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상과 등대[출 25:23-40]
2006. 7. 17. 00:08ㆍ목양자료/3.강해설교
출25:23-40 떡 상과 등대 떡 상과 등대와 여호와의 보좌(증거궤와 속죄소)는 시내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으라는 말로 단락지어 함께 언급되었다. 휘장에 의해서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고 지성소에는 여호와의 보좌를 두고 성소에는 떡 상과 등대를 두는 것은 비록 구별은 하지만 여호와의 보좌와 떡 상과 등대는 한 장막에 속한 것이며, 다 금으로 만들었다(26:31-37). 23-30 떡 상의 식양과 용도 떡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입히고, 금테를 둘리고, 금고리 넷을 모서리 위에 달았다. 상을 이동할 수 있도록 조각목에 금을 입힌 체를 만들었다. 상의 기구는 금대접과 금숫가락과 금병과 금잔이다.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떡 상이 10개, 금대접이 100개였다. 은상도 있었다(대상28:). 떡 상의 용도는 항상 여호와 앞에 진설병이 있게 하기 위함이다. 진설병은 안식일의 양식이다. 진설병은 여호와 앞에 진설하는 여호와의 향기로운 식물이다(민28:1). 금잔과 금숫가락과 금병과 금잔이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안식일마다 항상 여호와 앞에 이 떡을 진설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다(레24:8). 진설병은 에바 십분의 이로 만든 떡 열 두 덩이며, 안식일마다 두 줄로 여호와의 상에 진설하며 각 줄에 향을 두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며, 아론과 그 아들들이 안식일에 그 떡을 물려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레24:5-9). 31-40 등대의 식양과 용도 등대는 정금 한 달란트로 쳐서 만들며 한 덩어리로 만든다. 등대는 살구꽃 나무 형상이다. 받침과 줄기가 있고, 줄기 좌우 편에 세 가지를 만들되 좌우 가지가 각기 연결되게 하고, 각 줄기마다 세개의 살구꽃 형상의 잔과 꽃과 밭침이 있게 하고, 줄기에는 그러한 것이 네개 있게 하고, 줄기과 가지의 꼭대기에는 등잔을 둔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10개의 금등대와, 은등대를 두었다. 금등대의 일곱 등잔의 용도는 앞을 비추는 것이다. 앞은 여호와 앞 곧 증거궤 앞이다. 지성소는 어두움이다. 이스라엘은 순결한 감람기름을 여호와께 가져가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야 한다. 아론이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하여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불을 끊이지 말고 정리하여야 한다(레24:1-4). 빛과 살구꽃과 감람기름은 생명에 대한 표상이다(민17:8,렘1:11,슥4:) 여호와는 언약의 두 돌판위 구릅들이 날개로 덮은 속죄소 위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이르시며 통치하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 중에 함께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함께 거하는 생명을 누린다. 그들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이요 생명이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의 빛과 생명이시다. 여호와께서 성소 안에 살구꽃 형상의 정금 등대와 정금 상을 두시고,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순결한 감람기름으로 일곱 등잔의 불을 꺼지지 않고 켜게 하시고, 그 빛 가운데서 열 두 덩이 떡을 안식일마다 여호와 앞에 진설하여 진설병이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여호와의 상에 떡을 진설하는 것이 그들 중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받은 생명이요, 여호와 앞에 사는 사명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빛 가운데서 거닐며 여호와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를 주신 것이다. 이 은혜의 일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서 하늘에 속한 질서로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나님의 법이 마음 판에 새겨진 순종하는 새 백성으로 지으셨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로 살며 그의 상에서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온전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서 산다. 장차 하나님과 어린양이 등이 되실 때 교회도 그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하늘에 속한 법궤요 속죄소이며 등대요 상이다. 거룩하신 아버지 세상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출애굽기를 통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은혜를 입히셨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셨사오매 우리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얼굴에 비치는 영광의 빛가운데서 자유하는 아들로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신실한 삶을 살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더욱 온전케 해 주시옵소서. 아멘. 오늘은 출25장23절부터 끝절 까지 강론하겠다.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하겠다. 떡 상과 등대와 여호와의 보좌(증거궤와 속죄소)는 시내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으라는 말로 단락지어 함께 언급되었다.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어라 하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는 그 말로 단락들을 지어주고 있기 때문에 그 말로 단락 지어져 있는 한 묶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 오늘 배우는 떡상과 등대는 여호와의 보좌와 한 묶음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여호와의 보좌 떡상 등대 하고 제일 뒤에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어라. 그런 말로 한 단위로 묶어져 있다 그런 말이다. 그러면 묶어진 이유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어라 하는 말이 가끔 나오면서 단락을 지었을 때 거기 함께 포함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자 그 말이다. 휘장에 의해서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고 지성소에는 여호와의 보좌를 두고 성소에는 떡 상과 등대를 두는 것은 비록 구별은 하지만 여호와의 보좌와 떡 상과 등대는 한 장막에 속한 것이며, 다 금으로 만들었다(26:31-37에 보면 휘장을 만들라는 명령이 나온다. 