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산에서 보이신 여호와의 거처의 식양 [출 25:10-30]
2006. 7. 17. 00:04ㆍ목양자료/3.강해설교
출25:10-30: 여호와께서 산에서 보이신 여호와의 거처의 식양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이신 장막의 식양과 기구의 식양은 시내 산에 맹렬한 불 가운데 임하신 여호와께서 백성과 피의 언약을 체결하시고 이제 언약 백성의 대표자인 모세를 안식일에 그 영광 안으로 부르시고 언약의 증거 판과 함께 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의 영광 중에서 장막의 식양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여호와의 성소를 그 식양대로 짓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의 영광으로 영원히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약속이다. 이 언약은 피로 약정한 언약이다.
옛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은 산에서 보이신 식양을 따라서 사람이 지은 장막 곧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 안에서 여호와를 섬겼다. 하늘은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 이제 들어가사 섬기시는 하늘이요 위엄의 보좌 우편이다(히8:1-5)
장막에 대한 식양은 25:10-30:까지이며, 증거궤와 속죄소로 시작해서 증거궤 앞에 두는 향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끝난다. 이후 31장에 기록된 성막을 만드는 직공과 안식일 명령은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들 중에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복을 결론적으로 첨가하신 것이다.
장막을 짓도록 보이신 식양의 순서는 지성소에서 시작해서 성소와 뜰로 진행되며, 그리고 이어서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섬길 등불과 의복과 위임 식과 향단과 물두멍과 향을 만드는 규례로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장막에서 이스라엘과 한집에 거하시며 그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고 그 백성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 와 빛 가운에서 여호와의 상에서 먹으며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을 사르도록 하셨다.
성막에 속한 것은 금과,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은 막이며, 뜰에 속한 것은 놋과, 세마포와 은이다. 문과 휘장은 성막과 같다. 밭침은 성소의 것은 은이요, 성소의 문과 뜰의 것은 놋이다.
여호와의 거처는 입구의 문과 2중 휘장으로 되어 있다. 문과 휘장은 성소 안의 재료로 되어 있으며 그룹들로 수놓아 만들었다. 이 구릅들은 밤죄한 아담이 에덴의 생명 나무의 길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킨 천사들이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와 백성의 대표인 대제사장과의 간격이며, 성소의 휘장과 뜰의 문도 제사장과 레위인과 백성간의 여러 간격이다. 성막의 재료들의 차이도 그러한 영광의 차이를 나타낸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장막에서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것은 먹고 마시고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다(히9:8-10).
첫 언약도 피로 세운 것이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로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다(히9:).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성소는 귀한 보석으로 지어진 지성소의 구조이며 120,000 스다디온의 정 육면체이며 어린양이 빛이시다. 성전 문은 사면으로 열려 있어 만국이 그 빛 가우데로 다니나, 거룩치 못한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계21-22).
구체적인 성소의 기구들을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도록 하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이신 장막의 식양과 기구의 식양은 시내 산에 맹렬한 불 가운데 임하신 여호와께서 백성과 피의 언약을 체결하시고 이제 언약 백성의 대표자인 모세를 안식일에 그 영광 안으로 부르시고 언약의 증거판과 함께 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들 중에 거할 내 거처를 지어라. 하면서 여호와께서 산에서 여러 성막의 기구들과 장막에 기구들에 대해서 보이셨다. 이것은 무엇과 함께 주어졌냐면 이 앞에서는 언약의 식사를 하고 그 다음에 그 대표자인 모세와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영광으로 부르셨다. 그런데 하늘에 구름이 빽빽히 있는데 제 7일 안식일에는 구름 가운데서 여호와의 음성으로 모세를 부르셨다. 그 때 모세가 그 영광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영광은 백성이 산 밑에서 보았을 때는 맹렬한 불같은 영광이었다. 그 영광으로 들어가서 40일 동안 있었다. 그 때 주신 것이 이 성막의 제도다.
돌 판에 새긴 언약의 법 증거의 판과 함께 주셨다. 그러니까 이 앞과 뒤를 보면 바로 지금 보인 식양은 어떤 식양이냐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 안으로 들어간 그 식양이다 그런 말이다. 바로 그 관계를 땅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이 장막을 짓도록 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의 영광 중에서 장막의 식양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여호와의 성소를 그 식양대로 짓게 하신 것은 여호왂게서 시내산의 영광으로 영원히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약속이다. 이 언약은 피로 약정한 언약이다. 피로 언약을 세우시고 시내 산 영광안으로 부르시고 여호와께서 거할 집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시내 산에 모세를 그 영광 안으로 부르셔서 교제했던 이 교제의 관계로 이스라엘중에 영원히 거하시리라는 약속이다 그런 말이다.
옛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은 산에서 보이신 식양을 따라서 사람이 지은 장막 곧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 안에서 여호와를 섬겼다. 하늘은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 이제 들어가사 섬기시는 하늘이요 위엄의 보좌 우편이다(히8:1-5) 그러면 옛 언약 백성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살았는가? 시내 산에서 보인 영광 안에서 살았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인 식양이요 산에서 보인 식양이고 모세를 통해서 짓게 하신 식양이다.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겼다. 그것이 구약 시대다. 그러면 여기서 하늘에서 보인 식양은 히브리서를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그렇게 말을 한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인 식양을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이 하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 줬을 때는 하늘에서 보여주고 그것을 가지고 그림자로 땅에다가 짓고 그런 것이 아니고 이 하늘은 모세를 통해서 보여줬던 것과 비교되는 하늘이다.
모세에게 보여줬던 것은 산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그것을 따라서 장막을 지었다. 그것이 구약 백성이 하나님을 섬겼던 여호와의 영광의 거처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거처냐? 하면 이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했을 때 이 하늘에 있는 것은 시내 산에 어떤 원형이 있고 그것을 보고 모세가 땅에 내려가서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 하늘은 역사의 종말에 예수께서 들어가신 그 하늘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그 영광을 말한다. 그것을 위엄의 보좌 우편이라고 히브리서는 말씀을 한다. 그것이 구약 때 섬겼던 모형과 그림자라 그런 말씀이다.
장막에 대한 식양은 25:10-30:까지이며, 거기는 무엇으로 구성됐냐면 제일 처음 증거궤가 있다. 여기서는 법궤 그렇게 안하고 증거궤라고 그런다. 증거궤가 있고 그리고 속죄소가 있다. 거기서 시작해서 증거궤 앞에 두는 향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끝난다. 전체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말이다. 무엇으로 시작했냐면 증거궤로 시작해서 그 증거궤와 함께 있는 것이 속죄소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거기 좌정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보좌다.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쭉 설명이 되어서 어디서 끝나냐면 바로 이 증거궤 앞에 둘 향을 만들라 하는 그런 명령으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그 후에 31장에 기록된 것은 무엇이냐면 성막을 만드는 직공과 안식일 명령은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들 중에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복을 결론적으로 첨가하신 것이다.
이 성막을 짓고 그들 중에 거하시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뒤에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나태내 주고 있다. 성막을 지을 사람을 임명하고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한 자들이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 이것이 영원한 표징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막을 짓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그 신으로 모세에게 보이셨는데 그것을 짓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지혜로 충만한 자들이고 그렇게 함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 영광 안으로 모세를 부르셨고 또 다 지으라고 하고 나서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해서 하나님의 전을 지을 백성들을 임명하고 있고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서 영원한 언약의 표징으로 삼아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성막은 한마디로 안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안식이다. 그것이 성막의 의미다.
그래서 솔로몬 때 성전을 지었을 때도 하나님이 안식을 주셨을 때에 하나님의 안식의 거처로 성전을 짓는 것이다. 그런 말씀이다. 그래서 이 직공에 대한 명령과 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성막을 짓고 그들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의 복을 결론적으로 첨가한 것이다. 이제 증거궤로부터 시작해서 향을 만들라는 것으로 성소에 대한 구조는 끝나는데 이것을 다시 더 설명하겠다.
