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 4. 23:42ㆍ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최화진 뉴욕 나약대교수 간증
역경의 열매-국민일보에서
*‘테너 최화진’되기까지 숱한 눈물의 씨앗요즘 찬양 집회를 위해 전국을 다니다보면 붉게 물든 고운 단풍에 취해 그만 넋을 잃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라며 찬송을 부르게 된다.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마음껏 하나님을 불러보는 것. 얼마나 기다려온 날인가. 1982년 돈 한푼 없이 미국으로 건너간 나는 현재 뉴욕 나약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던 내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교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이 때문에 지난 13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난 7월에 1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했고 현재 교회 학교 등에서 찬양 간증집회를 열고 있다. 간증을 하며 내 삶을 잠시 돌이켜보면 ‘테너 최화진’이 되기까지 숱한 눈물의 씨앗을 뿌려왔다. 1952년 나는 형제 많은 집 막내로 태어났다. 할머니, 부모님, 형님 두 분과 누이 등 우리 식구는 모두 여덟이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방 한 칸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아랫목은 늘 큰형님의 자리였다. 6·25 전쟁 때 관통상을 입은 형님은 몸이 아파 항상 누워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장독대에 정한수와 북어를 올려놓고 매일 형님의 건강을 빌었다. 아버지는 책을 만드는 편집인이었다. 그래서 야담을 많이 읽으셨다. 왕십리 우리 집은 밤마다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버지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다 목이 마르면 “화진아, 노래 한번 불러봐라”며 나를 불러 세우셨고 그 사이 아버지는 목을 축이셨다. 다섯 살이 채 안된 나이였음에도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들을 멋들어지게 불렀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이때부터 막연히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저 베토벤 모차르트 같은 유명한 음악가를 꿈꿨다.그러다가 테너라는 성악분야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당대 유명한 테너였던 프랑코 코넬리의 노래를 들으면서다. ‘어떻게 사람에게서 저런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까?’라며 그의 목소리를 흉내내곤 했다. 문득 제대로 음악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음악대학에 들어가서 코넬리 같은 훌륭한 테너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다가 부도를 내면서 집은 물론 모든 재산을 날려버렸을 때였다. 매일 빚쟁이들이 찾아와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고등학교도 겨우 들어갔다.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자 방황이 시작됐다.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왜 우리 집은 돈이 없을까’라며 모든 게 부정적으로만 보였다. 매일 한숨만 내쉬면서 침울해 하던 나에게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왔다. “화진아, 우리 교회 찬양대에서 찬양하면 정말 멋질 것 같아. 이번 주에 함께 교회가서 노래하지 않을래?” 다시 노래할 수 있다는 말 한 마디에 친구를 따라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교회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약력
△1952년 서울 출생
△휘문고 졸업
△84년 미국 줄리어드음대 수석 입학
△86년 레이건 초청 백악관 연주
△89년 뉴욕챔버오케스트라와 카네기홀 연주
△뉴욕타임스 ‘가장 힘있고 아름다운 소리의 소유자’ 호평
△독일 뮌헨 오페라하우스 연주회 등 다수 연주 활동
△현 미국 뉴욕 나약대 음대 성악과 교수
(2) *성가대서 찬양할 때 뜨거운 기운과 방언
“화진 형제, 정말 노래 잘하네.” “찬양대 솔리스트를 하면 좋을 것 같아.” “너무 멋있어.” 찬양대원들은 ‘잘한다’고 칭찬해주었다. 갑자기 어깨가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동안 막내라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형님이나 누이들에게 ‘곰같다’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교회만 오면 모두 아낌없이 칭찬해줬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3주가 지났다. 찬양대석에 앉아 찬양을 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운에 사로잡혔다. 몸이 뜨거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방언이 터져나왔다. ‘바로 이것이 성령체험이구나.’ 