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탐방"

2007. 9. 5. 18:54선교자료/5.선교자료

"캄보디아 탐방"

 

킬링필드의 학살의 땅!

앙코르왓트의 문명의 땅!

대인지뢰밭의 죽음의 땅!

김봉구 소장이 캄보디아로 28일 출국하여 1주일간 다녀옵니다.


캄보디아 프롬펜에 있는 윤종철 선교사, 송준섭 선교사를 만나

캄보디아 실상과 외노센터와 교류협력 사업을 논의하고

하반기 의료단등 팀을 구성하여 방문하기전 사전탐방의 목적입니다.


앙코르 문명의 발원지라 문화탐방을 한달은 해야 제대로 할 정도로

풍부한 문화재를 소유한 나라!

프랑스, 일본, 베트남의 지배를 받아온 힘없고 가난한 나라!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영아사망률이 아시아 최고인 나라!

에이즈 환자가 20만명이 넘는 나라!

축구를 좋아하나 축구공이 없는 나라!


대전에 와 있는 캄보디아 노동자 유부탄의 형도 만날 예정이고,

이들이 한국에 들어오기전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캄보디아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지?

향후 한국에서 캄보디아에 돌아 갔을때

어떤 후속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지?

외노센터와 어떤 교류협력 사업이 가능한지? 등등의

사업을 논의하고 현장조사와 탐방 목적으로 출국합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이웃 베트남도 잠깐 들려볼 생각입니다.


외노센터는 향후 국제협력센터로의 전망을 갖고 있습니다.

대전에 와있는 북방지역,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의 나라들인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몽골, 중국, 북한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필리핀, 스리랑카,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태국, 인도, 파키스탄, 네팔 등에

지원, 교류, 협력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한 하늘 아래, 동시대에 살면서도 우리는 너무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는 없어서 굶어죽고, 누구는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버리고!

조금만 덜 먹고 나누면 아름다운 세상이 될텐데...

조금만 나누면 모두가 배불리 행복하게 살수 있을텐데...


하반기에 캄보디아에 함께 가실 분들은 미리 센터로 예약해 주시고,

60만원의 비행기 값을 모아 두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비를 후원해 주실 분들은 아래 계좌로 입금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농협 415-12-501704, 국민은행 475201-04-000340, 하나은행 647-910075-23808


대전 외국인 이주노동자 종합지원센터(631-6242, 우리사이)

이사장 김용우, 운영위원장 신현정, 소장 김봉구

홈페이지 http://migrant.netian.com


▶ 캄보디아 탐방 후원해 주신 분들입니다. 감사합니다.

고종혁 목사(영천교회) 김기분 원장(청북유치원) 김선미 교사(호수돈여중) 김선진 교수(청양대 소방안전)

김용우 목사(보문교회) 김황중 장로(제일장로교회) 박찬운 목사(가수원중앙교회) 살림교회 여선교회

신현정 가정의(한일병원) 심재호 교수(목원대 사회복지) 이재철 목사(갈보리교회) 장수찬 교수(목원대 행정정보) 주상필 소장(슈넬제약) 최은미 교직원(호수돈여중) 최종호 목사(수입교회) 한진걸 전국장(흥사단)


 ▶ 김봉구 소장 캄보디아 탐방기(6/28-7/3)



대전에 와있는 캄보디아 노동자 유부탄의 편지와 선물을 프롬펜공항에 마중나온 형 호시립씨에게 전해주었다. 호시립씨는 프롬펜 CCTV에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으며, 월급은 70-80$(한화로 9만원 정도)로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이 10만원이하다.
보자마자 급한 마음에 사진부터 찍자는 내 제안에 호시립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고, 윤종철 선교사님은 현지인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왼쪽부터 호시립씨, 김봉구 소장, 프롬펜 윤종철 선교사로 찍새인 내가 나오는 유일한 사진이다. 공항에서 장로교 송준섭 선교사님도 만나 인사하고 이틀 뒤 저녁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사역지도 가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엠케이센터 관리인 현지 집사부부의 두딸로 깐야(10세)와 동생 꼴리안(6세)이 방문단이 가져간 사탕을 들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얼굴과 이름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들은 한국 방문객들이 가져다 준 좋은 옷들을 입고 사는 행운아들이다.

엠케이센터는 한인선교사들의 자녀들을 위해 마련된 미신고 학교로 이곳에서 캄보디아 언어인 크메르어와 한국어, 역사, 산수등을 배우고 있다.
명성교회(김삼환 목사)의 후원으로 이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이 정상적으로 학교에 가려면 1,000$로 한화로 120만원의 엄청난 돈을 내야한다고 한다.
현지 선교사님들의 자녀교육 문제가 참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6시경 식당을 찾아갔는데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저녁에 일찍자고 아침에 일찍 일하는 것은 더운 날씨 탓과 전력공급의 어려움 등으로, 캄보디아인들은 아침형 인간들였다.
공무원들은 7시에 출근해서 점심시간 2시간 정도 휴식후 오후 4시쯤 퇴근한다.
쌀국수는 0.5$로 저렴하나 이용하는 사람들은 중상층이상이나 가능하며, 국물은 밤새 우려낸 돼지고기 육수로 진했으며, 여러가지 양념을 취향대로 넣어 먹으면 다양한 맛을 느낄수 있다.
돼지는 대부분 방목을 해서인지 고기 육질이 좋았고, 국물 맛도 좋았다.
이들은 아직까지 돼지에게 물먹일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아 보였다.

