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주께로 인도한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역정
2006. 7. 4. 21:44ㆍ선교자료/2.중국선교자료
중국을 주께로 인도한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역정
김귀춘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선교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실패’ 그 자체였다. 중국선교를 결심했을 때 약혼자와의 결별, 마침내 만난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가 중국선교중 결핵으로 죽음, 그것도 꽃다운 나이 33세에 아들 노엘을 낳다가 아들과 함께 천국으로 영원히 테일러의 곁을 떠났다. 그것도 부족했을까. 테일러가 가장 사랑하는 맏딸 그레이시의 죽음, 잇따른 아들 사무엘의 죽음, 그리고 또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 그 자신의 지병 결핵, 이질, 게다가 평생 그를 압박해온 수많은 핍박과 멸시. 그 흔한 대학졸업장은 커녕 평생 그가 몸담아왔지만 의학학위와 목사 학위 또한 그에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누구도 갖지 못한 진귀한 보물이 있었다. 일평생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다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죽어간 절개있는 믿음의 소유자.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이나 돈, 주변 사람들의 끈끈한 정을 단호히 절연하고 언제나 하나님 한 분만을 그의 애인이자 절대 목표로 삼고, 그렇게 살다간 지고지순한 열애자. 그러한 테일러였기에 위의 모든 시련은 그에게 잠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을 뿐이었다. 시련이 올수록, 연단의 강도가 높을수록 절망은 잠깐이었고, 영혼 더 깊은 곳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 전율하는 기쁨이 그를 지배했다. 인간의 눈으로 볼땐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때 분명 그는 위대한 성공자였다.
사랑은 위대하다
오늘의 주인공 테일러는 노랑머리에 코쟁이 영국사람이다. 미남도 아니었고 체구도 작고 몸도 연약했다. 하지만 두터운 신앙인인 그의 부모님은 테일러가 중국선교사로 나가길 갈망하여 어린시절부터 테일러에게 중국에 관한 선교열정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러나 노랑머리의 코쟁이가 피부색 머리색이 전혀 다른 중국 땅에 들어가 하나님을 전한다는 것은 때론 죽음을 초래하는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다. 테일러가 선교하던 때의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시내곳곳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난은 홍수전이 중국어 성경을 읽고 깊은 감화를 받아 중국을 기독교 나라로 만들려는 생각으로 정부군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 태평천국의 난 때문에 중국에선 선교사를 급하게 요청했고, 테일러는 의사 자격증을 가질 기회도 포기하고 중국을 향해 대장정길에 오르게 된다. 6개월의 죽음을 무릅쓴 긴 항해 끝에 도착했지만 중국선교회에서는 아무런 준비를 해두지 않고 있었다. 태평천국만 믿고 선교회의 후원을 일체 거부했던 테일러의 입장이 난감해졌다. 어느 누구도 단체도 그를 도울데는 없었고 일가친척하나 없는 낯선 땅 중국에서 그와 하나님만의 애절하고 열렬한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우문을 던져본다. 만약 체계적인 후원단체나 소속 단체가 분명하게 그에게 주어졌다면 그가 과연 그렇게 뜨겁고 열렬하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허허벌판 아무도없이 내버려진 고아와 같은 그의 삶에 하나님만이 전부였고, 그 사랑 때문에 중국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공자를 비롯한 유수한 학자들의 고결한 삶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는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건방지고 당돌하게 비춰지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목숨을 건 그의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사랑이 차가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100여명이 넘는 소속인원을 둔 선교회가 조직되어 중국 전역을 향한 체계적인 선교를 펼쳤다.
선교사 지망생들에게
테일러는 선교지망생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이 선교회나 자기와 친근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설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선교를 포기하십시오. 또한 우리 선교회의 신실하고 충성스런 멤버가 되려면 선량하고 경건한 사람들로부터의 조롱과 심지어는 적대에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은 내륙에 들어가 중국 옷을 입고 가능한 한 중국식으로 살아갈 준비가 온전히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조용하고 홀가분한 자세로 진득하게 사람들을 사랑할 사람들이 아니면 중국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선교사는 범사에 어느때든 예수님과 중국 영혼들을 첫째목표로 놓을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남자, 그런 여자가 있다면 너무 많을까봐 개의치 마시고 얼마든지 보내주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진주보다도 값진 사람들입니다.”
