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목회적 돌봄

2006. 7. 8. 23:46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설교와 목회적 돌봄
박노권교수

교회의 목회적 돌봄은 심리학과 심리요법적 통찰력의 현명한 사용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루이저 박사가 말한 대로 교회가 오랜 세기를 걸쳐서 축척하고 검증해온 목회적 자원들 즉 그들의 전문적인 유산을 많은 목사들이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목회적 돌봄은 현대심리학의 영향을 반영하는 일대일 개인상담의 차원을 넘어서 교회가 간직해온 풍부한 목회적 자원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어야한다고 본다.

따라서 목회적 돌봄을 위해 사용되었던 교회의 전통적 자원의 하나인 설교를 통해 오늘날 어떻게 효과적인 목회적 돌봄을 이룰 수 있는지를 조명해 보고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동시에 또한 부차적으로 이 과정에서 성도들에 대한 돌봄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설교라는 자원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오늘 상황에서 심리학적 통찰력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 설교를 통해 목회적 돌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설교에는 전통적으로 네 가지 즉 복음적, 목회적, 교리적, 그리고 도덕적 차원이 있다. 시대마다 강조점이 다르지만 이처럼 설교는 목회적 차원에서도 그 역할을 감당해 왔던 것을 보게 된다. 설교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요, 하나님의 위로와 신학적 주제와 가르침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선포하는 자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한다. 설교의 중심이 죄책감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성도의 심리적 치유이거나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파라클레시스 등에 머문다고 하면 그것은 바른 설교가 아닐 것이다. 설교의 중심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책으로 고민하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여 설교를 통하여 그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고 하나님이 그의 죄책감을 씻으시고 그의 상처를 고치시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급격히 변해 가는 사회 속에서 쉽게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는 먼저 그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도시화된 산업사회, 병든 사회구조 속에서 각종의 가정문제, 인간 소외문제로 상처입고 고난 당하는 자들, 슬픔에 잠긴 자들을 위하여 목회상담에서 하듯이 이런 교인들의 심층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설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더욱 효과적인 치유의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모든 사람은 심리적 문제들을 경험해왔고,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정확한 명제적 진리(삼위일체하나님, 기독교적 세계관, 예수에 대한 질문 등)를 선포한다고 오늘날 성도들이 경험하는 불안, 외로움, 죄책감, 분노, 우울증, 열등감 등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의 고민에 접근해야하고 그들의 정서적 문제와 내적 갈등에도 관심을 가져야한다. 이런 맥락에서, 송길원 교수의 "교인은 십일조를 잘하고 교회봉사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스트레스 관리도 잘하고 정신적 장애도 뛰어넘는 내적 힘을 지녀야한다. 교회는 이런 것들을 가르칠 사명이 있고, 설교는 이런 교인들의 상황을 상담적 차원에서 접근함으로 말씀 속에서 치유를 경험하도록 도울 수 있다" 라는 언급은 목회적 돌봄을 위한 설교의 방향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설교를 통해 효과적인 목회적 돌봄을 이루려면 인간 심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설교는 아무런 반응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상담이 인간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한 다음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를 강구하는 것이 그 임무인 것처럼, 돌봄적 설교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파악하고 난 후 말씀으로 어떻게 대처하는 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병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의 뿌리를 구체적으로 알고 말씀으로 대처하는 설교와 인간의 상처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인 상식이 없는 상태에서 진리만 전하면 된다는 식의 설교는 치유효과에 있어서 명백히 큰 차이가 있다.