거기 보면 휘장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고 지성소에다가는 보좌를 설치하고 성소에다가는 떡상을 둬라 그렇게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25장에서는 그런 구분에 강조가 있지를 않다. 구분에 강조가 있지 않고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어라 하는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어라 한 단위로 보좌와 떡상과 등대가 묶어져 있을 때 나중에 보면 휘장에 의해서 나누어지지만 여기서는 다 금으로 되어 있고 한 단위로 묶어져 있기 때문에 실은 한 장막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 제가 여기서하고 싶은 말은 만일에 등대와 떡상이 여호와의 보좌를 이루고 있는 증거궤와 속죄소와 구별에다가 강조를 두면 오히려 보좌를 쭉 설명하고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어라 단락을 지어 버리고 그 다음 성소에 있는 떡상과 등대를 말하고 나서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지어라 이렇게 나누어주면 좋겠는데 그렇지를 않고 보좌와 떡상과 등대를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나서 산에서 본 식양대로 지어라. 하는 한 단락을 지어 주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러면 왜 이런 단락을 지었는가 하면 나중에 26장에 보면 휘장을 통해서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은 하고 있지만 실은 의미는 다 금으로 만든 것이어서 한 장막에 속한다는 의미가 25장에 한 단락으로 묶어 준 그런 의미다 그런 말씀이다. 23-30 떡 상의 식양과 용도 떡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입히고, 금테를 둘리고, 금고리 넷을 모서리 위에 달았다. 상을 이동할 수 있도록 조각목에 금을 입힌 체를 만들었다. 상의 기구는 금대접과 금숫가락과 금병과 금잔이다.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떡 상이 10개, 금대접이 100개였다. 은상도 있었다. (대상28: 나중에 솔로몬 성전에 보면 은 기구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성소에서 은은 나중에 보면 성소의 밑바침이 은으로 되어 있고 그리고 성소의 뜰에 가름대가 은으로 되어 있고 그런데 솔로몬 성전에 보면 금 기구를 말하면서 은 기구도 함께 말을 한다. 여기 조각목으로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거했을 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무는 조각목이다. 그러니까 광야에 나무는 조각목이고 가나안 땅의 나무는 백향목과 잣나무다. 그러니까 그들이 거하는 곳에 여호와께서 함께 거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장막에 이동하면 함께 장막에 사신다. 그 때는 그들이 조각목이 있는 광야에 거할 때다. 그러니까 조각목으로 짓고 금으로 싸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조각목 이야기는 안 나온다. 백향목으로 짓고 잣나무로 짓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성전에 기구들은 자기 백성에게 주신 영광 그것이 곧 성전에 기구다. 자기 백성이 안식을 누리면 하나님도 안식을 누리고 자기 백성이 잣나무와 백향목 가운데 거하면 하나님도 그 가운데 거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들판에 거하시기 때문에 조각목으로 짓고 금으로 싸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떡 상의 용도는 항상 여호와 앞에 진설병이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 떡상을 만들어라 하는 마지막 단락을 보면 끝에 나와 있다. 항상 떡이 여호와 앞에 있게 해라. 그렇게 나온다. 가령 여호와의 보좌에 대한 이야기면 21-22절에 내가 거기서 만나리라 그것이 보좌에 대한 이야기고 그것이 보좌를 둔 목표다. 떡상에 대한 이야기는 30절 까지 되어 있는데 30절에 보면 항상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하라. 상을 만드는 이유는 항상 진설병을 여호와 앞에두기 위함이다. 등대의 용도는 37절에 보면 일곱 등잔을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치게 하라. 그것이 등대의 용도다. 그래서 그 식양에 대해서 쭉 말하고 제일 끝에 그용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떡상의 용도는 항상 여호와 앞에 진설병이 있게 하기 이함이다. 진설병은 안식일의 양식이다. 여기서는 진설병이 무엇인지 설명은 되어 있지 않다. 그 설명들을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더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것이 출애굽기에서는 설명되어 있지 않는가?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언약 체결 그 조직 구조 그런 것이 핵심이다. 이 진설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그 언약 교제의 삶을 말하는 레위기나 그리고 그 풍성한 봉사를 감당하는 민수기에서 주어지고 나는 너희 중에 어떤 하나님으로 거하시는가? 한 조직에 문제를 말할 때는 보좌를 설치해라. 내가 거기서 말하겠다. 떡상을 만들고 떡을 그 앞에 두어라. 그리고 일곱 등잔을 만들고 등대로 비치게 해라. 그런 조직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 기구에 대한 이야기만 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설명이 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레위기나 민수기는 출애굽기에 없는 것을 보충하려고 더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각 책에 목표 때문에 설명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고 출애굽기는 그런 설명은 없다. 출애굽기는 어떤 관계로 계시는가? 떡을 내앞에 두어라 이렇게만 설명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떡을 둔다는 의미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기 때문에 다른 모세 오경에 있는 것을 인용해 와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설병은 안식일의 양식이다. 그런데 진설병은 여호와 앞에 진설하는 여호와의 향기로운 식물이다(민28:1) 민28-9장은 하나님 앞에 풍성한 예물을 드리는 것이다. 거기 나와 있다. 금숫가락과 금병과 금잔이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여기 보니까 완전히 식사 도구가 갖춰져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상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금으로 되어 있다. 안식일마다 항상 여호와 앞에 이 떡을 진설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다. 레24:8절에는 그렇게 설명이 되어 있다. 