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광복절설교1탄

2007. 8. 11. 15:47목양자료/6.교회행사 자료


태평이냐?광복이냐?/행24:1-9
2001-11-21 21:40:52   read : 116

1. 더둘로의 시국론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 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3절)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로마 총독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총독 수하에서 로마에 대한 납세의 의무를 담당했고 치안 및 사법권을 가지지 못하는 주권을 상 실한 나라였습니다. 대신에 로마로부터 앞선 문물을 얻었고 일명 "Pax Romana"(로마의 평 화)의 우산 아래서 전쟁이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누리고 있었던 자유는 유대 전통을 따라 행하는 풍습과 종교생활 뿐이었습 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 온전한 자유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 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농성을 하다가 성역으로 인정받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 병들이 진입하여 그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특히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로마에 항거하는 몸부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소위 열심당 (zealot)이 구성되어 독립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롯 유다도 그 일원이었고 예수님 대신 하여 유대 명절에 석방된 바라바도 그 일원이었습니다. 이런 정치 투쟁이외에 거짓 메시아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현혹했 던 "드다"와 "갈릴리 유다" 사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사도 바울을 로마 총독에게 고소하는 자리에서 원고의 변호사 인 더둘로는 로마 총독을 찬양하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애씀이 보이고 있습니다. 변사 더 둘로의 로마 찬사는 곧 그를 내세운 당시 유대교의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함께 왔던 유대교 장로들의 시국관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기득권층의 보수주의 사고유형입니다.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은 나라 독립엔 관심이 없 었습니다. 그들 표현대로 나라의 평화와 사회 안정 그리고 발달된 문물의 수입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자기들이 지도자로 있는 동안 태평을 누리며 백성들의 삶의 물질적 풍요만 있 으면 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런 일을 이룰 수 없을 바에는 로마에게 주권 을 넘기고라도 그것을 얻고자 하는 전형적인 기득권층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넘기고 일본에 합병되었던 이씨조선 말기 대한 제국 시절 지도자들의 생 각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본과 합병만이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옳은 선택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2. 소요케 하는 자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대단한 위협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 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이유도 그들에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그들과 너무도 달 랐습니다. 그들에겐 풍요한 물질과 안정이 매우 중요했는데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 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신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유 대 지도자들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때 무엇을 더 요구하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죽일 모략을 꾸몄고 결국 로마 황제 모독 죄를 걸어서 십자가에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은 후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의 교훈 과 복음을 전하며 다니니까, 지금 바울을 "염병이라"고 고소를 한 것입니다. 더구나 대제사 장과 장로들은 바울을 "(천하를) 소요케 하는 자"로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총독부와 그 앞잡이들에게 가장 요주의 인물들이 거의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 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하여 독립운동의 불을 지폈던 독립선언문의 서명자 33인 중에 20여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 운동을 더욱 거세게 퍼지게 했던 곳이 제암리 교회였고 일제는 그 교회를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 뒤에도 나라의 독립과 민족 자립 을 주창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거의가 기독교 선교 학교에서 복음교육을 받았던 인물들이었습 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그토록 독립을 원하였었는가? 왜 식민을 싫어했는가?

물론 예수님도 바울도 정치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가 통치하느냐에 보다 어떤 통치를 하 느냐에 뜻을 보이신 분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대한 것 보 다 그로 인하여 어떤 나라가 될 것이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은 태평을 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광복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복음은 우리들에게 배부른 돼지가 되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태평가운데서 생활의 이기로 편 리해지고 물질의 풍요로 인한 만족도 좋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자유와 존엄함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어두운 깊은 굴에서의 풍성함보다는 밝은 빛 아래서의 자유를 더 큰 가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나온 것도 바로 이 이유입니다. 그들은 애굽 에서 먹을 것과 잠잘 곳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자유는 곧 예배의 자유였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출애굽의 이유를 이렇게 설 명했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 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 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 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출 5: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이런 자유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자유가 모든 자유의 근본입니다. 곧 신앙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종 교 중에 하나를 선택할 자유를 의미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자유입니다. 먹 고 마시고 잠 잘 곳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 탄은 처음부터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것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하나 님을 섬길 자유를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확실히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의 염려가 하나님을 찾을 자유를 빼 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것들로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만날 자유를 막 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3.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성전을 더럽게 하려하는 죄"로 고소를 당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유대인의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가려 한 사건을 두고 한 말입니다. 당시 유대지도자들은 나라를 다 내어주고도 오직 성전에만 이방인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된 다는 식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전만 지키면 하나님께 체면유지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결국 모두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을 해방시키려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유물에서 모든 민족의 것으로 해방케 하려 한 것입니다. 비록 이방 죄인들이 들어와서 성전이 더러워져도 그 성전을 통하여 죄로부터 해방받는 자들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4. 마무리하며

성경은 아무 일이 없는 태평보다는 고통과 희생을 통하여 얻는 광복을 더 큰 가치로 가르칩 니다. 우리 민족의 앞날에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더 큰 자유와 새로운 광복이 이루어지도 록 합시다.





예수님은 자유를 의미합니다/미4:1-5,요8:31-36
2001-11-21 21:43:08   read : 212

어느 행복한 부부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에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아이를 갖는 것 이 였는데, 오랬동안 아이가 없어서, 한 아이를 양자로 드리기로 결정했답니다. 그래서 아이를 고아원에서 데려왔습니다. 양부모는 양자된 아이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얼굴이 밝지 않고, 늘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이 부모는 아이를 데려온 병원에 갔습니 다. 그래서 문제의 근원을 밝혀서 치료하기로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그 아이를 관 찰한 결과, 아이의 어두운 그늘을 찿았습니다. 비록 좋은 양부모를 만나 좋은 환경 속에 거 했지만, 이것조차 아이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지난날 고아원 삶 , 과거의 삶이 그 아이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장 밑에서 원장 눈치보고, 먹을 것이 있어도 함부로 먹지 못하고 때로는 훔쳐먹으며 살다가, 양자로 들어왔지만 자기 집에 있는 것이 자 기 것인 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먹어도 두려웠고, 하나 하나 눈치를 보며 살아야했던 것입 니다. 그는 이제 자기 부모 밑에 와 있었지만, 아직도 아들로써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포로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었어도 그것을 알지 못하 고, 노예처럼 어둡고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아비 집에서 고아처럼 어둡게 사는 아이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소중합니다. 오늘 해방기념주일을 맞 이해서, 우리는 자유가 무엇이고, 자유인으로써 삶이 무엇이고, 이 자유를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자유인의 앞으로 행로, 그 사명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소중히 지키고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고자 합니다.

하나는 신앙의 무지에서 자유입니다. 이 무지는 과학을 알고 모르느냐, 철학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신앙의 무지에서 자유 를 말합니다. 그릇된 신앙의 지식에서 자유를 말합니다. 4장2절 말씀에 그가 도로 우리를 가 르칠 것이라. 진리의 길을 가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지 아니 한 자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네스트 케제만은 [예수는 자유를 뜻한다] 라는 책에서 이런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1952 년 천둥과 홍수로 네덜란드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분이 암스테르담에서 이러 이야기를 들 은 것으로 자유로운 신앙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엄격히 지키고, 주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마을 에 갑자기 폭풍우를 동반한 폭우로 마을이 떠내려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을에 위기가 닥 쳐와서, 이 어려운 것을 극복하려면, 일요일에 제방을 튼튼하게 해야했습니다. 경찰은 목사 님에게 통지했습니다. [지금 제방이 무너질 위기에 있습니다. 오늘 와서 제방을 쌓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될지라도 , 자기에게 위임된 교구민들을 불러서 제방이 무너 지지 않도록 필요한 일을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파멸로 인도할 것인가? 개인적 결단을 내려야할 때였습니다. 그는 교회 자문위원을 소집했습니다. 토론자 중에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가지고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살든지 죽든지 복종하는 것입 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확신과도 약간 어긋나는 말을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 자신도 4계명을 범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 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때에 존경할만한 어떤 노인 한 분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아직까지 남 앞에서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했는데, 이제는 말해야 되겠습니다. 나는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정도 자유인이 아내였는가 생각합니다.] 이 자유로운 예수님은 강력한 전 통파 동료들이 예수님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고 제자 중에 하나는 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 았습니다. 자유 자는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경건 자는 자유롭습니다. 케제만 이라는 학자는 자유와 신앙의 경건을 조화한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고, 주의 말씀을 알면, 자유롭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너무나 자유롭게 행동했습니다. 때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금 기시했던 안식일 계명도 새롭게 말씀하시면서, 병을 고쳤습니다. 약자와 죄인과 세리와 함께 교제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율법사와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 바 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이 행위가 하나님과 계명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관점에서 모세, 성서의 교리를 해석하 고 평가했으며, 그래서 경건하면서도 자유를 누렸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파격적일 만큼 자유롭게 행동했으나 방종이 아니였고, 놀랍고도 크신 하나 님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유가 방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유는 섬김으로 나타 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위임받은 심판자로써 비난과 정죄와 심판과 책망한 것 이 아니라 오히려 관용과 용서를 행했고, 오히려 약자를 섬겼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 니다.