장막을 짓도록 보이신 식양의 순서는 지성소에서 시작해서 성소와 뜰로 진행된다. 지성소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기 증거궤와 속죄소가 있다. 그 다음 밖에는 금등대와 금 떡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지성소에 있는 물건부터 성소로 그렇게 진행되고 그 다음에 뜰로 나간다. 뜰에는 번제단이 있다. 이런 단에 대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쭉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배열했는 가를 잘 봐야 한다. 이 단들은 하나님이 친히 임하시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하는곳이 다 단에 대한 문제다. 우리 같으면 안방 지성소에 대한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 하고 그 다음 안방밖에 있는 방 다 하고 그 다음 뜰에 있는 것 다 하고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여호와의 보좌로부터 시작해서 금등대와 떡상으로 해서 그 다음 번제단으로 막 나갔다. 물론 그 사이에 휘장을 이렇게 치라는 말이 있다. 그래도 그런 순서로 나간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 있냐면 이어서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섬길 등불과 의복과 위임 식과 향단과 물두멍과 향을 만드는 규례의 순서대로 명하신다. 이 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할 때 제일 먼저 무엇이 있는가? 금등대에다가 기름을 붓고 항상 등불을 밝혀야 된다. 기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는 향을 살라야 된다. 향 만드는 이야기 그 두 이야기가 대제사장 아론 가문의 봉사를 앞과 뒤로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가 대제사장의 옷 그 옷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다 쓰고 하나님 앞에 나갈 것이다. 그 옷과 위임식 그리고 기름부음 그 대제사장이 봉사로 씻는 물두멍 그리고 향을 사르는 향단 향품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봉사는 등대에다가 기름을 붓고 항상 등불을 켜야 하기 때문에 그 기름에 대한 문제와 하나님의 향단에 살라야 하니까 향을 만들라는 이야기 그것이 처음과 끝이고 그 안에는 대제사장의 의복과 직무들 그리고 기름부음 그런 문제로 진행이 된다.
그러니까 향단은 어디가 기록이 되어 있는가? 우리 같으면 향단이 제 일부에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할 것 같지요? 증거궤 그 다음 바로 그 앞에가 향단이 있으니까 향단 그 다음 금 등대 떡상 그 다음 휘장은 걷고 나오면 번제단 이렇게 기록해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 향단은 저 뒤에다가 돌려서 대제사장의 봉사와 함께 기록이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는 하나님의 거처와 거기서 봉사하는 대제사장의 규례로 되어 있다. 크게 나누면 하나님의 거처와 하나님의 거처에서 봉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로서 제사장에 대한 규례 그렇게 구분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장막에서 이스라엘과 한집에 거하시며 그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고 그 백성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 와 빛 가운에서 여호와의 상에서 먹으며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을 사르도록 하셨다. 여호와의 거처다. 거기 계시는데 그곳은 여호와의 증거궤가 있고 속죄소가 있고 거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면 그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복종할 것이다. 그리고 백성은 백성의 대표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성소에 빛 금등대에서 비치는 빛 가운데서 거닐으며 금상에 차려 놓은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그리고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휘장 바로 앞에서 금 향단에서 하나님 앞에 향을 살라서 하나님의 기뻐 맡으시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곧 성소에 대한 규례다. 그러니까 이 성소는 출애굽기 구조대로하면 20장에 시내 산에 올라가서 백성의 대표들이 함께 먹고 마셨다. 그 관계를 땅에 장막을 짓고 영원토록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도 시내 산의 영광이 하나님의 임하심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출발 토대이면서도 그것의 완성은 성소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이다. 이제 시내 산 사건은 항상 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돌아볼 수 있는 역사의 토대는 되어도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더 앞으로 나가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사했던 것과 연결된다고 했다. 어떻든 하나님이 백성중에 나타나심은 시내 산에 나타나심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립하는 토대다. 그런데 그것의 완성은 성소에서 항상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다 출발점을 가지고 있어도 시내 산에다가 반복한 것은 아니다. 그 점을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오셨다. 구약의 여호와의 나타나심이 신약에서는 예수의 나타나심이다. 그런데도 그분의 나타나심이 교회에서 누려지지만 교회의 삶은 항상 예수의 나타나심을 신약의 기록된 식으로 반복됨으로 누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신약의 사건을 성경은 불변하다 해 가지고 그대로 우리 교회의 삶에 연결해 버리기 때문에 성경을 바르게 해석을 하지 못한다 그 말이다. 그것은 성경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잘 이해를 해야 한다.
지금 여러분을 하나님이 부르시면 제자들을 부른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다 버리고 나를 따라라. 부자 청년이 따르려고 하니까 다 팔고 나를 따르라. 그런 식으로 여러분을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특별한 상황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부르시는가? 다 버리고 따라라 그런 식으로 직접 명령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말하는가? 자기 친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하다고 그랬다. 그런데 다 버리고 따라라 그러면 요새 식으로는 중이 되어라 그런 말이 될 것이다. 중은 장가 갔다 가도 버리고 가니까. 그러면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는 말인가? 예수님이 그 제자 단을 구성할 때 부르시는 것과 지금 우리를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물론 원리에 있어서 적용은 되겠지만 상황들이 다르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안된다 그 말이다. 마치 시내 산에 하나님의 임하심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출발점이다. 그래도 그것을 누리는 것은 성소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도 항상 토대는 시내 산을 본다. 그런데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예수의 나타나심이다. 그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설립된 것이 예수의 교회다.
그러면 교회 적인 삶은 예수의 나타나심을 항상 돌아보아도 그것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이루진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약 성경을 해석해야 될지 우리가 이해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보수파가 성경은 일점일획 어김없고 그대로 믿는다 그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예수님 일본으로 전도 가게 바다를 한 번 맨발로 건너 가 볼 랍니다. 그렇게 기도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래도 베드로는 한참 걸어가다가 물에 빠졌지만 그것을 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돈 잘 번다는 말은 만사형통인데 또 병 나은 것도 만사형통이라고 하는데 나를 바다 위로 걸어오게 하십시오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우리 나라 겁나서 독사 집은 사람도 없다. 그러니까 묘하다. 적용을 하려면 몽땅 다 적용을 해야 되지 그런데 적용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가 안간 목사가 얼마나 있는가? 그런 사람 없다. 그런데 돈벌고 그런 이야기는 성경대로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 쪽은 자꾸 그대로 연결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얼마큼 우리가 성경을 잘못 적용을 하고 있는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성경을 구원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하지 않으면 성경은 아주 어리석은 책이 될 수도 있다. 성경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 그렇게 될 수가 있다. 우상 섬기는 것만큼 그렇게 어리석게 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 성막의 제도는 출애굽기 구조대로 하면 시내 산 영광 가운데 모세가 들어간 그 영광이 땅에 구현 된 것이 이 성막 제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인 것이고 산에서 본 식양대로 지은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그림자다. 이 하늘은 예수님께 영광의 보좌 우편에 들어가신 사람이 지은 장막이 아니다.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영광에 들어간 것에 그림자다. 그것은 구약 전체를 말한 것이다. 장막으로 섬기는 것은 그림자로 섬기는 시대다. 그것은 시내 산 영광 가운데 들어간 섬김이다. 이제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그 영광의 빛으로 섬긴다. 그것의 그림자가 구약 때 섬김이었다 증거궤 그래서 성소 제도를 쭉 보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 중에 임하시는가? 또 그들 중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하는 문제와 거기서 어떻게 백성의 대표자가 하나님을 즐겨 봉사하는가 하는 그 두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묶으면 여호와의 안식이다. 처음부터 안식일에 부르셨고 마지막에도 안식하고 하고 있다. 여호와의 안식이다.
그러면 이제 더 구체적으로 어떤 재료로 되어 있는지 조금더 보자. 그러면 성소에 속한 것은 금과,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은 막이며 그렇게 되어 있고 뜰에 속한 것은 놋과, 세마포와 은이다. 문과 휘장은 성소 내부와 같다. 밭침은 성소의 것은 은이요, 성소의 문과 뜰의 것은 놋이다. 이것은 재료를 가지고 전체의 구조를 보는 것이다. 여호와의 거처는 입구의 문과 2중 휘장으로 되어있다. 문과 휘장은 성소 안의 재료로 되어 있으며 구룹들로 수놓아 만들었다. 이 구릅들은 밤죄한 아담이 에덴의 생명 나무의 길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킨 천사들이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와 백성의 대표인 대제사장과의 간격이며, 성소의 휘장과 뜰의 문도 제사장과 레위인과 백성간의 여러 간격이다. 성막의 재료들의 차이도 그러한 영광의 차이를 나타낸다.
