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7. 8. 23:52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예배를 통한 목회적돌봄 (Pastoral Care Through
Worship )
1. 들어가는말
목회적돌봄(pastoral care:
라틴어로는 Cure of souls를 뜻하는 Cura
Animarum) 은 예수님의 사역이후로 교회의 사명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이
되어왔다. 예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믿음안에서 서로를 강화하기 위하여 서로를 사랑해야 했으며, 그리스도가 목숨까지 내어주도록 사랑한 이
세상 사람들을 돌보야만 했다(요15:12-17). 전통적으로 교회안에는 목회심방, 교리, 종교문학, 기도, 성서연구, 설교, 그리고 성례전등
목회적 돌봄을 위한 많은 자원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목회적 돌봄은 일대일로 만나는 심리학적 성향의 상담을 강조하면서, 목사와
성도간의 개인적 관계의 견지에서 설명되어졌다.
교회의 목회적돌봄은 심리학과 심리요법적 통찰력의 현명한 사용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프루이저 박사가 말한대로 교회가 오랜 세기를 걸쳐서 축척하고 검증해온 목회적 자원들 즉 그들의 전문적인 유산을
많은 목사들이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목회적돌봄은 현대심리학의 영향을 반영하는 일대일
개인상담의 차원을 넘어서 교회가 간직해온 풍부한 목회적 자원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어야한다.
본 글에서는 예배를 통해 어떻게 목회적
돌봄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고자한다.
먼저 종교개혁 이후 감리교 전통안에서 보여지는 이 둘의 관계를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보고, 오늘날
심리학적 통찰력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 설교를 통해 목회적 돌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한다.
2. 예배와 목회적
돌봄에 대한 역사적 고찰
1) 종교개혁시대
로마교회 예배의 핵심은 성만찬 의식으로 볼 수 있는 데, 그 교리의 중심은 속죄
희생이다. 즉, 사제가 예배에서 이 핵심적 행위를 할 때 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을 달래기 위해 반복하여 드려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행위이다. 루터는 이 접근을 거부했다. 성만찬을 행함에 있어서 예수는 재차 반복해서 희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희생이 아니라, 축복가운데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이다. 말씀과 성찬의 예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루터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과 행하고 계신 것을 강조한다.
영국의 종교개혁자들도 기본적인 종교개혁의 교리들을 받아들였다. 성만찬 의식에서 그들은
갈보리위에서 그리스도의 단 한 번 희생의 충분함을 강조했다. 크랜머는 성찬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희생과 봉헌에 대한 "기억과
표현"으로서 언급한다. 성찬은 영적 양육이요, 영혼의 음식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죽음과,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것이 된 모든
유익들과 하늘의 급식과 양육에 대해 기억하도록 성만찬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만찬은 은혜의 수단이다; 그것의 유익은 우리의 육신을 먹이는 빵과
포도주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힘을 얻고 새롭게 되는 것"이다.
성만찬은 속죄적 희생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그것은 오히려 영적 양육 또는 축복의 근원(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지만, 영국 종교개혁자들은 속죄 개념을
버리지는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재 규정했다. 성만찬 희생은 성찬 참여자의 "찬양과 감사의 희생"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영혼과
몸"을 "온전하고 거룩한 산 제사"로 전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성만찬 희생은 자신을 내어준 그리스도의 단 한 번 드려짐에 의해 얻어진 구원의
선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예배는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이고 그행위에 대한 예배하는 백성들의 응답이다.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1549)서문은 예배의 끝에 "회중이 바르게 되기를" 하는 말을 분명히 밝힌다. 예배의식은 사람들안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 종교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영국 종교개혁자들은 예배를 외적 또는 기계적 구조의 일로써 이해하지 않았다.
바르게함(edification)은 또한 부분적으로 치유 즉 영혼의 치료(the cure of souls) 관점에서 보여졌다. 라틴어 cura의
본래적 의미는 돌봄(care)이나 그것은 또한 치유(healing)을 의미한다. 단어의 양쪽 모든 의미로, 영국 종교개혁자는 그들의 "cure"
(돌봄 또는 치유)아래 사람들의 영적 지속과 건강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국교안에서 사용할 수 있게 권위를 인정받은 의식서안에서 그들은 명백하게
영혼의 돌봄을 위하여 제공했다.
2) 18세기 영국교회: 웨슬리를
중심으로
18세기 영국교회는 깊은 영적침체를 경험하고 있었으며, 예배는 무시되던지 아니면 단순한 형식으로 행하여 졌다. 계몽주의(이성과
과학의 시대) 여파로 신학교육도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교회갱신에 헌신한 종교지도자들이 있었는 데 그중 하나가 토마스 제커였다.
제커는 교회의 공적 예배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존귀케하고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료 예배자들을 바르게 한다. 또한 여러 유익함을
얻으며 결국에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한다고 강조한다. 예배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수단이고 또한 교회 공동체가 상호간 영혼 돌봄에 적극적으로
참여케하는 하나의 무대이다.
