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빈곤감과 교회의 대안

2006. 7. 8. 23:31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상대적 빈곤감과 교회의 대안
박노권 교수(목원대)

들어가면서
  우리 경제는 그 동안의 고도성장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고 먹고사는 것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1963년에 1백 달러에 불과하던 소득이 1977년에 1천 달러를 돌파하고 1995년에 거의 1만 달러를 달성했으니, 비록 지금은 주춤한 상태지만 한국경제는 초고속 성장가도를 질주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려웠던 그 시절과 비교해서 그만큼 더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더 잘 살게 되었지만 욕구불만은 더 커지고 여기에 따라 상대적 빈곤감도 더욱 증폭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가용이 생활필수품이 될 정도이고, 이동전화를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할 만큼 부유해진 것 같은데, 왜 생활의 풍족함 속에서 상대적 빈곤감을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인가? 한 마디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내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상대방과 비교해서 또는 내가 원하는 만큼 소유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불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갖게 되는 상대적 빈곤감은 개인이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남과 비교해서 적게 가졌다는 빈곤감은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에 대한 비하감을 심어주어 심한 경우 좌절감을 넘어 우울증의 상태까지 이끌어갈 수 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지 못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해를 끼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또 이 빈곤감은 사회적으로 볼 때 사회적 통합을 해쳐 사회의 뿌리를 흔들 수도 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계층간 차이가 커지므로 인해 상대적 빈곤감이 증폭될 때,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대적 빈곤감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분석을 하면 나름대로 교회가 취해야 할 대안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I. 상대적 빈곤감의 원인
1. 공평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찾아온다.
  근대화의 초기에는 절대빈곤의 해결이 중심과제였다. 이때의 기본과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굶지 않도록 하고 놀지 않도록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고 따라서 자본을 마련하고 이것을 서둘러 투자화하는데 모든 노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효율을 중시하는 이런 경제 상황에서 공평의 문제는 가볍게 취급되었고, 오히려 공평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한가한 소리로 들렸다. 축적과 투자는 되도록 빨리, 그리고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시켜야 해야 했고 되도록 빨리, 그리고 되도록 많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70년대까지의 우리 경제가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고 절대빈곤문제가 해결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의 욕구는 끼니를 때우려는 생존욕구에서 또 다른 욕구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의 욕구불만은 경제성장률이 낮다든지, 생활수준의 향상이 느리다든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평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경제가 성장효율만을 추구해 온 나머지 욕구충족의 균형이 잡히지 못한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라디오도 귀하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오늘의 컬러 TV를 보고 스스로의 생활향상을 대견해할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사람들은 과거의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종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나와 남, 그리고 우리나라와 남의 나라를 횡적으로 비교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가 성장한다든지 생활의 절대수준이 개선된다고 해도,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는 만족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으나, 상대적 빈곤감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부나 기업이나 또는 개인들도 모두 효율만 따지려는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 예를 들면, 많은 정책입안자들은 농촌에 돈을 들이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 돈으로 공장을 짓는 경우에 비해서 경제성장률도 낮고 수출효과도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수리시설을 하고 경지정리를 하고 농촌생활환경을 개선해 주는 데 쓸 돈이 있으면 이것으로 중화학이나 첨단산업을 하는 쪽이 효과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효율만 따지고 공평에 대한 사회적 욕구를 가볍게 생각하는 데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경제가치관의 경직성 때문에 경제의 소외지대가 커지는 것이다. 중소기업인들이 가지는 불만, 노사관계에서 노동자들이 가지는 불만, 빈부격차에 대해서 느끼는 국민의 소외감..... 이들 수없이 많은 우리의 욕구불만과 상대적 빈곤감이 모두 공평의 문제를 경시하는 경제운용과 관계되는 것이다.

  앞으로 경쟁이 더욱 심해지는 세계화 시대가 되면서, 이 공평의 문제 역시 더욱 심해질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정보화, 지식화 사회로 21세기에 대한 희망도 크지만, 또한 소득 격차가 벌어져 고소득층 20%와 저소득층 80%로 나뉘어지는 소위 20대 80의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학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수년을 주기로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경제위기는 이러한 사회구조의 양극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사회보장 혜택의 축소와 임금삭감이 경제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살기 좋아지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많은 근로자들은 저임금의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고,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공평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므로 상대적 박탈감이나 빈곤감을 크게 느끼게 될 것이다.


