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의 생애와 사상 ( Write : 2003/04/03 )

2007. 6. 2. 23:24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무함마드의 생애와 사상 ( Write : 2003/04/03 )



- 권형기 교수(ACTS) -

오늘날의 국제적인 현실, 특히 공산권이 붕괴되어 버린 상황에서 이제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땅끝이 과연 어디인지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중공, 쿠바, 알바니아, 인도차이나 반도의 3개국을 제외하고는 복음의 사각지대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권, 특히 발상지인 아랍권에는 복음으로부터 소외된 민족과 광대한 지역이 널리 팽개쳐져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슬람권은 오랫동안 가난한 문명지역, 열등한 문화권으로 서구에 소개되어 왔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전 세계가 이슬람권을 무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라마다 관계를 맺어야 하는 강한 대상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복음의 사각지대, 성경 속의 땅 끝이요, 또한 복음전파에 가장 저항이 강한 곳이 바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인 아랍인들을 포함하는 무슬림권인 것이다.

따라서 선교대상으로서 이슬람권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현대 기독교 선교의 성공여부는 이슬람권 선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이슬람권는 기독교에 가장 적대적인 종교라 무슬림권 선교가 결코 쉽지가 않다. 이슬람권은 단순한 삶의 양식인 동시에, 사회, 종교, 정치, 예술, 철학, 문학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문화 복합체인 것이다. 게다가 8세기부터 10세기 초반까지는 서구의 기독교 문명을 능가하는, 당시 인류사의 최고 황금기와 문화 수준을 이루었던 종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관심을 두지않고 피상적인 이유로만 만족한 이유는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평가한 열등한 이슬람을 그대로 받아들인데 원인이 있다. 이러한 이슬람교가 우리에게 생소한 종교라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슬림들의 단편적인 신앙생활만 들여다 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도 나름대로 1,350여 년이 넘는 종교생화을 영위해 온 만큼 우리는 이슬람교라는 종교의 속성과 그 역사적인 변천, 발전기 및 전개과정을 올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세계 선교를 지향하는 이 시점에서 이슬람교는 반드시 넘어야 할 거대한 산맥이다. 우리가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하려면, 무슬림에 대해 비록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의 기본상식이라도 가지고 그들과 대면해야만 복음 전도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세계 이슬람 인구는 약 10억으로, 이는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에도 한국동란에 참전한 터키군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파된 후 1970년대의 중동붐을 타고 이슬람교가 급속히 팽창, 이미 전국에 7개의 모스크와 5만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교가 오늘날 불교, 기독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서 독자적인 전통을 구축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이러한 무서운 속도로 급성장하고 있는 이슬람교에 대해, 이슬람권에 선교를 나갈 때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정보들을 나누고자 한다.

무함마드의 생애와 사상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의미하는 ‘이슬람’이라는 용어는 A.D 7세기 초반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와 메디나에 살았던 무함마드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는데, 무슬림은 ‘이슬람’이라는 이름이 무함마드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긴 하지만, 이슬람교 자체는 옛날 인류의 조상인 아담시대부터 존재해 왔다고 믿는다. 아담이래 많은 예언자들이 출현했으나 무함마드가 최후에 나타난 최고의 위대한 예언자로서 이슬람교를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세계의 종교사를 볼 때 무함마드만큼 파란만장하고 복잡한 인격의 소유자는 없었다.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그를 잔인하고 탐욕이 강하고 남녀 관계가 부도덕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반면에 그는 관대하고, 박애정신이 강한 훌륭한 인격을 지닌 유일신 ‘알라’의 선택된 예언자로, 인간의 극치에 도달한 위대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이슬람교를 만들어간 과정을 우선 알아보는 것이 이슬람교의 신학적 관점에서 핵심적인 과제인 만큼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생애와 사상을 우선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슬람교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의 상황

