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불행을 다오.
2006. 1. 26. 00:54ㆍ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신헌철(申憲澈.59) SK(주) 사장은 유난히 눈물 많은 경영자다. 신중한 표정과 조심스런 몸가짐에는 오랜 신산(辛酸)을 견뎌낸 수양의 흔적들이 묻어난다.
유년시절은 불우했다. 1955년 울릉도를 오가며 해산물 수송일을 하던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신 사장이 부산 해운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는 남동생 우철(부산지방법원 판사)씨, 여동생 홍란 씨와 함께 시장에서 건어 물 장사를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가던 홀어머니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쳐다 봐야 했다. 초콜릿과 사탕은 미군이 운영하는 동네 교회에서 얻어 먹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가난한 학생들이 흔히 그랬듯이 신 사장도 은행원의 꿈을 안고 상고에 진학했다. 부산상고 시절 반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당시 부산출신의 기업가 김지태 씨가 운영하던 "백양장학회"의 장학생이 됐다. 이 때 같이 장학금을 받았던 사람들이 한 학년 아래의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 부장, 두 학년 아래의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편안한 길을 안내하지 않았다.
1963년 겨울 지금도 절친한 친구인 부산상고 동기 이성태 현 한국은행 부총재와 함께 서울 상대에 도전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당시 서울대 상대에 수석 입한한 이 부총재는"헌철아,너무 실망말거라.내년에 시험 다시 쳐서 서울에서 만나자"고 위로했지만 1964년의 재도전에서도 그는 실 패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자신보다 못한 학교 성적으로도 너끈히 합격했던 친구들을 보며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다시 1965년 겨울이 왔다.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터였지만 그는 이번에도 낙방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 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감은 불길했고 몸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안전하게" 연세대나 고려대를 지원할 수도 있었으나 사립대학은 등록금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귀착지는 부산대 상대였다.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결론 내렸어요. "어떤 대학이든 내 하 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2년을 허송세월했다는 자책감이 찾아왔다. 결국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해병대(1백79기)에 자원 입대를 하게 됐다.
해병대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간단했다.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2개월 정도 짧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시에 찌들대로 찌든 그가 해병대의 강도높은 훈련을 이겨내기는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동료들과 보트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을 달릴 때는 허벅지 근육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을 끼기도 했습니다. 또 배는 얼마나 고팠던지.." 하지만 그의 인생 스케줄은 제대를 4개월 앞둔 1968년 1월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하면서 또다시 구겨졌다. 전 사병의 제대가 무기한 연기된 것.뒤이어 8월에 실미도 북파공작원의 서울 진격사건, 10월에 울진 무장간첩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정신없이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결국 복무예정기간 26개월보다 7개월이 많은 33개월이 지나서야 군복을 벗었다 .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지요" 지금의 신 사장은 잇따른 대입 낙방과 해병대 생활을 "내 인생 최대의 비료"라고 말한다. 고통을 참고 어려운 세월을 인내하는 지혜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성취와 보람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1972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대한석유공사에 입사했다. 은행과 신문사 한 곳에도 동시에 합격했지만 발길은 유공으로 향했다. 처음 맡은 업무는 판매기획과의 마케팅.전국을 돌아다니며 신규 주유소 부지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월급은 4만6천5백원으로 삼성물산(4만2천5백원)보다 많았지만 무척 고생스러웠다.
주유소 자리를 찾아 험한 산자락도 마다않다보니 죽을 고비도 여러차례 넘겼다 . 1974년엔 마산의 한 야산에서 운전중이던 차가 굴렀다. 온 몸의 뼈마디가 부서진 듯 아팠고 차는 박살이 났다. 마침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부리나케 달려온 동료가 권하는 커피 한 잔을 받아든 그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웬지 서러웠습니다. 걱정해주던 상사와 동료들이 고맙기도 했고."
부장 승진이 워낙 빨랐던 탓에 이사 승진은 상대적으로 늦었다. 1991년 SK가스 영업담당 이사와 상무를 거치며 순조로운 회사 생활을 이어갔다 . 1993년엔 하남신도시 조성계획에 따라 강제 수용될 뻔한 위기를 맞은 팔당대교 인근의 충전소를 지켜내는 전과를 올렸다.
경영자로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1995년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 수도권마케팅 본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SK그룹이 기름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 사장을 신흥 경쟁시장인 통신 시장에 투입 한 것. 매일 새벽 2시에 퇴근해 집에서 옷만 갈아입고 출근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1996년 55만명이던 CDMA 가입자는 1998년 7백만명으로 증가했다. 대성공이었다. 주요소나 통신시장이나 남보다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 선점을 하는 것이 중요하 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1998년엔 휴대전화로 국제전화를 걸 수 있는 SK텔링크 사장으로 옮겨갔다. 취임 2년만에 매출을 2배로 키우고 별정통신업계의 확고부동한 1위 업체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거칠 것 없던 그의 장년에 뜻하지 않은 복병이 찾아왔다. 1998년말 어느날 갑자기 무릎이 아파왔다. 진단결과는 퇴행성 관절염.필드를 나가면 제대로 걷질못해 퍼터를 지팡이 삼아 서있어야 할 정도였다.
"경영인은 건강하지 못하면 즉각 퇴출되는 것 아닙니까. 이제 내 인생도 끝이 라는 생각이 들데요. 저의 상심한 모습을 보고 아내도 매일 펑펑 울었어요" 관절염에 좋다는 온갖 약을 다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물리치료였다.회사에 출근하기 전 매일 물속에서 자전거타기와 스트레칭을 반복했다. 자전거타기는 3백65일 매일 한다는 각오로 3백65회,55세에 맞은 고비를 극복한 다는 자세로 서서 하는 스트레칭은 55회,33세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앉아서 하는 스트레칭은 33회를 했다.
그러던 중 2001년 유니세프가 주최한 국제아동돕기 행사에서 한국암웨이의 김희 진 전 부사장을 만난 것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김 전 부사장이 "퇴행성 관절염에는 마라톤이 최고"라고 권유한 것이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마라톤을 시작한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틀에 한번 꼴로 2개월동안 7.6km의 남산순환도로를 왕복으로 달렸다. 신기하게도 무릎 통증이 사라지고 몸에는 활력이 넘쳐났다. 신 사장은 그해 10월 동아 마라톤 대회에 처녀 출전해 42.195km를 4시간 39분만에 완주하는데 성공했다.
"38km 지점을 지나자 결승점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 졌습니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자 그곳에서 네시간이 넘도록 가슴 졸이며 서있 던 아내가 달려와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마라톤을 8차례 완주했고 4시간3분의 최고 기록을 갖고 있다.
신 사장은 지난 5월 장애 어린이들에게 회사 각종 행사에서 거둬진 성금을 전달 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삶의 여러 형태에서 걸러진 내 나름대로의 결론은 "가난과 불행은 성공을 위한 보약이며 선생님의 회초리"라는 것입니다. 당사자가 그런 환경을 모진 시간속 에서 어떻게 믿고 견디고 바라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일훈.김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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