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23. 21:54ㆍ목양자료/2.설교자료
1. 비록 없을지라도
하박국 3:16-19
광주중앙교회 /변한규 목사
오늘은 우리교회가 맥추감사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하
박국의 성숙한 감사를 묵상하면서 은혜를 사모코자합니다.
하박국은 당시의 선지자입니다.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내 창자가 흔들리고 내 몸과 입술이 떨렸나이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
을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경제적인 상황이 우리 모두가 겪은 IMF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극심했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도 하박국
은 믿음으로 기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두운 인생의 터
널을 지나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환난 중에서라도 즐거
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또 연단
은 소망을 낳을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받았
으니 감사하는 인생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평범한 보통사람입니다. 둘째는 받지 않았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받을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이요, 이들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의 용장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사랑, 믿음도 받고 받은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생입
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소위 영적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맥추감사 주일
을 지키는 이 시간 우리 모두가 하박국처럼 비록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본문 11절에 있는 "비록 없을지라도"라는 말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비록 없을지라도 기도하라
합3:1을 보면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또 2절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 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 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
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박국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이름이
하박국인데 '포옹하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어 안 듯이 그런 이름의 뜻을 지닌
하박국입니다. 그는 자기 시대의 고통을 가슴에 끌어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박국 2
장에 보면 "오직 여호와는 그 성에 계시니"했는데 그는 기도할 때 성전에 엎드려 울면서 하
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기 하박국을
배워야합니다. 가세가 기울 때, 사업이 어려울 때, 내일의 전망이 어두울 때 우리 모두는 함
께 성전에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하박국을 배워야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힘을
내가 공급받는 방편입니다. 기도의 사람 하박국이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했습니다. 누가 사슴의 발같이 뛸 수 있
으며 땅의 높은 곳을 밟을 수 있습니까? 자신은 힘이 없는 죄인임을 자백하는 사람이요, 자
신은 원죄와 자범죄로 울어도 힘써도 못하는 기필코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
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하나님의 힘으로 인생을 일어서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홍해를 가르
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며 누가 사자 굴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힘을 입은 사
람 곧 모세, 여호수아, 다니엘인 것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높이 계신 하
나님의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때문에 불수레 타고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받아 선교 1세기를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종교 개혁
자들을 보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중세기
를 동트게 한 그 시대의 횃불이 된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을 보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 20세기 요셉의 창고를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모두 이적
을 만든 사람들이고 역사의 행복을 창조한 사람들입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까? 재
력이 많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없을지라도 이것만은 즉 기도만은 할 수 있다고
길을 뚫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없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기도 못합니까? 비록 없을지라도
기도는 할 수 있다는 이 믿음이 종교개혁을 가져왔고 청교도의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고 있
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확실히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받아 내리는 통로입니다. 시
50:14-15을 주목하십시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날
에도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드리는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감사를 열납 하십니다. 돈을 의지할 때 돈을 줄 수 있는
것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의지할 때는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얻게 됩니다. R.
A 토레이는 성도가 기도할 이유를 셋 들었습니다. 첫째는 사탄의 유혹 때문이고 둘째는 무
엇이든지 얻는 방법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눅
11:13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비록 없을지라도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비록 없을지라도 기뻐하라
하박국은 본문 18절에서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
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만일 하박국에게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 어려운 형
편 속에서 절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할 수 있
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힘이 되시기 때문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 하나
님은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 하나님은 피난처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서 하박국은
결코 절망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
족함이 없으리로다" 또 신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너는 참 행복자로다' 하박국은 둘러싼 정황이 모두 절망뿐이었습
니다. 없고 없고 없으며 없는 것뿐입니다. 그에게는 절망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정말
하박국은 빈털터리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합2:4은 너무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어떤 믿음입니
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그 하나님은 본문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바로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 건강을 나의 힘이라고 합니다. 철학자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고 쇼펜하워는 '권세가 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
게 하시리로다" 다윗도 믿음으로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모세도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고 하박
국도 믿음으로 비록 없을지라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
지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았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입니다. 믿음은 종달새 알에서 종달새 노래를 듣게 하는 일입니다. 하박국은 믿음으로 지금
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중에도 소망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으로
사는 인생은 노래가 없어도 춤을 춥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2:12에서 말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정말 사랑하는 성도여, 소망 중에 즐거
워하시기 바랍니다. 하박국은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졌습니다. '오직 예
수' 믿음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 내놓을 것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나의 죄를 속량해 주신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때문에 천
국 갈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믿음하나 우리에게 있습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믿음이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천국 갈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따라서 믿음으로 비
록 없을지라도 기뻐할 수 있어야합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기뻐하는 종교입니다. 축제의 종교요,
결혼예식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신랑이시고 우리 모두는 그의 신부이기 때문
입니다. 기쁨에는 물질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욕구충족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너도나도 기뻐하고 저금통장 두툼하면 김 집사도 박 집사도 기뻐합니다. 그러
나 이러한 기쁨 오래가지 못합니다. 영구적이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기쁨입니다. 또 쾌락적
인 기쁨이 있고 지성적이고 철학적인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깐 있다가
시들어버릴 박 넝쿨 기쁨입니다. 성도들인 우리는 믿음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입니
다. 그 기쁨 주님으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는 믿
음은 허깨비입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가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인들이 과연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보인다면 나도 그들의 하나님을 믿겠노라" 무슨 뜻입니
까?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말하지만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은혜 받은 사람의 감격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
다. "나는 거듭났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 나는 축복을 받았다"는 말은 무성하지만
그 기쁨 그 감격이 그 삶 속에서 표정 속에서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기뻐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사실 기뻐할 때에 봉사할 수 있고 구제, 감사절 헌금도 넉넉히 드릴
수 있습니다. 기쁨이 있어야 기쁨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기쁨이 없다는 말은 성령이 떠났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의 특징은 기뻐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 주시는 기쁨 나의 기쁨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셋째, 비록 없을지라도 감사하라
주경신학자 매튜헨리는 본문 말씀을 주석할 때에 하박국이 비록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었