설교의 지적인 측면이나 신학적 바탕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적인 면에 의해서는 인격변화가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을 만날 때 쉽게 열린다. 설교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해 줄 때, 즉 자신의 상처 입은 마음을 공감해 줄 때 설교를 듣는 청중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느끼게 된다.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도 설교자가 자신의 마음을 공감해 줄 때 서서히 불안과 갈등에서 벗어나면서 소망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자기 자신을 받아주지 못하고 열등감으로 미워하던 마음도 자신을 받아주는 설교자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되며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설교가 질책과 죄책감, 그리고 공포를 조장하게되면 청중은 심리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되고, 심리적 장애는 신체적 이상까지 초래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이 복음전파의 목적이다. 구원의 원래 의미는 치유이다. 인간이 영과 정신과 신체와 그리고 인간관계가 뒤틀려 있을 때 설교는 이를 바로 잡아주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건강하게 살도록 인도하는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영적인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와 신체적 질병의 상호관계를 목회자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설교를 통해 치유해갈 수 있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청중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 마음의 구조를 아는 것은 치유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중요하다.

이렇듯 효과적인 목회적 설교를 위해서는 회중들의 삶의 필요를 파악해야만 한다. 설교자가 교인들의 삶의 현실을 이해하고 저들의 고뇌와 마음을 읽는 것은 상담에 있어서 필수적인 경청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자기들의 문제에 대해 심리학적인 해답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으로 부터의 해답을 기대한다. 말씀을 소홀히 하고 인간 마음의 진단과 처방에만 치중한다면 좋은 설교는 아니다. 이것은 프루이저의 말처럼, 최근 미국에서는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전문상담자를 주위에 두고도 목사를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데, 이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상처 입은 사람들이 심리학자나 전문상담자의 도움을 넘어서는 영적인 도움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회중의 삶을 관찰하여 정확히 파악하고 그 해결의 원리들을 성경에서 찾아내어 그들의 삶에 섬세하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목회상담에서 중요시하는 시각조정이다. 이렇듯 설교를 통해 자신을 자각하게 되고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다면 목회적 돌봄이 잘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목회적 설교를 하게될 때, 회중 속에는 문제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건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섞여 있으므로 어떤 이에게는 예방적인 측면에서, 다른 이에게는 치료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오늘 현대인에게 중요시되는 자기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담 없는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또 한편 오늘날 상담이 장기 치료의 형태를 갖고있는데 반해, 설교는 단기 치료의 형태로 효과 있게 사용될 수 있다. 이렇듯 설교는 이제까지 상담에게 빼앗겼던 목회적 돌봄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목회적 설교는 교리적 설교와는 달리 인간의 삶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어떤 외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모습을 정직하고 명료하게 분석하고 반영해 줌으로 해서 내면으로부터의 깨달음과 자기 발견과 회개의 결단으로 인도하는 식이다. 그러나 삶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모습을 반영함으로 그 안에서 응답해 가는 삶이 되야 하는 데, 이때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발견된 자신을 보며, 용서와 치유와 성장은 일어나게 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 강단을 통하여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 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설교의 중요성은 강조되어 왔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왔다. 그러나 한국도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서 세속가치에 영향을 받아 가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서는 단지 옛 신앙전통 유산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깊은 필요에 대해 연구하는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효과적인 목회적 돌봄을 이룰 수 있도록 재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전통과 세속 가치의 사이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 크리스챤을 돌보아야 할 목회자들이, 이제는 복음선포의 설교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설교가 강조되어야 할 상황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 대한 효과적인 돌봄을 시도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끼면서 하나의 시도로서 여기에 필자의 설교 "성숙한 삶을 향하여"를 실어보고자 한다. 이 설교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우리 스스로 한 번 바람직한 설교를 머리에 그리면서 직접 평가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4. 설교사례: 성숙한 삶을 향하여 (본문: 데전 5:14-15)


