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7. 17. 00:01ㆍ목양자료/3.강해설교
출25:10-22 증거궤와
속죄소-여호와의 보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 보이신 식양대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여호와의 성소를 짓게 하셨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여호와의 성소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중에 빽빽한 구름과 맹렬한 불의 영광으로 강림하신 여호와께서 안식일에 그 영광에로 모세를
부르신 은혜를 이스라엘 중에서 항구적이 되게 하신 것이다.
성소는 여호와께서 보좌에 좌정하신 곳이며, 또한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빛
가운데서 여호와의 상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는 교제의 처소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배의 처소이다. 이러한 의미를 장막과 기구의 배열과
식양에 나타내셨다.
맨 처음 언급된 것은 증거궤와 그 위에 얹을 속죄소에 대한 식양과 용도이다. 증거궤와 속죄소는 여호와의 보좌로서 함께
언급한다. 여기서 중심 되는 기구는 여호와의 언약의 증거 판을 두는 증거궤이다.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는 여호와의
보좌이며, 거기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고 이스라엘을 위한 모든 명령을 이르신다.
궤는 조각목으로 짓고 정금으로 안팎을 싸서 만들었다.
궤의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궤의 네 발에 달고 조각목으로 체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양편 고리에 꿰어 두고 빼어
내지 말 것이다. 궤의 용도는 여호와께서 주실 증거판을 넣는 것이다.
증거궤는 여호와의 궤이며 언약궤이다. 이들 호칭은 상호 교환해서
쓰이나, 증거궤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언약궤는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서에서 주로 쓰인다. 증거궤라는 호칭은 궤속에 증거판을 넣기
때문이다.
속죄소는 궤의 뚜껑과 같은 크기인데 정금으로 만들고, 그룹 둘을 정금으로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어 양끝에 하나씩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하게 한다. 그룹들은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게 하고 그 얼굴들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한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증거판을 궤속에 넣는다.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의 보좌이다(대상28:2, 시99:5, 132:7).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며 거기서 이스라엘을 위한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다.
성막과
기구들의 나타난 재료의 차이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영광의 차이이다. 금은 여호와의 보좌의 영광이며 은과 놋은 그에 이르지 못하는 영광이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역사의 종말에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곧 성소이며
그 성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며 어린양이 그 성의 등이 되신다(계21:).
단과 상에 금테를 두르는 것은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리를 붙이고 체를 꿰어 레위인으로 메게 하신 것은 왕의 보좌가 이동하는 방식이다(민4:, 7:4-9,
대상13:9-12, 15:1-15). 증거궤는 여호와의 아무도 만져서는 안되므로 체를 꿰어 둔다.
증거의 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시행하시는 언약의 두 돌 판이다. 언약의 두 돌 판을 증거의 판으로 여호와의 궤 속에 넣게 하시고 그 위에 천사들의 거처인 속죄소를 두게 하시며
거기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며 공과 의로 통치하시는 것이다(대상16:27-36; 시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시97:2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구원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며 통치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보좌를 속죄소라고 칭하며 그룹들의 거처로
묘사하므로 피의 약정을 확정한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구원이요 안식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이 은혜의 일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교회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으로 온전케 하셨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참 이스라엘이요 마음 판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다(히8:-10:).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고(골3:3),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엡2:6).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며(히4;16)
거기서 하나님께 경배한다(계4: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 보이신 식양대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여호와의 성소를 짓게 하셨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여호와의 성소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중에 빽빽한 구름과 맹렬한 불의 영광으로 강림하신
여호와께서 안식일에 그 영광에로 모세를 부르신 은혜를 이스라엘 중에서 항구적이 되게 하신 것이다. 출애굽기 배경이 그렇다. 언약의 식사를 하고
나면 다시 언약의 대표자를 하나님께서 부르셨는데 모세외 여호수아를 부르셨고 이제 부르셨을 때는 흑암 가운데로 가까이 오라한 정도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영광에로 부르셨는데 제 7일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모세가 그 구름 가운데로 들어갔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장막에 대한 식양을 주시고 증거의 두 돌 판을 주셨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에게 보이시고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하나님의 거처를 지어라 하는 이
거처는 곧 모세가 하나님의 구름 가운데로 들어갔던 영광을 땅 위에 항구적이 되게 한 것이다. 대표자에게 일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대표자가 들어가서
40일을 거기 거했다. 그 은혜의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항구적이 되게 한 것이 이 성소에 대한 제도다 그런 말씀이다.