어린이들이 구두와 샌들을 닦으며 생계에 보태고 있었다.
중산층이하의 아이들은 학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하며, 이렇게라도해야 하루하루 근근히 배를 채울수 있다.
이들에게는 화려한 꿈은 없어 보였다. 그저 작은 공장에 취직해 굶지 않고 사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단다.
캄보디아 정부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공산정권들의 기본이 무상교육, 무상의료인데 이곳에서는 하나도 되지 않고 있었다.

다일공동체의 밥퍼에서 나누어준 쌀국수를 배급받아 건물옆에 앉아 두 아이에게 엄마가 국수를 먹이고 있다.
그의 젖은 말라 붙었고, 쌀국수를 먹인뒤 다시 1Km쯤 떨어진 슬럼가로 발길을 향했다.
그러나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고 빌어 먹는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듯 했다.
대부분 16세부터 결혼을 시작하고 25세가 넘으면 노총각 노처녀로 취급받을 정도로 결혼연령이 빠른 이유는 이들의 평균연령이 53세이기 때문이다.
영아 사망률이 1천명당 130명선으로 아시아에서 최고로 기아와 질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60을 넘기면 한국에서 예전에 환갑잔치를 한것처럼 이들에게도 장수한 것이다.
이러다보니 어린나이에 아이들을 낳고 먹고 살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집에서는 아이들이 방치되고 스스로 먹을것을 찾아가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계속될 것이다.

밥퍼에서 점심에만 쌀국수를 나누어 주는데 하루평균 200-300명의 어린이들과 극빈자들이 배를 채우고 있고, 대부분 어린동생들을 업고 와 밥을 먹이고 있었다.
부모들은 여기까지 오기가 귀찮아 오지 않는다고 한다.
아기가 아기를 키우는게 이곳에서는 평범한 삶인것 같았다.
지구촌에 매 7초마다 1명의 어린이가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기아인구는 8억 2천명으로 세계 인구중 8명에 한명꼴로 기아에 허덕이고, 1년에 기아로 죽어가는 생명이 무려 3천 6백만명으로 21세기 최첨단 과학문명시대의 또다른 모습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보고에 의하면 세계 식량 소비량은 19억톤이고 생산량은 24억톤으로 5억톤이 잉여생산량이다.
세계에 매년 5억톤의 식량이 남아 도는데 먹지 못해 죽어가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인구가 8억이 넘는다는 것은 분명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 할 대목임에 틀림없다.
왜 식량이 남아도는데 계속 굶어 죽어야 하는가? 인류에 평화가 오기 위해서는 식량을 나누어야 한다.
'평화'란 단어는 글자 그대로 쌀을 평등하게 나눈다는 뜻이다. 쌀을 골고루 나눌때 평화가 오는 것이다.
인류평화를 이야기 할려면 식량을 평등하게 나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좀더 덜 먹더라도, 음식물 쓰레기로 낭비하지 말고 지구 한구석에서 배를 움켜쥐고 있는 어린 영혼들에게 나누어야 한다.
그들의 죽음에 침묵하는 것은 분명 죄이다. 동시대에 한하늘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람의 구실을 하지 않는 범죄행위이다. 인류평화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특별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비우면 된다. 내 욕심을 버리면 된다. 내 탐심을 자제하면 된다.
그러면 평화가 온다. 그러면 다같이 배불리 살수 있다. 그러면 천국이요, 극락이다.

오른쪽의 높은 신축건물과 화려한 사원 옆으로 빈민가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빈민가에서는 매춘과 마약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으며, 아이들은 그런 생활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정부에서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부를 3%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니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나 지도층 인사들은 대다수 백성들의 고달픈 삶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린이들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밥퍼에서 나눠주는 옷과 샤워실에서 비눗칠을 할 수 있어 외모나 옷이 깨끗한 편이었다.
자신들의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걸 마냥 좋아하며, 안아주면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탓에 서로 안아 달라며 달라붙는다고 이곳 사역자인 이청현 선교사님이 일러 주었다.
또한 사진 찍는거 역시 너무 좋아했다.
자꾸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서 밧데리도 부족하고 칩 용량도 적어서 다 찍어 주지 못했다.
한 어린이에게 1만원이면 한달을 충분히 먹고 살수 있다.
외노센터로 1만원씩 후원하면 이 아이들의 한달 식량을 후원하는 것이다.
후원금은 현지 선교사에게 송금해 필요한 아이들에게 지혜롭게 사용될 것이다.
외노센터는 앞으로 세계 굶주린 아이들에게 1만원 후원운동을 벌여낼 생각이다.
외노센터 운영도 힘들지만 이 어린이들은 더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성서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 소년의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이 풍족하게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다.
보잘것 없고 작은 것이지만 함께 나눈다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모두를 배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성서에 등장하는 겨자씨 한알이 처음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물이지만 장성하여 새들이 깃드는 거목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작아도 언제가는 거목으로 변화발전할 것이란게 성서의 가르침이다.
나부터 시작하자! 작은것부터 시작하자!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 지금부터 시작하자!

