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의 흐름

2007. 10. 29. 22:19신학자료/4.현대신학

현대 신학의 흐름

 

Schleiermacher부터 볼트만까지

 

 

 


 <서론>

  현대 신학은 현대 철학이나 과학보다 조금늦게 시작되었다. 18세기 유럽의 지성계를 지배한 데카르트-뉴톤적인 현대 세계관과 사고방식은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도전으로 대두되었다. 이는 전통 신학의 모든 전제들을 문제시하고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대 정신의 도전에 직면하여 19세기초 신학적 응답으로 일어난 것이 현대 신학이다. 그것은 현대 세계에서 존립할 수 있는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대에서 그 토대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에 대한 대답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상황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현대 신학의 주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현대 신학의 흐름은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근본주의 및 최근 신학으로 분류되는데 이는 논쟁 중심으로 현대 신학의 흐름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흐름은 19세기의 슐라이어막허(1768-1834)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독일개혁교회 출신이지만 칸트이후에 신학하였기 때문에 전통적 신학방식에서 180도 회전하여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출발점과 참조점을 다 인간에게로 자져오므로 내재신학을 만들어 신학에 있어서 새로운 기원을 열어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런 19세기의 내재신학으로 출발한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났다. 유럽의 신정통주의 신학과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이 그것이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그리고 미국에서는 1929년 경제 대공황 이후로 자유주의 신학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인간 이성의 능력, 낙관주의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파괴됨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사상적 기반을 잃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본성의 어두운 측명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능력에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위기의 시대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는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인간중심주의로의 전환이 신정통주의와 근본주의의 신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19세기의 내재 신학에 대해 발트와 그의 동료 변증신학자들 에밀 브룬너, E.트루나이젠, F.고갈텐, R.불트만등이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신학의 근본인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이일은 발트가 시작하고 진행하며 체계화 하였다. 바르트와 함께 신정통주의 신학을 대표한 이가 있는데 에밀 브룬너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분쇄하고 종교개혁 신앙에 기초한 정통주의 신학을 재정립하는데 뜻을 같이한 동료요, 동지였으나 자연신학에 대한 견해차이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우리가 현대신학을 논할때 발트 다음 20세기 3대 신학자 중 하나인 불트만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배경은 깊은 자유주의에서 출발하였고, 과격한 신약 비판작업을 수해하여 비신화화 작업과 실존적 해석으로 복음을 번역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트만에게 있어서는 역사적 예수는 단지 존재했었다는 것 이상 아무것도 없고, 선포의 그리스도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적 방법으로 복음서를 탐구하여 거기서 역사적 예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예수는 교회의 선포에 나타난 그리스도 뿐이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성과 정확무오함에 대한 도정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신학에서 슐라이어막허와 바르트와 브룬너 그리고 불트만의 신학사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현대신학의 동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론>
  1. 슐라이어막허의 내재신학
  현대 신학의 태동은 19세기에 이루어진 신학의 대변환에서 시작되었다. 이렇나 변혁은 슐라이어막허가 현대 세계관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현대의 정황에 맞게 재 해석함으로써 현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이로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성경본문, 신조 및 교리를 신학의 토대를 삼는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신학 방법론상의 일대 변혁이었다. 신학을 계시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간의 종교의식에 대한 연구론,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에서 안간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러한 신학이 바로 내재신학인 것이다. 슐라이어 막허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몇가지 요소가 있는데 종교적인 면에서는 개혁교회적인 가정 배경과 모라비안 경견주의에서의 교육이었다. 