성소는
여호와께서 보좌에 좌정하신 곳이며, 또한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빛 가운데서 여호와의 상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는 교제의 처소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배의 처소이다. 이러한 의미를 장막과 기구의 배열과 식양에 나타내셨다. 배열들을 보면 먼저 여호와의 보좌가 있고 그 다음에
성소에 있는 기구가 있고 뜰에 있는 기구가 있고 그리고 나서 제사장에 대한 명령이 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이 봉사하는 기름과 향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보좌가 지성소에 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의 대표자는 성소에서 하나님께 떡상을 드리고 또
그것을 먹고 그런데 거기는 하나님이 비치신 빛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향단에 향을 사른다 그것이 여기 25장부터 30장까지 있는 성소에 대한
배열과 기구에 대한 식양에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교제의 처소요 예배의 처소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가 거기 있다.
나중에 보면 금
등대에 대해서 우리가 설명을 해야 되겠지만 읽어 가면서 설명을 하겠다. 이제 개별 기구들에 대한 설명이다.
맨 처음 언급된 것은
증거궤와 그 위에 얹을 속죄소에 대한 식양과 용도이다. 이 본문을 보면 10-16절까지는 내게 네게 줄 증거판을 궤속에 둘지며 거기 까지는
증거궤에 대한 명령이고 그 다음 17절부터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거기서부터 20절까지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거기 까지는 속죄소를 만들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21-22절까지는 10절부터 있었던 총 결론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거기 보니까 속죄소와 증거궤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증거궤에 대한 문제 그 다음 속죄소에 대한 문제 이 둘을 합해서 말하는 결론 그 결론이 21-22절까지다.
맨 처음
언급된 것은 증거궤와 그 위에 얹을 속죄소에 대한 식양과 용도이다. 증거궤와 속죄소는 여호와의 보좌로서 함께 언급한다. 결론에 보니까 함께
언급하고 있지요? 여기서 중심 되는 기구는 여호와의 언약의 증거 판을 두는 증거궤이다.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는 여호와의
보좌이며, 거기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고 이스라엘을 위한 모든 명령을 이르신다.
21절부터 읽어보면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어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명령을 이르리라. 21-22절이 처음에 있는 증거궤와 속죄소의 총 결론이다. 여기 보니까 속죄소는 증거궤의 뚜껑처럼 의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주석들을 보면 뚜껑인지 아닌지 말이 오락가락 한다. 여기서는 분명히 뚜껑은 아니다. 그래도 내용을 읽어보면 증거궤에 다가 얹어라
그리고 증거궤 속에다가는 두 돌 판을 넣어라. 그러면 내가 거기서 너희를 만나고 말을 하리라 그렇게 되었다.
여기 증거궤와 속죄소는
여호와의 보좌로서 기능을 감당한다. 내가 거기서 너를 만나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필요한 명령을 네게 말하겠다. 증거의 두 돌 판을 궤에 넣고 그
위에 속죄소를 얹으면 내가 거기서 너를 만나겠다. 여기서 곧 여호와의 보좌라 그 말이다.
궤는 조각목으로 짓고 정금으로 안팎을
싸서 만들었다. 궤의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궤의 네 발에 달고 조각목으로 체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양편 고리에
꿰어 두고 빼어 내지 말 것이다. 궤의 용도는 여호와께서 주실 증거판을 넣는 것이다.