제커는 사제들에게 일상 생활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얘기하며, 예배의식을 행할 때 그 중요성과 감각이 잘
전달되어 예배자의 관심을 끌도록 경건하고도 적절하게 행하여 질 것을 요구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목회적 관계를 발달시켜야 한다:"사제가 성도들을
더잘 알 면 알수록 그는 그 영향력을 좋은 목적에로 적용시킬 수 있다." 제커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목회적 의무는 그의 돌봄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에 대한 목사의 반응을 표현하는 것이다.
웨슬리에 의해 조직된 감리회의 치료적인 면은 다섯 관점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 첫볁로, 영적 건강은, 주요관심이 멤버 상호간의 바르게 함인 공동체안에서 실재가 될 수 있다. 상호간 도움과 성화를 위해 조직된
사회(society)는 초기 감리교인들에게 교구교회에서는 무언가 결핍된 깊은 차원의 친교를 제공하였다.
새롭게 회심한 자들을 위하여
목요일 저녁에는 목회적 지도를 했는 데 "서로 도와, 같이 기도하고, 권면의 말씀을 받고, 사랑으로 서로를 감독하고...그리하여 그들의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 하는 것이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이런 종류의 목회적 돌봄은 성도의 친교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은혜의 수단은 영적행복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 이었다. 그는 "은혜의 수단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외적 싸인 또는 행위로써
이것은 하나님이 선재하는, 의롭게 하는, 또는 성화시키는 은혜(preventing, justifying, or sanctifying
grace)를 주는 일반적 통로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제도화된 은혜의 수단은 기도, 성서연구, 성만찬이었다. 그는 사적 기도뿐 아니라,
공적기도를 매우 중요시 했으므로 그의 설교가들이나 쏘싸이어티 멤버들에게 교구예배에 참여할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실로 그것은 영적생활의 호흡이다. 성서연구는 두 번째 은혜의 수단이다. 그는 지속적이며
정규적인 성서 읽기를 권면했고 이는 기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성서는 영적 지식을 얻고 또한 신자를 잘못된 열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
성만찬은 세 번째 제도화된 은혜의 수단이다. 성만찬은 영혼을 위한 양식이며, 크리스챤 삶의 가장 헌신적 사건이며, 내적
거룩함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성례전의 중요성 때문에 웨슬리는 "지속적인 성찬"을 주장했다. 옥스포드 시절부터 시작해서 평생
그는 이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이 성례전이 감리회와 크리스챤 개인들의 건강에 필수적임을 믿었다. 그의 성만찬 찬송은 많은 경우 이 성찬을 영적
건강에 관련시킨다.(예수를 통한 치유의 역사)
성례전의 "맛봄"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시고 죄를 없애기 위해" 임재하심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웨슬리도 성만찬을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유익이라고 이해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성찬에 참여하여 얻는 유익은 "우리 과거 죄의 용서, 현재 우리 영혼의 강화와 새롭게 함"을 포함한다. 이 성례전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힘을 주며 또한 "완전에로 우리를 이끈다."
정통주의 또는 "옳은 견해"은
감리교인의 영적 건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다른 중요한 교리들은 믿음에 의한 칭의, 신생,
확신, 그리고 성화를 포함한다. 종교는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나 단지 감정주의는 아니다. 이해는 마음의 경험을 해석한다. 예배의식은 그리스도의
경험으로써 그리고 경험의 해석으로써 역할을 한다. 예배안에서 은혜는 주어지고 주님이 임재하고 마음은 뜨거워지고 영혼은 양분을 취한다.
영혼의 돌봄에 대한 웨슬리의 관심은 교정(바르게 함, 덕성함양)을 요구하는 크리스챤 삶의 이해안에 근거했다. 그런 삶과 그런 삶의 함양의
근본적인 것은 웨슬리의 예배학적 영성이었다. 쏘싸이어티도 같은 목적 즉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안에 자랄 수 있도록 하기위해 일을 했다. 은혜의
수단은 그 과정에 중심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도는 크리스챤 삶의 호흡이고, 성서는 지식을 주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이고, 성만찬은 유익한 것으로써 크리스챤들을 치유하고 지탱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순례
20세기
목회신학의 운동은 이상하게도 목회적돌봄을 예배와 분리하던지 아니면 덕성함양에 있어서 예배의 역할을 크게 평가 절하했다. 힐트너는 "목양"은
전통적인 어휘 cura animarum(cure of souls)가 의미하는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그는 교정(덕성함양, 바르게
함)이란 말은 기독교 목자의 일을 계시하기에는 너무 희미하다고 본다. 그는 목사의 일을 세가지 관점--목양, 대화, 그리고 조직--에서
규정한고, 예배와 종교교육을 다른 직능으로 분류하였다.힐트너는 예배의 우선적 초점은 하나님과 인간관계이므로 예배는 그렇게 분류되어야한다는
것이다.
