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애굽)문명 (BC3000- BC332)
2005. 12. 29. 00:10ㆍ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문명(文明:
civilization)과 문화(文化: culture) 문명과 대치(對置)되는 문화와 혼돈(混沌) 하는 경우가 있다. 문명(civilizat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키비스(civis:시민)나 키빌리타스(civilitas:도시)에서 유래하였으며,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사회적 발전을 문명이라 말한다. 문화(文化: culture)의 어원은 라틴어의 cultura에서 파생한 culture를 번역한 말로 본래의 뜻은 경작(耕作)이나 재배(栽培)였는데, 나중에 교양이나 예술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으며, 문화는 인류의 정신적이고 가치적인 소산을 문화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미개 문화는 있어도'문화에는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먹는 음식은 문화이지 문명이 아님으로 무엇을 먹던지 야만인 취급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모든 세계문명을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문명의 단위를 국가보다는 크고 세계보다는 작은 중간적인 범위에서 구하였다. 그는 서구문명, 인도문명, 극동문명, 정교(正敎)는 그리스도교 문명과 같은 현존하는 문명에서 고대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 21개의 문명을 들었다. 이들 문명 중에서 모체가 된 고대문명을 모문명(母文明)이라 부르며, 1. 이집트 문명 2. 수메르 문명 3. 미노스 문명 4. 중앙 아메리카의 마야 문명 5.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문명 6. 아시아의 중국 문명 7. 고대 인도의 하라파 문명 7개의 모문명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보았다. 이 중에서 중국 문명은 중간에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현재까지 4,000년 동안 계속 살아 있다. 이들 문명 중에 4개로 분류하여 다루려고 한다. [1] 이집트(애굽)문명 (BC3000- BC332) 나일강이 범람하여 비옥한 땅이 생겼으며, 나일강은 이집트의 어머니이었다. 이곳에 작은 40여 개의 도시국가가있었는데 통일하여 일찍이 왕국이 건설되었고, 파라오(바로왕)가 다스렸다. 홍수가 나면 다시 경계를 측량하는 수학이 발달하였고, 태양력과 지구가 둥근 것도 알았다. 갈대종류인 파피루스의 섬유로 종이를 만들었으며, 표음문자를 만들었다. 이집트의 어원은 그리스사람 아이큐프트스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는 켈트(검은 토지의 뜻- 퇴적층 흙이 검은데서 유래)라고 불렀다. |
<사진은 이집트의 신들> |
이집트 왕국 [4대 문명지도] 약 BC3000- BC332 년 약 2700동안 31왕조가 있었다. 홈페이지에 나오는 연대는 두산백과를 참고로 하였고 추정 연대는 학자마다 다르다. 왕조별로 참고삼아 간략하게 기록한다. 1. 초기왕조(BC3000- BC2800) 1, 2왕조 9 명의 왕 메네스가 초대 왕으로 이 시대에 기초를 확립하였다. 2. 고 왕국(BC2800- BC2250) 3, 4, 5, 6 왕조 4왕조 시대에 27 명의 왕이 절대군주와 중앙집권적 정치를 하였다. 4왕조(BC2600- BC2500)시대에 최고 번성 시대로 *피라미드 건설하였다. 피라미드는 카이로에서 12Km 떨어진 기자(기제: Gizeh)지역에 있다. 크기가 작아 진 것은 국력이 약해진 것을 말한다. 쇠퇴기에도 이런 대공사를 하였다. 3대 케오프스(쿠푸카): 3개의 피라미드 중 가장 큰 것이다. 4대 카프레(카프렌): 중간 것으로 *스핑크스가 같이 있다. 5대 멘쿠레: 가장 작다. 5, 6왕조는 대외적으로 위세를 떨치고, 6왕조는 고대왕국 마지막이다. 3. 중대 왕국(BC2250- BC1780) 7-17 왕조 7, 8, 9, 10 왕조까지 20명의 왕이 통치하고 이것을 제1중대왕국이라고 한다. 11, 12, 13, 14, 15, 16, 17 왕조가 51명의 왕이 통치하고 이것을 제2중대왕국이라고 한다. 제1중대 왕국(BC2250- BC2060) 파라오 지배는 유명무실이 되고 제후가 권력을 쥐고 활동하며 델타에도 침입하고 왕국은 분열, 분쟁, 혼란의 시대이었다. 제2중대 왕국(BC2060- BC1780) 11왕조 때 재통일한다. 12대 왕조 세누섯 2세 때 아브라함이 애굽에 간 것 같고, 국가는 부요하였다. 13, 14, 17 왕조는 남쪽을 다스리고, 왕권이 쇠퇴하였고, 힉소스(Hyksos)에게 망하여 약100년 간 지배를 받았다. 힉소스는 북쪽 애굽과 수리아를 통일한 아시아의 정복자이다. 힉소스는 유대인과 혈연관계라고 하여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다. 15, 16 왕조는 북쪽을 다스렸다. BC1800 경 16대 왕조 아파피 2세는 요셉을 등용한 바로로 생각한다. |
