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모자회사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2006. 1. 25. 22:38ㆍ참고자료/4,예화자료
[사람들] “모자로 번돈 20% 사회기부가 신조”
세계 최대 모자회사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거지→미군부대 ‘쇼리’→가게 사환→사장
세계 최대 모자 회사인 영안모자 백성학 (白聖鶴·63) 회장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7일. 열 살 소년 백성학은 피란 가는 교회 형들을 배웅하기 위해 원산 갈마항으로 달려갔다. 나루터에서 손을 흔들던 백 회장은 형들이 건네주는 사탕을 받기 위해 잠깐 배에 옮겨 탔다가 영영 가족들과 이별했다.
“얼떨결에 묵호항에 도착한 후 3년 동안 거지 생활을 했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양아치 패거리에 들어갔다가 담배를 못 피운다는 이유로 두들겨맞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북한으로 가려고 무조건 북으로 걸어가다 강원도 홍천 인근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쓰러졌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어머니를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신문지에 싸인 찐빵 두 개를 발견, 이틀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후 다행히 한국군과 미군 부대에서 군인들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쇼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때 그를 돌봐준 사람이 같은 고아 출신의 ‘빌리’라는 미군이었다. 하지만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중 북한군이 쏜 포탄이 유류 저장고를 명중시키는 바람에 전신에 화상을 입는 중상을 당했다. 빌리는 죽어가는 그를 헬기에 태워 가장 좋다는 미군 병원에 입원시켰다.
19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백 회장은 15세 때 상경, 모자 가게 사환으로 취직했다. 그후 하루 18시간씩 일한 결과 19세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그는 편하고 멋있는 모자를 만들기 위해 종일 사람 머리 모양만 연구했다.
단골이 늘어가고 번창하던 그에게 닥친 다음 시련은 5·16 군사혁명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 국민에게 국민재건복을 입도록 하는 바람에 사치스러운 모자도 자취를 감춘 것.
“다른 모자 가게는 모두 문을 닫고 재고는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모두 망했다고 좌절했지만 저는 다르게 보았지요. 오히려 싼값에 고급 모자들을 왕창 사들여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사람들은 얼마 뒤 다시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좋은 모자를 갖고 있었던 곳은 백 회장의 가게뿐이었다. 이렇게 큰 돈을 벌어들인 백 회장은 영안모자를 세워 수출에 눈을 돌린다.
미국 수출로 승승장구하던 백 회장에게 또다시 큰 시련이 닥친다. 미국에 히피문화가 유행하면서 젊은이들이 청바지에 장발 차림으로 다니면서 모자를 멀리한 것이다. 백 회장은 미국 야구장에서 살 길을 찾았다. 미국 프로야구단이 팬들에게 멋있는 ‘스포츠 캡’을 제공하면 대히트를 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 이때부터 영안모자는 미국 프로 스포츠 구단의 모든 팬서비스용 모자를 휩쓸게 된다.
영안모자는 현재 미국에 3개 공장을 비롯, 코스타리카·중국·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전 세계에 14개 생산거점과 12개 판매법인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연간 만드는 모자 개수는 1억개가 넘고, 연간 모자 매출이 2억1000만달러에 달한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모자 제조업체. 북미시장 점유율만 70%에 이른다. 대우자동차 버스부문 인수에 이어 최근에는 세계적인 지게차 업체인 클라크 본사를 인수,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고합의 케미컬부문 인수도 추진 중이다.
성공한 백 회장은 전쟁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빌리와 감격스러운 해후도 했다. 86년부터 전직 FBI 요원에 부탁, 4년간 미국 전역을 샅샅이 뒤진 끝에 필라델피아에서 빌딩 청소부 겸 야간 관리인으로 일하던 빌리를 찾아낸 것.
“빌리에게 좋은 차와 집을 사주고, 자식들의 교육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빌리는 한사코 거절하더군요. 대신 빌리의 이름을 딴 ‘빌리 사랑의 집’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빌리 사랑의 집’은 백 회장이 강원도 홍천 6만평 부지에 만든 복지시설 백학마을에 있다. 백 회장이 사재를 털어 만든 이곳에는 고아원·양로원·병원·장애인 수용시설·자활공장이 들어서 있다.
『살아가는 데 신조라면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내가 번 돈의 20%는 무조건 다시 사회에 기부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은행 돈입니다. 은행 돈은 결국 국민 세금이기 때문에 가급적 쓰지 않고, 절대로 축내지도 않는다는 각오로 살고 있습니다.』
백 회장은 후에 북한의 어머니(김숙녀)가 아들을 위해 내내 기도를 했고,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다 숨졌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래서 백 회장은 어머니를 기리는 교회를 지어 이화여대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 독립기념관을 지을 때 5억원을 쾌척했으며, 학교법인 숭의학원을 창설, 숭의여자대학과 초·중·고등학교도 운영 중이다.