선교에 대한 테일러의 원칙이 있다. 1) 하나님의 충족하심을 의뢰하라 2) 아직 아무도 복음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라 3)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라 4) 믿는 자들을 가르치며 자국인 지도자를 훈련시키라
파산 없는 은행
중국사명에 대한 소명을 받은 테일러는 두 가지의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고생스러운 생활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적은 비용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적 근육들이 강건해져야 한다고 느꼈다. “중국에 가면 아무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가 없게된다. 오직 하나님께만 요구할 수 있을 뿐. 그렇다면 영국을 떠나기 전 오직 기도로 하나님을 통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마친 후 빈민촌에 있는 여러 셋집들을 방문하면서 복음전하고 밤10시경 마지막 심방을 마쳤을 때였다. 한 가난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자기아내가 죽어가고 있다면서 함께 가서 아내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청했다. 테일러는 쾌히 승낙하고 따라갔다. 그곳에는 너덧명의 아이들이 앙상한 볼과 이마를 내놓고 영양실조에 걸려있었고, 퀴퀴한 냄새나는 돗자리 위에는 다 죽어가는 여인이 태어난지 이틀도 채 안된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병원에 갈 돈이나 약을 살 돈도 심지어 한끼 때울 식사도 없었다. 이때 테일러의 가슴에 두 마음이 방망이질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돈이라곤 반 크라운짜리 은화 한 개가 전부이고, 집에는 저녁끼니만 있는데 어찌하나! 이 돈을 주고나면 내일 점심부터는 굶어야 하는데…” 또 한마음엔 “2실링 은화 하나와 6펜스가 있다면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2실링을 주고 나머지는 가질텐데”라며 저울질하고 있을 때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성령님의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하나님을 희롱하느냐? 호주머니에 반크라운짜리 은화를 가지고도 감히 무릎을 꿇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느냐?” 그 순간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는 말씀이 떠올랐고, 그는 그가 가진 반크라운짜리 은화 전부를 그들에게 주었다. 이때 테일러의 마음엔 점심끼니 걱정은커녕 물밀 듯이 샘솟는 기쁨이 밀려왔다.
덕분에 앓던 산모는 살아났고, 그 아기도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테일러는 무엇보다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다음날 아침 남은 한 그릇의 귀리죽을 먹으면서 그는 행복했다. 그때 문간에서 우체부 소리가 들렸고, 소포가 그의 손에 건네졌다. 열어보니 종이로 싼 어린이 장갑이 한 켤레 들어있었고, 그 장갑속에는 10실링짜리 금화하나가 들어있었다. 문득 조지 뮬러가 즐겨 사용했던 표현인 ‘파산이 없는 은행’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곳이야말로 자기의 전 소유를 맡겨 마땅한 곳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일은 그에게 믿음을 부쩍 자라게 했고, 중국선교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그의 기도대로 즉각 응답된 것은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그는 더 많은 돈과 인력을 위해 기도해야했고, 자신과의 부단한 투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테일러가 중국선교를 결심하고 나서 각종 풍파가 그를 이모양 저모양으로 위협했다. 먼저 낯선 동양의 땅 중국에서 일생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했을 때 극심한 아버지의 반대로 그의 약혼자가 돌아섰다. 2년 동안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의 여인, 목소리가 아름다워 같이 찬양하며 즐거워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가며 한참을 우울하고 뼈아픈 고통속에 신음해야 했다. 그러나 어릴때부터 중국선교를 향한 그의 불타는 정념은 그 어느것도 막을 수가 없었다. 약혼자의 돌아섬은 테일러에겐 청천병력이었지만 그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배웠고 영혼은 한층 성숙되이 익어갔다. 자신의 독기, 이기심, 욕망, 인간의 한계 등을 뼈속 깊이 회개하게 되었고, 그의 영혼은 한송이 백합화처럼 피어올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게 된다.
