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세계사

2006. 1. 3. 00:23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간추린 世界史

古代


(1) 고대 그리스의 사회와 문화

① 에게문명
*크레타문명.
고대 서양의 문명은 지중해에 자리잡은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지중해지역에서 최초의 고대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라, 에게해 남쪽에 살던 크레타인들이었다. 크레타문명의 전성기는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 사이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크레타인들은 그리스 본토에까지도 그 세력권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크레타인들은 계속되는 지진 등의 자연재해로 큰 손실을 입고 결국 그리스 본토에서 성장한 미케네인들에게 기원전 1400년경에 멸망하고 말았다.

*미케네문명.
최초의 그리스인이 건설한 문명이 바로 미케네문명이다. 미케네문명은 평화적인 크레타문명과는 달리 호전적인 기풍을 지닌 전사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400년경의 크레타정복, 기원전 1300년 중엽의 트로이공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동부 지중해의 가자로 성장했다.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700년에서 1400년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나 점차 쇠퇴하여 기원전 1100년경에 멸망했다. 그 후 약 300년 동안 그리스역사에서 암흑기라고 불려진다.

② 폴리스의 성립
폴리스의 형성은 암흑기의 불안한 시대에 자신들의 재산과 토지를 지키려는 군사적 공동체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군사적 요새가 발전하여 부근 주민들의 정치, 종교, 상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인근 해당지역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폴리스라는 국가였다. 폴리스는 소규모 국가였다. 폴리스들의 총 수는 적어도 500개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폴리스들은 그 면적이 우리나라 제주도 면적의 1/3에도 채 미치지 못했고 시민수도 5천 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 폴리스들은 규모는 작지만 각기 스스로 의사결정과 정책집행을 할 수 있는 독립된 국가였다.

③ 아테네의 민주정치
수많은 폴리스들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정치체제란 없다. 민주제를 발전시킨 아테네인이 있었는가 하면 과두제를 채택한 스파르타인도 있었다. 여기에서는 아테네의 민주정치의 특징을 살펴보자. 아테네 민주정치의 특징은
첫째, 그것이 폴리스라는 소규모 국가에서나 가능한 직접민주제였다는 점이다. 전체 시민들의 모임인 민회는 폴리스 국정의 핵심기구로서, 주요 관리를 선출하고 국가의 정책을 의결하였다. 입법·사법·행정 업무가 모두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둘째, 민주제가 실질적으로 운용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만한 경제적 역량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했는데, 생업과 가내노동을 노예들이 대행해 줌으로써 시민들은 부담 없이 국정을 논의하고 관리로 봉사할 수 있었다.
셋째, 아테네민주제가 추구하던 자유는 시민이라는 특권층만이 누리는 자유였다. 그 자유는 20세 이상의 성인남자만이 누리는 것이었고 여성, 노예, 외국인은 제외되었다.

④ 그리스 문화
그리스문화는 인간 개인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해하고 인간의 이성적인 힘을 인정하고자 노력한 그리스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문화는 합리주의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서양 전통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인의 문화가 서양문화의 원류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우선 문학과 철학을 들 수 있다. 문학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의 낭송시인 호메로스가 구전가요를 정리해 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서양문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그리스인은 유명한 역사가도 많이 배출했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려진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전쟁사」를 저술했고,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전쟁사」를 기술했다. 그리스철학은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지방에서 나타난 자연철학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에 대한 철학의 관심을 인간으로 돌린 것은 소피스트(sophist)들이었다. 소피스트들은 보편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인 상대주의를 표명했는데, 이는 프로타고라스가 말했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개인적인 판단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소피스트들의 이러한 상대주의를 공박하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한 철학자가 곧 소크라테스(Sokrates)였다. 그는 인간의 모든 신념과 행동이 합리적인 이성의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비합리적인 전통이나 미신, 신화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자 했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철학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완성자였다.


(2) 알렉산더 제국과 헬레니즘문화

① 알렉산더 제국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끝난 이후의 그리스는 폴리스들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이제 그리스인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도 스스로 해결할 역량을 잃었기 때문에 인접 강대국들의 간섭을 초래했다. 신흥 마케도니아왕국은 풍부한 자원과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원전 338년 그리스를 통일한 후 알렉산더의 페르시아제국 원정과 더불어 영토확장에 나섰다. 알렉산더는 원정 10년 만에 이집트, 페르시아와 인더스강 유역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다.

② 헬레니즘 문화
알렉산더는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문화의 보급에도 힘썼다. 자신의 부하들과 페르시아 여성들을 집단 결혼시키거나 수만의 페르시아인 젊은이들을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알렉산더가 병사한 기원전 323년으로부터 이집트왕국이 로마인에게 정복된 기원전 30년까지를 헬레니즘시대라고 부른다. 헬레니즘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단일체가 아닌 이질적인 문화들이 제각기 혼합된 세계였음에도 ‘헬레니즘 세계’라고 불려지는 것은 그 속에 그리스문화라는 공통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헬레니즘세계의 동서문화 융합정책은 그리스문화와 동방문화를 동등하게 교류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동방문화를 정복자의 문화인 그리스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성격이 강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문화는 폴리스와의 유대를 상실하고 개인주의화되거나 세계시민의식을 지향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헬레니즘문화는 그리스문화의 국제화된 모습이었다.


(3) 로마의 발전과 그 문화
① 로마의 공화정
*귀족적 공화정
기원전 8세기에 일부 라틴인들이 티베르강 유역에 조그만 촌락공동체를 세웠는데, 그것이 대로마제국의 시초였다.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을 수립했다. 세습에 의한 왕이 없어지고 민회에서 인민의 동의를 얻어 선출된 2인의 집정관이 1년간 국가를 대표하는 통치자 구실을 했다. 민회에서는 입법, 관리선출, 전쟁과 세금 등에 관한 국가정책이 의결되었는데, 민회에서는 토의나 표결과정에서 시민들의 평등한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고 토지귀족들의 권한이 더욱 우세했다. 로마공화정에서 실질적인 의결기관은 토지귀족들의 회의체인 원로원이었다. 로마의 공화정은 전통적인 혈통귀족들의 특권을 보호하는 체제로서 성립했던 것이다.

*민주적 공화정
기원전 494년에 로마의 평민들이 로마에 침입해 온 외적과의 전투를 거부하고 인근의 성산으로 철수하자 귀족들은 평면회를 조직하고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관직인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도록 인정했다. 이어서 기원전 449년에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십이표법이 제정되어 귀족들의 자의적인 법운용에 제동을 걸었다.