거리에서 코코넛을 팔고있다. 다양한 과일이 풍부했으며, 사시사철 과일 열매를 딸 수 있는 축복의 땅이었다.
코코넛 4개에 1$로 맛이 좋고, 한국 백화점에서는 1개에 1만원 정도에 팔고 있다.
코코넛 음료는 이들에게 링겔과 같은 영양 공급원이라고 한다.
풍부한 과일과 석유, 가스, 금, 보석 등 풍부한 자원이 있고, 1년에 2모작 3모작이 가능하며, 지평선이 보일 정도의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고, 풍부한 해산물을 소유하고 있는 이나라가 왜 못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사람들 조금만 풀어 놓으면 캄보디아는 금방 천국이 될 듯 싶어 보였다.
더운 나라 사람들의 기질이라 그런것인지? 정치 지도자들의 몰이해의 탓인지? 아니면 불교국가답게 다시 태어날텐데 아득바득 살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참으로 연구대상인 나라였다.

프롬펜 시내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킬링필드로 윤종철 선교사님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시체만 7천구로 폴포트 공산정권이 친미세력을 무참하게 학살한 장소로 전국에 1,200 곳의 킬링필드가 있다.

땅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뼈가 선명하게 보인다.

Beat Children이라고 푯말에 써있듯 이곳은 어린이들의 시체가 발견된 곳으로 보이는 나무에 아이들의 머리통을 쳐서 죽이고 테두리가 쳐져 있는 곳으로 던져 버렸다고 한다.
수입교회 최종호 목사님이 뼈를 들고 서있다.

발견된 뼈들과 이빨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뼈와 이빨의 주인들은 무슨 연유로 무참한 죽임을 당했을까?

킬링필드 기념관 빼꼭히 쌓여 있는 해골들로 중간의 해골의 작은 구멍 자국은 못자국이고, 왼쪽 해골의 찢겨진 자국은 삽등으로 찍혀 손상된 자국이 역력하다.
킬링필드의 주역인 폴포트는 1952년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지하 공산당운동을 주도하며 붉은 크메르라는 크메르루즈란 공산 게릴라군을 조직하여, 1975년 4월 시아누크 정권을 물리치고 수도 프롬펜에 입성하였다.
그 이후 3년 반동안 피의 통치를 통해 프롬펜의 노동자 등 극빈층만 남겨두고, 미국의 앞잡이였던 친미사대주의자들인 엘리트 계층과 중산층 이상의 계층들을 모조로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이 중에 상당수를 학살함으로 튼튼한 공산정권,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운 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1998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태국 국경지대에서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2003년 12월 한겨레신문 보도에 의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학살인원이 300만명이 아닌 30만명이고, 70만명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1967-72 미군이 캄보디아로 들어온 베트콩 점멸작전으로 네이팜탄, 오렌지 에이전트(고엽제) 클러스트밤(공중폭파폭탄)로 민간인 100만명을 살상하여 도합 200만명이라는 기사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였다.
이 기사는 전범 미대통령 케이즈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촌극이 연출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사실일까?
폴포트 정권과 미국 둘다에게 반반의 책임이 있는 것이란 판단이 객관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죽은 이들은 말이 없다는 것이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의 한은 어디서 누가 풀어줄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이념도, 법도, 제도도 생명보다 우선될 수 없다. 생명보다 그것들이 우선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죄의 출발이다.

해골로 가득차 있는 킬링필드 학살기념관이다.

기념관 입구에서 동냥하고 있는 대인지뢰 피해자들로 근근히 구걸하여 먹고 사는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천루엘, 한화로 400원짜리 지폐를 받아들고 기뻐했으며, 웃음을 잃지 않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미국이 묻은 지뢰를 완전히 제거할려면 200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하며, 지뢰 제조비용은 1개당 불과 5$(6천원)이지만 제거비용은 1개당 1천$(120만원)이며, 국경지대는 아직도 지뢰를 제거하고 있고, 1년에 캄보디아에서만 1천명 가량이 대인지뢰의 피해자로 다리를 잘리거나 죽어나가고 있다.
전세계 68개국에 1억 1천만개의 대인지뢰가 설치되어 있고, 매년 2만 6천명이 지뢰로 생명을 잃거나 다리를 잘리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대인지뢰를 만들고 설치한 것이 미국이면서 지뢰를 제거하는 것 역시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1997년 미국 사회운동가 조디 윌리엄스와 이가 설립한 국제지뢰금지운동단체(ICBL)의 대표로 캄보디아인 툰 차나레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상금 94만$(11억원)을 반씩 나누어 가졌다. 미국인이 지뢰를 만들고 설치하고 또 미국인이 제거하고 상을 받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병주고 약주는 것인지?
워싱턴 D.C 경제전략연구소 프레스토 위츠 소장은 레이건 행정부때 통상부장관 자문위원을 역임한 골수 공화당 지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깡패국가(Rogue Nation)"라는 책을 통해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한 것은 의미있게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앙코르왓트가 있는 시엥립에 무료병원에서도 재현되는데 이 무료병원은 매우 크며, 신식건물로 운영자는 프랑스인이다.
100년간 캄보디아를 지배했던 프랑스가 이제는 무료병원을 통해 캄보디아인들을 보살피고 있는 현실은 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하려는 것인지?

