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uel Zwemer
2005. 12. 12. 16:05ㆍ선교자료/3.전도자료
회교 지역의 선교 --- 사무엘 즈웨머(Samuel Zwemer 미국, 1867~1952)
즈웨머는 회교 세계의 선교를 개척적으로 조직하고 추진한 사람이었다. 그는 놀랄 만한 정력가며 회교 국민을 깊이 사랑했다. 그는 설교사로서, 작가로서, 전도자로서, 또 변증자로서의 그의 능력을 회교 국민을 위해 사용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회는 밀폐되고 반목을 던지는 세계의 한 부분에 메세지를 전하는 일에 무관심했다.
즈웨머는 학생 의용 운동대의 1,000명 회원 중 하나였다. 제임스 칸틴(James Cantine)과 더불어 그는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고 초청도 않은 지역에서 봉사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아랍 세계를 택했지만 소속된 교파에 의해 이 분야에서 봉사하려던 제안이 '실행 불가능하다'고 거절 당했는데 그러자 그들은 단독으로 '미국 아랍 선교회(American Arabian Mission)'를 형성했다. (후에 이 교파는 이 사업을 병합했다.) 1890년에 즈웨머는 이락의 Basiah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내와 같이 이 아라비아 반도를 두루 다니며 일했다.
초년에는 무척 힘들었다. 즈웨머의 아이가 둘씩이나 죽었고 환경 조건을 원시적이었으며 사업의 결과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렸다. 1905년 건강이 약해지자 미국에 되돌아 와서 S.V.M.(학생 선교단) 최초의 지원자 담당 서기(Candidate Secretary) (역주 : 선교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에 관해 임무를 수행하는 직원)가 되었다. 그는 힘있는 설교가였기 때문에 그러한 은사를 활용함으로써 많은 학생들이 선교 사업에 그들의 삶을 투자하도고 자극하였고 또 교회 내에서는 선교 사업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1910년 그는 그의 사업으로 되돌아와 2년 뒤에는 회교 세계 전역에 선교 사업을 퍼뜨리기로 마음 먹고 카이로로 이주해 갔다. 카이로는 더욱 좋은 선교 전략적 중심지로서 선교사 훈련이 가능한 곳인 동시에 출판업(즉 나일 선교 출판사)을 일으킨 곳이기도 했다. 그는 남아프리카 같은 곳이나 네덜란드령 인도 같은 지역을 광범위하게 돌아다니며 독어, 영어, 아랍어로 설교했다. 이슬람교, 회교 지역, 선교사업, 성경 등에 관해 쓴 50여권의 책 말고도 그는 아랍어로 소책자를 썼다. 그는 회교 세계에서 기독 문서 사업이 필수임을 느꼈고 그 문서를 장려하고 배부하는 일이 편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Moslem(지금은 Muslim) World'라는 간행물을 창간, 편집했다.
1906년에 그는 카이로에서 선교사 수련회를 구성했고 1911년에는 럭노우에서의 또 다른 수련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회교 세계의 성격과 그곳에 기독교 증인이 필요함을 전세계의 기독교인에게 계몽시켰다. 말년에 그는 프린스톤 신학연구원에서 선교와 비교종교학의 교수가 되었다. 회교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일은 항상 커다란 반대에 부딪치고 또 수적 응답조차 많지 않지만 그래도 사무엘 주웨머가 뜻을 불어 넣기 위해 그토록 힘쓴 사업은 오늘날도 여전히 성실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즈웨머는 회교 세계의 선교를 개척적으로 조직하고 추진한 사람이었다. 그는 놀랄 만한 정력가며 회교 국민을 깊이 사랑했다. 그는 설교사로서, 작가로서, 전도자로서, 또 변증자로서의 그의 능력을 회교 국민을 위해 사용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회는 밀폐되고 반목을 던지는 세계의 한 부분에 메세지를 전하는 일에 무관심했다.
즈웨머는 학생 의용 운동대의 1,000명 회원 중 하나였다. 제임스 칸틴(James Cantine)과 더불어 그는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고 초청도 않은 지역에서 봉사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아랍 세계를 택했지만 소속된 교파에 의해 이 분야에서 봉사하려던 제안이 '실행 불가능하다'고 거절 당했는데 그러자 그들은 단독으로 '미국 아랍 선교회(American Arabian Mission)'를 형성했다. (후에 이 교파는 이 사업을 병합했다.) 1890년에 즈웨머는 이락의 Basiah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내와 같이 이 아라비아 반도를 두루 다니며 일했다.
초년에는 무척 힘들었다. 즈웨머의 아이가 둘씩이나 죽었고 환경 조건을 원시적이었으며 사업의 결과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렸다. 1905년 건강이 약해지자 미국에 되돌아 와서 S.V.M.(학생 선교단) 최초의 지원자 담당 서기(Candidate Secretary) (역주 : 선교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에 관해 임무를 수행하는 직원)가 되었다. 그는 힘있는 설교가였기 때문에 그러한 은사를 활용함으로써 많은 학생들이 선교 사업에 그들의 삶을 투자하도고 자극하였고 또 교회 내에서는 선교 사업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1910년 그는 그의 사업으로 되돌아와 2년 뒤에는 회교 세계 전역에 선교 사업을 퍼뜨리기로 마음 먹고 카이로로 이주해 갔다. 카이로는 더욱 좋은 선교 전략적 중심지로서 선교사 훈련이 가능한 곳인 동시에 출판업(즉 나일 선교 출판사)을 일으킨 곳이기도 했다. 그는 남아프리카 같은 곳이나 네덜란드령 인도 같은 지역을 광범위하게 돌아다니며 독어, 영어, 아랍어로 설교했다. 이슬람교, 회교 지역, 선교사업, 성경 등에 관해 쓴 50여권의 책 말고도 그는 아랍어로 소책자를 썼다. 그는 회교 세계에서 기독 문서 사업이 필수임을 느꼈고 그 문서를 장려하고 배부하는 일이 편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Moslem(지금은 Muslim) World'라는 간행물을 창간, 편집했다.
1906년에 그는 카이로에서 선교사 수련회를 구성했고 1911년에는 럭노우에서의 또 다른 수련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회교 세계의 성격과 그곳에 기독교 증인이 필요함을 전세계의 기독교인에게 계몽시켰다. 말년에 그는 프린스톤 신학연구원에서 선교와 비교종교학의 교수가 되었다. 회교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일은 항상 커다란 반대에 부딪치고 또 수적 응답조차 많지 않지만 그래도 사무엘 주웨머가 뜻을 불어 넣기 위해 그토록 힘쓴 사업은 오늘날도 여전히 성실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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