철학저인 면에서는 할레대학교 재학시절의 칸트연구와 번역사업을 통해 접한 플라톤의 사상을 들수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베를린의 자선병원 원목시절 점 은 지성인들과의 교제를 통애 받은 낭만주의의 영향이라 하겠다. 종교적인 면에서 슐라이어막허는 독일 개혁교회 전통과 경건주의 전통이 그 것이다. 그는 부모의 가문 모두로부터 개혁교회, 즉 칼빈주의 전통을 물려 받았다.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개혁교회 목사가문이었다. 슐라이어막허 여시 개혁교회 신앙교백에 동의하고 개혁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실제로 그는 칼빈주의 예정론을 변호하고 루터교도들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슐라이어막허의 가문에는 경건주의의 전통이 있었다. 아버지 고트리프는 개혁파 목사였으나 모라비안 경건주의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모라비안 교단은 종교개혁의 선구자 후스의 감화로 15세기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생겨난 보헤미아 형제단으로 부터 기원했으며, 깊은 종교적 감정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고트리프는 아내와 자녀들 역시 경건주의적인 신앙을 가지도록 인도했으며, 그 결과 슐라이어 막허는 14세기 때 회심했다. 슐라이막허가 종교의 정서적인 면을 강조하여 종교의 본질을 감정으로 간주한 것이나 종교와 철학을 철저히 구별한 것,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주장한 것은 모라비안 경견주의의 영향이었다. 슐라이어막허는 베를린의 자선 병원 원목시절 도오나백작의 소개로 낭만파 모임에 가다마했다. 낭만주의 자들은 18세기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 문학, 철학, 과학등 답변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강요된 것보다 자발적인 것을, 냉랭한 합리성보다 경험과 감정을, 외적이며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이며 상상적인 것”을 강조 했다. 슐라이어막허는 18세기 계몽주의와 계몽주의 신학의 초자연적 교리를 거부했던 낭만주의자들에게 공감하여 그들과 결합했으나, 신학과 철학에 대한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낭만주의에 종속되지 안혹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햇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는 종교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스피노자와 칸트 철학의 영향을 깊게 받아 신학을 하므로 신학에 있어서 초자연적 요소들을 배제하고 기독교를 내재화 하였다. 칸트가 인가의 이성의 능력과 범위를 제한하여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을 감각기관을 통해서 접촉하는 현상세계 뿐이라고 확정하였다.
  2. 칼바르트와 자유주의 신학
  칼바르트는 20세기 신하계를 주도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창시자료 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다. 바르트는 19세기 신학의 방법론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인간의 경험이나 종교적 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신학 또는 그리스도 증심적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과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중심에 대한 강조가 바르트 신학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적 교육을 받고 자유주의 신학자로 출발 했으나, 후에 이화 결별할 뿐만아니라 그 분쇄를 신학적 과제로 삼았다. 그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작용이엇다. 칼마프트는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하여 개혁교회적인 신앙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저명한 보수주의 신학자 프리츠 바프트였다. 바르트의 신학교육은 주로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스승들 대부분은 당대 신하계를 주도하던 자유두의 신학자들이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 하르낙과 헤르만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를 신봉했다. 그러나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은 급진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11년 아루가우(Argau)의 사펜일(Safenwil) 교회의 단독 목사로 부임하여 배운대로 자유주의 설교를 계속 하였다. 대학에서 배운 신학을 따라 설교했지만 싸펜일동네 사람들은 교회에 오지 안했고 주말을 즐기기 위해 산과 들로 나아갔다. 설교를 꼼꼼하게 준비했지만 거의 빈교회를 향해서 설교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에서 통요될 수 없음을 그가 알았다. 더구나 1914년 하르낙을 위시한 당대 유명한 신학자들이 다른 학자들과 함께 빌헬름 2세의 전쟁정책을 지지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따라서 바르트는 그들의 신학과 윤리학을 따를 수 없음을 깨닫고, 성경을 다시 이해하고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키엘케골을 읽고 칼빈을 다시 읽으며 칸트와 플라톤, 도 노에프스키 등을 읽어서 성경을 다시보며, 전통적 개혁신학에로 방향을 바꾸었다. 역사적 비평적 방법이 설교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보고, 역사에 대한 경외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회를 대치하였다. 인간의식의 신학을 대신하여 신적 계시의 신학을 대치하였다. 인간에게서 시작하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생가하는데서, 하나님에게서 시작하고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있다.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정립된 그의 신학이었다. 특히 신학 방법론 상에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전자가 인간의 경험이나 종교의식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데 반해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렇게 눈이 열린 바르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로마서를 주석하였다. 