꿈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이상과 현실 속에서 늘 갈등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옛날 고등학교시절 생물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하지만 그 선생님의 한마디 "그렇탸!"는 잊혀지지가 않는다. 수업시간에 "염색체는 이렇게 분열됩니다..." 한참 열정적으로 설명하고는 끝날 때 꼭 한마디 합니다: "나도 잘 몰라. 내가 봤간디? 그렇탸." 그러니 의심이 안들 수 있습니까? 그래 저녁에 집에 오면 선생님이 설명한 것을 참고서 갖다놓고 매일 확인합니다. 적어도 2,3주 계속했던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도 틀리지 않는 너무나 정확한 설명이었다. 그후로 내심 존경하게 되었는데, 또 한편 속으로는 이왕이면 분명하게 얘기하지 왜 "그렇탸"해서 헷갈리게 하는지 불만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실제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음을 종종 봅니다. 하나님이 우주 창조하시고 사람도 만드시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 하셨댜. 나도 잘 몰라. 내가 봤간디? 그렇탸.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을 산댜. 근데 나도 잘 몰라. 내가 가봤나? 그렇탸. 그러니 신앙에 힘이 없어요.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교회에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하나님이 계실지 모르니 만일의 경우 후에 큰 손해 안 볼 정도로만 적당히 나오고 적당히 봉사하고.

사실 그럴 수도 있다. 인생 7,80을 살아도 삶이 무엇인지 다 모르는데, 죽음이후에 대해 혹은 인생은 이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니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오늘 현대인의 특징은 신념이 없이 다양한 생각만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누가 얘기했듯이,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수많은 지식은 갖고 있으나 오히려 신념이 없고 가치혼돈-이것인지 저것인지 어떤 것이 참 바른 길인지 모르는-가운데 사는 것이 현대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생각 속에서 신앙의 갈등을 겪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여기 젊은이들이 있는데) 또 사랑 때문에 사람들이 갈등을 많이 겪는 것을 봅니다.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해버린 젊은이가 자기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쉐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이 오델리오에게 사랑을 고백하듯.

"사랑하는 그대여 저 밤하늘의 별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의심해도 좋소

태양이 우리를 돌고 있다는 것을 의심해도 좋소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다 거짓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허지만 결코 이것만은 의심하지 마오. 내 그대 사랑한다는 것을."

Doubt Thou the stars are fire

Doubt that the sun doth move

Doubt all the truth to be lier

But never doubt I love.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미안해. 우리는 아직 공부해야 할 때이잖아.."라면 어떻합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꺼지는 것 같지만 자살할 수는 없고. 그저 가슴을 치면서, "그래 그렇잖아도 내가 먼저 노- 할려고 그랬는데 먼저 얘기해줘서 고맙다." 그렇다고 아픈 가슴이 풀리나요? 인생의 선배들--로미오와 줄리엣. 단테와 베아뜨리체. 이수일과 심순애, 이도령과 춘향이, 갑돌이와 갑순이--이 다 겪어온 고민이지만 사랑의 갈등이 젊은 시절 가슴아프게 한다.

물론 결혼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검은머리 팥뿌리 되도록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늘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고 굳게굳게 약속했지만. 20대 젊은 부부. 여자가 말합니다. "여보 오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외식할까?" 그때 남자 "아니 미쳤어? 난 구수한 된장찌개에 밥말아 먹고 싶어서 결혼했다구" 사랑이 다 뭡니까? 냉전 분위기가 고조되는 거죠. 30대. 힘든 세상에서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대화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요. 그러다 보니 갈등이 또 생기고. 40대. 이제 아이들도 성장하고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안정이 되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거울 앞의 자신을 보면서 "아 이제까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았나. 내 인생은 어디에 있나?" 그러다가 옆집 돌이 엄마하고 비교해보니 속이 막 상해요. 이러다가 너무도 많은 주부들이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이때 잘못 나가면 잃었던 그 어떤 사랑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래 우스개 소리로 "강남 사는 주부 치고 애인 없는 여자 없다"는 말도 한참 유행어처럼 돌았던 것을 기억한다. 남자들도 그래요. 이제까지 정신없이 생존을 위해 바쁘게만 살아왔는데 조금 여유가 생기니까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사를 벗어나서 뭔가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은 없을까? 그러다가 운동이나 등산 글쓰기 어학공부 또는 사회교육원의 좋은 프로그램등 건전한 취미를 살리면 좋은데 잘못하면 술집으로, 도박으로 또는 자꾸 다른 여자 쳐다보다가 인생의 심한 곤경에 빠지는 사람도 보게된다. 그래 인생의 뭔가 새로움을 찾아 방황하는 때이다 해서 40대를 제 2의 사춘기라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다윗이 바람난 때도 40대였어요. 어쨌든 이런 일로 갈등이 심해질 수 있다. 50대. 50넘어서 60바라보게 되면 이제 싸울 기운도 없어요. "그래 참지 뭐... 같이 나이먹어가면서 서로 측은하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참는 게 습관이 됩니다. 그런데 60대되면 이제 자식들 때문에 또 싸우게 됩니다. "며느리가 그 정도면 되잖아요""아냐, 안돼! 그래도..." 인생 길에 갈등은 끝이 없나 봅니다.