*포에니전쟁
로마인이 지중해세계로 팽창을 시작하면서 마주친 첫 상대는 카르타고인이었다. 당시 카르타고는 서부 지중해 제일의 강력한 해상국가였다. 이 카르타고와 로마가 서부 지중해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 바로 포에니전쟁이었다. 세 차례에 걸친 이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함으로써 서부 지중해에서 로마는 독보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라티푼디움 경영과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점령한 토지를 국유화하였는데, 유력자가 국유지를 사유화하면서 대토지 소유제로 발전하였다. 특히 정복활동의 증대에 따라 대량의 노예가 공급되자 기원전 2세기경부터 노예를 이용한 라티푼디움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로마의 대외 발전이 오히려 로마 사회 내부에 심각한 경제 문제를 야기시켜 시민 간의 빈부 차이가 심화되고, 중장보병이었던 중소 농민은 몰락하여 군사력의 위기가 초래되었다. 이에 그라쿠스 형제는 지배 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막고 빈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중소농민을 회생시키려 했으나 실패에 그쳤다.

② 로마의 제정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의 지배체제인 공화정을 마감짓고 새로 제정시대를 열었다. 장기간의 내전기를 수습한 아우구스투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제국의 전반적인 안정을 꾀하는 일이었다. 그는 군인정치가의 재등장을 막기 위해 군대조직을 정비하여 자신이 로마군의 최고통수권을 장악했으며, 속주에는 상비군을 주둔시켜 국방과 치안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시민의 편의를 위한 공공시설들을 건설하였으며, 속주통치제도를 개선하여 내치의 안정을 이루었다. 로마를 안정과 번영으로 이끈 아우구스투스의 치세(B.C. 31 ~ A.D. 14)를 기반으로 로마제국은 향후 200여 년 동안 ‘로마의 평화’를 누렸다.

③ 로마의 문화
폴리스라는 소규모 국가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온 그리스인의 문화에 비해, 로마인은 대제국 운용에 필요한 실용적이고 외형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법률?언어?건축술?도로시설 등에서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로마문화는 스스로 그리스문화를 자신의 중요한 기반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다른 지역에 전파하여 헬레니즘문화의 범주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로마의 건축은 시민의 공동생활을 위한 공공건물과 신전, 상수도시설, 경기장과 원형극장 등 대규모 건축물이 도처에 세워졌다. 당시 로마는 제국의 원할한 통치를 위해 중앙정부와 속주 간의 신속한 군대수송과 통신의 필요에 의해서 기간도로망을 만들었다.
로마의 법률은 로마인이 제국통치를 보다 체계화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온 것이다. 공화정시대에는 로마시민에게 적용되는 시민법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나, 제정에 접어들면서 제국 내의 모든 지역의 주민들에게 적용되는 만민법으로서의 발전이 모색되었다. 이후 동로마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황제 때 『로마법대전』으로 정비되어, 중세교회법과 세속국가들의 법체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대륙법 계통의 법체계의 근간을 이루었다.

④ 크리스트교의 성립
로마의 속주인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예수는 유대교의 선민 사상과 형식적인 율법을 반대하고, 믿음과 사랑에 의한 영혼의 구원을 설교하였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늘자, 유대 교의 사제들은 그를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하였다. 크리스트교는 베드로와 바울 등에 의해 로마 제국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믿는 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비밀 집회를 갖자 크리스트교에 관대하던 로마는 점차 박해를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계속 확장되자 콘스탄니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칙령을 반포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였으며,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국교로 선포됨으로써, 전유럽으로 퍼져 나갈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中世

서양역사에서 중세는 고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래 약 1천 년간 지속된 시기였다. 서양 고대의 역사가 주로 지중해세계를 무대로 이루어졌다면, 서양 중세의 역사는 오늘날의 프랑스와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를 포괄하는 서유럽을 무대로 전개되었다. 즉, 고대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이후, 멸망한 서로마제국의 영토내에서 형성된 세계가 바로 서양의 중세사회였다.


1. 유럽 세계의 성립

(1) 유럽 세계의 성립

① 게르만족의 이동
게르만 족은 중부 유럽의 색슨족(Saxons), 프랑크족(Franks), 알라만족(Alamanni)과 동부 유럽의 롬바르드족(Lombards), 반달족(Vandals), 고트족(Goths) 등 여러 일파로 나뉘어진다.
게르만족은 인접한 로마제국의 안정된 선진문화와 풍요로운 경제의 혜택을 동경하여 로마의 국경을 빈번히 침입했다. 마침내 3세기에는 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을 이용하여 게르만족의 위협에 대처해야 할 상황에까지 몰렸다. 그리고 5세기에 들어 게르만족의 로마유입이 집단적인 민족의 대이동으로 바뀌게 되면서, 결국 476년에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② 프랑크왕국의 발전
여러 게르만왕국들 중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중세사회 형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국가는 단연 프랑크왕국이었다. 프랑크왕국이 장기적으로 안정된 국가를 유지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거주지인 라인강을 거점으로 영토를 확대해 나갔고, 비잔틴제국이나 이슬람교도의 침입에 직접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무엇보다도 로마인들이 신봉하는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피지배인들인 로마인들과 문화적 갈등을 줄일 수 있었다. 이후 서유럽을 통일하고 번영기를 누리다가 마침내 베르됭 조약(843)과 메르센 조약(870)으로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중프랑크?서프랑크로 갈라짐으로써 오늘날의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③ 노르만족의 이동
노르만족은 바이킹(Vikings)이라고도 불리웠는데, 스칸디나비아반도에 거주하던 호전적인 해양세력이었다. 이들은 인구 증가로 토지가 부족해지자 따뜻하고 비옥한 땅을 찾아서 고향 땅인 스칸디나비아를 떠나 유럽 각지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무자비한 침입과 약탈은 유럽 인을 공포에 떨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먼 곳에 있는 국왕보다는 무력을 지닌 각 지역의 유력자(영주)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영주들은 토지를 매개로 기사들과 주종관계를 맺음으로써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것이 유럽 사회의 봉건화의 시초였다

(2) 유럽의 봉건사회
봉건제는 중세 유럽사람들의 세속적인 생활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던 중세의 대표적인 제도였다. 봉건제란 봉토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사회질서였다. 봉건제를 간단히 설명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 이유는 한 사회 내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측면의 관계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어서 어느 일면의 입장을 부각시켜 단순히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군사적인 측면
주종제로 설명할 수 있다. 주군이 가신들로부터 개별적으로 가신으로서의 의무와 충성을 다짐하는 서약을 받은 후 가신에게 봉토를 부여하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주군과 가신간의 사적인 군신관계가 정식으로 맺어진다. 이 관계는 주군과 가신이 상호간의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존속되는 쌍무적 계약관계였다. 여기서 주군이나 가신은 모두 중세사회의 상류층인 기사와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왕을 정점으로 하여 하급기사에까지 연결되는 주종제의 피라미드구조를 이루고 있다.
*정치적인 면
왕이 자신의 영토 주민들에 대해 최고통치자로서의 권한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은 봉건사회가 지방분권제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왕이 가신에게 봉토를 수여한다는 것은 봉토에 대한 배타적인 통치권도 함께 부여하는 것이었으므로 자연 왕의 통치권은 분산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중세의 왕은 봉건귀족들을 통치하는 자가 아니고 그저 봉건귀족들 중의 제 1인자에 불과하였다.
*경제적인 면
장원제로 설명할 수 있다. 중세 농촌은 장원이라고 불리는 자급자족적인 경제단위를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장원은 농경지, 공동목초지, 영주의 성, 농민의 가옥, 공동시설물(방앗간, 대장간 등), 교회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주는 농노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빌려 주어 경작하게 하고 외부의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농노를 보호했다. 그 대신 농노는 영주에게 막중한 의무를 제공해야 했다. 농노는 영주의 허락 없이 장원을 떠날 수 없었고 결혼도 할 수 없었다.

