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Italy)

2006. 10. 21. 00:17선교자료/5.선교자료

이탈리아(Italy)  
 

유럽여행자에게 시민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귀족사회 안에서 꽃을 피운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는 유럽 배낭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쥴리어스 시저가 풍미하던 이탈리아, 8월의 상징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BC 27년 왕위에 오른 것으로 시작된 고대 로마로부터 전세계 카톨릭이라는 종교를 전세계에 전파시키었으며 지금도 수도 로마에 카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이 있는 나라가 이탈리아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역사를 뒤로하고 2차 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패전국으로 전락하고야 말았으나, 자동차 공업과 의류 직물공업으로 또다시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여전히 경제기반이나 정신풍토가 확연히 다른 북부와 남부의 구조상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수도 :  로마(Rome) 비자 :  불필요
인구 :  5789만 2000명 국가전화번호 :  39
면적 :  301,230 평방 km 국가URL명 :  it
1인당GNP :  2만 170달러 전압 :  110V
화폐 :  유로화(EUR) 현지언어 :  이탈리아어
환율 :  1유로화 = 1393.72원 썸머타임 :  3월 마지막 일요일에서 10월 마지막 일요일
종교 :  로만 카톨릭 시차 :  -7
은행 :  문맹율 :  총인구의 3% 남성: 2% 여성: 4% (1990의 est.)

 

이탈리아의 역사

▶ 로마 건국에서 르네상스까지

로마(Roma)는 B.C. 753년 4월 21일 로물루스(Romolo)와 그 휘하 목동들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탈리아(Italia)반도 남부는 그리스인들 이 많은 식민지를 만들어 지배하고 있었고 중부는 에트루스키(Etruschi)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Roma)인들은 먼저 북쪽 에트루스키(Etruschi)인과 이탈리치(Italici)계 민족을 제압하여 남하하는 켈트인을 격퇴하고, 다시 남이탈리아(Italia)의 그리스 식민도시도 정복하여 B.C. 270년경까지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그 뒤 지중해 지역뿐만 아니라 북쪽과 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여 B.C. 29년 시작되는 제국시대에는 북쪽은 영국, 남쪽은 사하라, 서쪽은 이베리아반도, 동쪽은 이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속주국들의 경제력, 군사력의 상승에 따라 이탈리아 본토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저하하여 A.D. 312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 A.D. 331년 콘스탄티노플 천도 A.D. 395년 동로마(Roma)와 서로마(Roma)의 분열 등 로마(Roma)제국은 분열을 더하다가, A.D.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대 로마시대의 막을 내리며 세계 정치사에서 사라졌다.

게르만계 민족의 침입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고 6세기 말에는 엘베강 하류 지역에 기원을 둔 롬바르드족이 롬바르디아(Lombardia)에서 캄파니아(Campania)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롬바르드 세력은 8세기 후반 교황의 요청을 받은 프랑크 세력과의 싸움으로 약화되고 , 800년 교황 레오(Leone)3세에 의하여 샤를마뉴가 신성로마 황제에 임명되어 카를 대제가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역사는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독일, 프랑스의 역사와 밀접하게 얽힌다. 남이탈리아(Italia)에서는 827년 튀니스의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Sicilia)에 상륙하여 비잔틴의 지배에서 시칠리아(Sicilia)를 빼앗아 팔레르모(Palermo)를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열면서 많은 새로운 재배 작물을 이탈리아에 가져왔다.

이슬람 교도에 의한 시칠리아(Sicilia)지배는 11세기에 노르만인에 의하여 종지부를 찍었다. 노르만인은 11세기 초부터 순례, 용병 또는 십자군 병사로 남이탈리아(Italia)에 와서 왕조를 세웠다. 거기에서는 서유럽풍의 봉건제도, 비잔틴풍의 관료제도, 아랍식 문화가 융화를 이루어 번영하였다. 이것이 절정에 달한 것은 혈연관계로 시칠리아(Sicilia)왕과 신성로마 황제를 겸하게 된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2세 시대이다.

그 뒤 남이탈리아(Italia)는 프랑스 앙주가의 지배를 거친 후 에스파냐의 아라곤가의 지배를 받았다. 이탈리아(Italia)반도와 비잔틴의 교역은 10세기 말부터 활발하였으나 십자군을 계기로 더욱 진전하여 베네치아(Venezia), 피사(Pisa), 제노바(Genova)등의 여러 도시가 번영했다. 아말피(Amalfi), 바리(Bari)등의 남이탈리아(Italia)의 상업도시의 번영은 집권적인 왕조체제의 강화 때문에 오래 가지는 못하였으나, 북이탈리아(Italia)와 중부 이탈리아(Italia)에서는 기사계급도 상인 및 토지소유자들로 이루어진 도시세력과 결탁하여 코무네(Comune)라고 하는 제권에서 독립한 자치체를 형성하였다( Comune라는 이름은 오늘날 현 밑의 행정구역 단위를 지칭함: 역자 주).

12세기 중엽,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1세가 롬바르디아(Lombardia)도시동맹에 패한 것이 이탈리아에서 코무네(Comune)번영시대의 계기가 되었다. 이 시대에는 베네치아(Venezia), 제노바(Genova)등과 함께 피렌체(Firenze), 밀라노(milano), 루카(Luca)등의 내륙도시도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도시상호간의 대립, 도시 내부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반시민과 대 상인이나 토지소유자로 이루어지는 토지귀족의 대립이 격화되고,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얽혀 13세기의 이탈리아 도시에서는 기벨린파와 겔프파의 대립이란 명목 아래 항쟁이 더욱 더 격화하였다.

항쟁상태에 있는 도시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특정 유력자에게 시정의 전권을 위임하는 이른바 시뇨리아(Signoria)제가 밀라노(Milano)를 비롯한 기타 소도시에서 보이기 시작하여 형식적으로는 공화제인 피렌체(Firenze)도 사실상 메디치(Medici)가의 전제 지배에 들어갔다.

도시의 발전과 동방의 높은 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시야의 확대, 상인의 현세적, 합리적인 의식 등이 기초가 되어 르네상스문화가 탄생하였다. 그것이 특히 꽃 핀 것은 메디치(Medici)가를 비롯한 지배자의 궁정이나 교황의 보호 아래에서였다.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바로 성 베드로(San Pietro)성당(1506년 율리우스 교황 때 착공 1626년 우르바노8세 교황 때 완공)이다.