잇따른 핍박
개인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복음은 개인보다 가족을 우선으로 여기는 중국의 윤리와는 맞지 않았다. 테일러와 CIM선교사들은 해안 쪽으로부터 서양인들이 거의 가본적없는 지역들 쪽으로 돌아다니게 됨에 따라 더 많은 핍박을 받게 된다. 핍박은 대개 상류층 학자들의 선동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중국사회의 엘리트로서 학식과 교양을 갖춘 이들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의 원리를 삶 속에 실천하고자 애쓰며,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명의 찬연함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 엘리트층에 속한다는 것은 동시에 오랜 중국의 유전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뜻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들의 염려는 자신의 염려가 아닌 중국사회를 향한 염려였다. ‘개인의 회심이 사회구조 자체를 와해시키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들 학자입장에선 설교라고 하면서 남을 가르치려는 태도자체가 못마땅했다. 이러한 중국사회의 여건을 잘 아는 테일러는 그때부터 가르치려는 자세를 버리고 진짜 중국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자신의 노랑머리를 그들처럼 까맣게 염색을 하고 그들이 먹는 음식과 그들이 자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뒹굴며 호흡했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배척은 계속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태평군과 정부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 선교사들은 태평군이 승리해서 중국이 복음화되기를 바랬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정부군은 왕조를 태평군에게 빼앗길까봐 대항하며 외국인 거류지까지 무단 침입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미국과 영국의 심한 공격을 받기에 이르고 말았다. 상해의 정부군은 도시를 봉쇄하고 외국인 거류지로 들어가는 북문만 남겨놓게 했었다. 그래서 외국인이 성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처절한 상황이었다. 외국인이라면 모두가 숨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도 위험지역을 찾아다니며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려는 테일러의 열정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그러나 핍박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강도를 더해갔다. 선교사들의 창문에는 돌들이 날아들었고, 그들을 비난하는 출처불명의 말도 안되는 포스터들이 나붙었다.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예수교 산적 패거리’라고 지칭하는가하면 포스터에는 그들이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알을 도려내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으며 아이밴 여자의 배를 갈라 그걸로 약을 만드는 괴벽이 있다는 얘기 등을 써 붙였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이런 일들을 해명하느라 땀빼는 일도 힘들었지만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그의 내면적 갈등이었다. 1869년 여름내내 테일러는 사기가 뚝 떨어져있었다. 걸핏하면 짜증을 내었고, 매일매시간이 실패의 연속이었다. 아내 마리아와 오랫동안 떨어져지낸 것도 내적인 긴장을 더해주었고 8월에 도진 중병인 폐렴도 한몫 거들었다. 그는 선교회와 특히 자기자신에게 더 깊은 생명의 능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는 기도했고, 고민했고, 금식했고, 갖은 노력을 다해봤다. 성경을 더 주의깊게 읽는 한편 휴식과 묵상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도록 생활을 재정리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거의 매일 매시간 죄의식이 나를 짓눌렀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잘 될거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거해지지가 않았다. 나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했고 한시라도 내 마음을 주님께로부터 떼어놓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살았다. 그러나 의무들이 주는 압박감과 어느 때는 힘을 쭉쭉 빠지게 하는 견딜 수 없는 방해거리들이 잇따라 터져 나로 하여금 그분을 잊게 만들었다. 그런 분위기속에 휩싸이게 되면 짜증이나 터무니없는 잡생각이나 불친절한 말들은 더더욱 절제하기가 힘들어진다. 날마다 남는 거라고는 죄와 실패, 그리고 무기력한 내 모습뿐이었다. 참으로 원함은 내게 있으나 행할 능은 없었다.”
이러한 고통으로 절망하고 있을 때 그의 동료 존 맥카시의 편지는 그에게 큰 힘을 준다. 존 맥카시는 “모든 것 되시는 그리스도”라는 책의 일부를 그에게 건넨 것이다.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거룩함의 시작이고 주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것은 거룩함의 성장이며 주 예수님을 늘 곁에 계신 분으로 의뢰하는 것은 거룩함의 완성이다. 자기가 그리스도안에서 죽었으며 그분 안에서 자기의 죄의 삯이 다 치러졌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경건한 생활의 가장 높은 고지로 올라가게 된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가장 많은 부분까지 모신 사람, 그리고 이미 다 이루어진 일 속에서 가장 온전하게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 우리의 발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온전치 못한 믿음이다.”
맥카시의 편지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신다”라는 한 문장이 허드슨의 눈의 껍질을 벗겨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라는 복된 진리가 그의 전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멍에 대신 자유, 실패대신 조용한 내적승리, 불안함과 두려움 대신에 주안에서 느끼는 충분한 안식, 그러한 것들이 그를 온통 지배했다.