던 것은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려도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으신다고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비록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감사를 못한 것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감사를 못합니다. 물질의 가난 때문에
감사를 못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가난 때문에 감사를 못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역경도 축
복되고 슬픔도 불행도 행복될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감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455
장 찬송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불평이 있을 수 없고 짜증이 있을 수 없습
니다. 예수님 안에서 무슨 염려, 걱정이라는 말입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것처럼 "염
려야, 걱정아 물러가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서양의 어떤 부자가 다이아몬드 토지를 발
견하려고 자기가 가진 땅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방방곡곡을 헤매다가 다이아몬드 토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훗날 이야기입니다. 그가 팔았던 토지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가 지닌 마음속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지 못하고 가난하
게, 짜증내고, 불만을 토하면서 살아들 가고 있습니다. 만일 이 시간에 우리들이 자기 삶 속
에 있는 이 다이아몬드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중앙교회 모든 성도들 부유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넉넉하게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국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
니다. 전쟁통에 독일군의 공습으로 살고 있는 아름다운 집이 완전 쑥대밭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불행을 당한 노부부를 위로합니다. "몽땅 다 잃어버렸군요. 안됐습니다. 힘을 내십
시오." 그때에 노신사가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다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
다. 아직도 제 곁에는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내가 있잖아요. 우리에게는 집을 지을 수 있는
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건강하구요. 꿈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곧장
시작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위로하러 온 사람들을 위로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여, 우리 모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
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성도, 환
난, 경제적으로 위기를 만난 성도가 있습니까? 좌절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고 실망하지 마
십시오. 비록 없을지라도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형들의 미움을 받아 구덩이 속에 갇혔을 때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구덩이 속에서 하나님과 단독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고발을 받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는 인내의 철
학을 배우고 지도자가 갖출 인격을 연단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애굽 총리대신이
되기 위해서 감옥 속의 고생대학에 입학했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면 모세도 미디안 광야의
고생대학 졸업장을 얻은 후에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의 3년 고생대학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선교사 자격증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고생대학에 입학하셨습니까? 졸업장을 받게 되는 날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을 믿으시
기를 바랍니다. 미국 미시간 호는 바다처럼 넓은 호수입니다. 수년 전에 이곳에서 배 한 척
이 뒤집어진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이 배에 젊은 수영선수가 탔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걸고 23명이나 물에서 건져냈습니다. 신문에도 떠들썩했습니다.
어느 날 토레이 목사는 설교를 하다가 그때 일이 생각나서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하는 지금
은 노인이 되었는데 물었습니다. "그때 일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 있는지요?" 노인의 대
답이 이렇습니다. "그 23명 중에 내게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
던 것이 기억에 남네요" 우리에게 교훈 하는 일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찾아와서 '감사해요'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
수님께서 눅17:17에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더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를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
사치 못한 그 아홉을 찾으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수백 명의 결혼주례를 했는데 그들의 결혼기념일에 찾아와서 "감사합니다" 인
사하는 부부는 단 한 부부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불평하기 위해서 안
좋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하
는 사람은 드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비록 없을지라도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십시
다. 받은 축복을 기억하면서 감사하십시다. 본문이 교훈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해도 포도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 소출이 없어도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게 양이 없
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
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 비록 없을지라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서원으로 드리는 감사
시편 116:10-19
충신교회/안재은목사
우리들의 신앙 생활 중에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예배, 기도, 찬송, 전도, 교제,
봉사, 감사, 헌신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특히 개인적인 것들이 있는데, 감사는 빼
놓을 수 없는 신앙생활의 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교회에는 몇 절기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감사절이 두 번이 있습니다. 그것은 맥추 감사절과 추수 감사절입니다.
맥추 감사절의 성경적 유래는 봄에 심은 보리를 추수하여 첫 열매로 드리는 절기이며, 추수
감사절은 수장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감사절을 지키는 절기입니
다.
(출 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
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오늘 우리가 맥추 감사절로 지키는 의미는 올해에 첫 열매로 드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지
난 반 년 동안의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겨보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는 어떻게 이 맥추 감사절기를 지켜야 할 것인지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은혜에 대한 감사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이 당했던 과거의 큰 곤란과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고 승리
할 수 있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세상 사람 누구도 믿거나
의지할 수 없으며,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절망 중에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사람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음을 고
백함과 동시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신앙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가 베푸는 자에게 오만 불손하게 행한다면 그것은 배은망덕한 일일 것입니
다.
본문에서 다윗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그는 고난 가운데서 구원을 경험한 후에 자기가 받은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후대하사 평안함을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인
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에서 건지시고 눈물을 그치게 하시며, 넘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고
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잊지 않고 있습
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실, 우리는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원망과 불평의 조건을
찾으면 또한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디에 우리의 삶의 채널을 고정시키
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신앙생활의 보약과 같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역대기에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일을 모두 마치고, 성전에 필요한 기구들
즉 그의 부친인 다윗 때부터 준비되었던 은과 금과 모든 기구를 하나님의 전 곳간에 두고
하나님께 봉헌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보면, 먼저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하고(대하 5:2-14),
솔로몬의 말씀(대하 6:1-11)과 솔로몬의 기도(대하 6:12-7:3), 그리고 성전을 봉헌하는 예식
(대하 7:4-11)을 가집니다. 그런데 역대하 5장에 보면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안치하였는데,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솔로몬은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고,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일백 이십인이 함께 서게 합니다.
(대하 5: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
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
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구름이 가득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있고 법궤가 있어도 성도
들의 감사와 찬송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이 임재하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예배와 신앙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이로 인하여 제사장이 능히 서서 하나님을 섬기
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 때문이었습니다.
(시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가득한 예배를 드리므로, 우리 가운데 거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예
배를 드려보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의 서원
성경에 서원(誓願)에 관한 단어가 70여 회 정도 나옵니다. 서원에는 5가지 종류가 있는데,
쌍무적 서원(창 28:20-22), 각성, 절제를 위한 서원(민 21:1-3), 감사의 서원(시 56:12, 13), 일
반적 헌신 서원(시 132:2-5), 보편적 예배의 서원(나 1:15) 등이 있습니다.
서원(Vow, 유케)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혹은 '맹세'의 뜻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헌신하
고 봉사하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일로서 자주 행해졌습니다. 이는 서원이 기도의 빠른 응답과 축복을 가져온다고 믿었
기 때문입니다.
