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2005. 12. 12. 16:03ㆍ선교자료/3.전도자료
미지 선교의 꿈을 이룬 백작 --- 니콜라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진젠도르프백작은 큰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진 독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그를 국가 공직에 있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몇 년 후 그는 고관직에서 사임하고 전도 사업에 헌신할 수 있었다. 결혼 시에도 그는 아내와 더불어 서약하기를 직위에서 물러나 그들의 부를 그리스도의 일에 바치겠다고 했다.
1723년에 진젠도르프는 소유지로 은게해 신조 때문에 핍박바던 '모라비안 종파(역주 : 9세기경 콘스탄티노블 교회의 희랍 신부인 시릴[Cyrill]과 메소디우스[Methodius]에 의해 모라비아 지방에 복음이 전파됨.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다가 종교 개혁시에 크게 융성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성을 반박, 30년 전쟁 시 큰 핍박을 받아 여러 곳을 피하던 중 일부가 이 진젠도르프백작의 은거지로 찾아왔다. 미국에 건너간 모리비안 교도는 특별한 교리가 따로 있지 않고 대체로 복음주의적이다.)'에게로 갔다. 그들은 'Herrnhut(역주 : 진젠도르프백작이 경건주의의 한 종파를 일으킨 Sachsen 지방의 땅 이름)'라 불리는 공동 사회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교회로 조직되어 갔다. 그들은 소박하게 살았고, 집단의식과 십자가에 못박힌 구세주에게로 향하는 헌신 및 그의 뜻에 대한 전적 복종을 특별히 강조했다. 진젠도르프는 영적 감독관이었고 드디어는 모리비아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731년 진젠도르프는 그린랜드에서 온 에스키모를 두 명 만났는데 그곳의 선교가 버림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또 서인도 제도에서 온 흑인 개종자를 만났는데 그는 혹심한 생활 조건과 영적 궁핍에 대해 들려 주었다.
진젠도르프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가 들은 것을 보고하자 교인들도 역시 동감이었다. 그들은 즉시 선교사 두 사람을 서인도 제도로 파송했고 그린랜드에도 다른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 사업은 신속히 퍼져나가 가장 어렵고 악조건의 지역까지도 도달하게 되었다. Herrnhut는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전에 성공회와 신교가 200년 동안에 발족하게 했다. 그들은 복음화 사업이 교회에서 최고의 우위를 차지해야 하고 그것이 공동 집단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선교사들은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자급 자족했고 복음을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전했다. 그들의 정책은 진젠도르프에 의해 틀이 짜였는데 그는 33년 동안 지도자 노릇을 했다. 그는 피선교민을 다스리려 하지 말고 다만 진젠도르프와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라고 강조했다. 선교에 대한 그의 헌신과 희생의 기준은 거의 짝을 찾기가 힘들었다.
진젠도르프는 당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체험을 강조한 "경건파"운도의 뛰어난 대표자였다. 그가 자은 많은 찬송가가 오늘날까지도 애창된다
진젠도르프백작은 큰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진 독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그를 국가 공직에 있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몇 년 후 그는 고관직에서 사임하고 전도 사업에 헌신할 수 있었다. 결혼 시에도 그는 아내와 더불어 서약하기를 직위에서 물러나 그들의 부를 그리스도의 일에 바치겠다고 했다.
1723년에 진젠도르프는 소유지로 은게해 신조 때문에 핍박바던 '모라비안 종파(역주 : 9세기경 콘스탄티노블 교회의 희랍 신부인 시릴[Cyrill]과 메소디우스[Methodius]에 의해 모라비아 지방에 복음이 전파됨.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다가 종교 개혁시에 크게 융성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성을 반박, 30년 전쟁 시 큰 핍박을 받아 여러 곳을 피하던 중 일부가 이 진젠도르프백작의 은거지로 찾아왔다. 미국에 건너간 모리비안 교도는 특별한 교리가 따로 있지 않고 대체로 복음주의적이다.)'에게로 갔다. 그들은 'Herrnhut(역주 : 진젠도르프백작이 경건주의의 한 종파를 일으킨 Sachsen 지방의 땅 이름)'라 불리는 공동 사회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교회로 조직되어 갔다. 그들은 소박하게 살았고, 집단의식과 십자가에 못박힌 구세주에게로 향하는 헌신 및 그의 뜻에 대한 전적 복종을 특별히 강조했다. 진젠도르프는 영적 감독관이었고 드디어는 모리비아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731년 진젠도르프는 그린랜드에서 온 에스키모를 두 명 만났는데 그곳의 선교가 버림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또 서인도 제도에서 온 흑인 개종자를 만났는데 그는 혹심한 생활 조건과 영적 궁핍에 대해 들려 주었다.
진젠도르프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가 들은 것을 보고하자 교인들도 역시 동감이었다. 그들은 즉시 선교사 두 사람을 서인도 제도로 파송했고 그린랜드에도 다른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 사업은 신속히 퍼져나가 가장 어렵고 악조건의 지역까지도 도달하게 되었다. Herrnhut는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전에 성공회와 신교가 200년 동안에 발족하게 했다. 그들은 복음화 사업이 교회에서 최고의 우위를 차지해야 하고 그것이 공동 집단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선교사들은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자급 자족했고 복음을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전했다. 그들의 정책은 진젠도르프에 의해 틀이 짜였는데 그는 33년 동안 지도자 노릇을 했다. 그는 피선교민을 다스리려 하지 말고 다만 진젠도르프와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라고 강조했다. 선교에 대한 그의 헌신과 희생의 기준은 거의 짝을 찾기가 힘들었다.
진젠도르프는 당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체험을 강조한 "경건파"운도의 뛰어난 대표자였다. 그가 자은 많은 찬송가가 오늘날까지도 애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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