그동안 나를 부정해왔던 것, 우리 가족을 비참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회개하며 앞으로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하나님께 서원했다. “제게 좋은 목소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주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긍정적인 신앙인으로 변화됐고 어려운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면 어떠랴. 내가 개척하면 되지’라고 굳게 마음 먹었다. 어렵게 고교를 졸업하고 얼마 뒤 바로 입대했다. 나는 육군본부 합창단에 들어갔고 믿음 좋은 친구들을 만나 육군본부 남성 4중창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그때 우리 중창단의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외부에서 특송 요청을 많이 받았다. 교회 강연회 행사장 등 오히려 부대에 있을 때보다 밖에서 노래하는 시간이 많을 정도였다. 제대를 몇 달 앞 두었을 때 우연히 우리 중창단의 노래를 들은 김장환(극동방송 사장) 목사님께서 한 가지 제안을 해오셨다. “내가 세계일주 선교여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제대한 뒤 나와 동행하지 않겠는가?” 1977년초 제대 후 바로 목사님과 선교여행을 떠났다. 중동 유럽 아프리카 지역 등을 돌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미국이었다. 김 목사님은 당시 지미 카터 미 대통령과 친분이 있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백악관에 초청돼 그곳에서 특별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또 이듬해 목사님과 함께 2차 선교여행에 나섰다. 미국 선교여행 때는 재닛이라는 할머니댁에 머물렀다. 한번은 할머니와 슈퍼마켓에 갔다. 한쪽 진열대에 깡통이 수북하게 쌓여있는데 모두 강아지 그림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의아해서 할머니에게 깡통에 대해 물으니 “모두 개 사료”라고 가르쳐주었다. 순간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깡통을 뜯으면 그 안에는 항상 맛있는 먹을거리가 가득했었다. 그런데 개가 깡통 속의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 개가 이 정도의 좋은 음식을 먹는다니. 만약 내가 미국에 가면 개보다야 더 잘 먹고 잘 살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한시도 미국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귀국한 뒤 김 목사님의 권유로 극동방송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서울침례교회에서 찬양대 활동을 하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1981년 7월 결혼했다. 우리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신앙 안에서 힘든 시간을 이겨내며 살았다. 그러다가 문득 무대에서 노래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럴 때면 꼭 한 가지 ‘미국에 가면 개보다야 내가 더 잘 먹고 잘 살겠지’란 생각이 교차됐다. 아내에게 미국에 가서 정식으로 노래를 배우고 싶다며 미국에 가자고 이야기했다. 정리=노희경기자
(3) 40달러 들고 美유학…
두 달은 감자로 연명 미국에 가자는 말에 아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임신 7개월의 몸으로 가진 것 없는 나를 무작정 따라나선다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아내는 “당신이 그렇게 미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연락을 줘요. 그러면 뒤따라 갈게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설득, 함께 떠나기로 마음을 모았다. 막상 미국에 간다고 하니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무슨 돈으로 항공요금을 마련하고 미국에서는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당시 출석하던 서울침례교회 이동원 목사님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명쾌한 해답을 주셨다. “화진 형제는 노래를 잘하니 교회에서 콘서트를 열어 후원금을 모금하는 게 어때요?” 교회에서 고별 콘서트를 열고 모아진 돈으로 편도 항공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남은 돈 40달러를 들고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가 1982년 5월이었다. 존 F 케네디 공항에서 워싱턴 공항으로, 다시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버지니아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내렸다. 만삭의 몸인 아내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이 미국이구나. 내가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곳. 그런데 왜 이렇게 두려운 것일까. 첩첩산중에 둘러보고 또 둘러봐도 불빛 하나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꾹 찔러 넣으니 달랑 40달러 지폐가 잡혔다. 순간 무릎이 힘을 잃고 ‘툭’ 꺾였다.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가 갑자기 파도가 밀려오며 풍랑이 일자 두려워하면서 바다에 빠지지 않았던가. 내가 바로 그 모습이로구나. 내가 물위에 서있구나. 여기가 물위야.’ 아내가 나의 손을 꽉 잡았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눈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당신을 믿어요. 