(3) 로마 카톨릭 교회
기독교는 프랑크왕국과 같은 강력한 후원세력을 얻어 서유럽 전역에서 그 교세를 확대해 갔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교회나 수도원은 세속군주 및 봉건귀족들로부터 많은 토지를 기증받아 정치적으로도 그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이처럼 교회세력이 물심양면으로 성장하면서 교회세력, 특히 로마교황과 세속군주들 사이에는 많은 마찰이 생겨나게 된다.
성직자들은 교회라는 정신적인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중세인의 신실한 종교생활을 선도하는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주종제라는 세속질서 속에 편입되어 세속군주에게 충성의 의무를 행하는 봉건귀족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성직자가 세속적인 질서 속에 편입되면서 교회는 부패하게 되고,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한 개혁운동에 클뤼니 수도원이 앞장을 섰다. 개혁적인 수도사들은 성직자의 결혼과 성직매매라는 타락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세속지배자들에 의한 성직자의 선출에 있음을 강조했다. 교회는 이를 토대로 성직자서임권이 교회에 있음을 밝히고, 세속군주들과 서임권투쟁에 들어갔다.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성직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대립하게 된다. 밀라노주교서임권을 둘러싸고 교황과 황제가 설전을 벌인 끝에, 급기야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다는 선고를 내렸다. 그러자 당시 독일지역 내의 제후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지 못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파문선고에 대항하지 못하고 부득불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이었다(1077).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교황이 기독교세계의 중심임을 선언하며 교황은 기독교왕국의 평화로운 질서를 위해 세속군주들의 국내 문제에도 개입할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다. 이처럼 11세기 이후로는 기독교의 권위가 속권과 대등하거나 때로는 보다 우세한 지위를 누리게 되면서 중세기독교는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4) 중세유럽의 문화

서양 중세문화의 기반은 단연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출생에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중세인의 일상적인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는 정신적인 토양이었으며 또한 중세의 지적 및 문화적 활동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회의 지배층인 기사들이 주로 군사적 활동에 전념했기 때문에 성직자와 수도사들이 중세문화를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문화는 기독교신앙 위주의 종교적인 편향이 강하고 인간중심적인
세속적 문화가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의 예술과 건축 역시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림과 조각은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대개 중세인의 종교적 영감을 북돋우기 위한 것들이었다.
건축양식 역시 교회건축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1세기와 12세기에는 로마네스크(Romanesque)양식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는 천장이 원통모양의 무거운 둥근 천장이어서 이를 떠받칠 벽이 두터웠고 따라서 창문이 적어 교회 내부가 어두웠다. 그래서 12세기부터는 끝이 뾰족한 천장을 갖춘 고딕(Gothic)양식이 유행했다. 고딕양식은 상대적으로 천장이 가벼워서 벽이 얇아지고 창문이 커져서 교회의 내부가 훨씬 밝아졌다. 그 대형창문은 여러색깔의 색유리창으로 장식되어 교회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2. 중세 유럽의 변화

(1) 십자군 전쟁과 교황권의 쇠퇴
①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은 셀주크 투르크의 예루살렘 점령과 비잔틴제국 황제의 구원요청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간 동안 지속된 근본적인 배경은 중세 안정기의 축적된 인적 및 물적 자원, 중세인의 열렬한 신앙심, 동서교회의 통합과 교회세력의 발전을 주도하려는 교회지도자들, 명예와 전리품을 확보하려는 세속기사들, 새로운 시장을 모색하여 교역의 규모를 확대시키려는 상인들의 입장이 한데 어울려 발생한 것이었다. 비잔틴제국의 황제로부터 구원요청을 받은 로마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클레르몽종교회의에서 성지회복을 위한 성전을 촉구하고 각지를 순회하면서 성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참여를 적극 독려했다.
1096년 기사들을 중심으로 제1차 십자군이 출정을 하였는데, 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십자표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이라고 불리워졌다. 전쟁에 큰 결실도 없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초기의 열렬한 종교적 열정은 차츰 식고 대신 세속적인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다.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에서는 신앙보다는 재물을 추구하는 기사들과 콘스탄티노플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한 베네치아상인들의 상업적 이해가 맞물려 성지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다. 이후에도 몇차례의 군사원정을 시도했지만 별 성과없이 약 2세기 동안 계속되던 전쟁은 끝이 났다.

② 십자군 전쟁의 영향
십자군은 성지회복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지만, 십자군 전쟁이 중세유럽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우선 십자군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전쟁을 적극 주도한 교황의 권위가 손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열정도 전반적으로 위축되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이 많은 인명피해를 겪음에 따라 기사층의 몰락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전쟁은 이처럼 기독교와 봉건귀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여파를 초래했지만, 교역과 도시의 발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촉진제 역할을 했다.


2) 도시의 성장과 장원의 붕괴
① 중세 도시의 발달.
중세도시는 처음에 봉건영주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도시민의 수도 적었고 전반적인 치안상태도 불았했기 때문에, 도시민들은 안전한 경제활동을 위해 봉건영주의 군사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봉건 영주의 제약과 속박이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장애가 되자, 도시민들은 공동의 투쟁을 통해 봉건영주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점차로 도시의 경제력이 커지자 대상인을 중심으로 도시 공동체를 형성하고, 무력이나 금력으로 도시의 자치를 인정받는 특허장을 획득하였다. 도시민들은 정치적으로 자유를 누렸는데, 도시에서 ‘1년과 1일’을 보내면 이전 신분과 관계없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는 말이 생겨났다.

② 장원의 해체
1300~1450년 사이의 시기는 소위 ‘봉건적 위기’로 불려진 침체기였다. 농업에서의 획기적인 기술혁신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다, 비효율적인 부역노동과 한계에 이른 토지개간, 지력의 고갈이 농업생산력을 저하시켰다. 더욱이 많은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했는데, 특히1348~50년에 유행한 흑사병은 전체 유럽인구의 1/3을 죽일 만큼 큰 피해를 끼쳤다. 이러한 인구감소는 노동력 부족을 야기시켰다. ‘봉건적 위기’는 중세사회에 전반적인 위기를 초래하였다. 위기해소를 위해 봉건적 부담을 강화시킨 봉건영주들과 그에 불만을 품은 농민 사이에 집단적인 마찰이 빈발했다.