구성 재료를 가지고 구분을 해 보면 하나님의 집은 몇 칸으로 되어 있냐면 제일 큰 뜰이 있고 한 문이 있다. 거기 들어가면 또 한 집이 있는데 거기 휘장이 쳐져 있다. 그 휘장을 걷고 들어가면 안에는 온통 금이다. 그리고 또 안에가 휘장이 있다. 그 안에가 증거궤가 있고 속죄소가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은 삼중 문으로 되어 있는 식이다.
그러면 재료들을 보면 왜 재료들을 구분하냐면 여러분이 여기 보면 나중에 그들을 속하도록 성전세를 내도록 말하고 있다. 은 반세겔 그것은 은으로 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설명을 하냐면 밭침은 은으로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성소는 속죄의 토대 위에 놓여 있다. 이렇게들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은은 그런 것은 아니라 성전에서 봉사하는데 쓰도록 하는 은 반 세겔이지 성전을 짓는데 쓰도록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금속 색깔로 막 구분하려고 해서 은 하니까 은은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30장11절부터 보면 속전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속전으로 내라고 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이 속전은 무엇 때문에 드리냐면 장자를 대신해서 드린 것이다. 그러면 장자를 대신한 것은 레위 지파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위 성전을 짓는데 토대를 놓는 은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비슷한 것만 있으면 연결을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성소를 보면 그 안방은 토대가 은이 아니냐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소는 속죄의 토대 위에 놓인 것이다. 이렇게 풀려고 그런다. 그런데 그렇게 풀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성소 구조를 전체적으로 보면 금속에도 차이가 있다. 그러면 제일 안방에는 전부 금이다. 판자에다가 금을 입혔다. 그러면 이 조각목 판자를 무엇이라고 하냐? 예수님의 인성이고 금은 신성이다. 또 그렇게도 설명을 하려고 그런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동식 천막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돌로 짓는다. 돌로 짓고 안에를 판자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동식 천막이기 때문에 그렇게 안되어 있다. 그래서 인성을 신성으로 싸면 겉에 보인 것이 신성이고 인성은 안 보인다. 그러면 그렇게 붙이면 그것도 안 맞는 것이다. 금으로 만들고 나무로 싸 버려야 겉에 보인 것인 것이 인성이니까 그런 말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안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무가 인성인데 이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라 좀도 슬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무죄성을 말하는 인성이다 이렇게 해 가지고 이 사람은 목재 장사인데 나무 하나를 가지고도 굉장히 설명을 할 수가 있다. 그렇게 하지 말라 그 말이다. 저도 아카시아 나무와 참 나무가 얼마나 단단한 줄은 조금은 안다.
그전에 이야기했지요? 단단한 나무로 해야 되겠구나 하고 모르고 참나무를 구해 왔다. 못을 박는데 못이 안 들어가더라고요? 아마 철도 침목 같은 것이 참나무나 아카시아 나무로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단단한 나무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벌레도 안쓸고 그러는데 그것은 성경이 직접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나중에 해석해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이런 것을 풀 때는 전체적인 구조로 풀어 들어가야 그런 묘한 일에 빠지지를 않는다.
그러면 만일에 속죄의 은이 성소의 토대면 뜰에 있는 것도 전부 은을 토대로 해야 되는데 뜰에 있는 것은 놋을 토대로 하고 있다. 놋이 토대다. 그러면 안 맞아 들어간다. 그런데다가 은 밭침으로 은 가름대로 뜰을 전부 질러야 된다. 하얀 세마포에다가 은 밭침대로 해야 한다.
그러면 나타난 것은 그렇게 안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그냥 자기 식으로 맞춰서는 안되겠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구조로 해석해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차이가 있다. 등급이 있다. 그것이 성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다. 그러니까 성소 안쪽에는 판자를 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쌓고 있는데 들어가 보면 전부 금이다. 안에 있는 기구들도 전부 금이다. 금등대 금상 나중에 보면 금향단도 들어갈 것이다. 전부 금이다. 그리고 거기 수놓아 있는 것을 보면 천막들이 휘장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막까지라도 가늘게 꼰 베실 하얀 세마포실이다. 거기다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은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다. 완전히 천사들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제일 안방 거기도 휘장이 쳐져 있는데 이 색깔에다가 그룹들이 수 놓아져 있다.
옛날에는 여기 강대 상이 하나님이 앉아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여기 천막이 하나 있어서 함부로 들어오면 안된다. 그 다음 저밖에 방이 있는데 거기다 금등대 금상이 있고 앞에 향단이 있다. 그리고 저 문도 휘장으로 쳐져 있다. 거기도 들어오면 안된다. 그러면 여기는 누가 들어오면 안되냐? 아무도 못 들어오고 대제사장만 일년에 한 번 잠깐 들어왔다 나가야 되고 거기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그리고 지성소밖에 있는 성소는 대제사장이 항상 들어와서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관리하고 향을 사르고 안식일에는 그 떡상에서 물린 떡을 먹고 그런 자리다. 거기는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들어오는 곳이다. 그리고 그 밖에는 일반 레위인은 못 들어온다. 뜰에는 레위인들이 항상 있어서 제사장을 보조해서 봉사하는 자리다. 그리고 백성들은 거기 들어왔다가는 죽는다. 언제만 들어오냐면 제물을 드릴 때만 문 입구에 들어와서 거기서 안수해서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리고 더 이상 나가면 안된다. 번제단 까지라도 임자는 못 나간다.
그리고 그 뜰밖에는 일반 백성이 항상 있는 곳이다. 그래도 뜰밖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 곧 가나안 땅 예루살렘이다. 그리고 그 땅 밖으로 나가면 이방인들이 있다. 나중에는 이 뜰이 솔로몬 성전에서는 더 확대된다. 등대와 떡상도 열이고 또 이 뜰도 확대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뜰이 있고 여인들의 뜰이 있고 그리고 그 밖으로 이방인의 뜰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 짐승들을 쫓아내고 성전을 청결했던 것은 이방인의 뜰 멀리 있는 백성들이 와서 돈을 교환하고 그런 뜰이다. 그러니까 솔로몬 성전에 보니까 이방인의 뜰까지도 있다. 그렇게 점점 확대되어 나간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재료들을 봤을 때도 무엇이 토대냐 한 것보다도 그 영광의 차이를 말한다. 그래서 성소는 이 집이면 전부 금이고 그리고 마당은 전부 금이다. 그리고 가운데 휘장이 있는 곳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밖에는 대제사장과 제사장이 봉사하는 거룩한 곳이 있고 그 밖에는 뜰이다. 그런데 이 토대는 무엇으로 되어 있냐면 안에는 전부 금이면 그것을 밭치고 있는 토대는 은이다. 그리고 밖에 뜰은 기구들도 전부 놋으로 되어 있고 받침들도 놋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밖에 뜰에서 성소로 들어오는 그 입구에는 휘장도 밭침은 놋이다. 그런데 문 밖에 있는 휘장 둘은 성소 안에 있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수 놓은 것이 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섬기는 것은 창세기 처음 구조로 하면 에덴에 있는 생명 나무 중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열 두 덩어리 떡을 먹는 것은 완성된 생명을 대제사장이 취하는 것이다.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달달 떨고 죄인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항상 너희 중에 문을 열어 놓았으니 내 앞에 들어와라. 한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 때는 문도 여러개 있고 거기 들어가는 간격도 여럿이다. 그래서 재료에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말이다.
