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회의 산동선교
2006. 7. 4. 21:47ㆍ선교자료/2.중국선교자료
한국 장로교회의 산동선교
중국의 동부, 황해바다 만곡부로 툭 튀어나온 산동반도와 그 내륙 화북평야 일대에 위치한 상동성. 황하 의 하류지대로 농토가 비옥하여 인구밀도가 높고, 예로부터 지척인 한국과 황해수로를 통한 잦은 내왕 이 있던 지역이다.
한국 장로교총회는 1913년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인을 정식 선교사로 이곳에 파송했다. 이 일은 한국교회가 외국에 나가 현지인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벌인 첫 예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한국교회 상황은 백만명구령운동 실패(1910년)와 '백오인사건'(1911년)의 여파로 전체 교인 수는 줄어든 반면 목사 장로 및 예배처소의 수는 오히려 증가하는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숙으로 전환하는 시기 였다(「한국교회 발전사」). 즉 종래의 시대적 바람을 타고 입교한 교인들은 떨어져 나가고 교회가 비정치화 비사회화되는 한편으로 이전보다 내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조직화되어 가던 때였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지만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외지선교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독노회 창설로 조직을 정비한 장로교의 첫 사업중의 하나도 이기풍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일이었다. 이어 1900년에는 한석진목사를 일본 유학생 선교사로, 최관홀 목사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선교사로, 이듬해에는 김영제 목사를 북간도 선교사로 보내 동포선교를 벌였다. 물론 감리교도 만주에 이화춘목사 배성식·손정도 목사 등을 파송했고 기타 교파들도 자체 선교를 일찍부터 벌였다. 그러나 순외국인 상대 선교는 산동선교가 최초였다.
중원문명의 발원지이며 공자와 맹자의 출생지이기도 한 산동은 전통적으로 유교의 영향이 강한 곳으로 장기간에 걸친 미국선교사들의 사업도 결실을 맺지 못하던 곳이었다. 중국과 기독교와의 관계를 보면 일찍이 '네스토리우스파'는 당나라 때 이미 유입되어 상당한 교세를 떨쳤고 천주교는 13세기 원나라 때 프란체스코회가 16세기에 들어 서구 과학문명과 함께 예수회가 들어왔다.
개신교는 1807년 영국선교회의 모리슨을 첫 선교사로 하여 의화단사건 등으로 숱한 선교의 피를 흘린 끝에 20세기초에는 교인 25만명, 병원 6백여곳, 고등교육기관 5백여곳의 교세를 이룩했다.
박태로등 3인 내양현에
산동선교가 시작된 1913년은 중국도 정치적 불안기였다. 신해혁명(1911년)으로 남쪽은 국민당의 중화민국이 탄생, 기독교인 쑨원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북쪽은 청조 중앙정부가 무너지고 위안스카이를 두목으로 하는 군벌들이 할거하던 때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관장지역에서 자의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사병을 두고 권력투쟁을 벌였다. 병들고 가난한 백성들의 민생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런 지경에서 박태로 등 세 선교사는 그해 11월, 한국교회의 요청을 수락한 중화예수교장로회가 그들에게 할당해준 산동반도의 요충지 내양현에 도착, 서문안에 중국인 가옥 한 채를 세내어 중국말을 익히는 것으로 선교에 착수했다. 그들은 1년여만에 '세례교인 3명등 40여명의 신도'를 모으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언어 및 산동지역에 관한 사전지식이 부족한데다 사업을 벌이자마자 닥친 기근과 풍토병으로 동행한 가족들이 질병에 걸리는 등 여러 어려움에 봉착했다.
총회는 사전조사가 불충분했음을 공감하고 산동선교의 재추진을 결의했다. 총회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발의한 인물이 방효원 목사. 초대신자 방만준의 아들로 평북 선천의 미션계 신성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산동선교에 헌신하다 35년 상해한인 교회를 거쳐 선천남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 북한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월남, 53년 피란지 부산에서 별세한 인물이다.
그는 조사 겸 통역 김병규와 가족을 데리고 현지에 부임, '복음당'이란 간판을 걸고 선교를 재개했다. 이어 홍승한, 이듬해엔 박상순선교사가 파송되고 1919년에는 의사 김윤식이 내양에 병원을 개설했다. 이에 따라 산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20년 내양에 새 교회당 건물을 마련했고. 성경학원을 세워 본토인 목회지도 양성하기 시작했다. 평도 즉묵현의 일부를 이양받아 선교지역이 더욱 확장되었다.
1932년 단독노회 창설
한국 선교사들은 부임 즉시 중국교회로 소속을 옮겼고 교회도 현지 노회소속으로 개척했으므로 중국교회로부터 호감을 샀다. 오늘날 해외선교와 관련, 눈 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또 이것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본국교회 소속을 견지했던 구미선교사들과도 대비된다. 산동교회는 성탄절에는 불우한 이웃을 교회로 초대해 푸짐한 음식을 대접하는 등 주민들의 큰 신뢰를 얻었다. 선교사들은 부흥사경회도 잇달아 열었다.
