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중국선교

2007. 6. 2. 23:47선교자료/2.중국선교자료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중국선교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중국선교

  1360년에 걸쳐 수행된 중국선교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주도하셨다. 중국선교의 역사는 언뜻 보면 인간에 의하여 주도되어 온 것 같이 보이나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의 중국선교가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 중심으로 수행되는 중국선교에서 우리가 할 일은 중국교회를 섬기는 일 외에 달리 없다.

1. 1949년 이전의 보잘 것 없는 선교의 열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 중국에는 해외 교회의 큰 선교 헌신이 있었다. 경교와 천주교,그리고 기독교의 선교적 노력은 집요하고 지대하였다. 기독교의 경우를 보면 1876년 473명이던 선교사가 1889년 1,296명, 1893년 1,324명, 1905년 3,445명, 1910년 5,144명, 1915년 5,338명, 1917년 5,900명, 1920년 6,204명, 1926년 8,325명, 1936년 6,059명, 1949년 6,204명의 선교사가 중국에서 헌신하였다.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기독교 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럼에도 1949년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까지 중국교회의 교세는 신자 834,909명에 교회당 6,536개 처였다.
   
  1949년 이전의 중국 선교에 선교사들과 해외 교회의 헌신을 과소 평가할 수 없다.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다.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의 헌신은 눈물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세를 얻게 된 것도 사실은 허드슨 테일러의 내지 선교회의 선교적 열매에 기인하는 바가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1949년 이전의 중국 선교가 보잘것없는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선교사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1949년 이후 선교사가 철수한 상태에서 맺어진 경이적인 중국교회의 성장을 더 드러내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1949년 이전의 중국 선교가 순교의 피를 흘리며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기대만큼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그 나름의 원인들이 있다. 중국인들의 반기독교 운동과 중일전쟁 등 선교를 저해하는 요인들이 중국선교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원인보다도 선교사와 중국교회의 내적인 저해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초창기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현지 교회가 어느 정도 세워졌을 때 선교사들이 지도력을 중국교회에 넘겨주었더라면 결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2. 선교사 부재시 중국교회의 경이적인 성장.
  1957년 방지일 선교사가 홍콩에 추방당한 때부터 개방이 되어 다시 선교사들이 입국하기까지 중국에는 선교사가 없었다. 실제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부터 선교사의 중국에 대한 영향은 거의 없었다. 선교사가 없으면 신생 현지교회들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염려되었지만 중국교회는 이러한 기우를 불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경이적인 성장을 하였다.

  개방 후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입국하기 전에 중국교회는 수천만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1949년 중국교회의 교세와 비교해 볼 때 수십 배의 성장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선교사 부재시 피선교지 교회의 경이적인 성장이 중국교회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선교사 죠지 패터슨(George Patterson)이 온두라스에서 선교사역을 통하여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온두라스의 정정불안으로 인하여 철수하였다. 몇 년 후 정국이 안정 된 후 현지를 방문해 보니 현지 교회들이 크게 성장하였고 성숙한 교회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던 적이 있다.

  이러한 경험으로 볼 때 중국 선교를 위하여 선교사가 필요하기는 하나 절대적인 요소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절대적인 주역이 아닌 선교사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려고 할 때 부작용만 예견될 뿐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중국교회가 스스로 주의 일을 해 나가도록 옆에서 돕는 자, 곧 섬기는 자로서의 역할 수행에 전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중국 선교 
  중국선교를 주도하는 분은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중공 수립 이후에 하나님이 중국선교를 어떻게 주도하셨는가?

3.1 하나님은 세속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는 장을 조성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는 역사의 전 영역에 미친다. 세속사도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다. 하나님은 중국에서 세속사를 주장하여 중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셨다. 특히 중공의 수립과 그 이후에 되어진 교회의 성장을 볼 때 하나님이 중국의 역사를 주도면밀하게 주관하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중공의 수립을 통하여 중국교회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게 하셨다.

  중공 수립 이전의 중국교회는 토착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았고, 선교사들을 의지하였다. 영적으로 의지하기도 하였고, 물질적으로 의지하기도 하였다. 주님의 뜻보다는 선교사들의 의중을 더 중요시하였고, 주님과의 관계보다는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더 우선하였다. 뿐만 아니라 능동적이기보다는 피동적인 자세로 사역에 임하였다. 그래서 중국교회가 건실한 교회로 세워져가기 어려웠다. 선교사들과 해외 교회와의 단절만이 선교사를 의존하는 중국교회를 자립교회로 세울 수 있고, 피동적인 자세의 사역자들을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사역자로 바꿀 수 있는 길이었다.