그래 어떤 부부는 이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까지 하게 됩니다. 조선일보(97.2.21)에 나온 95년 통계 보니 하루 평균 190쌍이 이혼, 결혼은 초혼, 재혼 합해 하루 1121쌍. 쉽게 말해 하루 6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또 새로운 사실은 50대 이후노인들의 이혼이 꾸준히 증가해서 지금은 천명당 6.6건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이혼은 무조건 안된다"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뜻과 이 사회공동체를 생각하기 보다, 철저히 나 개인 위주의 판단으로 너무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분위기는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또 돈이 없어서.. 건강 때문에, 너무 빨리 흘러가는 세월 때문에, 때론 재능이나 신체적인 문제로 고민할 수도 있다. "내 엄지발가락은 왜이리 이상하게 생겼을까" 이러한 갈등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때로는 내안에서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이것은 연약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상과 현실. 본질과 실존 사이에서의 갈등! 요즘 많은 철학, 문학의 글들 또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깊이 있게 감동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리하여 잘못하면 우린 여기에 푹빠져 이것이 바로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인간이해입니다.

성서는 인간의 참모습은 이런 갈등 속에서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갈등을 통하여 더욱 성숙해지고 참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개인 갈등뿐 아니라 가정, 교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갈등은 그 일을 통하여 한 집안을 구출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보듯 예루살렘의 큰 박해가 오히려 성도들을 유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게 해서 복음이 널리 전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갈등을 성숙의 디딤돌로 바꾸시는 것을 봅니다.