여기 출애굽기에서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냐면 상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라. 내 앞에 항상 떡이 있도록 해라. 민수기에서는 더 설명이 되어 있는데 이 떡을 향기로운 식물이라. 그렇게 되어 있는데 레위기는 그것을 하나님의 식물이라고 설명한 것 보다도 안식일 마다 항상 여호와 앞에 떡을 진설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라 그렇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떡을 안식일 마다 제사장이 먹기 때문에 그렇다. 레위기는 성소에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성소의 교제로 부르심이다. 자기 방으로 자기 상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는 여호와의 식물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레위기에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양식이며 영원한 언약이라. 이것을 안식일 마다 진설하고 제사장이 먹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진설병은 에바 십분의 이로 만든 떡 열 두 덩이며, 안식일마다 두 줄로 여호와의 상에 진설하며 각 줄에 향을 두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며, 아론과 그 아들들이 안식일에 그 떡을 물려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레24:5-9).이것이 레위기에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진설하라는 말이다. 에바 십분의 이는 평소 식량보다 두배다. 그러니까 안식일의 떡은 두배나 된다. 평소 식량은 에바 십분의 일이 사람 하루 식량이다. 에바 십분의 이는 안식일의 양식이다. 그렇게 해서 열두 덩어리인데 에바 십분의 이로 되어 있는 열두 덩어리 떡을 만들어서 두 줄로 한 줄에 여섯 개씩을 놓고 이것은 다른 날에 놓지 않고 안식일날 대제사장이 그렇게 논다. 그러면 그 떡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데 다음 안식일날 까지 있는다. 항상 여호와 앞에 이 떡이 있도록 해라. 그래서 얼굴의 떡 하나님 앞에 떡 그런 것이고 그 떡을 안식일날 아론과 그 후손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대상 28장에 은상을 만들고 은 등대가 있는 것은 아마 제사장도 은상에서 먹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금상은 하나님의 상이거든요. 그런데 이제 다윗 성전에서 보면 이 상이 열 개다. 등대도 열 개다. 그러니까 지금 광야에서 천막에서 살던 때하고는 다르다. 천막에 살고 있을 때는 아직 안식이 주어지지 않을 때고 이제 돌로 지은 집에 사실 때는 안식을 얻었을 때다. 그러니까 등대도 열 개, 상도 열 개고 거기 보면 많은 은촛대와 은 상이 있다. 그러나 그 용도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 모른다. 그래서 이 출애굽기에 보니까 내가 거할 집은 어떤 집이냐? 내 보좌를 거기 두어라. 보좌는 증거궤에 두 돌 판이 들어 있는 증거궤와 그 위에 천사들의 거처인 속죄소를 두어라. 내가 거기서 모세를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말을 거기서 이르리라. 이제는 시내 산의 영광의 보좌가 장막의 보좌로 그렇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항상 거기 계신다. 그것이 여호와의 은혜의 보좌다. 그런데 거기다 아직 휘장을 치라는 말은 없다. 바로 거기 계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상을 주시고 등대를 주시는데 그 상은 여호와가 상이어서 금으로 만들도록 되어 있고 여호와를 위해서 항상 떡을 진설해야 한다. 그리고 금 등대를 만들어서 그 앞을 비치도록 해야 한다. 실은 여호와의 보좌는 캄캄하다. 비치는 것은 떡상이 있는 곳 휘장 앞을 비추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거하는 장막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하나님으로 거기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민수기나 레위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장막으로 부르셔서 교제하는 레위기 또 하나님을 힘껏 봉사한다는 민수기를 보면 이 진설병은 여호와의 음식인데 특별히 레위기에서는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항상 진설하도록 했다. 왜 그러냐면 대제사장이 안식일마다 이 열두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그리고 다음 안식일에 그 떡을 물려서 그와 그 후손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상이요 동시에 아론의 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제단과 같은 의미여서 열두 덩어리 떡을 두 줄로 놓고 향을 두 줄에 하나씩 사르고 향을 사르므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번제로 드린 바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성소에 있는 떡상은 다른 것처럼 번제단에 태워 드리는 것이 아니고 향단에 향을 사르는 것처럼 거기서 향을 사르면 거기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식물로 드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사장이 먹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 떡이 있도록 해라했기 때문에 다음 안식일 날 무른다고 이해를 한다. 이제 더 잘 알려면 이스라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사 했는가를 알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향을 사르면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예물이 되었기 때문에 향을 사르므로 그 다음 제사장이 가져와서 먹었다고 해도 해석에 아무 이상이 없다. 그런데 그 때는 안식일만 떡이 있을 것이고 먹어 버렸으니까 다음 날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항상 있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다. 어떻든 해석하든지 핵심은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 항상 하나님의 상에 떡이 있도록 하고 이 떡은 제사장을 위한 떡이다. 그런데 이 떡은 열 두 덩어리인데 에바 십분의 이로 만든 떡이어서 안식일의 양식인데 열 두 덩어리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안식 온전한 생명이 주어진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성소 구조대로 하면 하나님 앞에 떡 드리는 백성이다. 하나님 앞에 기름과 떡을 드리는 백성이다. 