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설교 -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

2020. 11. 21. 11:13목양자료/2.설교자료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

말라기2:17-3:5

 

들어가는 이야기

 

엠비(MB)의 추억이라는 최근에 나온 영화가 있습니다.

엠비는 물론 명박 대통령의 이니셜을 의미합니다만 이 영화는 5년 전 17대 대통령을 뽑을 때 엠비의 유세현장과 공약을 돌아보며 지금 그 약속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짚고 넘어가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느낀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의 말이, 특별히 정치인의 말이 얼마나 허황되고 믿지 못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엠비가 쏟아낸 말과 공약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현직 대통령을 엠비라고 표현하는 것에 기분이 나쁘신 분은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영화제목이니까 잠간만 그렇게 불러보겠습니다.)

엠비의 대표적인 공약이 7%의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 4만 불 그래서 세계7대강국이 된다는747 공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약들이 얼마나 지켜졌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지금의 후보 중 하나가 대통령이 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여기에는 불가항력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국제정세나 세계경제의 침체 등 여러 가지 형편이 있을 것입니다.

어째든 인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너무 언론에 속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엠비의 추억에 보면 방송에서 방영되어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심금을 울리던 영상과 대사들이 얼마나 꾸며지고 연출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여 진다고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진짜가 아닌 가짜인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적그리스도의 기적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셋째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다 드러나고 보여 질 경우 얼마나 부끄러울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엠비의 추억은 영화 장르상 코미디입니다.

대통령선거 유세 중에 있었던 실제의 일을 편집하여 만든 영화인데 그것을 보면서 정말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중에 우리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가 있다고 할 때 무슨 인생이 될 것 같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과거 우리가 했던 말과 삶을 편집해서 다 보여준다고 할 때 무슨 인생이 될 것 같습니까?

코미디 같은 인생이 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감동적인 인생이 될 것 같습니까?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에 보면 코미디 같은 인생,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라기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이 시대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제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짓고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던 주전 400에서 300년 사이의 시대입니다.

제가 이 시대를 코미디 같은 시대,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이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217절을 보면,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유대 백성들을 말하는데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하는데 이들은 기쁘게 해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괴롭혀드렸습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말로 하나님을 괴롭혀드렸습니다.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좋아하시고 기쁨이 된다.”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였고 특별히 성전건축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다시 축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축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상황은 여전히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한 자들이 점점 강대해져 갈 때에 이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하나님은 악을 더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이 하나님을 괴롭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주시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공부를 시키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향하여 당신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부모님은 나보다 옆집에 있는 개똥이를 더 사랑하십니다.’ 라고 한다면 얼마나 불효하는 것이고 부모님을 괴롭히는 것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분명하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음에도 2000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재림은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말로 인하여 괴로워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셨음에도 조금 내형편이 좋지 않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괴롭게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조금 힘들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섭리도 알지 못한 체 하나님을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을 통하여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모습이 바로 코미디 신앙생활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제사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3절 하 반절에 보면,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는 말씀이 있고 4절에는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 유대백성들은 공의로운 제물을 바치지 못하고 있고 그 봉헌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말라기 시대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저는 것, 병든 것, 더러운 떡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고 말씀하시까지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면서 총독보다 존대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는 이 모습이 여러분 온전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보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이 모습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조건 제사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여 저는 것 병든 것 더러운 떡을 드리는 이 모습이 얼마나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입니까?

 

세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살았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대로 나를 경외하지 않았다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코미디 같은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제사도 드리고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드리는데 속으로는 전혀 경외하지 않는 모습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할 때 얼마나 코미디 같은, 쇼 같은 인생입니까?

 

오늘 한국교회의 코미디 신앙생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말라기 시대의 유대 백성들만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와 비슷한, 이와 똑같은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일보 겨자씨라는 코너에 나온 실제 이야기입니다.

어느 시골교회의 장로님 두 분이 적지 않는 돈 거래를 하였던 모습입니다.

채무자 장로님이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채권자 장로님이 법정에 고소를 하였습니다.

같은 교회 장로들끼리 고소를 하고 당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덕이 안 됨을 걱정하던 목사님이 큰 결단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의 전세를 빼기로 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상의가 되어 전세를 빼서 장로님의 채무를 갚아 주었습니다.

