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초기 역사

2008. 12. 18. 22:09신학자료/4.현대신학

경건주의 초기 역사


 

I. 머리말

II. 경건주의의 의의

III. 경건주의의 본성

Ⅳ. 영국 퓨리턴들의 경건주의

Ⅴ. 맺는말



I. 머리말


우리는 1991년부터 경건주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십여년 전부터 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함께 영적인 소원이 사라지고 교회의 성장 둔화가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한 경건주의 연구는 알게 모르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에도 한일 신학교에 경건주의 연구회가 있고 경건주의에 대한 책들이 수없이 번역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는 여러 목자님들에 의해서 연구된 것들과 새롭게 번역되는 자료들을 기초로 좀더 내용을 심화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다시 한번 영적 부흥과 사회개혁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경건주의는 1600년대에 유럽에서 교회와 사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일어난 운동입니다. 유럽은 그 때에 중세 사회가 붕괴된 다음 사회 전체가 급격히 변하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있었던 개신교 갱신 운동 가운데 뒷날까지 가장 넓고 깊게 영향을 끼친 것이 경건주의입니다. 경건주의는 교회의 신앙과 신학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은 자국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편, 경건주의는 교회사와 신학사에서 가장 크게 오해를 받아온 운동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은 점에서 경건주의 유산을 물려 받았는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aesemann)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아직도 경건주의 안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영향을 얻고 있다. 오늘날도 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경건주의 계통에서 배출되고 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의 쇠퇴는 전체 교회의 활동 영역에 대한 심각한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케제만의 이 말은 유럽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경건주의 유산이 20세기 끝무렵을 사는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경건주의를 신비주의나 열광주의, 도덕적 신인협력주의나 율법주의, 인간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내세 지향적 개인 신앙이나 역사성을 무시한 외골수의 주관적 신앙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경건주의를 교회를 갱신한 운동이 아니라 교회를 퇴보시킨 운동으로 취급했습니다.

교회사에 있었던 어떤 운동이나 사조든 그 초기 형태와 나중에 주도권을 쥐고 난 뒤 형태가 같지 않습니다. 경건주의는 그 시대에서도 아주 많은 흐름을 포괄하고 있고 시간적으로도 매우 긴 시기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부정적인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주의의 주된 흐름인 교회적 경건주의를 두고 볼 때, 또 경건주의가 초기에 가졌던 문제의식을 놓고 볼 때 위의 판단은 일방적이고 또 맞지 않습니다. 경건주의에 관한 잘못된 판단은 최근 30여 년 동안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경건주의가 교회와 사회를 갱신한 운동임을 여러 학자들이 드러냈습니다. 이 글은 영국의 경건주의를 중심으로 경건주의의 초기 역사를 살피고 이로써 경건주의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II. 경건주의의 의의


경건주의는 1600년대에 일어난 개신교적 갱신운동으로서 타락한 당시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경건주의가 방어적이며 체제 유지적며 보수적 인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운동이든지 그것이 다수가 되고 주도권을 쥐게 되면 체제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운동의 본질은 그 초기 성격에 비추어 평가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살피면, 교회사에서 경건주의만큼 혁신적인 운동도 드물었습니다.

당시는 크게 보아 중세에서 근세로 변화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중세에서 근세로' 변함이 여러가지를 뜻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변함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제도적인 교회나 위에 있는 신(객관)이 어떻게 규정해 주느냐보다 내(주관)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정통주의는 이러한 변화 가운데서 객관성를 고수하려는 힘겨운 노력을 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이러한 시대에 객관성을 보존하면서도 주관성이 객관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침으로써 그 시대에 기독교를 의미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갈등은 다른 말로 하면 교리와 삶의 갈등입니다. 특히 이 점에서 그 즈음 주도권을 쥐고 있던 정통주의와 여기에 반대했던 경건주의 사이의 차이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통주의가 바른 교리를 정의하고 그것을 보존하는데 가장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경건주의는 바른 교리를 삶에서 실천함을 더 강조한 운동이었습니다. 바른 교리(Ortho-doxie)보다 바른 실천(Ortho-praxis) 또는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 더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강조점을 옮김으로써 경건주의는 변하고 있던 세대에 기독교의 복음을 변증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적인 삶을 지향하며, 미완성인 종교개혁을 완성하려고 했던 경건주의는 이런 목적을 위하여 신비주의적 흐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경건주의 운동이 신비주의 사상 가운데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실천 지향적인 장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주의는 전반적으로 사변적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청교도 운동이 경건주의에 접맥된 것도 주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경건주의는 교리에 치우친 정통주의를 반대하며 일어났는데, 감정과 직관에 빠진 신비주의와 달랐고 인본주의적 윤리를 강조하는 계몽주의와도 달랐습니다. 후에, 계몽주의 사상을 그 토대로 형성되는 자유주의 신학에 경건주의 흐름을 이어받은 각성운동이 대립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Ⅲ. 경건주의의 본질


