에게 불교를 무시하도록 가르칩니다.”
스티브 하디드는 불교를 -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돈, 타종교나 어떤 것처럼 - 마귀의 역사이며 캄보디아를 망쳐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마을의 중앙에 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절, 그리고 그 주위에는 그 터무니없이 거대한 절을 세운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두막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수만 달러를 절을 짓는데 사용하고, 매해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그 오두막에서 살아가고 깨끗한 물을 얻지도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저는 그것이 사람들에 대한 착취로 보입니다.
사람들에게 지워진 거대한 짐 캄보디아에 7000개의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 계속 엄청난 양의 돈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있습니까? 40,000명입니다. 그들은 돌아다닙니다.
그들은 일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이클 킹(Michael King)은 프놈펜을 거점으로 하여 5년간 활동했던 기독교인 사역자이다.
그는 불교는 거짓이라고 믿는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와 무엇이 진실하고 무엇이 진실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는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불교가 거짓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이 나라의 불교가 뽈� 지배하에서의 학살로부터 여전히 고통받고 있으며 약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가까운 과거의 일들로 인해서 캄보디아의 불교가 염려됩니다.”
시아누크 라즈 불교대학교(Sihanouk Raj Buddhist University)와 불교 및 팔리 대학교(Buddhist and Pali University)에서 강의하고 있는 스리랑카의 승려인 I Pannatiss는 말한다.
“뽈�의 통치기간 동안, 승려들과 승려집단이 파괴되었습니다.
1988년 이후로, 캄보디아에 승려들이 다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의 승려였던 이들이 다시 승려가 되었지만, 그들은 적절한 지침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 왜냐하면 불교교육의 결핍 때문입니다. - 그들은 참으로 그들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캄보디아에 불교가 더욱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빈곤을 몰아낼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캄보디아에는 더 많은 불교와 더 올바른 지침이 특별히 정부에게 필요합니다. 정치인들이 먼저 지도를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온 나라를 지도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를 했던 캄보디아인 기독교인들은 불교를 마귀로 여기며, 오히려 그들은 단지 다른 선택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저는 성경을 공부했고, 불교과 기독교를 자세히 고찰했습니다.”
그의 형인 룬낟 나라(Runnath Nara)와 함께 선한목자 선교회를 운영하는 룬낟 나른(Runnath Narin)은 말한다. “기독교가 더 낫습니다.”
두 형제는 캄보디아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태국으로 도망친 후, 1985년에 기독교 선교사들과 처음 만났다. “제 삶은 좋지 못했습니다.”
룬낟 나라는 말한다. “저는 국경 난민촌에서 제 삶이 예수님을 믿을 때 더 나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해준 한 기독교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기독교와 선교사의 숫자와 기독교 단체와 기독교회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이곳에서 아주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은 실패를 겪어왔습니다.”
종교부의 다욱 사른은 말한다. “그들은 캄보디아인으로부터 아주 적은 믿음(belief)만을 얻었을 뿐입니다.”
기독교는 필리핀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베트남을 포함한 몇몇 아시아의 나라들의 적어도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450년 이상 기독교 선교사들이 일한 후에도, 인구의 0.5%만이 기독교인이다.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는 1555년에 도착한 도미니코회의 수도사인 포르투갈인, Gaspar Da Cruz이었다.
그는 언어를 배웠으며 캄보디아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바꾸는데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뽕쑈 신부의 저서 “The Cathedral of the Rice Paddy”에 따르면, 그는 1년 후에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850년에,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담당하던 미쉐 주교(Bishop Miche)는 프랑스어로 그의 상관에게 편지를 썼다.
“겨우 몇 년간 캄보디아에 살아온 어떤 사람도, 빚을 진 사람을 노예로 사는 것 외에는 캄보디아인들 속에서 결코 어떤 성공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매우 비싼 대가가 듭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스티브 하이드는 그렇게 많은 선교사들이 오고 나가기 때문에 캄보디아는 “회전문”으로 불리운다고 말한다.
5년후에, 그는 베테랑으로 여김받고 있다.
차카라 엠(Chakara Em)은 캄보디아계 미국인 선교사이며 프놈펜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회지도자이다.
그는 캄보디아로 돌아와서 그의 나라를 돕기를 원했다.
그는 선교사업이 더 가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NGO를 설립하거나 사업을 시작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미국에서 개종한 후에 6년이 지난 한 기독교인은, 불교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캄보디아가 의미 있는 수의 기독교인들을 갖지 못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단지 미소만 띄운다.
캄보디아는, 선교사들에 의해 “로키산 선교(the Rocky Mountain Mission)”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일본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일본에서처럼 마찬가지로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는 말한다. “캄보디아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