이것을 일일이 다 해석하려면 난처하다. 은은 무엇이냐? 그러면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말하고 은은 무엇이냐? 성경이 말을 하지 않으니까 모른다. 금 방패 대신에 놋 방패를 만든다. 분명히 질은 조금 떨어지고 그것이 성소 안과 뜰을 구별하는 차이점이다. 그런 구별은 가져오는데 놋 하니까 놋은 심판이다. 그렇게 하면 안 맞다 그 말이다. 이제 놋은 어떻게 주물로 만드는지 놋은 두들긴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맞다 그 말이다. 그 구조는 금보다 질이 더 떨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 간격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성소 구조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여기서 여러분이 잘 구별할 것은 성소 했을 때 이 성소를 어떤 의미로 성소라고 하는고 지성소를 말하는가? 또 지성소밖에 있는 성소를 포함해서 성소로 말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성막 전체를 두고 성소라고 말하는가? 그 문맥을 보면서 거기서 포함하는 범위를 이해를 해야 될 것이다. 그러니까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이 말은 바로 이 성막 제도에서 하나님을 섬겼을 때는 그런 말이다. 첫 장막은 모세 장막이기 때문에 그렇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이 성소는 특별히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휘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거기서 하나님이 좌정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데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출애굽기에서는 들어오지 말라는 선을 긋고 있지는 않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라. 구분한다는 말은 있어도 아직 나오지 말라는 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출애굽기는 여기서는 나오지 말라는데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 계시겠다는 약속이 강조다. 그런데 제일 출애굽기 끝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이 성막에 가득했을 때 모세도 들어가지 못하더라 그렇게 함으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기서 모세를 불러서 나한테 예물을 드리려면 이렇게 들어와라. 하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소의 영광과 시내 산의 영광을 일치시키면서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셨다. 그렇게 레위기로 넘어가고 있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이 성소는 특별히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다. 장막에서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런 것은 먹고 마시고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다(히9:8-10).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고 나아가는 길이 없었따. 단지 약속만 있어서 대제사장이 그 약속을 따라 일년에 한 번 들어가고 그 약속 때문에 거룩한 성소의 기능을 감당하고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서 육체의 예법 하는 것은 겉에만 씻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모세 제도의 예법이 육체의 예법이다. 모세 제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육체의 예법이었다. 성경은 정신과 육체 그런 이분법을 쓰지를 않는다.
첫 언약도 피로 세운 것이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여기서는 아직 피로 정결케 하는 의식은 아직 없다. 피 언약은 20장은 언약의 법을 읽고 나서 피를 뿌리면서 피 언약의 말이 나오고 그 언약 식사를 시내 산에서 했다. 나중에 제사장의 정결법을 보면 이렇게 이렇게 뿌려라 하는 뿌리는 법이 있다. 나중에 레위기를 보면 더 자세히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소를 물과 피로 뿌려서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로 구별하고 또 제사장에게 뿌려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구별하고 그렇게 해서 여호와의 거처로 구별했다. 그래서 물과 피의 뿌림이 곧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약 때 이런 뿌리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처럼 그 당시 있는 육체의 예법이지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율법을 쫓아 피를 뿌려서 모든 물건이 정결케 되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했는데 피흘림을 통해서 정결케 되고 곧 그것이 그들의 사함이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처를 이루는 것이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로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하셨다(히9:).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성소는 귀한 보석으로 지어진 지성소의 구조이며 120,000 스다디온의 정 육면체이며 어린양이 빛이시다. 성전 문은 사면으로 열려 있어 만국이 그 빛 가우데로 다니나, 거룩치 못한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계21-22).
계시록을 보면 우주적인 성전이 나온다. 그것은 전부 이 지성소의 구조로 되어 있다. 아직 지성소의 크기는 나와 있지 않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같다. 그런데 그것도 십규빗으로 된 것이 아니다. 모세 장막은 십규빗이고 솔로몬 장막은 이십 규빗이고 그리고 영원한 성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은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다. 거기서는 지성소와 성소 구별이 없고 성소와 뜰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지성소다. 여기는 일곱 등대로 비치는 빛이 아니라 여호와의 자신이 빛이시다. 어린양이 빛이되고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닌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만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만국이 다니다. 이 문은 동쪽 한 쪽으로만 열여 있고 두로 도는 화영검으로 에덴의 문을 지켰던 그룹들이 지키는 문 그 문을 들어가면 잘못하면 죽는데 그렇게 지키는 문이 아니라 항상 열려 있다. 그것도 사방으로 열려 있고 그런데 거룩하지 못한 것은 들어오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우주적인 성소로 세상이 완성 될 것이다. 그러니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여호와의 안식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중에 있도다. 구약 언어다. 출애굽기 언어다. 그것이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의 구원이다.
이제 예수님은 모세 제도의 방식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모세를 통해서 만든 장막 그 중에 짐승의 피로 들어가신 그런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대표로 하늘 위엄의 우편으로 들어가셨다. 그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 들어가셨다. 그는 땅의 장막에서 부리는 자가 아니라 하늘 장막에서 하나님이 부리시는 자다. 즉 자기 백성의 대표자가 그런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그랬는데 옛 언약 제도에서는 짐승의 죽음을 통해서 그 피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했는데 이제는 아들의 피를 통해서 영원히 하늘 성소에 나오도록 하셨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다시는 죄를 떠오르지 아니하고 이제는 모세 제도의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한 것이 아니라 영광의 보좌에 계신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우리 양심을 정결케 하셨다.
예수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하늘의 성소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예수와 함께 하늘 보좌에 있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누리는 구원이다.
여기 제사장의 봉사를 보면 물두멍이 있고 향단이 있고 기름으로 항상 등불을 밝히고 그렇다. 그것은 구약 사람이 만든 장막에서 밝힌 빛이고 향이다. 우리의 예수께서 빛을 비추는 것은 그런 금등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친히 빛이시오 자기 자신이 영원한 우리의 생명의 떡이다. 그리고 물의 씻음 피의 씻음이 아니라 자기 피로 영원한 성소에 들어가셨다.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시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약대로 하면 구분은 영원히 높이 들린 모세의 손이어서 내려오는 법이 없다. 영원히 살아 계셔서 중보하시는 왕이시다. 그분 안에서 교회는 영원히 승리하고 영원히 봉사한다. 그것이 신약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바다.
히브리서를 누가 기록했는가 모른다. 그 내용 설명으로 봐서는 누가복음 히브리서는 같은 구조다. 말하고자 목표가 같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 제도의 영광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모세 제도의 영광은 시내 산에서 구름으로 가리운 영광이다. 그리고 백성은 맹렬한 불밖에 있는 영광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장막 중에 거해도 백성은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이 구약의 영광인데 이제 우리가 가진 영광은 우리의 대표자를 하늘 성소로 부르셨다. 그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다. 시내 산에 나타난 그런 영광하고는 다르다. 그 영광 가운데서 교회가 섬기는 것이다. 왜 그분이 그의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교회가 그분의 거처다.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성소 있는 이 하나의 문을 보고 오직 한 문 한 분뿐인 오직 예수 하면 나중에 계시록을 보니까 문이 네 개나 된다. 계시록뿐인가? 에스겔 성전만 보더라도 문이 여러 개다. 그러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교리 적인 문제로 하지 말고 항상 그 이전 언약 역사에서 그룹들이 두로 도는 문은 무엇인가?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여기 성소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의 생명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다.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그림자들을 풀 때 그냥 자세히 푼다고 해서 이렇게 연결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성된 빛 가운데서 이전의 것이 무엇인지 봐야 되고 지금 것은 그 이전에는 어떤 토대에서 출발됐는지 봐야 된다. 그렇게 보면 교리 적인 본문으로 해석해 들어가는 잘못을 막아낼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구약 성전은 이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막혔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이고 그것이 육체의 예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먹고 마시고 뿌리고 그런것이고 마음을 정결케 하는 즉 죄로부터 온전히 구원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런 내용들이 찬양으로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 중에 우리 중에 계시는가? 그런 것을 찬양하면 좋겠는데 찬양 곡이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48장을 예배 전주곡으로 하라고 한 이유가 일절이 좋다. 만유의 주재 인자가 되신 하나님 아주 한 절이 간단하면서도 굉장히 위대하다. 그래서 그 찬양을 하도록 하는데 교인들이 모르면 그 곡이 나와도 모를 것이다. 만유의 주재 인자가 되신 하나님 그 쪽이 나오면 큰 경배가 되고 그런다. 그런데 그런 찬양들이 있으면 좋은데 없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도다 이것처럼 엄청나고 큰 기쁨이 없는데 그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곡들이 별로 없다.
우리 찬양이 빈약하다. 가끔 청년들이 부르는 성가집을 보면 좋은 것이 있는데 곡들이 기타곡이다. 그래가지고 듣고 있으면 아주 마음에 안 맞다. 그러니까 음악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성경에 있는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부를수 있도록 하면 참 좋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도 미국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미국 교회 부흥은 무디의 부흥이다. 무디가 설교하고 쌩취가 노래 부르고 그렇게 한것인데 그런 곡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서 교회에서 예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은 별로 많지를 않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만 많이 나와 있다. 만일에 전도 설교를 해 놓고 어서 돌아오오 부르면 가슴이 찡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에서 예배할 때 찬양곡으로 부르면 안 맞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는데 어서 돌아오고 해 지기 전에 돌아오라 하면 그것은 안 맞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배할때 찬양이 아주 중요한다. 그런 것이 안되어 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다 이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생명이고 그런데 그런 찬양들이 얼마 없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이신 장막의 식양과 기구의 식양은 시내 산에 맹렬한 불 가운데 임하신 여호와께서 백성과 피의 언약을 체결하시고 이제 언약 백성의 대표자인 모세를 안식일에 그 영광 안으로 부르시고 언약의 증거 판과 함께 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의 영광 중에서 장막의 식양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여호와의 성소를 그 식양대로 짓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의 영광으로 영원히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약속이다. 이 언약은 피로 약정한 언약이다.
