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주일 설교-만사를 성령으로 행하소서

2019. 6. 10. 15:47목양자료/2.설교자료

 

만사를 성령으로 행하소서.”

성경:고린도전서 2:1-16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표현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표현을 하느냐는 중요합니다. 표현 그 자체가 그 사람의 됨됨이뿐 아니라 현재의 생각,사상,행동,신앙,종교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가장 중요한 표현이 무엇이어야하는가를 말하여주고 있습니다.

 

1. 내가 전해야할 것은 십자가였습니다.(1-3)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많이 합니다. 만담도 하고, 소담도 하고, 우화도 하고, 코미디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허탈한 것입니다. 의미도 없고 남는 것도 없는 단순한 그 순간의 웃음만을 위하여 살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심각한 대화를 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를 따라 중요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그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말하는 일에 집중하였다고 말합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미사여구로 잠시동안의 흥을 돋우는 것으로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를 약하게 하였고, 두렵게 하였고, 심히 떨게 하였을까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어 구원받게 하려는 것을 표현하는데 그랬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1-3)

 

 

2.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사역하였습니다.(4-9)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하였을 때 그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 아니하였고, 인간적인 재치로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이것을 그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바로 이러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도 바울의 메시지, 그의 설교는 성령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이렇게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에 정통한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명문을 자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학문적인 지식 체계는 여러 가지 수사학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만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자들이 세상적인 만담의 유혹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진수 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나, 인간적인 성공 사례나, 간증을 더 즐긴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전한다는 것이 진부한 것처럼 여겨지는 강단이 많은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중요한 실책을 범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이 빠진 겉치례가 되고야만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대화, 그리스도가 빠진 강단, 십자가와 부활이 빠진 메시지는 이미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기 위하여 설교를 하는 것이고, 살리기 위하여 전도하는 것이고, 살리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죽이기 위하여 사역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리는 최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with a demonstration of the Spirit's power)/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God's power)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

성령의 나타남은 유익하게 합니다. 성령의 은사입니다. 나타난 것은 은사라는 말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3. 오직 성령만이 다 아십니다.(10-16)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10)

실로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0-13)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고린도교회에 전도하였고 말씀을 전하였으며 이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른 것이며,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만사를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다면 성령의 능력 안에 역사하는 전도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the mind of Christ)을 가졌느니라"(16)

 

 

잠자는 영성을 회복하라(삼상 30 : 1 - 10)

 

누구나 지나온 시간들을 뒤돌아 볼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감정은 아쉬움과 후회 그리고 안타까움 일 것입니다. 저 자신도 돌이켜 보면 아쉬웠던 일들, 후회스러웠던 일들이 많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난날 실수와 실패가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실패투성이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많은 우리의 실패와 실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잡고 계신 그 손을 절대로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역사상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귀하게 쓰임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쓰라린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더 가까이 하고 더욱 의지하고 더욱더 잘 섬기는 기회로 삼았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이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과거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아주 놀라운 증거를 경험했던 다윗이 환경과 사람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실패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윗이 그 실패에서 어떻게 승리로 회복하고 있는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다윗의 영성과 긴밀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 본문에 소개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하여 그가 왜 실패를 하였고 어떻게 자신의 실패를 깨달았으며 또한 어떻게 그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었는지를 영성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그는 왜 실패했는가?

 