(시 61:5)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
셨나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보답을 은혜의 조건으로 내세우며 기도하는 형태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만일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용할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자기를 보호해 주신다
면, 그 곳에 하나님의 집을 세울 것과 십의 일조를 드릴 것을 서약하였습니다(창 28:20-22).
또 한나는 만일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
였습니다(삼상 1:11, 27, 28).
본문을 통해서 볼 때,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 번 서원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위대한 성도들은 어려움과 위기를 하나님 앞에 서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원은 계
약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 116: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둘째, 서원은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그 인격을 도약하기 위한 서원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서원도 있었습니다. 이 서원은 주로 나실인들의 서원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성별
하여 바치는 것으로서 일정한 금욕생활의 선언이었습니다(민 6:1-8). 여기에는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바치기를 서원하고,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위대한 역사를 감당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서원은 경솔히 해서는 안되지만, 서원한 것은
꼭 지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서원은 성도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하여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순결을 서약하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을 하
나님을 향하여 가도록 붙잡아 매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늘 혹은 자주 하나님 앞에서 구약 성도들이 서원 하듯이 우리의 신앙적 충성을 다짐
해야 할 것입니다. 좀더 거룩하게 살도록, 보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인도를 위하여, 기도의
응답을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의 서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서원으로 드리는 감사제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감사제를 드렸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제를 드렸을 뿐 아니라, 그가 약속한 모든 것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시 116: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갚아야 할 빚이 어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
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지키며 이행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대부분 중요한 일에는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고, 서원하는 분명한 의식이 있었습
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약속을 믿고 우리는 결단하므로 서약을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자신의 결단과 하나님 앞에
서의 마음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강한 의무감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자
기의 양심을 속이고 때로는 성령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영적인 상처를 입게 됩니다.
둘째로, 그는 약속을 즉시 수행하였습니다. 연장해 달라고 애걸하거나 더디게 하나님의 약속
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믿음이 약해지면, 하나님과의 약속도 자기 마음대로 기일을
연장하거나 그 방법까지도 마음대로 변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로, 그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감사와 찬송할 약속을 지켰습니다.
(시 116:18, 19)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예루살렘
아, 네 가운데서, 여호와의 전 정에서 내가 갚으리로다 할렐루야
그는 구석에서 움츠려서 소극적으로 찬양하지 않고, 모든 성도 앞에서 당당히 큰 소리로 하
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나아갔습니다. 그의 예배는 겉치레나 과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
은 다윗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에는 소극적이며 찬양과 경배에는 취미가 아닌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한다
면, 이는 진정한 감사의 태도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서원
때에 자주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예배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제사는 하
나님께 넘치는 영광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와 찬
양으로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대상 29: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
나이다
결론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사생활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의 정도를 분별하는 척도라고 볼 수도 있
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자연스럽게 응답하는 성도의 마땅한 본분이자 하나님의 명
령인 것입니다. 또한 감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사모하
며 그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성도의 자연스러운 신앙의 표현입니다.
감사 생활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리고 감사는 모든 과거의 어려움과 속박에서 구원받은 감격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실을 서원(誓願)으로 보답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함으로 감
사의 제사로 나아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 65:1)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이제 우리는 감사를 감사의 조건에서 찾지 말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한 중대한 절기로 또는
삶에서 자연스런 습관으로 늘 이러한 감사생활이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승리자들은 철저한 감사생활을 통하여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
님의 은혜를 감사로 나타내어야 하겠습니다.
3. 맥추절에 드리는 감사!
(출23:14-17)
저는 아직 소록도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만은 그곳에 가면 나병 환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교회가 있는데 그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과 봉사와 충성은 건강한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랍니다. 그들은 예배 시간 때 모여서 손뼉을 칠 수가 없어서 손톱이 다 무너진 손가락이 없는 그 손으로 마루 바닥을 두드리면서 찬송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김없이 새벽 첫 시간부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루를 출발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모여서 섬기는 그 교회가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개척 교회를 해마다 세워준다고 합니다.
그들이 양계장에서 일해서 바친 그 헌금으로, 그리고 한끼씩 금식한 금식 헌금으로 선교비를 보내는데, 그 선교비를 받는 사람이 누구냐? 멀쩡한 우리네들이랍니다.
그런데 그 수용소 입구에 이런 푯말이 서 있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것을 원망하지 말고 남은 것으로 감사하라'
나병 환자들이 그런 감사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부끄럽습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입니다. 무엇을 주시면 드리겠다는 1차원적인 감사입니다. 그 다음에 ■'때문에' 감사가 있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졌으니 드리는 2차원적인 감사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3차원적인 감사.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오늘은 우리 한국 교회가 맥추감사절로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제목소개▶
본문 14절에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에 따라서 일년에 삼대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유월절'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킨 절기로 해방절기입니다.
▶두 번째 절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맥추절'인데 이날은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칠칠절이라고도 하는 절기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절기로는 '수장절'로 일년 동안 농사를 지은 것을 창고에 들이고 가을의 들판에 초막을 짖고 일주일 동안 생활하여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간 초막을 짖고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며 지키던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1. 맥추절의 유래를 알아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50일째 되던 날, 시내광야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 위로 부르신 후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맥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죄가 됩니다.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키라'는 말은 권면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맥추절은 첫 곡식을 거두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감사절입니다. 그래서 맥추절을 초실절이라고도 하고,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라고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맥추절은 첫 곡식에 대한 감사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나라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을 받은 것은 더 이상 애굽이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 백성이라는 강력하고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신약에서 주로 오순절이라 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120문도가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아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하자 3천명, 오천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남으로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세워지기 된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니라"
여기서 말하는 '너희 모든 남자'란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에 포함되는 20세 이상 되는 모든 남자를 가리키는데, 이스라엘 남자 중 20세 이상 된 사람은 일년에 세 차례, 즉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에는 의무적으로 성전으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물론 이때 20세 이상 된 남자만 성전으로 올라갈 수 있었고, 여자나 아이들은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여자들과 20세 이하 된 남자들도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특별히 20세 이상 된 남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성전으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한 것은 이들은 이스라엘 각 가정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나타나라"는 말과 동일한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 즉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민족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2. 맥추절을 '초실절'이라고도 하는데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즉, 맥추절은 모든 처음 것, 새로 수확한 것, 사람들이 먹거나 쓰지 않은 처음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섬기며 살아간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 맥추절을 바로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가장 귀하게 섬기며 살아가는 신앙을 이어 가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 것, 첫 마음, 첫 시간, 첫 재물, 첫 기회, 첫사랑 이런 처음 것들은 모두가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이런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오늘 맥추절에서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맥추절을 지키는 올바른 마음의 자세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배우는 것이요, 첫 믿음을 찾고, 첫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첫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몇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①제일 좋은 것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는 가장 좋은 것을 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정신입니다.