힐트너에게 있어서 선한목자의 비유에 근거를 둔 목양메타포는 치유, 지탱, 그리고 인도를 포함한다. 치유는 상처를 싸매고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것 또는 삶에 있어서 방향전환을 뜻한다. 크리스챤 치유는 인간의 전 자아(selfhood)에 관심을 갖는다. 힐트너의 "크리스챤
치유를 향한 운동은 세속적 채널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 기독교적 치유의 (alleged)수단과 양태에 대한 배타적인 집중은 기독교적 의미에서
치유를 방해할 수도 있다" 라는 주장은 옳다. 힐트너 입장의 약점은 그의 글들이 기독교적 수단과 양태에 대해 너무 적은 관심을 보여주고, 치유를
교회의 예배에서 떼어 놓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목자"라는 책에서, 힐트너는 지탱(sustaining)을 "대기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 소극적이고 힘없는 규정을 조용한 우정(companionship)--뒤바꿀 수 없는 손상이 생길 때 충격이나 상실앞에서 취해지는 양육의
대표적 성격--으로 확장한다. 그가 지탱에 대하여 지지와 격려의 견지에서 규정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는 그것을 충격과 상실의 상황에만
제한시키는 약점을 갖고 있다.
목양의 세 번째 모습인 인도는 성격에 있어서 추론적이다. 그것은 사람안에 있는 것이나 그에게 잠재적으로
가능한 것을 "끌어내는 것"이다. 힐트너는 인도로 부터 강요를 배제시키지만(현명하게), 그는 이 목양의 모습을 개인들이나 소 그룹에게 제한시키고
즉각적 필요의 견지에서만 사용한다.
힐트너의 두 번쩨 관점, 복음의 대화는 설교나 가르치는 일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목회적 활동과 사건들을 포함한다. 그는 이 기능의 세가지 서로 관련된 모습(aspects)을 제공한다. (1)학습, 이해, 또는 훈계
(2)깨달음, 깊이함, 바르게 함, 그리고 (3)축하함, 기억함, 기념함. 그는 어떤 맥락이나 분위기를 요구하면서 대화를 쌍방과정으로
주장하나(own), 예배와 명백한 연계를 만드는 것을 실패한다.
힐트너에게 있어서 조직의관점은 사회적 구체화 즉 교회조직(몸)이 다른
조직(몸)들(사회제도,이념, 정치적 경제적 질서등)과 관련을 맺게하는 조직(몸,형체)를 세우는 것이다. 그는 이 기능이 양떼--양을 구체화된
양떼로 만드는 것을 내포하는--의 감독을 의미하므로, 양육아래에 놓여져 있다고 이해한다. 조직(몸)은 교회의 생물학적 은유와 관련된다.
몸으로서, 교회는 유기적으로 발달할 수 있도록 양육을 요구한다(필요로 한다). 힐트너에게 있어서, "우리는 그의 교회안에서 양육되고, 그의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성만찬으로 확신되고, 그의 구원을 통해 풀려져서, 예배와 질문과 사랑안에서 아직 약하긴하나 즐거움으로 우리 자신을
드린다."
힐트너의 구조에 있어서 예배학적 바르게함(교정)은 주로 조직 관점--양육 또는 몸을 세움--의 구조아래, 그리고 대화 관점의
구조--훈계, 바르게 함, 기념--아래에 온다. 목사직의 이 세가지관점을 수용하면서, 그가 그들에게 부과하는 한계들에 의문을 던지면서, 우리는
예배가 이 세가지--양육, 대화, 조직--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르게함 이란 말은 힐트너에게는 애매모호한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영국교회의 사제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들 마음속에는 특별한 과정들(성화의 과정을 돕는 목회적, 예배학적 과정들) 그리고
특별한 목적(내적 인격의 완전, 하나님의 현존과 형상에로 크리스챤의 완전한 회복)이 있었다. 힐트너는 우리를 목회자-사람 관계의 역동성에 더
민감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통찰력을 예배의식자(liturgist)로서의 목사의 주요임무에 연결시키는 것에 실패함으로, 양육을
예배없이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분명히 크리스챤 양육은 예배밖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바르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만일 그것이 예배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디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
예배학에서 현대 감리교의 노력
교회 예배에 대한 오늘날 감리교의
관심은 웨슬리가 보여주었던것과 비슷한 예배의 목회적 모습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준다. 그들은(감리교) 그리스도안에서 크리스챤의 삶을 준비하는
바르게함에 있어서 예배가 불분명한 역할을 하게하는 힐트너의 모델을 충분히 인식한다. 교회예배에 대한 설명에서, 감리교 예배학자들은 주일
예배의식에서 사제로서 목사가 하는 일과 주중에 목사로서 하는 일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다시 한 번 인식 한다.
종교개혁 신학을 따르면서
현대 감리교 예배학자들은 인간의 필요--개인이나 사회가 채워줄 수 없는 그리고 개인에게 영생을 허락지는 못하는--에 반응해서 하나님의
자기내어줌을 표현한다. 우리는 쉽게 예배를 모든 기독교 예배의식의 고백-사면 sequence안에서 인간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본다.
1972 문서, "성만찬예전"(The Sacrament of the Lord's Supper), 에서 고백은 하나님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거역함에서 오는 인간의 필요를 보여준다. 용서는 의식적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 용서의 기초라는
복음에 근거를 두고있다.