  중국교회가 선교사들로부터 단절되고 중국공산당 정부의 통치하에 들어갔을 때 상당한 기간 동안 혼란과 어려움이 있었다. 공산당 정부와 야합하여 삼자교회의 기치를 들거나 삼자교회에 가입하는 교회와 사역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교회와 사역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가정교회를 이루었다. 가정교회는 고난도 많이 겪었지만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하는 교회가 되었다.

  하나님은 문화혁명을 통하여 중국인의 심성을 옥토로 기경(起耕)하셨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심성은 옥토가 아니라 돌밭이거나 길가 밭이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교와 도교, 불교, 토속 종교들이 중국인의 심성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복음을 받아들일 여지가 거의 없었다. 설사 복음을 받아들인다 해도 중국식으로 왜곡시켜 버릴 것이다. 중국식으로 왜곡된 복음은 이미 복음일 수 없다. 문화혁명은 중국인들의 심성 속에 뿌리 박혀있는 전통 종교와 무속 등을 깨끗이 청소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이 별 저항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설 수 있었다. 선교사 몇만 명이 100년을 사역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문화혁명을 통해서 이루셨던 것이다.

  문화혁명은 중국교회로 하여금 정금과 같은 신앙을 갖게 하였다. 정금과 같은 신앙은 고난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문화혁명을 통한 고난은 중국교회에 협착한 길을 걷게하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였다. 불과 같은 고난을 통과하는 가운데 알곡만 남고 쭉정이는 다 걸러졌다. 알곡 신자들이 있었기에 문화혁명을 은혜의 자료로 삼게 되었다. 문화혁명은 헌신된 중국교회 성도들을 전국 방방곡곡에 재배치함으로 복음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하였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게 하였다. 이는 마치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초대교회가 당시 세계 각 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게 했던 역사와 같다 하겠다.

  하나님은 모택동 사후 등소평의 집권을 통하여 개방과 개혁을 추구하게 하였고, 개방과 개혁을 통하여 중국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셨다. 하나님은 중국교회로 하여금 충분한 영적인 준비를 하게 하신 후에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중국의 개방과 개혁은 삼자교회로 하여금 지상으로 나오게 하였고, 가정교회들로 하여금 왕성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부당국이 교회에 대한 강온 정책으로 인하여 활발하게 사역할 때도 있었고, 위축될 때도 있었지만 가정교회는 적절하게 상황에 대처하면서 복음 증거와 교회 개척을 왕성하게 하였다. 또한 중국교회는 필요한 성경과 서적들, 그 밖의 필요들 그리고 사역자 훈련 등을 해외 교회들의 협력과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채울 수 있었다. 해외 교회와의 교통과 협력은 중국교회가 복음 사역과 교회 개척, 그리고 건실한 교회로 성숙해 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나님은 6.4 천안문 사태를 통하여 중국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셨다. 중국인들은 비교적 사회주의에 대한 나름의 애착이 있었다. 그러나 천안문사태는 중국인들의 사회주의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체험하며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은 중국인들, 특히 지식인들의 심성을 무주공산과 같은 빈 마음이 되게 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나님은 앞으로도 중국을 복음화하고 중국교회를 굳건히 세우시기 위하여 중국의 세속사를 주관하시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펼치실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3.2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교회의 비전을 성취하셨다.
  초대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의 교회였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교회의 본 모습에서 크게 이탈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는 시도들이 있어왔지만 성공적이거나 지속적이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중국 가정교회를 통하여 초대교회의 이상을 성취하셨다.

  중국 가정교회가 처음부터 초대교회를 회복하려는 비전을 갖고 계획적으로 움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중국교회의 남은 그루터기들에게 화급한 문제는 생존이었다. 신앙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 그들은 기도하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하나님은 중국교회의 남은 그루터기들이 드리는 믿음의 기도를 응답하셨고, 순간 순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배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복음을 증거하다 보니까 가정교회가 되었고, 초대교회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주님은 몸된 교회를 주관하시기를 원하셨고, 가정교회에서 그렇게 하셨다. 가정교회의 예배, 전도, 섬김, 목양, 교회관 등이 초대교회의 회복이었다. 그러나 삼자교회는 초대교회의 회복이 아니었다. 해외교회들이 전해 준 중공 수립 이전의 교회의 재건일 뿐이다. 이 점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가정교회가 흠이나 문제가 없는 온전한 교회라거나, 영원히 변질되지 않을 교회라는 의미는 아니다. 중국에 핍박과 박해가 계속되던 때에는 초대교회를 회복한 것을 지속할 수 있었으나 개방과 개혁이 진행되면서 자본주의가 유입되고 해외 교회들의 선교비가 들어오면서 일부 가정교회들이 변질되어 가는 조짐이 관측되고 있다.     