신앙 생활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봉헌 생활'입니다. 나의 순전한 마음을 드림으로써 봉헌하고, 나의 소중한 시간을 드림으로써 예배하고, 나의 소중한 것을 드리고, 봉헌하되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봉헌의 정신입니다.
'너희는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농사를 지어 거둔 첫 열매를 내게 바치라' 이 말씀은 바로 제일 좋고 가장 뜻이 있는 것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제일 좋은 것이 생기면 누구에게 먼저 주고 싶습니까? 아마 제일 어른이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것입니다.
옛날에는 첫 곡식을 거두게 되면 먼저 임금님에게 드렸습니다. 백성들은 그것을 백성 된 도리로 알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에서 430년 동안이나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 첫 추수를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첫 이삭으로 떡을 빚어 여호와께 드리라' 이 말은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첫 열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돈은 모두 소중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첫 월급은 더 중요한 뜻을 지닌 돈입니다. 사람이 성장하여 처음으로 직장에 가서 받은 월급, 이것이 얼마나 뜻이 있고 귀한 돈입니까? 그러니까 그 돈은 뜻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②하나님의 은혜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거두거든 내게 바치라.'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첫 열매를 얻기까지 그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면서 살아가려면 농사를 지어 보아야 합니다. 농사를 지어 봐야 하늘의 고마움을 알게 되고, 자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곡식단 하나로서 하나님의 실재를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하늘을 무서워할 줄 알고, 하늘을 거역하는 경거 망동을 하지 않습니다. 농부들은 하늘의 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심은 천심이라고 했습니다.
감사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감사는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음식 한 그릇을 앞에 놓고 감사하는 데서부터 감사 의식이 시작되고 감사하는 정신이 싹틉니다.
'너희는 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거두거든 여호와께 드리라.' 이 말씀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살라는 뜻입니다.
③땅을 잘 가꾸라는 말씀입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서 말하는 첫 열매는 벌레 먹고 쭈그러지고 보잘것없는 그런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깔 좋고 탐스럽고 먹음직한, 실한 열매를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열매가 맺힙니까? 그것은 땅을 잘 가꾸고, 잘 다스리고, 잘 관리할 때 좋은 열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라는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그 땅에 있는 우상을 버리고, 우상의 제단도 헐어버리고, 그 땅을 깨끗이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하여 그 열매를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강조합니다. 이 말은 하늘도 맑고, 땅도 맑고 사람도 맑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이 왜 지옥입니까? 거기는 더러운 하늘과 더러운 땅에 더러운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지옥인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중국의 학자 '순자'는 '천지자 생지본'이라고 했습니다. 맑은 땅과 맑은 자연이 삶의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땅을 잘 가꾸고 잘 다스려야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첫 열매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 열매는 땅을 잘 가꾸어서 얻은 오염되지 않은 열매, 썩지 않은 열매,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의 탐스러운 열매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을 지켜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3. 맥추절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밀, 보리 수확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지키시고 보호 해주신 것도, 건강을 주신 것도, 구원을 베푸신 것도, 환란과 시련을 이기게 해주신 것도 시시때때로 인도해 주신 것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곁에 계셔서 위로하시고, 힘주시며, 새 능력 주시며, 보살펴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하고, 감사의 마음을 계속해서 가질 때, 우리는 맥추절의 본래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란 무엇입니까? 감사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 은혜를 주신 분에게 보답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글자를 보면 느낄 감(感)자에 사례할 사(謝)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은혜 받은 자들이 고마움을 느끼고 은혜를 주신 분에게 사례하는 것을 말합니다.
①감사는 '축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시:100:4절은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기에서 '그 문'은 하나님께서 계신 그 궁정의 문입니다. 승리가 있고 응답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요10:9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집의 문'을 말합니다. 구원을 얻는 문이요,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는 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되는 문입니다. 능력이 되는 문입니다.
그 곳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문안으로 들어가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고, 또 그것을 받아서 먹고 마실 수 있는 그런 문입니다. 그런데 그 문에 들어가는 조건이 감사하므로 그 문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감사의 키를 사용 않고는 그 문을 열 수 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전에 올라오실 때 여러분의 가슴에 얼마만큼의 감사가 채워져 있습니까? 여기까지 이르도록 우리의 가정을 지키시고 나의 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의 가슴에 진실한 감사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계시는 궁정의 문이 열리고 주님의 축복의 손에 잡히느냐 하는 것입니다.
②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메'입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싹틉니까? 원망과 불평,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안에서 산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며 삽니다. 믿음이 떨어진 징조입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망, 불평은 마귀가 기뻐합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우리 모두 감사하는 믿음을 키우십시다!
③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아무나 감사할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는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젊은이가 청년답지 않게 감사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하여 다리 하나를 절단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감사가 살아지고 원망과 근심 속에 절망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할 일도 많고, 결혼도 해야할 나이인데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늘 상 없는 다리 한쪽만 생각하며 살자니 앞날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이 지점이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사람은 없어진 다리에 집착합니다. 그러는 사이 남이 있는 다른 다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이 청년이 어느 날부터인가 눈이 뜨이면서 다리 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없어진 다리 대신 남아있는 다리 하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 그 젊은이는 다리가 하나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무다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남은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선교사 훈련을 마치고 마침내 그 다리를 가지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식인종들이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고무다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식인종들은 그 고무다리를 씹어보았지만 씹히지 않자 마침내 그 선교사를 신적 존재로 섬기게 되어, 그 쪽을 완전히 복음화를 이루었답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게 된 것을 깨닫고 더욱 더 감사했다고 합니다.