<왕과 왕비> |
4. 신 왕국(BC1580- BC1080) 18, 19, 20 왕조 시대 18왕조는 BC1580년경 힉소스를 무찌르고, 유대와 수리아를 통합하고 유대인을 노예로 학대하기 시작하였다. 19왕조 8명의 왕들은 애굽을 세계적인 제국으로 만들었다. 아멘호텝(쿠푸)2세(BC1450- 1420)를 출애굽한 바로로 주장하는 학자와 메르넵타(?-BC1235)를 출애굽한 바로로 주장하는 학자가 있으나 두 가지다 근거가 있다. 라메세스(라암세스) 2세 라암세스(BC1300)는 위대한 왕 중에 한사람이다. 그는 히타이트족(헷족)을 정복하였고, 시리아 전역을 지배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그것으로 상처받은 것을 이집트 전역에서 대규모 건설사업을 일으키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자신의 성공을 기리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며, 선조의 공적을 표절하기도 하였다. 그는 포로를 노동자와 함께 채석장, 벽돌공장, 운하, 신전, 성 만드는데 동원하였다. 이 때 유대인이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왕은 자기 딸들과도 결혼하여 162명의 자녀를 두어 자기혈통으로만 왕위를 이어가게 하였다. 5. 말기 왕국(BC663- BC332) 21-31 왕조 제26왕조의 마지막 왕인 프삼티크 3세 때 페르시아의 왕에게 패배하여 이집트는 페르시아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일시적 회복하였으나, BC330경에 알렉산더에 멸망하여, 에스겔(30:13) 예언대로 다시는 애굽왕이 나오지 못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위치 지도(마케도니아)] BC580경에예레미야가 유대인을 데리고 피난 왔다. 이 때부터 유대인이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 이후에도 계속 살아 유대인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이들이 히브리어를 모르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들을 위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72명이 모였다하여 이 성경을 '70인 역'이라 한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70인 역'이다. 이 일로 예루살렘 교회는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예루살렘을 '어머니 성'으로 생각하며 사랑하였다. 유대인이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알렉산더, 포톨레미왕조, 시저, 아구스도는 유대인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 애굽인, 헬라인이 사는 지역을 3등분하여 살았을 정도로 살기가 좋았다. 바울 시대에 아볼로와 교부 클레멘트, 오리겐이 여기 출신이다. 교부 유세비오는 이 교회 창시자는 마가라고 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가 세운 도시중에 가장 유명하다. |
<BC15세기경 벽돌제조 과정의 벽화, 위 그림 중 살갗이 흰 3명은 유대인으로 추정> |
알렉산드리아의 피로스 등대 파로스 섬에 16층(135m) 높이의 등대는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이다. 당대는 높은 건축의 기술이 없었다고 하며, 16층 높이의 건축물은 20세기에 와서 가능했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 파로스 섬에 거대한 등대를 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사람은 '소스트라테스'라는 건축가이다.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기고 싶어 대리석에 새기게 하였다. '소스트라테스'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고 싶었으나 명령에 거역할 수 없어 대리석에 회반죽을 입히고 왕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진짜 대리석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어 세월이 지나면 자신의 이름이 드려나도록 하였다. 