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도 비켜간…''母子''
2006. 1. 25. 23:07ㆍ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큰비 끝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서울 변두리 어느 창고 앞마당. 망치로 큰 돌덩어리에 정을 수없이 내리치는 청년이 있다. 땀으로 온몸은 이미
흥건히 젖었다. 서울 동숭로에 다음달 초 세워질 작품 손질에 한창인 신예 조각가 신일수(31)씨다. 작품 제목은 ‘유영(游泳)’.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다. 이제 막 그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곁에 우산을 받쳐든 어머니 손성례(58)씨가 있다. 오늘이 있기까지
수없는 나날들을 가슴으로 울어야만 했던 모성(母性)이다.
말문을 트는 것이 더디다고 생각한 아이가 청각장애아라는 판정을 받았을 땐 세상이 그야말로 무너져내렸다. 그것을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어머니라는 이름. 다섯살배기를 등에 업고 구화학교를 찾았다. 거기엔 ‘농아도 말 할 수 있다’는 커다란 글씨가 입간판처럼 걸려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희망을 삼았다.
사물을 직접 보여주거나 그림카드·낱말카드를 만들어 말하는 입 모양을 훈련시켰다. 동물들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1주일에 한 번꼴로 동물원도 찾았다. 동물도감으로 공부한 것은 반드시 야외에 나가 직접 보고 만지게 하면서 말의 입 모양을 가르쳤다. ‘떨어지다’와 같은 동사를 익히게 하기 위해선 직접 배나 사과 등으로 시연해 보였다.
사이시옷 입모양을 만들어 주기 위해 호각불기, 촛불끄기, 알사탕 먹기도 수없이 했다. 어려서 입이 굳어지면 영영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은 엄마라는 소리를 한번만이라도 들어보는 것이었다. 아이를 위해 집은 온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심심풀이 먹을거리가 늘 준비된 장소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이번엔 음감이 문제였다. 도레미 화음을 팔등과 정강이를 피아노 건반 누르듯 하며 느끼도록 해주었다. 소리음은 어머니 목에 손등을 대 목떨림으로 가늠하게 했다. 멜로디언을 연주케 하고 옆에서 박자를 두드려 주었다. 이 같은 어머니의 정성은 피아노 체르니 40번까지 가능케 했다.
손씨는 자리 없는 귀갓길 버스에서 피곤해 지친 아이가 졸라치면 바닥에 신문을 깔고 끌어앉았다. 창피함은 사치였다.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시장통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은 어머니란 이름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식장은 물론 장례식장에도 늘 동행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죽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고아원 방문 등을 통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이 많음을 깨닫게 했다. 장애가 불행이 아니라 작은 불편이라는 점을 인식시켜 주었다.
가치관 교육도 사정은 비슷했다. 말이 아닌 손수 보여주는 길밖에 없었다.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아이 앞에서 행했다. 결과적으로 아이를 통해 바른 삶을 살아가는‘복’을 얻은 것이다.
어머니의 이런 노력들은 헛되지 않았다. 아들이 말을 하고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게 되면서 일반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어느 날 아들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가져왔다. 나도 이런 선생님처럼 작가가 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길로 화실에 데려가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싫어 아예 아이와 함께 그림을 배웠다. 1985년엔 현대미술공모전에서 최연장자로 입선했다. 내친김에 홍익대미술교육원에 입학해 97년 1기 졸업생이 됐다.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미술작품을 곁에서 접하게 해주기 위해 같은 해 아예 갤러리(청작화랑)를 개관했다. 아들을 데리고 자주 갔던 인연으로 청주에 거쳐하고 있던 운보는 전시기획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서양화 일색의 화랑 풍토에서 젊고 장래성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동양화 기획전의 작가들을 손수 선정해 주었을 정도. 이왈종 김병종 화백 등이 바로 그들이다.