우리는 다윗이 실패한 이유를 생각하기에 앞서 다윗의 승리와 성공을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다윗의 실패가 주는 의미를 더 의미 깊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삼상 16장에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삼상 17장에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주 화려한 데뷔를 합니다. 20살도 못되는 어린 나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이 두려워하던 골리앗과 싸워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이 승리의 사건으로 인해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는 계속되는 놀라운 영적인 승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다윗의 인기와 명예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지명 수배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윗은 매일 매일 쫓겨다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훌륭한 점은 그의 살아있는 영성입니다. 정말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언제나 기도를 쉬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과 의논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윗은 비록 쫓기는 신세였기는 하지만 영적으로는 매일 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언제나 행복했으며 만족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놀라운 영적 승리를 계속 하던 다윗에게 영적인 내리막 길이 찾아왔습니다. 즉 다윗의 영성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자신도 그것을 미처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통해 다윗은 영적인 내리막길을 내려가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알려면 삼상 27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삼상 27:1-2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일어나 함께 있는 육백 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계속해서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다 보니까 어느날은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블레셋의 아기스왕에게 투항을 합니다. 그러자 블레셋왕 아기스는 다윗과 600명의 부하를 환영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시글락이라고 하는 고을을 주어 다윗과 600명의 군사, 또한 그들의 가족들만 따로 살게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모처럼 14개월 동안이나 아주 편하게, 아무런 걱정없이 평안하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때부터 다윗의 살아있던 영성은 서서히 잠자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내리막길을 급속도로 걷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28장을 보니까 다윗은 묘한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블레셋왕 아기스는 다윗에게 출전준비를 요청했습니다. 자기편이 되어 이스라엘과 싸워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과거에 골리앗을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앞으로 사울이 죽으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과 한편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며 이스라엘 군사를 죽이란 말입니까? 정말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임. 그래도 어쩔 수 있습니까? 블레셋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니 왕의 명령에 따를 수 밖예요. 그래서 출전을 합니다. 그러나 삼상 30장에 보니까 다시 왕이 다윗을 불러 출전을 취소하고 다시 시글락으로 가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유인즉 블레셋 장군들이 생각해 보니 다윗은 옛날 블레셋과 싸운 적군이요 골리앗을 죽인 원수요 그리고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참모들이 생각해 보니 다윗은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전쟁 중에 언제 칼을 우리에게 돌릴지 모르는 놈입니다. 왕에게 탄원서를 올립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윗의 마음은 불쾌하고 불안했습니다. 이미 자기는 블레셋장군들에게 의심을 받고 있었고 어쩌면 아기스왕에게까지도 의심받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웬일입니까? 다윗과 600명의 부하들이 시글락으로 돌아와보니 그들이 없는 사이에 아말렉 군사들이 그 성을 침공하여 전부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자녀들을 전부 사로잡아 갔으며 재산을 하나도 없이 약탈해 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들은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울었습니다. "세상에! 사울의 손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해 보려고 이곳까지 도망 와서 살고 있는데 사랑하는 처자식이 사로 잡혀 가 버렸다니... 세상에! 이럴 수 있단 말인가?" 600명의 부하들은 울다가 울다가 너무나 분하고 기가 막혔는지 급기야 다윗에게 돌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다윗의 충성스런 부하들이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 생각에는 이렇게 된 것이 다 다윗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다윗의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600명의 부하, 언제든지 필요하면 목이라도 내놓을 수 있던 그들이 다윗을 배신하려고 하는 순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까지 쓰라린 실패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다윗은 이런 실패를 당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1)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기도하는 영성이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원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기도를 쉬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하나님과 의논했던 사람입니다.

 

삼상 23:1-5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라라 하신지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다윗이 한창 400명의 원통한 사람들과 함께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때입니다. 그때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지역인 그일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의협심이 많은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가서 블레셋사람을 칠까요?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응답).

 