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그리고 정금을 안팎을 전부
싸서 덮어야 한다. 그리고 궤 윗가로 돌아가면서 금테를 둘러야 한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금고리 넷을 만들어 궤의 네 발에 달고 그리고
조각목으로 체를 만들고 그 체도 금으로 싸고 그리고 양편 고리에 꿰어 두고 빼어 내지 말 것이다. 그대로 꿰어 둬야 한다. 그러면 궤의 용도는
무엇이냐? 여호와께서 주실 증거판을 넣는 것이다. 여기 16절을 보면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둘지며 그리고 21절로 보면 속죄소를 궤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궤 속에 증거판을 넣어라는 것이 거듭 반복되어 있다. 그러니까 궤의 용도는
여호와께서 주신 증거판을 넣는 것이다.
증거궤는 여호와의 궤이며 언약궤이다. 이들 호칭은 상호 교환해서 쓰이나, 증거궤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언약궤는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서에서 주로 쓰인다. 증거궤라는 호칭은 궤속에 증거판을 넣기 때문이다. 여기보면
궤가 이름이 없다. 궤를 만들고 했는데 이제 결론에서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22절에 보면 속죄소 위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결론에 드디어 증거궤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그 앞에는 이름 없이 궤를 만들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증거궤라고 부르는 것은 증거의 두 돌
판을 넣어 두기 때문에 증거궤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 이제 모세 오경에서 찾아보면 이 증거궤는 여호와의 궤 또 언약 궤 이런 세 가지
이름으로 상호 교환해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증거궤라는 이름은 여기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한 두 번 나온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호와의 궤 또는
언약 궤 그런 말이 주로 중심이 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서 증거궤는 왜 그런가? 언약의 두 증거판을 넣어 둠으로 증거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언약을 성취하신 분으로서 거기 계신다. 하는 증거로서 증거궤고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앞서
가서 싸우시고 하는 그런 문제는 언약궤로 주로 칭해진다. 언약의 진실하심을 따라 앞서 가신다. 여기서는 언약 체결이 중심이다. 내가 너희 중에
있다. 시내 산에서 친히 십계명을 발설하신 분께서 돌 판에 법을 새겨 주시고 그것을 보좌로 삼아서 그들 중에 거하신다. 왜냐하면 그 법을 그들
중에 이루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여기서 성막의 기능은 증거의 막 즉 하나님이 친히 그들 중에 계신다는 언약의 확증 그런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 출애굽기의 성막의 기능이고 그리고 다른데서는 자기 백성을 앞서 가시며 원수들과 먼저 싸우시며 한 것은 여호와의 궤 또 언약 궤
그래서 언약을 성취하신 분으로서 강조를 두면 언약궤 여호와의 궤 그렇게 칭해지고 내가 너희들 중에 있다는 언약의 확증의 문제로 기록이 되면
증거궤 거기다 강조가 주어져 있다 그런 말씀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시내 산에서 십 계명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모세가 책에 써서
읽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 산에서 부르시고 이제는 구름 밖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돌 판에
새긴 법을 주셨는데 그것을 마치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말씀이 이제 증거궤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언약의
확증으로 궤 속에 두 증거의 두 돌 판을 넣도록 하셨다. 이제 하나님은 시내 산에 계신 분이 아니라 증거궤 위에 계시는 분이시다.
속죄소는 궤의 뚜껑과 같은 크기인데 정금으로 만들고, 그룹 둘을 정금으로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어 양끝에 하나씩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하게 한다. 그룹들은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게 하고 그 얼굴들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한다.
그룹들은
여기만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나중에 성소의 휘장들을 보면 거기 그룹들을 수놓아 새겨지도록 했다. 그래서 그룹이 있는 곳은 여호와의 거처다.
