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설교-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2019. 5. 27. 16:22목양자료/2.설교자료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엡 4:13-15

사/여! 방학기간 동안 잘 지내셨나? 이번 방학은 다른 학기 방학에 비해 2배가 길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척 보고 싶었다. 참으로 잘 오셨다. 환영한다. 이번 3학기에도 변함없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는데 온 몸을 드리시기 바란다.

독일튀빙겐대학교 교수한스 큉 박사는 21세기에는 기성 교회가 쇠하고, 반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도는 점점 더 커져서 불건전한 성운동이 활발해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산업화가 계속되고 민주주의가 발전되 사람들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을 발견것이다라고 말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은 조금만 살만해지면 상에 눈을 돌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독일학자막스 베버는 그 동안 공연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스트레받고 살았다고 생각한다는 것..

여! 어떤가? 이분들의 말처요즘 이런 불건전한 신앙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하나님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래서 교인들이 세상으로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현상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 우리 앞에 닥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미래가 달려있다.

세속적 도전이 지금까지 겪지 못한 교묘한 방법으로 ‘동성애’니, ‘차금지법’이니 하는 이름으로 옥죄어 오고 있다. 이 세속적 도전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해야 할까?

먼저 교회론부터 바로 정립해야 한다. 교회당 크게 지어놓고 내 교회만 채우면 된다는 이기적 개교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가 취할 본질이 아니다. 이는 결국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자는 뜻이다. 특히 ‘교회당 잘 지어 놓았으니 우리교회로 오라’는 교인 뺏기 전도는 ‘양 도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건 ‘이단’이 하는 짓이다. 피해를 본 교회는 교단차원에서 이런 교회를 이단시해야 마땅하다.

그러면 교회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기복주의적 신앙을 바꾸어야 한다. 기복주의는 그것이 종교성을 띄고 있을지라도 세속적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 세속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기복주의적 신앙은 교회와 교인들로 하여금 우민화(愚民化)시켜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유리시킨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을 사회인으로서 당당하지 못한 이중적 인격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물량주의적 성공주의를 버려야 한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교인들을 거느렸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한 목회는 아니다. 큰교목사는 작은 교회들보다 비교적 돈을 많이 쓰기 때문에 교계에서 인기를 누리고 대접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소위 큰교회에서 밀려난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어디로 떠나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대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은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나 신흥종교로 떠나간다. 성경은 한 영혼이라도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멧돌을 메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했다. 목회자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가치관에 바로 서 있어야 성공한 목회자라 할 수 있다.

셋째, 개교회주의를 버려야 한다.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만 잘 되면 되는 것이지, 다른 교회는 내가 알바 아니라는 식의 개교회주의를 버려야 한다. 교회는 어떤 간판을 달았든지 ‘하나’이지, 둘이 있을 수 없다. 흥하면 같이 흥하고 망하면 같이 망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교회의 원리이다. 뿐만 아니라 개교회주의는 교회들의 연대와 사귐이라기독교회의 원리마저도 허구화 시키고, 교회를 마치 도박판처럼 이기집단으로 전락시킨다. 특히 장로교회의 원리는 독립적 개 교회를 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교파 또는 교단주의에 매몰되어 교회는 ‘하나’라는 원리가 무시되고 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한국 교회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다.

이런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볼 때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크리슨덤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다.(종교개혁 이전의 중세시대를 기독교 왕국(Christian Kingdom)을 줄여서, Christendom 시대라고 부름) 즉 기독교가 로마제국과 결탁하여, 온 세상에 엄청난 힘으로 군을 하던 그때(Christendom 시대)를 사람들은, ‘기독교의 부흥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2천년 우리 기독교 역사 중에 Christendom 시대는, 초대교회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전승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복음이 완전히 왜곡되고 호도된 시대였다. 기독교의 역사는 기독교가 힘을 소유하고 세상의 권세를 쥐었던 그 Christendom시대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를 했었는지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패권주위가 얼마나 위험사상인지를 여실히 보여 줬다. 따라서 그 크리슨덤 시대의 막을 내리고자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역사적 필연이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Christendom시대 이후의 기독교들과 오늘날개혁교회가 감당해야할 책임은 그 Christendom 시대의 오류를 바로잡아초대교회의 진정한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오늘날 우리들의 의무이다.이것이 저와 목회자가 될 신학생 여러분들이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이다.이것이 우리 한국교회가 영영히 세워져 갈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교회는, 무엇을 회복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되는지 조차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2018학년도 3학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는,  오늘날 개혁교회가 버려야 할 것과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해결 방법을 찾도록 해 보겠다.