무엇을 두려워하세요? 예수님이 계신데.’ 마음속으로 외치며 다짐했다. ‘그래, 예수님은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해주셨어. 주님만 바라보고 살자.’ 나를 초청해준 밥 그윈 목사님을 만나 잠시 머무를 곳을 안내 받았다. 목사님이 제공해준 방은 오랜 세월 사용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어두침침한 방에 불을 켜니 한쪽에 냉장고가 있었다.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 달걀 빵 우유가 들어 있었다. 널찍한 침대에 피곤한 몸을 누이자 스프링이 내려앉으면서 침대가 반으로 접혔다. 잠을 청하려는 데 갑자기 벽난로에 박쥐 한 마리가 떨어졌다. 1주일은 빵과 우유를 먹으며 버텼다. 그 다음 먹고 사는 게 문제였다. 눈에 띄는 대로 낚싯대를 들고 호수로 나가 고기를 잡아 올렸고 밭에 널린 감자와 고구마를 캐어 먹었다. 그렇게 두어 달을 보냈다. 어느 7월 뜨거운 여름날 밤 아내의 진통이 시작됐다. 밤 11시에 병원으로 갔고 아내는 7시간여의 진통 끝에 첫 딸 제시카를 출산했다. 의사는 동양인 아이를 처음 보았다며 예쁘다고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매일 감자만 먹어서 얼굴이 새카만 것일까? 아내가 제대로 먹지 못해 아기가 마른 것일까?’ 무엇보다 병원비가 없었다. 의사는 풀이 죽어 있는 내게 “밥 최(미국에서는 나를 이렇게 부른다),나는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노래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면서요. 병원비는 걱정하지 말아요. 돈이 생기는 대로 한 달에 얼마씩 나눠 내면 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4) *유학 4개월새 출장특송 전문가
‘우뚝’주님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사랑의 천사들을 보내주셨다. 밥 그윈 목사님, 딸 제시카를 받아준 산부인과 의사, 그리고 나의 첫 번째 음악 스승. 1982년 9월 2년제 전문대학인 ‘사우스웨스트 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음악 교수 한분이 피아노 뮤직이론 합창 등을 모두 가르쳤다. 어느 날 음악 교수가 나를 불렀다. “밥 최, 노래 한번 불러 봐요.” 교수님의 반주에 맞춰 ‘주기도문’을 불렀다. 노래가 다 끝나고 교수님이 어떤 말을 해줄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그 교수님은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미동도 하지 않으셨다. ‘내가 노래를 잘못 불렀나?’ 교수님 앞에서 처음 노래를 부르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잘 불렀다고 생각했다. 잠시 뒤 교수님은 “최고였어. 너무나 감동적이었어”라며 박수를 쳐주셨고 이번 주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와서 찬양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내 형편은 열악했다. 아내는 딸을 낳고 제대로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낚시로 건져 올린 물고기와 감자, 고구마로 배를 채웠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나마 주일에 교회에서 먹는 한 끼 식사가 우리 부부의 유일한 성찬이었다. 그런 내게 찬양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찬양을 부를까’보다는 ‘정식으로 초청을 받았는데 식사는 잘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갔다. 미국에서 처음 서는 무대였기 때문에 많이 떨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불렀고 ‘앙코르’가 터져 나왔다. 나의 첫 번째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게다가 그날 우리 부부는 만찬에 초대됐고 사례비도 받았다. 아내는 그날 밤 미국에서 처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며 흐뭇해했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딸아이에게 젖을 물렸고 아이 역시 엄마의 젖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문득 그 모습을 보자 속이 상했다. ‘차라리 내가 안정을 찾은 뒤 오라고 할 걸…’ 내게 먼저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은 뒤 부르라고 했던 아내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후회스러웠다. 며칠 뒤 다른 두 교회에서 초청을 받았다. 지난주 찬양을 잘 들었다며 우리 교회에도 와달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출장 특송 전문가’가 됐다. 교회 뿐 아니라 결혼식 결혼기념일 돌잔치 장례식에까지 불려 다녔다. 특히 주지사가 마을에 온 날 나는 미국 국가를 불렀고 주지사와 나란히 앉아 식사도 했다. 지역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그런 나를 두고 ‘다섯 자 정도 되는 사람이 열자 사람의 소리를 낸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이 조그마한 마을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나자 나는 자동차 한 대를 구입할 수 있었다. 내 찬양을 듣고 평생 농사만 지어온 한 촌로는 투박한 손을 내밀며 “감동적이었다네. 내가 성의 표시를 하고 싶은데”라며 ‘꽁꽁’ 싸매두었던 1달러짜리 지폐 2장을 건넸다. 또 한 장애인 부부는 “당신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다”면서 주머니에서 동전 4개를 꺼내줬다. 하나님은 촌로의 마음까지 움직여 나를 인도하고 계셨다. 이분들은 나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분들의 사랑에 따뜻함을 느꼈다. 처음 미국 생활은 낯설고 힘들었지만 점점 그 세상에 빠져 들어가는 내가 좋아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났다. 그때 마음속으로 다짐한 게 있었다.‘이 자동차를 타고 나를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5) *뉴욕서 날아 온 음대 입시요강 서류내