등대꼭대기에는 커다란 이동식 거울을 달아 60km나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태양광선을 한곳으로 모아들여 바다에 떠 있는 배를 불태울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등대가 허물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7세기 무렵 회교인들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함으로 지중해의 지배권이 이 등대로 인하여 기독교를 믿는 콘스탄티노플이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한 계략을 세워 그곳에 이집트의 금, 은 보화가 수 없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을 들은 칼리프는 파괴의 명령을 내렸으며, 보화의 욕심은 천 년의 등대를 무너뜨린 것이다. 잘 목을 뒤늦게 깨달은 칼리프는 중지 명령을 내리고 복구하려고 하였지만, 능력이 없어 반파된 채로 AD14세기까지 있다가 대지진에 완전 파괴되었다. 현재 등대를 복원중이라고 한다. 그리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파라'라고 한다. 파라는 이 등대를 그리스어로 '파라스'라고 부른데서 어원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BC 3세기 프톨레이마이오스 1세가 건립한 도서관으로 소장도서만 70만 권을 자랑하였다. 학자로는 기하학자 유클리드,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 수학자 헤론 등이 강의하면서 연구를 하였던 인류 최초 대학의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문명국가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곳임으로 이것을 방패삼아 반란군이 도서관으로 피신하자, BC 2세기 프톨레이마이오스 7세는 도서관을 불태웠다. 수많은 자료가 타버렸다는 소식이 전하여지자 각국은 '세계 최대'의 명예를 노리고 경쟁적으로 도서관 확장에 나섰다. 그러자 프톨레이마이오스 왕조는 견제계책으로 전매사업인 파피루스 종이 수출을 전면 중단하여 더 이상 책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각 나라는 양과 염소 가죽이 더 질기고 편리한 것을 알아내었고 양피지 책이 일반화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수출품 제 1호인 파피루스 판로를 잃게된 결과 만 초래하게 되었다. 이 도서관은 몇 차례 전화를 당하다가 AD 273년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내전에도 불이 났다. AD 640년 아랍군이 점령한 후 자료를 바그다드로 옮겨가 자취가 사라졌다. 고대 서양학문의 요람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이집트 정부의 주도로 유네스코와 선진 각국의 지원으로 2001년 10월에 13층 규모로 복원 개관한다고 하며, 현재는 50만 권으로 시작하여 800만 권으로 늘릴 예정이라고 한다. |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의 상상도> |
강 [나일강의 지도(사라센)] 4대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일어난다. 강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풍요의 어머니로 생명의 근원인 물을 공급하고, 또 경계의 의미를 지닌다. 국경과 지경으로 강을 경계로 삼는데, 강의 제일 깊은 곳이 경계선이다. 우리나라는 '지경' 이란 동네가 많은데, 이 동네는 어떤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강이 범람하여 진로가 바뀌면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다리는 화합의 의미가 되기도 하는데, 첸교가 대표적이다. 항가리 '첸 다리'는 '부다+페스트=부다페스트'를 만들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도 쓰이는데, '우리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의 요단강과 신화의 스틱스강이 대표이다. 나일강은 가장 따뜻한 강으로 유일하게 적도에서 온대 지방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섬긴 신 멤피스 신은 황소이며, 이집트 여인은 황소 앞에 성기를 노출시키며 원무를 추며 돌았다고 한다. 특히 송아지는 이스라엘인들도 섬기게 되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아몬 신은 암소이며, 아몬의 부인 '무트' 신은 독수리이다. 하늘의 신 '호러스'는 매이다. 태양의 신 '레'는 매이고, 동쪽의 신 '세트'는 악어이다. 죽은 자의 신 '오시리스'는 염소이고, 풍요의 신은 오시리스의 부인 '이시스'로 암소이다. 지혜의 신 '도드'는 원숭이이며, 도드의 부인은 헤카이다. 남쪽의 신 '느켑트'는 뱀이며, 나일강이 성역이다. 그리고 '바로'도 하나의 신이었다. 