(金泳秀
세계 최대 모자회사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거지→미군부대 ‘쇼리’→가게 사환→사장
세계 최대 모자 회사인 영안모자 백성학 (白聖鶴·63) 회장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7일. 열 살 소년 백성학은 피란 가는 교회 형들을 배웅하기 위해 원산 갈마항으로 달려갔다. 나루터에서 손을 흔들던 백 회장은 형들이 건네주는 사탕을 받기 위해 잠깐 배에 옮겨 탔다가 영영 가족들과 이별했다.
“얼떨결에 묵호항에 도착한 후 3년 동안 거지 생활을 했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양아치 패거리에 들어갔다가 담배를 못 피운다는 이유로 두들겨맞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북한으로 가려고 무조건 북으로 걸어가다 강원도 홍천 인근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쓰러졌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어머니를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신문지에 싸인 찐빵 두 개를 발견, 이틀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후 다행히 한국군과 미군 부대에서 군인들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쇼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때 그를 돌봐준 사람이 같은 고아 출신의 ‘빌리’라는 미군이었다. 하지만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중 북한군이 쏜 포탄이 유류 저장고를 명중시키는 바람에 전신에 화상을 입는 중상을 당했다. 빌리는 죽어가는 그를 헬기에 태워 가장 좋다는 미군 병원에 입원시켰다.
19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백 회장은 15세 때 상경, 모자 가게 사환으로 취직했다. 그후 하루 18시간씩 일한 결과 19세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그는 편하고 멋있는 모자를 만들기 위해 종일 사람 머리 모양만 연구했다.
단골이 늘어가고 번창하던 그에게 닥친 다음 시련은 5·16 군사혁명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 국민에게 국민재건복을 입도록 하는 바람에 사치스러운 모자도 자취를 감춘 것.
“다른 모자 가게는 모두 문을 닫고 재고는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모두 망했다고 좌절했지만 저는 다르게 보았지요. 오히려 싼값에 고급 모자들을 왕창 사들여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사람들은 얼마 뒤 다시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좋은 모자를 갖고 있었던 곳은 백 회장의 가게뿐이었다. 이렇게 큰 돈을 벌어들인 백 회장은 영안모자를 세워 수출에 눈을 돌린다.
미국 수출로 승승장구하던 백 회장에게 또다시 큰 시련이 닥친다. 미국에 히피문화가 유행하면서 젊은이들이 청바지에 장발 차림으로 다니면서 모자를 멀리한 것이다. 백 회장은 미국 야구장에서 살 길을 찾았다. 미국 프로야구단이 팬들에게 멋있는 ‘스포츠 캡’을 제공하면 대히트를 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 이때부터 영안모자는 미국 프로 스포츠 구단의 모든 팬서비스용 모자를 휩쓸게 된다.
영안모자는 현재 미국에 3개 공장을 비롯, 코스타리카·중국·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전 세계에 14개 생산거점과 12개 판매법인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연간 만드는 모자 개수는 1억개가 넘고, 연간 모자 매출이 2억1000만달러에 달한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모자 제조업체. 북미시장 점유율만 70%에 이른다. 대우자동차 버스부문 인수에 이어 최근에는 세계적인 지게차 업체인 클라크 본사를 인수,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고합의 케미컬부문 인수도 추진 중이다.
성공한 백 회장은 전쟁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빌리와 감격스러운 해후도 했다. 86년부터 전직 FBI 요원에 부탁, 4년간 미국 전역을 샅샅이 뒤진 끝에 필라델피아에서 빌딩 청소부 겸 야간 관리인으로 일하던 빌리를 찾아낸 것.
“빌리에게 좋은 차와 집을 사주고, 자식들의 교육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빌리는 한사코 거절하더군요. 대신 빌리의 이름을 딴 ‘빌리 사랑의 집’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빌리 사랑의 집’은 백 회장이 강원도 홍천 6만평 부지에 만든 복지시설 백학마을에 있다. 백 회장이 사재를 털어 만든 이곳에는 고아원·양로원·병원·장애인 수용시설·자활공장이 들어서 있다.
『살아가는 데 신조라면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내가 번 돈의 20%는 무조건 다시 사회에 기부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은행 돈입니다. 은행 돈은 결국 국민 세금이기 때문에 가급적 쓰지 않고, 절대로 축내지도 않는다는 각오로 살고 있습니다.』
백 회장은 후에 북한의 어머니(김숙녀)가 아들을 위해 내내 기도를 했고,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다 숨졌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래서 백 회장은 어머니를 기리는 교회를 지어 이화여대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 독립기념관을 지을 때 5억원을 쾌척했으며, 학교법인 숭의학원을 창설, 숭의여자대학과 초·중·고등학교도 운영 중이다.
(金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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