청교도들은 그들의 강조점에 따라서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로부터 성의와 전례에 잔존하는 교황주의적인 찌꺼기를 제거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퓨리탄들은 ‘좀더 순수한 ’예배 형식을 갈망했던 성직자들이었습니다. 둘째 부류는 카트라이트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으로 교회와 국가 간의 정치적 분쟁의 길로 나간 사람들입니다. 셋째부류는 순수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분리주의에로 나간 사람들입니다. 넷째 부류는 엄격성 내지는 경건성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퓨리턴 진영 속에 예배, 정치, 교회론에 주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듯이 개인적 경건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부류도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후대의 비국교도들의 정치적 무관심의 전조였습니다. 이같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개인의 종교적 복지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우리가 다루게 되는 사람들의 사상과 업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들을 경건주의적 퓨리턴이라고 부릅니다. 경건주의와 퓨리턴사이에는 다방면에 걸친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양자 모두 교리체계라기 보다는 종교적 경향이었으며 둘다 삶의 개혁을 목표로 삼았고, 반동적이었으며 다양한 신앙 체계를 통합시킬 수 있었고 신앙에 대한 국가적 제한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신앙적으로 열렬했고 금욕적이고 율법적이고 도덕적으로 진지했으며 이성보다 의지를 더욱 강조했고 경건의 실천에 치중했습니다.

경건주의는 하나의 신학 체계도, 완벽한 교리도, 특정한 교회정치 형태도, 하나의 예전도, 어떤 지리적 동질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식별 가능한 역사적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한다면 경건주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경건주의는 네가지 특징을 근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경건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체험적”, “내면적” 혹은 “인격적”과 같은 경건주의의 전통의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들은 항상 이러한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중심축을 가리키는 의도로 사용된 용어들입니다.

교회는 주로 이러한 관계로부터 신학이나 제의적 의식 같은 형태로 강조점을 옮기도록 유혹당해왔습니다. 기독교가 외적인 형태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고 그에 따라 형식주의가 등장합니다. 경건주의자들은 그러한 형식주의에 대해 단호하게 대적해왔습니다. 그들은 형식주의가 도덕적 종교적 무관심주의의 바로 전 단계에 해당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외적인 것에 빠져 생기를 잃은 형식적 기독교는 오직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조금 나을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해서 그들은 신비주의자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내면적인 응답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둘째, 경건주의의 특징은 종교적 이상주의입니다. 우리는 영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몸의 구속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때문에 갈등과 긴장 속에서 살게 됩니다. 경건주의자들의 종교적 이상은 완전을 향한 열망으로서 주로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주의자들은 그들의 설교에서 끊임없이 회개와 성화없는 개인의 기독교는 공허한 것이고 그의 신앙 고백은 사기일 뿐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경건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직업에서 사회의 일반적 도덕 수준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도덕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신자들의 의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헌신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경건서적, 성경 읽기, 기도, 규칙적인 예배 등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필수적이었습니다. 당시 스콜라주의자들은 그러한 경건을 행위의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경건주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건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신앙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필연적 산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인간이 표시한 감사의 행위였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응답하는데 있어서 심리적으로 꼭 필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17세기 동안 주요 교파 내에서 고려되지 않았던 세계 선교에 대한 심원한 관심도 경건주의자의 이러한 종교적 이상주의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학이 루터교적이든 칼빈주의적이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의무감을 느낀 사람은 주로 경건주의자였습니다. 16세기 영국의 종교 개혁 역시 주로 정치적이었고 그 때문에 교회 안의 진정한 개신교 윤리는 아직 발전되지 못했습니다. 높은 종교적 이상주의의 비젼을 가지고 개인적 중생을 통한 교회와 국가의 도적적 개혁을 목표로 하여 설교와 저술작업을한 이들은 바로 영국의 경건주의적 퓨리탄들과 대륙의 경건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 경건주의의 세 번째 특징은 성경을 강조한 것입니다.