아들 신일수씨는 말한다. 왜 엄마가 그토록 운보에게 데리고 갔는지 작가가 된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타계 1년 전 병석에서 운보는 “나처럼 할 수 있다”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구김살없이 성장한 그는 친구들 사이에선 마당발로 통한다. 대학 때 축제 파트너가 없으면 그에게 부탁하면 성사됐다. 현대고 재학 시절엔 영화배우 이정재와 단짝이었다. 고교 시절 입시 준비 중이던 미술반 선배들의 흙조각(테라코타)에 끌려 조각으로 진로를 정했다. 장애를 가진 그에게 대학 입시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더 높은 문턱이었다. 5수 끝에 상명대 조소과에 들어갔을 정도로 힘든 역정이었다. 이어 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어머니가 있어 오늘의 자신이 있다’는 그에게도 내면의 갈등이 없었을 리 없다. 말을 남들처럼 할 수 없다는 답답함에 어린 시절 방 안에 들어가 머리를 쥐어뜯고 뒹굴며 운 적도 많다. 어머니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성장의 고통쯤으로 지켜봐야 했던 가슴은 숯꺼멍이 됐으리라. 때론 어머니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몸부림친 적도 있다. 그럴 땐 어머니도 같이 머리채를 잡으며 눈물을 감추었다.
먹구름이 걷히고 땡볕이 다시 작업장에 내리쬔다. 서울 수색과 화전을 지나 고양 능곡 방향의 하천 둔덕 아래 자리잡은 조립식 창고를 월세 내 작업실로 쓰고 있다. 주변은 변두리의 황량함 그대로다. 이마에 돌가루와 땀이 범벅이 되어 안경알을 덮는다. 작업장을 찾는 어머니는 안쓰럽지만 대견한 마음에 지켜볼 뿐이다.
손은 망치 자국으로 터져 있다. 서너 번은 더 터지고 아물어야 작가가 된다는 전뢰진 대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돌조각은 집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잊게 해주어 좋다. 돌에 몰입하다 보면 또다른 세상이 그곳에 있다. 돌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작품으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신일수씨의 작품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는 평가는 어쩌면 당연하다. 긴 침묵의 터널을 지나며 담금질 된 내면이 작품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글 편완식, 사진 남제현기자
말문을 트는 것이 더디다고 생각한 아이가 청각장애아라는 판정을 받았을 땐 세상이 그야말로 무너져내렸다. 그것을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어머니라는 이름. 다섯살배기를 등에 업고 구화학교를 찾았다. 거기엔 ‘농아도 말 할 수 있다’는 커다란 글씨가 입간판처럼 걸려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희망을 삼았다.
사물을 직접 보여주거나 그림카드·낱말카드를 만들어 말하는 입 모양을 훈련시켰다. 동물들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1주일에 한 번꼴로 동물원도 찾았다. 동물도감으로 공부한 것은 반드시 야외에 나가 직접 보고 만지게 하면서 말의 입 모양을 가르쳤다. ‘떨어지다’와 같은 동사를 익히게 하기 위해선 직접 배나 사과 등으로 시연해 보였다.
사이시옷 입모양을 만들어 주기 위해 호각불기, 촛불끄기, 알사탕 먹기도 수없이 했다. 어려서 입이 굳어지면 영영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은 엄마라는 소리를 한번만이라도 들어보는 것이었다. 아이를 위해 집은 온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심심풀이 먹을거리가 늘 준비된 장소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이번엔 음감이 문제였다. 도레미 화음을 팔등과 정강이를 피아노 건반 누르듯 하며 느끼도록 해주었다. 소리음은 어머니 목에 손등을 대 목떨림으로 가늠하게 했다. 멜로디언을 연주케 하고 옆에서 박자를 두드려 주었다. 이 같은 어머니의 정성은 피아노 체르니 40번까지 가능케 했다.
손씨는 자리 없는 귀갓길 버스에서 피곤해 지친 아이가 졸라치면 바닥에 신문을 깔고 끌어앉았다. 창피함은 사치였다.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시장통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은 어머니란 이름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식장은 물론 장례식장에도 늘 동행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죽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고아원 방문 등을 통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이 많음을 깨닫게 했다. 장애가 불행이 아니라 작은 불편이라는 점을 인식시켜 주었다.