유대교 전통 속에 죽었던 율법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자 랑하는 신앙적 전통과 도덕적 질서를 말씀으로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 말 씀 안에서 가장 자유롭게 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유는 경건을 떠난 것 이 아니라 자유 함으로 더욱 경건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자유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바로 앎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모르면 우리를 외식하게 하고, 우리 양심을 가식적으로 만들고, 하나님도 형식적으로 섬깁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얽매는 것으로 생 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자유의 길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많이 연구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폭을 넖펴야 합니다. 거짓된 형식, 잘못된 전통에 매여 주님의 주시는 자유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 잘 알아야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 계명이 어디에 기록된 지 아십니까? 출애굽 20장과 신 5장입니다. 출34장에는 제의 십계 명 ( cultic decalogue )도 있습니다. 윤리적 십 계명중에 제일 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대교는 우리가 서론으로 여기는 2절 말씀을 1계명으로 합니다. 카톨릭과 루터 교는 우리 가 1계명 과 2 계명으로 나누는 계명을 1계명으로 하고, 우리가 9계명으로 하는 것을 9 계 명과 10 계명으로 하는데, 출애굽 쪽을 따르는 쪽과 신명기를 따르는 쪽에 따라서 9계명과 10명의 순서가 다릅니다. 십 계명의 차이를 알 때, 혼란이 아니라 보다 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바로 모를 때 혼란의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예수님 시대의 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랍비들은 율법 의 가장 중한 계명 곧 오직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가장 중한 무 거운 계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경한 계명' 가벼운 계명은 '새를 놓아 주는 것'이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경중(輕重)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은 도덕적 계명은 중하고, 시민법은 보다 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장 큰 계명에 대 해서 말하기도 했음을 성경에서 봅니다. 어떤 율법사가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계명을 가볍고, 무거운 것이나, 크거나 작은 것으로 말하지 않고, 옛 계명과 새 계 명으로 말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같이 우리가 사랑해야함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 니다. 사랑 안에서 율법이 완성되고,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것을 유대 전통주의자들 은 몰랐던 것입니다. 신앙의 무지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배움에 열심을 내야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에 는 이런 중요한 것도 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시 고백하는 사도 신경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자 합니다. 사도신경도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세계 교회가 하는 고백하는 것 중에 차이나는 것이 있습 니다. 영어 성경에는 십자가에 못밖혀 죽은 후에 he descended into hell 이오고, 그 다음에 장사한지 사흘만에 이렇게 되어집니다. 그뿐입니까? 주기도문도 문법이 안맞고 나라와 권세 와 영광이 라는 말도 권세가 아니라 dunymis라는 권능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창12:1-3절에 원문에 보아도 1절은 완료형으로 나타나고 2와3절은 미완료 재귀형 과 단순 재귀형으로 나타납니다. 이 본문은 사실 정확한 번역이 어렵습니다. seed라 영어로 번역된 단어도, 원어로는 단수이되, 단수 집합명사이기 때문에 대표자를 지칭하기도 하고, 민족집단 히브리인 전체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2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 본문을 보는 눈도 다양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창 12장2절에,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 라는 말도 다르게도 번역 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복이다. 복동이다. 복만이다' 이런 번 역도 가능합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말은 의역이고, '복이다' 라는 말은 직역입니다만, 2 절 하반 절은 오히려 직역에 가깝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아는 것 같아도 사 실 잘 모르고, 또 잘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많이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묵 상하고 배움을 통해서 성경의 무지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신비한 능력이나 환상을 통해서 믿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 해서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하시고, 그 다음에 경건과 행동의 자유, 말과 옳은 판단 과 생각의 자유를 갖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자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둘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쟁의 연습은 없어야 합 니다. 전쟁은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 시작됩니다. 물리적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입니다. 그 러나 물리적 힘의 균형은 이루기 어렵습니다. 신앙과 법에 의한 힘으로 평화를 이뤄야 합니 다.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피해야 합니다. 왜 피해야 합니까? 전쟁에는 승리자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이기든지 모두 패배자와 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전쟁으 로부터 자유를 외칩니다. 그러나 오늘도 전쟁은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전쟁 을 하는 것을 보면, 민족에게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무장이 되 면 평화는 이뤄집니다. 주님은 어떤 물리적 수단도 용납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정치가들이 마음대로 자신의 이익을 쫓아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법적 제도 장치를 만들고, 법의 감 시기능을 강화하면 전쟁 없는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80 년대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얻고자 한 것을 생각해보세요. 단지 한 사람이 물러가기만 바란 것이 아니라, 법의 통치하는 투명한 사회를 위해서, 민주화 투쟁을 한 것입 니다. 5 공 정권 때는, 법의 질서가 서지 않았습니다. 옳은 법이 서지 않아서, 모두 법 아래 평등하다, 이런 법을 세우기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벌렸습니다. 그리고는 민주화를 쟁취했습 니다. 독재자는 옳은 법이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민주화로 정의로운 법을 세웠습니다. 그 러나 오늘 보세요. 815 특사해서, 많은 범법자들이 사면 받고 나옵니다. 공의로 세운 법이 오늘 법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위정자들에 의해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세운 법이 가 치 없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옳은 법이 서지 못하도록 하는 독재자만 나쁜 것이 아니라 바른 법이 효력을 발하지 못하도록 정치적인 이유로 사면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법 의 공의가 민주주의 이름으로 무너지게 하는 것은 선한 정치가라 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런 그릇된 일이 생기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못하 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힘의 균형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 안에 서 변화 받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애 쓸 때 평화는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평화는 거짓된 평화입니다. 공의가 없는 평화도 거짓됩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 은 결코 평화가 아니라 더 큰 폭력과 피를 불러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이념에 대한 오 만과 편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무릅끊을 때, 전쟁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 화의 사도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말씀에 더욱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가난으로부터 자유입니다. 본문4절 말씀에 자기 포도 나무아래와 자기 무화과 나무아래 "앉는다"는 말은 평화와 안전 을 의미합니다. 심고 거둘 수 있다는 것은 평화의 상태입니다. 안전도 뜻합니다. 세렌게티 평원에서 마음대로 눕고 앉아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은 동물은 사자뿐입니다. 그만이 앉을 수 있습니다. 가난으로부터 자유는 바로 앉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평 화와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오늘 본문의 앉는 평화는 풍요로울 때만 가능합니다. 어떤 가난 으로부터 풍요로운 것입니까? 물질적 풍요만은 위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 때문에 원망하다가 망한 것을 봅니다. 비록 메추라기를 코가 질릴만큼 먹었으나 시106편 14-15에 보면 광야의 사건을 시인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 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 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만으로 인생은 만족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40일을 주리신 후에서 사람은 떡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고 했습니다. 물질적 굶주림이 커도 영적 주림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이 없음을 전도자 솔로몬도 전도서 6:7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난으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 가난에서 물질적 풍성을 얻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눅 6:20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 곧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을 통해서, 절망을 통해서 우리가 의지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가난 같은 고통과 신음, 괴롬 속에서 진정한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에 가난이 복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발견치 않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세상 모든 물질을 얻는다해도 허기질 것입니다. 그 러나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할지라도, 이 가난 속에서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만 나면 행복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 해방 기념주일에, 모든 물질 우상에서 자유 하시길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째로 죄와 죽음, 그리고 공포로부터 자유입니다.(5절) 호4: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내 백성이 망한다고 하나님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공포란 죄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계가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합니다. 사형제는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형한다 고해서, 그것 때문에 범죄가 덜 흉악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통계를 말합니다. 죄를 줄이기 위해서 사형 제를 도입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은 통계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성경은 어떤지 살펴야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빙자한 사형 폐지론 자들이 생각해야 할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설명하시면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곳은 출애굽20장 가운데 3군대입니 다. 오경 전체에서도 나는 곧 anoki, ani yhwh 라는 곳이 2절 나는 야훼니라,12절 이하에서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고 말씀합니다. 모살자와 고살자를 구분할 때, 13절에서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나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요. 할 때, 나 하나님이 14 절에서 "사람이 그 이웃 을 짐짓 모살 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의도 된 살인 계획자는 죽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단어 중에 원문에 보면 biadam이라는 말 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집적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브"라는 전치사는 영어로 by 곧 의하 여, 사람의 손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적 복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서 공정한 심판을 받고 사형시켜라 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범죄 예방 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이 당할 심판을 예표하는 것 입니다. 죄사함 받지 못한 죄인이 영원히 당할 심판의 징표로써 사형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 님의 공의로 말미암은 심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형제 는 하나님이 인간 사회 법정에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행되야 합니다. 사형선고가 때로는 고문에 의해서, 누명에 의해서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급한 사형이나 몇 십 년 동안 오랜 심사를 통해서 실수 없도록 조처해야 할 것이고 특별히 약한 백성, 권력 없는 백성에 대한 사형은 없는 것도 고려해 볼 만 하지만, 그러나 사형제도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앞으로도 없어지지 아니할 원리입니다. 역사 속에서 발전적으로 없어지길 바라는 노예 제도나 여 목사 제도 도입 같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영원히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낼 증표요 심판의 예표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현실적인 심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죄로부터 우리는 자유 해야 합니다. 자유하지 못하면, 우리가 죄와 죽음으 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불안으로 부터 자유 얻는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내 힘으로는 , 내 공로로는 구원 얻을 길 이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의 삶이 실패와 죄의 욕망, 불의한 꿈들을 주님의 십자가아래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가? 시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 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하나님 없이 산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했던가를 고백해야 합니 다. 철저한 자신의 한계 상황을 알 때, 진정 주님을 갈망하고, 찾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며,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신앙의 삶이 하루 하루가 기쁘고, 감사가 넘치십니까? 아직도 자신의 삶 속에 율법주의에 매여서, 예배에도 기쁨을 상 실하고있다면, 이 시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자유 얻고, 그 힘을 입어 구원 얻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내가 구원을 위해서 할 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포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져 믿고 받아드릴 때,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합니다. "정치적 자유, 사회적 자유, 물질로부터 자유, 양심의 자유를 소유한다'고 해도 주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지 못한 자유는 거짓된 자 유요 아직도 포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나는 자유를 잃어본 적이 없노라고 외치는 종교적 이스라엘 백성들 을 보십시오 지금 분명히 로마의 속국으로 세금도 내며 그들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도 그들은 자유롭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신앙 전통을 고집하면서, 자신들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종교로부터 미신으 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야합니다. 영생이란 요17:3 예 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를 알고 그를 믿으면 영생 얻고 자유 얻습니다. 귀신이나 어떤 영적 불안으로부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액땜이나 불행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예수님을 믿을 때 자연적으로 압니 다. 그러므로 공포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르고, 성경을 바로 모르면,.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는 전혀 자유가 없습니다. 오직 진리 되신 예수님만이 자유입 니다.

우리는 815 해방을 맞이해서, 지금 남북 간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해방 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존,에프,케네디는 베를린 이 봉쇄되었을 때, 서베를린의 광장에서 " Ich bin ein Berliner "라고 연설을 시작하면서, 케 네디 대통령은 자유에 대해서 외쳤습니다. "이 곳은 자유의 섬이다. 그리고 우리 중에 한 사 람이라도 자유를 얻지 못한 자가 있다면, 온 세계가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요지의 명 연설을 했습니다. 이 자유에 대한 연설은 베를린 시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민족 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민족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죄인으로 남아 있는 한, 비자유인 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 민족은 온전한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해 방과 자유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 민족과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할 때입 니다. 주님 한 분으로 인해서, 인류는 어둠이 지배하던 곳에 자유가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 도 주님의 제자로써 주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유를 가지고, 낮은 곳에서 섬겼습니다. 낮은 곳을 찾으셨습니다. 죄의 자리에 오셔서, 죄인들의 상처를 쓰다듬고 사랑을 나눴습니다. 고통을 나눴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 판 받고, 망할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십자가 피를 흘리 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 얻고, 죄와 사망에서 자유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자유 얻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지난 날의 잘못된 신앙의 틀을 부셔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만이 복이 아니라, 하 나님의 종으로 주님께 시간과 건강과 재물과 은사를 드리는 삶을 살 때, 자유를 누리게 되 고, 모든 거짓 우상에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됩니다. 해방은 받는데서, 쌓아놓는데서 얻어지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쓰여질 때, 깊이 체험되어집니다. 우리를 억 매는 체면, 명예, 욕망보다 종으로써 주님처럼 봉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이 시대에 사는 한, 이 민족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과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 처럼 섬기고 낮아지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할 때, 이 민족에게도 희망이 있고, 한국 교회에도 희망이 있고, 오늘 우리 삶에도 자유와 기쁨, 희 망이 넘칠 줄 믿습니다. 오늘 주안에서 얻은 자유를 남용하거나 방치하지 말고 주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 이웃을 위해서 사랑으로 나눌 수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8.15가 주는 교훈/왕상12:25-32
2001-11-21 21:44:32   read : 125

금년은 광복 5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6년 전의 조국 광복의 그 감격을 우리 민족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8.15의 의미가 퇴색되어지는 것 같아서 이 시간에는 8.15가 주는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8.15는 우리 민족에게 일제의 36년간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해방의 날이면서 세계 제2차 대전을 종결시킨 연합군의 승리의 날로 인식되어 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8.15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원래 유다 왕조는 통일 왕조였으나 솔로몬 이후 르호보암의 실정으로 나라가 32도를 중심 하여 남쪽은 유대나라, 북쪽은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8.15는 이스라엘의 건국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는 날이며 죄악의 날이고 저주받는 날이었습니다. 이날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의 눈물로 땅을 치며 앙천 대곡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8.15가 해방의 날인 동시에 자유의 날이며 남북 분열의 날로 이날부터 38도 이북에는 하나님 대신 유물주의로 팽창해 왔고 고통의 삶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8.15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⑴,민족 분열을 막아야 합니다. 북왕국 여로보암은 갑자기 얻어진 주권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자기의 왕국을 구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의 중심지를 찾아 남쪽으로 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반역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의 백성들이 남쪽 유다로 못 가게 가로막았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가로 먹고 못 가게 한다고 하나님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남북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8.15일이 건국의 기쁜 날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같은 민족이 그때로부터 남북이 분열되는 상처의 날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간에는 요단강을 건너서 살던 지파들과 건너지 않고 살던 지파들 간에 오랜 세월을 지나서 32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분열되어 300년간을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한 민족은 한데 뭉쳐서 살아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일찍이 우리 나라를 건지려고 애쓰던 애국 선열들의 표어였으며 생의 지표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갈라지기 쉬운 사람들의 마음을 이미 갈파하시고서 "항상 기도하라, 하나가 되라"고(엡4:1-8)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도 8.15가 일제의 36년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날이면서 그 날이 바로 남북이 분열되는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과 감격은 잠시뿐이고 외세에 의해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으며, 그후로 한 민족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남북으로 나눠져 살고 있으며, 지금은 또 동서로 나눠져서 매사에 대립을 하며 사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는 기쁨이면 만족할 것인데 정권 싸움으로 분열의 추태를 보였으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죄에서 해방 받은 그것 하나면 될 터인데 교회가 분열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8.15는 민족 분열의 날이었던 것처럼 우리 민족도 8.15는 민족 분열의 뼈아픈 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해방된 지 56주년을 맞으면서 어떻든지 민족 분열을 막는 지혜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⑵,배금주의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건국한 후 8.15를 건국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고 국론을 통일시키기 위해 금송아지를 세워 놓고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잘못된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적인 분입시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거룩하시며, 전지 전능하시며, 무소 부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 분을 오늘날도 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으며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의 형상 곧 비인격적인 형상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이 금 신상을 만든 것은 일종의 배금주의 행동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는 곧 배금주의를 상징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최근 들어 배금주의 사상으로 팽배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가치판단을 인격 여하에 두지 않고 월급 봉투가 얼마나 두틈 하느냐에 따르며,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얼마나 수입이 많으냐에 따라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진정한 사람되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졸업 후 어떻게 해야 좋은 학교에 가느냐에 두고 있으며, 좋은 학교에 갈려고 하는 것은 그래야 졸업 후 취직이 잘되고 그래서 돈을 잘 벌어들 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인명은 돈보다 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돈이 생기는 일이면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세상이니 오늘의 세상이야말로 배금주의가 팽배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북에는 하나님은 없고 유물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남한에는 하나님보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금송아지 사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의 현상을 보면 돈 때문에 신앙을 팔고 돈 때문에 형제간의 의리도 끊고 부자간에도 원수가 되고 교우간에도 원수를 맺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기던 여로보암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온 천하보다 사람의 생명이 귀중한 것이니 우리는 8.15 56주년을 맞으면서 배금주의 사상의 팽창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⑶,신앙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절기 제도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중요한 규례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형상이 바꿔지자 이제는 하나님의 준염하신 명령이 인간의 명령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 물질 중심,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도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명령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서게 된 것이며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은 피차간에 피를 흘리는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어쩌든지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제2차 대전의 목적은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군국주의에게 정복당한 약소민족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평화를 주기 위하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들이 전쟁을 한 것입니다. 1945년 초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패하고 동년 8,9월에는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로 36여만 명의 희생을 치른 후 일본이 항복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자유와 평화를 얻은 줄로 알았는데 세게는 다시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지식의 발달은 인간에게 평안과 행복을 주기도 했으나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더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해설 가인 피즈 교수는 "인간은 결국 자기를 파멸시키는 괴물을 만들고 그 앞에서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8.15의 기쁨을 만끽하던 우리 민족에게는 시대의 절망적인 고뇌와 쓴잔이 계속 찾아 왔습니다. 6.25를 통해서 조국은 초토화되었고 천만 이산가족이 생겨서 망향의 설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치가나 역사가들은 오늘의 현실을 불안으로 보고 있으며, 종교가들은 말세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우리 이간이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와 평안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참 평화를 누리며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14:27 "내가 너희에게 참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즉 세상 방법으로는 평안이나 자유를 누릴 수 없으나 주님이 주신 신앙을 가질 때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을 통하여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금신으로 대치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왕상18:30-40
2001-11-21 21:46:48   read : 115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왕상18:30-40
삼일 후면 이 땅에 해방을 주었던 8.15 광복절입니다. 21세기에 맞이해서 찾아온 56주년 광복절을 우리는 뜻 깊게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 은 36년 동안 이 민족을 억압해 오면서 이 땅에 하나님 제단까지 비참하게 무너뜨렸습니다. 1938년 조선총독부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마련하고 기독교 신앙을 본격적으 로 위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 가정에 가미다나를 설치케 하여 신사 참배를 하도록 하였는데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성도들이 복종하고 따랐습니다. 이 땅에 주의 종들은 "신사 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며 국가 의식으로서 받아 들여도 된다" 고 성도들을 설득했습니다.물론 주기철 목사를 위주로 해서 끝까지 신사 참배 거부한 2천여 명이 투옥 되었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됐으며 50여명이 순교했습니 다.8.15 해방 이후에도 기독교는 끓임 없는 분열과 싸움이 계속 되었고 그 후 이 땅에는 피비린내 나는 6.25 전쟁을 가져왔고 그런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부흥을 가져 왔지만 오늘날 까지 기독교는 끓임 없는 분열과 분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 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고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 교회가 있고 세계 에서 제일 큰 침례 교회가 있고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 교회가 있고 세계 20대 교회 중 6개의 교회가 있을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기독교인 수도 일본은 기독교 인이 1%에 이고 필리핀이 4%로 대만이 5% 인도네시아 9%에 비한다면 우리 나라는 25%라는 놀라운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무너진 하나님 제단을 봅 니다. 엘리야가 그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 니까 ?육적으로 영적으로 해방된 이 민족 위에 세워진 오늘날 교회들의 제단과 성도들의 마음의 성전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 하나님의 제단이 무너졌다면......무너져 가고 있다면 하나님 제단을 수축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제단을 수축해야 합니까 ?