그러나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반대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붙어 살기도 힘든 때인데 무슨 남의 일에 신경을 쓰느냐고 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다시 기도합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응답을 이유로 부하들을 설득합니다. 블레셋을 쳐 그일라를 구원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판단으로 행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과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아무리 부하들이 반대하고 참모들이 안들어줘도 기어이 하나님뜻에 따릅니다. 참으로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아갔습니다. 바로 이런 다윗이었는데 그가 삼상 27장에 와서는 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블레셋에 가서 투항할 때에는 하나님께 먼저 묻지를 아니합니다. 또 블레셋을 도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러 갈때에도 역시 하나님께 묻지를 아니합니다. 바로 이때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었던 것을 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길때에도 기도했습니다. 죽을 고비고비를 만날 때도 기도하고 모든 사람이 반대해도 하나님 뜻이면 순종했던 사람이었습니다.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윗은 블레셋으로 갈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를 안했습니다. 하나님과 의논을 안했습니다. 이때부터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보았다는 말이 전혀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마음속 생각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의 기도의 영성이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귀중한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멈추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기도가 멈추어져 있다면 아무리 현실이 잘되어지고 잘나가고 있다 할지라도 기도의 멈춤 자체로 그는 이미 실패하고 있는 것이며 패배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의 영성이 잠을 자거나 죽으면 그 자체가 실패요 패배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왕 아기스에게 아부하여 시글락이라는 곳에서 14개월동안이나 아무런 어려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말 겉으로는 아무 걱정이 없는 삶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기도 안하고 잠시 평안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잠시후면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처참한 패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잡혀가고 자식이 잡혀갔으며 가옥이 다 불타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생사고락을 함께 하리라고 했던 600명의 부하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패배였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데도 일이 잘 됩니까? 기도를 멈추었는데도 모든 것이 평안하며 마음먹는 대로 잘 됩니까? 기도의 영성이 죽어있는데도 평통합니까?

 

그렇다고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불안해야 합니다. 그것은 폭풍전야 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실패의 시작은 기도의 멈춤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멈춘 그 시간이, 실패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영성이 죽는 그 시간부터가...

 

 

2)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사람을 바라보며 두려워했습니다.

 

삼상17장에 나오는 다윗의 모습! 얼마나 당당한 모습입니까? 온 이스라엘이 골리앗 한사람으로 인해 덜덜덜 떨고 있을 때 다윗은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골리앗을 향해 나갔습니까? 자신과 도무지 비교할 수도 없었던 거인 골리앗을 향해 막대기 하나와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지고 당당하게 나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다윗의 살아있는 영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영성이 살아있으니까 참으로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삼상 27장에 나오는 다윗은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삼상 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지금 다윗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했던 다윗이 이제는 사울왕을 너무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매우 초라하고 초췌한 다윗의 모습이 아닙니까? 왜 이러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본대신 사울을 바라보았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던 다윗이 이제는 인간 사울을 바라봅니다. 하나님만 의지했던 그의 영성이 죽으니까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럴 때 다윗의 눈에 비치는 사울의 모습이 얼마나 커 보였는지 다윗은 그만 절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성령이 충만할 때는 비록 사울이 자기를 향해 창을 던져도 마음에 여유가 있었고 든든했는데, 이젠 믿음 없는 눈과 영성이 죽은 마음으로 사울을 바라보니 온통 사울의 손에 잡혀 죽을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두 번째 실패 원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보면 실망과 절망뿐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십시다.

 

 

3) 그는 블레셋을 대적하지 않고 블레셋과 타협함으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원래 블레셋과 원수되는 사람입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였고, 블레셋이 그일라 땅을 노략할 때도 블레셋을 쳤던 사람이며 앞으로 왕이 되어도 블레셋과 싸워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블레셋에 들어가서 아기스왕에게 투항을 하였고 계속해서 아기스와 타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니 다윗은 블레셋과 한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구별된 그의 영성이 세속화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걱정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14개월 동안이나 아무런 문제없이 정말 평안하게 살수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지도 않았고 도망다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너무나 평화스러웠고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보니 그것은 거짓 평화였음이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타협으로 얻어낸 잠시 동안의 평화는 철저히 거짓된 평화였습니다. 이것은 거룩하게 구별된 영성이 세속화 되어버릴 때 나타는 결과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투쟁해야 할 성도가 거룩한 영성으로 구별되어 있을 성도가 세상과 타협을 통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마귀와 세상과 죄와 싸워야 할 사람이 타협함으로 안정을 누리고 있습니까? 거짓된 평화에 속지 마십시오. 그 평화는 언젠가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 질때가 올 것입니다.