이 마음을 누가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④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마음'입니다.
확실히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스펄전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의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
⑤감사의 조건은 '찾아 만드는 사람의 것'입니다.
저절로 내 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를 바라고 있으면 내 안에 있는 감사는 점점 가난해지고 결국엔 아무 것도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감사는 감사할 조건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감사가 넘치는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뜻도 그런 것입니다. 범사란 모든 일을 다 말하는 것인데, 눈물 날 일에 어떻게 감사하고, 가슴 아픈 일에 어찌 감사할 마음이 생겨나겠습니까?
그러나 그럴지라도 실패한 그 자리에서 감사할 일을 더듬어 찾으라는 말씀이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눈물방울이 감사가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디서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 만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독일에 '마티 바덴'이라는 사람은, 자유주의적인 사상이 있다고 해서 극 보수파에서 밀려나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했던 정치가입니다.
한 번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 값싼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구두가 없어진 것입니다. 밤사이에 도둑을 맞은 것입니다. 화가 잔뜩 나서 '어느 놈이 내 신발을 훔쳐 갔느냐'고 욕을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게 하십니까?" 그때 주인양반이 창고에서 헌 신발을 주면서 말하기를 '오늘 주일인데 예배드리려 가자'해서 '마티'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을 억지로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에서 '마티'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서 바라보았습니다. 보았더니, 그 사람은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젊은 정치가 '마티 바덴'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이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고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을 신을 수도 없구나. 그럼에도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나는 신발만을 잃어버렸으니 또 사서 신으면 되건만 이렇게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까지 원망했으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그 후로 '마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항상 감사했고, 무엇이든지 어떤 일을 만나든지 감사할 것을 찾았습니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삶 자체가 감사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존경받는 재무부장관이 되어 크게 쓰임을 받았고, 독일 젊은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남아 있습니다.
⑥감사는 또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는 감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엔 약속이 있고, 감사는 또 감사를 낳습니다. 갈6:7절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감사를 심는 자는 분명히 감사를 거두게 하십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영적인 법칙입니다.
혹 여러분이 청천 벼락같은 절망의 선포를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열심히 일했는데 퇴직을 당했습니까? 기도하면서 시작했는데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절망의 그늘에서 한없이 울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만은 빼앗기지 마십시오. 믿음 없는 성공은 성공이 아니며 믿음 안에서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믿음 안에 흐르는 눈물은 눈물이 아니요, 좌절은 좌절이 아닙니다. 이 모두가 성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우리 위해 허락 하셨으니 분명히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4. 맥추절은 '계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맥추절은 7주간 동안 계속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단 한번으로, 한번의 형식을 차림으로, 한번의 예배로 끝나는 절기가 아니라 7주간 동안이나 계속되는 절기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에서 새로운 맥추절의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맥추절은 단 한번의 어떤 행위로 끝나는 절기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계속되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첫 열매의 신앙도 계속되어야 하고, ●감사의 생활도 계속되어야 하고,
●헌신의 자세도 계속되어야 하며, ●봉사의 마음도 변지 않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이 계속되는 절기가 바로 맥추절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끈질기게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들의 축복도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 교회의 부흥도 계속 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발전도, 세계 복음화도 끈질기게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할/
5. 맥추절에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신16:16을 보면,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여기서 '공수'란 말은 빈손이란 말입니다.
신16:10-11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 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그리고 신16:17절을 보면,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것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최선의 예물을 준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6. 맥추절을 지킬 때 주어지는 복이 무엇입니까?
출23:25절을 보면, ①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려주리라!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은 양식과 물입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②너희 중에 병을 제하여주리라!
건강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가정에 있는 질병을 제하고, 내 속에 있는 질병을 제하고, 언제나 강한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③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도록 축복해 주시리라!
아기를 소원해도 얻지 못한 이들에게 잉태의 축복을 주신다는 말씀이지만, 일반적으로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강하게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④지경이 넓어지는 복을 받게 됩니다.
출34:24절 상반 절을 보면,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출23:31절 "내가 너의 지경을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하수까지 정하고 그 땅의 거민을 네 손에 붙이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가나안의 경계를 말씀해 주신 것인데,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겠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맥추절을 지키면 가나안의 넓은 지경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⑤안전하게 보호해 주리라는 약속입니다.
출34:24절 하반 절을 보면,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맥추절을 비롯하여 무교절과 수장절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경을 넓혀 주시는 복도 중요하지만, 그 지경을 원수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를 받는 복은 더욱 중요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절로 예배를 드립니다. 감사하며 삽시다. 구원에 감사, 오늘 여기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또한 아름다운 축복을 바라보며 감사하며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맥추절을 지키라
출 23:14-17
포항중앙교회/서임중목사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하여서는 3가지 요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가치가 순
전히 물질이나 육체적 쾌락에 있지 않고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영성적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단순하고 사소한 일들에서 만족을 느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셋째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데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요건인 사소한 일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어야 한다는 말은 참으
로 의미가 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거니와 어떤 큰 일을 겪으면서 기쁨을 느끼는 때도 있지
만 사실은 사소한 일들 가운데서 행복을 느끼는 일들이 더 많음을 경험하게 됩니
다.
예컨대 퇴근하여 돌아와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 일이라든가, 단돈
1,000원짜리 액세서리라도 사서 예쁜 포장에 싸서 아내에게 선물을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이들의 발을 씻어 주는 경우
라든가, 말 한 마디라도 칭찬과 격려의 말을 건네주는 것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
낄 수 있습니다.
日常의 감동을 느끼라.
우리 교회의 일상용어가 되어버린 “20,000원 감사헌금 하셔요”가 바로 그 예
입니다.