이슬람교가 발생하기 직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다양한 신들의 숭배가 성행되었는데, 그 신들의 대부분은 지역마다 흩어진 각 부족이 섬기는 신이었다. 주된 종교는 수목, 돌, 연목, 동물 등에 깃들어 있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은 신과 정령의 보호와 구원을 받기 위해 일종의 위령제나 기원제 의식을 거행하곤 했다. 그 중에서도 신앙의 대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메카의 중앙에 위치한 검은 居石, 즉 ‘카바선전’이다. 당시의 메카인들은 이 돌이 아담과 이브가 생존했을 때부터 하늘에서 내려왔고, 후에 하갈과 함께 쫓겨난 장자 이스마엘이 메카에 와서 정착하자, 이스마엘을 보러온 아브라함이 돌로 축조, 이 사원을 지었다고 믿고 있다. 이 돌은 검은 보호막으로 덮여 있으며 그 안팎에는 많은 조각상들과 화상들이 모셔져 있었는데, 당시의 여러부족들이 공동으로 최대의 종교적 의례를 행하는 성지이자 순례의 중심지였고 따라서 이 신전에 모시는 신의 수만도 360여 개나 되었다. 이러한 다신들 중에는 후발(Hubal)이라는 남신과, 어머니신인 알라트(allat)라고 하는 세 여신들이 있었는데, 이 여신들은 가장 지고하고 능력있는 창조자로 숭배된 알라(Allah)라는 신의 딸들로 믿고 있었다. 또한 별, 남신, 여신과 같은 고대 아랍의 종교적 신화에 나오는 신들도 있었고, 천사, 악마, 요정과 같은 등급이 낮은 일종의 영들과 진(jinn)이라고 하는 일종의 귀신도 있었다.

당시는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팔레스타인에서 나오 유대인들이 아라비아 반도의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매우 강하고 영향력이 강한 종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올바른 경전을 갖지 못하고 많은 전설과 신화가 섞인 일종의 외경을 믿고 있었다. 또한 숫적으로 유대인들보다는 적었지만 경교도계(nestorians)기독교인 공동체가 존재했고, 그들은 오늘날처럼 전도에 힘을 쓰는 활기찬 교회들이 아니라, 형식화되고, 영적 능력과 복음증거의 열정이 거의 없고,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회였다. 이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러한 공백기에서 많은 외경의 이야기들과 전설적인 자료들이 성행하였고, 따라서 그릇된 신앙관을 가진 기독교 이단 종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당시의 아라비아 반도는 오늘날 아랍인의 조상인 셈족이 모여 일찍이 정착해서 거주해왔다. 일부는 농사를 짓거나 수공업, 무역등에 종사하면서 오아시스와 도시에서 생활했고, 일부는 낙타, 말, 양, 염소들을 치면서 초유지와 사막에서 생활해 온 유목민들이다. 경제 및 문화적으로는 이웃나라들-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이디오피아-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 나라들 사이의 무역로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과하기 때문에 그 중 중요한 무역 요충지인 홍해 연안에 위치한 메카 오아시스가 많은 사람들의 왕래 덕분에 아랍인들의 종교중심지화 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따라서 교회사적으로 암흑시대의 초창기인 이 시기에 아라비아 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탄생한 것이다.

무함마드의 출생과 메카 거주시기

무함마드는 A.D 570년경 메카에서 꾸라이쉬 부족에 속하는 하심가문에 출생하였는데, 부친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고, 모친 아미나 역시 무함마드가 여섯 살 되는 해에 사망하자, 무함마드는 처음에 조부 압두 알무딸립에게 맡겨져 양육되다, 2년 후인 8세 때에 조부가 사망하자 아저씨 아부딸립에게 보내져 양육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무함마드의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가문은 메카의 카바신전을 보살피는 제사장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무함마드는 당시에 메카에 만연되어 있던 많은 우상숭배와 조열한 미신들을 몹시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특히 자신이 속한 부족이 잡신을 섬기는 일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면서, 유일신 사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메카 사회는 소수의 귀족들이 다수의 노예들을 착취하면서 온갖 불의와 불공평이 만연되어 있었는데, 무함마드는 아랍종교의 모순 외에도, 당시의 종교들간의 불화, 우상숭배, 부도덕성, 노예착취, 부녀자, 고아들의 차별대우 등과 같은 사회적 병폐들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무함마드는 어릴 시절부터 삼촌을 도와 대상무역에 종사하면서 사업에 있어서는 성실하고 유능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대상무역에 종사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곳을 다니던 중 많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정확한 교리를 가지지 못한 이단자들로서, 그 중에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콜리리디안파 교인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무함마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잘못 이해,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아닌 하나님과 인간 예수와 여인 마리아를 믿는 삼신(Tritherism)을 숭배하는 다신교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으며, 유일신 사상에 몰두하고 있던 무함마드에게 성부와 성자가 없는 완전한 유일신교를 창시하는 동기를 유발시킨 것이다.

