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문화혁명(文化革命) 시기와 이후의 중국 기독교(1966-1976)

2013. 5. 10. 17:57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문화혁명(文化革命) 시기의 중국 기독교(1966-1976)

지난 호에 우리는 대약진운동 이후의 중국의 정치변화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의 기독교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문화혁명의 발전과정


1965년 11월, 야오원웬(姚文元)이 상하이의 문회보(文匯報)에《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역사극을 평론하면서 당시의 문예계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마오쩌둥(毛??)은 그의 평론을 정치적 투쟁의 돌파구로 이용하여 모든 신문에 싣게 하였고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리우샤오치(劉少奇)를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파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 5월 16일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마오(毛)가 제정한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통지(通知)’가 통과되면서 문화혁명이 시작되었다. 문화혁명을 지도하는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한 ‘516통지’에는 마오의 좌경사상, 투쟁노선, 투쟁의 방침과 정책 등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중앙문화혁명소위원회>를 조직하여 소위원장에 천바이다(陳佰達), 고문에 캉셩(康生), 부위원장에 장칭(江靑)과 장춘챠오(張春橋) 그리고 왕리(王力), 관펑(關鋒), 치번위(戚本禹)와 야오원웬 등을 위원으로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먼저 인민일보(人民日報)를 재조직하여 선전의 수단으로 삼고 6월 1일 첫 사설에 사상이 불순한 인물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튿날 베이징대학에서 학생들이 <베이징대학당위원회> 와 <베이징시위원회>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발표하고 민중들이 일어나 ‘흑방(黑幇)’을 물리쳐야 한다며 각 당위원회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베이징대학교를 선두로 하여 각 지역의 학생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시위를 벌이고 각 학교마다 대자보가 만발하여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또 각 곳에서 홍위병(紅衛兵)들이 조직되어 시위가 확산되어 갔다.


홍위병은 문화혁명 당시 학생들에 의해 조직된 학생시위 조직으로 마오의 공개적인 지지를 통해 홍위병 운동은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마오는 8월에서 11월까지 3개월 동안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무려 8번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홍위병들을 만나 이들의 운동을 고무시켰다.


마오는 8월 1일부터 12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한 <제8대 11회 중앙전체회의>에서 리우샤오치를 타도하고 중앙정권을 다시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앙정권을 장악한 마오는 67년부터 그 여세를 몰아 각 지방으로 확대하여 지방정권 숙청작업에 착수하였다. 67년 1월 상하이(上海)의 왕홍원(王洪文)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상하이의 당정권을 성공적으로 쟁취하면서 시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치열한 정치투쟁으로 인해 내부의 모순과 대립이 발생하면서 무력 충돌까지 속출하여 내전의 위험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마오는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진압하고 홍위병을 해산시켰다.


  1968년 9월 전국 29개 성, 시와 자치구에 <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약 2년에 걸친 홍위병 운동은 일단락을 맺고 <혁명위원회>의 주도하에 문화혁명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1968년 10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8대 12회 중앙전체회의>에서 리우샤오치는 모든 직책을 박탈당하고 카이펑(?封)에 연금된 후 당뇨병, 심장병, 폐렴 등으로 11월 12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1969년 <제9대 제1회 중앙전체회의>에서 마오를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린뱌오(林彪)를 부주석으로 선출하면서 3년 여에 걸친 문혁은 일단락을 맺게 된다.

 

종교정책 


문화혁명 당시 파사구(破四舊: 구사상, 구문화, 구풍습, 구습관)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마오와 고위 당국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장칭은 인민일보 12월 4일자에 <무산계급문화대혁명대회>에서 발표한 연설내용을 보도하여 이 세상에 신이나 귀신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종교는 구문화(舊文化)의 것이니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종교를 용납할 수 없고 이를 철저히 소멸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67년부터 홍위병들은 대자보를 붙이고 종교 문제를 관할하는 <통일전선공작부(統一前線工作部) 이하 통전부>가 반혁명 수정주의 집단에 통제되어 자본주의 계급의 도구가 되었다고 비난하면서 통전부의 지도자들을 면직시키고 강제노동 처분을 내려 사상개조를 시켰다. 또한 통전부와 그 외 종교와 관계된 모든 기관을 해산시키고 홍위병들이 모든 관계 서류들을 인계받아 처리하였다. 통전부 산하 종교업무를 직접 담당하는 <종교사무국>은 <괴물들의 보호소>, 혹은 <자본주의 부활부>라고 비평하여 폐지시키고 그와 관계된 고위 간부들은 모두 강제노동에 보내졌다.