세 가지로 살펴 볼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첫 번째 : 열 두 돌로 단을 수축하라

(왕상18:30-32)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하신 자더라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 "

당시에 이스라엘은 3년 반 동안 가뭄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는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겠다"고 하고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누가 믿는 신이 참 신인지 알아보자 " "제물 위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시니라 " 고 하였습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리 자기들이 섬기는 신께 제사를 드리며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 먼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했습니다. 어떻게 수축했습니까 ?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대로 열 두 돌을 취하여 제단을 수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단을 쌓았습니다.

32절에 보면 엘리야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라고 하였습니다. 즉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지파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의지 하고 단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 제단이 무너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영적으로 무섭게 타락한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아합 왕이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 시대의 타락이 어느 정도 였는지 짐작이 가는 것입니다. 3년 동안 비가 안와서 가뭄이 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단순한 땅에 가뭄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엘리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 2 -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시고 야곱의 열 두명의 아들 을 택하여 가나안 땅을 택하게 하시고 축복된 민족으로 삼아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엘리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창35:10-12)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 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민족이 지금 그러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이 땅에 8.15 해방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 하나님이 이 민족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민족에게 축복을 주셨고 교회들을 부흥시켜주었고 성장시켜 주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서 가나안 땅에서 복을 누리며 살게하시고 강한 국가로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이 민족도 그러한 축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왜 가뭄이라는 어려움이 찾아왔습니까 ? 저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뉴스에 우리 나라는 I.M.F를 완전히 졸업했다고 합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 민족이 이 땅에 교회들이 성도들이 진실로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않는 다면 이 어려움은 우리에게 계속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 민족이 당장 해결해야 할 것은 경제적 가뭄이 아닙니다. 영적 가뭄 현상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영적 가뭄이 느껴지고 있습니까 ? 나 자신을 먼저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가뭄을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영적 가뭄을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이 시대 말씀의 홍수 시대입니다. - 3 - 인터넷을 통해서, T.V와 방송을 통해서 책을 통해서 날마다 무수하게 하나님 말씀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수 때에 먹을 물이 없다는 것 아시죠 ? 왜 이처럼 홍수처럼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우리의 영혼은 갈급할까요? 엘리야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무너진 제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무엇이 제일 시급한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제단을 새로 만든게 아닙니다. 전에 만들어졌던 하나님 제단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제단을 다시 보수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성도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단이 무너져있다고 생각 되지 않습니까 ? 부족한 종의 눈에는 거의 모두 무너진 제단의 모습입니다. 무너진 곳에 아무리 귀한 말씀이 임한다고 한들 무슨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또 무너진 곳에서 무슨 거룩한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씨를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네 가지 밭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13:19-23)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 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 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 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 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

길가 밭, 돌 밭, 가시떨기 밭은 밭은 밭인데 밭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밭입니다.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순간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진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길가 밭, 돌 밭, 가시떨기 밭은 무너진 성전을 가진 자들의 모습입니다. -4- 이런 밭은 말씀이 임해도 말씀의 결실이 맺어지지 않습니다. 더욱 무섭고 큰일 인 것은 교회의 제단이 무너진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주의 종들이 계속 말씀을 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무너지는 역사만 나타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언제부터인지 물량주의, 숫자주의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크냐 ? 성도가 얼마나 많느냐 ? 헌금을 얼마 나오느냐? 그러다 보니깐 성도들도 똑같은 사고 방식을 가지고 교회를 택하고 있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무너진 진 자들의 숫자가 더 많았습니까 ? 무너지지 않는 자의 숫자가 더 많았습니까 ? 인간의 머리는 숫자의 개념을 떠나지 못합니다. 이 생각부터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숫자적인 개념을 가지고 우리를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 신앙 생활 몇 년 했는지 따지시는 하나님이십니까 ? 기도를 몇 시간 했는지 따지십니까 ? 헌금을 얼마나 많이 냈는지 액수를 따지십니까 ?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따지십니까 ?

왜 모르십니까? 천국은 찾는 자들이 적고 좁은 길이라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성도 여러분 ! 무너진 곳에는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떨어져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 아무리 씨앗을 뿌려보십시오. 무슨 싹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하나님 제단을 다시 반듯하게 수축하는 일입니다. 엘리야의 모습을 다시 봅시다. 엘리야가 무엇으로 제단을 수축했습니까 ? 열두 돌로 제단을 다시 수축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엘리야는 제단을 수축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돌은 무엇입니까 ? 성경은 돌을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하는 것이 많습니다. (벧전2:6)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산 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모퉁이 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의 제단을 단단히 다시 쌓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진 그 마음 밭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질 때 삼 십배 육 십배, 백 배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 5 - 두 번째 : 제단과 제물 위에 물이 흐르게 하라

(왕상18:33-35)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 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

열 두 돌로 제단을 수축한 엘리야는 제단에 번제물을 드리고 번제물과 나무 위에 열 두 통의 물을 갖다 부었습니다. 그 물은 제단에 번제물을 적시고 제단에 만들어 놓은 도랑에 물이 가득하게 고이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제의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 "똑같이 송아지를 제물로 드리고 그 제물에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이요 하나님이시다" 라는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 엘리야의 제의였습니다 제단에 불이 임한다고 할지라도 물 때문에 불은 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 불과 물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흥건한 물 위에 하나님의 불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은 곧 말씀을 뜻합니다.(엡5:26) 말씀이 강한 곳에 성령의 불의 역사가 임한다는 사실을 보통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열 두 통의 물을 부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송아지로 번제 제사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제물의 각을 떠서 불로써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이 불은 사람의 인위적인 힘으로 일으키는 불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로 제물을 태워야만 합니다. 무엇을 의미힙니까 ? 온전한 순종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제물을 송아지였지만 각을 떠서는 드리지 아니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 앞에 번제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순종하고 희생하는 번제 제물이 되어야만 합니다. - 6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그러므로 오직 예수 신앙으로 하나님 제단이 수축되고 그 위에 온전히 순종 하고 희생하는 신앙 가운데서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불의 역사는 반드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몸소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 마음에 하나님 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의 제단이 있었고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십자가에서 온 몸의 물과 피를 흘리시고 인류를 위해 희생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에게 하나님 말씀이 충만히 임하셨고 그러하였기에 예수님은 불같이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을 보세요. 제자들이 처음에는 그들 마음에 제단이 수축되지 못해서 예수님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마음의 제단들이 수축 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제물되기로 작정하고 순종하고 희생할 때 그들에게 임한 말씀들이 불 같이 역사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 제단이 수축되었다면 이제 내 자신이 온전히 예수를 위해 순종하고 희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에 주님의 성전이 자리했다면 주님을 위해서 순종하고 희생하는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롬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구약에 모든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만이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제물이 없는 제단에 물만 흐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죽어야 한다" 고 생각지 말고 "내가 먼저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이 먼저 죽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 제단에 물만 흐르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 평신도들도 말씀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설교를 못합니까 ? 모든 목사님들이 참으로 설교들을 잘 합니다. 나 자신이 먼저 제단에 제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어떤 하나님의 역사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 7 - (마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요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이 땅에 해방이 오고 6.25 전쟁이 터진 어려운 가운데서도 목사와 그리스도 인들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습니까 ?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들려진대로 순종하고 복종했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 교회는 부흥되었고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 먼데 보지 말고 나 자신부터 한 번 보세요 우리의 마음에 제단은 수축되었다 할지라도 그 단 위에 올려진 제물이 있습니까 ? 다시 강조합니다. 그 제물은 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제물이 있습니까 ? 그러한 자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도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불로 역사하시는 모습입니다. 주님 제자들이 모두 교회를 위해 죽었습니다. 바로 제자들에게 불로 역사하시는 모습입니다. 나 한사람이 불로 역사될 때 이 민족 위에 영적 가뭄이 물러가고 성령의 단 비가 내리게 될 것입니다.

전라남도에 있는 용정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국전쟁 때 공산당의 만행 으로 교회는 불이 나서 없어졌고 성도들은 많이 피살당했습니다. 수복되자 피난 갔던 성도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시 건축하려고 해도 도무지 가망이 없었습니다. 이때 온 성도들이 힘을 모아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예산을 세웠습니다. 시멘트, 목재, 자갈 등 건축 자재의 예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예산이라 는 것도 실재 필요 액에는 못 미쳐 막막한 실정이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부모가 순교하고 혼자 살고 있는 15살 된 성옥이가 있었습니다. 교회 건축자재 중 돌에 대한 예산이 나오자 성옥이는 이 돌을 내가 산에서 머리에 이어서 날라 놓으리라고 결심을 하고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 습니다. 성옥이는 남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밤 11시가 지나서야만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한 밤 중에 산에 가서 돌을 예배당 건축터에 매일 날랐습니다. 아 무도 모르게 이 일을 행하면서 순교 당하신 부모님을 생각하 고 "아버지! 어머니! 제가 부모님 대신 예배당 건축을 하는데 참여하고 있습 니다........." 하고 울었습니다. 돌이 세 트럭에 실을 만큼 되었습니다. - 8 - 아무도 누가 돌을 날랐는지 몰랐습니다. 성옥이는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교회의 건축은 성옥이의 희생이 함께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직 예수를 위해 살려고 하는 자에게 주님의 말씀이 임하고 불같은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왜 아무런 변화도 없는지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변화됩시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세 번째 : 올바른 기도 제단이 되자.