특히 선교사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없던 헌금제도를 실시, 교회부흥의 재정적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주현칙에 이어 안준호의사가 의료활동에 가세, 선교회 직영 맹인학교도 개설했고 애린학교, 애도학교등 육영사업도 펼쳤다.
마침내 1932년에는 단독 내양노회를 창설할 만큼 교세가 성장했다. 이는 본격적인 산동선교 10년만에 이룬 쾌거로 이웃성공회뿐 아니라 중국교회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다. 이런 쾌거를 이룩한 데는 일정 장소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벌이는 좌당전도 외에 포도단 이라는 전도대를 조직해 환등기 유성기 천막을 갖고 여행하며 전도하는 유행전도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참고로 1932년 교세를 보면 교회 51곳, 교인 1천3백24명이었다.
그러나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던 교회는 1930년대 항일투쟁등 중국의 불안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중일전쟁(1937년) 이후부터 사정은 극히 악화됐다. 대부분 선교사들은 귀국 했고 그해 파송받은 방효원목사의 아들 방지일 목사도 현지 부임을 못할 지경이었다. 내양에 있는 선교사 사택들은 중국인들에게 약탈당하고 교회도 다수 파괴되었다. 1940년이후 활동은 재개했으나 사정은 전만 못했다.
특히 2차대전 종전이후 중국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하고부터는 선교활동은 거의 전면 중단상태였다. 모든 교회는 폐쇄되고 건물은 학교나 공장, 마구간 등으로 사용되었다. 많은 교인들이 박해를 받아 처형되는 와중에도 방지일 목사는 끝까지 전도에 전념하다 1957년 6월 홍콩으로 추방되었다. 이로써 산동선교는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산동선교는 중국공산당 결성이후 1930년대 중국사회에 만연된 반종교 특히 반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한국선교사들이 침략자 일본의 치안우산 아래서 활동을 전개해 현지인의 일부 반감을 샀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교회사적으로는 여러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일이었다.
20년간 중국선교에 몸소 애쓴 방지일목사는 "한국교회가 피선교 30년만에 인적 물적 공히 자력으로 외국선교에 나셨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며 "이는 세계 선교사에 유례가 없는 큰 자랑거리"라고 말한다.
/전인철 기자(국민일보)
중국의 동부, 황해바다 만곡부로 툭 튀어나온 산동반도와 그 내륙 화북평야 일대에 위치한 상동성. 황하 의 하류지대로 농토가 비옥하여 인구밀도가 높고, 예로부터 지척인 한국과 황해수로를 통한 잦은 내왕 이 있던 지역이다.
한국 장로교총회는 1913년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인을 정식 선교사로 이곳에 파송했다. 이 일은 한국교회가 외국에 나가 현지인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벌인 첫 예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한국교회 상황은 백만명구령운동 실패(1910년)와 '백오인사건'(1911년)의 여파로 전체 교인 수는 줄어든 반면 목사 장로 및 예배처소의 수는 오히려 증가하는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숙으로 전환하는 시기 였다(「한국교회 발전사」). 즉 종래의 시대적 바람을 타고 입교한 교인들은 떨어져 나가고 교회가 비정치화 비사회화되는 한편으로 이전보다 내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조직화되어 가던 때였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지만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외지선교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독노회 창설로 조직을 정비한 장로교의 첫 사업중의 하나도 이기풍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일이었다. 이어 1900년에는 한석진목사를 일본 유학생 선교사로, 최관홀 목사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선교사로, 이듬해에는 김영제 목사를 북간도 선교사로 보내 동포선교를 벌였다. 물론 감리교도 만주에 이화춘목사 배성식·손정도 목사 등을 파송했고 기타 교파들도 자체 선교를 일찍부터 벌였다. 그러나 순외국인 상대 선교는 산동선교가 최초였다.
중원문명의 발원지이며 공자와 맹자의 출생지이기도 한 산동은 전통적으로 유교의 영향이 강한 곳으로 장기간에 걸친 미국선교사들의 사업도 결실을 맺지 못하던 곳이었다. 중국과 기독교와의 관계를 보면 일찍이 '네스토리우스파'는 당나라 때 이미 유입되어 상당한 교세를 떨쳤고 천주교는 13세기 원나라 때 프란체스코회가 16세기에 들어 서구 과학문명과 함께 예수회가 들어왔다.
개신교는 1807년 영국선교회의 모리슨을 첫 선교사로 하여 의화단사건 등으로 숱한 선교의 피를 흘린 끝에 20세기초에는 교인 25만명, 병원 6백여곳, 고등교육기관 5백여곳의 교세를 이룩했다.