가치관 교육도 사정은 비슷했다. 말이 아닌 손수 보여주는 길밖에 없었다.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아이 앞에서 행했다. 결과적으로 아이를 통해 바른 삶을 살아가는‘복’을 얻은 것이다.
어머니의 이런 노력들은 헛되지 않았다. 아들이 말을 하고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게 되면서 일반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어느 날 아들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가져왔다. 나도 이런 선생님처럼 작가가 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길로 화실에 데려가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싫어 아예 아이와 함께 그림을 배웠다. 1985년엔 현대미술공모전에서 최연장자로 입선했다. 내친김에 홍익대미술교육원에 입학해 97년 1기 졸업생이 됐다.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미술작품을 곁에서 접하게 해주기 위해 같은 해 아예 갤러리(청작화랑)를 개관했다. 아들을 데리고 자주 갔던 인연으로 청주에 거쳐하고 있던 운보는 전시기획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서양화 일색의 화랑 풍토에서 젊고 장래성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동양화 기획전의 작가들을 손수 선정해 주었을 정도. 이왈종 김병종 화백 등이 바로 그들이다.
아들 신일수씨는 말한다. 왜 엄마가 그토록 운보에게 데리고 갔는지 작가가 된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타계 1년 전 병석에서 운보는 “나처럼 할 수 있다”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구김살없이 성장한 그는 친구들 사이에선 마당발로 통한다. 대학 때 축제 파트너가 없으면 그에게 부탁하면 성사됐다. 현대고 재학 시절엔 영화배우 이정재와 단짝이었다. 고교 시절 입시 준비 중이던 미술반 선배들의 흙조각(테라코타)에 끌려 조각으로 진로를 정했다. 장애를 가진 그에게 대학 입시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더 높은 문턱이었다. 5수 끝에 상명대 조소과에 들어갔을 정도로 힘든 역정이었다. 이어 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어머니가 있어 오늘의 자신이 있다’는 그에게도 내면의 갈등이 없었을 리 없다. 말을 남들처럼 할 수 없다는 답답함에 어린 시절 방 안에 들어가 머리를 쥐어뜯고 뒹굴며 운 적도 많다. 어머니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성장의 고통쯤으로 지켜봐야 했던 가슴은 숯꺼멍이 됐으리라. 때론 어머니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몸부림친 적도 있다. 그럴 땐 어머니도 같이 머리채를 잡으며 눈물을 감추었다.
먹구름이 걷히고 땡볕이 다시 작업장에 내리쬔다. 서울 수색과 화전을 지나 고양 능곡 방향의 하천 둔덕 아래 자리잡은 조립식 창고를 월세 내 작업실로 쓰고 있다. 주변은 변두리의 황량함 그대로다. 이마에 돌가루와 땀이 범벅이 되어 안경알을 덮는다. 작업장을 찾는 어머니는 안쓰럽지만 대견한 마음에 지켜볼 뿐이다.
손은 망치 자국으로 터져 있다. 서너 번은 더 터지고 아물어야 작가가 된다는 전뢰진 대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돌조각은 집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잊게 해주어 좋다. 돌에 몰입하다 보면 또다른 세상이 그곳에 있다. 돌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작품으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신일수씨의 작품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는 평가는 어쩌면 당연하다. 긴 침묵의 터널을 지나며 담금질 된 내면이 작품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글 편완식, 사진 남제현기자
'운영자자료 > 1.운영자 자료실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훌륭한 영적 안내자 (0) | 2006.01.26 |
---|---|
가난과 불행을 다오. (0) | 2006.01.26 |
찬송가 470장의 탄생 (0) | 2006.01.25 |
성냄을 다스리기 (0) | 2006.01.25 |
결혼한지 16년만에 낳은 아이 (0) | 2006.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