기독교가 막강한 힘과 권력으로 군림을 하던 Christendom 시대에는, 기독교 고지론’을 주장했다. 즉 하나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기독인들이 이 세상에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의 힘과 권력을 쥐어야 한다것...기독교 공동체가 영적흡입력과 영향력으로 승부하는 대신에, 권력과 출세와 명성을 얻는 기회를 제공하는 세력집단으로 부상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러다보니 심지어는 교황이 왕을 세웠다 폐위시켰다 하는 그런 권까지 소유를 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 인간의 제도와 조직과 영향력신뢰하고 복음에 의한 자발적 회심이 아니라, 개종을 강요하는 종교적 압력집단으로 변했다.(11~13세기 십자군전쟁.. 칼 들고 ‘믿을래 or 죽을래?’ 협박한 것)

Christendom 시대는, 과거의 검소하고 바른 예배와 내적인 영적 관심 대신에 호화로운 건물과 현란한 예배의식으로 세상의 관심을 돌려버렸다. 교회의 할일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 전파와 이에 대한 완성인데(이게 본질인데) 예배당 건축이나 외적 몸집불리기로 변질되어 버린 것...

그것이 Christendom 시대의 특징인데, 그래서 망했는데(종교개혁이 일어 났는데) 오늘날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나서, 그러한 고지론에 입각한 기독교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무기삼는 하나님의 참 교회를 그리며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그 대가로 피를 뿌린 것)...

▶그런데 오늘날 개혁교회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피로 이루어낸 종개혁의 의미를 완전히 퇴색 시켜버리고 또 다시 ‘고지론’에 사로잡혀서 종교개혁 이전의 Christendom 시대로 되돌아가 버렸(면죄부만 안 판다 뿐이지, 완벽하게 되돌아가 버렸다.)

사/여! 여러분이 보시기에 오늘날 교회가,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말만으로 세상과 진검승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엄청난 규모의 건물과, 시설과, 유익한 프로그램과, 입에 발린 축복의 남발로 사람들을 무한정 끌어모으고 있다고 생각하나?

교회가 말씀의 능력을 상실하고, 엉뚱한 비본질적인 부산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고, 십자가가 진정한 파워임을 변호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람들로 채울 수 없다고 착각을 하고, 다른 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여 예배당을 채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여! 교회는 복음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 교회의 문을 낮추고, 연극이나 무용, 멀티미디어 등을 예배에 동원하고 프로 연주인들을 돈을 주고 고용해서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때로는 적당하게 울려주기도 하면서, 그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전하겠다라고 하는 발상은,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의 권위를 교회 스스로가 땅에 던지고 짓밟는 짓거리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와 능력이 없으니까 우리가 우리의 방법으로 도와주겠다’라는 것...

그러나 그러한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식의 사고는, 교회라는 단어의 정의조차 모르는 무식한 발상일 뿐이다. 여러분도 아시다 시피 교회는 이 땅에서, 세상적 방법으성공하고 번영하는 것목적으로 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적공과 번영이 하나님향한 우리의 신앙을 방해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음속에 새기면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자기의 삶최우선순위에 올려놓는 일을 방해받을 수 없다.라는 그런 절박신앙고백을 굳게 지켜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이다.

성도의 ‘거룩한 비효율!’(세상의 돈,명예,지식을 추구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나를 비워 하나님께 드리려는 마음), 도저히 효율적이지 않지만, (가성비 제로이지만) 그러나 그 거룩한 비효율이, 진짜 효율이다. 그러므 그 ‘거룩한 비효율’의 파워와, 복음의 역설성과, 복음의 의외성을 올바르게 배우고, 인식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완성되어져가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내 삶으로 경험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 끝날까지 플러스 인생이다.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자부인의 성취와 거룩의 완성’이라는 그 목적지로, 결국은 ‘합력하여 선’으로 귀결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서 우리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시키는데 밑 거름으로 쓰이는 것....(그래서 성화되고,,, 학교 수업의 이 과정도 복이 되는 것이다)

본문(엡 4:13-15절)을 보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여러분의 범사, 모든 일, 그 일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여러분의 자라남을 위해 있다. 그래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 범사를 가지고 예수님께 까지 자라는데 쓰라는 것....

근데 그 범사에만 집중하여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이 범사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졌으면 좋겠다’ 이게 고지론이란 말이다.

여! 그 범사는 여러분이 그 범사의 관심을 두어 그 범사가 잘되고/ 못되고를 갖고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라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 아니라, 그 범사를 사용하여 예수님까지 자라가라고 여러분에게 범사가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그 범사에는 성공도 포함이 되고, 실패도 포함이 되고 부유함도 포함이 되고, 가난함도 포함이 되어있다. 그게 범사다.*범사: 무릇 모두凡,  일事

여! 우리의 범사는 모두 우리에게 성장(합력하여 선을 이룸)관한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어떠한 것인지에 관계없이 우리는 전부 감사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난다는 게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엄청난 능력의 초인이 되는 것?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난다는 게, 테레사수녀처럼 사랑의 화신이 되는 것? 그럼 우리는 다 떨어지되어 있다. 15절에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라는 말을 잘 보셔야 된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덮고 있는데, 그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확 덮게 되면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게 되고, 그 착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까지 자란다는 것...

사/여! 이번 3학기에는 주님이 주신 오늘의 말씀에 따라 범사를 감사하고, 예수님의 사안에서 참된 것만을 행하여, 예수님까지 자라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