이런 기쁨은 환경의 형통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우린 흔히 환경이 형통하고 쭉쭉 풀려야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말들을 성경 여러 곳에서 뒤집어엎는다. 영혼이 잘되야 범사가 잘되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관점은 형통한 환경이나 장미빛 탄탄 대로가 아니다. 그런 것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영혼이 잘되고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데에 분명한 초점과 목표를 두었다. 테일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테일러가 얻은 자유, 평강, 기쁨은 환경이 형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험난한 환경이 겹겹이 그의 주위를 엄습했다. 아이들 중에 제일 귀엽던 맏딸(8세) 그레이시가 약해지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침에 잠이 깨면 제일 먼저 달려와 인사를 하고, 테일러가 산보를 할때는 경쾌한 걸음으로 동반해주던 사랑하는 딸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보다 구원받은 그레이시를 데려가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중국에는 학교가 없어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영국으로 보내고자 아이들을 전송하기 위해 상해 해안으로 가는 배속에서 막내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때 테일러는 그의 선교동지 버거부부에게 이렇게 쓴다. “저는 오늘 사랑하는 아이들과 중국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아이들 중 둘에 대해서는 이제 전혀 근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 품안에서 쉬고 있습니다. 저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지만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천로역정은 말 그대로 험난했다. 테일러 부인은 아들을 낳은 후 콜레라가 발병하여 아이가 태어난지 1주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산모도 얼마안있어 33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테일러는 부부간에 쌓인 두터운 애정 때문에 서로 헤어질 것이라는 것은 아예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12년 반동안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사랑하는 아내에 대해서는 한번도 실망해 본적이 없었다. 부인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테일러는 그녀와 함께 행복한 시절을 12년동안 살게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주님의 영원하신 존전으로 데려가심에 대해 감사하며, 자신의 남은 여생을 주님을 위해 더욱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테일러가 데즈가라즈에게 쓴 편지다. “나의 갈길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나의 봉사가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가족을 잃은 슬픔이 아무리 클지라도, 나의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해도 내가 아무리 힘이 없을지라도, 나의 영혼의 갈증이 아무리 클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며 그 이상을 해주십니다. 양자강보다 더 힘이있고 더욱 깊으며 더욱 넘치는 강물이 흘러나옵니다. 가뭄이 오면 시냇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운하까지도 메말라 버리지만 양자강은 결코 메마르지 않습니다. 깊은 물은 항상 흐르고 있으며 아무도 이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안식을 말했던가
1900년의 의화단의 난이 기본적으로 반기독교 운동이었다기보다는 반외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때 수난을 겪은 주요 인물들은 선교사들과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북경 지역에서만도 15,000-20,000명 가량의 가톨릭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두명의 주교와 많은 신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 전역을 통털어 130명이 넘는 개신교 선교사들과 50명이 넘는 선교사 자녀들이 목숨을 잃었다. 테일러의 소속인 CIM은 58명의 선교사와 21명의 선교사 자녀를 잃었다. 의화단은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제2의 귀신들’이라 부르면서 그들을 중국 및 중국문화에 대항하는 반역자로 몰아 죽임을 당한 중국인 개신교 신자들의 총수는 거의 2,000명을 헤아렸다. 칠순의 나이로 쇠약한 상태에서 다보스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 테일러에게 의화단 소식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는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의 살인 폭도들을 떠나 그분의 존전, 그분의 품, 그분의 미소 속으로 안겨들어갈 때의 그 황홀한 기쁨이 어떤 것이었겠는지 좀 생각해보렴.”
의화단의 탄압기간동안 중국의 가톨릭 및 개신교 선교사들이 보여준 용단과 신앙적 절개는 너무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죽음앞에서 단 한명의 선교사도 신앙을 포기하거나 전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더욱 강건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목숨을 내놓았다. 대다수의 중국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단 한가지 행동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믿음앞에 절개를 지켰다. 그들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기에 참으로 합당한 이들이었다. 테일러의 말년, 죽음을 앞둔 그의 고백이다. “나는 읽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심지어 기도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주님을 의뢰할 수는 있다.”
누가 안식을 말했던가?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아버지의 일을 하는 나에게 땅위에 그 무슨 안식 있으리.