하나님 앞에 가져온 것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거하시고 주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공짜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와서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를 짓고 하나님의 상에 놓으면 하나님은 거기서 기뻐 받으시고 백성이 먹고 마시도록 복을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소밖에 것을 성소 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향내 나는 음식을 제사장 양식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의 교제 안식의 교제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열두 덩어리 떡이 안식일에 떡덩어리로 주어진다. 그리고 안식일 날 제사장이 진설하고 먹는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장막으로 거하신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 말이다. 31-40 등대의 식양과 용도 등대는 정금 한 달란트로 쳐서 만들며 한 덩어리로 만든다. 등대는 살구꽃 나무 형상이다. 받침과 줄기가 있고, 줄기 좌우 편에 세 가지를 만들 되 좌우 가지가 각기 연결되게 하고, 각 줄기마다 세개의 살구꽃 형상의 잔과 꽃과 밭침이 있게하고, 가지에는 그러한 것이 네개 있게하고, 줄기과 가지의 꼭대기에는 등잔을 둔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10개의 금등대와, 은등대를 두었다. 금등대의 일곱 등잔의 용도는 앞을 비추는 것이다. 앞은 여호와 앞 곧 증거궤 앞이다. 지성소는 어두움이다. 여호와의 보좌는 어둠으로 가리워져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그 어둠 가운데서 자기 백성으 만날수가 없다. 그 하나님은 빛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데 출애굽기에서는 그 빛이 청옥을 편듯하고 청명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 백성의 대표자가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거룩한 곳 시내 산 하나님의 발 밑에서 먹고 마시던 거룩한 곳 그런 것이 여기서는 일곱 등대에 빛이 비추도록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직도 등대의 빛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계시고 자기 영광의 빛가운데는 계시지 않는다. 그 영광은 휘장으로 가리워졌고 캄캄한 어둠 뿐이고 거기는 아무도 들어갈수 없다. 그러니까 등대의 빛가운데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순결한 감람 기름을 여호와께 가져가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야 한다. 출애굽기는 그런 말이 없다. 그냥 등잔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 등잔으로 내 앞을 비춰라 그런 말만 있지 그 등잔을 어떻게 관리할지 그런 말은 없다. 또 기름을 가져와라 그런 말도 없다. 여기는 등대의 구조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등대의 용도만 설명되어 있다. 이제 거기다 기름을 가져와 켜고 하는 것은 구체적인 교제의 삶인데 그것은 레위기나 민수기에서 설명이 된다. 여기서는 그런 구조와 용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그들 중에 계시는가 주신다 그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구약이 모든 은혜의 제도는 그 당시 구체적인 은혜의 선물이고 그러면서 그 완성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지 단순한 상징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에 일곱 등대가 없으면 성소는 캄캄한 어둠이 될것이고 그 어둠은 하나님의 어둠이어서 사람이 그 앞에 들어갈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캄캄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일곱 등대를 주셔서 자기 앞을 비추게 하고 그 앞에 떡상을 차리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하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 중에 빛가운데 거하신다. 촛대 가운데 빛 가운데 거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 거하신다고 장막의 제도를 말씀하시고 그리고 산에서 본 식양대로 지어라 하는 단락을 지어 버리고 있다. 이스라엘은 순결한 감람 기름을 여호와께 가져가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야 한다. 아론이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하여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불을 끊이지 말고 정리하여야 한다. 레24:1-4절에 보면 떡상에 대한 문제가 나오기 전에 먼저 등대에 대한 문제가 나온다. 출애굽기에서는 떡상에 대한 구조가 먼저 나오고 그리고 등대가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교제로 자기 백성을 부르셨는데 그 교제 가운데 사는 것이 등잔불을 켜도록 하는데서 주어졌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에다가 강조를 두었는데 그것을 실제적으로 활용하고 시행하는데 있어서는 항상 등잔불을 켜라는 것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는 떡상을 차리는 것이 두 번째로 나온다. 그런데 출24:1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항상 기름을 가져와 등불을 켜라 해 놓고 그 다음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제사장 아론 이야기만 쭉 나온다. 왜냐하면 아론의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거든요. 그러니까 아론이 하는 일은 곧 백성이 하는 일이다. 아론에게 주어진 것은 곧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다. 빛과 살구꽃과 감람기름은 생명에 대한 표상이다(민17:8,렘1:11,슥4:) 이것이 더 진행되면 성령으로 나타날 것이다. 민17장에 보면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났는데 살구 싹이 나고 살구꽃이 피었다. 렘1장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 환상을 보시는데 살구 꽃 가지 거기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 하나는 끓는 가마가 북방에서 남방으로 기울어지는 것 그것을 예레미야에게 보이셨다. 그 때 이 살구나무 가지를 봅니다 했을 때 내가 반드시 그 일을 이루리라. 그렇게 해석을 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살구꽃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다 죽었는데 거기서 살구 꽃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었다. 살구 꽃은 다 죽은 것 같은데 겨울인 것 같은데 반드시 이룬다. 죽은 것 같은데 싹이 나고 열매가 맺는다. 그것이 예레미야가 봤던 살구 꽃 나무 환상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살구 꽃 하는 것은 생명과 관계가 된다. 그런데 거기다 등불을 켜라고 했고 그것도 순결한 감람 기름으로 등불을 켜라고 했다. 그리고 특별히 슥4장을 보면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하는데 여호와의 능력으로 하실 것이다. 