하나님과 우리관계의 기초(그리스도의 삶, 죽음,그리고 부활)는 또한 성례전 감사(eucharistic
Thanksgiving)의 초점이다. (성례전의 분류';;;감사 분급등 설명)
전통적인 말(lift up your hearts,
sursum corda)로 시작함으로, 감사는 하나님이우리를 창조하셨음을, 우리가 그를 거역함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회상시킨다. 1976문서, "세례, 견진, 그리고 갱신의 예배"도 우리를 향한 그리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행위를 기독교
예배의 기초로서 강조한다. 서론에서 그 문서는 신적행위를 설명한다. 입회 즉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전능한 구원행위로 이끌어
들이신다." 그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하나님은 우리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새 삶은 믿음의 삶이다. 그안에서 우리는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의 선물인 자유를 받아들인다. 이 모든 예배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이 은혜는 우리가 사는 방식,우리가 믿는 방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방식으로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에게 응답하게 한다는 전제위에 근거를 두고있다.
제임스 화이트는 어떤 예배의
형태에 있어서나 핵심적인 세가지 규범을 말한다. 목회적 규범은 단지 목사가 성도를 알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사는 성도들이 그들에게
의미있는 것에 대해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민감해야만 한다. 신학적 규범은, 기독교 예배는 명백한 내용 또는 메시지를 갖고 있고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가 모든 역사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로 기억하는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기념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역사적 규범은, 역사를 통해 기독교
예배에서 변치 않는 것들을 보여주는 과거의 그런 예배의식으로 부터 배울 필요성을 강조한다.
윌리암 윌리몬은 그의
예배신학(liturgical theology)을 화이트가 제공하는 윤곽위에 세운다. 그에게있어 예배의 신학적 규범은 다음 질문에 집중한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예배하는 자는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선조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고 또한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말해졌는 가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관련이 있다. 초대교회에서 어떻게 매주 성만찬을 행했는 가 하는 것은
(중세)성만찬식에 대한 종교개혁의 영향이나 웨슬리의 회심역할로서의 성만찬 이해같은 역사적 사실 만큼 의미를 갖고 있다. 목회적 규범은 예배하는
사람들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예배의식을
"사람의 일"(the work of the people) 로서 인식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예배를 목회적 돌봄의 주요 영역으로 이해하여 왔다. 신-인(수직적)관계가 설교, 축도, 기도 그리고 성만찬을 행함에서 중요하지만, 목사는
신-인 중개자 이상이다. 그는 또한 "그의 예배의식의 리더쉽을 통하여 은혜의 수단을 나누어주는 공동체의 목사"이다. 주일 성만찬에서 성도들을
먹임은 한주간 동안 목사의 일--목사가 교회멤버를 양육하고 지탱하는 일--의 예배의식적 반복이다. 주의 식탁, 상담, 심방, 교리문답, 그리고
우연한 만남에서, 목사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소명을 감당할 힘을 주기 위하여 먹이고 양육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있다. 성만찬과 다른 목회적
만남속에서 목회적 돌봄은 할 수 있게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의사, 정신치료가, 상담가, 행정가, 그리고 사회복지사 심지어는 선생과
목사의 오늘날 모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윌리몬은 사제(the priest)를 우리의 목회적 모델로 제시한다. 그는 이 제안을 고린도
교회에서의 당파주의와 부절제에 대한 바울의 반응(고전 1:2; 14:26)에 근거를 둔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모든 예배활동의
목적-- 강화 또는 덕을 세움--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성만찬을 그들의 깨어짐을 치유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고전 11:17-34). 바울이 한
것처럼 목사들은 강화자(upbuilder)로서 그들의 소명을 이행하기 위하여 예배로 방향을 돌려야한다.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이 상담(counseling) 그 이상을 포함한다는 윌리몬의 주장은 옳다. 재클과 클렙쉬에 의해 제시된 목회적 돌봄의 네가지
기능(치유, 지탱, 인도, 화해)을 인정하면서, 그러한 기능들이 교회의 예배안에 나타난다고 윌리몬은 주장했다.
목사가 그의 서재나, 병원
침대곁에서나, 부엌 식탁둘레에서 성도를 상담할 때, 그는 단지 세례의식이나, 성만찬이나, 설교에서 행하는 것--성도들로 하나님을 만나게하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는 예배의식안에서 그들을 지도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목사가 성찬 떡을 뗄 때, 축도에서 그의 손을 올릴 때, 기도를
인도할 때, 그는 단지 그가 상담이나 목회적 돌봄의 다른 행위--치유, 지탱, 인도, 그리고 화해시키는 것--속에서 행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영혼의 돌봄에서 자동적으로(ex opere operato) 기능을 하지는 않는다.
예배는 잘못 사용되거나
불만족스럽게 사용될 수도 있다. 그것은 "건전하고, 성숙하고, 책임적이며 성실한 인격의 성취"를 방해할 수 있다. 예배에 있어 중요한 것은
동기이고, 윌리몬은 예배의 일 (역할) 뒤에 있는 네가지 이유--하나님이 실제적으로 행한 것을 예배학적으로 모방하는 것, 하나님이 원하는 바대로
우리 자신을 회복시키는 것, 과거 사건들을 기념하고 다시 재현하는 것, 하나님께 찬사를 돌리는 것--에 대하여 프러이져를 의존한다.
