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0. 15:56ㆍ목양자료/2.설교자료
성령으로 사는 성도의 삶
로마서 8:12-17
지난 주일에 우리는 성령강림주일로 지냈습니다.
성령강림주일 다음 주일로 지키는 오늘은 교회력으로 볼 때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리켜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세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이라는 면에서 전혀 차이가 없고 일체가 되신다는 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입니다.
세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은 하나가 되신다, 즉 일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에 의하면 한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역할이라는 말은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이지만 때로는 남편이 되고 때로는 아빠가 되고 때로는 목사가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한 분이신데 때로는 성부 때로는 성자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세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동시에 하나입니다.
세 하나님이 각자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믿어야 할 내용입니다.
이 말을 제일 먼저 사용한 사람은 터툴리안이라는 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지 않고는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예수님에게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삼위 하나님의 역사가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분명 세 하나님으로 존재하십니다.
이러한 삼위일체가 왜 중요하냐 하면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고 사람이라면 그 분은 죄가 있었을 것이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수 없었고 대속의 죽음의 효과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죄인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우리가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하나님이시고 성자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을 믿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특히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령 하나님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의 역사를 우리는 믿고 따라야 하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대로 사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말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대로 사는 인생이라고 꼭 믿지 않는 자들만을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육신대로 살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랐지만 그는 항상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목표대로 살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기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3년을 따라 다녔던 스승을 은 30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돈으로 밭을 샀지만 그 인생은 자살로 끝나는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 때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으로써’ 즉 성령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데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육신대로 사는 사람과 달리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살게 됩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뜻 자기의 목표를 죽이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목표대로 삽니다.
이렇게 영으로 살게 될 때 그 인생이 성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항상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진정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는 줄 믿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승리의 길이며 행복의 길이며 주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여러분들 속에 성령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순간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과 임재를 잘 구별하지 못하여서 때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성령님은 믿는 성도들 속에 늘 함께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다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미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임재하고 계시며 우리와 동행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은 먼데 계신 분도 아니고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분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미 성령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님에게 아예 관심도 없이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삽니다.
어떤 사람은 급할 때만 성령님을 찾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여러분들과 늘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잊지 마시고 늘 동행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13절 말씀에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소극적으로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중에 하나가 바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어떤 안수집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20년 이상 교회 생활 하면서 교회의 안수집사가 되셨는데, 이 분이 커피를 마시면서 지나가는 말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옛날에 교회 다니기 전에 길을 가다가 거지를 만나면 엉덩이를 발로 차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지를 만나며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적은 돈이라도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별로 흥미로운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거하시는 삶을 살다보니 그 속에 남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많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그 집사님의 마음에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도록 우리가운데 늘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도 모르게 변화된 삶을 보고 내 자신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여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도록 역사하십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살도록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우리는 변화시키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여러분, 무시하지 마시고 성령의 역사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 수 있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역사가 무서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의 시대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서움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고 심판을 받기 때문에 율법을 지킵니다.
지금도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마지못해서 율법을 지킵니다.
이렇게 두려움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경우에는 외식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 의해 말씀을 지키게 되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기쁨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고난의 말씀마저도 다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힘입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며 성령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아버지라고 아주 편하게 아주 친근하게 부르면서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새 신자를 영접시키기 위하여 사 영리를 사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사 영리에 나오는 새 신자 영접기도는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어지는 기도문 속에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런 기도를 따라 하도록 요청하는데 그런데 이런 기도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 예수님,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 우리는 얼마나 쉬운 기도이며 얼마나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합니까?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잘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마음껏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속에 기쁨과 감격이 생기고 모든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특권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를 부르면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이심을 또한 알게 됩니다.
17절 말씀그대로 ‘자녀이면 상속자가 됩니다.’
자녀의 축복은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은 곳인가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도 배설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곳을 우리는 상속으로 받게 됩니다.
그것을 성령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우리로 그 소망가운데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런 상속을 받는 성도들은 당연히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이기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님은 우리에게 증거 하시고 보여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상속받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상속과는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자꾸만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라, 나를 섬기라고 유혹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런 유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것은 잠깐이요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얼마 있지 않아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승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계속되는 너무나 좋은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확신하면서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이기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 barnab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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