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

2006. 11. 8. 00:04신학자료/4.현대신학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

   허호익(대전신대 교수)


  민중신학은 1970년대 이후의 한국적 정치상황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신학적 응답으로 전개된 신학이다. 1970년대는 경제발전과정에서 도시 노동자들의 경제적인 착취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고 급기야 청계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사건으로 표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3선개헌에 이어 10유신을 선언함으로서 정치적 파행이 계속되었다. 이어서 19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긴급조치라는 초법적인 제도로 인해 정치적 자유가 크게 제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촉구하고 이를 신학적으로 풀어낸 것이 민중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은 성서적 근거는 구약성서의 출애급 사건과 신약성서의 예수의 메시야직의 선언이다. 출애급 사건(출 1-12장)은 정치적으로 노예상태에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강제노동의 착취를 당하였으며, 문화적으로는 히브리인종의 남아(男兒)를 강제산아제한을 시키고, 종교적으로는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제사조차 드리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낸 모세라는 지도자에 의해 히브리 민중을 해방시킨 사건으로 이해된다. 출애급 사건에 비추어 보면 구원이라는 것은 정치적 억압, 경제적 착취, 문화적 차별, 종교적 박해로 부터의 해방으로 경험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출애급 전통은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메시야직을 선언한 누가복음(4:18 이하)의 말씀을 통해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한다. 예수는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성서(레 25:8-17)에 나타나는 희년(禧年)을 의미한다. 희년은 출애급 후 매 50년 마다 포로나 노예, 집안의 몸종이나 머슴을 무조건 석방하고 자유를 선포하는 해이며, 토지나 가옥이 타인의 소유로 넘어 갔을 때에는 원소유자에게 무조건 돌려주어 경제적인 불평등을 재편하여 가난한 자의 지위를 격상시켜주는 해이다. 따라서 예수는 이런 구약의 출애급과 희년의 전통에 따라 로마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정치적인 자유와 경제적 착취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한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은 우선적으로 가난한 민중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민중신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을 민중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의 피지배 계층인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라는 민중사관을 주장한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인 이유는 민중이 “생산의 담지자이며, 역사 변혁의 주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생산을 실재로 담당하는 이들은 노동자, 농민, 도시 근로자들이다. 이들의 생산한 것을 모두가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생산을 중단하면, 사회의 지탱과 역사의 발전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든 지배계층은 현상유지를 지지하므로 변화와 변혁을 저지하여왔다. 그러나 민중은 지배계층의 현상유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역사의 변혁과 발전을 선도하거나 주도하여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을 직접 담당하고 역사의 변혁을 끊임없이 시도해온 민중이 바로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민중신학의 핵심을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야성’과 ‘한의 속량적 성격’이라고 하였다. 서남동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장)와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장)”를 연결시켜 민중이 곧 메시야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강도 만난 자를 죄인인 인간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로 해석했다. 그러나 서남동은 예수나 이 비유 마지막에 가서 “너희도 이같이 하라” 명한 것을 토대로 우리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비유를 양과 염소의 비유와 관련시키다. 예수는 주린 자, 목 마른 자, 나그네 된 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와 같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마 25:40)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강도 만난 자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 바로 민중이며, 예수는 이 민중과 자신을 일치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받는 민중을 섬기는 것이 곧 자신과 민중을 일치시킨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민중이 메시야라는 의미에서 지금은 영웅적인 개인의 시대가 아니라 민중전체의 시대이며 역사의 주인은 제왕이 아니라 민중이며, 민중을 다스리려고 하지 말고 민중을 섬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1980년대 광주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서남동은 김지하의 단상에 나타나는 한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수용하여 ‘한의 신학’을 발전시키면 민중의 소리를 한 맺힌 호소로 해석한 것이다. “한이란 눌린 자 약한 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없고 풀어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상태이다. 그렇기에 한은 하늘에 호소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의 무고(無告)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서남동은 죄의 개념을 한의 개념으로 대체하였다. 속죄론과 관련하여 죄를 고대사회에서는 죽음과 불사의 문제로, 중세와 근세에는 죄책감의 문제로, 현대 서구사회에서는 소외의 문제로 파악하여 왔다면  한국신학이 문제 삼아야 할 죄의 주제는 한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사실상 광주민주화 운동 중 희생당한 가족들은 가족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피맺힌 한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반체제인사라는 기피대상으로 경원시되었고 죄인으로 취급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서남동은 이들의 맺힌 한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죄를 “가해의 죄”와 “피해의 한”으로 구분하였다.