길거리에서 수박을 잔뜩 쌓아 놓고 팔고 있다. 수박은 대체적으로 길쭉하며 맛은 한국의 수박 맛과 별반 다름이 없었고 달고 맛있었다.

중앙선이 따로 없고 수도 프롬펜에도 신호등이 몇개 없을 정도로 이들의 교통의식은 거의 없어 보였다.
안전벨트를 차지 않아도 되고, 음주단속도 없다. 아무데서나 유턴해도 되고, 반대차도로 돌진해도 위법이 아니다.
대부분의 오토바이에는 백밀러가 부착되어 있지 않았고 이로인해 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끼리 충돌사고로 두대가 엎어져 있고, 백인이 머리에서 피가 흘렀지만 누구하나 병원으로 데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구경거리가 생긴듯 잔뜩 모여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감리교 신학교와 기숙사 앞에서 대표선교사 송진섭 목사님과 방문단의 기념촬영 장면
1억 가량의 비용이 투자된 건물들로 50여명의 현지인들이 신학교에 입학해서 무료로 공부를 하고 기숙사를 사용하고 있었다.
아쉬운 점은 이런 훌륭한 공간에서 주민들이나 학생들에게 기술교육이나 한글교육등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없다는 점였다.
반면 청북교회의 1억 후원으로 장로교 송준섭 선교사님은 센터를 짓고 이곳에서 다양한 기술교육과 언어교육, 에이즈퇴치운동 등을 벌이고 있었는데,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 차이를 엿볼수 있었다.
구원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게 나의 신앙으로 사회구원에 좀더 관심할 것을 주문하였다.

길가에 있는 공업사에서 두 청년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건물 위에 출입평안이란 글씨라 눈에 띄었다.
기복신앙이 주를 이루고 있는 소승불교가 국교요. 국민의 90% 이상이 불교인으로 건물 곳곳에 부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마치 한국의 불교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의 기복신앙과 차이가 없어 보였고,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란 액자가 한국 기독교인들의 가정에 있듯 이들은 출입평안이란 종이를 부착하고 있었다.
복을 바라는 마음은 세계 어느 누구나 매한가지인듯 싶다.

캄퐁츠앙 도시의 재래시장으로 한국의 재래시장과 비슷했다.
다만 값이 싸다는 것이 다를뿐이었다. 또다른 점은 사시사철 풍부한 과일열매들이 있다는 것이다.

재래시장에 작은 먹거리판을 차려놓고 먹을 것을 팔고 있었다. 하얀것은 계란이 아니라 곤오리였다. 이곳은 닭보다 오리가 더 많았다.
삶은 계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계란인줄 알고 몇개 시켰는데 알고보니 어린오리가 알 안에서 죽은 곤오리로 도저히 먹을수가 없었다.
최목사님과 신학생은 잘도 먹었다. 비위가 매우 좋아 보였다. 한국사람들이 못 먹는 음식이 있을까?

교회앞에 있는 펌프다. 메콩강물이 황토물이라 도저히 먹을 수 없어 이렇게 지하수를 퍼내는 펌프를 설치하여 물을 길어 올리고 이 물을 끓여 먹는다.
식수로는 사용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수부족으로 물을 사먹어야 하고, 흙물이라 석회석이 많아 치아질환을 대부분 갖고 있으나 치과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전국에 의료인이 700명이 전부이니 병원도 많치 않을뿐더러 병원 갈 돈도 대부분 없는게 이들의 현실이다.
하반기에 외노센터 의료단이 캄보디아에 갈 경우 치과의사는 반드시 대동해야겠다고 거듭거듭 생각했다.

캄퐁츠앙에서 배타고 1시간 가량 미종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향하고 있을때 메콩강가에 살고 있는 이들이 여유롭게 작은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고, 메콩강은 중국에서부터 시작하여 베트남까지 이어지는데 누런 황토물로 고기가 산다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미종족들이 살고있는 마을의 한 가옥으로 1층은 돼지, 오리, 닭 등이 살고 2층에 현지인들이 살고 있으며, 2층 끝에 이처럼 부엌이 있고 음식을 해먹고 있었다.
매일 작은 나무를 태워 불을 삼고 있었고, 매우 위험해 보였다. 가옥 전체가 야자수나 과일나무로 기둥을 삼고 지붕을 만들었기에 더욱 화재에 노출되어 있어 보였다.

2층방에서 캄퐁츠앙 감리교회 전도사님과 현지 책임자, 최종호 목사님과 윤종철 선교사님등 몇명이 크메르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미종족 어린이들이 외지인들이 와서 노래하고 율동을 하고 연극을 하자 신기해하며 매우 재미있어 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거의 윗도리를 안 입고, 신발도 신지 않은 원시상태 모습이고, 물이 부족하여 자주 씻지 않아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누어준 과일에 마냥 즐거워하며 집으로 향했다.
대부분 학교에 가지 않아 글자를 모르는 현실였다.
그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이곳에서 죽을때까지 배고프지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약 600여명이 살고 있는 마을였고, 큰 사원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과연 선교라는 것이 이들의 삶을 어떻게 바꿀려는 것인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자본주의 문명과 선진국의 문화와 기독교 신앙을 주입시켜 이들을 문명인,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이들을 더 행복한 길로 인도하는 것인지 내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문화와 전통, 습관,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유지시키면서 이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부터 그 수요를 채워나가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역전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친들 귀 담아 듣는 사람들은 없다. 그 외치는 사람을 보면서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노숙자들에게 빵과 우유를 먼저 나눠주면 얼마나 좋을까를 여러번 생각했었다.