그런데 속죄소 금으로 만드는데 그 속죄소 양끝에다가 그룹들을 연결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한 덩어리로 만들어라 그 말이다. 또 그룹들은
날개를 펴고 그 얼굴로 속죄소를 향하게 만들어라. 이것을 증거궤 위에 얹으라 그렇게 되어 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증거 판을
궤속에 넣은다.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의 보좌이다(대상28:2, 시99:5, 132:7). 이제는 여호와가 시내 산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증거궤 위에 계신다. (대상28:2, 시99:5, 132:7). 이런데서는 여호와의 보좌라 여호와의 발등상이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호와 증인이 그럴 것이다. 예수님은 땅에 오시지 않는다. 왜 땅은 발등상이요 그랬으니까 왕이 발등상에 내려오는 법이 있냐? 하늘 보좌에
앉아있어야 되지 너는 내 보좌 우편에 앉았으라 햇으니 그 보좌에 앉아 있고 땅은 발등상이라 종이나 앉은 자리지 안 내려온다. 문자 그대로 풀면
맞을 듯 하다. 이제 솔로몬의 기도를 보면 하늘의 하늘이라도 여호와를 감당치 못한다고 했다. 하물며 내가 지은 이 전이리이까. 그런 의미로
발등상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항상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위다. 증거궤 위다. 그러니까 그것은 발등상으로표현 된
것은 그냥 종이 앉은 자리다 그런 말이 아니라 왕이 거기 임하셨다는 그런 표현법이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풀어서 왕은 보좌에 앉지 발등상에 내려
오겠냐? 그가 재림하면 발등상으로 내려오는 것이니까 재림하지 않는다. 그렇게 글자 풀이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발등상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전보다 훨신 크신 분이시다. 그런데 구약 때 하나님의 임재는 증거궤 위다. 그러니까 그것이 여호와의
발등상이요 동시에 여호와의 보좌다.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며 거기서 이스라엘을
위한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다. 시내 산이 그 쪽으로 옮겨진 것 같다.
성막과 기구들의 나타난 재료의 차이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영광의
차이이다. 여기 보면 만든 기구에 전부 금으로 싸게 하셨고 금 고리를 만들고 금테를 두르도록 했다. 여기서는 전부 금이다. 한꺼번에 설명하고
넘어 간다. 왜냐하면 금을 한참 설명하고 은을 한참 설명하면 난처하니까 금은 동을 한꺼번에 설명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금속의 차이는 있어서
같은 의미다. 실은 금의 의미가 그보다 낮은 금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금속의 차이는 곧 영광의 차이이다. 그래서 성소
내부는 전부 금이고 성소밖은 한 마디로 하면 놋이고 그렇게 구별하면 더 맞다. 그 사이에 은이 나타나고 있지만 크게 나누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성막이 서 있을 제도 모세 제도에서는 휘장 안에는 제사장만 들어가고 백성은 들어가지 못한다. 아직 성소에 나가는 길이 막혔다.
그런데 백성은 제물을 가지고 오면 뜰에는 나아간다. 물론 그가 제단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해도 뜰에까지는 나아갈 수가 있다. 거기는 놋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광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 금속 재료를 가지고 예수님 신성 인성 그것을 설명하면 안되고 그들 중에
임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임하시는가 하는 문제지 여기서 예수님의 인격을 직접 말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성소로 말씀하신가
우리는 그것을 인격으로 막 말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구약에서는 인격에 대한 문제보다도 그의 하시는 일에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조막목은 예수님의 인성 금은 예수님의 신성 그렇게 하면 안되고 한마디로 성소 안에는 전부 금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탁월하게 나타나고 그
보다 영광이 덜 한곳은 뜰이다. 그래도 같은 영광이다. 그것이 구약에서 선을 나누고 있는 방식이다 그런 말이다.