▶ 르네상스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

이탈리아(Italia)반도의 정치정세는 독일, 프랑스, 스페인등 인접한 강대국의 개입을 초래할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16세기에는 외국세력의 싸움터가 되고, 한편 신대륙 발견과 오스만투르크족의 진출, 이에 따르는 상업로의 변화에 의하여 17세기 이후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로도 정체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이탈리아(Italia)의 사보이(Savoia)왕국만은 17세기 후반 이후 합스부르크가와 부르봉가의 대립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18세기에는 사르데냐(Sardegna), 리구리아(Liguria), 피에몬테(Piemonte)로부터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일부까지도 영유하였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Italia)본토에서 오스트리아, 스페인세력을 추방하여 봉건적 특권의 폐지, 교회재산의 몰수 등 프랑스혁명 정신을 이탈리아(Italia)에 가져다 주는 역할을 하였다. 나폴레옹 몰락 후 구체제가 부활하였으나 각지에서 입헌혁명 또는 공화제를 목표로 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1848년 유럽의 혁명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들 운동은 오스트리아의 군사력과 교황 원조에 나선 나폴레옹 3세의 무력간섭에 의하여 좌절되었으며, 입헌헌법을 유지한 곳은 사르데냐(Sardegna)왕국(Savoia왕국)뿐이었다.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Vittorio Emanuele)2세 치하의 사르데냐(Sardegna)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 되었다.

사르데냐(Sardegna)왕국의 수상 카보우르(Savour)는 국내에서 자유주의적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열강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한 외교에 의하여 롬바르디아(Lombardia)를 오스트리아에서 해방시키고, 토스카나(Toscana)왕국, 교황령 등 중부 이탈리아의 병합을 추진하였다.

한편 가리발디(Garivaldi)는 의용군을 이끌고 시칠리아(Sicilia)에 원정하여 두 시칠리아(Sicilia)왕국을 제압하여 통일 이탈리아(Italia)왕국 의 기틀을 만들었다(이탈리아(Italia)통일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3인물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Vittorio Emanuele)2세왕, 정치가 카보우르(Cavour), 군인 가리발디(Garivaldi)장군등이다. : 역자주).

이리하여 당시 아직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북동부와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를 제외하고 이탈리아의 통일이 대체로 달성되어 1870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Vittorio Emanuele)2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수도는 처음에 토리노(Torino), 뒤에 피렌체(Firenze)로 옮겨졌다가 1870년 로마 점령에 이어 71년 로마(Roma)를 수도로 정했다.


▶ 통일 이후

통일 후 20년간 이탈리아는 카보우르(Cavour)이래의 자유무역주의를 취하면서 철도망 건설, 통일적 행정 및 경제제도의 채용 등을 통하여 통일의 열매를 거두려고 하였다.

통일 왕국은 자유무역주의와 북부의 제도를 남부에 강요하게 되는 데, 이로 인하여 부르봉왕조의 식산정책에 의하여 싹을 보던 남부의 근대공업은 쇠퇴하게 되고 다시 전근대적인 토지제도와 결합된 낮은 생산력 수준의 남부농업이 화근이 되어 통일된 이탈리아(Italia)에서 남부는 매우 낙후되게 되었다.

1880년대 말 이후 남북 이탈리아(Italia)의 격차와 국내의 대다수 주민의 빈곤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경영에 나섰으나 그것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원인들이 19세기 말의 사회적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고,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이,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주의적 경향의 운동이 대두되었다.

19세기~20세기 초의 호황기에 중공업의 보호육성과 몇 가지의 자유주의적 정책이 취해져 중화학공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시기에 총동맹파업과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 혼란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이탈리아(Italia)는 제l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들어갔다. 연합국측으로 전승국이 된 이탈리아는 아디제(Adige)강 상류지역과 이스트리아 지방을 오스트리아로부터 획득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극심한 불황으로 엄청난 수의 실업자가 속출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달마치아의 영토 요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도 겹쳐 국내에서는 온갖 불만이 일어났다.

1920년 이후 밀라노(Milano), 토리노(Torino)등에서 노동자에 의하여 공장이 점거되고 생산을 관리하게 되자 이에 반감을 가진 소시민과 농민을 배경으로 무솔리니(Mussolini)가 이끄는 파시스트(Fascista)당이 세력을 신장했다.

1929년 정국의 혼란을 틈타 각지의 파시스트(Fascista)에 의한 로마(Roma)진군이라는 형식으로 무혈 쿠데타에 성공하여 무솔리니(Mussolini)정권이 탄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좌익세력은 분열되어 있어 유효한 반격을 하지 못했으며, 또 현재의 기독교민주당의 전신인 인민당은 뒤에 무솔리니(Mussolini)에 의해서 비합법화되는데, 최초의 무솔리니(Mussolini)정권 탄생시에는 파시스트(Fascista)당과의 연립내각에 참가했었다.

한편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Italia)에서 독재를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의 소지가 많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쏠리니(Mussolini)정권은 교황청측과 그 유명한 라테란(Laterano)조약을 맺게되는 데, 이 조약으로 교회와 국가간 관계가 정립되고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국 (La Citta' del Vaticano)은 한 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1929년 이탈리아에도 밀어닥친 세계공황에 대처하여 무솔리니(Mussolini)는 파산에 임박한 중요산업과 은행에 정부자본을 투입하는 한편 국내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며 동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 대한 시장확보전쟁에 나섰다.

1936년 에티오피아를 병합하고 1937년에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Italia)방공협정을 체결하여 1940년 히틀러 독일의 뒤를 이어 영국, 프랑스에 선전을 포고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동지중해와 아프리카에서의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고, 한편 국내에서는 파시스트(Fascista)와 주둔 독일군에 대한 레지스탕스 운동이 격화하여 1943년 7월 무솔리니(Mussolini)정권은 붕괴했다.

같은해 9월 바돌리오(Badolio)정권이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에도 북이탈리아(Italia)로 도피한 무솔리니(Mussolini)와 독일군은 연합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일찍이 파시스트(Fascista)에 의해서 비합법화된 인민당(기독교민주당의 전신-추후 이탈리아 현대사에 한 장을 열게됨: 역자 주), 사회당, 공산당 등을 주체로 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의하여 밀라노(Milano), 토리노Torino)등 주요도시는 해방되었다.

1945년 봄, 북이탈리아(Italia)의 독일군,파시스트(Fascista)군이 항복하였고 스위스로 도주하던 무솔리니(Mussolini)는 유격대의 손에 잡혀 처형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Italia)의 정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담당한 기독교민주당, 공산당, 사회당을 주체로 하여 전개되었다.

1946년 6월의 국민투표와 헌법제정의회의 선거를 통하여 이탈리아(Italia)는 왕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하여 기독교민주당의 데 가스페리(De Gasperi)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내각을 탄생시키며 이탈리아 공화국(La Repubblica dell'Italia)이라는 공식 국가명을 사용하였다. 공화국 헌법은 4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지난 1978년 바티칸(Vaticano) 교황청에서는 폴랜드 출신 보이티와가 출신 요항 바오로(Giovanni paolo)2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400년 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인이 아닌 외국인 교황이 탄생하였다.