(왕상18:36-38)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되는 장면입니다. 무너진 제단에 불이 임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가 이 시대 우리들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모든 교회 제단 위에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임해야 할 기도 응답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깨닫기 를 바랍니다. 첫째.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드려야 올바른 기도입니다. 엘리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기도한 것은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 9 -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진실로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 왜 우리가 기도할 때 의심하면서 기도하십니까 ? (약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의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습니까 ? 하나님의 제단을 수축하고 자신을 제물로 드렸고 말씀을 의지하고 기도 하였기 때문에 응답이 떨어질 줄 믿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가 기도해 놓고 왜 마음에 의심이 들어오고 흔들거립니까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나님께 행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 내 마음의 성전을 수축을 했습니까 ? 아니면 내 자신이 제물이 되고자 했습니까 ? 아니면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친 적이 있습니까 ? 내가 하나님께 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힘이 없습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지금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 반드시 기도 응답이 떨어질 줄 믿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 우리의 기도가 마음의 성전도 수축하지 않고 제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도 없는 가운데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정욕을 위해서 구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믿음을 보이고 구하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을 내가 주의 종이 됨을 알게 하옵소서"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나기를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 10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역사는 나를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응답해주실 것이라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 저의 행함을 통해서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기도가 올바른 기도이고 그 기도 위에 하나님은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토레이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쪽지를 써서 올렸습니다. 쪽지에는 "존경하는 토레이 목사님 나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일을 위해 기도해 왔는데 하나님은 응답을 해 주지 않습니다. 나는 30년 동안 장로교회에 다니며 꾸준히 신앙 생활해 왔고 20년간 장로로 봉직하고 25년간 주일학교 부장을 맡아왔는데 내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라고 물어 왔습니다. 그때 토레이 목사님은 "당신은 기도 응답을 받기 원한다면 당신이 하나님께 무언가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고 했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무언가 얻기 위해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기도입니다.

셋째. 하나님 뜻에 맡기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는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말씀대로 모든 것을 행한 후에 이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기도를 응답 해달라고 하지 아니했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2-3)

일을 행하시고 뜻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올바른 기도를 드리는 일 뿐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 바른 기도를 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이 시대 교회에서 기도 소리가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곧 성도들에게서 기도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단을 쌓고 제물이 되기를 원하고 말씀에 순종한다고 할지라도 기도가 없는 제단에는 불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로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결 론 ) 엘리야가 왜 능력 있는 선지자였습니까 ? 그는 무너진 제단을 발견했고 그 무너진 제단을 어떻게 수축해야 하는지 알았고 수축된 제단에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아는 자였고 제단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제단들이 무너졌는데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의 제단들이 무너진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알고 있다해도 수축하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제는 내가 섬기는 교회 제단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내 마음의 성전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어느 한 쪽이 무너져 가고 있는 자가 있다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신속하게 수축해야 할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목회하신 후안 카롤로스 오르티즈 목사님 말씀이 생각 납니다. 그는 2년 동안 정신없이 전도한 결과 600명의 성도로 교회를 성장 시켰습니다. 하루는 그가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이 들었는데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가 잡지와 책을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교에서 배운 술수를 쓰고 있다. 도데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어디에서 나의 손길을 찾아보겠느냐? " 주님은 말씀하셨답니다. 오르티즈 목사는 할 말을 잃고 있는데 주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자라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 가는 모습이다 "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 일본 억압 속에서도 믿음 하나로 신앙을 지키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며 죽어갔기 때문에 우리의 조국은 해방을 얻었고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50년대 60년대 70년대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위해서 살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 땅에 교회들이 세계에 소문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냉정하게 이 시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들이 성도들의 마음에 있는 제단들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 자신부터 무너진 단을 수축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수축하지 못하면 내일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존재하지도 않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 12 -





진정한 광복/욘4:1-11
2001-11-21 21:49:43   read : 158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74년 8월 15일 29주년 광복절입니다. '나는 오늘이 뜻깊은 자리 를 빌어서 조국통일이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것을 하는데 둔탁한 총 성이 울렸습니다. 이 총성은 [문세광]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다가 오발하여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쏜 총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연설은 계속되었고,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 동안 시종하는데 다시 '땅, 땅, 땅'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고, 놀란 군중들의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식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총성은 [문세광]이 [박정희]대통령을 겨냥해 발사한 것인데, 제2탄은 박대통령을 가리고 있던 방탄 연설대좌측 상단에 맞았고, 3탄은 불발, 제4탄 은 [육영수] 여 사의 오른쪽 머리를 명중시켜 육 여사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한 동안의 아수라장이 정리되고 육 여사가 병원으로 옮겨진 뒤에 약 10여 초 간말없이 연설 문을 바라보던 박대통령은 중단했던 기념사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연설을 이어갔습니다. ' 여러분, 하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원하는 평화통일의 기본 원칙을 명 백히 천명하고자 합니다.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의 기본 원칙은 첫째는, 우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남북은상호 불가 침 협정을 체결해야 합니다. 둘째는, 남북은 상호 문호를 개방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남북대화를 성실 히 진행시켜야 하며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것입니다.' 연설이 끝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박대통령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육 여사의 핸드백과 고무신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습니다. 모두 이 날을 기억하고 계실것입니다.

저는 지금 [박정희] 대통령을 이야기하려고 그 날의 기념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해낸 광복절 기념식에서 거의통일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탄을 맞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숨 을 거둔 당시의 광복절 기념사에서도 박대통령은 여전히 평화통일의 기본 원칙을 말하고 있 었습니다. 왜일까요? 분명히 일본으로부터의 광복은 얻었지만, 완벽한 광복이 아니라는것 을 온 국민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복이후에 이 나라는 38도 선을경계로 이념 의 선이 그어져 둘로 나누어졌고, 결국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마주 대하는 비극의 전쟁을 겪 고도 다시 복잡한 휴전선으로 나라와 국토가 둘로 나누어지고말았기 때문입니다.

광복과 6.25 전쟁이후로 벌써 반세기가 지나가고, 박 대통령이 육 여사의 죽음앞에서 비장하 게 평화통일 기본원칙을 천명한지 다시 27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우리는 아직 민족의 통일 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통치로부터는 벗어났지만 그 때문에 생겨난 민족의 아픔 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의 광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꼭 국토가 분단된 것만 으로 광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일본과의 관계가 정립되 지 않은 상황도 역시 우리의 광복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요즘 일본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역사교과서를 자기들 마음대로꾸며 왜곡시키고 있 습니다. 이것은 교과서의 왜곡이라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 다는 것이요, 아직도 그들이 군국주의의 못다 이룬 꿈을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국가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갔고, 그 이후로도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 아픔을 감내하고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 총리는 다 시 신사 참배를 하겠다고 하고있습니다. 전범을 의사로 참배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대동 아 일본통일의 야욕을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겪었던 비극의 6 25와 남북의 분단은 일본이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일제시대가 없었다면 남북이 따로 신탁통치를 받는 일 이 없었을 것입니다.그리고 그랬더라면 적어도 우리민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분단되는 일은 없지않았겠습니까?

여하튼 우리는 지금 그런 과거를 겪고 오늘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지금은 분명 통일로 가는 길목인데 여기에서 우리의 처한현실이 너무 혼란스럽 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황'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 데 지금의 우리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여당과 야당은 늘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정권과 언론의 대립에서 언론과 언론의 대립으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을 따라 국민들까지도극명하게 이리 저리 로 나뉘어 대립하는 혼전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우리는 지금 폭풍 전야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광복이 되어 주권을 되찾고 경제 발전을 이룩한 이 나라를 떠 나고 싶어합니다. '민주화가 되고 또 통일을 준비하고 있는이 나라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 고 말합니다. 내가 태어난 조국과 민족을 등지는 사람들을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 게 마음먹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정체는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표면적인 광복은 이루어졌으나진정한 광복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광복은 자유요 주권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됩니다. 광복은 '하나됨과 통일과 인 권과 행복한 삶으로' 마무리가 되어야 완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은 정치적인 수완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정책으로 이루어지는것도 아닙니다. 통일은 우리 안에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고 그릇이 준비되었을 때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광복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낼 것입니까? 첫째, 복음으로 이기주의의 벽을 허무는 것이 진정한 광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하나님 앞에 상당히 불편해진 자신의 심기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가기 싫었던 니느웨로 가서 죽이고 싶도록 미운 원수들을 향해 회개할 것을선포했더니 그들 이 회개하고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나는 자신이 회개를 선포해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제발 회개하지 말았으면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의 머리 위에 쏟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니느웨성의 모든 지도자와 백성이 하나같이 회개하였습니다. 일이 그리되자 [요나] 는 항변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 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절) 이것은 [요나]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미워하는 니느웨까지도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빈정대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오직 이스라엘 밖에는 없었습니다. 다른 민족이 하나님 께 용서를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의 이런 마음이어디서 왔 느냐? 편협한 선민의식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이스라엘이기에 이스라 엘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은 심판을 받아야 하고 멸망해야 되었 습니다. 이것이 '네오 내셔널리즘', 즉 '신국가주의'입니다. 맹목적인 애국심에 노예가 되 어 자국의 국민만 사랑하고 그 밖의 민족들에게는 증오심을 발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최악의 신국가주의는 나치즘이고, 그 버금가는 것이 일본의 군국주의입니다. 문제는 독일은 나치즘을 악으로 정의하고 버렸지만, 일본은 아직도 그 근성을 버리지 못하 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어당] 박사는 '현대인이 경계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 가 운데 하나가 신국가주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을 삼으셨지만, 니느웨의 백성들 또한 져버리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국난을 크게 겪으면 애국심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 무 지나쳐 맹목적인 애국심의 노예가 되어 내 나라 내 민족 밖 모르는 사람이 된다면 이것 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에은 평화조약을 맺고도 보복전 쟁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혹 우리에겐 신국가주의 성향이 없는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처우를 생각하면 떳떳할 수 없는 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중국교포들의 등을 쳐 먹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만 잘 되면 다른 이들은 죽든지 살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네오 내셔널리즘입 니다. 꼭 국가나 민족간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만이 네오 내셔널리즘이 아닙니다. 지역간의 극단적인 이기주의, 집단간의 극단적인 이기주의 역시 전부가 다 네오 내셔널리즘의 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쓰레기 처리장은 우리 지역에 안되고, 장애인 시설도 내가 사는곳 가까이에 는 둘 수 없다면 도대체 폐기물은 어디에서 처리하고, 장애인들은 어디에 발을 붙일 수 있 다는 것입니까? 나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입니다. 장애인들은 우리의 핏줄이요 형제입니 다. 또 언제 내가, 혹은 우리 가족 중에 장애인이 생길지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집단 이기주의가 어디 이 정도뿐입니까? 조금만 불이익이 있을것 같으면 모두가 피 켓을 들고 전사처럼 나섭니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혈투를벌이고, 그것으로도 안될 듯 싶으면 이제는 아이들까지 동원해가며 악을씁니다.우리의노동운동도 집단 이기주의 병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요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나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3절입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 이니이다." 니느웨가 하나님께 용서받고 바로 서는 모습이 보기 싫으니 죽여달란 말입니다. 이 얼마나 극단적인 민족 이기주의 입니까?

여러분, 민족 이기주의를 버릴 때 민족이 번영하게 됩니다. 지역 이기주의를버려야 싸움이 그치고 함께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집단 이기주의를 버려야 우리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원칙도 져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나 종군위안부에 관한 처 절한 인권유린에 관한 것들은 분명하게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미워도 그들을 위한 선교의 사역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그들이 진정으로 변화되는 것은 복음으로 그들의 심령이 거듭날 때에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민족이 세계를 품에 안는 민족이 될때, 그것이 광복의 완성입니다. 여러분, [요나]에게 니느웨는 아무 상관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피가 섞인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도움을 주는 나라도 아닙니다. 니느웨 사람들이하나님 신앙을 받아들인 것도 아닙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이요, 국가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을위협하는 적대국이었 으며, 있는 대로 죄가 가득 찬 죄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성에 하나님은 요나 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회개와 심판과 구원을 외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요나]에게 '니느웨를 품에 안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들의 죄의 문제를 네 것으로 지고 심판을 피할 길을 알려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성밖으로 나가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기다 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박 덩굴을 준비하셔서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그 박 덩굴 때문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 덩굴을 씹어 시들게 하십니다. 해가 뜨고 뜨거운 동풍이 함께 부니 그 열기에 요나의 정신이 오락가락해졌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다시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푸념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 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덩굴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 만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10~11절)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가슴으로 좁아지게 하지 마십시 다. 일본이고 미국이고 중국이고 북한이고 원칙대로 가릴 것은 가려야 하겠지만, 언제나 하 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같아야 합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세계를 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으라고 말씀하시는 나라와 민족들이 어디 이웃나라뿐 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대한민국을 축복하시고, 국력을 키워 세계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하시는 것은 세계를 품으라는 우리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프리카건 동남아 시아건 아메리카 대륙이건,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복음과 함께 도움을 주어야 할 사명 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라가 주권을 회복했다고 광복이 아닙니다. 여전히 민족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개인이기주의에 끌려 다니고 있다면 그 민족 그 사람은 아직 식민이요 노예 요 부자유한 존재인 것입니다.