 

 

2. 다윗은 실패를 어떻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1)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 자신의 실패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처음엔 몰랐습니다. 기도의 멈춤이 실패인줄도 몰랐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실패의 원인인줄도 몰랐으며 아기스와 타협하며 산 것이 거짓 평화인줄 몰랐습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거짓된 평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실패를 했는데, 실패 중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그 모습이 얼마나 불행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 실패의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나서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실패한 모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아기스와 타협하여 얻은 모든 소유와 평안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릴 때 자신의 실패를 깨닫습니다. 물질을 잃어버리고 건강이나 명예, 또 다른 많은 소중한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하나님께 항복하고 두손을 듭니다.

 

 

2) 또 하나, 그는 부하들의 배신을 통해 실패를 알게 됩니다. 다윗의 부하 600명은 다윗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다윗에게 일사각오 백절불굴의 총성을 각오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처자식이 다 잡혀갔고 가옥이 다 불타 버렸을 때 그들은 다윗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울며 울다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윗 때문이었다고 생각이 되어서.. 이때 다윗의 심정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웠던 그들이 세상에, 나에게 돌을 던지려 하다니... 어찌보면 다윗을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 할 저들이 이렇게 나를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그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 사람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요 헛된 일인가?" "끝가지 하나님만 의지했어야 했는데..." 그는 철저히 자신의 실패를 깨달았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의 모습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십니다. 우리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시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 고난, 소유를 잃고 배신을 당하게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자기의 실패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로 하나님께 항복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3. 그는 어떻게 실패를 승리로 바꿉니까?

 

1) 그는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600명의 부하들이 울고불고 할 때 그는 울지 않고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600명이 돌을 들어 다윗에게 던지려고 할 때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동자를 색출해서 목을 벨 수 있었고 아기스에게 협조를 구해서 무력적인 방법으로 이 일을 진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감정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영성회복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만일 감정적으로 처리를 했다면 어떤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영적 원리에 입각하고 영성회복의 차원에서 문제의 핵심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삼상 30:6-8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부하들이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그 아픔이 배신으로 변합니다. 다윗에게 돌을 던지려 할 때 다윗은 곤경에 처합니다. 기가막힌 심정입니다. 바로 그때 다윗은 하나님의 에봇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물어봅니다. "하나님!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쫓아가면 그 아말렉 군사들을 잡을 수 있을까요?"

 

먼저 다윗은 기도의 영성부터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했던 그의 영성은 회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다윗아! 걱정말고 지금 당장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빼앗겼던 모든 것을 정녕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지금 자기가 당한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이것은 아말렉에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600명의 부하에게 있던 것도 아니다. 이 문제는 바로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내가 기도 안해서 그렇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 안해서 그렇고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이런 문제가 찾아온 것이다. 내 영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영성이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 보자." 이제라도 하나님만 의지해 보자.

 

다윗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합니다. 선악과나무를 선택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선택한 것입니다. 불평, 원망을 않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그제서라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패자부활전의 길로 도전하게 역사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3) 하나님의 약속, 응답을 받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과 명령을 받고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말렉 군사를 따라 가기 시작했습니다. 한숨도 쉬지않고 사력을 다해 쫓아갔습니다. 그러자 너무나 지쳐서 200명이 낙오! 그래도 200명을 떨어뜨려놓고 400명만 데리고 죽어라 쫓아갑니다. 사실 600명의 군사도 아말렉과 싸우긴 역부족입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400명을 데리고 전력질주합니다. 가서 보니 아말렉은 승리의 기쁨에 빠져 깊은 밤까지 축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축제후 부녀들을 강간과 폭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기습공격 최선을 다해, 사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마침내 그들을 무찌르고 나서 빼앗긴 모든 처자식, 재산을 하나도 남김 없이 뺏아올 수 있었습니다. 부녀와 자녀들은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다윗의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하나도 손해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다윗은 그 사건을 통해 부하들에게 참으로 존경받는 지도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로 이 일이 있고난 얼마 후에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게 되었고 마침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도 실패하신 분계십니까? 세상에서 당한 온갖 실패로 인해 좌절하고 낙망한 분계십니까? 이시간 다윗처럼 먼저 내 영적인 상태부터 체크해 보십시오. 나의 죽은 영성, 잠자는 나의 영성을 먼저 회복하십시오. 우리의 잠자는 영성, 죽은 영성이 먼저 깨어나야 합니다.