넷째, 경건주의의 특징은 저항의 요소입니다. 경건주의라는 용어는 그것이 주장하고자 하는 경건이 본성상 이것과 다른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과 삶의 규범에 저항한 곳에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상 경건주의의 네가지 특징적 강조 즉 체험적, 완전주의적, 성경적, 저항적 요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개신교 안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Ⅳ. 영국 퓨리턴들의 경건주의


영국의 종교 개혁은 헨리 18세가 이혼문제로 교황청과 갈등이 있자 로마와 단교하고 수장령을 공포하여 국교회를 성립시킴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후 에드워드 6세때 교회를 캘빈주의 형태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메리 여왕(1553-1558)의 카톨릭 복귀정책으로 말미암아 교회내에 개신교적 요소들이 분쇄되었고 옛 로마 카톨릭 의식들이 재현되었습니다. 그녀는 1553년 8월 그녀의 재가 없이는 모든 설교와 인쇄를 하지 못하도록 함으로 청교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청교도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후퍼는 예복 착용에 반대하여 저항하다가 화형당하였습니다. 존후퍼는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서머셋 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상당한 배경을 갖춘 부모 덕분에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1519년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여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글을 읽게되자 자신이 전력을 기울여 취리히 개혁자들의 저작을 연구하도록 신의 감화를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경건주의의 선구자이며 회개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했습니다. 후퍼와 동시대인으로서 존 브래드포드가 있습니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고 겸비한 인물”로서 대륙 종교 개혁과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 사이의 가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이자 모임에 다름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성례는 그 어떤 “즉물적인 임재”에 의해 유효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그 실재는 “성령과 믿음의 눈과 귀로 ”감지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거듭 거듭 개진하였습니다. 또한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의 절대적 유효성에대한 강조입니다. 이 율법은 인간의 몽학선생이며 그 자체로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고 심지어는 지옥문 앞에 까지 끌고 가서 마침내 그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에 못지 않게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부단히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선과 자비를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거듭남’이 날마다 더하도록 기도하자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의 개조에 다름 아닌 것이니 즉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자기 의지에 반하여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그것은 이어받는 것 처럼 제 2의 아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만사에 우리를 이끌고 인도하는 ‘선한 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삶 자체를 하나의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영적 초연함을 추구했습니다. 또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에서 지켜야 할 교훈”에서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단순하고 가식없고 겸손하고 열렬하게 마음을 여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로써 필요한 것을 요청하거나 이미 주어진 은혜에 감사한다.”고 정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대낮의 햇빛을 볼 때, 기상할 때, 옷입을 때, 하루를 시작할 때 기도한다. 그는 하루 온종일 기도하는데 식사 때, 식사 후에 저녁에 귀가할 때, 해질 때, 촛불을 켤 때, 잠자리에 들 때 기도한다. 마침내 졸음을 느낄 때 그는 입술에 다음의 기도를 머금고 수면에 들어감으로써 하루를 마감한다. “오 나의 파수꾼이요 보호자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보살펴 주소서: 당신 안에서 나의 육신이 안식하게 해 주시고 나의 혼이 깨어서 경성하게 하소서.” 그는 자기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 속에 기도의 영이 확실히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경우와 상황에 적합한 묵상과 기도문을 만들어 냈는데 이는 그의 후대에 등장한 수많은 경건주의자들과 대동소이했습니다. 이상의 경건주의적 퓨리터니즘의 정신은 수난과 순교 속에서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경건주의의 최선의 형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진실로 실존적인 접근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회적 혼란과 기존이 가치 체계가 분쇄되는 와중에서 의미를 발휘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와대조적으로 신학적 체계의 구축과 스콜라 신학적 정교성에의 탐구는 풍요롭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가운데서 이루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주의적 퓨리턴들의 초기 핵심 인사로는 윌리엄 퍼킨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1557년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자비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음주와 불경스런 언행에 탐닉했는데 한번은 한여인이 자기 자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입다물어, 아니면 저기 주정뱅이 퍼킨스에게 데려갈러야.” 이 말에 마음 깊이 충격을 받은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너무나 경건하고 무흠했으므로 악의를 품은 사람들도 그의 명성을 헐뜯기를 두려워했으니 그들은 도저히 그에겐 자기 이빨이 들어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오른손이 불구였음에도 그의 왼손에 쥐어진 붓으로 로마 카톨릭의 대의 명분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그의 저서는 사후에 대다수의 현대 기독교언어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의 주저는 [황금 사슬]입니다. 퍼킨스의 사상에서 신학과 경건은 전혀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경건은 실천 신학이었고 신학은 경건의 지적 토대였습니다. 여기서 그의 근본 관심사는 경건이었습니다. 그는 “신학이란 복된 영생의 학문이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본질상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고 그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생활 방식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의미했습니다. 대륙이 개혁자들의 제 2세대는 종교 개혁을 위한 원초적인 동력을 제공했던 기독교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떠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교리적 정의의 미세한 차이점에 사로잡혔고 신학 논쟁에 정력을 탕진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퓨리턴들은 그들의 신학적 통찰력을 기독교인의 실생활에 적용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이것이 퓨리턴 공동체 내에서 경건주의적 발전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경건의 최고조는 17세기 초반 영국의 가장 들뜬 시기에 도달했습니다. 그때는 영국 역사상 가장 소란하고 예측 불가능한 시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의 인물 중에 존 도네임, 토마스 굳윈, 제레미아 버러우, 리차드 백스터, 죤번연등을 들 수 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영국 경건주의에서 극히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지성과 도덕적 진보, 사랑의 능력, 사역의 위력, 현실적 업적등 모든 것들이 가장 큰 규모로 성취되었습니다.” 설교에서 그는 지성뿐만 아니라 심정을 움직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적용력과 드문 예리함, 뛰어난 분별력, 인간 마음의 죄악성의 깊이에 관한 심원한 지식, 자기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의 겁없는 성실성, 그를 떠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임박한 죽음에 관한 자각과 함께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부드럽고 유연하며 음악적인 목소리와 온유하고 정감적이며 장중한 매너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모든 말에 위엄과 사랑을 덧입혀주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 개신교 강단 역사에서 백스터보다 뛰어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는 우리가 하는 소감 모임과 같은 것을 하였고 젊은 사람들 몇 명이 사적으로 모여서 세시간 이상 합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의 집에 모여서 지난 주일의 설교를 반복하고 다음 날을 위해 기도로 준비했습니다. 그는 개신교의 가장 매력적인 러브 스토리가 될 만한 모든 재료들을 갖춘 가정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와함께 죤 번연에 관해서 말해야 하지만 우리가 그의 생애를 잘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자 합니다. 제레미 테일러는 [거룩한 삶], [거룩한 죽음]을 통해서 거룩한 삶에 도움이 되는 일반적 수단들을 상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죽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죽음을 예기하면서 살고 날마다 무덤 문을 두드리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무덤문은 결코 그를 압도하여 해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 ” 거룩한 죽음은 실제로 죽는 방법에 대한 논문이 아니라 평안하게 죽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문입니다. 그의 핵심적 관심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촉발되고 철저한 윤리적 행동으로 표현되는 거룩한 생활이었습니다.