25세 되는 해에 돈이 많은 미망인이자 경교도 기독교인인 카디자의 끈질긴 구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경제적인 안정과 사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왔다. 그러자 종종 단식을 하고, 메카교외의 사막을 거닐다가 산의 동굴에 들어가서 혹은 바위위에 올라가서 유일신을 생가하면서 명사을 즐기거나 환몽에 빠져드는 습관이 생겼다. 유일신을 부르짖는 무함마드의 심림적인 갈등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일신관을 접하면서 아랍인들을 위한 새로운 유일신 종교를 만들어야 겠다는 열정을 태우게 했다.

첫 계시와 예언자의 탄생

40세의 어느 날 자주 가곤 했던 히라 등굴에서 명상을 잠기던 중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계시를 주었다. 첫 계시 후 한동안 계시가 없자, 계시의 초자연적인 근원에 대한 의심, 온전한 정신이었는지 의문을 품고, 깊은 영적 우울 내지 회의에 빠졌으나, 부인 카디자의 사랑과 신뢰에 용기를 얻고 재계시를 기다리는 중, 다시 천사 가브리엘의 환상을 체험하고, 비로소 자신이 알라의 예언자로 선택받았으며, 구약과 신약에 언급되는 예언자들이 마침내 아랍인들 중에서도 선택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문맹자라 전혀 글을 읽을 수 없었고, 또 당시에는 아랍어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토론을 접하면서 유일신에 대한 개념을 얻었을 것이고, 이러한 구약성경의 종교적인 지식이 그의 계시체험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로부터 우주와 인류의 창조자이신 진실하고 탁월한 유일신의 존재에 관한 신앙을 받아들였고, 기독교로부터는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신의 배려와 자비에 관한 신앙을 전달받았을 것이다. 첫 계시는 그의 삶의 큰 전환점이 되었고, 이슬람교 발생의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예언자로서의 근거가 되었다. 무함마드는 자신에게 계시를 준 신의 이름을 당시 카바신전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던 ‘알라’라고 붙이면서 신은 유일한 존재이며, 자신은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과 같이 ‘알라’의 선택을 받은 최후의 예언자로서 인간들에게 ‘알라’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알려야 할 사명을 무여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알라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심판의 날, 저주받은 자들의 고통과 처음 보기에는 감각적인 것 같은 낙원의 즐거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점차 참된 창조주의 단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메디나로의 이주

그의 포교는 당시 카바 신전을 숭배키 위해 모여드는 순례자들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던 많은 메카 주민들의 조소와 멸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박해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소수의 추종자들이 이교도에 의해 계속 박해를 받게 되자 그들을 데리고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는데 오아시스 농업지역인 메디나는 무함마드가 설교하기에는 메카보다 훨씬 나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다. 메디나에 온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미움받던 설교자에서 권력있는 정치가로 둔갑, 메디나의 아랍인 전체를 지배하는 정치가, 행정지도자로 변신하였다. 메타 거주시의 위기로부터 탈출, 메디나로의 이주는 정치와 종교와 연결된 신정통치의 이슬람 공동체(UMMA)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메디나의 이주는 ‘히즈라’라고 불리며, 후일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었다. 즉 이슬람력은 A.D. 622년 7월 16일을 이슬람교의 기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A.D.622년은 이슬람력(A.H.)의 1년이 된다.

당시의 메디나 주민의 약 70%는 유대인들이었는데, 무함마드는 숫자족으로 아랍인들이 열세임을 인식, 메디나 거주 초기에는 유대교리와 관습을 일부 받아들였다.