박태로등 3인 내양현에
산동선교가 시작된 1913년은 중국도 정치적 불안기였다. 신해혁명(1911년)으로 남쪽은 국민당의 중화민국이 탄생, 기독교인 쑨원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북쪽은 청조 중앙정부가 무너지고 위안스카이를 두목으로 하는 군벌들이 할거하던 때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관장지역에서 자의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사병을 두고 권력투쟁을 벌였다. 병들고 가난한 백성들의 민생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런 지경에서 박태로 등 세 선교사는 그해 11월, 한국교회의 요청을 수락한 중화예수교장로회가 그들에게 할당해준 산동반도의 요충지 내양현에 도착, 서문안에 중국인 가옥 한 채를 세내어 중국말을 익히는 것으로 선교에 착수했다. 그들은 1년여만에 '세례교인 3명등 40여명의 신도'를 모으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언어 및 산동지역에 관한 사전지식이 부족한데다 사업을 벌이자마자 닥친 기근과 풍토병으로 동행한 가족들이 질병에 걸리는 등 여러 어려움에 봉착했다.
총회는 사전조사가 불충분했음을 공감하고 산동선교의 재추진을 결의했다. 총회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발의한 인물이 방효원 목사. 초대신자 방만준의 아들로 평북 선천의 미션계 신성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산동선교에 헌신하다 35년 상해한인 교회를 거쳐 선천남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 북한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월남, 53년 피란지 부산에서 별세한 인물이다.
그는 조사 겸 통역 김병규와 가족을 데리고 현지에 부임, '복음당'이란 간판을 걸고 선교를 재개했다. 이어 홍승한, 이듬해엔 박상순선교사가 파송되고 1919년에는 의사 김윤식이 내양에 병원을 개설했다. 이에 따라 산동선교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20년 내양에 새 교회당 건물을 마련했고. 성경학원을 세워 본토인 목회지도 양성하기 시작했다. 평도 즉묵현의 일부를 이양받아 선교지역이 더욱 확장되었다.
1932년 단독노회 창설
한국 선교사들은 부임 즉시 중국교회로 소속을 옮겼고 교회도 현지 노회소속으로 개척했으므로 중국교회로부터 호감을 샀다. 오늘날 해외선교와 관련, 눈 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또 이것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본국교회 소속을 견지했던 구미선교사들과도 대비된다. 산동교회는 성탄절에는 불우한 이웃을 교회로 초대해 푸짐한 음식을 대접하는 등 주민들의 큰 신뢰를 얻었다. 선교사들은 부흥사경회도 잇달아 열었다.
특히 선교사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없던 헌금제도를 실시, 교회부흥의 재정적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주현칙에 이어 안준호의사가 의료활동에 가세, 선교회 직영 맹인학교도 개설했고 애린학교, 애도학교등 육영사업도 펼쳤다.
마침내 1932년에는 단독 내양노회를 창설할 만큼 교세가 성장했다. 이는 본격적인 산동선교 10년만에 이룬 쾌거로 이웃성공회뿐 아니라 중국교회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다. 이런 쾌거를 이룩한 데는 일정 장소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벌이는 좌당전도 외에 포도단 이라는 전도대를 조직해 환등기 유성기 천막을 갖고 여행하며 전도하는 유행전도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참고로 1932년 교세를 보면 교회 51곳, 교인 1천3백24명이었다.
그러나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던 교회는 1930년대 항일투쟁등 중국의 불안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중일전쟁(1937년) 이후부터 사정은 극히 악화됐다. 대부분 선교사들은 귀국 했고 그해 파송받은 방효원목사의 아들 방지일 목사도 현지 부임을 못할 지경이었다. 내양에 있는 선교사 사택들은 중국인들에게 약탈당하고 교회도 다수 파괴되었다. 1940년이후 활동은 재개했으나 사정은 전만 못했다.
특히 2차대전 종전이후 중국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하고부터는 선교활동은 거의 전면 중단상태였다. 모든 교회는 폐쇄되고 건물은 학교나 공장, 마구간 등으로 사용되었다. 많은 교인들이 박해를 받아 처형되는 와중에도 방지일 목사는 끝까지 전도에 전념하다 1957년 6월 홍콩으로 추방되었다. 이로써 산동선교는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산동선교는 중국공산당 결성이후 1930년대 중국사회에 만연된 반종교 특히 반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한국선교사들이 침략자 일본의 치안우산 아래서 활동을 전개해 현지인의 일부 반감을 샀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교회사적으로는 여러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일이었다.
20년간 중국선교에 몸소 애쓴 방지일목사는 "한국교회가 피선교 30년만에 인적 물적 공히 자력으로 외국선교에 나셨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며 "이는 세계 선교사에 유례가 없는 큰 자랑거리"라고 말한다.
/전인철 기자(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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