*지대의 금납화
농민들의 반발과 장원이탈을 강압적으로 막기 어려운 데다 부역노동에 의한 직영지경영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영주들은 직영지경작을 포기하고 직영지를 농민들에게 임대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제 지대는 부역노동 대신 화폐나 현물로 납부되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대의 금납화였다. 지대의 금납화는 실질적으로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가격상승으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실질적인 지대부담이 줄어들었고 경제외적인 강제도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곧 농노의 예속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장원제의 붕괴를 말하는 것이다.


(3) 중앙집권국가의 출현
중세의 왕은 봉건영주들과 교회세력의 견제 때문에 영토 전반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세력이 쇠퇴하고 세속봉건영주 역시 장원제의 몰락과 기사전술의 쇠퇴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됨에 따라 국왕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이로써 주군과 봉신 간의 사적인 인간관계인 주종제가 약화되고 국왕이 영토 내의 모든 주민들에 대해 직접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자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국왕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상비군과 관료제를 운영했고 이에 대한 재정충당을 위해 도시의 상공업자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중앙집권적인 민족국가로 발전하는 중대한 계기가 된 것은 백년전쟁(1337~1453)이었다.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영국이 우세하였으나, 결국에는 잔 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은 프랑스가 승리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백년전쟁을 계기로 귀족이 몰락하고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고 영국에서는 장미전쟁이 일어나 헨리 7세의 튜터왕조가 열렸다.


近代

 14~15세기 이후 프랑스혁명에까지 이르는 약 5세기 동안의 시기는 이른바 ‘지리상 발견’으로 불리우는 유럽세계의 팽창, 르네상스, 종교개혁, 절대왕정의 성립과 붕괴라는 급격한 변화로 점철되어 있다. 중세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구조전환이 이루어진 이 시기의 본질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수립에 입각한 절대주의체제의 수립, 자본주의적인 요소의 증대, 그리고 자본가집단의 성장에 따른 시민사회의 발전으로 파악해 볼 수 있겠다. 이 시기 동안의 사유의 변화 역시 이상의 현실 및 구조의 변화에 입각하여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검토될 주제는 르네상스로 시작된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의 발전이다.

1. 서양 근대 사회의 시작

(1)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내지 인문주의운동은 정치, 신, 윤리, 미에 대한 서양인의 감각과 사고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으며 비판적인 시각을 육성해 주었다. ‘재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걸쳐 고전문화의 부흥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운동으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라는 시대적 의미도 지닌다. 르네상스에는 세숙주의정신의 대두, 개인 및 경험에 대한 강조, 민족국가 및 세속군주에의 충성심 등 근본적인 변혁이 내포되어 있다.

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탈리아에서는 일찍이 13세기 이전에 봉건제가 소멸하고 지중해무역에 입각한 도시가 발달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도시 신흥부르주아의 부, 그리고 국력신장과 인기확보를 추구한 전제군주의 후원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세속적 특징은 고전연구를 강조하는 인문주의운동에서 두드러져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의 문학적 업적과 플라톨철학에 대한 활발한 연구 등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새로운 인간관과 자연관이 나타났다. 인문주의적 열정과 세속주의적 관점은 미술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개인적 성취를 추구하는 미술가들은 세속군주 및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후원자들 속에서 세속취향을 더욱 발전시켜, 조토,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은 많은 걸작품을 산출했다.

② 북유럽의 르네상스
1494년 이탈리아전쟁의 발발과 함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쇠퇴기를 맞이했고, 르네상스운동은 알프스 이북 곧 북서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국가체제의 수립과 자본주의발전을 시도했던 유럽 각국은 이탈리아의 외교정책과 전쟁술을 채택하였으며, 인문주의는 외교 및 행정, 그리고 궁정에서 요구되었던 언어와 수사학의 기술, 그리고 완벽한 신사의 이념을 제공해 주었다. 전반적으로 북서유럽 르네상스의 성격은 기독교인문주의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세속적이었던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에 비해 북서유럽의 인문주의는 기독교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탈리아에서 인문주의가 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었다면, 고전연구의 비판적 방법을 성경의 해석 및 번역 등에 적용하면서 확산된 기독교인문주의는 종교비판을 통해서 사회비판의 성격까지도 띠게 되었다. 막대한 토지 및 제반 사회정치적 특권을 독점한 교회, 사제의 의식, 예컨데 성자숭배, 성인전, 면죄부, 우상숭배 등으로 전락하여 일반인들을 소외시키고 있던 교회의 의식등은 개탄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한 공격은 파괴적 효과를 발휘하면서 종교개혁의 광범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2) 종교개혁

① 종교개혁의 배경
종교개혁의 배경은 먼저 르네상스에서 찾을 수 있다. 르네상스로 확산된 세속적 분위기에 대한 저항이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와 같은 르네상스시대의 교황은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참주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교황령을 독립된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들은 또한 성 베드로 성당의 건립으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후원자로서 낭비, 물질주의 등을 통하여 세속적 가치를 대변했다. 여기서 교단의 부패와 교회재정의 남용은 기독교이념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의혹을 초래했다. 이상의 과정은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루터의 저항으로 귀결되어 종교개혁의 길을 열었다.

②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독일의 대주교의 대변인이었던 요한 텟쨀은 독일 전역을 돌면서 영혼을 구제한다는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건립기금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아직 국가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독일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사이며 비텐베르크대학의 성서학 교수였던 루터는 1517년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교황과 황제로부터 파문당한 루터는 독일영방군주의 보호를 받으면서 카톨릭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인쇄술의 발전은 루터의 주장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라틴어로 쓰여졌던 95개조의 항의문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수천 장씩 인쇄되었다. 이리하여 일개 학자의 반항은 대중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524년 ‘평등한 만인’이라는 루터의 가르침에 고무된 농민들이 기존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봉기를 일으켰을 때 루터는 군주와 귀족의 편에 서서 농민봉기의 진압을 촉구하는 권위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이후 루터파는 독일에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다. 독일의 종교분쟁을 궁극적으로 종결지은 아우구스부르크의 화의(1555)는 각 지역의 종교적 선택권을 세속군주에게 부여하되, 그 범위를 카톨릭교회 및 루터파교회로 한정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③ 칼뱅의 종교개혁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계승한 프랑스 부르주아 출신의 칼뱅은 명석하고 조직적인 사람으로서 제네바에서 엄격한 신정정치를 실시했다. 칼뱅은 근면하고 금욕적인 현실생활을 통해 신의 선택받은 자임이 증명된다는 예정설로 중산계층의 호응을 받았으며, 근대적인 직업관과 생활윤리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 스코틀랜드,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확산되어 근대장로교회로 발전했다.