유대인들도 무함마드의 교리가 유대교의 교리와 많이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 초기에는 무함마드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차츰 무함마드가 지신을 알라가 보내신 예언자라고 역설하면서, 구약의 사건들, 특히 성경의 인물들에 대한 언급 내용에서 부정확하게 말하자, 무함마드를 사기꾼으로 몰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이내 유대인들에게 분개하면서, 자신이 설명하던 구약의 사건들의 내용이 구약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때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전이 임의대로 개악(改惡)내지 왜곡되었다고 주장, 자신이 계시받아 전하는 내용들의 신빙성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무함마드의 비난이 고조, 유대의 종족들에 대한 추방 혹은 대학살을 단행했고, 메디나 이주 초기에 따랐던 유대인의 관습을 아랍식으로 수정, 아랍화 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포교한 이슬람교가 이전의 창조주 알라가 보내신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된 왜곡, 부패된 종교들을 수정 보완하는 유일한 참된 종교라고 선포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그의 설득력 있는 설교와 카리스마적인 힘과 지도력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고 복종케 하였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메카의 탈환이었다. 그는 메카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이유가 정치 및 경제적인 고려 때문이라 판단,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이슬람교로 개종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카를 상대로 3차례의 큰 전쟁을 거치면서 메카 주민들의 힘의 약화를 가져온 가운데, 메디나에서의 무함마드측의 군사력이 강대해지자, 무함마드의 세력이 메카를 상대해서 더 이상 열세에 놓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무함마드는 무력으로 사용하기로 결정, A.D.630년에 10,000명을 이끌고 메카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미 메타는 무함마드에게 적수가 안될 정도로 약해 있었기 때문에 메카의 꾸라이쉬 부족의 지도자들은 이슬람교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고, 무함마드는 쉽게 메카를 정복, 많은 지지자들을 모으면서 이슬람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카바 신전의 여러 잡신들의 형상을 파괴 및 제거하고 카바 신전을 ‘알라’가 계시는 무슬림들의 순례와 신앙의 중심지이자 고향으로 만들었다.

일생의 남은 두 해(A.D.631-632)는 메카에서의 종교적 통일과 지배권 강화에 주력하면서 동시에 다른 아랍 부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 견고히 하면서, 필요시에는 복종 및 개종시키기 위해 군사적 행동도 강행하였다. 이리하여 무함마드가 사망할 당시인 A.D.632년에는 전 아라비아 반도가 이슬람교의 세력하에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무함마드의 성격과 업적

무함마드의 성격은 이상스러울 만치 혼합적이었다. 그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시인이요, 체계적인 사고 능력을 지닌 사색가라기 보다는 위대한 즉흥 시인이고, 매우 단순한 취미를 지니고, 다정다감한 성격, 관대하고 결단력이 강하고, 빈틈이 없고, 친척, 기민한 판단력과 타고난 지도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물론 잔인한 면도 있고, 원수에게 보복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히 인간적인 면도 있었다.