그럼 어떻게 이 갈등을 괴로움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 성숙해지는 삶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먼저 주님이 죄와 허물이 많은 나를 받아 주셨듯이 나 스스로도 이런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용기입니다. 여기가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제 얘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중2 때 한 번은 주일 낮 학생예배때 특송을 하기로 했다. 일주일 동안 집에서 열심히 연습해서 드디어 주일아침 150여명의 학생들 앞에 섰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당시 168장으로 "죄짐맡은 우리구주"라는 찬송이었는데, 피아노 첫음이 내가 집에서 혼자 준비한 것과 너무 틀리는 것 아닙니까? 결국 1절도 못 끝내고 들어왔는데 그때의 창피함이란. 감수성이 예민한 그때 더욱이 좋아하던 여학생 앞에서. 몇 주일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은 제 심정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하나 배운 것이 있다. 내 자신을, 나의 경험을 더 이상 수치스럽지 않게 생각하지 말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왜 노래를 파바로티만큼, 여자라면 조수미처럼 못할까. 왜 내 부인은 황신혜처럼 생기지 못했을까.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나? 내가 왜.."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미워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그건 내가 아니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고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더 나아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남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늘날 많은 문제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음"에서 옵니다. 정신적 질병. 우울증 그리고 수많은 신체적 질병도 나를 미워함에서 영향받는다는 것은 오늘날 의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하나님 안에서 늘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미국 시민인권운동의 기수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추모회에서 어느 흑인 여가수가 가슴을 뭉클하게 부르던 노래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가사는 다 잊었지만 계속 반복되던 한마디 "I'm somebody". 우린 노예도 아닙니다. 무가치한자가 아닙니다. 우린 특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릴 사랑합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키엘케골은 "비교는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했는데 비교는 잘못하면 우리를 비하시키고 이것이 남을 향할 때는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우린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 부족함을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십니다. 로마서의 주제인 칭의가 무엇입니까? 의롭다고 칭하는 것 아닙니까? 즉 나는 죄인 그대로 인데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겁니다. 마치 만원 짜리 지폐의 사실가치는 10원(?)이나 만원이라고 인정하고 사용하듯.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런 우리를 가리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결코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정을 받을만한 공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아준 이 귀한 나를 내가 왜 뭐가 조금 부족하다고 용서를 못하고 미워하고 열등감으로 살아갑니까? 내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음은 성숙한 삶을 향한 첫 걸음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조금씩 자라날 수 있습니다. 마치 구원받는 순간 사람은 아직 아이와 같고 신앙 안에서 점점 자라야 하듯 즉 감리교 신학 용어로 성화 되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기초--나를 받아드리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위에서 점점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 크리스챤의 성숙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나를 죄인임에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하듯, 나 자신 참 나의 모습을 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허나 만일 여기서 나사랑(self-love)에서 멈춘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될 것입니다. 요한 15:12-17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목숨까지 내어주기까지 사랑한 모든 사람들을 믿음 안에서 너희도 받아주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너는 둘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내가 나의 부족함을 받아주듯 이웃의 부족한 약점도 받아주어야 합니다. 약한 자를 보며 "넌 왜 그래? 라고 내 입장에서 기준을 정해놓고 비판만 하지 말고 그 약한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같이 자라도록 해야합니다.

이것이 진정 성숙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아내가 김치찌개 못한다고 맨날 불평하고 구박해보세요. 그러다가는 라면도 못 얻어먹습니다. 아이들 수준은 생각 않고 이웃집 아이하고만 비교하며 "넌 왜 그 모양이냐" 하면서 자식의 있는 모습그대로 받아주지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끄러워하면, 결국 아이들 가슴에 멍이 들고 성격형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게됩니다. 그것은 모두에게 불행입니다. 서로가 부족함을 탓하고 불평하기보다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같이 자라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생길 걸어가면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랑할 누군가 있다는 것. 이것은 삶의 행복이고 진정 내 삶을 의미 있고 성숙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간곡히 권면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점점 악해지니 이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말고 "종말이여 오라"가 아니고, 또는 종말이 곧 오니 모든 것 포기하고 산으로 갑시다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도 주안에서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우리의 약한 이웃을 붙들어 주자는 권면을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걸어야할 크리스챤의 자세임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종말이 다가왔다고 느껴질 만큼 세상이 악해지고, 물질주의와 잘못된 자본주의/ 개인주의 의식이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잃게 하며 서로가 외로워지는 그래 우리를 절망하기 쉽도록 만드는 이 시대에 우리 크리스챤의 바른 삶의 지침이 또한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웃 돌봄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 불만만 갖는다면 그나마 이 세상은 정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오늘의 이 말씀을 드립니다.


"규모 없는 자 (게으르고 바르게 행치 못하는 자)를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를 안위하고. 불행한 여러 가지 일들, 순간의 잘못, 실패 따위로 실망한 자를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고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주며. 육체적 영적으로 병들고 쇠약해져서 제 발로 서지 못하는 사람을 붙들어서 의지하고 서게 해주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며. 자기를 반대하고 괴롭히고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 실망하거나

적대하지 말고 용서하고 마태5장, 로마서12장에서 보듯 하나님께서 해결할 때까지 오래 참으며

악으로 사람을 대하지 말고 선으로, 사랑으로 대하라" 어떤 조건에서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언제나 선행으로 대하야 하는데 이것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 자들이 취할 태도요, 크리스챤의 길이라는 권면입니다.