여러 신 중에 그들은 영원한 삶의 상징으로 '스카라브'라는 딱정벌레를 숭배하였는데 이 벌레가 자생번식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방문객에게 이 벌레를 조각한 목걸이를 팔고 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 아멘호테프 4세(18왕조, BC 1353-1336 재위)는 종교개혁을 하였다. 이집트는 테베의 '아몬 신'과 헬리오폴리스의 '레'가 가장 부유하고 가장 힘센 신으로 나라의 진로를 관장한다고 믿었으며, 왕들은 중요한 사항은 신들에게 신탁을 청하였다. 아멘호테프 4세는 이미 두 신들을 통합하여 '아몬-레(후에 '하라크테' 신)'으로 되어 있는 것을 다시 종교개혁 하여 태양의 신 아톤을 새로이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의식을 확립하여 많은 신은 사라졌다. 수도 테베는 주신 아몬의 사제들이 권력과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왕은 종교개혁 후에 테베를 버린 다음, 새 수도를 텔 엘 아마르나로 옮기고 '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으로 '아케트 아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치세 6년째에 자신의 이름도 '아톤에게 이익되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크나톤'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농사법 나일강이 범람하여 비옥한 땅이 되면 일일이 씨앗을 심기 어려워 씨앗을 마구 뿌려 놓고, 돼지를 몰아 넣어 씨앗을 밟게 하여 돼지가 밟은 곳은 새싹이 나게 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피라미드 높이 230 m, 가로×세로 140m×140m, 330 만 개 돌로 만들어 졌다. 사막가운데 서있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경이롭고 지대도 주위보다 높은데, 이곳까지 배가 돌을 싣고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배가 발굴되어 전시된 것을 보았는데 이 배는 파라오 왕이 이승과 저승을 오고 갈 때에 타라고 함께 매장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사용된 돌은 약700만 톤으로 7톤 트럭으로 100만대 분이고 이 트럭을 한 줄로 세운다면 약 6200 km 넘는데 미국의 동서 길이(약 5000 km) 보다 길며, 경부 고속도로 약15배나 되는 길이이다. 나폴레옹은 이 돌로 파리의 성벽을 쌓는 다면 3m의 높이에 두께는 30cm로 쌓을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 그리스역사가 헤로도토스는 40만 명의 인부가 20년간 일해야 한다고 계산하였다. BC 3000년경에 제4왕조의 왕의 무덤으로 쿠프카 왕 것이 유명하다. 이집트인은 영혼이 육체로 되돌아와 부할한다고 믿었다 . 고대건물은 거의가 천기와 지기에 맞추어 건설했는데 피라미드도 그 중 하나이다. |
<나일강과 카이로> |
땅의 삶을 하늘에 연결하기 위하여 건물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피라미드는 3개인데 이것은 삼태성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데, 삼태성은 제갈공명이 이 별을 보고 자기 죽을 때를 알았다고 한다고 하는 별이다. 피라미드는 헬라어로 '델' 이라 부른다. 웟부분은 매끈하고 아래 부분은 거칠은 이유는 회교의 회당을 짖기 위하여 떼어 갔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 중에 가장 정확하고 가장 크다고 하며, 만든 사람은 현대인의 두뇌만큼 위대하다고 한다. [1971년 NASA의 우주선 마리너 9호가 화성을 촬영하였는데, 사진 속에 피라미드 모양과 스핑크스와 같은 거대한 얼굴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화성인이 설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만든 것은 그 시대에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불가사의 헬라인들이 여행자들의 관심과 즐겨 찾는 건축물 7가지를 정하였는데 1) 이집트(애굽) 피라미드 [위 참조] 2)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신전 참조] 3) 바벨론의 공중 정원 [공중 정원] 4) 터키 에베소(에페소스)의 아데미(아르미테스)신전 [에베소스 참조] 5) 페르샤(바사) 할리카르낫소스의 마우솔루스왕 묘 6) 터키 로도섬(로드스)의 청동상 [로드스 참조] 7)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피로스 등대 이것들은 알렉산더가 지배한 곳에 집중 되여 있으며, 이 중 현존하는 것은 피라미드 뿐이다. 