  “‘죄’,‘정죄’는 사회학적으로 볼 때 흔히 지배자가 약자 반대자에게 붙이는 딱지(label)에 불과하기 때문에 ‘죄’의 사회학적인 분석 없이 신학적인 이론 전개란 오히려 성서적인 근본의도를 배반하고 역기능을 하게된다. 그러므로 죄론에 앞서서 한, 곧 ‘범죄당한 경우’(sin against)가 문제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죄인들이란 ‘범죄를 당한 자들’(those who are sinned aginst), 곧 억울한 자들이다. 말하자면 ‘죄’란 지배자의 언어이고 ‘한’은 민중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경우, 신군부는 가해의 죄를 저질렀으므로 그들의 만행을 회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억울하게 살해된 광주시민은 “피해의 한”이 맺힌 민중이면서도 오히려 신군부에 의해 죄인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한 많은 죄인”이 된 것이다. “피해의 한으로서의 죄”라는 개념은 죄론적인 의미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한을 푼다는 의미에서 속량적인 성격을 지닌다. 한을 지배자의 가해와 억압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축척된 맺힌 한과 이를 반체제적 사상과 행동으로 승화한 푸는 한으로 구분한 김지하의 한과 단의 변증법을 신학적으로 수용한 서남동은 푸는 한의 속량적인 성격을 한의 사제직과 관련시켰다.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恨의 사제’는 전통적인 서구 신학에서 말해온, 죄의 회개를 강요하고 스스로 속죄의 매체로 자처하는 사제직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한다. 그러므로 한의 사제는 죄로부터 구원을 말하지 않고 한의 절대 해체를 복음으로 선포한다. 지배계층, 부유계층의 횡포를 축복하고 눌린 자들의 자기 생존을 위한 항거를 마취시키고 거세하는 사제직이 아니고, 진정으로 저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비굴해진 저들의 주체성을 되찾는데 함께하고, 저들의 역사적 갈망에 호응하고 저들의 가슴 속에 쌓이고 쌓인 한을 풀어주고 위로하는 ‘恨의 사제’가 될 것을 권한다. 한의 사제는 현실에 눌린 자, 잃어버린 자, 저주받고 추방당한 자, ‘죄인과 세리들’의 한 맺힌 ‘소리의 매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민중의 소리를 듣고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는 예언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서남동은 예수의 주기도문 중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두 구절은 민중들에게만 적용되는 기도문이라고 해석한다. 자자손손 평생 먹고도 남을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가 기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가난한 민중만이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는 바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가해한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들에 대한 민중들의 용서의 선언은 민중의 맺힌 한을 푸는 것이라고 한다.

   어쨋든 민중신학은 1970년대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의 상황에서 태동하여 1980년의 광주민주와 운동으로 한 맺힌 민중, 가난한 민중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고 보듬어 않으려는 신앙적인 열정에서 출발한 행동신학이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강조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은 전통적인 신학에 비해 강조점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민중신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 중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보다 강조하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요한일서(4:20)에서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였다. 민중신학은 보이는 민중을 사랑하는 것이 민중과 자신을 일치시킨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웃 중에서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민중을 우선적으로 사랑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 사실이다. 민중신학이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이웃 사랑만을 강조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한다면 민중신학은 그 신학적 기초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민중신학의 이러한 위험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단이라고 여길 만큼 신학적인 문제가 큰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