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돌파구다

2006. 1. 25. 22:30참고자료/4,예화자료

기도가 돌파구다

베드로는 3년 동안 따랐던 스승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스승이 아주 좋은 상황에 있을 때 부인했다면 또 모를까 가장 비참할 때, 십자가 처형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시점에서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닭이 울고 스승이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봅니다(눅22:61). 스승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칩니다. 스승은 그 비참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눈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그는 견딜 수 없어서 밖으로 뛰쳐나가 펑펑 통곡을 합니다.

스승이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불쌍해서 웁니다. 지금 묶여 있는 스승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마음껏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던 자기 자신이 그렇게 비참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위기입니다. 자타가 공인하던 스승의 수제자인 줄 알았는데 지금 이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 스승을 부인해도 자기만큼은 스승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는 데에까지도 가겠다(눅22:33)고 장담했는데 지금 이 정도로 추락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정말 혐오스럽습니다. “아, 내가 이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인격이 의심스럽고 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저히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이런 위기를 만납니다. 잘 믿는 줄 알았는데 힘 앞에서 여지없이 굴복합니다. 배신자라는 느낌이 듭니다.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절대로 남에게 손해 안 끼칠 것이라던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로 남의 인생을 파탄에 빠뜨립니다. 그러고도 꾸역꾸역 살아야 하는 자기 자신이 정말 역겹습니다.

크게 성공해서 이름도 날리고 남도 도와줄 줄 알았는데 지금 폭삭 망한 상태입니다. 영혼의 위기요, 인격의 위기요, 인생의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를 당해 보셨습니까. 지금 이런 위기 가운데 있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탠리 탬이라는 미국인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20세에 사업을 벌였는데 완전히 쪽박을 차고 말았습니다. 너무 실망이 컸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실망할 필요가 없느니라. 네 사업을 나에게 넘겨주면 내가 성공시켜 주리라.”

그는 주님께 서원했습니다. “주님이 만일 제 사업을 맡아서 성공시켜 주신다면 저는 사업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겠습니다.” 그는 37달러로 재기했는데 사업이 잘 풀려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서원을 기억하고는 아주 과감하게 자기 사업의 51%를 주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후 그의 사업은 거침없이 성장했고 그는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수많은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위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있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 받고 스승을 판 파렴치한입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하고 맙니다. 위기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파렴치한입니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이기고 더 유능하고 성숙한 일군으로 변신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마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유다는 위기 앞에서 후회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닫힌 미래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복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열린 미래입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나서 통곡했고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덤으로 달려갔고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셨을 때에는 바다로 풍덩 뛰어들어 헤엄쳐 주님한테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회복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중심을 아셨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실천한 힘이 그에게 없었다는 것도 주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지금 온천수처럼 끊임없이 퐁퐁 솟아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받아주시고 주님이 다시 써 주시길 바라는 갈망입니다.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성공해서 주님 앞에 당당히 서고 싶은 욕심입니다.

유다는 후회하고는 끝입니다. 마음이 거기서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은 주님을 향해 계속 끓어오릅니다. 주님에 의해 회복되고 복권되고 더 크게 쓰임받고 싶습니다. 그가 위기를 만나지 않았다면 주님을 향한 그의 열정은 이전의 수준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그의 열정이 더 크고 강렬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기는 기회입니다. 실패하지 않았다면 작은 성공에 그쳤겠지만 실패 때문에 더 크고 강렬한 갈망으로 주님한테 나아갑니다. 그래서 더 큰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실패 앞에서 후회하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회개하되 회복되고 복권되고 더 크게 쓰임받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전진하게 돼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주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를 회복시키시고 복권시키시고 더 큰 사명을 주십니다.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21:16). 결국 그는 하루에 3천 명을 회심시키는,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실패 앞에서 우리는 영혼의 위기, 인격의 위기, 인생의 위기를 겪습니다. 그러나 실패가 클수록 회복되고자 하는 갈망도 큽니다. 그래서 위기가 기회입니다.

젊은 트루엣 목사님은 오발로 친구 아놀드를 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엄청난 위기 앞에서 치명적인 절망감을 맞봐야 했지만 주님한테 다시 받아들여지고 다시 쓰임받고 싶은 갈망으로 일주일 내내 기도로 매달립니다.

드디어 주님이 꿈에서 그를 찾아오십니다. “두려워 말라. 이제부터 너는 내 사람이다.” 위기가 없었더라면 그는 아마 평범한 목사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통해 20세기 초 미국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었습니다.

계곡이 깊을수록 우리의 부르짖음이 큽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이 클수록 주님의 응답이 큽니다.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가 정유소를 운영하다가 광산업에도 손을 댔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투자자금을 몽땅 날리고 말았습니다.

광부들이 폭도로 변해서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자살을 떠올리다가 폐광 앞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십일조 생활을 해 왔는데 왜 이런 시련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 살아 계시다면 그 증거를 보여 주세요.”

그러자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그는 주위 사람들이 미쳤다고 수군거렸지만 폐광을 계속 파들어 갔습니다. 갑자기 검은 덩어리가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석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44세에 미국 석유산업의 90%를 차지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위기가 없었다면 그는 그저 평범한 광산업자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기는 그를 미국의 석유 왕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지금 위기중이십니까. 후회하고 마시겠습니까, 아니면 기도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86:7).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40:1-2).

위기는 기회입니다. 영적인 위기이든, 도덕적인 위기든, 관계적인 위기이든, 경제적인 위기든 위기는 기회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 빛납니다. 위기가 심할수록 주님을 향한 갈망은 더 커집니다. 갈망이 클수록 응답은 더 커집니다.

위기 앞에서 주저앉든지, 위기 앞에서 도약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주님이 회복시키시지 못할 위기는 없습니다. 위기의 돌파구는 우리의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