1969년 8월 <홍기(紅旗)>를 통해 종교는 인민들의 아편과 같아 무산계급을 압박하고 노예로 삼아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정신적인 무기역할을 할 뿐 아니라 무산계급들이 압박자들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사상을 완전히 속박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종교는 과학과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대립되기 때문에 전 세계 공산화를 위해 분투노력하는 것과 기독교 국가를 설립하는 것하고는 물과 불이 융합할 수 없는 것처럼 상극의 존재라고 주장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호함과 동시에 불신앙의 자유도 보호해야 한다는 중국 공산당의 종교에 대한 기본입장과 태도를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천명하였다. 또한 공산당은 종교자유를 허용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유심론(唯心論)이나 종교의 교리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유심론, 승려주의, 각종 종교와 미신 등에 비판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폭력과 협박 등으로 신도들이 신앙을 포기하여 중국에 모든 종교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유도하였다.


각종 종교를 핍박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마오쩌둥 숭배운동’을 전개하여 그를 우상화시키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파괴하고 천주교와 각종 사당을 파괴하면서 전국 곳곳에 마오의 초상화를 붙였다. 그리고 마오가 저작한 모어록(毛語錄)은 성경을 대신하여 읽도록 하였다. ‘손에도 모어록이 떠나지 않고 입에도 모어록이 떠나지 않도록 한다.’ 는 구호와 함성을 미친 듯이 외치면서 그와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 혁명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심지어는 구타와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공개 집회마다 “마오쩌둥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는 것은 보편적인 관례가 되었다. 홍위병을 이용하여 백성들이 갖고 있는 현재의 종교사상을 마오쩌둥 사상으로 완전히 세뇌시켜 새로운 공산주의의 ‘신인(新人)’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문화혁명이 노리는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였다.

 

교회의 수난과 발전


1966년 8월에 대부분의 교회들은 홍위병들에 점령되어 건물들이 파괴되고, 교회재산은 압수되었으며, 종교 활동은 ‘자본주의 계급의 집회’ 라고 규정하여 모든 집회를 중지시켰다. 교회 내부의 시설들과 찬송가, 성경 등 교회의 모든 시설과 자료들을 불에 태워 버리고 그나마 생존한 교회들은 공장, 창고, 회의장이나 당 간부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교회 벽과 울타리 등에 “근본적으로 신이나 영혼, 그리고 예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어른들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믿을 수가 있나? 우리들은 무신론을 신봉하고 오로지 마오만을 믿는다. 우리들은 전 국민들에게 모든 성경을 태워 버리고 십자가나 신들을 철저히 파괴하며 종교단체들은 모두 해산 시키자” 라는 표어나 대자보 등을 수없이 붙였다.


교회뿐 아니라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난징(南京)의 <금릉협화신학교(金陵協和神學校)>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6년 6월에 신학교의 강의가 중지되고 8월에 홍위병들이 신학교에 진입하여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특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와 학술잡지들은 대부분 소각되어지는 비운을 당해야만 했다. 도서들을 소각하는 데 3일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그 당시에 소각된 도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홍위병들은 도서들을 운동장에 쌓아놓고 소각할 때에 신도들을 그 주위에 강제로 무릎 꿇게 하고 그 모습을 보도록 하였으니 그 방법과 태도가 극도로 잔인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삼자회> 조직은 해체되고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대자보를 통해 <삼자회>의 간부들은 ‘자본주의 계급’ 혹은 ‘인민을 박탈하는 계급’의 대표자들 이라고 비난하고 ‘삼자운동’ 은 ‘리우샤오치(劉少奇)와 우야오종(吳耀宗)의 음모에 의해 벌어진 정치운동’ 이라고 비난하였다. 홍위병들은 <삼자회>에 속한 목회자들을 극악분자, 사상반동파, 문제가 비교적 적은 인물 등의 세 부류로 나누어 처리하였다. 그들은 삼자회의 고위 간부들을 구타는 물론 목에다 죄명을 붙이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온갖 고통과 모욕을 주고 심지어 강제노동을 시켜 스스로 반성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폭행 속에 간부들은 고통과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신앙을 버리거나 자살을 하기도 하였다.


일반신도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홍위병들은 ‘파사구(破四舊)’ 를 실행한다는 명목으로 신도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온 집안을 수색하고 귀금속, 골동품, 피아노와 가구 등 값비싼 물건을 강탈했다. 가져갈 수 없는 것은 불에 태우거나 부수고 집안에서 성경과 종교서적들이 발견되면 신도들을 끌고 가두시위를 하며 온갖 구타와 폭행을 가했다. 그러나 많은 신도들은 용감히 이 모든 고통을 견디며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결론


문화혁명은 마오의 극좌파와 리우샤오치 등의 수정주의파와의 정치, 사상, 이념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정치투쟁이었다. 마오는 문화혁명을 통하여 대약진의 실패로 실축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홍위병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회오리 속에서 기독교는 전례 없는 핍박과 피눈물 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중국 기독교가 서방의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과거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들추어 중국이 공산화된 후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있던 중국 기독교에 일격을 가하여 중국에서 기독교가 영원히 자취를 감추기를 원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고통을 참으며 신앙을 견지하여 오늘날의 중국 기독교를 건설하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출처/ 중국어문선교회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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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文化革命) 이후의 중국 기독교(1976-1979)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고 10월 6일 중앙정치국은 문화혁명을 주도한 핵심 세력 4인방(四人幇)인 장칭(江靑), 장춘챠오(張春橋), 왕홍원(王洪文)과 야오원웬(姚文元)을 체포하고 화궈펑(華國峰)을 중앙정치위원회와 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 추대함으로 문화혁명은 마침내 종식된다.