어떻게 촛대가 있는데 촛대 좌우 편에 두 감람나무가 있어서 순금같은 기름을 공급한다. 그러니까 그 등불이 켜진다. 그래서 작은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이루시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짓고 거기 등불을 켜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온전한 표상인데 거기 보면 여호와께서 친히 두 감람나무를 통해서 순전한 금 기름을 공급한다. 더구나 등잔 꼭데기 줄기 가운데 있는 꼭데기 있는 등잔은 일곱 금관이 있어서 금기름이 공급된다.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을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하는데 성령으로 능력으로 행하신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은 생명의 능력에 대한 문제를 살구 꽃 모양으로 된 금 등대 그리고 거기다가 감람 나무 기름을 부어서 빛을 발하면 이 빛이 여호와 앞을 비추게 해서 그것으로 제사장이 그 성소에서 거닐고 하나님의 상에 떡을 진설하고 또 안식일에 그 떡상에서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가족이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떡상과 등대는 서로 연결된다. 다 생명과 관계가 있다. 이제 요한 복음에서는 생명이신 아들을 바로 빛이라 지목하고 있다. 여호와는 언약의 두 돌판위 구릅들이 날개로 덮은 속죄소 위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이르시며 통치하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 중에 함께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함께 거하는 생명을 누린다. 그들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이요 생명이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산으로 부르시고 하나님 발 밑에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도록 하셨다. 그 장면이 땅으로 옮겨진 것이 사람이 만든 장막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처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불러 놓고 친히 말씀하시고 거기서 대표자를 부르시고 잔치하셨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계시지 않고 법궤 위 천사들의 거처에 강림하셔서 이제는 자기 종들을 자기 앞으로 부르시고 이제는 캄캄한 어둠이 아니라 자기는 어둠 가운데 가리고 있지만 어둠이 아니라 일곱 등잔에서 비치는 빛가운데서 자기 종에게 항상 안식일에 떡을 차려 놓고 하나님 앞에 드리면 하나님의 양식을 백성이 먹을 수 있도록 안식의 떡 온전한 생명의 교제를 허락하셨다. 이제는 하나님이 어둠이 아니고 빛이시다. 그런데 그 빛이 일곱 등대로 나타나 있고 살구나무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살구 나무는 묘하다. 그냥 꽃만 있고 꽃받침만 있으면 좋은데 위에가 금잔이 또 붙어 있다. 술잔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그런 꽃은 없다. 살구 나무 꽃 같으면 요새 화분에다 파는 것 같으면 빨개 가지고 잔 같은 그런 꽃이 있더구만요. 그것은 잔 같이 생겼다. 살구 나무야 잔 같은 꽃이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떡상에 있는 잔과 전부 연결될수 있는 것이다. 꽃은 꽃인데 금잔이 잔이 붙어 있다. 그렇게 해서 항상 합치면 일곱 개다. 가운데는 네 개 가지에는 세 개씩 합치면 항상 전부 일곱 개다. 가지와 줄기도 합치면 일곱 개고 잔과 그리고 받침과 꽃도 가운데 있는 줄기와 한가지마다 합치면 항상 일곱 개다. 그런데 좌우 가지가 평면에 붙도록 그렇게 했고 앞을 비추도록 했다. 돌아가면서 옷걸이 만든식으로 여기저기 끼어진 것이 아니고 평면으로 되어 앞을 비추도록 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등대는 단순한 모양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의 떡상을 비추도록 하는 용도다. 그러니 여기 잔이 있다거나 살구나무라거나 또 감람 기름을 부은 다거나 하는 모든 문제 또 그 앞에다가 떡상을 차려 놓고 먹는 모든 문제는 생명과 관계된 일이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의 빛과 생명이시다. 여호와께서 성소 안에 살구꽃 형상의 정금 등대와 정금 상을 두시고,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순결한 감람 기름으로 일곱 등잔의 불을 꺼지지 않고 켜게 하시고, 그 빛 가운데서 열 두 덩이 떡을 안식일마다 여호와 앞에 진설하여 진설병이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여호와의 상에 떡을 진설하는 것이 그들 중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받은 생명이요, 여호와 앞에 사는 사명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생명을 주셨는가? 자기 보좌를 설치하고 거기다가 등잔과 떡상을 주시고 거기다가 빛을 비추게 하셔서 떡상에 떡을 차려서 백성으로 그 앞에 나와서 먹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으로 거기 거하신다. 그러니까 이 성전의 구조 하나님이 산에서 본 식양 즉 하나님은 시내 산 영광 안으로 부르셔서 거기서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를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며 하나님은 거기서 빛과 생명으로 계신다. 그러니까 등대로 완전히 생명을 표상하는 모양이다. 성전의 기름은 항상 나중에 생명을 표상하는 것으로 기름이다. 하나님은 완전히 기름 요리를 좋아하신다. 요새로 하면 전부 튀김 요리다. 건강법으로는 아주 나쁜 것이다. 그런데 순 기름으로 튀긴 요리다. 그런데 기름은 생명을 표상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백성보고 기름을 가져오라 했는데 그 기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선물로 하나님의 집에다가 진설하도록 한 것이다. 왜 그것이 그들의 생명의 선물이니까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집에 생명의 교제가 되게 하심으로 가나안 땅의 생명을 성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기름을 하나님께로 가져오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등에 불을 켜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상에 차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 흠양하시고 그것을 제사장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교제하신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인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아직 어둠이 휘장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첫 장막 성소가 있을 동안에는 두 번째 장막 아직 지성소는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첫 장막에 있을 때도 하나님을 섬겼는데 등잔과 떡상에서 하나님을 봉사하고 금향단에 향을 사름으로 봉사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앞에 부르는 영광의 거처다. 