프러이져도 또한 윌리몬이 예배를 시험하기위해 제안하는 바로 그 인간 경험의 차원을 제공한다. 회중예배 또는 개인에 대한 예배의 의미를
평가하기 위해, 목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개인 또는 회중에게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람은 섭리를 이해할 수 있는가?
삶을 살며 무엇에 사람은 자신을 위탁하는가? 어떻게 사람은 은혜를 사용하는가? 어떻게 사람은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그 자신을 인식하는가? 목적에
대한 사람의 느낌은 무엇인가?
심리학과 예배사이의 더욱 포괄적인 대화를 원할 수도 있지만, 윌리몬은 그 문제를 성례와 정체성의 점에서만
다룬다. 본질적으로 세례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세례주는 공동체인 교회에 소속됨을 확신시켜준다. 세례는 "그리스도안의 새 정체성"에 대한 길을
열어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세례는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이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불리워졌다는 것을 선포한다.
윌리몬이 예배의 행위를 확증하기위해 현대심리학적 통찰력을 사용하는 두 번볁 점은 의례(ritual)와 상징의 견지에서이다. 의례는
사람들이 분리를 초월할 수있도록 의도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룹에게 응집력과 연속성을 제공하는 보편적인 수단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사람들의 마음, 생각, 행동속에 구체화시키려고 한다. 의례는 성장과 변화를 불러오고, 안정감을 또한 제공한다. q비슷하게 상징들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창조적이고 적합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윌리몬은 목사의 예배의식적 역할을 가장 우선적인 목회 활동으로 주장하고,
목사들에게 건전한 예배신학을 발전시킴으로서, 에배의식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서, 그리고 기술적으로 사람들을 예배로 인도함으로서, 이 사실을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목회적 활동을 믿바침해(undergirding) 주는 것은 "두가지 부름" 즉 하나님과 사람에 의한 부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특수하고, 개인적이며 경험적 부름을 주장함에 있어서, 윌리몬은 신에 대한 목사 자신의 믿음, 이해, 관계, 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모든 크리스챤의 사역을 정당화하듯 그의 사역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안수는 공동체가 함께 모이고 덕을 세우도록 돕는 기능을 하는
공동체(교회)의 공인으로서 몇 사람을 따로 세우고 권위를 준다. 목사의 주요 관심은 그의 돌봄아래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덕을
세움은 기독교 예배의식의 목적이다.
결론
덕을 세움은 예배의식의 주요 목적이었다. 그러나 덕을 세움의 일은 마술적인 것도 비인격적
과제도 아니다. 그것은 관계를--인간에 대한 신, 신에 대한 인간,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포함한다. 예배의 행위에서 이런 관계들은,
기독교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그리하여 공동체의 건강을 이루고 그 목표를 결정하는 진리와 사건의 예배의식적 그리고 상징적인
표현과 재제정(re-enactment)에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들이 공동체안에 있는 크리스챤의 영적 건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예배의식적 표현은 또한 영혼의 돌봄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한다.
예배에서 신은 축복과 은혜로서 인간에게 관련을 맺으신다. 이런
관점에서 예배는 하나님이 신적 사랑을 보여주는 자기 내어줌안에서 인간을 향한 행위임을 의미한다. 인간 삶의 과정과 결과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은
신적사랑이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결과에 영향주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는 신적 간섭을 표현한다.
홀로있으면(하나님없이) 인간은 영적으로 쇠약해진다 왜냐면 인간 영혼은 성장을 위하여 양분을 취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치유가 필요하다. 이런
기본족 인간의 필요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자기 주심안에서 응답한다. 크리스챤이 예배할 때, 그 자기줌을 회상한다. 이런 예배의식적
기억은 예배에 참여한 영혼들을 새롭게하고 힘을 주는 구원적 기억으로서 의도되어 진다.
인간적 관점으로부터 예배는 또한 우리를 신에게
관련시킨다. 예배에서 우리는 신적 은사(선물)--예배가 우리를 위해 주려고 하는 것--에 응답한다. 예배는 그것의 다양한 표현--고백, 찬양,
감사, 청원, 그리고 중재--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표현의 형태--언어적 그리고 육체적 응답, 헌금, 봉사,기도, 우리 자신--안에서 그런
응답을 허락해야한다. 이것이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 종교개혁자가 말하는 성만찬적 희생--그리스도의 한 번 충분한 자기 줌에 응답하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자기 표현--이다.