 

부끄러워 마시고 벌거벗은 상태로 이 시간 우리 주님께 나아 오십시오. 그분은 언제나 살아 계신 주님, 언제나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한번 그분 앞에 나와 엎드려 항복해 보십시오. 그분과 내 삶을 진지하게 기도로 의논해 보십시오.새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곧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위대한 패자부활전의 길이 새롭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5:17-18)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7-18)

 

1. 성경적인 영성의 개념은 무엇인가?

 

요즈음에 영성(靈性)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오늘은 이 문제를 함께 나누기 원한다. 흔히 영성의 개념에 대해서 오해를 한다. 예컨데 너무 신비적, 개인적으로 폭좁은 해석한다든지, 영성을 개인적인 소유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영성(靈性)이 무엇일까?

 

'영성이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적인 영성의 개념은 신비적인 능력 이전에,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關契)를 말한다. '하나님과 자기자신, 그리고 이웃과 피조세계에 대해 열려있는 올바른 관계(關契)를 맺는 것', 바로 그것이 성경적인 영성의 개념이다. 여기서 말한는 열려있는 올바른 관계란 '그의 삶이 하나님과의 막힘이 없는 교제와 사귐'이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하고, 영성있는 사람이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을 말하고, 영성이 있는 삶이란 하나님 임재의식을 갖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사실 '영성'이란 낱말 자체가 성경에 나오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퓨뉴마)''영의 사람들'에 대해서 나온다. 그러니까 '영성'이라는 말은 곧 성령(聖靈)과 직관되는 말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성도들은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일단 거듭난 성도들은 그 심령에 성령이 내주(內住)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크리스챤은 '영성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적으로 하나님 임재 의식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교만과 모든 지적인 오만함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야 계속적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교만한 사람인가? 하나님 없이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인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영성이 있는 사람인지, 좀 더 쉽게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말로는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굉장히 멀리계신 분처럼 대한다. 그러나 잠시 눈을 감아보자. 그리고 지금 내 바로 앞에 주님이 계시고,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 것을 바라보면서, 기도해 보자.(실제로 해 본다). 느낌이 어떤가? 하나님이 굉장히 가까이 계신 분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느낌이 아니고, 실제로 가까이 계신다.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모습으로 설 때, 자기 자신을 가장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처럼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삶이 영성있는 사람의 삶이다.

 

2. 영성의 위기가 찾아오는 오는 경우

 

그런데 크리스챤들이 영접한 이후에도 영성의 위기(危機)를 맞이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과의 열려있는 올바른 관계(關契)가 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어느 때 그런가?

 

그 첫째는 바로 죄()가 있을 때이다. 우리 마음에 죄가 자리를 잡으면, 그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물 역할을 한다. 59:1-2을 보자.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59:1-2)

 

또한 영적인 태만(怠慢)과 타협(妥協) 때문에 위기가 올 수 있다. 영성의 위기(危機)는 하루 아침에 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것같은 죄악(罪惡)의 문제들을 그대로 방치하다가 나중에 큰 신앙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즉 조금씩 조금씩 사소한 것에서부터 실패하며, 그 출발은 '타협(妥協)'에 있다("한 번쯤은 어때...", "딱 한 번만, 이 번까지만 하고 다음 부터는 그만두어야지..." ). 태만과 타협은 마귀가 아주 잘 이용하는 전술전략이다.

 

특히 영적인 위기는 용서함이 없는 곳에 쉽게 찾아 온다. 자기 심령 속에 풀지 않는 요소들(영적, 도적적 요소들)이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열린 교제를 방해한다.

 

3. 성경적인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때에 계속적으로 참된 영성이 있는 사람(=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는 사람, 올바른 사귐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1) 영적각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들이 영성이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먼저 자신의 문제들을 깨닫고, 회개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와 상처들을 고백하고 정결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자신의 죄악된 요소들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을 '영적인 각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고백은 매일 되어야 한다.