사원에 있는 어린스님들이 마을 끝에서 끝까지 돌면서 탁발을 하고 있다.
탁발은 집들을 방문하며 주문을 외우고 댓가로 밥을 얻은 행위를 말한다. 이것을 탁발승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주민들에게 밥을 빌어 먹는 것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배를 채우기 위해 사원에 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예전에는 모든 남자는 평생에 꼭 한번은 탁발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 법이었으나 지금은 법으로 강제하지 않지만 형편이 어려운 캄보디아에서는 대부분 자발적으로 사원으로 보내 밥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미종족 마을을 돌다보니 배를 수리하고 역청을 바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꽃을 가꾸는 집을 발견하였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꽃이 이 먼 곳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꽃을 키우는 이쁜 마음을 간직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이 마을에 있는 훈센의 인민당 간판이 붙어 있는 집앞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정당 연락사무소 정도로 생각된다.
현재 캄보디아는 훈센이 이끄는 중도노선의 인민당이 과반수 이상 장악했으나 헌법에 2/3를 차지해야 내각을 구성할 수 있음으로 선거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정에 실패함으로 1년이란 시간을 허비하고 얼마전 간신히 내각을 수립하였다.
그동안 1년간은 무정부 상태였으니 공무원들은 월급도 못받고, 장관도 없었으니 얼마나 주민들의 고통이 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을처녀들이 맷돌을 돌리며 콩을 갈고 있었다.
한국은 맷돌위에 손잡이를 만들어 돌리는 반면 이들은 돌림이를 길게 만든 것이 달랐고 맷돌 돌리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내가 몇번 돌려 주니까 수줍은 웃음을 띄우며 매우 좋아했고, 바디랭귀지로 한국식 맷돌이 더 편하다고 귀뜸해 주었으나 제대로 전달된것 같지 않았다.

어디서 났는지 망가진 자동차 장난감을 열심히 수리하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이 매우 진지해 보였다.
줄곧 옆에 붙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어린 동생은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의 접근에 거리를 두고 저만치 물러섰다.
매우 단순한 자동차라 내가 도와 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거들었으나 기계치인 나로서는 도저히 고칠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제대로 고쳤는지 궁금하다.

캄보디아 전통집을 동네 남자들이 다같이 모여 협동공사를 하고 있었다.
외지인이 카메라를 멀리서 들이대자 손을 흔들어 보이며 포즈를 취해 줄 정도로 이들은 순박했고, 친절했다.
아래층은 동물들이 사는 곳으로 비워두고, 2층에 사람들이 사는 집을 짓는데 대부분 현지에 있는 과일나무로 기둥을 삼고 지붕은 과일나무 잎으로 엮어 만든다.
2층에 사람이 사는 이유는 1년 내내 더운 날씨를 감안하여 지열에서 떨어지려는 것일 것이다.
나무와 잎으로 만들어 통풍이 잘되게 하는데 겨울에도 17-26도로 선선한 날씨인데 17도 이하로 떨어지면 추위에 적응이 안돼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은 한국의 매서운 겨울을 어떻게 날까 매우 걱정이 되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겨울일텐데 말이다.

미종족 선교여행을 마치고 캄퐁츠앙 감리교회로 돌아와 기념촬영을 하였다.
교회에서 현지 여전도사님과 교우들이 환대해 주어 편하게 1박을 했다. 현지 여 전도사님은 캄보디아에서 불쌍한 고아들을 데려다 5명이나 기르고 있었고, 본인의 자녀 2명과 합쳐 7명의 자식이 있다고 좋아했다.
고아들을 거두어 입히고 먹이고 교육시키고 결혼까지 시킨다니 이들에겐 구세주나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모두들 친어머니처럼 따르고 있었고 신앙심이 좋아 매일 새벽기도회와 저녁기도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미종족 선교에도 앞장서고 있었다. 윤종철 선교사님은 이 교회에서 관리하는 현지교회가 28곳이나 된다며 두 부부 전도사님들의 대단한 열정에 감탄했으며, 윤 선교사님은 프롬펜에서 먼 이곳까지와서 청소년축구단을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들과 친선축구대회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고, 이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축구대회도 하고 한국도 구경시켜주리라 다짐해 보았다.
캄보디아 국기에 가운데 건물이 앙코르 왓트로 국기에 넣을 정도로 이들의 자랑임을 알수 있고, 흰색은 크메르 문화와 부, 적색은 불의와의 투쟁과 크메르인들의 강인한 정신, 청색은 농업과 환경을 상징한다.