또 다른 7가지 불가사의는 1)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2) 로마의 콜로세움 [아래의 콜로소스와 베스파시아누스 참조] 3) 영국의 스톤헨지 4) 중국의 만리장성 [진나라 참조] 5)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피로스 등대[위 참조] 6)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사원 [소피아 참조] 7)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중에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만 없고 다 현존한다. L. 코트렛 이 선정한 7가지 불가사의 1) 클라크데 슈발리에 요새: 시리아의 십자군의 성채 2) 예루살렘 바위의 돔 사원 3) 그리스 중부 테베의 네크로폴리스(죽은 자의 도시-묘지) 4) 팔미라 고도: 시리아의 고대도시 5) 그리스 중부 델포이(도시국가)의 아폴로 신전 6) 미노스 궁전: 크레타 섬(그레데)의 신전 7) 이집트 왕가의 계곡: 왕가의 무덤은 BC1540년경 투트모세 1세는 바위골짜기에 구멍을 뚫어서 무덤을 만들고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동원된 사람은 모두 죽였다. 이것이 최초로 다른 왕들도 따랐다. 골짜기는 공동 묘지가 되어 '왕들의 골짜기'라고 한다. 이중에 투타크하멘(18세에 타살 당함-BC1350) 것이 가장 유명하고 황금마스크와 화려한 유물은 도굴 당하지 않아 전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왕들의 문'이라 일컬어지는 왕가의 계곡> |
그 밖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 크메르(캄보디아)의 앙코르 돔 사원, 페루 나스카의 그림, 남태평양 이스터 섬의 모아이와 무우 대륙, 페루 쿠스코의 잉카제국 수도와 석축, 영국의 스톤헨지, 멕시코의 마야 문명 등이다. 위의 내용은 그 시대에 소개할 기회가 생기면 설명하기로 하겠다. 스핑크스 머리는 사람, 몸은 사자 모양이다. '살아 있는 형상'의 뜻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수천년 더 오래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무덤의 주인 카프렌 왕의 모습이라 하며, 자기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앞발 사이에 비석이 있는데 내용 중에 꿈에 관한 이야기기가 있다고 한다.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거대한 인간상이나 동물상을 *콜로소스라고 한다. 스핑크스의 수난사를 살펴보면 오스만 투르크(마멜우크인)의 군대가 이집트를 침입하여 원시 대포로 스핑크스를 과녁으로 삼아 연습 중에 코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1779년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피라미드 앞을 지나면서 '병사들이여 4000년 역사가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나, 스핑크스 상이 '거만하게 보인다'며 턱수염을 대포로 떨어 드렸다. 후에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 영국이 턱수염을 수습하여 대영 박물관에 보관하였다. *콜로소스(colossus)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 기자지구의 스핑크스를 보고 콜로소스(거대한 형상)라고 한데서 기인한다. 로마의 콜로세움도 근처에 네로 황제의 거상 '네로 콜로소스'에서 이름이 왔다. 유명한 콜로소스로는 로도의 청동상, 올림피아의 제우스상과 각 나라마다 콜로소스는 많을 것이며, 불교국은 더욱 많을 것이다. 미칼란젤로의 '다비드(다윗)'상도 일종의 콜로소스이다. 미라 스핑크스 밑에 가면 미라 공장이 있다. 미라를 만드는 법은 먼저 뇌를 쇠고리로 코 구명으로 잡아 당겨 나오게 한 후 내장은 들어내고 종려로 만든 술로 잘 씻은 후에 향가루를 뿌리고 다시 꿰맨다. 70여일 말린 후에 밀랍을 먹인 붕대로 시신을 감아 그 위에 점착액을 바른다. 미라를 관에 넣고 잘 만들어진 작은 집 같은 곳에 넣고, 좀더 큰 곳에 넣기를 세 번 반복하면 작은 방만한 크기가 된다. 이것을 무덤이나 피라미드 속에 넣어 보관하게 된다. 미라를 만들 때에 심장은 넣어두었다고 하는데 심장에 양심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저승에서 심장으로 심판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이로시 건물의 1/3정도가 무덤이다. 무덤 속에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미라 때문에 관광객이 찾아와 생계에 수단이 되었다. 기독인의 인구는 적지만 경제권을 쥐고있다. 회교인들과는 사는 구역이 따로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기독인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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