나중에 여러분이 성소는
어디 성소와 비교를 해봐야 되냐면 왕상에는 솔로몬이 왕에 등극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상에는 다윗이 마지막에 성소에 대해서 제도를 주고
대하에 들어가면 이제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기사가 있다. 그런 기사들과 서로 비교를 해봐야 된다. 그 비교를 해 보면 왜 열왕기에서는 여기 까지
기록을 하고 역대기에서는 저기 까지 기록을 했는가? 하는 문제를 알 수가 있다. 나중에 솔로몬 성전을 가면 이보다 훨씬 다르다. 역대기를 그룹
둘을 만들었는데 감람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도금을 했다. 그리고 새로 지은 성소에 가득 차게 만들었다. 그것은 여기 속죄소에 있는 것하고는 다를
것이다. 그러면 그런 것은 무엇인지 생각을 해봐야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유리 할 때는 하나님도 계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주셨을 때는 하나님도 가나안 땅에 집을 짓고 계셨다. 그 집은 이동식 천막이 아니다. 아주 영광스러운 집이다. 그런데 그 집이
아라우나 타작 마당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는 자리에 짓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모세의 장막은 이동식 천막이다. 왜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주지 않았을 때 하나님도 광야에서 유리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감람목으로 무엇을 만들고 백행목으로 만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 보면
조각목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광야에 있는 재료다. 그런데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는 전부 백향목 잣나무 또 감람목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함을 백향목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아주 좋은 재료로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건축학 자가 되어 가지고 백향목도 안 썩고 감람목도
안 썩은다. 그러면 처음부터 제일 든든한 재료로 할 일이지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만 재료가 바뀌어 지는가? 자기 백성에게 주신 영광으로 자기
거처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으면 가나안 땅의 극상품으로 그 집이 지어져 있고 광야에서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을 입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나중에 이 성소를 계시록에 있는 성소와 비교를 해보면 더 맞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말씀을 주셨는데 이제는 그 거처가 시내 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로 옮겨져 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궤가 하나님의 보좌요 그 속에는 여호와의 증거판이 들어 있다.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고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속죄소가 있는데 그룹과 한 금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떨어질 수 없는 하나다. 속죄소와 금은 하나로 되어 있고 내가 거기서
너를 만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막과 기구들에 나타난 재료의 차이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영광의 차이고 금은 여호와의
보좌의 영광이며 은과 놋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영광이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역사의 종말에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곧 성소이며 그 성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며 어린양이 그
성의 등이 되신다(계21:에 보면 모세의 성소의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거기 보면 성소가 따로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성이 곧 성소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루살렘 성이 곧 성소다 지성소 구조로 되어 있고 거기는 완전히 유리 같은 정금이다. 그런데 그 금이 모세 장막에 보니까 성소의
금속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단과 상에 금테를 두르는 것은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면류관을 쓴 것처럼 되어 있다. 금테를 두루는 것은 증거궤와 그리고 향단과 그리고 떡상 그렇게 되어 있다. 번제단은 단은 단인데
놋테가 둘러 있지 않다. 그러니까 뜰에 있는 영광은 조금 차이가 난다.