장로님들의 문제는 잘 해결이 되었고 두 분의 장로님들은 매우 만족해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살던 집이 없어지자 목사님은 사택으로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장로님들이 목사님이 약속을 어겼으니 교회를 떠나달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목사님을 모실 때 부모님을 모시지 않기로 했는데 이제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으니 약속위반이고 그러니 교회를 떠나라는 것입니다.(물론 돈도 안 갚고 말이죠.)

 

목사님들의 코미디도 이에 뒤지지 않습니다.

부흥회를 서로 돌려가면서 한다고 합니다.

한 번은 우리교회에 와서 해 주고 다음번에는 당신교회에 가서 하는 것으로 약속을 하는데 문제는 부흥회 사례를 굉장히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교회에서 그만큼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줄때는 교회 돈 주고 받을 때는 자기 주머니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인데, 가끔씩 어느 교회 임직식 순서를 맡게 되면 축의금은 교회 돈으로 하고 순서사례비는 제가 챙깁니다.

어떤 돈 많은 교우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에게 기도부탁을 하면서 이 병을 고쳐주시면 큰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가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치지 못하고 그 환자 교우가 세상을 떠나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목사님은 약속한 돈을 달라고 했고 그 가족들은 고치지 못하였으니 줄 수 없다고 주지 않았습니다.(이상의 이야기는 상식수준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의 예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한국 교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모습을 편집해서 한국교회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속속들이 보여준다고 하면 얼마나 창피하고 코미디 같은 모습에 얼굴이 뜨겁겠습니까?

우리가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코미디 같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코미디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 사자를 보내리라

 

오늘 본문에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러한 신앙생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내 사자를 보내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에서 우리는 비슷한 말을 볼 수 있는데 내 사자’ ‘언약의 사자등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먼저 예비케 하는 사자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오시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사자가 필요하고 그를 먼저 보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 먼저 세례요한을 보낸 것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초림 때의 주님은 사실 심판의 주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예비시킨 사자라고 생각합니다.

초림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해결하려 오셨습니다.

그 주님은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고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비케 하신 하나님은 이제 심판하실 재림의 주님을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은 재림의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예비해야 할 때입니다.

다시 초림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예비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을 잘 맞이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을 때 재림의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제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 이런 모든 문제의 중심에 제사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지도하고 바르게 인도해야 할 최고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만 그들이 올바른 모습으로 서지 못했을 때 백성들이 바로 설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바른 신앙으로 서지 못했을 때 그들은 깨끗한 제물을 드리지 못하고 병든 것 저는 것 온전하지 못한 것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성도들을 가리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영광이자 동시에 큰 책임을 주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바르게 설 때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사장들이 올바로 설 때 백성들이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예배가 바르게 드려질 때 성도들이 올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 우리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사가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회복이 없이 신앙의 회복이 없고 예배의 회복이 없이 믿음의 회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사가 올바르지 못했을 때 그들의 삶이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내 맘대로의 예배,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시간이 있으면 드리고, 할 일없으면 나오는 그런 예배의 모습으로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형식적인 예배, 의례적인 예배, 습관적인 예배를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회복하여 신앙의 회복, 가정의 회복, 교회의 회복, 사회와 민족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반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잘되는 것을 보면서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실망감이 적당한 신앙생활, 믿지 않는 자와 별 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만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도 적당하게 나도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적당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물들고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렇더라도 나만은 구별되게 살아야 하고 나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A. G. 로엠메르스의 어린왕자 두 번째 이야기중에 세상을 바꾸는 단 한 가지 방법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착한 아들을 원한다면 먼저 좋은 아빠가 되는 거고, 좋은 아빠를 원한다면 먼저 좋은 아들이 되어야겠지.

남편이나 아내, 상사나 부하직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간단히 말해서 세상을 바꾸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자신을 바꾸는 거야"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는 것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진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내가 책임을 지면됩니다.

다른 사람 바라보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될 때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내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좋은 교회,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엠비의 추억은 곧 우리의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의 추억, 장로의 추억, 교우의 추억, 우리 교회의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추억이 코미디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코미디 같은 인생, 코미디 같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진실한 인생, 진실한 신앙생활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코미디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가 되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검색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