아직 지성소까지는 부르지 않았다. 왜 거기는 캄캄한 어둠이니까 일곱 등잔불이 커져 있는 곳까지만 제사장이 나온다. 거기 까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는 곳인데 어둠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빛가운데 거하시는데 일곱 촛대에서 밝히는 빛가운데서 거하시고 그리고 열 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는 떡 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선물이고 바로 그 일을 계속 감당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명을 누리고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세상의 빛 등대다 했을 때 그 등대 기능을 가지고 하면 등대의 빛가운데서 함께 사는 생명의 교제 가운데서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지 등대의 자체의 기능을 설명해서는 안된다. 물론 계시록에 보면 교회를 일곱 등대로 일곱 촛대로 말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촛대 사이에 거하시고 교회를 분명히 일곱 촛대로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촛대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서는 안되고 그들 중에 계신 주님과 함께 어떻게 사는가 문제로 곧 우리들이 하나님의 빛을 누리고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런 등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어린양이 친히 빛이 되시고 하나님이 빛이 되니까 다른 등이 필요가 없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영광으로 변한다. 지금도 교회를 보는 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만 주님께서 영광으로 재림하시면 우리도 그 영광 가운데 나타난다.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등대의 기능이고 등대의 생명이다. 그러니까 등대 자체의 기능을 설명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왜 성소의 구조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는데 어떤 교제로 거하시는가를 성소의 삶에다가 나타내고 있다. 지금 출애굽기는 성소의 구조에다 새기고 있는 것이다. 이제 레위기나 민수기는 성소의 삶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시내 산에 계신 하나님이 그들 중에 어떤 관계로 계시는 가로 설명하는 것이고 그 관계 가운데 사는 것이 그들의 생명이고 그 관계 가운데 사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이 떡상이나 등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생명의 선물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온전한 빛은 예수의 얼굴에 비치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비췄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앞에 산다. 그러니까 예수가 우리의 온전한 빛이요 그는 세상의 빛이라고 요한 복음 처음부터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참 생명이시다. 그분과 함께 삶으로만 빛이요 생명이다. 그분을 떠나서는 빛과 생명이 없다. 그러니까 성소 제도는 모두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실 온전한 생명을 모세 제도적인 방식으로 주고 계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빛 가운데서 거닐며 여호와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를 주신 것이다. 이 은혜의 일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서 하늘에 속한 질서로 온전케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나님의 법이 마음 판에 새겨진 순종하는 새 백성으로 지으셨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로 살며 그의 상에서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온전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서 산다. 장차 하나님과 어린양이 등이 되실 때 교회도 그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하늘에 속한 법궤요 속죄소이며 등대요 상이다. 돌 판에 새기시고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말씀했던 하나님이 우리 마음 판에 새기시고 친히 우리 마음에서 말씀하신다. 소원과 탄식을 우리 안에 두고 행동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셨다. 예수의 속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의 속죄소다. 예수께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 보좌 앞에 나가고 그것이 구약의 속죄소였을 때는 그것은 휘장밖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우리의 온전한 속죄소여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간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우리의 속죄소인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분으로 속죄소다. 그래서 우리 마음 판에 하나님의 법을 새기고 마음 안에 좌정하신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의 생명의 빛이시다. 그는 일곱 등대에 비친 빛 정도가 아니라 빛 자체이시다. 그가 세상에 오셔서 그분의 상에서 먹고 마시도록 하셨다. 이 은혜의 일을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서 오셔서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아들과 함께 하나님 안에 있고 그런 생명의 교제를 허락하셨다. 예수님만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참 빛을 주신다. 예수를 아는 자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른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빛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들이 그분과 함께 교제하는 삶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그분의 빛이요 그리고 그분으로 빛으로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구원의 기관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 성소의 구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언약의 거처 언약의 삶의 교제를 말하는데 그 은혜의 일을 예수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셨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증거다. 