두 관점--인간에 대한 신,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맺음(선물과 응답)--은 성례전적으로
예배학적으로 이해된다. 크리스챤 건강과 성장은 연속적인 기초위에서 두 관점을 요구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강화되고, 양육되고, 새롭게되고,
치유되려면, 우리는 영적으로 정기적 기초위에서 양분을 취해야한다. 웨슬리와 함께 우리는 우리의 영적 삶의 보존과 강화를 위하여 은혜의 수단의
필요함에 동의한다. 크리스챤 삶의 목적인 성결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은혜의 수단의 사용에 중심적인 것은 성례전적 예배이다. 세례와
성만찬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주고 영적으로 우리를 양육한다. 영국종교개혁자들과 오늘날 감리교 예배학자들의 성례전 신학은 인간의 필요에 초점을
맞춘다. 지속적인 성만찬은 원치 않는 공동체에 부과되어지는 어떤 고대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속적인 회상에 의해
양육되고, 지탱되고, 치유되어져야하는 크리스챤의 필요를 표현한다. 그것은 계속되고, 치료적이고, 깊이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신비적 결합)에
대한 인간적 필요를 표현한다. 이 관계 그리고 이 관계의 성취에 대한 소망, 성찬적으로 생각하면, 는 지탱하고, 양육하고, 치유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성찬 예배의 실체요 목적이다.
예배학적 관계의 이 두 관점에 함축적인, 신뢰로서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모든 예배의식적 활동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하나님을 우리는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이 지정한 은혜의 수단을 신뢰한다. 그러한 신뢰는
단지 의도되어진 목적들을 위하여 은혜의 수단을 소유한다. 그들은(은혜의 수단)은 우리가 벌거나 하나님의 호의를 요구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들은
그안에서 하나님이 자유롭게 신적인 축복을 주시는 방법이다.
덕을 세우는 일은 세 번째 관계적 관점--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맺음--을
포함한다.
예배와 목회적 돌봄을 연결시키려는 작업을 한 학자:
PC & preaching, Willimon,
Capps, Browning, 송길원 등
III. 설교를 통한 목회적돌봄
역사적으로 예배는 목회적돌봄의 귀중한 자산이
되어왔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심리학의 소개 이후로 인간의 더 깊은 차원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예배는 새롭게 활용될 수 있다.
1. 설교
설교에는 전통적으로 네가지 즉 복음적, 목회적, 교리적, 그리고 도덕적 차원이 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사역,
십자가와 부활의 선포를 하는 것이다(복음적차원, Kerygma).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도록 이끌며,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목회적 차원, paraclesis). 설교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분명히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하는 것이다(교리적 차원,
homilia). 그리고 그것은 교육적인 설교로 도덕적으로 변화된 행동을 하게 한다(도덕적 차원, didache). 시대마다 강조점이 다르지만
이처럼 설교는 목회적 차원에서도 그 역할을 감당해 왔던 것을 보게 된다.
설교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요, 하나님의 위로와
신학적 주제와 가르침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선포하는 자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한다.
설교의 중심이 치유 그 자체이거나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파라클레시스 등에 머문다고 하면 그것은 설교라는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예를 들면, 죄책감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있는 성도에게 죄책감의 의미와 죄책감을 벗어버려야 할 이유등를 설명하거나 그의 상처를 단순히 치료하고자 하는 것은 바른 설교가 아닐 것이다.
설교의 중심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책으로 고민하는 사람을 하나님앞에 서게 하여 설교를 통하여 그를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고 하나님이 그의 죄책감을 씻으시고 그의 상처를 고치시게 해야 하는 것이다.
상처입은 사람들, 고난당하는 자들, 슬픔에 잠긴 자
등을 그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그안에서 새 삶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인격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데 그 독특성이 있다.
목회적 설교는 인간의 발달단계에 따른 고난과 문제가 무엇이며, 어떠한 기독교 진리와 어떠한 하나님의 권능이 그들을 도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자기중심성이 강한 아동기의 자녀들에게 엄격하고도 자상하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를생각하며,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아 갈등하는 청소년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참된 정체성과 하나님앞에서의 참된 인간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청년, 중년기의 위기, 노인기의 지나온 생을 받아들임과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설교할 것이다.
본 글은 설교의 한
분야만을 치중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목회자가(북미교회상황) 일대일 차원의 심리학적 상담에서만 목회적돌봄을 행하려는 것을 지적하고 우리의
귀중한 유산을 재 발견하자는 의도이다.
*예방상담의 기능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사전에 이에 대한 면역체계를 길러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설교.
베드로"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예방적 상담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모든 사람은 심리적 문제들을 경험해왔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적으로 정확한 명제적 진리(삼위일체하나님, 기독교적 세계관, 예수에 대한 질문등)를 선포한다고 오늘날 성도들이
경험하는 불안, 외로움, 죄책감, 분노, 우울증, 열등감 등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賁닫기 시작했다. 교회는 사람들의 고민에
접근해야하고 그들의 정서적 문제와 내적 갈 등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교인은 십일조를 잘하고 교회봉사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스트레스 관리도 잘하고 정신적 장애도 뛰어넘는 내적 힘을 지녀야한다. 교회는 이런 것들을 가르칠 사명이 있고, 설교는 이런 교인들의 상황을
상담적 차원에서 접근함으로 말씀속에서 치유를 경험하도록 도울 수 있다.
회중의 삶을 관찰하여 정확히 파악하고 그 해결의 원리들을 성경에서
찾아내어 그들의 삶에 섬세하게 적용해야한다.