요즈음 쌍가풀 수술 값이 많이 낮아졌지만 한 때 200만원이 넘었습니다. 그러
니 모태로부터 태어날 때 쌍가풀 눈을 갖고 오늘까지 살아오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십일조의 십일조 20,000 원 하자는 우스개 이야기가 우리 교회 감사
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속눈썹이 길어서 20,000원, 좋은 남편, 좋은 아내와 함게 하고 있음으로 인한
20,000원, 좋은 교회 좋은 목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
여 20,000원, 오늘까지 건강한 몸으로 일상의 축복을 노래할 수 있음이 20,000
원 등등 감사함을 깨닫고 감동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 우리 교회 성도
들의 일상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소한 일들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를 못했습니
다. 오히려 원망과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감정이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수백년 동안 노예로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쁨이나 감사의 감정이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래서 종노릇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도 기뻐할 줄 몰랐습니다.
홍해 앞에서 부정적인 사고로 가득 차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
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에 바빴습니다.
광야 가운데서 만나를 내려 먹여 주시고, 바위에서 생수를 내어 주시는 물을
마시면서도 항상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과 불평을 그치지 않는 것이 이스라
엘 백성이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광
야 40년 생활은 어느 하루 즐거움이 없는 불평과 원망으로 말미암은 불행의 나날
이었습니다.
일상에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에 행복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것, 곧 감동할 수 있는 마음이 축복입니다.
감사의 원인을 찾으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대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
첫째는 유월절로서 그것은 애굽의 고난과 억압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둘째는 맥추절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 민족이 되어서 농사를 짓고 처음
거둔 곡식의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셋째는 수장절로서 연종(年終)에 드리는 추수 감사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3가지 절기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감사의 내용으로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기쁨을 기쁨으로 표현할 줄 모르고, 감사함을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에
게 감사의 훈련을 시키시려는 깊은 의미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기쁨을 기쁨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감사를 감사함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라고 해 보면 잘 되지를 않습니다. 왜?
그것은 어려서부터 감사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행은 어른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잘못 배워서 심어진 것입
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할 줄 모르
는 불행 가운데 내버려두시지를 않고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셨던 것입니
다.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
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즉 감사할 수 있는 삶이란 감사의 근원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이
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시는 타지역의 성도님들이 꼭 들려주는 말
이 하나 있습니다.
포항중앙교회는 별로 웃을 일도 아닌데 그렇게 활짝 웃고 예배시간에도 뭔지
는 모르지만 안개가 걷히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교회의 체질화입니다.
아무리 웃겨도 기를 쓰고 웃지 않으려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건
불행입니다.
감동하지 못하는 마음에 웃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에 즐거움이 없이 입술에 미소가 배어 나올 수 없습니다.
예화 사전에서 가져온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행복하게 한집에서 생활합니다. 어느 날 아들이 밖에서
들어와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 오늘 너무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오늘 교회에서 오다가 차량 사고가 있었는데 제 차가 그렇게 많이 굴렀는데
도 제 몸은 다친 데가 없습니다.”
“나는 너보다 훨씬 더 감사한 일이 있었단다.”
“저보다가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나는 집에 오는 길에 자동차가 한 바퀴도 안 굴렀단다.”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떤 마을에 냉천과 온천이 함께 솟는 신기한 곳이 있었습니다. 마을 여인들
은 겨울에도 빨래하기 좋고 여름에도 빨래하기 좋은 편리함을 누리고 있었습니
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마을 여인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원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늘 불평이랍니다.”
“이렇게 좋은 물의 혜택을 입으면서 불평을 하다니요?”
“냉천 온천이 나오는 것은 좋은데 빨래 비누가 필요 없는 거품 좋은 물이 안
나오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정신 질환입니다.
여러분의 오늘은 어떠합니까?
모든 것이 평안하고 좋을 때 감사하지 못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서 벗어날 때
감사하는 관행, 감사할 상황에 감사하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바라는 욕심이 우리
의 범사를 더욱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를 통해서 감사 생활을 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도 마찬가지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하셨을까요?
첫째는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일상에서 행복해 지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후손 대대로 감사할 줄 아는 백성이 되라
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식을 거두어 쌓아 놓고 자기 식구들만 먹고 살았다면 이
스라엘 민족에게는 아무 기쁨도 감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거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음식을 장만하고 이웃끼리 나눕니다.
이웃간의 사랑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절기를 지키는 행사는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기쁨이며 축제였습니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행복이란 가만히 있는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훈
련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
다.
‘광수 생각’의 한 토막 이야기입니다.
입시를 앞둔 학생이 수업 중에 연필을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순간 학생은 당
황한 기색으로 혼자 중얼거립니다.
“아, 난 이번 시험에 떨어지겠구나.”
그 때 곁에 있던 예수를 믿는 친구가 연필을 주워서 다시 바닥에 떨어뜨리면
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너는 이번 입시에 떨어진 것이 아니야. 봐라 연필이 바닥에 붙었잖아.”
동일한 사건을 경험하면서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생
각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일상에서 감사함이 훈련된 사람은 범사가 행복합니다. 그러나
매사에 감사함이 없는 사람은 범사가 불행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일생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맥추감사절을 맞으면서 잊어 가던 감사를 찾게 됩니다. 감사절은 감사
하는 마음의 훈련입니다.
감사절은 이웃의 고마움 또한 느끼게 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맥추감사절을 지키면서도 행복한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
는 감사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원숙한 신앙의 상징입니다.
비전이 꽃봉오리라면 감사는 그 열매입니다.
소망은 빈 그릇입니다. 감사는 가득찬 밥그릇입니다.
소망은 어린 아이와 같지만 감사는 철든 어른과 같습니다.
소망은 배우지 않아도 다 할 수 있지만 감사는 성숙한 신앙인의 선언문입니다.
둘째 맥추 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범사의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고
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맥추절을 지키는 것은 얻은 것의 첫 열매를 감사하며 후손들에게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이 풍요로워 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절기를 지키는 것은 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지켜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감사의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쁨으로 이 절기를 지켰습니다.
감사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축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사회를 보십시다.
나라도 없고 민족도 없고 심지어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이기주의자들의
장터 같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알아야 합
니다.
그러나 감사의 생활은 우리를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아름답
고 밝습니다.
사회는 그렇다 치고 오늘의 교회를 보십시다.
왠 불평들이 그리 많습니까?
자기는 아무 흠도 없는 천사로 착각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가 허물 투성이 죄인
으로 규정하고 살아가는 교인들이라면 그들이 무슨 구원받은 백성들입니까?