[자료제공 : www.okroma.net]

국가개요

유럽여행자에게 시민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귀족사회 안에서 꽃을 피운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는 유럽 배낭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쥴리어스 시저가 풍미하던 이탈리아, 8월의 상징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BC 27년 왕위에 오른 것으로 시작된 고대 로마로부터 전세계 카톨릭이라는 종교를 전세계에 전파시키었으며 지금도 수도 로마에 카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이 있는 나라가 이탈리아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역사를 뒤로하고 2차 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패전국으로 전락하고야 말았으나, 자동차 공업과 의류 직물공업으로 또다시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여전히 경제기반이나 정신풍토가 확연히 다른 북부와 남부의 구조상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기후와 복장

▶ 기 후

온대지역에 속하지만 반도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기후가 나타난다. 알프스 산맥은 서풍과 북풍을 부분적으로 막아주며 북부평야와 아펜니노 지역은 다양한 기후를 보인다. 사르데냐 섬은 대서양, 시칠리아는 아프리카의 바람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대체로 겨울에는 지중해성 저기압, 여름에는 알프스성 저기압, 가을에는 대서양성 저기압과 동시베리아 고기압이 이탈리아 기후를 지배한다. 최북단인 알프스 지역은 대륙성 산악기후로 기온이 낮은데, 동부와 서부를 비교하면 동부는 강우량이 1,053㎜, 평균기온은 6.6℃이고 서부는 각각 660㎜와 7.4℃를 나타낸다. 가을과 늦겨울에는 푄(Fohn)이라는 고온건조한 바람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불어온다. 적설량은 서부가 동부보다 많다. 포 강 유역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몹시 추우며 내륙지역이 동부 해안보다 기온차가 극심하다.


▶ 복 장

여름과 겨울의 평균기온이 각각 23℃와 0.3℃이다. 강우는 봄·가을에 집중되며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증가한다. 연평균기온은 15℃ 내외이고 강우량은 660㎜ 정도이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긔 춥지 않고 따뜻한 기온이 나타난다. 때문에 여름에는 간편한 복장(반팔차림)이 좋고, 봄과 가을에는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기 때문에 비옷이나 우비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또한 여름에는 햇볕이 따가우므로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선글래스가 필수이다

여행 시 주의사항

▶ 복장

이탈리아의 성당에 들어가려면 복장부터 검사를 받는다.(특히, 바티칸은 더욱 심하다)소매가 없는 셔츠나 반바지, 미니스커트는 입장이 불가능하다.


▶ 소매치기

신문지를 혹은 잡지등을 들고 떼지어 다니는 어린아이들 아기를 업고 가족이 함께 다니는 가족 소매치기단,오토바이를 이용한 차치기 도둑도 성행한다.
(- 이탈리아에서는 길을 걸을 때에도 될 수 있으면 차도쪽에 가까이 붙어 다니는 것은 금물이다.) 로마의 테르미니 역과 바티칸으로 가는 버스 안은 소매치기들의 단골 출몰지역

▶ 기차 안의 도난사고

이탈리아를 입국하는 야간 열차 내에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다들 잠들어 있는 새벽녘이 소매치기들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일단 열차에 올라 좌석을 확보한 후에는 줄열쇠를 이용하여 선반에 묶는다.
발을 문에 기대고 잔다. 문을 열면 금방 알수 있도록...
(머리를 기대면 다칠 위험이 높으니까 발을 기대는 것이 가장 좋다.)
언제나 긴장할 것!
( - 열차의 출발, 도착하는 순간도 이들이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인 것도 잊지 말자.)
①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을 주의하라

이태리에서 시내관광을 하다보면 친절한 사람이 많다. 이태리 사람들은 관광객에 대하여 상당히 친절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친절한 것은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다. 길을 가다보면 괜시리 한국사람이냐며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한국의 남대문, 이태원을 이야기하며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어떠하였다며 반갑다고 한다. 먼 타국에서 한국 말을 하는 외국인을 만나니 반갑다. 그는 온갖 좋은 말을 하며 음료수를 제공하고 싶다며 술집으로 데려 간다 (이태리의 술집은 한국과 전혀 다름). 한잔 얻어 마신 여행객은 한국식으로 보답을 하겠다고 한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생각할 때는 이미 때는 늦었다. 가져온 계산서는 있는 돈 다 털어도 안된다. 이태리는 술 문화가 한국과 틀리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집에서 주량 것 마신다. 친구들과 한잔할 때는 식사를 초대하거나 초대되어 식사를 하며 한잔하되 만취가 되도록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경우는 없다. 밤에 시내거리에 만취가 되어 누어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② 밤에 기웃 거리는 사람은 당한다

이태리에 와서 저녁에 분위기를 즐기기 원하는 남자들이 있다. 배회 하다보면 싼 곳이 있으니 오라며 호객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발 백중 당한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한국에서 하는게 좋다. 밤 문화가 한국처럼 발달한 곳은 없을 테니까?

여러 주의사항을 열거하였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권총을 든 노상강도나 돌로 뒤통수를 치고 빼앗아 가는 경우는 없다. 한 마디로 여행 객이 조금만 주의하고 신경쓰면 소매치기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탈리아에서의 쇼핑

이탈리아에서 쇼핑을 하려면 여러 가지 물건이 있지만 특히 의류, 시계, 낵타이, 가죽제품(피렌체, 베네치아), 유리제품(베네치아)가 제일 유명하다. 어떤 것은 가격이 다소 비싸기도 하지만 공항면세점뿐만 아니라 일반 상점에서도 면세혜택을 받을수 있다.

우선 카운터에 이야기를 하여 면세서류를 받아 출국하기 전 공항에서 세관의 확인도장을 받아 자신의 주소지와 함께 우표를 붙여 보내야 한다. 또한 신용카드 번호를 기재하는 것이 세금을 환불받을 경우 간편하게 자신의 통장에서 받을 수 있다.

쇼핑 시 다음 사항을 유의하자.

- 선물은 가급적 마지막 도시에서 꼭 필요한 것을 사자.
- 중간 도시에서 산 물건은 양이 많을 경우 배편으로 보내는 것이 좋다.
그 많은 짐을 다 가지고 다닌다는건 무리하기 때문이다.
- 물건가격에 세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에서의 쇼핑

이탈리아에서 쇼핑을 하려면 여러 가지 물건이 있지만 특히 의류, 시계, 낵타이, 가죽제품(피렌체, 베네치아), 유리제품(베네치아)가 제일 유명하다. 어떤 것은 가격이 다소 비싸기도 하지만 공항면세점뿐만 아니라 일반 상점에서도 면세혜택을 받을수 있다.

우선 카운터에 이야기를 하여 면세서류를 받아 출국하기 전 공항에서 세관의 확인도장을 받아 자신의 주소지와 함께 우표를 붙여 보내야 한다. 또한 신용카드 번호를 기재하는 것이 세금을 환불받을 경우 간편하게 자신의 통장에서 받을 수 있다.

쇼핑 시 다음 사항을 유의하자.