그리고 고리를 붙이고 체를 꿰어 레위인으로 메게 하신 것은 왕의
보좌가 이동하는 방식이다. 고리가 붙어 있는 것은 이 증거궤하고 떡상 하고 그리고 금향단하고 번제단하고 그것은 고리가 붙어 있고 체를 꿰어서
해야 한다. 제일 무거운 것이 놋그릇인데 물 떠놓고 씻고 목욕하는 큰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고리를 달아라는 말도 없고 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를 않다. 촛대도 금으로 되어 있지만 고리가 붙어 있거나 그렇지는 않다. 그러니까 주로 고리는 상과 단이 붙어 있다. 나머지는 오히려
거기에 있는 부속된 기구처럼 되어 있다. 그러니까 고리가 붙어 있고 관까지 쓰여져 있는 것 그런 것이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증거궤는
고리를 아예 꿰어 놓고 빼내면 안된다. 그 말은 만지지 말라 그 말이다. 다른 것은 뺏다가 또 옮길 때는 꿰어서 옮겨야 되지만 이 증거궤는 아예
꿰어 놓아야 한다. 만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여기 (민4:, 7:4-9, 대상13:9-12, 15:1-15).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군대로 조직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가 이동한다. 그 보좌가 이동할 때 어떻게 레위인이 봉사할 것인가 하는 의미가 민4장과 7장에
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많은 소도 내고 수레도 냈다. 요즘 같으면 짐을 실고 가도록 트럭 같은 것은 낸 것이다. 그렇게
헌금을 한식이다. 그런데도 놋솥을 이동하는 므라리 지파에게 말하자면 수레에다가 실고 다려라 그런 말이 없다. 4장에 보면 전부 어깨에 메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전부 어깨에 매라 그렇게 되어 있다. 실고 가라는 말이 한군데도 없다. 실제로 나중에 수레들을 배열할 때 보면
하나님의 지성소에 있는 물건을 메는 고핫 지파에게는 수레를 하나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므라리 지파가 성소 뜰에 있는 많은 기구들을 운반한다.
거기는 수레를 많이 주었다. 그리고 천막을 이동시키는 게르손 지파에게는 조금 주었다. 고핫 지파에게는 아주 주지 않았는데 그들은 지성소에 있는
물건을 메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전부 메라 해 놓고 수레는 주는가? 실고 가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전부 메라는 말이 주를 이루고
실고 가라는 말은 한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민수기에서 여호와의 보좌가 이동하는 방식이다.
나중에 역대상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증거궤를 메고 오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웃사가 소가 놀래서 뛰니까 그것을 만지다가 죽었다. 그래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벳에돔의 집에 두었다. 그 집이 큰복을 받았다. 그래서 나중에 레위 지파를 성별하게 하고 그들로 법궤를 메도록 했다. 거기 보면 레위 지파에
누가 이 법궤를 멜 수 있는가 그렇게 하고 있다. 여호와의 보좌가 이동하는 식이다. 반드시 레위 지파가 메어야 되고 일반 백성은 가까이 하면
안된다.
민수기 4장을 보면 잘 나와 있다. 옮길 때도 홍색 자색 그런 보로 덮어야 한다. 그래서 옮길 때도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성막이
움직이는 방식이고 보아서는 안된다.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체를 만들고 고리를 만들고 체를 꿰라. 그렇게 하고 레위 지파로 메게 했을
때 이것은 마치 옛날 우리 나라 임금이 가면 가마 타고 간다. 그와 비슷하게 옮겨 가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단들은 그렇게 옮기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조각목으로 만들고 밖에는 금속으로 덮었다.
증거궤는 체를 꿰어 두고 빼내지 말라 한 것은 어느 누구도 손대서는 안되고
그것은 거룩한 여호와의 보좌로 누구도 만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앞서 가실 것이다. 그래서 꿰 놓고 빼지를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다. 나중에 솔로몬의 성전을 보면 이 체가 길어서 성소 밖에서도 체가 보이게 생겼다. 그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보겠는가?
여호와의 보좌가 영원히 저기 계시는구나 하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말하자면 건물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항상 거기 계시다는 표로 그렇게 체를 보이도록 했다.