도로변에서 좌판을 놓고 수박을 팔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앞에는 오토바이에 긴 수레를 연결하여 수박을 옮겨 다니며 파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에게 오토바이는 매우 소중한 존재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오토바이는 50-100만원 사이로 이들이 1년은 꼬박 벌어야 살수 있는 비싼 이동수단이었다.

캄퐁츠앙에서 프롬펜으로 돌아오는 길가에 불교사원이 보였다. 한국에서는 차를 타고 도로를 가다보면 작은 동네마다 제일 크고 좋은 건물이 교회이듯 캄보디아에서는 동네마다 제일 크고 화려하고 좋은 건물은 사원들였다.
수많은 사원들은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 헌금하여 세운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사원이 동네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마을과 주민과 분리된 사원은 분명 죽은 종교요, 죽은 사원일 것이다.
그 마을과 주민을 책임지는 사원으로 거듭날때 캄보디아는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소승불교를 국교로 숭상하고 있는 현실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 더욱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한국의 동네마다 서있는 교회도 그 지역과 주민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길가에 서있는 이슬람 사원이 눈앞에 보여 차를 멈춰 세우고 한장 찍었다.
시간이 허락하면 안까지 들어가고 싶었으나 밖에서 사진 한장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캄보디아에서 이슬람과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2-3%로 매우 저조하다. 그러나 이슬람 사원이 있는 동네는 다른 동네와 다른 점들이 있었다. 바로 축구장이 있었고, 공장들이 있었다.
이슬람 사원은 종교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이 맘껏 뛰어 놀 수 있는 축구장을 만들어 놓았고, 지역주민들이 일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공장을 세워 이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현지 기독교 선교사들과 한국의 여러 종교가 반드시 관심하고 배워야 할 대목이라 생각했다.

프롬펜에 있는 윤종철 선교사님과 사모님이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집 구조는 프랑스가 100년간 지배했기에 프랑스 양식였고, 거실은 저녁에는 차를 들여놓는 차고로 사용되었다.
한국처럼 차나 오토바이를 밖에 세워두지 못하는 것은 부품이나 아니면 통체로 훔쳐가기 때문인데 생산성이 적다보니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문화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외지인은 낮이나 밤이나 오토바이족들의 표적의 대상임으로 가방등 물건을 앞으로 메고 두손으로 꽉 움켜쥐고 다녀야 안전하다.

일명 뚝뚝이로 4명 정도가 탈 수 있으며 메콩강가에서 숙소까지 4$의 요금을 냈다.
여느사람처럼 환한 웃음으로 포즈를 취한 운전수는 베테랑으로 숙소까지 안전하고 빠르게 태워다 주었다.
택시가 따로 없고 오토바이가 택시 역할을 하고 있었고, 뒤에 손님을 태우고 신호도 없고 중앙선도 없고 교통법규도 없어 자유자재로 묘기운전을 하며 다니는 것이 마냥 신기한 모습이었다.
경찰이 단속하는 건 오토바이에 넘버를 달지 않은 미신고 오토바이뿐이었고, 차량을 단속할때도 이유가 없었다.
경찰은 무조건 잡고 잡힌 운전수는 무조건 1$ 정도를 주고 그냥 지나가는 모습이 비일비재하다. 왜냐하면 정부가 1년간 수립되지 않아 경찰도 30-40$의 월급도 받지 못해 이렇게라도 먹고 살수 밖에 없는 현실때문이다.

프롬펜에서 앙코르 왓트가 있는 시엥립으로 이동중에 보이는 다리는 1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다리였다.
천년전에 이렇게 튼튼한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끄덕없어 보이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충북 진천에 있는 900년전 고려시대 임장군이 놓았다는 농다리보다도 훨씬 크고 튼튼해 보였다.


말로만 들었던 앙코르 제국의 명물이요,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앙코르 왓트!
천년전 앙코르 제국의 위엄과 뛰어난 예술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 사원을 당시 어떻게 지었을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제로 등록되었을 것이다.
9-13세기까지 동남아시아 전역을 지배했던 앙코르 제국의 위용을 실감하게 했다.
고대 그리스신전이나 로마 콜로세움을 능가하고 로마제국의 전성기보다 훨씬 웅장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한 당시 40년간 동원된 16만명의 민중들의 고통 역시 상상하기 어려웠다. 수만명이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앙코르 왓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50년 6월 프랑스 신부와 현지 원주민 4명에 의해 발견되면서부터로 수많은 내전과 외부의 침략에도 손실되지 않음이 경이로웠다.
천년이 지난 지금 일부 건물들이 무너져 내려 보수공사중 였는데 세월과 자연앞에 장사가 없다는 인생무상을 느끼기도 했다.