신앙으로 내 안의 이기주의를 허무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내 품에 나를 필요 로 하는 이들을 품을 때 그것이 바로 '생명의 빛이 회복되는광복'입니다. 여러분의 품을 더듬어보십시오. 누구를 얼마만큼 품고 있습니까? 아직 버리지 못한 이기 심이 느껴진다면 새 마음을 주시기까지 기도로 엎드려 진정한 광복의 축복을 이루시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15가 주는 교훈/왕상12:25-32
2001-11-21 21:51:02   read : 149

금년은 광복 5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6년 전의 조국 광복의 그 감격을 우리 민족은 지금 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8.15의 의미가 퇴색되어지는 것 같아서 이 시간에는 8.15가 주는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8.15는 우리 민족에게 일제의 36년간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해방의 날이면서 세계 제2차 대전을 종결시킨 연합군의 승리의 날로 인식되어 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 성에게도 8.15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원래 유다 왕조는 통일 왕조였으나 솔로몬 이후 르 호보암의 실정으로 나라가 32도를 중심 하여 남쪽은 유대나라, 북쪽은 이스라엘로 분열되었 습니다. 그러니까 8.15는 이스라엘의 건국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는 날이며 죄악의 날이고 저주받는 날이었습니다. 이날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의 눈물로 땅을 치며 앙천 대곡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8.15가 해방의 날인 동시에 자유의 날이며 남북 분열의 날로 이날부터 38 도 이북에는 하나님 대신 유물주의로 팽창해 왔고 고통의 삶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렇다 면 8.15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⑴,민족 분열을 막아야 합니다. 북왕국 여로보암은 갑자기 얻어진 주권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자기의 왕국을 구축하고자 하 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의 중심지를 찾아 남쪽으로 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반역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 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의 백성들이 남쪽 유다로 못 가게 가로막았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가로 먹고 못 가게 한다고 하나님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남북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8.15일이 건국의 기쁜 날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같은 민족이 그때로부터 남북이 분열되는 상처의 날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간 에는 요단강을 건너서 살던 지파들과 건너지 않고 살던 지파들 간에 오랜 세월을 지나서 32 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분열되어 300년간을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한 민족은 한데 뭉쳐서 살아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일찍이 우 리 나라를 건지려고 애쓰던 애국 선열들의 표어였으며 생의 지표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갈라지기 쉬운 사람들의 마음을 이미 갈파하시고서 "항상 기도하라, 하나가 되라"고(엡 4:1-8)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도 8.15가 일제의 36년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날이면서 그 날이 바로 남북이 분열되는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 과 감격은 잠시뿐이고 외세에 의해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으며, 그후로 한 민족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남북으로 나눠져 살고 있으며, 지금은 또 동서로 나눠져서 매사에 대립 을 하며 사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는 기쁨이면 만족할 것인데 정권 싸 움으로 분열의 추태를 보였으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죄에서 해방 받은 그것 하나면 될 터인 데 교회가 분열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8.15는 민족 분 열의 날이었던 것처럼 우리 민족도 8.15는 민족 분열의 뼈아픈 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해방 된 지 56주년을 맞으면서 어떻든지 민족 분열을 막는 지혜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⑵,배금주의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건국한 후 8.15를 건국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고 국론을 통일시키기 위해 금송아지를 세워 놓고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했습니다. 그 런데 여로보암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잘못된 행위입니다. 우리 가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적인 분입시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거룩 하시며, 전지 전능하시며, 무소 부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 분을 오늘날도 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으며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의 형상 곧 비인격적인 형상으로 바꾸 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이 금 신상을 만든 것은 일종의 배금주의 행동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 다. 금송아지는 곧 배금주의를 상징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최근 들어 배금주의 사상으로 팽배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가치판단을 인격 여하에 두지 않고 월급 봉투가 얼마나 두틈 하느냐에 따르며,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얼마나 수입이 많으냐에 따라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진정한 사람되 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졸업 후 어떻게 해야 좋은 학교에 가느냐에 두고 있으며, 좋은 학교에 갈려고 하는 것은 그래야 졸업 후 취직이 잘되고 그래서 돈을 잘 벌어들 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인명은 돈보다 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돈이 생기는 일이면 사람을 죽 이면서 까지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세상이니 오늘의 세상이야말로 배금주의가 팽배한 세상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북에는 하나님은 없고 유물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남한에는 하나 님보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금송아지 사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의 현상을 보면 돈 때문에 신앙을 팔고 돈 때문에 형제간의 의리도 끊고 부자간에도 원 수가 되고 교우간에도 원수를 맺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금송아지를 하나 님으로 섬기던 여로보암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온 천하보다 사람 의 생명이 귀중한 것이니 우리는 8.15 56주년을 맞으면서 배금주의 사상의 팽창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⑶,신앙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절기 제도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중요한 규례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 권과 하나님의 형상이 바꿔지자 이제는 하나님의 준염하신 명령이 인간의 명령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 물질 중심,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 도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명령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서게 된 것이며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은 피차간에 피를 흘리는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어쩌든지 전쟁을 하지 말아 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제2차 대전의 목적은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군국주의에게 정복당한 약소민족들에게 자 유와 해방과 평화를 주기 위하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들이 전쟁을 한 것입니다. 1945년 초 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패하고 동년 8,9월에는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로 36여만 명의 희 생을 치른 후 일본이 항복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자유와 평화를 얻은 줄로 알았는데 세게는 다시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휩 싸이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지식의 발달은 인간에게 평안과 행복을 주기도 했으나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더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해설 가인 피즈 교수는 "인간은 결국 자 기를 파멸시키는 괴물을 만들고 그 앞에서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8.15의 기쁨을 만끽하던 우리 민족에게는 시대의 절망적인 고뇌와 쓴잔이 계속 찾아 왔습니다. 6.25를 통해서 조국은 초토화되었고 천만 이산가족이 생겨서 망향의 설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치가나 역사가 들은 오늘의 현실을 불안으로 보고 있으며, 종교가들은 말세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우리 이간이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와 평안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참 평화를 누리며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14:27 " 내가 너희에게 참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 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즉 세상 방법으로는 평안이나 자유 를 누릴 수 없으나 주님이 주신 신앙을 가질 때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참된 신앙을 통하여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금신으로 대치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동포여 들으라/미6:1-9
2001-11-21 21:52:33   read : 130