옛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은 산에서 보이신 식양을 따라서 사람이 지은 장막 곧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 안에서 여호와를 섬겼다. 하늘은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 이제 들어가사 섬기시는 하늘이요 위엄의 보좌 우편이다(히8:1-5)
장막에 대한 식양은 25:10-30:까지이며, 증거궤와 속죄소로 시작해서 증거궤 앞에 두는 향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끝난다. 이후 31장에 기록된 성막을 만드는 직공과 안식일 명령은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들 중에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복을 결론적으로 첨가하신 것이다.
장막을 짓도록 보이신 식양의 순서는 지성소에서 시작해서 성소와 뜰로 진행되며, 그리고 이어서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섬길 등불과 의복과 위임 식과 향단과 물두멍과 향을 만드는 규례로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장막에서 이스라엘과 한집에 거하시며 그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고 그 백성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 와 빛 가운에서 여호와의 상에서 먹으며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을 사르도록 하셨다.
성막에 속한 것은 금과,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은 막이며, 뜰에 속한 것은 놋과, 세마포와 은이다. 문과 휘장은 성막과 같다. 밭침은 성소의 것은 은이요, 성소의 문과 뜰의 것은 놋이다.
여호와의 거처는 입구의 문과 2중 휘장으로 되어 있다. 문과 휘장은 성소 안의 재료로 되어 있으며 그룹들로 수놓아 만들었다. 이 구릅들은 밤죄한 아담이 에덴의 생명 나무의 길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킨 천사들이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와 백성의 대표인 대제사장과의 간격이며, 성소의 휘장과 뜰의 문도 제사장과 레위인과 백성간의 여러 간격이다. 성막의 재료들의 차이도 그러한 영광의 차이를 나타낸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장막에서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것은 먹고 마시고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다(히9:8-10).
첫 언약도 피로 세운 것이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로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다(히9:).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성소는 귀한 보석으로 지어진 지성소의 구조이며 120,000 스다디온의 정 육면체이며 어린양이 빛이시다. 성전 문은 사면으로 열려 있어 만국이 그 빛 가우데로 다니나, 거룩치 못한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계21-22).
구체적인 성소의 기구들을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도록 하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이신 장막의 식양과 기구의 식양은 시내 산에 맹렬한 불 가운데 임하신 여호와께서 백성과 피의 언약을 체결하시고 이제 언약 백성의 대표자인 모세를 안식일에 그 영광 안으로 부르시고 언약의 증거판과 함께 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들 중에 거할 내 거처를 지어라. 하면서 여호와께서 산에서 여러 성막의 기구들과 장막에 기구들에 대해서 보이셨다. 이것은 무엇과 함께 주어졌냐면 이 앞에서는 언약의 식사를 하고 그 다음에 그 대표자인 모세와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영광으로 부르셨다. 그런데 하늘에 구름이 빽빽히 있는데 제 7일 안식일에는 구름 가운데서 여호와의 음성으로 모세를 부르셨다. 그 때 모세가 그 영광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영광은 백성이 산 밑에서 보았을 때는 맹렬한 불같은 영광이었다. 그 영광으로 들어가서 40일 동안 있었다. 그 때 주신 것이 이 성막의 제도다.
돌 판에 새긴 언약의 법 증거의 판과 함께 주셨다. 그러니까 이 앞과 뒤를 보면 바로 지금 보인 식양은 어떤 식양이냐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 안으로 들어간 그 식양이다 그런 말이다. 바로 그 관계를 땅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이 장막을 짓도록 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의 영광 중에서 장막의 식양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여호와의 성소를 그 식양대로 짓게 하신 것은 여호왂게서 시내산의 영광으로 영원히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약속이다. 이 언약은 피로 약정한 언약이다. 피로 언약을 세우시고 시내 산 영광안으로 부르시고 여호와께서 거할 집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시내 산에 모세를 그 영광 안으로 부르셔서 교제했던 이 교제의 관계로 이스라엘중에 영원히 거하시리라는 약속이다 그런 말이다.
옛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은 산에서 보이신 식양을 따라서 사람이 지은 장막 곧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 안에서 여호와를 섬겼다. 하늘은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 이제 들어가사 섬기시는 하늘이요 위엄의 보좌 우편이다(히8:1-5) 그러면 옛 언약 백성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살았는가? 시내 산에서 보인 영광 안에서 살았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인 식양이요 산에서 보인 식양이고 모세를 통해서 짓게 하신 식양이다.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겼다. 그것이 구약 시대다. 그러면 여기서 하늘에서 보인 식양은 히브리서를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그렇게 말을 한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인 식양을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이 하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 줬을 때는 하늘에서 보여주고 그것을 가지고 그림자로 땅에다가 짓고 그런 것이 아니고 이 하늘은 모세를 통해서 보여줬던 것과 비교되는 하늘이다.
모세에게 보여줬던 것은 산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그것을 따라서 장막을 지었다. 그것이 구약 백성이 하나님을 섬겼던 여호와의 영광의 거처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거처냐? 하면 이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했을 때 이 하늘에 있는 것은 시내 산에 어떤 원형이 있고 그것을 보고 모세가 땅에 내려가서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 하늘은 역사의 종말에 예수께서 들어가신 그 하늘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그 영광을 말한다. 그것을 위엄의 보좌 우편이라고 히브리서는 말씀을 한다. 그것이 구약 때 섬겼던 모형과 그림자라 그런 말씀이다.
장막에 대한 식양은 25:10-30:까지이며, 거기는 무엇으로 구성됐냐면 제일 처음 증거궤가 있다. 여기서는 법궤 그렇게 안하고 증거궤라고 그런다. 증거궤가 있고 그리고 속죄소가 있다. 거기서 시작해서 증거궤 앞에 두는 향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끝난다. 전체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말이다. 무엇으로 시작했냐면 증거궤로 시작해서 그 증거궤와 함께 있는 것이 속죄소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거기 좌정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보좌다.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쭉 설명이 되어서 어디서 끝나냐면 바로 이 증거궤 앞에 둘 향을 만들라 하는 그런 명령으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그 후에 31장에 기록된 것은 무엇이냐면 성막을 만드는 직공과 안식일 명령은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들 중에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복을 결론적으로 첨가하신 것이다.
이 성막을 짓고 그들 중에 거하시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뒤에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나태내 주고 있다. 성막을 지을 사람을 임명하고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한 자들이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 이것이 영원한 표징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막을 짓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그 신으로 모세에게 보이셨는데 그것을 짓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지혜로 충만한 자들이고 그렇게 함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 영광 안으로 모세를 부르셨고 또 다 지으라고 하고 나서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해서 하나님의 전을 지을 백성들을 임명하고 있고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서 영원한 언약의 표징으로 삼아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성막은 한마디로 안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안식이다. 그것이 성막의 의미다.
그래서 솔로몬 때 성전을 지었을 때도 하나님이 안식을 주셨을 때에 하나님의 안식의 거처로 성전을 짓는 것이다. 그런 말씀이다. 그래서 이 직공에 대한 명령과 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성막을 짓고 그들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의 복을 결론적으로 첨가한 것이다. 이제 증거궤로부터 시작해서 향을 만들라는 것으로 성소에 대한 구조는 끝나는데 이것을 다시 더 설명하겠다.