삶의 또 다른 격려자인 팻 와야트 교수. 그녀는 사우스웨스트주의 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어느 날 와야트 교수로부터 함께 살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테즈웰의 저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와야트 교수는 교회에서 나의 찬양을 듣고 그런 결심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제안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밤이면 박쥐가 떨어지고 어두침침한 그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와야트 교수는 딸 제시카를 친손녀처럼 아끼고 사랑해줬고 우리 부부를 자식처럼 돌봐줬다. 와야트 교수와 함께 살면서 이듬해인 1983년 둘째딸 에리카를 낳았다. 교회 집회를 다니며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찾았을 때 나는 틈틈이 낚시를 즐겼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먹고 살기 위해 낚시를 했지만 그때는 취미생활이 됐다. 어느 날 낚시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데 흰 벽돌로 예쁘게 지어진 한 자그마한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교회를 보자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어졌다. 뜨거운 여름날 교회에 들어 가보니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강대상 옆에는 먼지가 뽀얗게 싸인 피아노 1대가 놓여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안 쳤는지 건반을 눌러도 건반 사이에 낀 먼지 때문에 건반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이 이렇게 울적한데 하나님은 어떠실까?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구나. 정말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겠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시골의 한 교회에서 열리는 ‘홈 커밍 선데이’ 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나를 초청한 교회가 바로 울적한 마음으로 나왔던 그 흰벽돌의 예쁜 교회였다. 많은 사람이 나의 찬양을 듣고 그 기쁨을 이어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불렀다. 찬양을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데 한 할머니께서 지폐를 든 손을 덜덜 떨면서 내게 다가왔다. 약간 몸이 불편한 듯 보였다. 그 할머니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며 내게 감사 표시로 지폐를 건네며 말했다. “밥 최는 왜 이런 시골에 살지? 뉴욕에 가면 줄리어드나 맨해튼 음대에서 공부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더 크게 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시골에서 이러고 있지?” 갑작스런 할머니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그저 “줄리어드는 알아요. 제게는 딸 둘이 있고 그곳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제 형편에 가능할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기도해봤어?”라고 재차 되물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기도해볼게요”라고 말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잠을 자기 위해 누웠는데 천장에 그 할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하나님, 어떤 할머니가 저더러 줄리어드를 가라고 하는 데 그게 가능할까요?” 그날 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잠을 청했다. 며칠 뒤 뉴욕에서 서류봉투 1개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줄리어드 음대 맨해튼 음대 등 음악대학 입시요강이 들어있었다. 이것을 보낸 분은 뉴욕 롱아일랜드 헌팅턴감리교회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다. 일전에 만났던 그 할머니가 바로 사모님이었다. 줄리어드 음대의 입시요강은 영어수필과 뮤직이론시험, 그리고 실기는 영어 독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2곡씩 부르는 것이었다. 한 번도 독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된 노래를 불러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참 황당했다. ‘8곡을 어떻게 노래해? 나를 놀리는 건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보면서 마구 불평이 쏟아졌다.