  이번호에서 우리는 문화혁명 이후 정치적 과도기를 맞아 중국의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정치적 변화


문화혁명이 종식되면서 중국은 화궈펑 영도 하에 새로운 정치체제가 형성되었다. 화궈펑은 1977년 2월 7일, <인민일보>, <홍기> 와 <해방군보> 등의 사설을 통해 “마오(毛) 주석이 결정한 모든 정책은 굳건히 견지하며 옹호하고 마오 주석이 주장한 모든 지시를 시종일관 견지한다(凡是毛主席作出的決策,我們都堅決擁護, 凡是毛主席的指示,我們都始終不?地遵循)??는 소위 ??두 개의 모든(兩個凡是)??이라는 그의 정치적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는 마오 주석 추종세력들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1977년 8월 12일,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화궈펑은 앞으로 중국은 ??사회주의 현대화강국??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할 것을 선포하고 명실상부한 새로운 시대의 영도자의 위치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8년 2월 24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5대 제1회 정치협의회>를 통해 덩샤오핑(?小平)은 정치협의회 주석으로 선출되어 화궈펑과 덩샤오핑과의 정치노선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2월에 열린 <제11대 제3회 중앙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을 위시한 수정주의파는 화궈펑이 주장한 “두 개의 모든??방침을 강력히 비판하며 계급투쟁을 위한 당강이 정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민 경제와 경제체제를 개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임을 지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공업, 농업, 과학, 국방 등의 ??4개 현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한 4개 현대화 실현을 위한 ??4가지 견지(堅持)??를 내세웠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해야 한다. 둘째, 무산계급의 통치를 견지해야 한다. 셋째, 공산당 영도 체제를 견지해야 한다. 넷째, 사회주의노선을 견지해야 한다.


이로써 덩샤오핑은 당시 일부 도시에서 불기 시작한 민주화운동을 잠식시키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다져갔다.

 

종교정책(1976. 10-1978. 12)


이 시기 종교정책은 완화되어 문화혁명 이전의 온화노선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관련된 정책은 여전히 연구 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종교 사무를 담당하는 통전부, 종교사무국, 애국종교조직들은 여전히 편견 속에 푸대접을 감수해야 했다.


1977년 9월 27일, 런지위(任繼愈)는 <광명일보>에 문화혁명 이후 처음으로 종교문제를 주제로 다룬“종교연구와 신학비판??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으로 종교를 연구하고 신학을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당과 국가가 종교에 대해 올바른 정책을 실시 할 수 있도록 이론적 근거와 사상을 제공하기 위한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78년 3월에는 사회과학원 소속인 종교연구소는 연구 활동을 재개(再開)하고 런지위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제5회 정치협상회의>에는 16명의 각 종교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였는데 기독교 대표로는 띵광쉰(丁光訓), 리우량모(劉良模), 루오꽌쫑(羅冠宗), 옌쟈러(閻迦樂)등 4명이 참석하였다. 곧이어 개최된 <제5차 인민대회>에도 20여 명의 종교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1978년 4월, 백여 명의 당고위층 간부들과 학자들은 세계종교연구소가 개최하는 <종교학 연구좌담회>에 참석하여 종교연구에 대한 필요성과 원칙에 대해 토론하고 마르크스주의 무신론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의견들을 내세웠다. 그해 12월 난징(南京)에서 개최한 <제1차 중국 무신론학술대회>에서는 무신론과 유신론간의 충돌과 모순이 정치, 경제와 이데올로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토론하고 <중국 무신론협회>를 성립하였다.

 

종교 신앙의 자유


중국의 종교사무국 국장인 샤오시엔파(蕭賢法)는 중국의 종교정책은 이미 헌법에 “국민들은 신앙의 자유와 불신앙의 자유가 있을 뿐 아니라 무신론을 선전할 자유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헌법의 규정에 근거하여 그는 현재 중국에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강조하였다.