- 선물은 가급적 마지막 도시에서 꼭 필요한 것을 사자.
- 중간 도시에서 산 물건은 양이 많을 경우 배편으로 보내는 것이 좋다.
그 많은 짐을 다 가지고 다닌다는건 무리하기 때문이다.
- 물건가격에 세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거스름돈 받을 때 유의사항

이태리인 들의 계산방법이 우리와 다르다. 한국에서는 일단 물건을 사고 돈을 내면 지불한 금액에서 물건 값을 제하고 몇 천 몇 백원을 한꺼번에 거슬러 준다. 그러나 이태리에서는 물건 값에 잔돈을 더하여 지불한 금액에 맞춘다. 예를 들면 고객이 5,500리라짜리 물건을 사고 10,00리라짜리 지폐를 지불하면 500리라를 먼저 거슬러 주어 6,000리라를 만들고 1,000리라짜리를 하나하나 거슬러주며 7,000, 8,000, 9,000, 10,000리라를 맞추는 방식으로 계산한다. 혼선되는 부분이니 잘 유념하여 두는게 좋다. 급하게 일를 볼 때 착각을 일으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특히 역에서 급하게 표를 구입할 때 동전을 보고 거스름 돈 모두인줄 알고 기차에 승차한 후 자세히 확인할 때는 이미 기차가 떠나고 난 다음이다. 이들이 산수를 못하거나 역무원이 잘못한게 아니고 본인의 불찰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계산법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이태리 계산법을 이해하고 습관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음을 참고로 말해주고 싶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침착하게 거스름 돈을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다.

자료협조 :
http://www.okroma.net/info.html

교회/사찰] 바티칸시국 (Citta Del Vaticano)


전세계에 걸쳐 8억의 신도를 갖고 있는 카톨릭의 총본산, 사원의 규모도 세계에서 제일 크다. 326년 창건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베드로의 묘 위에 성당을 지은 것이 시초이다.

로마의 티베레 강 건너편에 위치한 바티칸 시국은 중세에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으로 바티칸은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1929년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교황 사이에 맺은 조약(라테라노 조약)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 조약은 당시의 ‘로마 문제(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과의 논쟁)’를 해결하였고 바티칸에 대한 교황의 완전 주권을 인정하였으며, 이탈리아 내에서의 교회, 종교 교육, 결혼 등에 관한 외교 조약과, 정부에게 몰수된 교회 재산의 보상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였다.

교황은 바티칸 시국 안에서 행정·입법·사법에 대한 절대 권한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바티칸 정부의 각료들을 임명하는데, 이들은 교황청 인사들과는 달리 성직자가 아니다. 교황은 교황청의 바티칸 시국 위원회에서 통치권을 행사하며, 행정권은 중앙 협의회의 보좌를 받는 지사에게 위임된다.

총 면적 0.44km2, 인구 약 1,000명의 바티칸 시국은 독자적인 통신 체계, 은행 기관, 화폐를 비롯해서 우체국, 라디오 방송국, 백화점, 의료 시설, 100명 이상의 스위스인 수비대를 갖추고 있다. 식량·물·전기·가스를 포함한 물자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소득세가 없고 자금의 유입이나 유출에 대한 규제가 없다. 세계 각국에 교황사절을 파견하고 외교사절을 접수하고있다.

정면에는 입구로 올라가는 거대한 계단이 있는데 이는 베르니니가 만든 것이다. 계단 왼쪽에는 성베드로 상이, 오른쪽에는 성바울 상이 서있다.본회랑은 마데르나가 만든 것이다.

2열로 늘어선 커다란 기둥을 중심으로 좌회랑, 중앙회랑, 우회랑으로 나뉜다. 안회랑근처에 돔이 있는데 여기가 교황만이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주제단이 있는 안회랑으로 사원 중에서도 가장 엄숙한 장소이다. 바깥회랑은 베르니니가 제작하였다.
    분류 :  [교회/사찰] 역사,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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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식 홈페이지 : 
http://www.christusrex.org/www1/vaticano/0-Musei.html

][박물관] 국립박물관 (Museonazionale romano)


한 번에 3,000명 이상 목욕할 수 있었다는 4세기의 테르메 디 디오크레치아노 목욕탕 유적지에 세워진 박물관으로 테르미니 역 광장과 마주하고 있다. 고대 목욕탕 옛 구조에 전시실이 있어 별명이 테르메(목욕탕) 박물관이다.

목욕탕 출토품,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 모자이크가 진열되어 있어 고대 미술의 소장에 있어 세계적임을 과시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켈란젤로의 회랑'이다. 기둥,아치, 창의 구성에 리듬감이 있는 아름다운 회랑으로 실제 설계는 야콥 데르두카에 의한 것이다. '루도비시의 옥좌','아우구스투스 황제 상','란첼로티의 원반 던지기' 등이 볼 만하다.
    분류 :  [박물관] 역사, 전시, 미술, 
    입장료 : 12,000L

][극장] 콜롯세움 (Colosseo)

     콜롯세움내에 있는 관광지 : 로마군인 복장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

에스뀔리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 사이 사이에서 그 거대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는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시절인 A.D.72년 네로 황제의 저택이었던 [도무스아우레아](황금궁)의 인공호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서, 원래는 [홀라비우스 원형 극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원형 경기장으로 원형이 가장 잘 보관되어 있는 건물, 그리스도 인들의 대단한 순교지이다.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로마를 상징하는 원형극장이다. 지금 188m의 타원형 구조물로 높이 57m, 4층으로 되어 있다.
    분류 :  [극장] 역사, 종교, 스포츠, 

궁전/성]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2000년전 로마 공화정이 위치하고 있던 장소로 그당시의 유적이 폐허로 보전 되어 있다.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있는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의 중심지이다. 포로라는 이름대로 처음에는 변두리 성의 사람들이 모이던 시장터였다.

현재는 몇 개의 개선문 외에는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폐허가 되었지만, 규모는 커서 걸어서 둘러보는 데만도 2시간이 소요될 정도이다. 입구는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와 카보우르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이곳을 걸을때 고대 로마의 한복판을 걷는 경험을 할수 있다.
    분류 :  [궁전/성]

조형물] 진실의입 (Bocca della Verita)

티베리나(Tiberina) 섬에서 동쪽 강변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왼쪽에 중세시대에 건축한 코스메딘의 성모 마리아(Santa Maria in Cosmedin) 성당이 보인다. 진실의 입이 이 성당 입구 왼쪽에 놓여 있다. 전설에 의하면 말한 사실에 대한 진실성을 밝히기 위하여 이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입을 열게 하면 진실의 여부가 밝혀질 뿐더러 거짓말을 할 경우 입이 닫혀 손이 잘린다고 한다. 중세의 풍습 중에 하나가 많은 전설을 전 한 것이다. 진실의 입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데 진실성이 없는 사람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사실 진실의 입은 고대 로마시대 때에 하수구 뚜껑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수구 뚜껑의 신세에서 표면에 새겨진 얼굴 덕에 하루 아침에 신이 된 케이스이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유명신사가 된 것은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 덕분이다. 아름 다운 사랑이야기 "로마의 휴일"을 본 여성이라면 꼭 기억할테니까 ...