장막을 짓도록 보이신 식양의 순서는 지성소에서 시작해서 성소와 뜰로 진행된다. 지성소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기 증거궤와 속죄소가 있다. 그 다음 밖에는 금등대와 금 떡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지성소에 있는 물건부터 성소로 그렇게 진행되고 그 다음에 뜰로 나간다. 뜰에는 번제단이 있다. 이런 단에 대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쭉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배열했는 가를 잘 봐야 한다. 이 단들은 하나님이 친히 임하시고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하는곳이 다 단에 대한 문제다. 우리 같으면 안방 지성소에 대한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 하고 그 다음 안방밖에 있는 방 다 하고 그 다음 뜰에 있는 것 다 하고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여호와의 보좌로부터 시작해서 금등대와 떡상으로 해서 그 다음 번제단으로 막 나갔다. 물론 그 사이에 휘장을 이렇게 치라는 말이 있다. 그래도 그런 순서로 나간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 있냐면 이어서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섬길 등불과 의복과 위임 식과 향단과 물두멍과 향을 만드는 규례의 순서대로 명하신다. 이 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할 때 제일 먼저 무엇이 있는가? 금등대에다가 기름을 붓고 항상 등불을 밝혀야 된다. 기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는 향을 살라야 된다. 향 만드는 이야기 그 두 이야기가 대제사장 아론 가문의 봉사를 앞과 뒤로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가 대제사장의 옷 그 옷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다 쓰고 하나님 앞에 나갈 것이다. 그 옷과 위임식 그리고 기름부음 그 대제사장이 봉사로 씻는 물두멍 그리고 향을 사르는 향단 향품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봉사는 등대에다가 기름을 붓고 항상 등불을 켜야 하기 때문에 그 기름에 대한 문제와 하나님의 향단에 살라야 하니까 향을 만들라는 이야기 그것이 처음과 끝이고 그 안에는 대제사장의 의복과 직무들 그리고 기름부음 그런 문제로 진행이 된다.
그러니까 향단은 어디가 기록이 되어 있는가? 우리 같으면 향단이 제 일부에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할 것 같지요? 증거궤 그 다음 바로 그 앞에가 향단이 있으니까 향단 그 다음 금 등대 떡상 그 다음 휘장은 걷고 나오면 번제단 이렇게 기록해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 향단은 저 뒤에다가 돌려서 대제사장의 봉사와 함께 기록이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는 하나님의 거처와 거기서 봉사하는 대제사장의 규례로 되어 있다. 크게 나누면 하나님의 거처와 하나님의 거처에서 봉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로서 제사장에 대한 규례 그렇게 구분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장막에서 이스라엘과 한집에 거하시며 그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고 그 백성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 와 빛 가운에서 여호와의 상에서 먹으며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을 사르도록 하셨다. 여호와의 거처다. 거기 계시는데 그곳은 여호와의 증거궤가 있고 속죄소가 있고 거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면 그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복종할 것이다. 그리고 백성은 백성의 대표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성소에 빛 금등대에서 비치는 빛 가운데서 거닐으며 금상에 차려 놓은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그리고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휘장 바로 앞에서 금 향단에서 하나님 앞에 향을 살라서 하나님의 기뻐 맡으시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곧 성소에 대한 규례다. 그러니까 이 성소는 출애굽기 구조대로하면 20장에 시내 산에 올라가서 백성의 대표들이 함께 먹고 마셨다. 그 관계를 땅에 장막을 짓고 영원토록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도 시내 산의 영광이 하나님의 임하심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출발 토대이면서도 그것의 완성은 성소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이다. 이제 시내 산 사건은 항상 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돌아볼 수 있는 역사의 토대는 되어도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더 앞으로 나가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사했던 것과 연결된다고 했다. 어떻든 하나님이 백성중에 나타나심은 시내 산에 나타나심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립하는 토대다. 그런데 그것의 완성은 성소에서 항상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산에다 출발점을 가지고 있어도 시내 산에다가 반복한 것은 아니다. 그 점을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오셨다. 구약의 여호와의 나타나심이 신약에서는 예수의 나타나심이다. 그런데도 그분의 나타나심이 교회에서 누려지지만 교회의 삶은 항상 예수의 나타나심을 신약의 기록된 식으로 반복됨으로 누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신약의 사건을 성경은 불변하다 해 가지고 그대로 우리 교회의 삶에 연결해 버리기 때문에 성경을 바르게 해석을 하지 못한다 그 말이다. 그것은 성경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잘 이해를 해야 한다.
지금 여러분을 하나님이 부르시면 제자들을 부른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다 버리고 나를 따라라. 부자 청년이 따르려고 하니까 다 팔고 나를 따르라. 그런 식으로 여러분을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특별한 상황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부르시는가? 다 버리고 따라라 그런 식으로 직접 명령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말하는가? 자기 친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하다고 그랬다. 그런데 다 버리고 따라라 그러면 요새 식으로는 중이 되어라 그런 말이 될 것이다. 중은 장가 갔다 가도 버리고 가니까. 그러면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는 말인가? 예수님이 그 제자 단을 구성할 때 부르시는 것과 지금 우리를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물론 원리에 있어서 적용은 되겠지만 상황들이 다르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안된다 그 말이다. 마치 시내 산에 하나님의 임하심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출발점이다. 그래도 그것을 누리는 것은 성소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도 항상 토대는 시내 산을 본다. 그런데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예수의 나타나심이다. 그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설립된 것이 예수의 교회다.
그러면 교회 적인 삶은 예수의 나타나심을 항상 돌아보아도 그것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이루진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약 성경을 해석해야 될지 우리가 이해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보수파가 성경은 일점일획 어김없고 그대로 믿는다 그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예수님 일본으로 전도 가게 바다를 한 번 맨발로 건너 가 볼 랍니다. 그렇게 기도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래도 베드로는 한참 걸어가다가 물에 빠졌지만 그것을 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돈 잘 번다는 말은 만사형통인데 또 병 나은 것도 만사형통이라고 하는데 나를 바다 위로 걸어오게 하십시오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우리 나라 겁나서 독사 집은 사람도 없다. 그러니까 묘하다. 적용을 하려면 몽땅 다 적용을 해야 되지 그런데 적용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가 안간 목사가 얼마나 있는가? 그런 사람 없다. 그런데 돈벌고 그런 이야기는 성경대로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 쪽은 자꾸 그대로 연결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얼마큼 우리가 성경을 잘못 적용을 하고 있는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성경을 구원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하지 않으면 성경은 아주 어리석은 책이 될 수도 있다. 성경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 그렇게 될 수가 있다. 우상 섬기는 것만큼 그렇게 어리석게 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 성막의 제도는 출애굽기 구조대로 하면 시내 산 영광 가운데 모세가 들어간 그 영광이 땅에 구현 된 것이 이 성막 제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인 것이고 산에서 본 식양대로 지은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그림자다. 이 하늘은 예수님께 영광의 보좌 우편에 들어가신 사람이 지은 장막이 아니다.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영광에 들어간 것에 그림자다. 그것은 구약 전체를 말한 것이다. 장막으로 섬기는 것은 그림자로 섬기는 시대다. 그것은 시내 산 영광 가운데 들어간 섬김이다. 이제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그 영광의 빛으로 섬긴다. 그것의 그림자가 구약 때 섬김이었다 증거궤 그래서 성소 제도를 쭉 보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 중에 임하시는가? 또 그들 중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하는 문제와 거기서 어떻게 백성의 대표자가 하나님을 즐겨 봉사하는가 하는 그 두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묶으면 여호와의 안식이다. 처음부터 안식일에 부르셨고 마지막에도 안식하고 하고 있다. 여호와의 안식이다.
그러면 이제 더 구체적으로 어떤 재료로 되어 있는지 조금더 보자. 그러면 성소에 속한 것은 금과,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은 막이며 그렇게 되어 있고 뜰에 속한 것은 놋과, 세마포와 은이다. 문과 휘장은 성소 내부와 같다. 밭침은 성소의 것은 은이요, 성소의 문과 뜰의 것은 놋이다. 이것은 재료를 가지고 전체의 구조를 보는 것이다. 여호와의 거처는 입구의 문과 2중 휘장으로 되어있다. 문과 휘장은 성소 안의 재료로 되어 있으며 구룹들로 수놓아 만들었다. 이 구릅들은 밤죄한 아담이 에덴의 생명 나무의 길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킨 천사들이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와 백성의 대표인 대제사장과의 간격이며, 성소의 휘장과 뜰의 문도 제사장과 레위인과 백성간의 여러 간격이다. 성막의 재료들의 차이도 그러한 영광의 차이를 나타낸다.
구성 재료를 가지고 구분을 해 보면 하나님의 집은 몇 칸으로 되어 있냐면 제일 큰 뜰이 있고 한 문이 있다. 거기 들어가면 또 한 집이 있는데 거기 휘장이 쳐져 있다. 그 휘장을 걷고 들어가면 안에는 온통 금이다. 그리고 또 안에가 휘장이 있다. 그 안에가 증거궤가 있고 속죄소가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은 삼중 문으로 되어 있는 식이다.