④ 크리스트교 세계의 분열
정치적 갈등 및 경제적 대립이 뒤얽혀 16세기 후반의 프랑스 위그노전쟁과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거쳐, 17세기 초에는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대규모 국제전쟁이 벌어졌다. 루터의 개혁 이후 100년 이상에 걸친 종교전쟁을 겪은 유럽은 30년전쟁이 끝난 1648년에야 안정되었다. 16세기 말을 기준으로 볼 때, 프로테스탄티즘은 북부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등지의 북서부 유럽을 확보했다. 반면 카톨릭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지의 남부 유럽과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 등 남동부 유럽을 확보했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중세 기독교세계의 통일을 파괴함으로써 근대국가를 비롯한 모든 근대적 발전의 길을 보다 순조롭게 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촉진한 데에 있을 것이다. 특히 칼뱅계통의 프로테스탄트는 근대적인 직업관과 금욕적인 생활윤리를 제공하여 근대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3) 신항로 개척

서유럽의 근대사를 주도하게 되었던 원동력은 진취적인 개척정신으로 시작된 지리적 팽창으로부터 비롯했다. 여기에는 종교적 동기 및 동양에대한 호기심 외에도 경제적인 동기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또한 항해술 및 조선술의 발전, 중앙집권화된 민족국가의 출현은 현실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최초로 인도항로를 탐색한 포르투갈은 동양무역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와 필리핀을 장악해 해상제국을 건설했다.

① 유럽 세계의 팽창
유럽의 팽창은 동양물산을 대량 유입하여 유럽인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대량의 귀금속은 가격혁명을 초래했으며, 넓은 해외시장은 상업혁명을 야기하여 유럽의 상업규모를 비약적으로 확대하고 경제의 중심을 이슬람 및 지중해로부터 대서양 연안의 민족국가로 이동시켰다. 이후 유럽은 동양의 문명권과 활발히 접촉하여 유럽주도의 세계사를 성립시켰다.


(4) 절대 왕정

① 절대 왕정의 성립
경제적 변화는 새로운 정치체제 즉 절대적인 국가를 등장시켰다. 유럽에서는 중세 말의 혼란과 동요 속에서 왕권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국가적 통합을 시도해 왔다. 왕권의 강화는 17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고, 이제 사회의 제반 세력 및 집단은 명백하게 왕권에 종속되었다. 이와 함께 지상의 통치권으로서의 주권의 개념이 나타났다. 주권의 개념은 강력한 왕권이 통치하던 초기에는 군주권력을 의미했다. 군주권이 행사되는 영토범위가 명확하게 규정되고, 엄격한 의무에 종속되는 신민이라는 구성원의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요컨데 영토, 주권, 그리고 국민이라는 국가의 구성요건이 확립되면서 국가의 개념이 출현한 것이다.
절대왕정의 유지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도가 요구되었다. 왕은 관료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특히 지방의 귀족세력을 견제하여 최고통치권을 확립하려 했다. 또한 상비군제도를 통하여 군사력을 독점함으로써, 종래 기사제도에 입각해 있던 귀족들의 세력을 무효화시켰다. 이와 함께 전국적인 조세제도를 통해서 재정을 확보하고, 또한 전국적인 사법제도를 설치하여 보편적인 기준을 수립하려 했다.
② 17, 18세기의 유럽 문화
* 궁정문화
유럽에서 절대주의가 절정에 달한 17세기의 예술은 일반적으로 바로크예술로 알려지고 있다. 그 특징은 궁정적이고 귀족적이며 인간의 힘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토대로 하고 있는 점이다. 절대주의의 전성기였던 탓으로 절대왕권과 궁정이 비단 정치나 사회면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따라서 궁정과 그를 둘러싼 귀족들의 보호가 예술발전에 크게 작용했으며, 대표적 건축도 궁정건축으로서 루이 14세가 지은 베르사유궁전은 그 장대하고 호화찬란한 점에서 바로크시대의 상징이라 하겠다.

* 과학혁명과 계몽사상
르네상스 이래의 인간 중심적이며 세속적인 시민 문화가 더욱 발전하였으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베이컨과 프랑스의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기초를 쌓았으며, 영국의 뉴턴은 만유 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여 과학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새로운 근대적 우주관을 확립하였다.
영국의 로크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절대 왕정을 비판하였으며, 애덤 스미스는 중상주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며 경제 활동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근대 과학과 철학, 영국 혁명과 로크의 정치 이론 등을 배경으로 하여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계몽 사상이 등장하였다.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루소를 비롯한 계몽 사상가들은, 이성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법칙을 잘 적용함으로써 인류 사회는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낡고 모순된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계몽 사상은 시민 계급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시민 계급은 계몽 사상을 통해 절대주의 체제를 체계적으로 비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중요함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계몽 사상은, 시민 계급이 주도하여 민주주의를 이룩한 미국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시민 사회의 성립

(1) 영국 혁명

① 청교도혁명
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녀의 유언대로 스코틀랜드 왕인 사촌 제임스가 영국 왕위에 올라 제임스 1세가 되어 스튜어트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한 나라가 되었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찰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왕이 되자 에스파냐와의 일전을 계획, 전쟁에 필요한 비용문제 때문에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가 열리자, 법률가 출신의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크는 의회의 권리를 명시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의회는 이를 기꺼이 승인했다. 이것이 유명한〈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이다.
찰스 1세는 6월 청원서를 재가하고 그 대신 필요한 돈을 받아냈다. 그러고는 이듬해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그런데 1639년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교회를 영국의 국교회식으로 고치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찰스 1세는 할 수 없이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는 경비조달을 승인하기는커녕 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분노한 찰스 1세는 무력으로 의회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자 의회 측도 군대를 모아 대항했다. 이리하여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8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왕당파는 구 귀족,성직자,독점 상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의회파는 자영농,신흥 상공업자,신흥 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1646년 6월 왕당파의 근거지인 옥스퍼드가 점령되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찰스 1세를 영국 의회에 넘겨주었고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마침내 처형되고 말았다. 영국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왕 대신 의회가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을 청교도 혁명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 권력을 장악한 의회의 구성원들이 바로 신흥 상공업자들, 즉 청교도였기 때문이다.