자료제공 : http://www.okroma.net/guide.html
    분류 :  [조형물] 영화, 

조형물] 트레비분수 (Fontana di Trevi)

바로크 양식의 최대 걸작품인 이분수는 동전을 던저 들어가면 로마로 다시 올수 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트래비 라는 이름은 트리비오 Trivio(삼거리)에서 유래한다. 분수가 있는 작은 광장에서 길이 세 방향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이 분수는 '등을 돌리고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에 올 수 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국제적인 명소 답게 분수 바닥은 세계 각국의 동전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동전들은 정기적으로 회수되어 자선사업에 쓰인다.
    분류 :  [조형물]

 

나폴리(Napoli)

 


남이탈리아 최대의 도시 나폴리는 카프리 섬, 이스키아섬등이 있는 나폴리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을 따라 작은 구릉으로 이어지는 나폴리 거리의 풍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나,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이었던 이 거리는 여러모로 볼곳이 많다. 역사나 미술에 흥미있는 분에게는 왕궁, 누오보성, 그리고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추천한다.

나폴리만의 경치를 즐기고 싶은 분은 산타루치아의 해안, 포지리포의 동산을 추천하고 싶다.

지중해의 따사로운 햇살 사이로 아파트 베란다에 깃발처럼 널려 있는 세탁물이 볼만한 스팍카나 폴리는 대표적인 서민들이 사는 곳이고, 낡은 교회, 사적이 많은 역사적 지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되는 본고장의 나폴레타나의 피자를 맛보아야 한다. 2, 3일 여유가 있으면 봄베이는 물론 카프리, 아마르휘, 소렌토등 수려한 나폴리만의 리조트지등도 가볼만 한 곳이다.

나폴리를 보고 죽으라(Vedi Napoli e poi muoia)! 어떤 이가 나폴리를 보고 감탄하여 한 말이다. 누구는 이태리를 Cantare(노래), mangiare(음식), amore(사랑)의 나라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특히 나폴리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보통 한국사람들이 단체관광으로 나폴리를 볼 때 폼페이(Pompei) 유적 지로 가는 도중에 잠깐 둘러 보메로(Bomero) 언덕에서 나폴리만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해안도로를 따라 가며 몇몇 건물을 보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이러한 코스로는 나폴리(Napoli)를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시간에 제한이 있는 사람들은 할 수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나폴리와 인근지역 방문을 위하여 최소한 몇 일은 머물기를 권하고 싶다. 첫날은 나폴리에서, 다음날은 쏘렌토(Sorrento)에서, 그 다음날은 카프리(Capri) 섬에서 머물면 좋겠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폴리 전통 해물 요리와 피자를 와인 한 잔을 곁들여 여유있게 맛보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관광이다. 단 하나, 나폴리 시내에서는 주의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간곡하?부탁한다. 너무 친절하게 접근하여 주머니에서 금 시계, 반지, 목걸이를 꺼내 팔고자 하는 경우가 있는 데 100% 가짜이다. 승용차를 갖고 갈 경우는 저녁에 꼭 관리인이 있는 주차장에 주차 표를 받고 주차시키는 게 안전하다.

 폼페이(Pompeii)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에, 비옥한 토지를 배경으로 일찍이 오스크인들이 촌락을 이룬 뒤, BC 8C 이후 그리스의 식민자 에트루리아인이 이주하면서 마을이 성장하였다.

교역이 번창하여 농산물, 포도주, 어패류, 경석(輕石)을 생산해 수출이 활발하였으며, 그리스 신전이 세워지는 한편 오스크이탈리아문화도 발전하였다.

BC 5세기 삼니움인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누케리아를 맹주로 하는 도시동맹의 일원이 되어 귀족공화정체제를 갖추었다.

BC 3세기 로마의 진출로 한때 독립하여 헬레니즘과 로마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였다. 포에니전쟁 때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편에 섰으나 그 뒤 로마 지배 아래 들어갔으며, 동맹시전쟁에서 다시 로마에 저항했지만 결국 로마시민권을 얻어 귀속되고 많은 로마인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도시제도를 정비하고 라틴어를 수용하였으며, 극장, 베누스신전, 이시스신전, 목욕탕, 바실리카 등을 세워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로마 귀족과 시민층의 휴양지로서 건설된 별장은 호화로운 벽화, 조각,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로마 문명의 상징이랄 수 있는 상,하수도, 포장된 도로, 상점도 갖추어졌다. 최성기에는 인구가 약 2만 명이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폼페이의 볼거리

폼페이는 도시 전체가 유적지이기 때문에 그 크기는 정말 방대하다. 그런데 그 규모에 비해 볼거리의 대부분은 모두 북쪽에 몰려있다.

<비극의 시인의 집(Casa del Poeta Tragico) >
비극의 시인의 집이 유명한 볼거리 중의 하나인 이유는 건물 자체가 가지는 매력 때문이 아니라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개조심이라고 써 있는 돌 때문이다.

<목신의 집(Casa di Fauno)>
원본은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있고 여기에는 복제폼이 있다. 하지만 고풍스러운 정원과 어우러진 모습이 멋지다.

<베띠의 집(Casa di Vetti)>
아기자기한 정원도 좋지만 '폼페이식의 빨강' 이라는 적갈색의 프레스코 벽화가 멋지다. 입구의 오른쪽의 남근 그림이나 침실의 도색적인 그림들 때문에 창녀의 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곽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것은 마귀를 추방하려는 부적었다고 한다. '폼페이식의 빨강'은 현대의 기술로도 재현되지 않는다고 한다. 2000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비의의 장(Villa dei Misteri)>
서쪽의 에르콜라노 문을 나와서 당시의 묘지가 있는길로 500M가면 도착이다. 크고 작은 60개의 방이 있는 대저택으로 큰 방 벽의 한면에 그려진 등신대 인물의 겁먹은 듯한 얼굴 표정과 폼페이의 붉은색 배경이 신비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지진은 로마의 티투스 황제가 집권한지 한 달이 지난 서기 79년 8월 24일 아침에 시작되었다.베수비오산 정상에서부터 시작되어 나폴리만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드문드문하던 진동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잦아졌으며 나중에는 계속된 진동으로 산꼭대기에서는 불꽃을 튀기면서 뿜어내기 시작했다. 에르콜라노에서 쏘렌토 해안선 지역과 사르노 유역 안쪽, 남쪽으로는 파에스툼까지의 지역이 피해를 입었으나 그 중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은 폼페이었다.