샤오시엔파는 “종교 신앙의 자유??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국민들은 신앙의 자유와 불신앙의 자유가 있다.
2. 국민들은 신앙의 자유를 선택 할 수 있다.
3. 국민들은 오늘 종교를 믿고 내일 믿지 않을 수 있고, 혹은 반대로 오늘 믿지 않고 내일 믿을 수 있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4. 대종교나 소종교 등 정치적으로는 모두 동등한 지위에 있어 국내에서 어떠한 종교도 특권을 누릴 수 없다.
5.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신앙인이든 신앙인이 아니든 정치적으로는 모두 평등하다.
6. 정부는 행정적인 수단으로 종교를 간섭하지 않는다.
7. 종교 인사들은 외국 종교 인사들과 자유롭게 우호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다.
8. 각 종교는 스스로의 단체들을 조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천주교애국회>, <불교협회>, <회교협회> 등.
9. 신앙인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모두 참여하기 때문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문화혁명 이후의 중국의 종교정책은 통전을 위한 잠정적인 조치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하지만 그러할지라도 종교 활동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종교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것은 상당한 발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 신앙 자유정책의 실시


1978년 12월 <제11대 제3회 중앙전체회의> 개최 후 종교 신앙의 자유정책이 정부기관에 의해 실행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통전부와 종교사무국들이 문화혁명 시기의 “투항주의?? 혹은 ??수정주의??의 산물이라는 비난을 벗어버리고 종교업무를 재개했다. 또한 5대 종교의 애국조직들이 활동을 재개하고 정부도 종교 연구기관들을 설립하여 규모 있게 발전시켜나갔다.


  1979년 2월, 쿤밍(昆明)에서는 <전국종교책화연토회(全國宗?策??討會)>를 개최하여  정부가 종교자유를 실시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인 근거와 효과적인 실행을 위한 정책들을 토론하였다. 종교연구를 통해 국민들의 유심론적인 사고방식을 타파하고 정부의 종교정책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외국의 종교를 이해함으로 각 나라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도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1979년 3월 15일, <인민일보>에는 “종교와 봉건미신??이라는 글을 통해 초자연의 신비의 힘을 믿는 것은 모두 미신으로 간주하지만 종교는 미신으로 볼 수 없고, 모든 미신은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여 정의하였다. 또한 국가는 신앙 자유정책을 실행하여 종교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종교 지도자들은 반드시 정부의 정책과 법령을 준수해야 하고 타인의 신앙의 자유를 간섭해서는 안 되며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반혁명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종교사무국의 회복


종교사무국은 국무원 직속기관이지만 통전부의 감독과 지도를 받고 있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모든 기관들이 폐지되었다가 1972년 후에 중국이 ‘핑팡(??)외교??를 전개하면서  회복은 되었지만 겨우 외국 손님들을 접대하는 정도였다.


  1978년 12월에 열린 <제8회 전국종교공작회의>를 통해 건전한 종교 활동을 실행하기 위해 종교사무국의 조직과 업무를 회복할 필요성을 절감하여 이를 국무원에 건의했다. 국무원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그 해 중앙과 각 지방의 종교사무국이 재조직되었다.


종교사무국의 주요한 업무로는 첫째, 신도들에게 무신론을 교육하고 종교의 성장과 영향력을 제한한다. 둘째, 교회, 성당, 사당과 절 등의 종교 건물들을 보호하여 불필요한 파괴를 방지한다. 셋째, 외국 종교단체나 지도자들이 중국 내의 종교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감독한다. 넷째, 신도들을 고무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4개 현대화를 적극 참여시켜 강력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도록 한다.


종교사무국이 종교를 권장하기보다는 종교를 감독하고 종교 활동을 제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종교를 이해하고 있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전국 삼자회(三自會)의 부활


1979년 6월 상하이(上海)의  <기독교삼자애국위원회>가 그 활동을 재개하면서 전국 각 지역의 삼자회 조직과 업무가 회복되었다.


삼자회가 회복되면서 오랫동안 닫혔던 교회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1979년 4월 8일 닝뽀(寧波)의 교회가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문혁 이후 처음으로 문을 연 교회가 되었다. 1971년부터 외교관, 유학생과 외국손님들에게만 개방되었던 베이징의 미스탕(米市堂)은 1979년 4월부터는 중국 신도들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각 지방에서도 연이어 교회활동이 재개되었는데 어느 지역이나 문을 열리기만 하면 신도들이 구름같이 밀려와 예배를 여러 차례 나누어 드려야 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오랫동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일시에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성경과 교회 지도자들의 수가 매우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교회가 온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결 론


중국은 문화혁명이라는 정치적인 회오리바람을 만나 오랜 동면(冬眠) 상태에 있다가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의 붕괴로 서서히 동면에서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도 예외 없이 종교사무국이 회복되고 삼자회와 교회들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재개되면서 중국교회는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상으로 이해하고 강력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전제 하에 있는 중국 기독교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출처/ 중국어문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