2. 소비주의 문화가 상대적 빈곤감을 더욱 크게 만든다.
  우리 경제는 절대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고소득 사회에 진입하면서 소비문화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 식생활이 고급화되고 소비재 수입이 급증하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해외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는가 하면 헬스클럽과 볼링장, 골프장, 스키장, 사치스런 유흥업소 등이 크게 번창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의 개념으로서 상품을 구입하던 차원에서 벗어나, 상류층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여 "소비를 통한 행복"이라는 인생관이 확립되고 "소비가 미덕이 되는 사회"의 생활양식이 일반화되면서 허위 욕구와 과잉 기대의 심리가 확산되어 이제는 "근검, 절약, 자선"의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개신교 윤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환영을 받지 못하는 위기에 처하였다. 여기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의 폭이 깊어지게 되고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빈곤감이 생기게 된다.

  소비주의 문화는 인간의 행복은 소비를 통한 욕망의 충족의 결과로서 얻게 되며,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소속감은 소비를 통해 스스로 과시할 수 있으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여기에 덧붙여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체면의식과 허례허식주의가 작용하여 과소비 풍조를 낳게 한다) 이러한 소비주의 문화는 소비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만들기 때문에 개인의 주체성은 그의 소유와 동일시된다. 소비지향적 인간은 더욱 많은 것, 더욱 새로운 것을 소유하기를 갈망하며 이를 위하여 발버둥친다. 나의 존재는 내가 입는 것, 먹는 것, 소비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인간이 철저하게 외적인 기준에 의하여 그 가치가 판단된다. 이렇듯 소비주의 문화는 존재의 본질 자체가 소유하는 것이며, 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의미라고 가르친다.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존욕구는 절대적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스스로 만족하는 포화점이 있고 한계가 있는 단선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소비문화에서의 향락욕구는 포화점이 없는 다원적 욕구이다.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뿐 아니라, 남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상대적 우위 욕구까지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제하지 않으면 끝없이 확산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특히 나라 경제의 저성장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저승진, 봉급의 저속상승, 아니 많은 직장인들이 상시적으로 퇴출의 위기까지 맞고 있는 오늘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에게 익숙해져온 이런 소비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게 만든다.


II. 상대적 빈곤감의 해결방안
1. 현실에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늘 부딪치는 높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인 것처럼, 상대방이 가진 것과의 비교 또는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욕구와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의 만족은 욕구수준과 공급수준이라는 두 날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데, 바라는 것만큼 공급능력도 키울 수 있다면 욕구의 팽창은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나 줄 수 있는 힘이 욕구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이때에는 욕구 쪽을 다스려야 할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늘 부딪치는 현실이고 특히 지금 우리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서 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욕구 쪽을 다스리는 일은 소홀히 하고 모두가 공급능력을 키워서 만족을 얻으려고만 노력해 왔다. 그래서 모두가 성장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고 그 결과로 욕구불만은 더 커지는 현상이 되풀이되어 온 것이다. 정부나 기업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도성장을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정의와 도덕성이 흐려지고 빈부격차가 커지게 되었던 것이며, 이것은 나아가 새로운 욕구불만을 낳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족할줄 모르는 지나친 욕심을 줄여야 한다. 예를 들어, 1인당 소득이 우리의 2배가 넘는 홍콩 사람들의 6할이 7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식구가 많은 사람은 이 단칸방에 2층 또는 3층의 침대를 놓고 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20평짜리 주택도 좁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 사람들의 소득이 우리의 4배이지만 우리보다도 좁은 집에서 더욱 검소하게 살고 있음을 보고 우리의 욕심이 지나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욕구를 절제하는 개인, 욕구를 다스리는 가정, 욕구를 자제하는 사회, 그리고 이러한 분수를 가르치는 교육이 되어야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고 도덕성이 되살아날 것이다.

  인도의 성현 라마크리슈나가 남긴 말은 이런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게 만든다.

  숲속은 가시덤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맨발로 걷기는 불가능하다. 이 가시덤불 속을 지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방법을 가정할 수 있다. 첫째, 숲 전체를 가죽으로 덮는 방법 그리고 또 하나는 두 발을 가죽 구두로 보호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숲 전체를 가죽으로 덮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보행자의 두 발만을 가죽 구두로 보호하는 게 보다 현명한 방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수많은 욕망과 바람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는 이 모든 욕망과 바람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이 있고, 둘째로는 이 모든 욕망 속으로 들어가서 남김없이 욕망과 바람을 충족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 모든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고 나면 연쇄반응으로 또 다른 욕망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많은 욕망들을 최소한 축소시켜 만족을 구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 그리고 나머지 욕망을 진리 추구 쪽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보다 현명한 길이다.