폼페이는 사르노강 하구 화산의 경사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약 17년 전, 즉 서기 62년에 이미 지진을 겪었던 곳이다. 열한시간 동안 쉬지 않고 경석과 재가 뿜어져나와 매 시간당 15cc씩의 돌과 잿가루로 길거리, 동네, 정원들은 물론이고 집들도 천천히 파묻히게 되었다. 집들이 무너지자 주민들은 창고로 대피했고 어떤 이들은 제일 견고하게 지어진 곳이라 생각
되는 방으로 피했다. 많은 사람들이 민가를 버리고 지진이 없는 시골을 찾기도 했다. 무더기로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피하기 위해 머리에는 망토나 방석을 뒤집어 쓰고 돌 잿더미 위를 걸어 피신하는 폼페이인들은 목적지 없이 무작정 폼페이를 떠났다.계속해서 폭발하던 화산은 자정 즈음 약간 누그러지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뜨거운 가스와 화산암 덩어리를 분출해 내면서 바위조각들을 화산 등성이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유황과 염
소, 화산암조각들과 바위조각들이 뒤섞인 가수가 잇달아 뜨거운 열풍이 되어 화산 등성이에 퍼지고 그 지역을 불태워 휩쓸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진흙 사태와 쇄설성의 뜨거운 잿더미가 물에 범벅이 되자 속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진흙더미나 물과 재가 섞인 잿더미들이 모두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흘렀는데 그곳은 급류가 흐르는 두 개의 대협곡으로 싸인
해각으로서 바로 에르콜라노 시가가 위치한 곳이었다.

여기 이곳 주민들은 하루내내 윗동네에서 일어난 엄청난 광경들을 지켜봤지만 그 순간까지 굉음조차도 그다지 무서운 소리로 들리지 않았고 손톱만큼의 재도 날아오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어떻든 그들도 만약의 비상사태를 감안해 이미 집들을 버리고 바다쪽으로 피신을 시도했는데 화산은 그 쪽으로 지진 진동을 시작했고, 이 진동으로 엄청나게 큰 센 파도가 덮쳐 정박해 있던 배들은 모두 바위덩어리에 부딪쳐 이미 떠내려갔기 때문에 바다로 피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미세움에서 온 해군제독 카이오플리니오 트란퀼로의 구조함선대 또한 접근하지 못하고 구조작업에 실패했다

공포에 찬 에르콜라노인들은 무조건 바다쪽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질뿐 당황해하면서 화산이 진정되고 바다가 평온을 찾을 것만을 기원하였으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 명 정도의 남녀와 어린이 그리고 짐승들이 모여 있는 곳에 뜨거운 화산의 열기가 몰아쳤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생명체란 생명체는 모두 몰살되었다. 잠시후 도시의 광경은 죽은 시체만
겹겹이 쌓이고 그 시체들 위로 가만히 진흙탕 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두 번의 뜨거운 열기와 진흙더미가 섞인 지진이 1시간 동안 도시를 덮은 후, 네 번째의 열기가 25일 새벽에 또한번 휩쓸고 지나갔다. 가옥, 큰 건물 할 것 없이 모든 건축물은 진흙 속에 잠기기 시작했으며, 바닷물조차 100m 정도나 밀려나 버렸다. 폼페이 최후의 고통은 에르콜라노보다 훨씬 더 연장되었다. 독가스가 세 번이나 도시의 성벽까지 퍼졌고, 아침 6시경에는 도시 안으로까지 밀고 들어온 독가스와 네 번째로 불어온 뜨거운 화산 열기로 지진이 남아있던 생존자들마저 곧 모두 생명을 잃게 되었다.또 다시 두 시간 동안 두 번의 가스사태와 진흙사태가 해변에 침입했다.

에르콜라노시에는 죽어서 쌓인 시체들의 높이가 20미터에 이르고, 폼페이에는 2m 70cm의 경석이 쌓이게 되었는데, 이 고아경은 붕괴와 몰살이라는 표현이 꼭 알맞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에르콜라노의 해군함선구조대를 지휘했던 카이오 플리니오 트란퀼로 제독이 수증기가 인 열풍에 질식해 사망했다.

출처 - '폼페이 최후의 날' 책 내용 中
http://my.netian.com/~needwony/talent.html

 

][마을/지역] 쏘렌토 (Sorrento)


나폴리 민요 돌아오라 쏘렌토(Torna in Sorrento), 오! 나의 태양(O! Sole mio)으로 유명한 소렌토(Sorrento)는 나폴리 만 남쪽에 있는 소렌토(Sorrento) 반도 끝의 단층 지형이 만들어 낸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자연이 만들어 낸 절경 위에 형성된 쏘렌토(Sorrento)는 과거부터 아름다운 경치와 온화한 날씨, 맑고 잔잔한 물로 뭇 사람들의 잊지 못할 추억의 순간을 제공한다. 한 여름 구름 한점없는 하늘에 떠있는 태양아래 자연이 만들어 낸 조화는 정말 아름답다. 무언가 친근감을 주는 오렌지와 레몬 과수원이 연출하는 한 폭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쉼과 사랑을 제공한다. 쏘렌토(Sorrento)는 년 중 언제 찾아가도 상쾌한 바닷가가 맞아주는 휴양도시이다. 이탈리아 여행에 지쳤다면 이 곳 쏘렌토(Sorrento)에서 여장을 풀고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아말피(Amalfi) 해안을 감상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과거나 오늘이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는 곳으로 7~8월은 피하는 게 좋다. 사랑하는 연인과 왔다면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은은한 불빛아래 한 잔의 와인과 맛있는 해물요리로 저녁을 즐기는 것도 멋있는 한 순간이 될 것이다.

자료제공 :
http://www.okroma.net/guide.html

 

로마(Rome)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20여세기에 걸친 인류의 역사를 그대로 현대에 전하여 주는 대도시이다. 훠로 로마노, 코롯세오등의 고대 로마유적, 바티칸의 산 피에토로 사원을 비롯한 대교회들, 그리고 에우르, 훠로 이타리코등의 근대 건축등, 긴 역사에 걸치어 로마가 각시대에 쌓아온 문화유산의 불가사의한 조화가 영원의 도시에 멋진 경관을 부여하고 있다.

로마에서 빼놓을수 없는것이 식도락과 쇼핑이다. 유명 브틱이 줄지어 있는 고급 상점가, 로마의 젊은이들이 쇼핑을 즐기는 여러지역. 아이쇼핑만 하여도 멋진 패션센스에 접할수 있다. 식사는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에서도, 서민적인 핏체리아에서도 다양하게 즐길수 있다. 어디에서도 맛있는 요리와 따뜻한 웃는 얼굴이 여행자를 뜨뜻하게 맛이하고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분수나 광장을 찾아 거리를 산보하면 로마의 휴일은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도시 개요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20여세기에 걸친 인류의 역사를 그대로 현대에 전하여 주는 대도시이다. 훠로 로마노, 코롯세오등의 고대 로마유적, 바티칸의 산 피에토로 사원을 비롯한 대교회들, 그리고 에우르, 훠로 이타리코등의 근대 건축등, 긴 역사에 걸치어 로마가 각시대에 쌓아온 문화유산의 불가사의한 조화가 영원의 도시에 멋진 경관을 부여하고 있다.