역사적 비평적 방법대로 아니고, 셩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로하여 주석하여 1918년 로마서 주석 초판을 탈로하고 1919년 로마서 출간으로 새로운 신학, 20세기 시작의 문을 열었다. 이 로마서 주석은 19세기 신학과 20세기 신학의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유일한 근거하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대신 인간, 인간의 신앙, 경견, 감정 및 문화등에 중신을 두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든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성을 강조하던 초기의 입장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인가, 시간과 영원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 질적 차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변증법을 사용했다.  罐떼 주석 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이 떨어진 것”과 같은 충격을 신학계에 주었다. 그리하여 신앙에 대해 말할 때 인간의 종교경험에서 출발하는 것을 거부하므로 슐라이어막허와 19세기 신학을 반박하였다. 발트는 슐라이어막허의 내재신학을 비판 하면서도 종교도 비판하였다. 슐라이어막허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 감정을 신앙의 본질로 정의하고 이러한 감정 혹은 종교의식을 신학의 출발점과 중심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바르트는 신앙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신학을 전개했다. 슐라이어막허의 관심사가 기독교적 자기의식이었다면 바르트의 관심사는 인간에게서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슐라이어막허가 아리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신학적 방법을 택했다면, 바르트는 이를 반대로 뒤집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법을 택했다.
  3.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
  18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신학계를 지배했던 자유주의 신학은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터전이 되는 인간이성의 능력, 낙관주의 및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전쟁을 통해 허구로 판명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0세기 초에 나타난 새로운 신학사조가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것은 “위기의 신학” “변증법적  니학” 또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대표자가 칼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에밀 브룬너(Emil Brunner 1889-1966)였다.
  이들의 관계는 우정과 갈등과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분쇄하고 종교개혁 신앙에 기초한 정통주의 신학을 재정립하는데 뜻을 같이한 동료요 동지였으나 자연 신학에 대한 견해차이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들의 우정의 토대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갈라놓은 견해차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일반계시와 자연신학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바르트는 이를 부정했고 브룬너는 인정했다. 바르트와 브룬너는 모두 스위스 출신 개신교 신학자이다. 이들은 스위스와 독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지만, 목회활동을 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성을 깨닫고 그것과 결별했다. 그들은 인간의 경험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적인 신학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들은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의 후예들이며 철학적으로는 칸트철학과 키에르케고르 및 하이데커의 실존주의 철학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의 신학은 공통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신학을 신정통주의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변증법적신학, 위기의 신학, 또는 스위스학파로 부르는 것이 좋은 예라 하겠다. 그리고 이들의 신학 사상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주의라는 것도 또 다른 중요한 공통점이다. 이것은 변증법적 신학의 특징이기도 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신학의 지도자들은 많은 공통점을 지닌건 사실이지만 모두가 다 같은 공통점만 있는건 아니었다. 이러인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사상적으로 서로 가라지게 되었다. 특히 바프트와 브룬너 사이의 논쟁은 자연신학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느냐는 것이 바르트와 브룬너의 논쟁점이다. 바르트는 일반계시와 자연신학을 모두 거부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자연신학을 변호라려는 한 사람이 다름아닌 친구 브룬너였다. 1934년 그는 공개 서한을 통해 바르트에 도전했다. 그것이 토마스주의의 유명한 표어를 표제로 사용한  悶О泡은총(Nature and Grace) 이다. 이 책은 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한 비판서였다. 이에 바르트는 같은해 10월  틈臼앴 에밀 브룬너에 대한 응답(No! An Answer to Emil Brunner)'이라는 저술을 통해 즉각적으로 응답했다. 바르트와 브룬너 사이의 자연신학 논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