이 땅에 나를 보내시고 이 땅에서 그날을 기다리게 하시며
그때까지 당신의 일을 맡겨주신 그분, 그분은 내게 은혜 또한 후히 주시리
일할 수 있는 은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 그러나 안식의 은혜는 아직 아니리.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김귀춘 편집부장 (그리스도복음신문 2003.3월호)
김귀춘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선교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실패’ 그 자체였다. 중국선교를 결심했을 때 약혼자와의 결별, 마침내 만난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가 중국선교중 결핵으로 죽음, 그것도 꽃다운 나이 33세에 아들 노엘을 낳다가 아들과 함께 천국으로 영원히 테일러의 곁을 떠났다. 그것도 부족했을까. 테일러가 가장 사랑하는 맏딸 그레이시의 죽음, 잇따른 아들 사무엘의 죽음, 그리고 또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 그 자신의 지병 결핵, 이질, 게다가 평생 그를 압박해온 수많은 핍박과 멸시. 그 흔한 대학졸업장은 커녕 평생 그가 몸담아왔지만 의학학위와 목사 학위 또한 그에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누구도 갖지 못한 진귀한 보물이 있었다. 일평생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다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죽어간 절개있는 믿음의 소유자.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이나 돈, 주변 사람들의 끈끈한 정을 단호히 절연하고 언제나 하나님 한 분만을 그의 애인이자 절대 목표로 삼고, 그렇게 살다간 지고지순한 열애자. 그러한 테일러였기에 위의 모든 시련은 그에게 잠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을 뿐이었다. 시련이 올수록, 연단의 강도가 높을수록 절망은 잠깐이었고, 영혼 더 깊은 곳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 전율하는 기쁨이 그를 지배했다. 인간의 눈으로 볼땐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때 분명 그는 위대한 성공자였다.
사랑은 위대하다
오늘의 주인공 테일러는 노랑머리에 코쟁이 영국사람이다. 미남도 아니었고 체구도 작고 몸도 연약했다. 하지만 두터운 신앙인인 그의 부모님은 테일러가 중국선교사로 나가길 갈망하여 어린시절부터 테일러에게 중국에 관한 선교열정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러나 노랑머리의 코쟁이가 피부색 머리색이 전혀 다른 중국 땅에 들어가 하나님을 전한다는 것은 때론 죽음을 초래하는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다. 테일러가 선교하던 때의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시내곳곳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난은 홍수전이 중국어 성경을 읽고 깊은 감화를 받아 중국을 기독교 나라로 만들려는 생각으로 정부군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 태평천국의 난 때문에 중국에선 선교사를 급하게 요청했고, 테일러는 의사 자격증을 가질 기회도 포기하고 중국을 향해 대장정길에 오르게 된다. 6개월의 죽음을 무릅쓴 긴 항해 끝에 도착했지만 중국선교회에서는 아무런 준비를 해두지 않고 있었다. 태평천국만 믿고 선교회의 후원을 일체 거부했던 테일러의 입장이 난감해졌다. 어느 누구도 단체도 그를 도울데는 없었고 일가친척하나 없는 낯선 땅 중국에서 그와 하나님만의 애절하고 열렬한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우문을 던져본다. 만약 체계적인 후원단체나 소속 단체가 분명하게 그에게 주어졌다면 그가 과연 그렇게 뜨겁고 열렬하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허허벌판 아무도없이 내버려진 고아와 같은 그의 삶에 하나님만이 전부였고, 그 사랑 때문에 중국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공자를 비롯한 유수한 학자들의 고결한 삶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는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건방지고 당돌하게 비춰지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목숨을 건 그의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사랑이 차가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100여명이 넘는 소속인원을 둔 선교회가 조직되어 중국 전역을 향한 체계적인 선교를 펼쳤다.
선교사 지망생들에게
테일러는 선교지망생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이 선교회나 자기와 친근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설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선교를 포기하십시오. 또한 우리 선교회의 신실하고 충성스런 멤버가 되려면 선량하고 경건한 사람들로부터의 조롱과 심지어는 적대에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은 내륙에 들어가 중국 옷을 입고 가능한 한 중국식으로 살아갈 준비가 온전히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조용하고 홀가분한 자세로 진득하게 사람들을 사랑할 사람들이 아니면 중국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선교사는 범사에 어느때든 예수님과 중국 영혼들을 첫째목표로 놓을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남자, 그런 여자가 있다면 너무 많을까봐 개의치 마시고 얼마든지 보내주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진주보다도 값진 사람들입니다.”