② 명예혁명
크롬웰이 사망하고 1660년 5월 29일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런던에 입성했다. 그 뒤를 이은 동생 제임스 2세는 전제 정치를 강화하고, 카톨릭 교회를 부흥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일부 의원이 반발, 제임스 2세는 세 번이나 의회를 해산한 끝에 제임스 배척안을 부결시켰다. 제임스 배척파는 청교도가 주축이었고, 반대파는 지주,귀족,성직자들이 중심이었다. 양파는 각각 전자는 휘그 당, 후자는 토리 당이라 불렸다. 이것이 영국 정당의 기원이다.
1688년 5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왕비 마리가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명예 혁명의 발단이다. 첫째 왕비의 소생인 메리와 앤은 신교도로 어려서부터 신교 교육을 받은 터였지만, 새 왕비 마리는 카톨릭이었으므로 의회는 태어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휘그 당과 토리 당은 손을 잡고 제임스 2세를 몰아내기로 했다. 의회가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린지 공 윌리엄이었다. 두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했다.
딸과 사위에게 쫓긴 제임스 2세는 12월 왕비와 아기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고 말았다. 의회는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즉위시키고 유명한 <권리 장전: Declaration of Rights>을 승인케 했다. <권리장전>의 주요 내용은, 모든 법률의 제정 또는 폐지는 의회를 거쳐야 하며,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에선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입헌 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성공한 명예로운 혁명이란 뜻에서 이 사건을 명예 혁명이라 불렀다.


2) 미국 혁명
일찍이 17세기부터 영국의 신대륙 식민활동이 본격화되어, 18세기 초 청교도를 비롯한 이주민은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에 13개의 영국 식민지를 건설했다. 북부에는 자영농업 및 상공업이, 남부에는 노예를 사용하는 농장경영이 행해졌으나, 불평등한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 전체를 통해 자유와 자치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그러나 해외식민지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해 제국체제의 편성을 도모한 영국은 조지 3세의 즉위(1760) 후 인지세와 차세의 부과 등 중상주의적인 식민정책을 채택했다.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원칙으로 맞섰으며, 이는 1775년의 독립전쟁으로 폭발했다. 식민지 대표들은 독립선언을 공포하여(1776.7.4) 생명, 자유 및 행복추구의 자연권을 촉구했다.
유럽열강의 경쟁관계를 이용해 성공한 미국혁명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고 헌정적이라는 성격을 띠나, 민주주의적인 성격도 가미되어 있다. 그러나 신분제 및 구제도가 부재했던 관계로 사회혁명으로서의 성격은 미약하다.
(3) 프랑스 혁명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형제애의 이념을 표방한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절대주의적인 구체제를 타도했던 전형적인 시민혁명이었다. 프랑스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집단인 제 1 신분, 귀족인 제 2 신분, 평민인 제 3 신분으로 구성된 봉건적인 신분제 내지 절대주의적인 구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평민 중에서도 상인 및 제조업자, 그리고 문필가 등의 자유직업인 등으로 이루어진 시민계급 곧 부르주아는 재력과 교양에도 불구하고 귀족 및 정권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봉건적 부담 및 국가에 대한 세금 등으로 많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결정적 위기를 맞은 프랑스재정은 혁명에 이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권계급에의 과세 및 왕실경비의 삭감을 통해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던 시도가 귀족과 왕실의 반발로 실패하자, 루이 16세는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에서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신분 간에 충돌이 벌어지자, 제 3 신분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성립시켰고, 이에 자극받은 파리의 민중은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으며, 혁명적 분위기는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국민의회는 ‘봉건제의 폐지선언’ 및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혁명이념을 제시하여 민중의 지지 및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선거에 의해 새로 선출된 국민 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프랑스 제1공화정을 선포하였다. 국민 공회에서 중산적 부르주아 및 소생산자층에 기반했던 자코뱅당은 상층 부르주아에 기반한 지롱드당과 대립하다가 1793년 민중세력을 배경으로 자코뱅독재를 확립했다.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실시하자 온건파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내고 공포정치를 종식시켰다. 1795년 유산계급에 입각하여 수립된 총재정부는 전쟁에 따른 경제난과 좌우파의 압력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군대에 의존했다. 혁명군 지휘자 나폴레옹은 1799년의 쿠테타로 무능한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①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나폴레옹은 혁명의 이념을 코에 걸고 유럽대륙을 제패하면서 자신의 군사적 야심을 추구했다. 이리하여 나폴레옹은 1808년경에 이르러 영국을 제외한 유럽대륙을 혁명의 이념하에 제패했다. 끝내 영국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지 못한 나폴레옹은 1808년 베를린칙령으로써 유럽대륙과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해 영국의 고립을 꾀했다.
그러나 영국의 경제적 우위가 확실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는 각국의 반나폴레옹적인 감정을 유발했다. 궁극적으로 나폴레옹은 무모한 러시아원정에서 패하면서 몰락했다. 나폴레옹은 분명 군사적인 정복자로서 프랑스혁명의 사생아였지만 현실감각이 탁월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그는 혁명기에 이루어진 제반 변화를 인정하여, 시민계급 및 재산권을 인정하고 프랑스은행을 설립했으며 중앙집권적인 행정제도를 확립하고 나폴레옹법전을 편찬하는 등 프랑스사회의 제도적 틀을 이루었다.

 4) 산업혁명
18세기 후반 서유럽에서는 영국을 출발점으로 하여 또 하나의 혁명, 즉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각종 기계의 발명 및 기술혁신으로 이루어진 생산력의 비약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은 전 산업분야에 파급되면서 정치 및 사회경제구조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산업혁명은 지리상 발견 이후 유럽의 정치, 사회, 경제, 정신 등 모든 발전이 누적된 복합적 산물이었다.

① 영국의 산업혁명
영국에서는 명예혁명 이후 정치?사회적 안정이 이루어졌으며, 18세기 이후의 농업혁명으로 몰락한 소농이 산업예비군을 형성했다. 또한 넓은 해외시장과 통합된 국내 시장, 풍부한 자원, 근대적인 금융제도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자극했다. 면공업분야에서 시작된 새로운 기계의 발명으로 가내수공업적인 단계를 넘어선 공장제생산이 출현했으며, 제철공업 및 석탄공업, 교통 및 통신이 발전되었다.

②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산업혁명의 움직임은 곧 서양의 여러 국가와, 궁극적으로는 지구상 모든 곳에 파급되었다. 산업혁명은 산업사회를 출현시키고 풍요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공하여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 이후 인류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산업혁명은 또 한편 자본가계급 곧 부르주아와, 임금노동자계급 곧 프로레타리아라는 양대 계급을 형성시켰다. 여기서 분배문제, 노동문제, 도시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와 정치?경제적 투쟁이 파생되면서 현대사회가 아직도 직면해 있는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3.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1) 자유주의의 발전
자유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이루었던 것은 유능하고 자신만만한 부르주아였다. 특히 17~18세기에 일어났던 여러 시민 혁명은 자유주의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현실적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즉, 영국의 청교도혁명 및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선언, 그리고 프랑스혁명 등이 진행되는 가운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자유와 평등, 재산권 등 자유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적 개념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기존의 국가권력 및 권위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헌법의 확립, 자유선거, 대의제 정부, 권력분립등의 개혁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빈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자유주의이념은 19세기를 통하여 보수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1830년과 1848년의 혁명을 거치면서 이들의입장은 보수화되어 갔다. 또한 자유주의경제이론을 주장했던 이들은 하층민들이 처해 있던 불행한 상태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이들에 의하면 개인의 불행은 그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함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해서 마땅하다는 것이다.


