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dson Taylor

2005. 12. 12. 16:00선교자료/3.전도자료

중국 내륙 선교의 개척자 ---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영국, 1832~1905)


허드슨 테일러는 키가 작고 체구가 약한 사람이었고 건강도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으며 교육 또한 잘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중국의 광활한 내륙 지방이 문호를 개방해 복음을 받도록 하셨다. 그때 다른 선교단체는 대영제국의 변두리에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테일러가 처음으로 중국에 도착한 것은 수명이 짧고 비능률적이었던 '중국 복음 전도회(China Evanglization Society)'에 배속받은 1854년이었다. 몇 해 동안 곤란 중에서 실패와 어쩌다 있는 성공을 거듭하고 난 뒤 그는 자기를 파송한 선교부에서 물러나 그 당시로서는 말썽이 많았던 새 선교원칙을 만들어 냄으로 1866년에 16명의 새로운 선교사와 함께 '중국 내륙 선교부(C.I.M)'를 시작했다. 그는 선교부를 위한 자금을 전적으로 기도에 의존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필요한대로 공급하셨다. 테일러는 강력히 복음화에 중점을 두었고 점점 더 내륙 깊숙이 파고 들었다.

가장 큰 소동을 빚은 그 원칙은 복음이 더 잘 받아들여지고 서양의 복음 협외에 의해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는 선교사들이 반드시 중국식 복장을 하고 생활의 모든 면에서 중국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한 것이다. 초기 선교는 많은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C.I.M.은 국내의 다른 선교 단체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본국에서도 테일러를 전적으로 오해하고 바방하게 되었다. 새로운 선교사 중 몇몇이 이 원칙에 반대해 저항을 일으키고 물러서거나 추방을 당해야 했다. 중국인은 언제나 의심투성이었고 때로는 적대감을 품기까지 했다. 중국인과 영국인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그들의 위치를 매우 불안하게 했다. 한 때는 선교부 가옥이 약탈을 당하고 그들 전원이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테일러와 그의 아내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상대방을 몹시 신뢰하였는데 그 급박한 시기에 아내가 죽고 말았다. 자녀 중 둘은 그녀보다 먼저 죽었다. 그래도 그는 그런 난관을 헤치고 하나님의 사업을 이룩했다. 1883년까지 중국의 모든 성(Province)을 방문하였고 3개 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에 선교사가 살게 되었다. 선교부는 점점 자라서 오랫동안 중국 최대의 선교 단체가 되었다.
C.I.M.의 현재 이름은 '해외 선교회(Overseas Missionarv Fellowship)'이다. 1940년대 후반에 중국 본토에서 선교 활동이 끝날 즈음 C.I.M.은 더 넓은 아시아 지역으로 활동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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