그러면 재료들을 보면 왜 재료들을 구분하냐면 여러분이 여기 보면 나중에 그들을 속하도록 성전세를 내도록 말하고 있다. 은 반세겔 그것은 은으로 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설명을 하냐면 밭침은 은으로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성소는 속죄의 토대 위에 놓여 있다. 이렇게들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은은 그런 것은 아니라 성전에서 봉사하는데 쓰도록 하는 은 반 세겔이지 성전을 짓는데 쓰도록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금속 색깔로 막 구분하려고 해서 은 하니까 은은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30장11절부터 보면 속전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속전으로 내라고 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이 속전은 무엇 때문에 드리냐면 장자를 대신해서 드린 것이다. 그러면 장자를 대신한 것은 레위 지파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위 성전을 짓는데 토대를 놓는 은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비슷한 것만 있으면 연결을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성소를 보면 그 안방은 토대가 은이 아니냐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소는 속죄의 토대 위에 놓인 것이다. 이렇게 풀려고 그런다. 그런데 그렇게 풀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성소 구조를 전체적으로 보면 금속에도 차이가 있다. 그러면 제일 안방에는 전부 금이다. 판자에다가 금을 입혔다. 그러면 이 조각목 판자를 무엇이라고 하냐? 예수님의 인성이고 금은 신성이다. 또 그렇게도 설명을 하려고 그런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동식 천막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돌로 짓는다. 돌로 짓고 안에를 판자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동식 천막이기 때문에 그렇게 안되어 있다. 그래서 인성을 신성으로 싸면 겉에 보인 것이 신성이고 인성은 안 보인다. 그러면 그렇게 붙이면 그것도 안 맞는 것이다. 금으로 만들고 나무로 싸 버려야 겉에 보인 것인 것이 인성이니까 그런 말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안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무가 인성인데 이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라 좀도 슬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무죄성을 말하는 인성이다 이렇게 해 가지고 이 사람은 목재 장사인데 나무 하나를 가지고도 굉장히 설명을 할 수가 있다. 그렇게 하지 말라 그 말이다. 저도 아카시아 나무와 참 나무가 얼마나 단단한 줄은 조금은 안다.
그전에 이야기했지요? 단단한 나무로 해야 되겠구나 하고 모르고 참나무를 구해 왔다. 못을 박는데 못이 안 들어가더라고요? 아마 철도 침목 같은 것이 참나무나 아카시아 나무로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단단한 나무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벌레도 안쓸고 그러는데 그것은 성경이 직접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나중에 해석해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이런 것을 풀 때는 전체적인 구조로 풀어 들어가야 그런 묘한 일에 빠지지를 않는다.
그러면 만일에 속죄의 은이 성소의 토대면 뜰에 있는 것도 전부 은을 토대로 해야 되는데 뜰에 있는 것은 놋을 토대로 하고 있다. 놋이 토대다. 그러면 안 맞아 들어간다. 그런데다가 은 밭침으로 은 가름대로 뜰을 전부 질러야 된다. 하얀 세마포에다가 은 밭침대로 해야 한다.
그러면 나타난 것은 그렇게 안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그냥 자기 식으로 맞춰서는 안되겠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구조로 해석해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차이가 있다. 등급이 있다. 그것이 성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다. 그러니까 성소 안쪽에는 판자를 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쌓고 있는데 들어가 보면 전부 금이다. 안에 있는 기구들도 전부 금이다. 금등대 금상 나중에 보면 금향단도 들어갈 것이다. 전부 금이다. 그리고 거기 수놓아 있는 것을 보면 천막들이 휘장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막까지라도 가늘게 꼰 베실 하얀 세마포실이다. 거기다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은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다. 완전히 천사들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제일 안방 거기도 휘장이 쳐져 있는데 이 색깔에다가 그룹들이 수 놓아져 있다.
옛날에는 여기 강대 상이 하나님이 앉아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여기 천막이 하나 있어서 함부로 들어오면 안된다. 그 다음 저밖에 방이 있는데 거기다 금등대 금상이 있고 앞에 향단이 있다. 그리고 저 문도 휘장으로 쳐져 있다. 거기도 들어오면 안된다. 그러면 여기는 누가 들어오면 안되냐? 아무도 못 들어오고 대제사장만 일년에 한 번 잠깐 들어왔다 나가야 되고 거기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그리고 지성소밖에 있는 성소는 대제사장이 항상 들어와서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관리하고 향을 사르고 안식일에는 그 떡상에서 물린 떡을 먹고 그런 자리다. 거기는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들어오는 곳이다. 그리고 그 밖에는 일반 레위인은 못 들어온다. 뜰에는 레위인들이 항상 있어서 제사장을 보조해서 봉사하는 자리다. 그리고 백성들은 거기 들어왔다가는 죽는다. 언제만 들어오냐면 제물을 드릴 때만 문 입구에 들어와서 거기서 안수해서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리고 더 이상 나가면 안된다. 번제단 까지라도 임자는 못 나간다.
그리고 그 뜰밖에는 일반 백성이 항상 있는 곳이다. 그래도 뜰밖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 곧 가나안 땅 예루살렘이다. 그리고 그 땅 밖으로 나가면 이방인들이 있다. 나중에는 이 뜰이 솔로몬 성전에서는 더 확대된다. 등대와 떡상도 열이고 또 이 뜰도 확대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뜰이 있고 여인들의 뜰이 있고 그리고 그 밖으로 이방인의 뜰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 짐승들을 쫓아내고 성전을 청결했던 것은 이방인의 뜰 멀리 있는 백성들이 와서 돈을 교환하고 그런 뜰이다. 그러니까 솔로몬 성전에 보니까 이방인의 뜰까지도 있다. 그렇게 점점 확대되어 나간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재료들을 봤을 때도 무엇이 토대냐 한 것보다도 그 영광의 차이를 말한다. 그래서 성소는 이 집이면 전부 금이고 그리고 마당은 전부 금이다. 그리고 가운데 휘장이 있는 곳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밖에는 대제사장과 제사장이 봉사하는 거룩한 곳이 있고 그 밖에는 뜰이다. 그런데 이 토대는 무엇으로 되어 있냐면 안에는 전부 금이면 그것을 밭치고 있는 토대는 은이다. 그리고 밖에 뜰은 기구들도 전부 놋으로 되어 있고 받침들도 놋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밖에 뜰에서 성소로 들어오는 그 입구에는 휘장도 밭침은 놋이다. 그런데 문 밖에 있는 휘장 둘은 성소 안에 있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수 놓은 것이 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섬기는 것은 창세기 처음 구조로 하면 에덴에 있는 생명 나무 중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열 두 덩어리 떡을 먹는 것은 완성된 생명을 대제사장이 취하는 것이다.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달달 떨고 죄인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항상 너희 중에 문을 열어 놓았으니 내 앞에 들어와라. 한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 때는 문도 여러개 있고 거기 들어가는 간격도 여럿이다. 그래서 재료에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말이다.
이것을 일일이 다 해석하려면 난처하다. 은은 무엇이냐? 그러면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말하고 은은 무엇이냐? 성경이 말을 하지 않으니까 모른다. 금 방패 대신에 놋 방패를 만든다. 분명히 질은 조금 떨어지고 그것이 성소 안과 뜰을 구별하는 차이점이다. 그런 구별은 가져오는데 놋 하니까 놋은 심판이다. 그렇게 하면 안 맞다 그 말이다. 이제 놋은 어떻게 주물로 만드는지 놋은 두들긴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맞다 그 말이다. 그 구조는 금보다 질이 더 떨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 간격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성소 구조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여기서 여러분이 잘 구별할 것은 성소 했을 때 이 성소를 어떤 의미로 성소라고 하는고 지성소를 말하는가? 또 지성소밖에 있는 성소를 포함해서 성소로 말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성막 전체를 두고 성소라고 말하는가? 그 문맥을 보면서 거기서 포함하는 범위를 이해를 해야 될 것이다. 그러니까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이 말은 바로 이 성막 제도에서 하나님을 섬겼을 때는 그런 말이다. 첫 장막은 모세 장막이기 때문에 그렇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이 성소는 특별히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휘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거기서 하나님이 좌정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데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출애굽기에서는 들어오지 말라는 선을 긋고 있지는 않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라. 구분한다는 말은 있어도 아직 나오지 말라는 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출애굽기는 여기서는 나오지 말라는데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 계시겠다는 약속이 강조다. 그런데 제일 출애굽기 끝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이 성막에 가득했을 때 모세도 들어가지 못하더라 그렇게 함으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기서 모세를 불러서 나한테 예물을 드리려면 이렇게 들어와라. 하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소의 영광과 시내 산의 영광을 일치시키면서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셨다. 그렇게 레위기로 넘어가고 있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이 성소는 특별히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다. 장막에서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런 것은 먹고 마시고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다(히9:8-10).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고 나아가는 길이 없었따. 단지 약속만 있어서 대제사장이 그 약속을 따라 일년에 한 번 들어가고 그 약속 때문에 거룩한 성소의 기능을 감당하고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서 육체의 예법 하는 것은 겉에만 씻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모세 제도의 예법이 육체의 예법이다. 모세 제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육체의 예법이었다. 성경은 정신과 육체 그런 이분법을 쓰지를 않는다.
