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2013. 12. 11. 11:55신학자료/4.현대신학

소외 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교육 기회 제공

프랑케는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될 무렵, 독일이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후진국에 속해 있을 당시의 사람이다. 독일은 역사적으로 왕권이 강했던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여러 제후국들이 모여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중세 시대 교황들은 독일의 연약한 제후 체계를 이용하여 독일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경제적인 이익을 누렸다. 성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모금이 독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던 것도 교황청의 독일에 대한 강한 영향력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1517년 종교 개혁이 일어났으며, 이후 유럽 각국은 신교, 구교의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독일에서 301618~1648 동안이나 전쟁을 치른다. 독일 전역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전쟁 고아들도 곳곳에 넘쳐 났다.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749년경의 프랑케 학교

1663년에 태어난 프랑케는 1692년 프로이센 지역에 있는 할레대학교의 교수로 일하는 동시에 할레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목사로 일했다. 그의 강의는 아주 인기가 있어서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프랑케는 그곳에서 가난한 집의 자녀들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 그래서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돈을 지원했으나, 그의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695년에 아주 적은 자본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할레대학교의 제자들을 교사로 임용한다. 1699년에는 72명의 교사가 근무할 정도로 학교가 성장했으며, 1,000여 명의 고아들이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생활했다. 프랑케는 학교 이외에 고아들을 위한 기숙사, 출판사, 인쇄소, 빵 제조 업체, 서점, 약국 등을 운영하는 등 큰 사업체를 꾸려 나갔다. 그의 학교는 모든 사회 계층의 자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에게는 등록금을 받고 고아들은 무상으로 교육하였다. 1716년에는 150명의 교사가 2,000여 명의 학생들을 교육하는 명실상부한 프로이센 제일의 교육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프랑케는 교육자로서 교육 과정을 설계하고, 영재 테스트를 최초로 도입한다. 또한 독일어의 맞춤법을 통일시켜 학생들이 실용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교육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왕까지 변화시킨 프랑케의 가치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독일은 여러 제후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871년 독일의 여러 제후국을 통일한 프로이센도 1700년대까지는 별 볼일 없는 제후국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1713년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1711년에 처음 프랑케를 만나 독일 경건주의를 접하게 된다. 그는 프랑케에게 큰 감명을 받았으며 왕으로 즉위한 직후인 1713년 다시 프랑케를 방문한다. 그는 프랑케 학교가 표방하는 경건주의, 사회 복지 철학을 프로이센 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는다. 그는 프로이센의 미래 관리들을 이 학교에서 교육받게 하였고, 그들은 여기에서 근면, 성실성, 책임감, 정확성, 경건 등을 중요한 가치관으로 배웠다.

프리드리히 1세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케 학교에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따라서 이 학교는 프로이센 국가의 공식적인 교육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프랑케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1세는 프로이센의 귀족층에게도 근면, 절약, 책임감을 가지도록 강조했으며 자신도 근면과 절약에 솔선수범하였다. 예로 그의 왕실 지출비는 전체 국가 예산의 1%만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프로이센의 귀족층은 프랑케의 영향으로 국력을 축적해 1871년 독일의 통일을 이룬다. 프랑스에서는 즐길 줄 모르고 부지런히 일하는 프로이센 사람들을 빗대어 "프로이센 사람이 되는 것은 영광이지만, 그들은 즐기지는 못한다"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

독일에 살다 보면 독일 사람들의 정직성과 근면성, 체계적인 시스템에 대해서 감탄할 때가 많다. 오늘날 '독일'하면 떠올리게 되는 독일인적인 성향은 프로이센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프로이센에 큰 영향을 끼친 프랑케의 교육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현재 독일 사회에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하나로 프랑케를 간과할 수는 없다. 교육이 진정한 백년대계임을 프랑케를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_ 홍혜정 / 사진 출처_ www.heiligenlexikon.de

홍혜정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독일 함부르크대학 역사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함부르크에서 프리랜서 통·번역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함부르크 한글 학교에서 독일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신학자료 > 4.현대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건주의 초기 역사  (0) 2008.12.18
경건주의와 종교개혁  (0) 2008.12.18
프랑케와 할레의 경건주의   (0) 2008.12.18
현대 신학의 흐름  (0) 2007.10.29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  (0) 2006.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