오늘 우리는 광복 54주년을 기 념하는 뜻깊은 주일을 맞이했습니 다.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생활은 빛을 잃고 어두움 가운데서 살던 암 흑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빛을 다시 찾게 되 었습니다. 그래서 '광복'(光復)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한 마디로 감격의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본 사람의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이 된다는 것 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 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 족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해방을 선물로 안겨 주셨 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랫동안 애굽 에서 종살이하며 너무 힘들고 어려 워서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었습니 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들의 수고를 아시고, 눈물을 보시고, 간구를 들으 셔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정치적인 구 속을 받아 부자유하게 사는 것처럼 불쌍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전에 패트릭 헨리가 남긴 말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 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오." 그렇습니다. 자유는 생명을 주고 바 꿀 정도로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비극 무슨 비 극 하여도 망국(亡國)의 비극처럼 큰 것이 없습니다. 망국민이 되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가는 곳마다 멸시와 천 대를 받습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슬 픈 것은 부모 없는 고아가 되는 것 이요, 민족으로서 가장 슬픈 것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의 유대인들을 보 세요.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600만 명이 히틀러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 은 뿌리 없는 풀과 같고 집없는 어 린아이 같습니다. 나라는 백성의 큰 집입니다. 집은 우리에게 안전한 보 금자리와 자유로운 방과 행복한 생 활을 보장해 줍니다. 집이 없을 때 우리는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조국은 우리 조상의 나라요, 부 모의 나라입니다.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기를 받은 동포들이 같은 말을 쓰고, 같은 글을 쓰고, 같은 역사를 창조해 나아갑니다. 나와 조국은 나 무와 잎사귀, 세포와 생명체의 관계 와 같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잎에 는 생명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조 국의 품에서 떠날 때 우리는 유랑민 처럼 비참해집니다. 사람들은 나라 없는 백성을 측은하게 생각하기보다 는 멸시의 눈으로 대합니다. 왜냐하 면 애국심과 용기와 단결력이 부족 했기 때문에 제 나라를 다른 나라에 빼앗겼거나 그 나라가 무너진 것이 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라 없는 백성은 동정의 대상보다는 멸시의 대상이 됩니다. 망국민은 역사의 낙 제생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남을 침략해서도 안되지만 남의 침략을 당했을 때 용감하게 국토를 지켜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모든 국민의 첫째 의무요, 기본 책임입니 다. 우리는 위대한 조국, 자랑스러운 나라, 빛나는 사회를 만들어 우리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물려주어야 합 니다. 우리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어야 합니다. 한 나라의 위대성은 무력이나, 경제나, 국토의 크기나, 인구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정신이 있는 나라가 위대한 나라입니다. 사람에게는 조국을 선택할 자유 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태어났 다는 것은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뜻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영광으로 바꾸고, 축복으로 바꾸고, 자랑과 보람의 빛으로 만들어야 합 니다. 54년전 해방의 그 날 우리에게 는 감격의 노래가 있었고, 희망의 대화가 오갔습니다. 독립의 의지가 솟구쳤고, 성실의 정신이 팽배했습 니다. 줄기찬 건설의 이상이 빛났고, 아름다운 협동의 윤리가 두터웠습니 다. 하늘과 땅에 순수의 정기가 넘 쳤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맑은 새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모두가 역사 적 새 출발의 감격과 정열과 희망이 벅찼습니다. 우리의 입에는 즐거운 노래가 있었고 우리의 가슴에는 아 름다운 기원이 서리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상에는 부푼 희망이 있었 고, 우리의 행동에는 줄기찬 생명력 이 약동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외부의 세 력에 의해 국토가 양단 되는 비극을 안게 되었고, 동족상잔의 6.25 참변 을 겪게 되었습니다. 혁명의 진통을 치르고 군사 독재의 어두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50여년을 보내게 되었 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입에서는 많은 노래가 사라졌고, 우리의 가슴 에서는 아름다운 기도가 없어졌습니 다. 우리의 대화는 불신의 말로 가 득하게 되었고, 우리의 풍토는 부정 과 부패의 탁류로 화해 버렸습니다. 민족의 정기는 사죄와 파쟁으로 흐 려졌고, 우리의 생활은 좌절과 파탄 에 직면했습니다. 낭비와 허영의 망 국병이 우리 사회의 골수까지 깊이 침투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미래에 대한 비전 을 잃고 건설에 대한 의욕이 희박해 졌습니다. 역사의 폭풍 속에서 정신 을 차리지 못하고 좌표와 방향을 상 실한 채 허덕이고 있습니다. 권력과 금력, 소위 정경이 유착해서 나라의 경제를 말아먹고 민생고에 신음하는 근로 대중의 처절한 신음 소리가 민 족의 고막을 슬프게 두드리고 있습 니다. 우리 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 어서고 있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 니 남의 나라 빚 얻어다가 그 동안 흥청거리며 산 꼴이 되었으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손꼽히는 기업마 다 수조 원씩의 빚을 지고 있어 자 기 자본으로 갚을 형편 못되어 국가 에서 소위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 는데 그 공적자금이라는 것이 결국 은 국민의 혈세가 아닙니까? 이제 그것마저 바닥이 나게 되었다니 어 떻게 해야 됩니까? 국제 금융 기구 의 도움을 받으면서 빈익빈 부익부 의 현상이 심해져서 국민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 정치 지도자들은 그것 에 아랑곳없이 서로의 당리당략을 위해서 싸움만 계속해서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처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 사의 전철과 과오를 다시 밟지 않는 총명과 예지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의 창부가 된 우리에게는 오직 진지 한 반성이 요구되고, 역사의 탕아로 전락한 우리에게는 다만 엄숙한 참 회가 필요합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50년이면 이 강산 이 적어도 다섯 번은 변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 50년 동 안 세계는 전진하고 비약했는데 우 리 나라 이 민족의 의식은 좌절과 공전 속에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여러분, 비슷한 운명에 놓였던 이스라엘을 보세요. 1948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독립한 이스라엘은 메마른 사막을 싱싱한 농원으로 바 꿔 놓은 이스라엘의 기적을 낳았습 니다. 2,000년 동안 조국을 잃어버리 고 온갖 침략과 박해 속에 세계를 떠돌아다니던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잃었던 옛 터전에 새로 운 국가를 다시 세웠습니다. 세계 각국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의 건설을 위해서 피땀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1948년 5월 14 일 드디어 독립을 선언했고 2,000년 만에 나라를 다시 찾은 것입니다. 히틀러의 학정 하에서 피살된 600만의 동포를 눈물 속에서 기념하 며 그들은 600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습니다. 2000년 동안 죽은 말로 되어 버렸던 구약 성경의 히브리말 을 정식 국어로 채용했고, 이스라엘 의 정신을 부활시켰습니다. 건설과 전진의 정열과 사명감이 그들의 정 신과 생활을 지배했습니다. 단결의 철학이 탄생했고, 창조의 윤리가 솟 아났습니다. 유대인은 불사조의 민 족이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신앙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들은 문 자 그대로 시온의 영광을 다시 찾았 습니다. 과거의 박해는 현재의 승리 로 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서 울시보다 인구가 적은 나라지만 세 계 각국에 흩어져 큰 일을 하고 있 고, 세계 초대강국인 미국에서 정치, 경제를 주도하고 있으며, 의료계, 법 조계, 학계에서 요긴한 위치를 차지 하고,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놀라운 기적 의 밑바닥에는 건실한 이상주의의 철학이 깔려 있고, 굳은 정신적 신 념의 주춧돌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 다. 해방 후 50년 동안 이스라엘은 일어났습니다. 독일은 또한 통일되 고 부흥했습니다. 패전의 폐허와 잿 더미 속에서 게르만 정신은 또 다시 살아났습니다. 현해탄 건너 패망했 던 일본도 다시 일어나 자본주의의 상품을 가지고 세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고, 군사적으로도 아시아의 방위를 책임지는 자리에 이르게 되 었습니다. 중국은 중국대로 사회주 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실리주의 정책을 써서 세계 경제대국으로 부 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현실입니 다. 러시아 역시 지난날의 공산주의 가 얼마나 잘못되었던 것인지를 뼈 아프게 느끼고 자유주의 사상에 근 거한 새 나라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해방 후 50년 동안에 모두 일어 섰는데 우리는 6.25로 치명적 결정 타를 맞았고, 정치의 혼란으로 사회 적 비극만 계속되어 왔습니다. 역사 의 수레바퀴는 50여년 동안 혼돈과 침체 속에 공전해 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거센 격류 속에 서 있 습니다. 우리의 사회적 여건은 여전 히 어렵고 역사적 상황은 불투명합 니다. 우리에게 확고한 민족적 주체 성이 서지 못하면 우리는 역사의 사 나운 격류 속에 떠내려가기가 쉽습 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는 우리의 힘 으로 서고,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려 는 자주정신이 필요합니다. 남의 힘 을 믿고 남의 힘을 의지해서 살려는 것은 노예 정신입니다. 세상에 무엇 이 슬프다 슬프다 하여도 마음이 죽 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습니다. 스 스로 인생의 패배자라고 믿는다면 그는 정말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마 는 것입니다. 나는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면 그는 정말 인 생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 역사의 낙제생이라고 생각해서 비굴하게 살면 우리는 정말 역사의 수치스러운 낙제생으로 전락해 버리 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의 우등생이라고 스스로 굳게 자부하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역사의 우등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 죽으면 모든 것이 죽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의 주체 정신이 생 생하게 살아서 힘차게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살았는가 죽었는가를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 니다. 우리는 자주의 나무를 심고, 독립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조의 불굴의 정신을 가슴속에 지녀야 합니다. 굴종과 비 하의 예속 정신을 버리고, 독립과 자존의 자주 정신으로 새로운 정신 풍토를 건설해야 합니다. 해방 직후 우리 사회에는 아름 다운 신의의 질서가 있었습니다. 서 로가 믿고 신뢰했었습니다. 회의의 언어가 없었고, 불신의 대화가 없었 습니다. 말에는 거짓이 없었고 행동 에는 속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 늘 우리 사회는 극도의 불신 사회로 전락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존경하는 말보다 모욕하는 말이, 칭 찬하는 말보다 저주하는 말이 성행 하는 것은 사회적 상호 불신의 구체 적 표현입니다. 특히 정치인 사회에 불신의 악덕이 심합니다. 위정자는 번의를 예사로 생각하고, 국민에 대 한 식언을 아무렇게도 여기지 않습 니다. 나라 살림살이의 중책을 맡은 위정자에게서 정직의 덕을 찾아볼 수가 없고, 신의의 언어를 들을 수 가 없고, 성실의 정신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거짓이 몸에 배었 고, 불신이 생리화했고, 속임수를 생 활의 신조로 삼은 것 같은 인상이 들 때마저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회는 서로 믿을 수 있는 사회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회는 서로 믿을 수 없는 사회입니 다. 성실은 대인 관계의 기본 질서 요, 신의는 사회생활의 기본 원리입 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성실의 도덕과 신의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어야 합 니다. 마귀의 말은 믿을 수 없어도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어야 합니 다. 신의의 터전이 없을 때 정치의 안정도, 경제의 번영도 바랄 수가 없습니다. 도둑놈들이 손발이 맞아 서 도둑질을 해도 최소한도의 상호 신의는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공명 한 민주 사회 건설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의는 사회 를 흥하게 하고 불신은 사회를 망하 게 합니다. 이것은 인간 역사의 엄 연한 경험적 진리입니다. 우리는 일 찍이 불신 사회가 번영하는 예를 보 지 못했고, 신의 사회가 쇠망하는 경우도 보지 못했습니다. 한 개인이 사회에서 공신력을 잃으면 발붙이고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한 민족이 국제 사회에서 공신력을 잃어버리면 독립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 대 개인이나, 국가 대 국 가의 관계에서나 신의는 언제나 지 켜야 할 기본 질서입니다. 성실은 도덕의 핵심이요, 신의는 윤리의 기 본입니다. 허위와 불신은 불행과 멸 망의 원리요, 성실과 신의는 행복과 번영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 를 굳게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어떻게 신의의 사 회에서 불신의 사회로 전락했습니 까? 그 책임은 온 국민이 져야 하지 만 특별히 위정자들의 책임이 크다 는 사실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 다. 과거 자유당 말기의 부정 선거 와 부패 정치는 이 땅에 불신의 씨 를 뿌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 사 회가 불신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는 것은 우리 사회의 큰 비극이 아 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근본적으로 바로 잡는 길은 신의의 질서를 재건하는 일입니다. 불신과 부패를 제거하고 신의와 공정의 사회를 건설하는 일 은 우리 민족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8.15 해방 이후 온 국민 의 가슴속에 깊이 메아리치며 서로 믿고 지내던 이 아름다운 신의의 질 서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신 의 악을 깨끗이 불살라 버려야 합니 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의 말대로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게 해야 우리 가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국민은 훌륭합니다. 우리 국민은 건강합니다. 이번 수재 민을 돕기 위해 며칠 동안에 천만에 가까운 국민이 ARS를 통해 참여하 는 것을 볼 때 정말 착한 국민인 것 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잘 참고 견디는 국 민을 우롱하는 것은 위정자들입니 다. 학부형에게 15만원 받았다고 구 속하면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 은 수백억 원을 받아도 떡 값이니, 관행이니, 대가성 없는 정치자금이 라고 해서 넘어가는 이 사회, 이것 이 공평무사한 법질서가 운영되는 민주 사회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습 니까? 이제 우리는 부패 불감증 환 자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래서 밖에서는 우리 나라를 부패 공 화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붙 여 주지 않았습니까? 부끄러운 일입 니다. 가슴아픈 일입니다. 이런 대접 을 받고도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이 민족을 이런 처지까지 전락시켜 버린 사람들이여, 깊이 회개해야 합 니다. 참회와 반성과 개혁으로 성실 과 공정의 새 인간으로 돌아가야 합 니다. 오늘 우리의 정치는 국민의 혈 세를 받아 과연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고 있습니까? 이 사회를 부익부 빈익빈의 비극적인 사회로 몰아넣고 있는 자가 누구십니까? 로버트 오웬 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치의 목 적은 통치하는 자와 통치 당하는 자 를 행복하게 하는데 있다." 옳은 말 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새로운 질서 가 요구됩니다. 우리의 경제 풍토에 서 빈곤과 사치를 몰아내고 생산 의 욕과 건전한 기업 윤리를 확립해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 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기업하시 는 분들에게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부채를 낳고 부채가 장성 하면 부도를 낳습니다." 왕성한 의 욕으로 기업을 확대시키는데 자기 자본 가지고 하는 데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내 자본은 없이 외부의 빚을 가지고 하다가 감당 못하니 결 국 당하는 것은 국민이 아닙니까? 이 착한 국민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 까? 부지런히 일한 것밖에 없는데 왜 이런 부담을 안아야 합니까? 과거 우리 나라의 재벌이라는 분들이 장사를 자본과 기술로 하지 아니하고 정치적으로 했으니 장사가 됩니까? 그래서 지금 남은 것이 무 엇입니까? 빚밖에 더 있습니까? 이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책임질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일은 몇 사람이 저질러 놓고 국민에게 책 임지라니 이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우리에게 두 가지 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에 맞지 않는 망국적인 사치와 향락과 허영 그리고 과소비의 사회악을 몰아내야 만 합니다. 우리가 이 일을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습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분을 알고 자기의 분을 지키는 것입 니다. 사람이 자기의 분을 지킬 때 건전하고 번영합니다. 자기의 분을 모르고 자기의 분을 넘을 때 병이 들고 파멸이 오는 것입니다. 제 분 을 모르고 제 분을 넘을 때 오만과 불손의 병에 걸립니다.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이여, 부족한 것이 감히 말씀드립니다. 각 자 자기 분에 맞지 않은 소비, 자기 분에 맞지 않는 향락, 자기 분에 맞 지 않는 사치, 자기 분에 넘치는 사 업 확장, 자기 분에 맞지 않는 생활 은 버립시다. 이 모두는 쇠망과 파 멸로 통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의 경제 풍토에 건전하고 합리적인 기업 윤리를 세워야 합니다. 사회의 부를 소유하는 자본가들 은 부의 사회적 책임을 알고 옳게 사용하는 윤리를 가져야 합니다. 돈 은 내 것이 아니고 관리하는 것입니 다. 돈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맡은 사람, 청지기로서 일해야 합니다. 여 기서 떠날 때 우리 사회는 불합리하 고 무궤도한 사리사욕의 각축장으로 화하고 말 것입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이 협잡하 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을 모으는 사람은 부정과 협잡으 로가 아니라 노력하고 수고해서 정 당하게 돈을 벌어야 합니다. 오늘 같은 사회 풍토에서는 젊은 사람들 이 성실하게 창의성을 살리며 일하 고 싶은 의욕을 잃어버릴 정도가 아 닙니까? 그러니 늘어나는 것은 사기 범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누구를 원 망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정죄하 고 비난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대로라면 이 민족의 앞날이 너무 어두워서 외치는 것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미가서 6장 8절 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 하나님 께 나아가는 이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번제나 잘 드리 면 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 주신 말씀은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 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의식보다 그 의식 을 행하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더 중하게 여기십니다. 예물을 드릴 때 도 하나님은 예물 자체보다 예물을 드리는 이의 마음과 생활을 보십니 다. 그리고 올바른 윤리 생활을 원 하십니다. 공의가 행해져야 합니다. 산업 사회를 예를 들자면 일한 만큼 임금을 지불해야 되고, 받은 임금만 큼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이 같은 대우를 받 습니까? 여당과 야당이 같은 대우를 받습니까? 국회의원과 평민이 대통 령 아들과 보통 사람의 아들이 같은 대우를 받습니까? 부정 부패라는 말 이 왜 생깁니까? 결국 공의가 돈이 나 권력에 의해서 흩어진다는 말 아 닙니까?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복을 받 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사회, 민족,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도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의를 구해야 평화도 번영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 다. 이사야 32장 17절에 "의의 공효 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 안과 안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의 는 평화와 번영의 조건입니다. 그래 서 잠언 14장 34절에 보면 "의는 나 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 되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정 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 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직 공의 가 우리 나라 어디나 하수같이 흘러 서 어느 사회, 어느 단체, 어느 기관 이나 공의롭게 운영되어서 우리 나 라가 축복을 받고, 민주국가도 발전 할 뿐더러 오늘 우리에게 행복을 가 져오며, 우리 자손 만대에 복이 되 기를 바랍니다.