예, 분노 가인의 분노(창4:1-15), 모세의 분노(출32:7-20), 사울의
분노(삼상18:1-16), 요나의 분노(욘4:1-11), 분노 감정의 관리(엡4:25-32)
삶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민감하게
파악하여 설고의 형태로서 때를 따라갈등과 문제의 해결, 위기 극복을 도와주는 사역이다.
회중속에는 문제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건강한
사람, 약한사람이 섞여 있으므로 어떤이에게는 예방적인 측면에서, 다른 이에게는 치료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담없는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익명서이 보장되는 전화상담 활발, 비밀을 알고있는 상담자에 대한 부끄러움,
폭로에 대한 두려움, 적개심). 오늘날 상담이 장기 치료의 형태를 갖고있는데 반해, 설교는 단기 치료의 형태이다. 이렇듯 설교는 이제까지
상담에게 빼앗겼던 목회적 돌봄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목회자에게 개인 상담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Harry
Emerson
Fosdick "나의 설교는 그 자체가 청중을 상대로 하는 집단상담이다. 사실 모든 설교는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과 깊이 만날 수 있어야하고 심리적으로 무거운 짐진 사람들의 문제속으로 파고 들 수 있어야한다."
*상담목회적 설교의 필요성
현대인의 상처: 풍부한 물질 그러나 마음의 궁핍속에 살아가는 현대인. 왜?
도시화된 산업사회에서 하나님없이 물질, 권력, 명예로
사는 인간마음.
만남의 상실: 부모, 가족, 이웃. 산업사회에서 건강을 지켜주는 공동체의파괴
병든 사회구조:정치,경제, 교육제도
자연생태계의 파괴:인간도 자연과 함께 멸망할 위기
이런것들에서 상처가 발생한다. 교회는 상처받은 현대인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아픔에 대답할 수 있어야한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주다니?
이러한 신음하는 인간을 감싸줄 책임이 있다.
누구나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속에 놓여있기에 목회자는 대중을 치유하는 설교를 개발해야한다.
* 치유설교의 수준까지 다다르려면 인간심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갖고 있어야한다. 그렇지 않고 씨만 뿌리려고한다면 아무런 반응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인간의 아픔을 공감해주면
청중의 마음문은 열리도록 되어있다.
Jung에 의하면 영적인 장애가 병의 근원이라고 본다. 환자의 영적인 장애를 바르게 도와줄 때 환자는
회복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영적인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와 신체적 질병의 상호관계를 목회자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설교를 통해
치유해갈 수 있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청중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 마음의 구조를 아는 것은 치유하는 설교자가 되기위해
중요하다.(위의 줄 설명)
상담설교를 상담설교 되게 하는 것은 회중들의 삶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 있다.
설교를 통해 자신을
자각하게 되고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다면 상담의 훌륭한 기능이 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이 복음전파의 목적이다.
구원의 원래 의미는 치유이다. 인간이 영과 정신과 신체와 인간관계가 뒤틀려 있을 때 설교는 이를 바로 잡아주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건강하게 살도록
인도하는 일이다. 목회상담과 같은 목표.
** 상담은 인간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를 강구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돌봄적 설교는 구체적으로 파악된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으로 어떻게 대처하는 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병든 마음, 상처입은 마음의 뿌리를 구체적으로 알고 말씀으로 대처하는 설교와 인간의 상처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인 상식이
없는 상태에서 진리만 전하면 된다는 식의 설교는 치유효과에 있어서 명백이 큰 차이가 있다.
교회에 참석하는 청중의 심리를 보면 자기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기를 바라고 자기들의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해답얻기를 원한다. 자기들의 문제에 대해 심리학적인 해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으로 부터의 해답을 기대한다. 말씀과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말씀 소홀히하고 인간 마음의 진단과 처방에만 치중한다면 좋은 설교아니다.
설교의 지적인 측면, 신학적 바탕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적인 면에 의해서는 인격변화가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을 만날 때 쉽게 열리는 경향이 있다.
설교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해 줄飁, 즉 자신의 상처입은 마음을 공감해 줄 飁
설교를 듣는 청중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느끼게 되고, 그와 함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는 응어리도 서서히 녹아 내리기 시작한다.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도 설교자가 자신의 마음의 마음을 공감해 줄 때 서서히 불안과 갈등에서 벗어나면서 소망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반면에 설교가 질책과 죄책감, 그리고 공포를 조장하게되면 청중은 심리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되고, 심리적 장애는 신체적 이상까지 초래할 수
있다.(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받아들이기 보다 억압으로인해 병발생, 권위주의의 폐해)
최근 미국에서는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전문상담자를 주위에 두고도 목사를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데, 이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으나,대부분의 상처입은 사람들이 심리학자나
점문상담자의 도움을 넘어서는 영적인 도움을 요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Pruyser.)
이전의 목회적돌봄은 문제있는이--이제는
성장필요한 모든이
누구나 치유,성장필요 목회자의 특별영역.
healing, sustaining, guiding--
reconciling, nurturing
1. 삶속에서의 좌절과 상처경험
2. 치유의 첫 번째 단계는 상처의 자리에 내려가
공감하며 수용.