(6) *독학으로 연습… 줄리어드 음대
합격 뉴욕에서 날아온 줄리어드 음대 입시요강을 본 날부터 마음이 심란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호미를 들고 멜론 밭에 나가 잡초를 잡아 뜯으면서 “도대체 그런 것은 왜 보내서 사람 맘을 뒤흔드는 거야?”라며 불평을 쏟아냈다. 그때 나를 향해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물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밥 최, 그 동안 노래는 어떻게 배웠어? 네가 돈이 있어서 레슨을 받았니?” “아니지.” “그럼? 네가 악보를 보고 박자 음정 따져가면서 노래를 배웠니?” “그것도 아니지.” 내 마음이 둘로 쪼개져 서로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그렇지, 나는 그저 귀로 들으면서 노래를 배웠지.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훈련시키셨어.’ 그 길로 백화점에 가서 영어 독어 이탈리아어로 부른 오페라 아리아 테이프를 샀다. 프랑스어로 된 것이 없어 학교 프랑스어 선생님에게 발음을 부탁해 녹음해서 들었다. 그렇게 테이프를 2개월 동안 반복해 들으며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테이프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발음을 그대로 흉내 내 혼자 연습했다. 시험을 보러 가는 날까지도 닳아서 안 들리는 테이프를 귀담아 들으려고 애썼다. 한적한 시골을 벗어나 대도시 뉴욕 줄리어드 음대로 갔다. 대기실에는 400여명의 남녀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잘 생기고 젊은 아이들이었다. 내 앞의 한 남학생은 할리우드 영화배우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졌다. ‘저렇게 잘생겼다면 노래도 잘하겠지.’ 그 친구가 시험을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귀를 문에 대고 들어봤다. 그 친구의 노랫소리가 하도 괴상해 나는 ‘픽픽’ 소리를 내 웃었다. 갑자기 문을 박차고 나온 그 학생이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시뻘개진 그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돼 있었다. 이제 내 차례. 나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을 보니 흐뭇한 표정을 짓는 듯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데 바로 내 앞에서 시험을 본 그 남학생이 나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너 누구한테 노래 배웠니?” 나는 웃으면서 “테이프 듣고 시험 보러 왔는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머리가 하얀 한 중년 신사가 나를 불렀다. “네가 밥 최냐? 열심히 해라”며 내 등을 토닥였다. 그분이 내 미래의 스승 오렌 브라운 선생님이었다. 1차 합격자 중 많은 학생이 2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독일어로 한 곡 부르고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또 불렀다. 그때 한 여선생님이 “브라보”라고 박수를 쳐주었다. 합격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 일상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2개월이 지나도 줄리어드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떨어졌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니던 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처의 한 직원이 “밥 최, 합격했는지 알아봤어?”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2개월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떨어졌나 보네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한번 알아보겠다며 학교에 전화했다. 잠시 뒤 그는 전화를 끊고 말했다. “밥 최, 합격했대요. 정말 축하해요.”