V. 맺는말


경건주의가 당시의 타락한 교회와 사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삶의 변화, 곧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을 외쳤던 것에서, 벽에 부딪친 현재 한국 교회의 출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점은 우리가 경건주의를 연구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 가운데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행(시대 사조)을 비판하는 능력이 적다는 것입니다. 많은 목회 프로그램들이 한때 유행했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행을 넘어서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 인식 과정은 전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지성, 감정, 의지가 총체적으로 작용하여야 전인격적인 신앙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디 전인격적인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국 교회는 어느 한 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왔습니다. 전통적인 유교적 가부장적 신앙에서 의지쪽을 강조하였다면 성령 충만을 외치는 신앙에서는 감성을 강조하였고 제자 훈련형의 신앙에서는 지적인 인식 과정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기독교의 삶이란 이 모두를 묶는 삶입니다.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하시는 성령님은 전체의 삶을 변화시키십니다. 경건주의는 성령을 통하여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삶을 변화시키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우리가 21세기를 섬기기 위하여 우리 시대에 맞는 경건 훈련을 개발하고 확산시켜야 합니다. 일대일 성경 공부와 소감 훈련을 좋은 경건의 훈련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제는 더욱 힘차게 확산시킴으로써 시대를 변화시키는데까지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Ⅵ. 참고 문헌


에르네스트 스트풀러, 「경건주의 초기 역사」 송인설, 이훈영역, 도서출판 솔로몬, 1993.

지형은, “야곱 스페너를 중심으로 경견의 위기와 소그룹을 통한 교회 갱신(Ⅰ,II)” 목회와 신학 6,8월호, 1996.

??????, “종교 개혁의 종교 개혁”,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임용을 위한 공개 강의 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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