로마에서 빼놓을수 없는것이 식도락과 쇼핑이다. 유명 브틱이 줄지어 있는 고급 상점가, 로마의 젊은이들이 쇼핑을 즐기는 여러지역. 아이쇼핑만 하여도 멋진 패션센스에 접할수 있다. 식사는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에서도, 서민적인 핏체리아에서도 다양하게 즐길수 있다. 어디에서도 맛있는 요리와 따뜻한 웃는 얼굴이 여행자를 뜨뜻하게 맛이하고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분수나 광장을 찾아 거리를 산보하면 로마의 휴일은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피렌체(Pirenche)
 

이태리 중부의 주요도시. 인구 약46만. '꽃의 도시'란 의미로 영어로는 플로렌스라고도 한다.신흥공업도시이자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상공업이 성하며 식품, 의료, 가구, 자동차 부품, 냉장고 등의 공업이 활발하고 특히 전통적으로 이름 높은 가죽제품도 생산되고 있다.

이태리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13~15C의 예술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시뇨리아 궁전을 비롯하여 국립미술과, 도서관, 교회 등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시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과 같은 양상을 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격심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영국, 독일 양군의 치열한 공방전의 무대로 참화를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태리에서 손꼽히는 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학술 연구기관이 모여있어 문화 도시로서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피렌체(Fiirenze)는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도시로 역사가 깊기 때문에 유명한 성당, 팔라초라 불리는 궁전, 피아차라 불리는 광장 등이 많고 성당과 궁전에는 이 고장에서 활약한 위대한 예술가의 회화와 조각이 소장되어 있다. 이곳의 유명한 성당은 Santa Maria del Fiore 대성당, 산타 마리아 코로체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산타 마리아 델라 키르미네 성당, 산 노렌죠 성당 등이고, 궁전은 피렌체 주 청사, 필라초 메디치 퀴카르디, 필라초 우피치 등이다.

꽃의 도시 피렌체는 거리 전체가 르네상스의 보물을 곳곳이 박아 놓은듯한 거대한 미술관인듯한 느낌이다. 장미빛 지붕이 아름다운 꽃의 성모사(두오모), 시뇨리아 광장에 서있는 미켈란젤로상, 베키오 궁전의 장중한 건물, 그리고 평화롬게 흐르는 아르노강쪽에 보이는 폰테 베키오. 거리의 우아한 느낌은 르네상스 당시의 화려한 번영을 상기시킨다.

르네상스기 최고의 미술품을 보관하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이나 피티 미술관을 비롯하여 시내의 교회, 건물의 구석구석에서 대예술가의 작품을 볼수있는 피렌체의 거리는 미술 팬에게는 흥미에 넘치는 관광지이다. 또한, 데도르나브오니 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쇼핑가는 피혁제품, 패션 관계의 멋있는 상점들이 즐비하여, 관광하는 사이에도 충분히 쇼핑을 즐길 수 있다.
 
][교회/사찰]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또는 두오모 성당 (Santa Maria dei Fiore)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는 피렌체의 중심 성당, 단테가 세례를 받았다는 세례당의 천국의 문과 '최후의 심판', '피에타'가 있다. 산타마리아 노벨라 광장에서 동쪽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은 1294년 피렌체의 시민들이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 대신에 대성당을 짓기로 결의하고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에 따라 기공하였다.

몇 차례 설계의 주체가 변경되고 공사의 중단을 겪으면서 1420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거대한 돔은 1887년에 가서야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카에 의해서 완성할 수 있었다.

녹색과 백색 그리고 분홍색의 대리석으로 기하학적으로 디자인된 외관은 여성적인 우아함을 자랑하고 있다

높이 106미터의 이 거대한 주황색 돔은 미케란젤로가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만들때 참고했을 정도였다고하니 그 규모와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흰색 일색으로 지어진 고대 성당 건축과는 다르게 주황색과, 녹색의 대리석을 기하학적으로 배열하여 사용한 이 성당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변색되어 고딕양식의 예리함보다 오히려 유연하면서도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후일 피렌체 고딕 양식이란 독특한 장르를 만들게 되었다.

'Santa Maria del Fiore'는 '꽃의 성모'라는 뜻이다.
    분류 :  [교회/사찰] 종교, 미술, 
거리/광장]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거리의 남쪽으로 흐르는 아르노 강 북쪽에 위치한 시뇨리아 광장은13~14세기에 열린 광장으로 피렌체 정치의 중심 무대가 된 곳이다. 옛날 그리고 지금도 피렌체 행정의 중심지로서 공화정을 모토로 했던 피렌체인이 곳곳에 모여 토론을 벌이고 거수에 의해 표결에 부쳤던 곳이다.

광장은 베키오 궁전과 많은 조각이 늘어선 조각관이 있는 야외 미술관의 역할도 한다. 광장 중앙에는 ‘넵튠의 분수’가 있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복제품도 있다. 이 분수 근처 둥근 브론즈의 부석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 수도승 사보나로라가 화형으로 처형된 장소 나타 내는 화강암 표식도 있다.
    분류 :  [거리/광장]

베키오궁전 (Palazzo Vecchio)

베끼오라(Vecchio)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오래되었다는 뜻이며 팔라죠(Palazzo)는 궁전이라는 뜻이다. 94m의 탑신을 높이 드리운 베끼오 궁전(Palazzo Vecchio)은 엄격한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1298년에 아르놀프 디 깜비오(A. di Cambio)가 시작하여 1314년에 완성되었다. 1550년 코시모 1세(Cosimo I)가 피티 궁(Palazzo Piti)으로 옮기기 전까지 당대 최고의 메디치(Medici) 가문의 궁전으로서 피렌체(Firenze)의 정치를 총괄하던 곳이다. 한때 피렌체(Firenze)가 이탈리아 통일 기에 잠정적인 수도(1848~49,1859∼60, 1865∼71)일 때 집무를 본 곳으로 현재의 시청이다. 궁전에는 바사리(Vasari), 베네데또 다 마이아노(Benedetto da Maiano), 미켈란젤로(Michelangelo)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무척 호화롭다. 한 마디로 메디치(Medici)가와 피렌체(Firenze)의 영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궁전 앞의 광장은 씨뇨리아 광장(Piazza di Signoria)으로 혁명가 사보나 롤라(Savonarola)가 화형 당한 곳이다. 광장에는 1594년 쟘볼로냐(Giamblogna)가 세운 메디치(Medici)가의 코시모 1세(Cosimo I) 상을 비롯하여 넵튠의 분수등이 있다. 베끼오 궁전(Palazzo Vecchio)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어린 시절의 베아트리체(Beatrice)와의 사랑을 그린 신곡의 작가로 유명한 단테(Dante 1265∼1321)의 생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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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사진] 현재 시청으로 사용하고 있는 베키오 궁전   
][거리/광장] 미켈란젤로 광장 (Piazzale Michelangello)

아르노(Arno)강 서편 언덕에 위치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광장은 19세기에 건축가 지 포지(G. Poggi)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 광장 가운데에는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아카데미아(Academia) 미술관에 소장 되어있는 다비드(Davide) 상과 성 로렌쪼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의 신감실에 있는 조각들을 복사하여 세워 장식하였다. 이곳에서 보여지는 피렌체(Firenze)의 전경은 예술의 도시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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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사진]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피렌체(Firenze)의 야경   
    분류 :  [거리/광장] 역사, 전시, 미술, 

피렌체에서 쇼핑해보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치 본점과 벨트라미의 쇼윈도에 장식된 화려한 구두와 가죽 옷들 그리고 베키오 다리에 늘어선 금은 세공집들에 가보자. 피렌체는 옛날부터 가죽제품과 금은 세공품으로 유명하다.