(7) *줄리어드가는 길 ‘기적 릴레이’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였다. 입학금과 생활비를 합쳐 약 2만5000달러를 마련해야 줄리어드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돈은 3000달러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낚시질을 마친 뒤 어깨에 낚싯대를 걸치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때 옆으로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누군가 말을 붙였다. “밥 최, 뉴욕에 갈 준비는 잘 돼가요?” 이 지역의 유명 정치가 샌드라 워던 여사였다. 그녀는 시무룩한 내 표정을 보고 차를 한쪽에 세웠다. “그동안 당신이 만난 사람들의 명단과 주소를 내일까지 내 사무실로 갖다 줘요.” 캐슬우드의 밥 그윈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400여명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워던 여사에게 갖다 줬다. 그녀는 내게 편지 한 통을 보여줬다. “친애하는 ○○○씨, 테즈웰이라는 한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한국 청년이 줄리어드 음대에 합격해 공부를 하러 떠나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마을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입학금과 생활비를 마련하지 못해 공부를 포기해야 할 형편에 놓여있습니다. 도와주실 분은 연락해주십시오.” 워던 여사는 그 편지를 복사해 내가 가져간 400여명에게 보냈다. ‘과연 연락이 올까?’ 초조한 마음으로 3일을 보냈다. 진 해럴드라는 은행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콘서트에서 내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며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부자 고객’들을 대상으로 모금을 한 뒤 연락을 주겠다면서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해럴드와 통화한 뒤 어느새 1주일이 흘렀다. 그러나 마음은 평안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힘으로 이뤄진 것이 하나도 없었고 매순간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으며 그때마다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줄리어드까지 합격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입학금 접수 마감 3일전 해럴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밥 최, 내가 얼마나 모았을 것 같나? 놀라지 말게.” 그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돼 있었다. “1만7000달러를 모금했다네. 어서 이쪽으로 오게나.”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만7000달러에 내가 갖고 있던 3000달러, 그리고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분들의 후원금을 갖고 뉴욕으로 갈 수 있었다. 그동안 가족처럼 함께 지낸 팻 와야트 교수는 특히 정든 두 딸과 헤어지는 것을 무척 마음 아파했다. 그는 “밥 최, 열심히 해라. 뒤에서 기도해줄게”라고 격려해줬다. 세계적인 테너가 되겠다고 나를 도와준 모든 분에게 약속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줄리어드 음대에 1984년 입학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최고의 선생 밑에서 공부하는 첫날이었다. 선생님은 레슨을 시작하기 전 갑자기 “교무처에 가서 수표를 하나 찾아오라”고 말했다. 순간 당황했다. ‘뭐야? 겨우 저런 심부름을 시키는 건가?’ 교무처에서 주는 봉투를 선생님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올해 세 번 오디션을 해서 18명이 들어왔다. 그 중 실기가 가장 뛰어난 학생에게 장학금 5000달러를 주는 것이다. 그것을 네가 받게 됐다. 축하한다.”며 그 봉투를 건네줬다. 줄리어드 음대 전체 수석 및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기쁨 속에서 본격적으로 노래 공부를 시작했다.
(8) *키작아 오페라 탈락… 내 할일은 찬양
나보다 훨씬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학생들은 나를 ‘삼촌’이나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고향 같은 캐슬우드와 테즈웰에서 격려해주는 많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열심히 공부했다. 줄리어드에 들어가고 첫 번째 오페라 오디션 날이었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열창하는 내 모습을 그리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연습해왔던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떨어지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내가 실력이 모자란 것일까? 아니면 동양인이라고 차별받는 것일까? 오페라 오디션에서 떨어진 이유는 ‘단신’이었기 때문이다. 키가 1m60도 채 안 되는 내 체구로 오페라 무대에 서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남자배우라면 여배우보다는 키가 커야 했지만 나보다 작은 여자는 없었다.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단지 키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내가 성악가로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오페라 무대에도 서지 못하는데 어떻게 대성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이렇게 나 자신이 못나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어루만지셨다. “화진아, 너는 나를 위해 살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잊고 있는 것이냐?” 고등학교 때 하나님께 서원했던 게 또렷이 기억났다. “평생 하나님만을 찬양하면서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었다. “그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따로 있어. 최고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성가를 부르자.” 오페라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을 과감히 접고 교회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교회에서 찬양하는 내게 각계의 초청 연주가 쇄도했다. 