왓트(사원)의 네군데 벽에 새겨져 있는 다양한 부조들은 경이로왔다.
주로 3단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천상계, 인간계, 미물계를 표현하고 있고, 이 조각은 악인들을 지옥으로 떨어 뜨리고 있는 모습으로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앙코르 왓트를 관람한 후 다시 시내로 나와 점심을 먹고 다시 앙코르 톰으로 들아간다.
한국식당에서 푸짐하게 식사를 했고 바로 옆 건물은 북한의 평양랭면 식당이 있었는데 대문에 금일 휴업을 써 놓고 영업을 하지 않았다.
한달에 한번 휴업을 한다는데 하필 이날이 휴업날이라 평양랭면 맛을 보지 못해 매우 애석했다.
랭면 한그릇에 6-7$로 한화로 7-8천원 정도로 현지 음식에 비하면 매우 비싼 편이다.
쌀국수가 0.5$임을 감안할때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평소에는 북한 미녀들이 앙징맞게 손님들을 맞으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이란 노래도 불러준다고 한다. 이들은 북한에서 고위직이고, 외교관 수준으로 인재들이 와 있다고 한다.
캄보디아는 해방이후 폴포트 공산정권이 들어서 북한과 일찍 수교를 체결했고, 현 국왕인 시아누크는 김일성 주석과 의형제 사이로 깍듯이 형님으로 모셨다고 하며, 현재도 복잡한 국내 정치상황을 피해 평양에 체류중이며, 인민당의 훈센 총리와 아들이 이끄는 민족주의 연합전선 라나리드 왕자와 얼마전 연립정부를 세웠으나 당분간 캄보디아로 돌아갈 의사가 없다는 뜻을 표명했다.
프롬펜에 김일성도로가 있을 정도니 시아누크 국왕이 김일성 주석을 얼마나 형님으로 잘 모셨는지를 엿볼 수 있다.


앙코르 톰으로 제일 큰 사원이다.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때 건설되었고, 말 그대로 커다란 도시를 연상케 했다.
당시 100만명 가량의 인구가 살았다고 아니 천년전에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천년전 앙코르 제국은 베트남, 태국, 라오스, 미얀마,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 전역을 지배하였다.
이곳은 제국 황제가 살았다는 왕궁으로 후궁만 해도 천명이 넘었다하니 당시 앙코르 제국이 얼마나 큰 제국였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캄보디아에서 과실의 씨앗을 뱃으면 지금도 그 씨앗이 발아하여 우람한 나무로 자란다고 한다.
건물 틈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기이한 현상역시 이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광경이 아닐수 없다.

앙코르 왓트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사원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코끼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먼 거리가 아니라 코끼리 신세는 지지 않았지만, 사원의 부조에도 코끼리가 등장하는 걸 보면 천년 전에도 코끼리는 존재했었고, 사람들의 노동도구나 이동도구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씨엥립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로교 김경일 선교사의 센터를 찾았다.
용인 모교회 청년들이 선교여행차 막 도착하였고 우리도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이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이곳에서는 한글교육과 컴퓨터 교육을 50여명의 청소년들에게 실시하고 있었다.
김경일 선교사님에게 나는 한글교육을 체계적으로 시켜 한국으로 산업연수생이나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잘 알아보라는 주문을 했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10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10만원의 월급을 받기도 힘들다.
만약 이들이 한국에서 부를 획득하여 고국에 돌아간다면
한국에서 배운 기술과 넓은 식견으로 향후 캄보디아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역들이 될 것임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지 선교사들은 이들을 잘 교육하고 훈련하여 한국으로 보내고, 한국의 외국인노동자 지원센터에서는 이들을 잘 보살펴 다시 고국으로 보냈을때 이들은 고국에서 지도자 위치에 설 것이며, 한국을 고마운 나라로 좋은 인상을 갖게 될 것이고, 한국과의 다양한 교류와 협력사업을 벌인다면 캄보디아의 발전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양국의 친선관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단순한 선교차원의 차원뿐만 아니라 더 큰 시야를 갖는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일들이 벌어질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평소 12$(한화로 1만 4천원) 정도의 부페집으로 비수기요, 김경일 선교사님의 덕분에 8$에 근사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평소 한국 여행사에서 관광객들을 데려가 식사를 시키고 후불로 계산한다고 하고는 여러번 독촉해야 식비를 받을 수 있어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치 않다고 한다.
어딜가나 나라에 먹칠을 하는 종자들은 늘 있는것 같다.
그런데 김경일 선교사님은 선교여행에 온 손님들이나 씨엥립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곳을 이용하며 즉석에서 계산을 해줘 태국인 사장이 잘 보았다는 것이다.
그 덕에 좀더 저럼한 가격으로 식사를 했다.
식사는 태국요리, 베트남요리, 캄보디아요리, 중국요리, 한국요리, 서양요리 등 다양했고, 과일과 야채, 빵 등 한국 부페만큼 풍성했다.
12$의 가격은 현지인들에게 큰 돈으로 이들은 1년에 한두번 정도 큰 일이 있을때나 오는 곳이란다.

부페식사를 마치자 1시간 가량 캄보디아 전통민속마당이 펼쳐졌다.
전통춤인 압사라 댄스는 앙코르 왓트 부조에 새겨져 있는 모양 그대로 손목은 360도 꺽이고 엉덩이는 뒤로 쭉 빼야하는 어려운 동작인데도 이들은 어려서부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부조에 나타난 모양을 그대로 선보여 주었다.
1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별 볼거리도 없었고,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동작마다 기합 비슷한 소리를 내었고, 총각이 여자에게 애정공세를 표시하고 여자는 새침만 떼는 등의 내용이었다.
천년전의 화려한 크메르 문화와 위풍당당한 앙코르 제국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오히려 한국의 사물놀이나 부채춤이 이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20$(한화로 2만 4천원)짜리 호텔로 게스트 하우스라는 표현이 더 맞을듯 싶었다.
값싸지만 묵기에는 훌륭한 방이었고 아침식사 요금까지 포함되었으니 이보다 더 쌀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자주 오기에 방에는 한글로 금연, 화장실 이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좀 창피한 마음도 들었다. 굳이 이 정도의 단어라면 영어로 표기해 놓아도 될 것 같은데 한글로 써 놓은 속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주오는 한국사람들에 대한 배려인지 아니면 똑바로 지켜달라는 당부인지 헛갈렸다.