말 많은 교인, 그 사람이 또 한 사람의 말많은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불평하는 교인, 그 사람이 또 한 사람의 불평하는 교인을 만들어 갑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다 보면 교회는 사탄의 운동장이 됩
니다.
그것은 감사함이 훈련되지 못한, 입만 열면 남의 말이나 하고 교회를 불평하
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무서운 현상입니다.
그 옛날 우리의 어르신들은 보리밥을 먹으면서도 웃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아이들은 갈비를 구워 먹으면서도 속이 차지 않은 늑대 마냥 으
르렁거리면서 이웃의 것을 탐냅니다. 그래서 웃음이 없습니다. 웃음 없는 얼굴
은 감사 없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두 소녀가 길을 걷습니다. 비가 오다가 멎고 하늘이 청명하게 맑았습니다.
한 소녀가 말합니다.
“얘, 참 좋은 날씨다. 얼마나 좋아.” 그러자 다른 소녀가 말합니다.
“애도 별스럽기는, 이렇게 좋은 날씨 어디 처음 보았니?”
감사함으로 가득 찬 소녀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식탁 앞에 앉았습니다. 그
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주시니.”
이때 어머니가 말합니다.
“얘야, 누가 들으면 어지간히 굶긴 줄 알겠다.”
똑같은 마음이지만 감사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함 마음의 차이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네 마음에 있느니라”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신앙인의
감사의 고백입니다.
셋째 맥추 감사절은 지키는 것은 성도들이 복 받는 비결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상한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법칙과도 같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심는 데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감사한 일들을 많이 거두어들인다는 교훈입
니다. 이것은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경험으로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9:6-9절에서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놀라운 진리를 가르쳤습
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
이로다. 각자가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
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
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
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참으로 멋진 진리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행복해지는 비결, 축복 받는 비결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
다.
주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은 낙심이 없습니다. 불안이 없습니다. 조급
함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현주소는 “믿음도 은혜군 감사면 축복리”인데 불신자들의 현주
소는 “살기도 괴롭군 죽으면 끝나리”입니다.
오늘날도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성도들이 행복해지는 훈련입니다.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으로만 행복해질 수 있는 교훈적 메시지가 있
습니다.
더 나아가 성도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 여기
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범사가 감사함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5. 순종으로 심고 거두자
갈 6:6-10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최초로 하신 비유는 씨를 뿌리는 비유입니다. 영적인 진리를 농사 짓는 법과 자연의 법칙으로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고 깨닫기 어려운 말씀도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가장 쉽게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가지가 “심는 데로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씨를 부리면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되고, 나쁜 씨를 뿌리면 나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리의 말씀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활과 도덕적인 생활, 가정 생활과 사회생활에 다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에도 적용이 되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에도 맞아떨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인생살이가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정말 마음속에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이 날마다 씨를 뿌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뿌리면 거짓을 거두게 되고, 진실을 뿌리면 진실을 거두게 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뿌리며 거두는 일을 동시에 하고 살아갑니다. 좋은 열매를 거둘 때는 좋은 씨를 뿌렸기 때문인 줄 알면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나쁜 결과가 생기면 나쁜 씨를 뿌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줄 알고 나쁜 씨 뿌린 것을 회개하고 삼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씨를 뿌리고 좋은 열매를 거두도록 인내하고 수고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나쁜 씨를 뿌리고서도 좋은 열매를 거두겠다는 사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고, 우정을 심으면 우정을 거둡니다. 친절을 심으면 친절을 거두고, 존경을 심으면 존경을 거둡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러분들이 이미 아시다 싶이 이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쁜 씨를 뿌리면서도 좋은 열매를 거두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우리 사회에 판을 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면 자기를 속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을 하고, 이 정도의 거짓이야 별개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 불의를 심고, 10년 30년 공을 허물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만 피해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자들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예술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으로 부패되어 있어 자기를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면서 잘살아 보겠다고 아우성을 치니 참으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팟이 난다”는 속담 하나도 제대로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저질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모으려고 이 땅에 두 천사를 내려보냈습니다. 한 천사는 그의 바구니에 사람들의 소원 기도를, 다른 천사는 감사 기도를 모으려 했습니다. 얼마가 지난 후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되돌아 왔습니다. 한 천사는 바구니가 넘칠 정도로 인간들의 수많은 소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감사 기도를 담아 오겠다는 천사의 바구니는 거의 비어 있었고, 그 천사는 슬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1. 좋은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사람이 중생하여 변화가 되여야 합니다.
선행과 진실을 심으면 하나님께서 심은 데로 의의 열매를 거두고 축복의 열매를 거두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좋은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령 자체가 중요합니다. 사람 자신이 변화되지 않고 좋은 씨를 뿌릴 수 없는 것이며, 사람 자신이 변화되지 않고서 행하는 의로운 행위는 사실 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몇 년 전 대부라는 영화가 우리 나라에 상영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이태리 시실리 섬 출신들이 미국에 이민을 와서 마피아라는 깡패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마피아 두목이 적들에게 총살을 당하자 그의 아들은 자기 어린 조카가 영세를 받는 그 시간에 자기 두목을 죽인 원수들을 총살시키는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그 영세를 받는 아이의 아비인 자기 매부도 함께 살해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가장 선하고 신의를 지킨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죄인의 의라는 것은 결국 불의를 자기 식으로 포장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씨를 심는 것이 못됩니다.
어떤 마을에 두 아들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큰아들에게 밭에 가 일을 하라고 했더니 예라고 대답하고 다른 곳에 가 버렸습니다. 둘째 아들은 다른 일이 있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밭에 가 일을 했습니다. 물른 착한 아들은 둘째입니다. 이 말씀은 밭에가 얼마나 밭을 갈았느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의 심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칼뱅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주님은 우선 심령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그 행위로는 성결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신다. 또 이 말씀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그 불결한 심령에 오염된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오염된 행위라고 하신 행위에서는 의라는 이름을 부쳐서는 안된다. 주님은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아주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셨다. 부정한 손이 만지면 거룩한 것도 부정하게 되여 버린다는 말씀이다.”