  교회에서도 신앙적으로 이런 면을 잘 해석하고 가르쳐야 한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우리 인간의 유한성과 소외의 상황에 들어오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조건을 나누시면서 우리의 준거 구조를 취하셨다." 그렇다면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수용(self-acceptance)이란 것도 그 존재론적 뿌리를 이와 같은 기독교 신앙 안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초는 죄와 절망과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이를 받아주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수용인 것이다. 마틴 루터의 말을 빌면,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고(simul justus et peccator), 죄가 가득차 있음에도 분명히 수용되어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는 이런 귀한 존재인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또는 재능면에서 남과 비교해서 부족함이 있다고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워하고 빈곤감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이것은 잘못된 삶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교만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비교는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했는데 남과 비교하게 될 때,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것은 우리 자신을 비하시키고 남을 향할 때는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 안에서 늘 느끼며 살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기독교신앙을 바로 가르칠 때 오늘날 경제적인 문제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문제의 근본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2. 현실을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자신의 현실 모습, 또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나, 이것은 이제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다. 상대적 빈곤감에 빠진 이를 교회가 치유하기 위해서는 클라인벨(H. Clinebell)이 제시한 방법론처럼 전인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올바른 치유를 위해서는 개인의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조직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적인 것이므로 서로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적 빈곤감이 심리적으로 또는 더나아가 신앙적 차원에서 있는 그대로 자기를 받아들임으로 극복되었다 하더라도, 사회구조적으로 이런 현상이 생기지 않도록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사회정치 구조 문제, 사회복지제도 문제, 조세 제도 등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평신도들을 통해서 또는 교회차원에서 대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필자가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여기서는 오늘날 상대적 빈곤감을 가장 크게 유발시키고 있는 부의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해 보고자 한다.

  지금 우리 경제가 당면한 근본 문제는 경기가 나쁘다든지, 물가가 오른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배에 탔다는 생각이 희박하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나와 비교해서 부유한 사람을 보았을 때, 돈을 모은 사람이 그만큼 사회에 기여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의 부는 나의 이익과 보완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사람의 부가 나의 이익에 설사 도움이 안되더라도 적어도 나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 사람들이 남의 부에 대해서 축복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고 여기서 부에 대한 사회적인 존경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와 비판하는 눈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기보다는, 남의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자기도 열심히 노력해서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을 할 수 있는 즉 부가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회를 이룩하도록 교회는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해 부유한 자와 권력 있는 자들이 겸손하고 정직하도록 가르쳐야 하며, 의로운 질서, 공평한 질서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정의와 공평을 위해 사회참여활동, 예를 들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복지제도나 조세의 형평성을 위한 정책 등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이런 것이 의약분업 사태에서 보여지듯이 비록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교회가 할 수 있는 실천적 측면에서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 그동안 개교회 중심의 외형적 성장에 치중하고, 왜곡된 기복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철저하게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부정과 부패에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되는 것을 많이 보아 온 것이 현실이다. 또한 돈과 권력 있는 자를 가난하고 약한 자보다 우대했고, 교회의 자원을 사회정의 실현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바로 사용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한반도에 불어닥친 경제위기의 고통, 북한동포들의 굶주림, 세계 인구중 매년 1,800만명이 굶어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나눔과 섬김의 원리로 청빈의 삶을 힘써 살지 못한 잘못에 대해서도 뉘우쳐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가려고 교회가 노력할 때, 상대적 빈곤감의 문제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서도 해결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전인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온전히 회복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나오면서
  비록 우리가 아무리 소유했다 할지라도 가진 만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욕구가 더욱 많아지게 되고, 그 만큼 더 많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음으로 인하여 그만큼 더 불행해 하는 모습을 우리는 주위에서 보게 된다. 더욱이 경제가 어려워지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의 욕구와 현실 사이에는 점점 큰 차이가 벌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상대적 빈곤감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자들이며,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욕심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됨을 가르치며, 예수 그리스도는 무소유와 자기 비움을 몸소 보여주셨다. 이런 신앙의 가치관이 뒤바뀌게 될 때, 인간은 경제에 종속되며, 상대적 빈곤감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늘날 소비주의 문화의 향락욕구를 추구하는 가치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인간은 경제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회복시킬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와 같이 인간의 바른 모습을 늘 가르쳐야 할 것이며, 더나아가 사람들을 온전하게 돌보기 위해, 사회를 향해서도 열린 마음을 갖고 공의로운 사회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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