선교에 대한 테일러의 원칙이 있다. 1) 하나님의 충족하심을 의뢰하라 2) 아직 아무도 복음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라 3)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라 4) 믿는 자들을 가르치며 자국인 지도자를 훈련시키라
파산 없는 은행
중국사명에 대한 소명을 받은 테일러는 두 가지의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고생스러운 생활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적은 비용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적 근육들이 강건해져야 한다고 느꼈다. “중국에 가면 아무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가 없게된다. 오직 하나님께만 요구할 수 있을 뿐. 그렇다면 영국을 떠나기 전 오직 기도로 하나님을 통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마친 후 빈민촌에 있는 여러 셋집들을 방문하면서 복음전하고 밤10시경 마지막 심방을 마쳤을 때였다. 한 가난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자기아내가 죽어가고 있다면서 함께 가서 아내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청했다. 테일러는 쾌히 승낙하고 따라갔다. 그곳에는 너덧명의 아이들이 앙상한 볼과 이마를 내놓고 영양실조에 걸려있었고, 퀴퀴한 냄새나는 돗자리 위에는 다 죽어가는 여인이 태어난지 이틀도 채 안된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병원에 갈 돈이나 약을 살 돈도 심지어 한끼 때울 식사도 없었다. 이때 테일러의 가슴에 두 마음이 방망이질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돈이라곤 반 크라운짜리 은화 한 개가 전부이고, 집에는 저녁끼니만 있는데 어찌하나! 이 돈을 주고나면 내일 점심부터는 굶어야 하는데…” 또 한마음엔 “2실링 은화 하나와 6펜스가 있다면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2실링을 주고 나머지는 가질텐데”라며 저울질하고 있을 때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성령님의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하나님을 희롱하느냐? 호주머니에 반크라운짜리 은화를 가지고도 감히 무릎을 꿇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느냐?” 그 순간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는 말씀이 떠올랐고, 그는 그가 가진 반크라운짜리 은화 전부를 그들에게 주었다. 이때 테일러의 마음엔 점심끼니 걱정은커녕 물밀 듯이 샘솟는 기쁨이 밀려왔다.
덕분에 앓던 산모는 살아났고, 그 아기도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테일러는 무엇보다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다음날 아침 남은 한 그릇의 귀리죽을 먹으면서 그는 행복했다. 그때 문간에서 우체부 소리가 들렸고, 소포가 그의 손에 건네졌다. 열어보니 종이로 싼 어린이 장갑이 한 켤레 들어있었고, 그 장갑속에는 10실링짜리 금화하나가 들어있었다. 문득 조지 뮬러가 즐겨 사용했던 표현인 ‘파산이 없는 은행’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곳이야말로 자기의 전 소유를 맡겨 마땅한 곳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일은 그에게 믿음을 부쩍 자라게 했고, 중국선교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그의 기도대로 즉각 응답된 것은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그는 더 많은 돈과 인력을 위해 기도해야했고, 자신과의 부단한 투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테일러가 중국선교를 결심하고 나서 각종 풍파가 그를 이모양 저모양으로 위협했다. 먼저 낯선 동양의 땅 중국에서 일생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했을 때 극심한 아버지의 반대로 그의 약혼자가 돌아섰다. 2년 동안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의 여인, 목소리가 아름다워 같이 찬양하며 즐거워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가며 한참을 우울하고 뼈아픈 고통속에 신음해야 했다. 그러나 어릴때부터 중국선교를 향한 그의 불타는 정념은 그 어느것도 막을 수가 없었다. 약혼자의 돌아섬은 테일러에겐 청천병력이었지만 그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배웠고 영혼은 한층 성숙되이 익어갔다. 자신의 독기, 이기심, 욕망, 인간의 한계 등을 뼈속 깊이 회개하게 되었고, 그의 영혼은 한송이 백합화처럼 피어올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게 된다.