참 자유함이 있는 곳/고후3:12-18
2001-11-21 21:53:52   read : 194

봅 바틀렛이라고 하는 탐험가가 경험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아주 희귀한 새 몇 마리를 얻었습니다. 이것을 새장에 가두어 가지고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이릅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에 이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굴면서 새장에 갇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고 머리를 찧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새장에서 계속 푸덕푸덕 푸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몸부림을 치고 열광을 하니까 결국은 새장 문이 열렸습니다. 새는 망망한 대해 한 가운데로 도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새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창공을 높이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새장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에 이 봅 바틀렛씨는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렇게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배로 돌아와서 날개의 힘이 지쳐 가지고 그 갑판 위에 그냥 툭 떨어져서 쓰러지는 거예요. 저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날아올랐는데 망망대해에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물론 먹을 것도 없습니다. 죽기 살기로 이 배를 향해서 다시 돌아온 겁니다. 온 힘을 다해서 돌아와서, 간신히 돌아와서 갑판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주어 담아서 다시 새장에 집어넣었습니다. 더 이상 이 새장은 그들에게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새장은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끝없는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 새장에 있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고 편안하게 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새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선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 자유가 무엇입니까? 알면 자유요 모르면 필연입니다. 알면 은총이요 모르면 숙명입니다. 내가 처한 처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에 이것이 무슨 뜻이 있는지를 알면 그 어느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거기에 행복도 있습니다. 푸른 창공을 날아간다고 해서 자유인인 건 아닙니다. 참 자유의 의미,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토마스 H. 그룸(Thomas H. Groome)이라고 하는 미국의 교육학자의 저서 가운데 Christian Religious Education 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안에서 그는 세 가지 자유를 말합니다. 자유의 유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유가 뭐냐하면 합리적 사유의 자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자유. 여러분 이 자유를 물리적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만은 육체적으로, 그런 건 아닙니다.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자유는 생각의 자유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생각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내 과거, 계속 나를 어지럽히고 뒤따라 다닙니다. 내 악몽, 억울했던 한이 있고 또 지금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그 생각은 그 어디에 있든지 자유롭지 못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많은 근심과 걱정이 매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걱정처럼 불필요한 게 없습니다. 걱정하고 나면 잠도 못 자고, 몸도 해롭고, 결국엔 감성이 약해져서 좀 짜증도 나고, 백해무익한 것이 걱정입니다. 자 그래도 걱정 안 하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건 생각의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끔 교양서적을 읽습니다. 책에 보면서 요새는 플러스발상 이라는 얘기, 창조적인 생각을 해야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모든 일은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망조가 든다 이거예요.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생각하라고 강조합니다. 아, 말을 하라면 잘 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지 못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좋을 줄 누가 모르나. 안 되는 걸 어떡하노. 잊어버려야 될 것을 잊지 못하고 내 생각이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생각 자체가 지금 무엇인가 꽉 붙들려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은 생각이 문제예요. 자, 여러분 은총을 알면 자유롭습니다.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으면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곳에 있는 줄 알면 나는 자유롭습니다 만은 왜 그런지 나는 어디론가 자꾸 이렇게 빠져 들어가고 있고 끌려가고 있습니다. 생각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성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각의 근원이 되는 기능, 이성이 자유롭지 못해요. 병들었어요. 합리적 사유를 못합니다. 진리 안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병든 이성이에요. 그래서 생각 자체가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는 가책에 매이기도 하고 유감스러운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는 아니 될 것인데' 하는 많은 후회가 있습니다. 여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신문을 보셨겠습니다 만은 바로 지난 10일에 미국의 현직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4500명이나 되는 많은 목사님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르윈스키 스캔들로 말미암아 하원의 탄핵을 받은 지 일년 반만에 된 일입니다. 탄핵을 받고 하원에서 한시간 동안 연설을 하는 그 장면을, 마침 제가 미국에 갔던 때에요, 텔레비로 유심히 지켜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분이라고 그렇게 느꼈었습니다. 이제 일년 반만에 4500명의 목사님들 앞에서 진실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남을 용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내가 전 세계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지지해주신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원이 나를 탄핵했습니다. 탄핵해서 처음에는 괴로웠습니다 만은 오히려 그 탄핵으로 인해서 나는 자유롭게 됐고 이래서 저는 그분들에게 오히려 감사를 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온 몸을 휩싸는 감사의 느낌을 갖습니다. 내가 철저히 무너지지 않았다면 100% 진지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숨길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바로 그 때에 내가 해야할 일을 하는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주 투명하게 아무 것도 숨기는 것이 없어요. 그 때 가서 비로소 참 자유를 누릴 수가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양심, 여러분의 이성, 여러분의 생각은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진실로 정직하고,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이 창공을 날으는 거 같은 그러한 상태가 될 때, 그러한 영적인 상태에서만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택의 자유를 말합니다. 선택과 의지의 자유. 우리가 어떤 때에 우리는 자유 의지로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깨끗한 양심을 따라, 신앙을 따라,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선택하느냐? 아니면 이권을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고 뭐 다음 일을 생각하고, 잡스러운 생각이 우리 마음을 붙들고 거기서 결정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들의 결혼이 있지요. 그 혼사 문제가 있지요. 순수하게 신앙과 그 인격을 보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간간이 보면 이 분과 사돈 맺으면 장사가 잘 되고, 이 분과 어떻게 관계가 되면은 그 다음에 출세에 도움이 되고. 이 지저분한 생각들 때문에 판단이 흐려집니다. 선택이 빗나가요. 여러분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어요.
또 한 가지는 행동의지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무엇엔가 또 끌리거든요. 이게 자유롭지를 못해요.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많은 책임, 또 나의 나약함, 그래 의롭지 못한 도덕성, 이런 것들 때문에 행동이 깨끗하질 못해요. 과감하지 못해요. 담대하지 못해요. 행동의지의 자유가 없습니다. 이걸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영국에 '브리테니카'라고 하는 요트가 있는데 이것은 영국 여왕이 애용하는 요트입니다. 이런 화려한 배가 있는데 이 배를 몰고 나갑니다. 선장과 거기에 있는 선원들까지도 의기양양합니다. '이건 여왕을 태운 배다. 이 배는 가장 존경을 받는, 또 막을 수 없는, 높은, 지체 높은 배다' 그리 생각을 하고 배를 몰고 나갑니다. 망망대해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안개가 끼기 시작을 합니다. 캄캄해집니다. 아무도 안 보이는데 저 앞에 불빛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선장이 점점 가까워 오는 불빛을 보면서 호령을 했습니다. "비켜라. 이건 브리테니카호다. 여왕님이 탄 배다. 건방지게 어딜 가까이 오느냐. 비켜!" 그리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점점 가까이 왔어요. 부딪칠 지경이 됐습니다. 그 불빛 속에서 이쪽을 향해 소리지르는데 "야 이 미친놈아, 나는 등대다" 그러더랍니다. 누가 비켜가야 되겠습니까. 내가 큰소리 친다고 이게 되는 겁니까? 우리의 자유, 이것은 제한되어야 합니다. 내 잘못된 이성, 잘못된 욕심, 잘못된 판단, 여기에다가 무제한 자유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은 자유하지 못합니다. 물질, 환경,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이 자유하지 못하다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수건이 쓰여져 있다. 뭔가 쓰였어요. 그래 자유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또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도 없고, 이성과 감성의지가 다 병들었기 때문에 결코 자유하지 못한다.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진다 그랬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 영이 자유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는 곧 영이시다는 말씀이 있는데 '호큐리오스 토프뉴마 에스팀' 이건 유명한 요절입니다. 성령론에 있어서 이 요절은 대단히 중요한 요절로 늘 여기에 증거가 되고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는 영이시다' 라고 할 때 신학자들은 한 단어를 추가해서 해석합니다. 주는 지금 영이시다. 주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육체적 시간 공간의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이십니다. 그런고로 무한한 자유,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다. 그 영적 존재에 대한 속성을 설명해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이 자유문제는 정신 문제요, 가치의 문제요, 세계관 문제요, 영적 문제입니다. 이건 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는 8·15 해방 이후로 50년 동안 자유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8·15 해방되는 그 날 날씨가 좋았습니다. 몹시 더웠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박치순 목사님께서 저희 집에 찾아 오셨습니다. 제 할아버지 연세 높으신, 교회의 어른이신 장로님을 찾아 오셔서 "우리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하고 둘이 부둥켜안고 그렇게 우는 것을 제가 어렸을 때 보았습니다.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해방을 맞았다. 자유를 얻었다고 그럽니다. 그래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나. 그랬습니다. 한달 동안 아무도 일 한 사람 없습니다. 마침 그때 공출해 가지고 쌓아놓은 곡식이 많이 있었어요. 소도 있었어요. 군인들에게 준다고 소를 다 공출해 놓은 게 있었는데 이거를 그냥 잡고 해서요 한달 내내 잔치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사실 시골에서 어쩌다가 소고기 못 먹습니다. 일년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했는데 좌우간 제 기억으로 코에서 누린내가 나게 먹었습니다. 이대로 영원히 되는 줄 알았더니, 이대로 자유롭게 사는 줄 알았는데 왠걸요. 계속 문제에 부딪히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도대체 자유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무엇이 자유였다는 얘기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해방을 맞은 겁니까? 여러분 깊이 생각할 문제올시다. 자유에 대해서 이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쯤은 알만합니다. 아직도 그 뜻을 몰라서 스스로도 불행하고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방종은 자유가 아닙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집을 나가 사는 모든 생활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건 무서운 속박입니다. 아버지 집에 돌아올 때까지는 절대로 자유인이 아닙니다. 32절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직 진리가 진리를 떠날 때 거기에 자유 없습니다. 36절에 보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들이 자유케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해 주실 때,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될 때 성령은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서. 그런고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그 사랑을 확증 받을 때 거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오로지 거기에만. 유명한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Justice and Freedom in Society" 라고 하는 책에서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께 얽매일 때 비로소 자유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유의 역설을 말합니다. Paradox, 역설을 말합니다. 여러분, 사랑의 노예가 될 때 자유롭고, 진리의 노예가 될 때 자유롭고, 여러분 은총에, 하나님의 은총에 사로잡힐 때 거기에 자유가 있는 겁니다. 이건 정치도, 물질도, 지위도, 건강도,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배웁니다.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사랑이요, 용서요, 희생이요, 겸손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고 그 영이 있는 곳에 오로지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참 자유를 알고, 참 자유를 지키고, 그 자유 안에서 참으로 주의 은혜를 감사할 때 생명력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고,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올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 기도
자비하신 주여,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직도 회개하지 아니한 죄가 있어서 우리는 자유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참 자유의 뜻을 모르기에 그 자유를 지켜가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의 영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시고 온전한 자유를 누릴뿐더러 많은 속박에서 시달리는 우리의 귀한 주의 백성들을 자유케 할 수 있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영에 온전히 사로잡히고 충만함을 입어서 온전한 자유인으로서의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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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애국/롬9:1-5
2001-11-21 21:54:52   read : 229

오늘은 우리 민족이 36년간 일제의 억압과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된지 54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광복주일이다. 1945년 8.15가 주일이었는데 금년에도 주일이어서 더욱 우리의 마음에 감회가 깊다.
세상에 나라를 잃고 망국백성이 되는 것처럼 슬프고 비참한 일이 없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일제 식민지 생활에서 뼈저리게 체험했다. 나라 잃은 백성은 마치 부모없는 고아와 같다. 우리가 해외에 나와 살아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속한 민족공동체와 모국이 잘되고 번영하며 부강해야 사람 대접을 받게 된다. 그 점에서 로마서 9장 말씀을 중심으로 바울의 민족정신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한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 공동체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며 동족에 대해 얼마나 고통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1)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하였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는 것이 독립운동을 하고 정치활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한 시민으로서 자기 맡은 일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애국이다. 학생은 정직하고 진실하게 학업에 열중하므로 자기 실력을 쌓아가는 것, 제품을 만드는 사람은 참 한국의 기술은 세계에서 최고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품질좋은 상품을 만드는 것, 상인은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업을 하며 친절하게 손님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애국이다. 운동선수는 운동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좋은 스포츠맨 쉽을 보여주는 것이 곧 나라를 빛내는 길이 된다. 박세리, 박찬호, 선동렬 그들이 체육을 통해 얼마나 나라를 빛내고 있는가? 우리가 반드시 정치를 해야 애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가들이 정치를 한다면서 자기의 이권을 생각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일하므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사회를 위기로 몰아가며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할 때가 많다.
오늘 우리 민족과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진실성의 결여이다. 이 진실성이 사라질 때 서로 믿을 수 없게 되고 신뢰할 수 없는 불신사회를 만들어 놓게 된다. 진실성이 결여될 때 거기서 사기 횡령이 시작되고 부정부패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 개혁을 그렇게 외치고 있지만 왜 개혁이 안되는 것인가? 먼저 위에 있는 지도자들이 정직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고 한번 약속한 것은 목숨이 달아나도 지키는 진실성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데서 모든 문제가 야기된다.

2) 바울은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두 가지 근심을 말한 적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서 회개를 통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이루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으로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고후 7:10). 바울이 근심하고 고통하고 있는 것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했다. 이 말은 갈수록 더 커지는 고통을 의미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고통이 있다. 그 사람의 고통을 보아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고통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평면적 고통, 다른 하나는 입체적 고통이다.
평면적 고통은 돈없는 고통, 집없는 고통, 애인없는 고통 등이다. 그러나 입체적 고통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민족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 하는 차원이 높은 고민이다.

3)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 했다.
여기서 동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많은 분들이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나 이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 된 이해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참 신앙인은 자기가 속한 민족공동체나 국가에 대해 뜨거운 애국 애족의 정신이 있었던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2장 32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리면서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했다. 참 얼마나 동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는가? 바울은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긍지와 자부심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통로였다(출 4:22, 신 14:1, 호 11:1).
물론 그리스도인은 국가 지상주의자는 아니다. 국가 지상주의는 오히려 나라를 망치는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 했는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도 이런 많은 축복을 주셨지만 그것을 바로 간수하고 닦고 개발해 가지 못함으로 우리는 비웃음과 부끄러움을 당하는 백성이 되지 않았는지 살펴 봐야겠다. 회개하고 고치며 치유받을 것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나가 치유함을 받아야겠다.

역대하 7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치유받을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다.

(1) 악한 길에서 떠나 회개함으로 고침받을 수 있다.
창 3장17절에 보면 '땅은 너를 인하여 저주를 받고' 했다. 우리 조상 아담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범하므로 땅은 저주를 받아 오염되고 황폐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 방법대로 순리로 살아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2) 스스로 겸비하여 (14절 중)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겸손해야 한다. 자기를 낮추고 교만을 버려야 한다.

(3)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했다.
한 개인이나 국가나 민족이 잘 살려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축복을 하셔야 한다. 시편 33편 12절에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다'고 했다.