증거의 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시행하시는 언약의
두 돌 판이다. 언약의 두 돌판을 증거의 판으로 여호와의 궤 속에 넣게 하시고 그 위에 천사들의 거처인 속죄소를 두게하시며 거기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며 공과 의로 통치하시는 것이다(대상16:27-36; 시89:14 시97:2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시고 시행하시리라는 보증이다. 그 보증으로
두 돌판을 증거판으로 궤 속에 넣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보좌의 기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임하신 그 통치의 기초는 항상 돌
판에 새겨진 법이다. 그것이 공과 의로 통치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인용구절들을 보면 시89:14절을 보면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여기서 의와 공의는 같은 개념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의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 그래 버리면
이스라엘은 멸망할 것이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이 언약의 주로서 그들 중에 계셔서 공의로운 통치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구원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며 통치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보좌를 속죄소라고 칭하며 그룹들의 거처로 묘사하므로 피의 약정을 확정한다. 시내
산에서도 피로 언약을 체결하시고 언약 체결 식사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이 언약을 따라 대표자들을 구름 영광 가운데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있어야 할 은혜의 법들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돌 판에 새겨 주셨다. 이 하나님이 이제 보좌에 함께 계셔서 영원히 이스라엘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보좌를 속죄소라고 그렇게 칭하고 그룹들의 거처로 묘사하면서 피의 약정을 확정한다. 피의 언약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들의 거처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보좌다. 그것을 속죄소라고 말한다. 아직 속죄
제사에 대한 문제는 나오지 않는다. 특별히 속죄제사는 레위기에 나올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서는 속죄소라고 미리 붙여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백성을 만나시는데 속죄의 은혜로 만나신다. 그것이 피의 언약 체결에서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구원이요 안식이다. 그것이 성소의 가장 큰 구조로는 안식일에 모세를 영광 안으로 부르셨고 성소를 다 짓고 나서도 큰 안식일을 지키라고
그랬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안식 곧 구원이다. 이것이 오늘 했던 설교대로 하면 임마누엘이다. 함께 계시는 것이다.
구약에는 휘장으로 가리고 계신 분이 영원히 자기 백성의 형제로 함께 오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왜
만군의 여호와 신가? 천사들의 호위를 받고 천사들 가운데 계신다. 그는 하늘의 천군 천사를 친히 부르셔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이제 하늘이 천사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이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사들의 거처에 친히 좌정하셔서 자기 백성의
속죄의 은혜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중에는 만군의 여호와 그렇게 특별히 이사야서에서는 부른다.
이 은혜의 일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교회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으로 온전케 하셨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참 이스라엘이요 마음 판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다(히8:-10:).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고(골3:3),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엡2:6).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며(히4;16) 거기서 하나님께
경배한다(계4:10).
계시록에 보면 천사들과 함께 경배하는 24 장로들의 예배가 있다. 이제 교회 안에서 그 일을 완성하셨다.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증거의 판에 새겨진 그 언약의 법이 마음 판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돌판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마음에서 말씀하신다. 그것이
신약 백성의 탁월한 은혜다. 구약 때는 몇몇의 증거 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으면 이제 그분은 주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셔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져 있고 그것이 새 백성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기쁘시고 온전한 뜻을 우리 마음에 소원과 탄식을
두고 이루어 내신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소원이고 탄식이다. 그것이 신약 교회에서 이루어 진다.
이제 교회는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았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다. 사람이 만든 장막 가운데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데 이분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신 분이다. 그분 안에 있다. 교회는 사람이 만든 휘장 밖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계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누리는 경배요 복이다.
이 일을 교회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새 백성으로 지으셔서 완성하셨다. 구약과 신약은 이처럼
연결되면서 비교할수 할수 없는 탁월함이 교회에 주어진 것이다.
나중에 떡상과 등대를 더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 물론 천사들의 거처가
여호와의 거처인데도 이것이 천사들의 거처가 된 것은 그 판이 증거판이 들어 있는 증거궤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는 속죄소 보다는 핵심적인
주제는 증거의 두 돌판을 넣어두는 하나님의 언약궤 곧 증거궤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 지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말하는
속죄소가 그 위에 있을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있지를 않는다. 나중에 성소에서도 중심이 되는 곳은 등대 보다는 떡상이다. 아마 떡상이 먼저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실현 등대는 떡상을 비추도록 하는 보조기구 비슷하게 되어 있다.
일곱 등대하면 신약에서는 교회로 많이 나온다.