호텔 프론트 뒤에 캄보디아 국왕인 시아누크와 그의 네번째 아내인 왕비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위에 돌아다녔던 도마뱀은 어디로 갔는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어느곳을 가든 파리와 모기, 도마뱀, 소, 돼지, 닭, 오리 등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생명체들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고, 캄보디아인 그 누구하나 이것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우리는 연신 파리를 쫓았고, 모기를 잡고, 도마뱀을 피했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공생하는 존재로 진작부터 받아 들이고 있는 듯 했다.
사진에 있는 국왕과 왕비는 국부와 국모처럼 여유롭고 자비로운 인상을 주었다.
한국의 국왕과 왕비는 왜 없어 졌을까?
영국이나 일본 등 아직도 국왕이 존재하고 우리도 불과 50년 전에는 국왕이 존재 했었는데...
캄보디아 역시 실권은 수상이 행사하고 국왕은 형식적인 나라의 대표이나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임과 존경을 받고 있어 그 어느 정치세력도 국왕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수상도 국왕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정치 형국이다.
한국에도 국왕이 존재했다면 추기경처럼 나라의 어른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의 존재가 그 사회에 일정정도 동화처럼 아기자기한 편안한 정서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사진 밑에는 한글로 써놓은 글씨가 띄어쓰가 틀려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낯선 땅에서 한글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씨엥립에서 프롬펜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길가에서 도자기를 팔러 이동중인 캄퐁츠앙의 청년들을 만났다.
이들은 외부인의 접근에 전혀 경계하지 않고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사진 앞에 냄비에는 점심을 먹기 위해 불을 지펴 밥을 하고 있었다.
캄퐁츠앙은 도자기 마을이란 의미를 갖도 있듯이 옛부터 도자기를 많이 생산한 도시로 지금도 여전히 많은 도자기를 생산하여 곳곳으로 팔러 다니고 있다.
이들의 마차에는 작은 악세사리와 식기류, 농기계류 등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고, 색칠이 전혀 없는 황토색 자연 그대로였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손바닥 반만한 작은 물건였는데 바닥은 하트모양였고, 그 위에 작은 두마리의 비둘기 한쌍이 있는 작품였다.
사랑을 의미하는 하트와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은 제작자가 누구인지도 무척 궁금했고, 한국의 새마울 운동 이전의 시대인 캄보디아에서 어떻게 이런 기발한 작품을 만들었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사랑의 하트와 평화의 비둘기 한쌍의 절묘한 조화는 나를 감동시켰고 나는 두말없이 그 작품을 3천레엘(한화로 900원)을 주고 샀다.
최근 30년간의 내전과 전쟁통에 이 청년들은 사랑스러운 세상을 기원하며 이 작품을 만들었으리라...
다정한 비둘기 한쌍처럼 오손도손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이 작품을 만들었으리라...
이 청년들의 위대한 작품과 순박한 마음을 3천레엘이란 값싼 지폐 3장만으로 사기에는 너무나 값지고 귀중한 작품이었다.

프롬펜 시내는 오토바이 천국이다. 택시가 있으나 값이 비싸고 찾아보기 어렵고 그대신 오토바이가 택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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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프롬펜 공항에서 호시립이 대전에 있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와 선물을 받아안고 태국 방콕공항으로 이동후 다시 인천공항으로 오던 중 비행기 안에서 찍은 구름 사진이다.
하루에 한번쯤 스콜현상으로 쏘나기가 쏟아지는데 구름 위에는 말짱하다. 비를 먹구름이 뿌리기 때문에 구름 위는 늘 화창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상식일게다.
구름 아래서는 비가 올 경우도 있고 화창할 수도 있으나 구름 위는 늘 화창하다는 것이 내가 구름 밑에서 살아야 할 것인지 구름 위에서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요상한 구름처럼 하루에도 열두번씩 바뀌는 변덕스러운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조절하여 늘 평상심을 유지하는 구름 위처럼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성찰하게 했다.

▶ 캄보디아 탐방에 후원해 주신 분들입니다.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고종혁 목사(영천교회) 김기분 원장(청북유치원) 김선미 교사(호수돈여중) 김선진 교수(청양대 소방안전) 김용우 목사(보문교회) 김황중 장로(제일장로교회) 박찬운 목사(가수원중앙교회) 살림교회 여선교회, 신현정 가정의(한일병원) 심재호 교수(목원대 사회복지) 이상용 대리(한국언론재단) 이재철 목사(갈보리교회) 장수찬 교수(목원대 행정정보) 주상필 소장(슈넬제약) 최연미 교직원(호수돈여중) 최종호 목사(수입교회) 한진걸 전국장(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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