그러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 항상 구약이면 구약 그 당시 문맥을 봐야 한다. 그 당시 구조에서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처소로 해석이 되는지 그러면서 그것은 아직도 가리워져 있다.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 당시 구체적 생명의 교제다. 그런데 그 은혜의 일을 예수 안에서 완성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만 구약의 임시적인 기능들은 완전히 벗겨지고 완전한 빛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그래야 구약이 신약에 하나님의 생명의 책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구약 성경을 영원한 기업으로 소유한 것은 구약 교회가 아니라 신약 교회다. 구약 교회는 모세 제도적인 방식으로 소유했어도 온전한 빛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온전한 빛으로 소유한 것은 신약 교회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의 빛으로 해석했을 때만 구약의 한계성들은 벗겨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구약 당시에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문제를 근간으로 삼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 없는 신학적인 이야기밖에 안되는 것이다. 만일에 일곱 등잔에 불이 꺼지버리면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이고 그러면 캄캄함뿐이어서 아무도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여기 일곱 등대의 불 그리고 떡상이 차려진 곳이 다 안식이다. 온전한 빛이요 온전한 생명이 거기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생명의 선물이다. 바로 이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삶으로 구원의 기관으로 교회가 봉사하지 그냥 독립적으로 등대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보통 본문 강해 그러면 앞에 설명한 부분 떡상과 등대를 자세히 말하면 우리가 읽을 때는 무엇이 왔다 갔다 하고 잘 모른다. 그런데 그림을 더 자세히 하면 아 깊도다. 정확하도다. 그것은 구약 백성만큼도 못하다. 구약 백성도 그 상응 구조를 알아서 끝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앞을 향해서 열린 책이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 버리고 일곱 등대입니다. 떡입니다 해 가지고 등대의 사명을 감당하자 하고 거기다가 촛불이 녹아지듯 자기를 태우고 남을 밝힌다 하니까 그것이 기독교적인 사랑의 정신 같고 해도 구약의 의미는 하나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시간의 질서에서 구원의 하나님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 당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구원인데 그 구원은 아직도 휘장 안은 캄캄하고 그런데도 휘장 밖을 일곱 등대로 비치도록 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그 앞에 나와서 자기 상에서 먹도록 했다. 그것이 구약의 생명의 교제다. 그런데 이제는 휘장을 거두시고 참 빛이 나타나셨다. 일곱 등대에서 비치는 빛이 아니라 참 빛이 나타나셨다. 이 분 앞에서 우리가 먹고 마셨다. 그분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부활하신 분으로 영으로 임하셔서 이제 우리 마음 판에 하나님의 법을 새기고 친히 그가 좌정하셨다. 예수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생명의 빛이요 생명의 능력이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도록 그처럼 초대하셨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 새 생명의 빛가운데서 우리가 새 생명의 양식으로 서로 교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교제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소의 삶이 이제 신약 교회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항상 구약 언어다. 구약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언어 개념은 구약 언어 개념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의 완성은 이제 새로운 의미는 부활하신 예수의 빛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 구약을 연결하고 또 차이점을 두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촛대고 촛대 자체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일곱 등대 가운데 살고 있다. 참 빛가운데 사니까 참 빛을 비춘다. 여러분이 참 생명을 먹고 마시니까 참 생명으로 세상을 봉사한다. 우리의 생명이 누군가를 증거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빛도 없고 생명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참 빛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되는 것이지 떡이 무엇인지 등대가 무엇인지 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저도 등대를 여기 까지만 알고 또 어떻게 만드는가 보니까 복잡하고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일곱은 일곱인데 한 금덩어리다. 이것은 하나인데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구약의 표상 법이다. 설이나 추석 이런 날을 당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새로운 제자여서 예수가 모세의 새로운 제자 정도만 이해를 한다. 그리고 무엇을 안하냐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다. 그것이 최고다. 그것이 백점이다. 그런 식으로만 살고 있는 것은 신약 백성의 삶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것은 법 형식상 최하 수준일 뿐이다. 상에 앉아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즐거운 교제를 말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상에 앉아서 먹고마시면 정말 할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냐면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그것은 현대식 여성 비슷하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 그 말이다. 