그는 이슬람교 교리상 합법화된 1부 1처제와는 달리, 13명의 부인과 2명의 첩을 거닐었다. 언 듯 보기에는 무함마드가 매우 부도덕하게 보이겠지만, 당시에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던 무함마드는 자기가 살해한 적들의 미망인들이 남편을 잃고 슬픔에 잠기자 위로해 주기 위해서 부인으로 삼은 경우가 대다수라, 이것은 당시 여성들의 낮은 신분과 위치를 고려할 때 무함마드의 인격에 손상을 주거나 크게 비판을 일으키지는 않았고, 오히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그럴 정도로 인간미가 넘쳤다고 감탄하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계시의 악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에게 내린 계시는 사망시까지 23년(A.D.610-632)간 단편적으로 지속되었고, 그의 사후 계승자들에 의해 수집, 기록되어 ‘코란’이 되었다. 즉 무슬림들은 알라가 아담이후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어 자신의 뜻을 밝히셨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무함마드는 그동안에 예언자들의 서열중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전에 모든 계시들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함마드가 계시받아 전했다는 코란의 내용과 가르침은 이전의 모든 경전들과 예언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무함마드의 권위는 알라의 선택된 예언자들 중 가장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대다수의 서양의 이슬람학자들은 무함마드를 부정적으로 보고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들의 징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그의 초기 삶의 불우한 성장 배경, 좌절과 절망, 아랍인도 유대인들처럼 독창적인 계시서가 필요하다는 그의 깊은 확신, 자신을 아랍인들의 예언자로 특징지어줄 어떠한 계시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갈구, 그리고 다양한 당시의 주변 환경의 영향이 그의 잠재적인 신심을 움직여, 많은 즉흥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 냄으로서 연속되는 계시를 구성해 나간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즉 무함마드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결혼 후 여유가 생기자,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은 자라고 지나치게 확신하고 알라의 예언자라고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부러움, 주위의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반발심, 신의 일을 해야 한다는 종교심이 주는 압박이 지나쳐, 유일신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신의 음성으로 진지하게 오해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무함마드는 사회 개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강력한 유일신 사상 숭배, 이교도들의 영아 살해 풍습 타파, 아랍인들을 통일, 아랍인의 공동체 의식을 세우고, 문화 종교, 도덕적 분야에서 개척자적 역할을 하였고, 당시의 정치적인 몰락에 의한 혼란, 부정의한 경제 질서, 사회 계급의식의 격렬한 차별을 비난하였고, 도덕적 타락에 대한 각성, 생명의 존중등과 같은 긍정적인 면도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슬람교를 창시할 때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많은 부채를 졌으나 양 종교의 잘못된 교리와 정보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오류와 임의의 가능성이 내재 되어 있었다. 즉 포교 초기에 사막의 유목민들을 통합, 강력한 군사적인 집단으로 만들어 함께 사막을 벗어나고자 하는 경제적인 목적과 알라의 뜻을 실현시키려 했던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키 위해 노력하던 중, 정치와 종교를 교묘하게 혼합, 과격한 신정정치를 하였으며, 교리상의 모순된 원리가 교묘하게 조화된 정치성을 띤 종교를 만든 것이다.

무함마드가 계시 받았다고 전한 ‘코란’에 진리가 없다고 한다면 잘못된 대답일 것이다. 코란에 담긴 내용의 80%정도는 진정한 진리이고 이것이 기독교인 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코란 속에는 많은 진리가 포함되어 있지만, 영생을 얻기위한 참된 길을 향하여 가는데 있어서는 완전히 반대의 길로 이끌고 있다. 이슬람교가 이처럼 기독교나 유대교와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타난 것은, 후대의 종교로서 교조 무함마드가 유대교와 기독교 문화에서 자라나 영향을 받았음을 반영하는 사례일 뿐이다. 기력 4세기경에 아라비아 반도에 기독교가 유입되었다. 당시에는 토착적인 다신교가 성행하고 있었으며 기독교 또한 유일신의 개념이 아닌 다신교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하나님의 속성은 그들의 이해속에서 변질되었으며 ‘알라’라고 지칭하며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쓰게한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여튼 무함마드느 10억이 넘는 무슬림들이 구원을 막아버리는 큰 죄악을 범하고 만 것이다.

이슬람교는 무함마드 사후 급속히 팽창, 초대 교회 당시 복음이 전파되었던 중동 지역이 지금은 이슬람교에 의해 철저히 통치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시급히 복음을 전해야 할 지역이 되어 버렸다. 무슬림 정복자들은 실제로 이 지역에서 만연된 퇴폐된 기독교를 쓸어 버렸으며, 영성을 잃은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쉽게 이슬람화 되기도 했다. 요즈음은 서구에도 이슬람의 열풍이 불고 있는데, 특히 영국, 불란서에서의 급속한 무슬림들의 숫적 증가를 생각할 때, 그 영향으로 이슬람이 발생했던 것을 상기하며 답답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슬람 인구가 늘어가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구원의 영광을 누리는 기독교인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반성에서 답답함이 앞선다. 과거에 기독교의 나약함이 아니었던들 태동도 하지 않았을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통감해야 하며, 우리 세대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역에서 다시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없어 죽어가는 무슬림들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 진리를 전해 주어야 할 복음의 빚진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