8.15 해방과 애국/사48:10,잠14:34
2001-11-21 21:55:34   read : 265

오늘은 8.15 해방을 맞이 한지 54번째 되는 날입니다. 36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고통과 슬픔을 당하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나라를 되찾은 날입니다. 그 기쁨도 채 가시기 전에 6.25동란이란 처참한 전쟁을 치르며 이 나라가 폐허가 되고 거지처럼 가난하여 세계에 손벌리고 얻어먹던 나라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 만큼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를 향하여 선교하는 나라가 된 것을 생각하면 무엇으로 다 감사하고 찬송할지 알 수 없습니다. 36년 동안이나 국토를 빼앗기고 말도 빼앗기고 성도, 이름도 빼앗겼다가 다시 찾게 된 것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계시고 6.25때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으나 기적적으로 UN 군이 상륙하여 공산군을 몰아내고 이만큼 부강한 나라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말세에 마지막 주자로 선교하는 민족으로 쓰시기 위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한국의 사명

세계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과 민족을 들어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말세지말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제사장 나라요, 선교의 사명을 부여받은 나라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봅시다.
① 한국은 고난으로 연단 받은 나라입니다.
이사야 48장 10절에 "보라 내가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은 많은 고난으로 연단 받은 나라를 들어 쓰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의 생에를 보십시오.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세계 어느 나라 보다 고난을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한국은 5,000년 동안 수많은 외적의 침략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였고 일본에게 36년 동안 온갖 핍박과 고난과 슬픔을 당하면서도 나라가 망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은 사상 그 유례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이었습니다.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지만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말세에 하나님이 쓰시려는 섭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② 한국은 약소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소 민족을 택하여 쓰십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우리 한국의 국토 3분의 1 만큼도 안돼는 약소민족이요 인구 몇백만 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은 크고 강대한 나라에 영적 사명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선택하시는 것도 멸시받고, 비천하고, 가난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자를 들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
③ 한국은 신앙이 돈독한 나라입니다.
세계 선교 여행을 다녀보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힌두교, 모슬렘교, 불교와 짬뽕이 되어서 예수 믿는다는 교회가 참 많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한국교회 만큼 말씀의 기초 위에 서서 제대로 믿고, 제대로 기도하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게다가 인도는 8억의 인구를 가졌지만 힌두교 국가로, 마귀로 꽉 찬 나라이며, 중국은 12억의 인구를 가졌지만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이고 인도네시아는 1억의 인구를 가졌으나 모슬렘 국가나 다름이 없고, 일본도 경제력이 있어 보이지만 800만가지 귀신을 섬기고 기독교인은 영점 몇 퍼센트도 안돼는 귀신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100여년 만에 25% 이상의 신자를 가진 나라입니다.
한국에 신학교가 너무 많고 목사, 신학생이 너무 많다고 비난을 받지만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에도 마음놓고 선교할 수 있게 되면, 그 많은 목사, 신학생도 모자르게 될 것입니다.
④ 한국은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 부흥의 씨앗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를 들어 쓰십니다. 시편 79편 10절에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중에 알리소서"라고 했습니다.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를 열방중에 알리시는 하나님입니다. 대원군 때에도 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왜정 때에도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많이 순교했습니다. 6.25때에는 535명의 목사와 셀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말세에 들어 쓰십니다.
⑤ 한국은 기도를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매일 새벽기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떡 먹듯이 하는 교회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한국처럼 기도원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시편 50편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도의 영을 부어 주셔야 됩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개인이나, 교회나, 기도하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⑥ 한국은 복음의 열매를 잘 맺는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21장 4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탄생한 나라이지만 2,000년 동안 복음을 빼앗기고 복음은 로마를 거쳐 독일과 영국으로 왔고 그 후 미국을 거쳐 아시아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한국만큼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영성이 잘 발달한 나라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만큼 성령 충만한 나라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교회만 해도 1971년에 100명에 불과 했으나 이제 머지않아 10만 명에 도달할 것입니다.
⑦ 한국은 셈족의 후예입니다.
창세기 9장 26절에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에게 각각 축복과 저주를 내렸는데 셈에게는 영적인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함은 종의 종이 되는 흑인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은 백인의 조상이 되어 물질의 축복을 받아 창대케 되었습니다.
⑧ 한국은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찾는 나라입니다.
신에 대한 명칭 가운데 한국의 "하나님" 처럼 성경 적인 칭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즉 유일신을 의미하고 "한" 은 "크신 분, 위대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범신론적인 이름이지 기독교적인 칭호가 아닙니다. "하늘님" 즉 막연하게 범신론적 의미가 들어있으므로 "하느님" 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 선민 이스라엘의 풍습과 사상과 같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 일찍이 이런 예언적인 시를 읊었습니다.
"오! 코리아여! 그대 옛날에 아시아의 황금시절에 밝은 등불의 하나였도다.
이제 그대 등불 다시 밝여라. 그대 온 동방을 비치는 밝은 등불이 되리라"
우리 주위의 여러 나라가 공산화되는데도 지리적으로 가장 취약한 한국은 공산화되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으려면

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대 로마 제국은 외부적인 조건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소돔 고모라성은 의인 10명도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해 없어 졌습니다. 잠언 14장 34절에 "의는 나라도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신실하고 정직한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덴마크 나라는 인구 500만에 작은 돌작밭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이지만 지상 낙원이라 할만큼 잘 사는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그 국민은 정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그 나라 제품은 시험해 볼 것도 없이 믿고 잘 사갑니다. 여행하다가 물건을 놓고 와도 틀림없이 찾아줍니다. 우리 나라도 정직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준법정신입니다. 선진국민은 준법 정신이 강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탈세라면 큰 죄로 여깁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신자들도 탈세할 수만 있다면 한다고 놀랍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고의를 행하면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했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 중에 하나도 없어서 멸망시켰다는 말씀입니다.
② 책임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위대한 성도들이나 위대한 민족이나 국가는 모두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나라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1-3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 땅에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는 발발하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이 민족을 사랑하여 IMF의 채찍으로 징계하심을 깨닫고 온 국민이 각성하도록 기도하고 따라서 무역 흑자가 계속 되어 외채를 갚고 IMF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고 따라서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겠고, 또한 부정 부패가 없어지고 공의가 춤을 추고, 진리가 소리 높여 노래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없어지는 나라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③ 구령사업에 힘쓰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가 부흥하고 국내 복음화와 해외선교에 힘쓰는 나라가 될 때 그 나라는 번영하고 복 받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구라파가 기독교 인구가 그렇게 많으면서도 선교에 힘쓰지 않을 때 바이킹족, 해적들의 침략을 받아 그들에게 끌려간 부녀자들이 전도해서 예수 믿고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이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같은 나라들입니다. 재정 러시아에 그렇게 기독교 인구가 많았지만 안일주의에 빠질 때, 공산주의라는 몽둥이로 두드려 부서져 비참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한 맺힌 소원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하나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조지 화이트필드는 "주여,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을 가져가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으며,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장은 성령세계를 받고 열심히 선교하여 그 모라비안 교도들이 20년 동안 선교 사업한 것이 큰 교단이 200년 동안 한 일보다 더 컸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복음이 필요한 나르는 다 내 나라이다"고 했고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어디서나, 언제나 영혼구원"이라고 표어를 가지고 쉴새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후예들에게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그러므로 이 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일로 쓰임 받도록 하시오. 보시오 당신이 얼마나 설교했느냐, 또는 얼마나 많은 일에 관심을 가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최선을 다해 영혼을 구원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데려와 회개케 하시고" 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구원하기까지 했습니다. 영혼 구원에 힘쓰는 개인, 교회, 국가를 축복하십니다.




유월절과 광복절/고전5:4-8
2001-11-21 21:56:07   read : 197

유월절과 우리의 광복절을 비교하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유월절이 애굽의 400여 년 압제로부터 해방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념일이라 면, 광복절은 우리 나라가 일제 3간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공통되는 말은 '해방'입니다. 쓰라린 아픔을 벗게 해주셨습니다. 먼저 어원부터 찾아보면 '유월'은 영어로 '넘어간다'(passover) 혹은 다른 말로 '지나간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더 깊은 뜻은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생활은 한마디로 노예생활이었습니다. 인권이 유린되었고 자유라곤 '일하는 자유'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들을 불쌍히 보신 분은 야웨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출 3 : 1-12), 그는 처음에 사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이 우둔하였고 용기가 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게 그를 부르셨고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소명'을 받았으며, 바로 왕에게로 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바로는 강퍅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재앙을 내릴 때마다 듣는 척 하다가 역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10번째 재앙으로 장자가 죽는 재앙입니다. 짐승의 첫 새끼도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 야웨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양의 피를 이스라엘백성들의 집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게 한 것입니다. 그 양의 피를 보호이스라엘 집에는 그 무서운 재앙이 넘어 가고 그런 '표시'가 없는 애춥의 집집마다에는 장자가 죽는 재앙이 임했습니다. 결국 바로 왕은 항복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제일 큰 명절이 되었습니다.

1. 기념하는 신앙
광복절이나 유월절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기념하는 데 있습니다. 기념이란 과거를 추억하며 그날의 감격과 기쁨을 되새기는 일입니다. 유월절을 봅시다. 해마다 유대월력으로 니산월(우리의 1월)이 되어 오면 유월절을 대대적으로 지킬 준비가 시작됩니다.
먼저 누룩 없는 떡(무교병)을 만들고 쓴 나물(애굽에서의 고통 상징)을 준비하고 어린양을 잡습니다. 주로 이 기간을 무교절이라 부르는 이유는 역시 그 절기의 내용을 말해 줍니다. 지난 때의 아픔을 재연하는 것은 현재의 감사를 잊지 않게 하는 신앙에 있습니다. 광복절의 깊은 뜻을 되새겨야 하는 우리로서도 무조건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만 갖는 기념이 아니라 그때 우리 선조들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오늘의 새다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흥분하거나 스스로 도취하기보다 그야말로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념이 되어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을 기억하면서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되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서 급히 먹는 기념을 지금도 매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신이 오늘날에도 비록 적은 수효의 유태인들이지만 온 세계에 영향을 주는 민족혼을 남기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일제의 압박은 한마디로 쓴 나물을 먹고 지난 쓰라림이었습니다. 말도, 글도, 재산도, 문화도 짓밟았습니다. 젊은이들을 보국대로, 탄광으로 끌고 갔으며, 우리의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날의 고뇌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을 되새기며 새로운 도약을 위해 기념해야 합니다. 광복은 그렇게 된 과정 뒤에 기쁨으로 해방을 본 것입니다.

2. 결심하는 신앙
유월절 잔치는 끝날 때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남은 음식은 태워 버립니다.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을 가리켜 한갖 애굽에서의 고뇌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순결(깨끗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레 2:11). 양의 피가 곧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도 다 관계성기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심은 대단했습니다. 1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유월절은 뜻 있게 빨리 끝을 맺습니다.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는 자격도 엄격하여 불결한 자는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부정뿐만 아니라 시체를 만진 자도 참석을 못합니다. 이것은 절도 있는 엄격성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무교절기의 마지막 날입니다. 예를들면 성경말씀에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출 12 : 15).
누룩 없는 떡이나 쓴 나물을 먹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절기를 잘 지키고 있습니다. 인내를 잘합니다. 그래서 힘이 있고 지혜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즉 결단을 실천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도 과거 조상들이 가졌던 끈기와 투지를 배워야 합니다. 일제로부터 참아 낸 인내심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과거의 교훈이 없는 기쁨만에 머물 것이 아니라 무언가 결심이 필요합니다. 요사이는'인스턴트'가 유행입니다. 모든 것이 빠르고 즉석에서 결정됩니다. 음식도 그렇고, 우리의 생활방식도 그렇습니다. 인내심이 부족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성격도 급하고 하는 일도 조급하게 서둔다는 경향이 있습니다. 광복절을 맞으면서 새롭게 자아 반성하되 결단을 신앙으로 실천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생활의 방편으로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의식으로 실생활에 적용되는 신앙으로 결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진정한 유월절과 광복절은 !
신약시대로 접어들면서 예수에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잔치를 준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의 진정한 결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애굽과 같고, 일제와 같은 죄악의 구속으로부터 진정한 해방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꼭 양의 피가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의 양이 된 것입니다(요 1 : 29).
양의 피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재앙과 신이 머물지 않고 넘어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즉 유월절 양의 피, 곧 십자가의 은총을 고백하여 믿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영생의 구원이 약속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고린도 전서 5 : 7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 22 : 16). 유월절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낸 날이듯이, 광복절도 역시 우리 민족을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날입니다. 역시 더 나아가서 인류 전체를 죄악의 압제로부터 영원한 구원으로 해방시켜 주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해방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린양의 보혈은 우리를 무서운 심판으로부터 영생의 구원으로 안내하는 표시가 된 것입니다.
진정한 유월절과 광복절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은총으로 해방의 기쁨을 맛보며 사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 기쁨은 다음과 같이 나타내야 합니다.
먼저 감사해야 하며, 둘째,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해야 합니다.


출처 : 미라클
글쓴이 : 최정남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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