첫 언약도 피로 세운 것이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여기서는 아직 피로 정결케 하는 의식은 아직 없다. 피 언약은 20장은 언약의 법을 읽고 나서 피를 뿌리면서 피 언약의 말이 나오고 그 언약 식사를 시내 산에서 했다. 나중에 제사장의 정결법을 보면 이렇게 이렇게 뿌려라 하는 뿌리는 법이 있다. 나중에 레위기를 보면 더 자세히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소를 물과 피로 뿌려서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로 구별하고 또 제사장에게 뿌려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구별하고 그렇게 해서 여호와의 거처로 구별했다. 그래서 물과 피의 뿌림이 곧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약 때 이런 뿌리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처럼 그 당시 있는 육체의 예법이지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율법을 쫓아 피를 뿌려서 모든 물건이 정결케 되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했는데 피흘림을 통해서 정결케 되고 곧 그것이 그들의 사함이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처를 이루는 것이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로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하셨다(히9:).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성소는 귀한 보석으로 지어진 지성소의 구조이며 120,000 스다디온의 정 육면체이며 어린양이 빛이시다. 성전 문은 사면으로 열려 있어 만국이 그 빛 가우데로 다니나, 거룩치 못한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계21-22).
계시록을 보면 우주적인 성전이 나온다. 그것은 전부 이 지성소의 구조로 되어 있다. 아직 지성소의 크기는 나와 있지 않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같다. 그런데 그것도 십규빗으로 된 것이 아니다. 모세 장막은 십규빗이고 솔로몬 장막은 이십 규빗이고 그리고 영원한 성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은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다. 거기서는 지성소와 성소 구별이 없고 성소와 뜰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지성소다. 여기는 일곱 등대로 비치는 빛이 아니라 여호와의 자신이 빛이시다. 어린양이 빛이되고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닌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만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만국이 다니다. 이 문은 동쪽 한 쪽으로만 열여 있고 두로 도는 화영검으로 에덴의 문을 지켰던 그룹들이 지키는 문 그 문을 들어가면 잘못하면 죽는데 그렇게 지키는 문이 아니라 항상 열려 있다. 그것도 사방으로 열려 있고 그런데 거룩하지 못한 것은 들어오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우주적인 성소로 세상이 완성 될 것이다. 그러니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여호와의 안식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중에 있도다. 구약 언어다. 출애굽기 언어다. 그것이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의 구원이다.
이제 예수님은 모세 제도의 방식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모세를 통해서 만든 장막 그 중에 짐승의 피로 들어가신 그런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대표로 하늘 위엄의 우편으로 들어가셨다. 그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 들어가셨다. 그는 땅의 장막에서 부리는 자가 아니라 하늘 장막에서 하나님이 부리시는 자다. 즉 자기 백성의 대표자가 그런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그랬는데 옛 언약 제도에서는 짐승의 죽음을 통해서 그 피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했는데 이제는 아들의 피를 통해서 영원히 하늘 성소에 나오도록 하셨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다시는 죄를 떠오르지 아니하고 이제는 모세 제도의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한 것이 아니라 영광의 보좌에 계신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우리 양심을 정결케 하셨다.
예수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하늘의 성소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예수와 함께 하늘 보좌에 있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누리는 구원이다.
여기 제사장의 봉사를 보면 물두멍이 있고 향단이 있고 기름으로 항상 등불을 밝히고 그렇다. 그것은 구약 사람이 만든 장막에서 밝힌 빛이고 향이다. 우리의 예수께서 빛을 비추는 것은 그런 금등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친히 빛이시오 자기 자신이 영원한 우리의 생명의 떡이다. 그리고 물의 씻음 피의 씻음이 아니라 자기 피로 영원한 성소에 들어가셨다.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시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약대로 하면 구분은 영원히 높이 들린 모세의 손이어서 내려오는 법이 없다. 영원히 살아 계셔서 중보하시는 왕이시다. 그분 안에서 교회는 영원히 승리하고 영원히 봉사한다. 그것이 신약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바다.
히브리서를 누가 기록했는가 모른다. 그 내용 설명으로 봐서는 누가복음 히브리서는 같은 구조다. 말하고자 목표가 같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 제도의 영광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모세 제도의 영광은 시내 산에서 구름으로 가리운 영광이다. 그리고 백성은 맹렬한 불밖에 있는 영광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장막 중에 거해도 백성은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이 구약의 영광인데 이제 우리가 가진 영광은 우리의 대표자를 하늘 성소로 부르셨다. 그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다. 시내 산에 나타난 그런 영광하고는 다르다. 그 영광 가운데서 교회가 섬기는 것이다. 왜 그분이 그의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교회가 그분의 거처다.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성소 있는 이 하나의 문을 보고 오직 한 문 한 분뿐인 오직 예수 하면 나중에 계시록을 보니까 문이 네 개나 된다. 계시록뿐인가? 에스겔 성전만 보더라도 문이 여러 개다. 그러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교리 적인 문제로 하지 말고 항상 그 이전 언약 역사에서 그룹들이 두로 도는 문은 무엇인가?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여기 성소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의 생명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다.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그림자들을 풀 때 그냥 자세히 푼다고 해서 이렇게 연결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성된 빛 가운데서 이전의 것이 무엇인지 봐야 되고 지금 것은 그 이전에는 어떤 토대에서 출발됐는지 봐야 된다. 그렇게 보면 교리 적인 본문으로 해석해 들어가는 잘못을 막아낼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구약 성전은 이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나아가는 길이 막혔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이고 그것이 육체의 예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먹고 마시고 뿌리고 그런것이고 마음을 정결케 하는 즉 죄로부터 온전히 구원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런 내용들이 찬양으로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 중에 우리 중에 계시는가? 그런 것을 찬양하면 좋겠는데 찬양 곡이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48장을 예배 전주곡으로 하라고 한 이유가 일절이 좋다. 만유의 주재 인자가 되신 하나님 아주 한 절이 간단하면서도 굉장히 위대하다. 그래서 그 찬양을 하도록 하는데 교인들이 모르면 그 곡이 나와도 모를 것이다. 만유의 주재 인자가 되신 하나님 그 쪽이 나오면 큰 경배가 되고 그런다. 그런데 그런 찬양들이 있으면 좋은데 없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도다 이것처럼 엄청나고 큰 기쁨이 없는데 그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곡들이 별로 없다.
우리 찬양이 빈약하다. 가끔 청년들이 부르는 성가집을 보면 좋은 것이 있는데 곡들이 기타곡이다. 그래가지고 듣고 있으면 아주 마음에 안 맞다. 그러니까 음악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성경에 있는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부를수 있도록 하면 참 좋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도 미국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미국 교회 부흥은 무디의 부흥이다. 무디가 설교하고 쌩취가 노래 부르고 그렇게 한것인데 그런 곡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서 교회에서 예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은 별로 많지를 않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만 많이 나와 있다. 만일에 전도 설교를 해 놓고 어서 돌아오오 부르면 가슴이 찡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에서 예배할 때 찬양곡으로 부르면 안 맞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는데 어서 돌아오고 해 지기 전에 돌아오라 하면 그것은 안 맞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배할때 찬양이 아주 중요한다. 그런 것이 안되어 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다 이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생명이고 그런데 그런 찬양들이 얼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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