잇따른 핍박
개인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복음은 개인보다 가족을 우선으로 여기는 중국의 윤리와는 맞지 않았다. 테일러와 CIM선교사들은 해안 쪽으로부터 서양인들이 거의 가본적없는 지역들 쪽으로 돌아다니게 됨에 따라 더 많은 핍박을 받게 된다. 핍박은 대개 상류층 학자들의 선동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중국사회의 엘리트로서 학식과 교양을 갖춘 이들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의 원리를 삶 속에 실천하고자 애쓰며,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명의 찬연함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 엘리트층에 속한다는 것은 동시에 오랜 중국의 유전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뜻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들의 염려는 자신의 염려가 아닌 중국사회를 향한 염려였다. ‘개인의 회심이 사회구조 자체를 와해시키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들 학자입장에선 설교라고 하면서 남을 가르치려는 태도자체가 못마땅했다. 이러한 중국사회의 여건을 잘 아는 테일러는 그때부터 가르치려는 자세를 버리고 진짜 중국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자신의 노랑머리를 그들처럼 까맣게 염색을 하고 그들이 먹는 음식과 그들이 자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뒹굴며 호흡했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배척은 계속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태평군과 정부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 선교사들은 태평군이 승리해서 중국이 복음화되기를 바랬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정부군은 왕조를 태평군에게 빼앗길까봐 대항하며 외국인 거류지까지 무단 침입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미국과 영국의 심한 공격을 받기에 이르고 말았다. 상해의 정부군은 도시를 봉쇄하고 외국인 거류지로 들어가는 북문만 남겨놓게 했었다. 그래서 외국인이 성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처절한 상황이었다. 외국인이라면 모두가 숨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도 위험지역을 찾아다니며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려는 테일러의 열정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그러나 핍박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강도를 더해갔다. 선교사들의 창문에는 돌들이 날아들었고, 그들을 비난하는 출처불명의 말도 안되는 포스터들이 나붙었다.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예수교 산적 패거리’라고 지칭하는가하면 포스터에는 그들이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알을 도려내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으며 아이밴 여자의 배를 갈라 그걸로 약을 만드는 괴벽이 있다는 얘기 등을 써 붙였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이런 일들을 해명하느라 땀빼는 일도 힘들었지만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그의 내면적 갈등이었다. 1869년 여름내내 테일러는 사기가 뚝 떨어져있었다. 걸핏하면 짜증을 내었고, 매일매시간이 실패의 연속이었다. 아내 마리아와 오랫동안 떨어져지낸 것도 내적인 긴장을 더해주었고 8월에 도진 중병인 폐렴도 한몫 거들었다. 그는 선교회와 특히 자기자신에게 더 깊은 생명의 능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는 기도했고, 고민했고, 금식했고, 갖은 노력을 다해봤다. 성경을 더 주의깊게 읽는 한편 휴식과 묵상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도록 생활을 재정리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거의 매일 매시간 죄의식이 나를 짓눌렀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잘 될거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거해지지가 않았다. 나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했고 한시라도 내 마음을 주님께로부터 떼어놓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살았다. 그러나 의무들이 주는 압박감과 어느 때는 힘을 쭉쭉 빠지게 하는 견딜 수 없는 방해거리들이 잇따라 터져 나로 하여금 그분을 잊게 만들었다. 그런 분위기속에 휩싸이게 되면 짜증이나 터무니없는 잡생각이나 불친절한 말들은 더더욱 절제하기가 힘들어진다. 날마다 남는 거라고는 죄와 실패, 그리고 무기력한 내 모습뿐이었다. 참으로 원함은 내게 있으나 행할 능은 없었다.”
이러한 고통으로 절망하고 있을 때 그의 동료 존 맥카시의 편지는 그에게 큰 힘을 준다. 존 맥카시는 “모든 것 되시는 그리스도”라는 책의 일부를 그에게 건넨 것이다.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거룩함의 시작이고 주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것은 거룩함의 성장이며 주 예수님을 늘 곁에 계신 분으로 의뢰하는 것은 거룩함의 완성이다. 자기가 그리스도안에서 죽었으며 그분 안에서 자기의 죄의 삯이 다 치러졌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경건한 생활의 가장 높은 고지로 올라가게 된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가장 많은 부분까지 모신 사람, 그리고 이미 다 이루어진 일 속에서 가장 온전하게 기뻐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 우리의 발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온전치 못한 믿음이다.”
맥카시의 편지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신다”라는 한 문장이 허드슨의 눈의 껍질을 벗겨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라는 복된 진리가 그의 전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멍에 대신 자유, 실패대신 조용한 내적승리, 불안함과 두려움 대신에 주안에서 느끼는 충분한 안식, 그러한 것들이 그를 온통 지배했다.