구경을 끝내고 나면 산 로렌초 교회 옆으로 가보자. 이 일대의 시장은 피렌체 제1의 규모로 연중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시장 중심에 있는 것이 2층 건물의 식료품 시장이다. 만약 피렌체인들의 식탁이 궁금하다면 한번 들려보자. 화요일 오전이면 피렌체에 있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권할 만한 것이 시내 서쪽 아르노 강변의 카시네 공원에서 열리는 카시네 시장이다. 거리 노점에는 양복에서 식료품까지 모든 것이 다 있다. 아침 일찍부터 붐비고 여기서 볼만한 것은 구두류와 양복류이다. 우리 나라에 온 관광객들이 동대문, 남대문과 같은 시장을 보러오는 것처럼 우리도 한번 이탈리아의 시장이 어떤지 한번 구경해보자. 어쩌면 한국의 어느 시장 귀퉁이에 서있는 듯한 착각이 들지도모른다.

베네치아(Venechia)
 

이태리 북동부 아드리아해 북안에 위치한 역사 깊은 항구 도시로 인구 약 36만. 베네치아는 118개의 섬들이 약400여개의 다리로 이어져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로 되어 있는 독특한 시가 구조를 가진 도시로 널리 '물의 도시'로 일컬어 지고 있다. 따라서 시내에는 자동차가 전혀 없으며 길을 하나 건너는 데도 배를 타야만 한다.

유리세공업으로 유명한 무라노섬, 국제 영화제 및 해수욕장, 카지노 등으로 유명한 리도 등도 베네치아에 속해 있다. 또한 공화국 번영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 아카데미아 미술관 등은 미술, 건축 예술의 보고로 알려져 있어 베네치아는 이태리에서 로마, 피렌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물의 도시인 베네치아는 대운하를 곤도라가 왕래하는 전경은 세계의 관광객의 여정을 자극시키는 곳이다. 중세에서부터 동방과의 무역을 해왔으며, 아드리아해의 여왕이라고도 불리어온 해운국 베네치아의 빛나는 역사는 오늘날 산 마르코 광장의 사원, 궁전을 비롯하여 시내 여러곳의 건물이나 화려한 전통 행사중에서 짐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당시의 화가들의 색감 풍부한 회화는 아카데미아 미술관등이 보관되어 있다.

배와 도보가 교통 수단인 베네치아에서는 모든것이 인간적인 휴먼 스페이스로 움직이고 있다. 쇼 윈도우를 살펴보면 베네치아에서 유명한 여러종류의 유리상품들이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시내 전체에 넘치는 로맨틱한 무드가 관광객을 매료시킨다. 이렇게 발닿는데로 거리를 산보한 후에는 레스토랑의 편안한 분위기 중에 와인 잔을 앞에 놓고 신선한 해물 요리를 마음껏 즐겨보고 싶은 충동이 저절로 일어난다.

아드리아해에 어둠이 내리면 물위의 도시 베네치아 하늘로는 별빛이 온통 총총하다. 그 별빛 받으며 초생달처럼 날렵하게 생긴 곤돌라에 몸을 싣고 운하를 둥둥 떠다닌다. 11세기 이래 베네치아의 중요한 교통 수단이 된 곤돌라 덕분에 이 도시의 골목길은 누워서도 구경할 수 있다. 연인과 함께라면 더욱 황홀하다. '탄식의 다리(Bridge of Sigh)'밑을 지나노라면 영화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1600년에 지어진 이 다리가 한때 베네치아 총독들의 궁전인 투칼레(Ducale)와 감옥 사이의 통로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 다리를 건너면서 죄수들이 겪어야 할 '한숨과 탄식'이 바로 다리 이름이 됐단는 유래는 더더욱 탄식을 자아내기도 한다.
][거리/광장] 산 마르코 광장 (Piazza San Marco)
     산 마르코 광장내에 있는 관광지 : 산 마르코 성당시계탑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 마르코 광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대리석 살롱이다(길이 175m, 폭 80m). 전 광장을 둘러싸고 유개 회랑이 설치되어 있으며 여기엔 유명한 카페들과 고급 상점들이 자리잡고 있다. 바실리카(성당) 앞에는 세개의 깃대가 꽂혀 있어서 사이프러스, 칸디아, 모레아의 베네치아 왕국을 상징한다.

대운하로 열려 있는 광장은 전에 '일 브롤리오(Il Broglio)'라 불리웠다. 그것은 음모라는 뜻인데, 10:00~12:00까지 오직 귀족들만이 거기서 만나는 일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산 마르코의 사자상을 위에 올려 좋은 두개의 화강암 기중과 성 테오도레의 상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 온것이다.

만조 때는 바닷물에 잠겨, 옷을 걷고 노천까페에 않아 커피를 마시는것도 재미있는 경험이다.
    분류 :  [거리/광장] 역사, 미술, 

][조형물] 종 탑 (Campanile)

성당 건너편에 위치한 98,6m의 종탑(Campanile)은 화려하게 장식된 성당과는 대조 적으로 무척 간결하다. 10세기에 축조된 이 탑은 1902년 어느날 밤 무너져 1912년에 다시 옛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여 세워 놓은 것이다. 종 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 밑에 위치한 유명한 산소비노(Sansovino)가 피해를 면 치 못했는데 이 것은 본래 1540년에 건축된 건물이었다. 복원된 산소비노(Sansovino)에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 태양신 아폴로, 상업의 신 머큐리와 평화의 신들이 전시 되어 있는 데 모두 산소비노(Sansovino)의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 상 역시 그의 작품이다. 현재 관광객들에게 베네치아(Venezia)의 아름다운 전망을 제공하는 종 탑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오를 수 있으며 이곳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베네치아(Venezia)을 한 눈에 관망할 수 있다.

자료협조 : http://www.okroma.net/guide.html

[상단 사진] 종탑   
    분류 :  [조형물] 역사, 
    입장료 : 6,000L
    입장시간 : 겨울 09:00 ~ 16:00 , 여름 09:00 ~19:00

][다리] 탄식의 다리 (Pontidei Sospiri)

탄식의 다리는 총독궁과 교도소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17C에 만들어진 이 다리는 죄수들의 한탄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일명 소스피리 다리, 한번 건너간 죄인은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다리의 작은 창에서 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며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여기에 카사노바가 감금된 적이 있었으다. 그러나 그는 환상적인 방법으로 탈출했다고한다.
[상단 사진] 탄식의 다리   


출처 : 천국의 섬 보라카이  |  글쓴이 : 여행돌이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