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보아산 (삼상31:1-13)
2006. 1. 28. 00:01ㆍ목양자료/3.강해설교
길보아산 (삼상31:1-13) 초점:인본주의 최후 이 시간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길보아산"입니다. 길보아산은 '솟아나는 샘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이 산은 이름만 들어도 은혜가 펑펑 솓아지는 산입니다. 이 산은 실제로 산림이 울창한 산입니다. 그런데 이 산은 사울왕이 최후를 마친 마지막 산이기도 합니다. 사울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를 따르던 수많은 백성들과 그의 세 아들도 거기서 블레셋 군대에 의해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머리와 갑옷은 블레셋 사방에 보내져 놀림감이 되고 갑옷은 우상의 신전 아스다롯에 보내지고 그 머리는 벧산 성벽에 내걸려졌습니다. 참으로 비극의 길보아산입니다. 그래서 나중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이 활노래라는 이름의 슬픈 조가를 지어 부르도록 했습니다. 그럼 길보아산의 사울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인본주의의 최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삼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구했습니다. 삼상8:4-5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했습니다. 이 요구를 들은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며 제왕 제도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도 왕이 있어야 전쟁의 날 열방과 같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 싸움을 싸을 것이라고 하면서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생겨진 것이 인간 왕제도였습니다. 사실 인간 왕이 없었을 때는 사무엘이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뢰를 발하사 원수 블레셋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모두 제 본연의 위치에서 평화롭게 지내다가 난국시에 나팔소리를 듣고 나가 싸울지라도 하나님을 왕으로 받들 때는 항상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왕이 된 후부터는 불필요한 많은 비용과 수고와 고통이 따르고 내부적인 문제들이 야기됨과 아울러 싸우면 승리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중요한 요충지들을 적에게 내어주는 꼴이 되고 말았고 그 결과 많은 백성들이 죽고 경제 활동이 마비되었습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이 나서는 곳에는 가시적으로는 득이한 듯해도 그 결말은 항상 고통입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학1:6-9) 고 지적하셨습니다. 신앙생활 안하면 편할 것 같지요? 그러나 이것이 나를 파멸로 이끄는 일이요 내 심령을 죽이는 길입니다. 또 기도 안하면 잠도 더 자고 편할 것 같지요? 그러나 이것은 성문을 열고 시험을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혹은 헌금 안하면 그 돈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 같지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십일조는 바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안 바치면 어떤 변통이 생겨서라도 고통스럽게 바칠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경험 속에서 이 말이 사실이라고 긍정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롬8:6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생각 육신 중심의 인본주의의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나 보세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하려 할 때 처음에는 출발이 순탄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풍우 대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3:18-20에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 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대로 하고 항상 성령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하나님께 여쭈었느냐의 차이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세운 인간 왕으로 인해 부르짖을 일이 있어도 응답해 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삼상8:18). 이처럼 인간 중심으로만 나가는 사람들 앞길은 참으로 암담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길보아산의 사울의 최후는 인본주의의 비극적인 종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이 산은 교만의 최후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본문 1-2절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했습니다. 이 비극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교만한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이 예언은 삼상 13장에서 사울이 스스로 번제를 집행했을 때(삼상13:13-14), 또 한 번은 삼상 15장에서 여호와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남겨 놓았을 때 주어졌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한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삼상15:22-23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런 사울이었지만 본래 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겸손하고 외모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움을 받은지 채 1년도 못되어 자기를 위하여 군대를 뽑고 자기의 통치 기반만을 든든히 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으며 일생 자기의 왕위를 지키려고 다윗만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아의 존재를 의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 사울은 자기를 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울을 찾을 때 그는 우수꽝스럽게도 행구 사이에 숨었었습니다. 삭게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간 이치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나를 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가장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약4:6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죄가 교만죄입니다.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된 것도 교만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시퍼에게 기름부어 주시고 한 없는 영광을 주시었건만 겸손하기는 커녕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용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습니다(벧후2:4). 그런데 아직 사단의 활동이 있는 것에 대해 박형룡박사는 그의 조직신학 신론에서 우선 그 중 일부가 감금된 것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사울도 자기의 권세 유지를 위해 교만하더니 여호와께 버림을 받았고 남들보다 어께 위만큼 크다고 우쭐대더니 결국 그 목이 잘려지고 말았고 자기 위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생 다윗을 쫓아 다니더니 결국은 자기 칼에 죽고 말았으며 그토록 무할례자들 앞에서 위신을 생각하더니 결국 그의 갑옷도 빼앗기고 그의 머리는 적국의 성벽의 못에 내 걸려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교만죄의 최후입니다. 3. 우리는 사울의 다른 면 즉 그의 신본주의와 겸손을 봅니다. 본문 11-13절에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했습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울의 다른 면에 주의를 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기간은 짧았지만 사울에게도 신본주의와 겸손이 주장할 때가 있었고 그 여운을 그가 비록 죽었으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상11장을 보면 암몬왕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칠 때 화친을 거부하고 모두 죽이든지 모두 오른쪽 눈을 뺀 다음에 화친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식을 안 사울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백성을 이끌고 가서 암몬을 쳐서 야베스를 기적적으로 구했습니다. 이 일은 온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했었습니다. 그러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이 죽어 그 시체가 블레셋의 벧산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가서 취해 와(삼상31:11-13) 그 시체를 화장하여 그 뼈를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7일을 금식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은 그가 죽었어도 성령의 감동으로 한 신본주의의 결과는 길이 길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한 일만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가 됩니다. 그래서 요일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더라도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영원한 하늘의 상으로 남게 됩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길보아산에서 사울의 인본주의와 교만의 결말과 아울러 그의 신본주의와 겸손의 결말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인본주의를 택하면 길보아산의 비극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신본주의를 택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나아가 영원히 그의 기억하신 바가 됩니다. 이 두 가지의 사실을 길보아산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신본주의와 겸손의 길을 택하여 죽음의 길보아산이 아니라 그 이름 그대로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과 같은 축복의 길보아산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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