그렇다고 직접 교회로 해석하면 안된다. 실제적으로 떡상은 많이 설명이 안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떡으로 많이 설명은 해도 떡상은 잘
안 나온다. 그런데 이 등대 같은 것도 직접적으로 교회 같은 표상보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빛이시오 구원인 것은 나타낸 것이 일곱 등대에서
나타낸 것이다. 등대는 교회로도 묘사될 뿐만 아니라 여호와 앞에 일곱 영 하나님의 완전한 빛 어린양이 친히 빛이 되시고 그것이 더 중심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분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구원으로 빛으로 기능 발휘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곱 등대는 계시록 처음에 일곱 교회라고 한다고
해서 막 교회로 해석할것이 아니다. 실은 성소에서 떡상에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그것을 제사장을 안식일에 자기 양식으로 취하는 이것이
성소에 있는 예배의 본질 즉 교제의 본질이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하겠다.
계시록에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예루살렘 성이 곧 성전인데
성전이 따로 없고 완전한 금이다. 이제는 성전 뜰이 없다. 그 뜰에는 레위인이 활동했고 일반 백성은 문 앞에 나올 수가 있었다. 나중에 솔로몬
성전에 가면 이방인의 뜰도 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는 뜰이 따로 없다. 우주가 거룩한 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는 구약 표상 법을 그대로
써야 한다. 여기 금을 하나님의 성소 기구로 삼았기 때문에 거기서 금이 구원 역사에서 특성을 얻는 것이지 금속 재료를 해석해서 그것으로 들어가면
안된다. 그 재료를 해석해서 금은 변하지 않는다. 불변이니까 신성이다. 그러면서 여러분도 여호와의 성소가 되려면 금을 불로 연단해서 찌꺼기를
제거해 버린 것처럼 불변하는 믿음이 있어야 여호와의 성소가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되고 여기서는 금속의 영광의 차이만 해석하면 된다.
금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차이만 설명하면 된다. 금을 가지고도 영해 하자면 마음대로 설교한다. 금은 마음대로 늘린다.
그러니까 통도 쌓고 천사도 만들고 하겠지요? 딱딱하면 안 될 것이다. 아무리 비싼 금강석도 딱딱하면 깨지느니라. 금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그러면
설교가 되는 것이고 별말이 많다. 그런데 그런 것은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다. 여기서는 영광의 차이들만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금으로 쌓고 했어도 금이나 조각목은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것을 말한 적은 없다.
그들 중에 계신 영광스런 분이 누구 신가가
이것을 통해서 비추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재료가 바꿔져 있다.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 그것을 가지고 벌레가
슨다 안 슨다 하면 난처하다 그 말이다. 여기서 보니까 은으로 된 것도 있다. 은은 계란을 뭍여 버리면 깜해 져 버린다. 그런데 그렇게 변하기
쉬운 것이 은인데 그것으로 만들려면 되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말들을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전에 놋그릇 보면 절기 때 되면 가마니 깔아 놓고
기와 장으로 닦았다. 푸르스름한 녹이 슨다. 그러니까 그것은 성경에서는 전혀 말을 안하고 있는데 금보다 순결한 믿음 놋 같이 단단한 무엇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다. 이것은 영광의 차이를 나타낸다.
구약 때는 영광의 차이가 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의 차이가 없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방식이다.
바로 보좌에 계신 그분이 친히 우리 중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 그분이시다. 그분이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는데 언약의 성취자로 계시기 때문에 마음 판에 법을 새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지으시고 그리고 그
보좌에 우리를 함께 앉게 하셨다. 그것이 구약 역사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그 역사를 완성하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십계명
말씀을 읽는다. 왜냐하면 새로 법을 주신 것은 없다. 그러나 돌 판에 새긴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판에 새긴 방식으로 우리
중에 오신다. 하나님으 뜻이 우리 생명과 소원이 되도록 하셨다. 그래도 새겨진 것은 처음 돌판에 새긴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읽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 그분과 함께 하시는 생명의 교제 가운데서 법이 해석되고 나타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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