(2) 민족주의의 발전
19세기의 유럽을 이끌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민족주의였다. 근대 민족주의의 기원을 이루었던 것은 바로 프랑스혁명이었다. 혁명은 절대주권을 소유한 민중, 그리고 하나의 주권 밑에 통합된 민중이라는 개념을 제공하여, 민족을 하나의 통합된 정치적 실체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와 같이 통합된 국가를 이루고 있었던 곳에서는 민족주의가 민족 곧 민중의 주권을 확보하려는 민주주의적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반면,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이 아직 국가로 통합되지 못하고, 단지 혈통과 문화적 측면에서 일체감만을 느끼고 있던 곳에서는 정치적 실체로서의 민족, 곧 하나의 국가 속에 통합된 민족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3) 19세기의 사회와 문화
자연과학은 17세기 말 뉴턴에 의하여 그 기초가 잡힌 후 18세기로부터 19세기에 걸쳐 눈부신 발달을 하게 되었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산업혁명을 촉진시켰으며, 19세기 이후 양자의 발달이 가속화되어 산업과 인간문명을 크게 변모시키게 되었다.
문학에서는 19세기 전반기에 고전주의나 계몽주의와는 반대되는 낭만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19세기 후반기에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을 더욱 존중하고 직관에 의존하여 민족의 과거나 중세문화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2월혁명이 실패로 끝난 19세기 중엽으로부터 후반에 접어들면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나 꿈을 쫓느니보다 인간의 사회와 직지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現代

1.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세계

(1) 제국주의와 열강의 대립
① 제국주의 국가의 등장
19세기 말엽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잉여자본이 축적되는 동시에 독점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는 곧 생산 및 자본의 집중이
강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먼저 주기적인 경제불황 내지 공황이 거듭되는 속에서 많은 영세기업들이 도산한 반면, 살아 남은 기업들은 상호간의 결합을 통해서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사회에 대한 지배력 역시 높여 갔다. 또한 금융권을 장악하고 있는 은행의 지배도 역시 강화되었다. 여기서 자유경쟁은 쇠퇴하고 독점자본주의 및 금융자본주의에 길을 내주었다.
그러나 이는 또다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우선 축적된 잉여자본은 새로운 출구를 요구했다. 또한 독점이 강화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노동자들의 숫자가 급진적으로 증대되었는데, 이는 사회적 갈등과 함께 노동계급의 저항을 야기했다. 이에 사회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의 팽창을 통해 해결하려는 제국주의정책이 촉진되었다. 특히 자본수출을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개입과 심지어는 영토병합이 요구되었고, 선진국들은 군비를 강화하면서 국제적인 긴장을 야기했다. 사실 유럽인들이 타지역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16세기 이래 지속되어 온 현상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유럽의 제국주의적인 진출은 대규모의 인구이동이라는 현상을 수반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성격까지도 변화시켰다. 원료공급지와 상품시장이라는 재래적 의미 이외에도 잉여자본의 투자대상지역이라는 새로운 성격이 부여된 것이다. 이는 식민지의 역할이 종전의 경우에 비해 보다 증대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②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계분할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선진자본주의국가에 뒤이어서 해외진출을 서두르던 독일, 이탈리아, 미국도 세계분할에 뛰어들었다. 여기에 결코 자본주의국가라 할 수 없는 일본과 러시아까지 가담하면서 식민지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영국은 케이프타운과 카이로 및 캘커타를 잇는 이른바 3C정책을 통해 아프리카 경영을 시도하였으며, 독일을 상품시장으로서 가치가 있는 서아시아와 중부 아프리카와의 연결을 꾀하여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3B정책을 추구하였다. 또한 프랑스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구였던 영국과 다소 긴장관계에 놓였다. 한편 아시아에서 영국은 인도 제국을 세운 후 다시 네팔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을 보호국화하는 동시에 미얀마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반도의 요지를 점령하여 말레이 연방을 세웠다(1895). 영국에 의해 인도에서 밀려난 프랑스는 캄보디아, 베트남에 세력을 확대시켜 프랑스 령 인도차이나를 만들고(1887), 라오스를 추가하였다.


(2) 제1차 세계대전의 전개
1914년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내외를 암살한 사건은 협상 및 동맹의 망에 의해 대규모의 전쟁 곧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무엇보다도 1870년대 이후 발전된 제국주의의 폭발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엄청난 병력이 동원됨으로써 제국주의열강들이 군비확장을 준비해 왔음을 증명했다. 독일의 단기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일본과 이탈리아 등이 연합국에 참전하는 등 전쟁이 확대되었다. 교착상태에 빠진 전국을 타개하려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은 미국의 대독감정을 악화시켰고, 이는 1917년 4월 미국의 연합국 참전으로 이어져 대전의 향배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후 독일 및 동맹국에는 패색이 짙어져 갔고, 1918년 가을부터 동맹국들의 항복이 시작되었다. 1918년 11월에는 키일군항에서 수병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혁명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독일이
마지막으로 휴전에 응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3) 러시아혁명
20세기 초, 러시아의 개혁적 당파로는 실업가들과 진보적인 귀족들이 입헌 군주제에 입각한 평화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입헌 민주당, 나로드니키의 전통을 따라 더 많은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려던 사회 혁명당, 그리고 지식인과 도시 노동자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 민주당(온건 노선의 멘셰비키와 급진노선의 볼셰비키로 분열)이 있었다. 1917년 3월(러시아력으로는 2월)에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자, 처음에는 자유주의 정당인 입헌 민주당과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전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레닌이 귀국한 후 볼셰비키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고, 전쟁에서의 거듭된 패배로 전쟁 혐오 사상이 널리 확산되었으며, 효과적인 개혁을 실시하지 못한 임시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볼셰비키는 11월(러시아력으로는
10월)에 혁명을 일으켜 케렌스키가 영도한 임시 정부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4) 베르사유 체제
① 베르사유 체제의 수립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모든 변화는 이른바 ‘베르사유체제’라는 국제질서로 나타났다. 전후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은 제국주의를 지양하고 자유와 자치에 입각한 새로운 평화질서를 수립할 것을 제안했다(14개조). 그러나 이 원칙은 무시되고 회의는 전승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과 군비제한 등 패전국에 대한 철저한 응징으로 일관되었으며, 그 결과로 베르사유조약이 나타났다.

② 자유 민주주의의 확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민주주의가 크게 확산되었다. 새로 형성된 독립국들뿐만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 제국에서도 제정이 무너지고 민주적인 국가체제가 등장하였다. 기존의 유럽민주주의도 발전해서, 남녀평등의 보통선거에 입각한 대중민주주의가 등장했으며, 세계공황을 계기로 복지국가의 개념도 확대되었다.