3.3 하나님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중국교회로 중국특색의 중국교회가 되게 하셨다.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종교는 성격상 지방적이며 또 종족적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서나 같은 모양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성경과 공통적인 신앙고백 외에는 그 지방과 민족의 정서에 맞는 교회가 되는 것을 원하신다. 중국교회는 중국교회 다워야 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전해주고 세운 중국교회는 서구교회의 복사판이었지 중국교회 다운 중국교회는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발과 중국교회 지도자들의 자각으로 중국 토착교회들이 세워졌다.

  토착교회들은 나름대로 특색과 장점을 갖고 있었고 생명력도 있었다. 토착교회 지도자들은 중공 정부 통치아래서도 존립해 나갈 것으로 기대했으나 중공 정부는 제일 먼저 토착교회 지도자들부터 제거해 나갔고 토착교회를 와해시켰다. 토착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신자들이 가정교회의 뿌리가 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중국교회가 중국특색의 중국교회가 된 것은 성령이 그렇게 되도록 역사하신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토착화와 현장화는 삼자교회와 같은 성경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교회를 열매로 맺었지만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토착화와 현장화는 가정교회와 같은 지극히 성경적인 교회로 나타났다. 성령은 앞으로도 중국교회로 하여금 성경적인, 중국적인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아우를 수 있는 상황화와 현장화를 주도하실 것이다.

3.4  하나님은 가정교회를 친히 통치하셨다.
  중공 치하에서 가정교회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 중에서 지도자를 세우셨고, 훈련하셨으며 사역을 인도하셨다. 궁극적으로 삼자교회도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신 것은 가정교회였다. 가정교회는 인간의 뜻과 지혜로 사역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셨다. 하나님은 원대한 경륜을 갖고 그 경륜을 이루기 위해 섭리를 세우시고 그 섭리대로 가정교회를 통치하시고 인도하신 것이다.

  가정교회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고 동행한 교회였다. 하나님은 가정교회를 통치하심에 거의 제한을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마음껏 가정교회를 통하여 뜻을 펼치실 수 있으셨다. 뿐만 아니라 가정교회 사역자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고, 교인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다. 그 증거가 바로 가정교회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풍성한 간증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중국 선교사와 중국교회 사역자들과 교인들이 선교의 주체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중국 선교를 주도해 오셨다. 중공이 수립되기 전에도 하나님은 중국 선교를 주도하셨다. 하나님은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들의 마음에 중국 선교에 대한 사명과 비젼을 주셨고, 그들을 훈련시키셨으며 인도하셨고 보호하셨으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러나 중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이 하나님을 제한하였기에 충분히 역사하실 수가 없으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한을 받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을 믿지 않는 고향에서 표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이 믿느냐 믿지 않느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 따르느냐에 따라 표적을 행하시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신다, 주님을 구주로 믿지만 생활이나 사역에서 자신이 주도할 수가 있다. 이럴 때 주님은 주님은 제한을 받으신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며 그 능력은 역사함의 열매로 나타난다. 중공 수립 이전의 중국 선교의 결과는 하나님의 통치가 중국선교에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중공 수립 이후의 중국교회의 경이적인 성장은 하나님의 통치가 중국 교회에 풍성히 임하였었음을 증거해 준다. 중공 수립 이전과 이후의 선교적 열매의 차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충분히 임하였느냐, 그렇지 못하고 제한받았느냐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공 수립 이후의 선교적 여건이 이전보다 비교하기 힘들만큼 열악하였음에도 수십 배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을 달리 설명할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공 수립 이전에는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선교였다. 물론 토착교회 운동도 일어났고, 나름대로 예수 가정, 소군교회 등 열매도 있었다. 그러나 중공 수립 이전 중국선교의 주도세력은 선교사였다는 데 공감이 이루어질 것이다. 선교사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중국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중국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주관, 공의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약해서 하나님이 중국선교를 주도하시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선교가 되지 못하였기에 변변치 못한 선교 열매와 큰 부작용을 남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