예수님도 사람들의 일차적인 욕구를 수용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도 (수가성 여인: 샘물의 필요성을 부인안함 수용)
3. 시각을 조정해 긍정적인 인생관 갖도록 함
(여인으로 하여금 깨어진 모습 그대로 보게하고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안 에서
본래의 모습이 회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성춘 교수의 논리-- 치료 자체에만 관심갖는 정신치료의 한계 넘어섬
Don
Browning--바람직한 윤리제시 필요--단지 수용으로만 해결 못함
4.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관심롸 방향을 전환시켜 주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될대로 되라는 삶을 살고 있으나 자기의 상처를 치료받고 새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필수적 임을 알고 있다.
5. 이 설교의 과정속에서 주님이 그들사이에 함께계셨음을 깨닫고 그분이 고난당하는 자에게 생명의
능력을 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한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변천에 의해 대가족 제도의 붕괴와 핵가족의 분열화 현상은 인간의 안전감의 기본틀의
파괴와 인간의 본질적 괴리감과 소외감을 심화시킨다. 우리의 가정생활은 날로 갈등과 마찰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시달리는 악순환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전통사회의 분업화에 의한 기계적 인간과 인간소외를 심화시키는 비인간화 현상을 겪게되므로 이런 사회환경속에서 사회구성원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쉽게 심한 상처를 입는다.
이런시대속에서 현대 목회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대가족 제도의 붕괴와 핵가족의 분열에 의한 각종의 가정
파탄과 위기들을 맞이하는 교인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는 사회적 병리 현상에 의한 각종 심리적
병리현상을 보이고 있는 교인들의 숫자가 날로 눈에 띄게 표면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인들의 심층적 삶 속 깊이까지 연구하고 탐색하며
치유를 시도하는 것이 목회상담의 역할이라면, 교인들의 심층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설교한다면 치유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 교인들의
만성적 죄책감, 심한 상처와 억울함에 의한 적개심과 사무친 한, 사랑결핍과 열등의식, 정서적 불안감, 파괴된 가족관계(부부파탄, 자녀탈선,
고부갈등 등). 인지변화의 목표보다 정동적 변화를 목표로 접근할 飁 효율적인 전인적 변화가능. 감정의 수용, 감정의 공감, 감저의 해소,
시각정리(새가치관 형성)을 포함할 때 효과적.
목회상담의 입장에서 볼 때 우울증의 원인의 대부분은 분노심을
내면화(internalization)시켰을 때 일어나다고 본다. 분노심의 지나친 억압작용은 마음의 침체 현상과 아울러 우울증을 낳게한다. 억제된
분노심은 개인에 따라 화병을 낳게 하기도 한다. 이 화병증상은 분노심의 신체화 현상인 것이다.
현대 목회현장에서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분노심을 억제 또는 억압하는 것으로만 교훈하고 있어서 우리 신앙인들이 분노심을 적절히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는 사례가 많지 않나
염려스럽다. 설교를 통해 분노심을 적절히 처리하는 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엡4:26 분노심을 처리하는 길잡이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를 통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7정을 주셨다(그중 하나가 노(怒)의 정을 뜻한다). 그러므로 분노심 자체는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한다. 우리가 느끼는 분노심을 어떻게 죄를 짓지 않으면서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교훈이 엡4:26이다.
한국교회는 설교강단을 통하여 지금까지 세계적인 교회의 위상을 발전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설교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되리라고 믿는다. 이제 날로 깊은 상처를 입고있는 가정구성원들과 사회구성원들을 위하여 목회적인 설교가 필요하리라 본다.
1. 상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하는 일이다. 설교에서 이것이 가능한가? 설교는 형식상 일방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설교는 쌍방통행이다. 설교자는 말하기에 앞서서 설교를 듣는 사람의 소리없는 소리를 들어야한다. 교인들의 소리에 경청하지
않는 설교는 일방적인 설교요 교인들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 허공을 치는 설교가 되기 쉽다. 경청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교인들의 삶의
현실을 이해하고 저들의 고뇌와 마음의 간구를 읽을 수 있어야한다. 그래야 그들의 심령을 쪼갤 수 있다.
2. 경청 즉 교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음으로 설교자는 교인들의 삶의 참된 모습을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3. 여기에서 교인들의 소리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일이 설교의 중심기능이다.
목회적 설교는 교리적 설교와는 달리 인간의 삶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어떤 외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모습을 정직하고 명료하게 분석하고 반영해 줌으로 해서 내면으로부터의 깨달음과 자기 발견과
회개의 결단으로 인도하는 식이다. 그러나 삶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안에서의 모습을 반영함으로 그안에서 응답해가는 삶이
되야한다. (참 나의 모습: between ideal I and actual I.)
나를 이해해주는 그 설교자의 눈 빛안에서 자기의
모습을 보며 동시에 사랑과 은총이 담긴 그리스도의 눈길을 느끼게될 때 용서와 치유와 성자은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롭게 발견되어진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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