마음대로 바람을 피우면서 이 남자가 처음이다 그러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는 설 잔치 추석 잔치 하니까 먹고 마시는데 상에 놓지 않는 것만 먹을 것이여. 그런 식으로 산다 그 말이다. 그리고 나는 계명대로 살았노라.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기독교 신자들 같으면 술집에 따라 들어가서 안주만 먹는 것 나는 믿으니까 술은 먹지 않고 안주만 먹었지요. 그러니까 죄 지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알콜을 먹었냐 안먹었다에 총 초점을 둔다. 그래 가지고 그전에 보면 소주만 안 부으면 포도주 진짜 독한 것 취하게 마시고도 나는 술 안먹었다. 알콜 안 마시고 포도주 마셨거든. 그러면 우리 나라는 옛날에 제사 제도 가지고 싸운 성리학 때문에 그런지 문자 풀이를 그렇게 많이 한다. 그래도 술 집 가서 그 분위기에는 완전히 휩 싸인 것이다. 고개 끄덕 끄덕 이야기 다 하고 그런데 안주만 먹고 왔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즐거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가를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한다. 여러분이 이 세상 가운데 살고 있으니까 세상을 떠날수는 없다. 여러분이 이런 저런 용도로 연결이 되이 있다. 그러나그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축하하는 방식으로 보내서는 안되겠다 그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모세 제자가 되지 말라 그 말이다. 그래서 몇 가지 규칙 지키는 것을 신앙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여러분도 심히 미워하고 슬퍼하고 그런데도 여러분이 옛 질서 가운데 여전히 묶여져 있다. 여러분이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빛으로 생명으로 봉사할 것인지 그 문제를 생각하라 그 말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안 싸운 것만 평화고 지혜로운 것이다. 이번 설에도 형제들하고 안 싸우고 지나가면 아 은혜롭게 지나간 것이다. 가장 증거하기 좋은 찬스에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왜 완전히 입을 다물고 모든 영광을 죽은 자에게 바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날 조용히 지냄으로 무사히 지나갔도다. 좋은 것이다. 그렇게 살지 말라 그 말이다. 하여튼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은 힘껏 살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조심해서 산다. 부끄럽게 살고 미안하게 살고 죄송하게 살고 오늘 설인데 나 때문에 별고 기분이 안 나고 죄송합니다. 이렇게 산다. 그것은 완전히 거구로 산 것이다. 왜 세상이 해석해 준대로 사니까 그렇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혈육으로 묶여진 곳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누가 자기 자식 때리면 힘없는 어머니도 달려가서 열심히 싸우고 제일 누가 싸움을 잘 하냐면 남편이 누구하고 싸울 때 달려든 마무라가 제일 싸나운 것이다. 그것은 말리지 못한다. 열심히 한다. 말도 쉬지 않고 해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조용하고 점잔하고 지혜롭다. 우리 하나님이 점잔 하셔서 그런지 이상하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어떤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상을 차려 놓으니까 상을 엎어 버렸다. 전라도 말로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았다. 그 방법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옳은 이야기다. 상 엎는다고 귀신이 넘어지겠어요? 어디 보니까 절에서 그림을 잃어 버렸다고 나오더구만요. 그것이 절에서 섬기는 그림들이다. 도둑이 가져가도 꼼짝도 못하고 그런데 그것을 또 섬긴다. 그런 것은 잊어 버렸어도 창피하니까 말도 안해야지. 신이면 스스로 돌아 올 것이지 도둑놈이 잡을 것 뭐 있어. 그러니까 얼마큼 거꾸로 사는가 알겠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빛으로 보면 심히 슬퍼할 일들이다. 진짜 너무 슬퍼서 밥맛이 떨어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날 그런 식으로 금식한 것이 아니라 아차 하면 우상 제물 먹으니까 조심하자. 어디가 섞어진 줄 알겠는가? 그래 가지고 그전에 있었던 재건 교회는 삼일은 금식이다. 제사 반찬 떨어지도록 굶어 버리자. 그러니까 철저한 모세 제자다. 냄새도 맡지 않을 것이니까 굶어 버리자. 그리고는 아이들은 전부 교회로 모이게 해서 라면 끓여 줄 것이다. 집에 가면 위험하니까 그리고 거기다가 조금 좋은 것이 한가지 있다. 전부 그날 범죄 하니까 붓글씨로 쓰는 것이다. 회개하라고 그리고 대문마다 붙이고 전도하러 다니는 것이다. 남들은 좋다고 먹고 취하고 있는데 슬프다고 붙이고 다니니까 이것은 판을 완전히 깨 버리는 사람이다. 같이 먹도 않고 굶어 버리고 그런데 그 정신은 좋은데 방법들은 모세 제자 식으로 살았다. 여러분보고 그날 굶어라 그 말이 아니다. 먹어도 상관이 없다. 우상 제물이어도 여러분을 우상의 상에 앉아라 함께 즐거워하자 그런 방식만 아니면 여러분은 상관이 없다. 문제는 여러분이 이 세대를 어떻게 봉사하는가가 문제다. 여러분이 이번에는 참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고 그런 의미로 지혜롭게 봉사하십시오. 그 지혜를 나타낸 방식으로 지혜롭게 봉사를 해야 한다. 그냥 우상 제물 안먹었다고 이번에도 편안히 지나지 말고 그렇게 하시라 그 말이다. 우상을 섬기는 남의 물건을 부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 부순다고 귀신이 없어지나. 하나님을 완전히 우상화시킨 것이다. 그것은 남의 물건이다. 바울도 아테네에서 우상이 가득해서 마음에 심히 분노가 가득 찰 때 우상을 부순 적이 없다. 오히려 사도행전에 보면 회개한 죄인들이 그전 일을 원통히 생각하고 은 오만냥 어치 되는 책도 불살라 버리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믿는 사람은 너무 겁나고 힘이 없으니까 교회에 가서 예배를 한 번 크게 드리고 그날 부서 버릴 것이다. 예배 안 드리고 부수면 좀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새로운 믿는 신자를 도와준다고 기도하고 가서 부서 버리고 그런다. 그러니까 이것 무슨 믿는 것인지 하여튼 우리 나라는 미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면서 더욱 미신을 가르친다. 우상 제물 먹지 말라고 하면서 무엇이 붙은 줄 알고 더욱 무서워한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이 아니면 참으로 생명이 없고 빛이 없고 지혜가 없다. 더 어리석게 될 뿐이고 우상을 정리해도 더욱 우상의 종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떡을 먹지 않아도 떡을 먹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다. 여러분이 이번 기회가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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