한번은 한 CEO가 직원들을 위한 성탄 축하 콘서트에 나를 초청했다. 그는 자신의 전용 비행기와 리무진까지 제공해주었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니 하나님은 예비 된 길로 ‘척척’ 이끌어주셨다. 1주일에 서너 차례 초청 연주회를 다니며 신앙의 동역자들을 만났고 덕분에 우리 가족은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보다 오히려 자유롭게 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훨씬 좋았다. 1989년 뉴욕 챔버 오케스트라와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때 뉴욕타임스는 ‘가장 힘 있고 아름다운 소리의 소유자’라고까지 호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또 다른 기회가 왔다. 닥터 코포넨씨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뉴욕 나약대 음악과장이었다. 오전 채플 1시간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나약대는 미국 성결교 계통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미션스쿨이었다. 아름다운 학교 정원, 예의 바른 학생들, 무엇보다 예수님의 일꾼을 양성한다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1시간 집회를 맡은 날 강당에 가보니 총장을 비롯해 교수와 학생 300여명이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지나온 삶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가끔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나기도 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어느덧 내게 주어진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채플을 마친 학생들은 “감동적이었다.”며 사인 요청을 해왔다. 닥터 코포넨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강의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이날 채플은 일종의 오디션이었다. 1989년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하고 90년부터 나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9) *“크신 은혜 갚을 때까지 찬양무대”
나약대 교수로 있으면서도 나는 외부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92년 독일 뮌헨 오페라하우스 오디션에 합격,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출연했다. 테너 싱어를 맡아 잠깐 무대에 선 게 내 생애 첫 오페라 데뷔작이었다. 그때 출연료가 무려 4만달러였다. 또 96년 뉴욕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 경연대회에서 우승했고 시카고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꾸준히 연주 활동을 벌여왔다. 백악관 초청 연주, 카네기홀·링컨센터 연주, 동남아·유럽·중동 세계 순회연주, 쿠바 초청 연주 등 많은 무대에 섰다. 올해 초에는 북한에서 초청을 받았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성악가로서 대형 무대에도 서봤고 명예도 얻었다. 그러나 내게 딱 맞는 옷은 따로 준비돼 있었다. 찬양 무대에 섰을 때가 가장 편안하다. 미국에 와서 처음 맞은 성탄절 때 고백했던 게 생각난다. 서더블로프 교회에서 초청 찬양집회를 하기로 한 날 교회에서 내게 트럭을 갖고 오라고 연락이 왔다. 가보니 300여 상자의 선물꾸러미가 강대상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성도들이 모두 우리 가족을 위해 준비해준 성탄선물이었다. 옥수수캔 우유 아기 옷 돈…. 가난하고 어려웠던 초기 미국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수많은 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생활을 처음부터 이끌어준 밥 그윈 목사님(하나님의 품 안에서 평안하시길),우리를 친자식처럼 돌봐준 팻 와야트 교수, 지난 3월에 돌아가신 나의 영원한 스승 오렌 브라운 선생님, 샌드라 워던 여사, 진 헤럴드씨 등 셀 수 없는 많은 미국 친구들이 내 옆에 있었다. 아내와 나는 선물꾸러미를 풀면서 “가난한 것도 행복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었다. 그때 재차 다짐한 게 있었다. ‘제가 받은 은혜를 다 갚을 때까지 하나님을 위한 무대에서 찬양하겠습니다.’ 1990년부터 나약대 교수로 일하면서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열심히 살아왔다.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던 나는 지난 7월부터 안식년을 맞아 모처럼 고국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 수첩을 보면 주일에는 3∼4차례의 찬양 간증집회로 꽉 차 있다. 평일에는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들 레슨, 중·고·대학 채플예배 및 실업인회 교회 등 집회로 정신없이 보내고 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이 시간들이 무척 행복하다. 언제 또 이런 귀한 사람들을 만나겠는가? 또 언제 이렇게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해보겠는가? 이 무대는 대본이나 특별한 연습이 필요 없다. 그저 자연스레 내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지면의 마지막을 정리하며 후배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꼭 해주고 싶다. 요즘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보면 실의에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너무 안쓰럽다. 그들을 붙잡고 이런 말을 들려줬다. “생각하고 꿈꾸는 것만큼 이뤄진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잡힌 나는 음악적 욕심을 냈고 대가들의 노래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 큰 꿈을 갖고 하나님께 매달린다면 주님은 기쁘게 응답하신다. 그동안 ‘역경의 열매’를 통해 격려해준 많은 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리=노희경기자
/국민일보 200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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