요즘 세상 나혼자 몸 간수하기도 힘든데, 내 혼자 시간 쓰기도 바쁜데... 내 생각만 하기도 복잡한데 어떻게 남까지 관심을... 더구나 어떻게 남을 위해 어려움까지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남을 위해 살면서도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합니다.

그래요 우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고 또 이 사랑 때문에 기꺼이 우리 자신 헌신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어려워 보이는 일도 감당할 수 있게 힘을 주십니다.


교회 나가자고 전도할 때 사람들한테 가끔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아, 나 돈이 없어 못나가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십일조. 각종감사헌금. 절기 때마다 헌금. 교회모임때마다 헌금... 부자가 아니라 경제적 부담 때문에 못 가겠다고 합니다. 또 누구는 "난 게을러서 못 가요" 정말 교회 다니는 사람처럼 부지런한 사람 없을 거에요. 주일낮, 밤, 수요일, 금요속회, 매일 새벽기도회, 또 웬 모임은 그리 많은지. 사실 그래요. 그렇찮아도 피곤하고 힘든 세상인데 얼마나 교회생활 하기가 바쁩니까? 모든 에배참석. 교인의 의무. 특히 온전한 십일조 생활해야죠. 요즘 같은 불경기에 물가는 비싸고. 쓸곳은 많고. 그런데 10만원 1/10이면 만원이고, 100만원이면 10만원, 1000만원이면 100만원..큰돈입니다. 언젠가는 어느 성도님을 심방 가서 왜 저녁예배 안나오냐고 하니까 그 분 대답 "첫사랑 봐야죠" 그래요. 그렇지만 우리는 할 일이 많아도 또 TV재미있는 것 있어도 교회와야 됩니다. 그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권면해서 은혜 안에 자라게 할 책임도 우리에겐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어떻게 다 감당합니까?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옵니까? 교회의 제도에서? 아니면 목사님의 간곡한 권면이 있어서?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린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더나가 이웃도 받아주고 사랑하고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 교회도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노래 못하는 저도 스스로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급격한 산업화 정보화의 시대를 맞이하며 개인적으로도 우린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심방하다보면 많은 가정들이 나름대로 다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부부갈등, 자녀문제. 교회는 어떻습니까? 흔히 하는 말로 목사 사모님이 옷을 잘 입으면 "사모님은 너무 사치해", 못 입으면 "사모님은 언제 좀 세련될라나"흠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는 서로 인사도 안하고 너무 차가워. 우리 교회는 어려운 사람을 안 돌봐. 우리 교회는 찬송을 크게 안 불러. 김집사는 대체 왜 그래?" 이렇게 저렇게 교회 안에도 흠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또 어떻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국가가 유지되려면 군과 경제 신뢰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리더쉽이 상실되고, 경제는 활력을 잃고, 가장 중요한 정부에 대한 신뢰, 서로간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시대를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제부터는 우리의 부족함을 수치스러워하고 절망하지 맙시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주며 주님 안에서 완전을 향해 자라도록 노력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 갈등을 성숙의 디딤돌로 만들어 주시며 우리 개인뿐 아니라 가정, 교회,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킬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성령은 불, 뜨거운 마음, 순수한 마음인데 이것이 꺼지면 안됩니다

예언을 멸시치 말고--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요 권면, 은사이다.

주의 말씀을 들을 때 멸시치 말고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취하고--나쁜 것 버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좋은 것 취하는데도 결단 필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당시 성행하던 우상숭배, 성도덕혼란. 잔인한 경기 등을 영향받지 않게 멀리하고 본받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렇게 성도들이 살기를 권하는 바울은 이제 데살로니가 온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흠없이 보전되기를 기도한다. 성숙하고 바르고 깨끗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흠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성도 여러분, 주님오실때까지, 우리가 참으로 귀한 존재임을 날마다 느끼며 부족함에도 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나가 이웃을 돌보고 같이 자라는 성숙한 삶을 살므로, 이 시대의 빛이 되고 주님오실때에 바르게 살았다고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