 2.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세계

(1) 경제공황과 전체주의 국가의 출현
① 미국의 번영과 공황의 발생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은 경제 호황으로 ‘황금의 20년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어려웠으며, 공업 제품의 만성적인 생산 과잉과 흥청거리는 소비 풍조로 인해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주가가 완전히 폭락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자금난을 겪게 된 은행들이 연달아 파산했으며, 대출금을 회수하자 기업들이 도산하여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은 구매력의 감소를 가져와 시장을 축소시켰고, 그 결과 더 많은 실업이 발생하는 등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공황은 순식간에 전세계로 파급되어 1929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세계 무역량이 60%이상 감소하였다.

② 전체주의 국가의 대두
경제 공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각국이 처한 형편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국내 경제 기반이 비교적 탄탄하였던 미국은 생산 활동을 억제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고 실업자를 위한 공공 사업을 추진하면서,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를 갖지 못한 나라들에서는 사회 불안을 막는다는 구실로 강력한 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침략적인 대외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 1930년 이후 일본의 군부 독재 정권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한다


(2)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
독일은 1938~1939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고 소련과는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팽창의 야심을 명백히 드러냈다. 4개년계획으로 군비확장에 주력해 온 독일은 단치히와 서부 폴란드를 병합했고, 소련도 동부 폴란드와 발트 3국 등을 점령했다. 이탈리아의 발칸 진출이 용이치 않았던 반면, 독일은 승승장구로 서쪽의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으며, 마지노 방어선만 믿고 소극적으로 항전하던 프랑스까지 손에 넣으면서 비시괴뢰정부를 수립했다.(1940).
그러나 처칠이 지도하는 영국의 치열한 항전, 드골이 지도하는 자유프랑스군과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의 저항, ‘민주주의의 병기창’을 자처한 미국의 참전 등은 전세를 호전시켜 나갔다.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물자를 탐내어 소련을 침입하게 된
다. 그러나 독일은 소련의 동장군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수비태세로 전환했다.
한편 태평양에서는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을 보장받고자 했던 일본이 1941년 11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했다. 그러나 일본 역시 1942년 여름 이후 다른 추축국가들과 함께 역전의 국면을 맞았다. 이에 따라 연합국의 수뇌들은 카이로(1943), 얄타(1945.2), 포츠담(1945.7) 등지에서의 회담을 통해 전후국제질서에 대해 논의했다. 무솔리니정권이 붕괴된 이탈리아가 추축국 중 1944년 6월 가장 먼저 항복한 후, 1945년 5월에는 독일이 항복했다. 1945년 8월 원자탄이 투하된 일본이 마지막으로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3) 냉전체제의 형성과 변화
전쟁이 끝난 뒤, 동부 유럽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 국가가 연이어 탄생하였고, 서유럽 국가 안에서도 공산당 세력이 성장하였다. 미국은 서유럽에 대한 경제적 지원, 그리스 공산 혁명의 진압 등을 통해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 및 동부 유럽의 공산국가들과,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 ‘총성없는 전쟁’, 즉 냉전이 시작되었따. 냉전이 시작되면서 연합국이 분할 점령하였던 우리나라와 독일은 결국 분단되고 말았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대립은 중국의 공산화 이후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한편 전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나라들은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서 시작된 식민지 시대는 막이 내려졌다.


 3. 현대사회의 변화

(1) 공산권의 몰락과 자본주의 체제의 확대
① 냉전에서 평화 공존으로
사실 냉전체제는 1955년 흐루시초프가 형식적으로나마 변화의 몸짓을 보임으로써 일찌감치 취약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는 변화의 조짐이 뚜렸해졌다. 이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내에서 나타난 세력관계의 변화가 반영된 양상이기도 하다. 미국은 경제력의 상대적 쇠퇴와 베트남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군사적 좌절을 경험했으며, 경제적으로 정체된 소련 역시 공산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중국과 대립
했다. 여기서 중국, 독일, 일본의 세력이 부상하는 이른바 다원적 세력균형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미국과 공산중국의 접근을 계기로 국제정세는 화해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으로 시작된 동서화해는 1975년에 일단락되면서 동서화해의 데탕트시대로 접어들었다.

② 동유럽 공산 체제의 붕괴
1980년대 말 냉전종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냉전체제의 당사자의 한 진영, 즉 소련 및 동구권이 자체적으로 붕괴한 데에서 기인한다. 1985년에 시작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로부터 1989년 독일 베를린장벽의 철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동구권에서의 변화 등이 나타났다.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는 급변하는 국제적 상황에 대처하기에 역부족이었고, 냉전이라는 국제 구도하에서 과도한 군비경쟁은 경제에 막대한 출혈을 강요했다. 따라서 1985년경부터의 페레스트로이카의 추진은 우연한 계기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필연적 과정이었다. 이는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고, 1980년대 말에 와서 동유럽공산주의체제는 급격히 몰락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냉전구도가 해체되었다.

③ 자본주의의 전망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체제가 승승장구하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대결에서 자본주의체제가 승리했다는 식의 판단은 성급한 결론이라 할 것이다. 분명 현실사회주의체제는 내부적 무리와 약점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의 궁극적인 평등과 자유의 실현을 향한 인간사회의 이상, 즉 사회주의적 이상의 종착점을 선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21세기의 시점에서 자본주의체제의 강렬한 생동력과 추진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미 사회주의적 비판을 통하여 많은 부분이 수정되고 변질되었다. 따라서 앞으로도 보다 ‘사회주의적’이라 할 만한 변화가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3) 대중사회와 대중문화의 발달
① 대중사회
대중사회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는 가운데 나타난 다양한 사회 현상을 포괄하는 말이다. 19세기 말부터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산업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 계급의 비중이 커지고, 다양한 직종의 기능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이 이루어지면서 도시화가 급격히 진전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노동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이 활발했다. 식민지 수탈을 통해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선진국에서는 사회 보장 정책의 실시, 의무 교육 제도 도입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른바 대중민주주의의 기초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중 사회라는 거대한 매커니즘 속에서 인간은 커다란 구조 속의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기 쉽다. 아울러 인간의 의식과 행동 양식에 대중 매체가 큰 영향을 끼치게 됨으로써 개성과 주체성을 상실하기 쉽다.

② 대중문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고, 교육의 대중화와 대중매체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광범위한 대중이 문화 예술의 향유자로 자리를 잡게 되고 대중문화가 형성되었다. 대중문화는 대중의 정서와 생활을 반영하는 주체적인 예술 활동의 일부로서 그 의의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즉, 문화 예술의 향유자가 늘어난 것은 곧 문화 상품의 소비자가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문화가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를 잡고 문화의 상품화가 진전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이윤 추구 활동이 평범한 대중들의 문화 활동을 지배하게 되고, 이는 대중의 획일화와 저속화를 부추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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