 

2) 영적훈련이 필요하다.

 

깊은 영성은 각성(회개)의 단계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적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 시간에 강조하고 싶은 그것의 가장 중요한 3가지 요소는 '예배, 말씀, 기도'이다. '예배, 말씀, 기도'가 참된 영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되는가하면, 바로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同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들을 통해서 성령으로 인한 속사람의 강건함을 힘입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청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영성은 우리의 삶 속에서 예배, 말씀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육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봉사를 해도 그 사람의 삶과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예배자(Worshiper)의 모습으로 서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성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해도, 그곳에 말씀묵상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헛된 것이다. 이것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적인 것이 많아도, 기도가 병행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속사람은 약할 수 밖에 없다.

 

3) 성령충만한 삶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미 언급한대로 영성, 또는 영의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성령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성령충만(聖靈充滿)이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의 '온전한 지배(支配)하심'이다. 그 성령의 온전한 지배하심의 상태가 가장 '올바른 열린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이다. 성령깨서 영적각성도 주시고, 영적훈련도 주관하신다.

 

그러면 성령충만한 결과(結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삶, 성령과 동행하는 삶, 성령의 임재의식 속에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삶이다. 오늘 봉독한 본문이 있는 엡5-6장이 바로 영성있는 삶(성령임재 의식 속에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할 때는 영성이 있는 듯한데, 삶 속에서는 성령이 없는 것 처럼 (또는 성령의 임재의식 없이) 사는 사람의 영성은 거짓된 것이다.

 

본문이 있는 엡5-6장을 보라.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을 말한다(17-18). 그리고 곧 이어서 나오는 말이 무엇인가하면, 부부관계, 부자관계, 상하의 관계성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성령의 전신갑주를 말한다. 무슨 말인가하면, 영성이 있는 사람, 곧 성령의 온전한 지배하심을 받는 것과 영적인 삶은 동일(同一)하다는 말이다.

 

예컨데 다윗왕을 보라. 사실 다윗처럼 영성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수 많은 영적인 찬양시를 지었다. 그러나 다윗의 많은 찬양시들이 정말 영성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것은 삶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유진 피터슨이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찬양을 불렀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적인 깊이 있는 찬양을 부르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들이 부른 이 찬양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인정되어지는 것은 예배 이후에(또는 예배 이전에) 우리의 삶이 뒷받침될 때이다. 우리는 참된 영성이란 우리의 삶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아무리 신비적인 체험을 많이 한다해도(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삶이 개판이라면, 그 사람의 영성은 거짓이다. 신비적인 부분만을 영성의 전부로 착각하지 말라. 오히려 삶이 없는 신비성 때문에 비난받고 있다.

 

흔히 한국 내의 많은 선교회나 단체들이 '영성'을 부르짖는다. 그런데 실제적인 변화는 없다. 왜인가?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영성'을 목놓아 외치지만, 그 외치는 영성이 신앙과 삶을 이분화(二分化) 시키는 것에 귀착되었다.

 

우리 한국교회에 영성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이해가 정착된 것은 3.1운동 이후부터 이다. 3.1운동 이후에 대체로 현실참여 보다는 천국만을 바라보는(재림만을 생각하는) 내재적(內在的)인 신앙으로 변해갔다(나는 지금 천국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결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지금도 비일비재 하다. 지금도 많은 경우에 '영성있는 사람''예언이나, 신비적인 능력을 행하는 사람'정도에만 국한 시킨다. 그 사람의 신비적인 말에는 기울이면서도, 그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빙자한 점쟁이들도 곳곳에 있고, 그것이 진짜 영성인양 착각하면서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이제는 '영성'의 개념을 올바로 세우기 바란다. 영성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영성은 성령충만한 삶을 전제로 한다. 삶이 없는 영성은 거짓영성이다. 삶이 없는 영성은 기만이며, 사기이다. 이것을 위해서 예배, 말씀과 기도가 균형잡힌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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