심령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행하는 좋은 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심령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2.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이며 좋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본문에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에게 잘 하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에는 죄인이 구원 얻는 일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에 대해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면 반듯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여 있습니다.
마 25장에는 단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 단란트를 받은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서 다섯 단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렇게 해서 두 단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개을러서 일을 안하고 놀다가 “개으르고 악한 종”이 되였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말이요, 개를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않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낳다“(삼상 15:2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좋은 것도 있지만, 어려운 것도 있고 하기 싫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잠언 24:29에서 ”행악자가 잘되는 것을 보고 부러워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만 보고, 어떻게 저런 악한 인간이 잘 살고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나사로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할 줄 모르고 돈을 모아 잘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저렇게 살아도 잘 사는 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부자는 대단히 잘못 살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것은 부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나사로는 천국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는 데로 거두는 일은 세상에서도 나타나지만 세상에서 나타나지 않는 공평한 것은 이 세상 밖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비단 성경에만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勸善懲惡을 말하는 모든 생각이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심되 좋은 것을 많이 심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신령한 것을 심으면 영생을 거둔다고 하시고 육의 것을 심으면 죄를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교훈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나쁜 것을 잔 듯 심어 놓고도 좋은 결실을 거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나쁜 것을 심고 좋은 것을 거두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혹간에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좋은 것을 심어야 좋은 것을 거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좋은 것을 뿌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쁜 결과를 보면 이상하다고 합니다. 이상할 것 한가지도 없습니다. 그가 좋은 것인 줄 알고 뿌린 것은 사실 나쁜 것을 뿌린 것입니다. 즉 나쁜 것을 뿌리면서도 좋은 것을 뿌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무엇이며, 나쁜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생을 많이 하고 의사가 되여 살만큼 되어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자기 자식들에게 좋은 것,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을 준답시고 귀족 교육을 하고 귀족 생활을 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잠자는 침실과 침대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입히는 옷도 최고급품으로, 먹는 것도 최고품으로, 그는 최고가 아니면 아이들에게 입히지도 먹이지도 재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최고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돈을 써서 좋은 학교에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해외 유학이 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그 생활에 적응을 못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결국 최고가 되긴 되였습니다. 그러나 그 최고는 망나니 최고였습니다. 그 때에야 그 아비는 자기가 생각하던 최고로 좋은 것이 잘못 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아이들과 그 가정은 구제 불능의 저주받은 아이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은 성령 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성령 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시고 인간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신분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좋은 것이던 나쁜 것이던, 우리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던, 어렵게 하는 것이던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에게 감사할 줄 아는 것, 이상의 좋은 것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영국의 버나드 쇼에게 누가 묻기를 “세상에 어떤 책이 가장 귀한 책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서슴없이 “구약의 욥기”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구약의 욥기가 어떤 책입니까? 극한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위대한 욥의 믿음과 승리와 축복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까? 그 책의 핵심적인 말씀이 무엇입니까?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 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 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한 욥의 말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식 10남매와 재산과 아내와 민족을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사단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그가 한 말은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 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 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입니다. 이 일이 욥에게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 참고 견딥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의 큰 츅복을 받습니다. “(욥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욥42: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욥42:16)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욥42: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1960년대 후반부터 전세계에는 프리섹스가 번져 가정이 파괴되고 성도덕이 문란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찾아 온 것이 무서운 성병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 호모 섹스가 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찾아 온 것이 무서운 에이즈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 것이며, 그것을 심을 때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허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갈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5. 선한 것을 심어야 합니다.
한 청년이 급히 교회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한 노인이 자전거의 체인이 풀려 끼우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간단한 일이지만 처음 해보는 노인에게는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년은 자기가 도와 줄까도 생각했지만 오늘은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는 날이고 자기가 오늘 맡은 순서가 생각이 나서 그냥 못 본 척하며 지나갔습니다. 교회에 도착하니 부흥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초청된 목사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속된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목사님이 나타났습니다. 청년은 깜짝 놀랬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전거를 고치고 있던 바로 그 노인이었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는 선한 일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재주가 하나 씩은 있습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만, 친구는 운동을 잘 할 수도 있고, 내가 힘이 세면, 다른 친구는 지혜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왜 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서로 돕고 살라고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힘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지혜 있는 자가 미련한 자를 서로 서로 도와 가면서 그렇게 말입니다. 그 청년이 목사님을 도와 체인을 갈아주었다면 부흥회가 좀 더 일찍 시작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게 선을 행할 힘이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힘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이 말뜻은 선을 심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낙심하기 쉽고, 피곤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고 명예와 지위를 얻는 일에는 피곤을 모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할 때는 낙심된 일이 많이 생깁니다. 피곤하기도 하고,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가라는 의문이 생기 기도하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서 낙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인내하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금방 무슨 좋은 일이 일어 날 줄 기대를 하는데 선한 일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 있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꼭 선한 결과가 있음을 믿고 기다리지만 자기 공로를 내 세우지 말아야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죽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일을 해 좋고도 무익한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것이 잘 기다리는 방법이 됩니다. 자기의 공로를 강조하면서 기다리면 기다림에서 실패를 합니다.
1865년 마시리라는 사람이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하나님에게 바쳐 YMCA (기독교 청년 연합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감리교의 평범한 평신도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기독교인인 청년들을 모아 하나님의 복음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하고 착한 일을 위해 1년만에 88,000달라 가 모금이 되였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다시 투자를 해서 18개국에 동시에 YMCA를 설립했습니다. 그러자 더 많은 기부금이 답지가 되였고 전 세계에 YMCA가 창설되었고 24만 개신교 지도자들이 배출 되였습니다. 마시리라는 사람의 헌신과 그가 심어 놓은 선한 씨앗이 오늘도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는지 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마침내 1946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6. 하나님이게 바치는 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어느 역사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역사를 연구하고 사람의 생활을 관찰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쓰시는 분은 하나님께 바치기를 잘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성경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바치라는 말씀을 수없이 들을 수 있습니다. 바치되 좋은 것을 바치고, 첫 열매를 바치고,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고, 먼저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치는 자에게 후히 되여 눌러 부족함이 없게 주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드리므로 받는 축복의 원리를 이 맥추절에 께닭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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