이런 기쁨은 환경의 형통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우린 흔히 환경이 형통하고 쭉쭉 풀려야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말들을 성경 여러 곳에서 뒤집어엎는다. 영혼이 잘되야 범사가 잘되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관점은 형통한 환경이나 장미빛 탄탄 대로가 아니다. 그런 것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영혼이 잘되고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데에 분명한 초점과 목표를 두었다. 테일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테일러가 얻은 자유, 평강, 기쁨은 환경이 형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험난한 환경이 겹겹이 그의 주위를 엄습했다. 아이들 중에 제일 귀엽던 맏딸(8세) 그레이시가 약해지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침에 잠이 깨면 제일 먼저 달려와 인사를 하고, 테일러가 산보를 할때는 경쾌한 걸음으로 동반해주던 사랑하는 딸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보다 구원받은 그레이시를 데려가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중국에는 학교가 없어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영국으로 보내고자 아이들을 전송하기 위해 상해 해안으로 가는 배속에서 막내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때 테일러는 그의 선교동지 버거부부에게 이렇게 쓴다. “저는 오늘 사랑하는 아이들과 중국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아이들 중 둘에 대해서는 이제 전혀 근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 품안에서 쉬고 있습니다. 저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지만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천로역정은 말 그대로 험난했다. 테일러 부인은 아들을 낳은 후 콜레라가 발병하여 아이가 태어난지 1주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산모도 얼마안있어 33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테일러는 부부간에 쌓인 두터운 애정 때문에 서로 헤어질 것이라는 것은 아예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12년 반동안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사랑하는 아내에 대해서는 한번도 실망해 본적이 없었다. 부인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테일러는 그녀와 함께 행복한 시절을 12년동안 살게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주님의 영원하신 존전으로 데려가심에 대해 감사하며, 자신의 남은 여생을 주님을 위해 더욱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테일러가 데즈가라즈에게 쓴 편지다. “나의 갈길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나의 봉사가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가족을 잃은 슬픔이 아무리 클지라도, 나의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해도 내가 아무리 힘이 없을지라도, 나의 영혼의 갈증이 아무리 클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며 그 이상을 해주십니다. 양자강보다 더 힘이있고 더욱 깊으며 더욱 넘치는 강물이 흘러나옵니다. 가뭄이 오면 시냇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운하까지도 메말라 버리지만 양자강은 결코 메마르지 않습니다. 깊은 물은 항상 흐르고 있으며 아무도 이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안식을 말했던가
1900년의 의화단의 난이 기본적으로 반기독교 운동이었다기보다는 반외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때 수난을 겪은 주요 인물들은 선교사들과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북경 지역에서만도 15,000-20,000명 가량의 가톨릭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두명의 주교와 많은 신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 전역을 통털어 130명이 넘는 개신교 선교사들과 50명이 넘는 선교사 자녀들이 목숨을 잃었다. 테일러의 소속인 CIM은 58명의 선교사와 21명의 선교사 자녀를 잃었다. 의화단은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제2의 귀신들’이라 부르면서 그들을 중국 및 중국문화에 대항하는 반역자로 몰아 죽임을 당한 중국인 개신교 신자들의 총수는 거의 2,000명을 헤아렸다. 칠순의 나이로 쇠약한 상태에서 다보스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 테일러에게 의화단 소식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는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의 살인 폭도들을 떠나 그분의 존전, 그분의 품, 그분의 미소 속으로 안겨들어갈 때의 그 황홀한 기쁨이 어떤 것이었겠는지 좀 생각해보렴.”
의화단의 탄압기간동안 중국의 가톨릭 및 개신교 선교사들이 보여준 용단과 신앙적 절개는 너무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죽음앞에서 단 한명의 선교사도 신앙을 포기하거나 전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더욱 강건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목숨을 내놓았다. 대다수의 중국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단 한가지 행동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믿음앞에 절개를 지켰다. 그들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기에 참으로 합당한 이들이었다. 테일러의 말년, 죽음을 앞둔 그의 고백이다. “나는 읽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심지어 기도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주님을 의뢰할 수는 있다.”
누가 안식을 말했던가?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아버지의 일을 하는 나에게 땅위에 그 무슨 안식 있으리.
이 땅에 나를 보내시고 이 땅에서 그날을 기다리게 하시며
그때까지 당신의 일을 맡겨주신 그분, 그분은 내게 은혜 또한 후히 주시리
일할 수 있는 은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 그러나 안식의 은혜는 아직 아니리.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김귀춘 편집부장 (그리스도복음신문 2003.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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