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중국근대사와 반기독교 운동의 고찰

2013. 5. 10. 18:00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중국의 만리장성


丁名楠

중국근대사에 있어 반기독교 사건은 중국 국민이 외국 침략에 대항한 정의로운 투쟁의 중요한 조성부분으로 근대사에 큰 사건이다. 외국의 대포가 중국의 문을 두드리고 서양 선교사가 침략 세력에 수반하여 내륙에 진입한 이래 군중의 반기독교 투쟁은 빈번히 발생하여 전국 각지에서 보편화 되었다. 신해혁명 전까지 크고 작은 반제국주의 반기독교 운동이 5백~6백회 일어났다.


국내외를 진동시킨 1900년 의화단 운동은 반기독교 투쟁의 가장 발전한 형태로 중국 최대의 배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의화단운동 시기에 외국 교회 특히 천주교회 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 중국에서의 선교 전략을 바꾸어 다시 대규모적인 반항 투쟁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려했다. 중국 인민은 통일된 조직과 집중적인 지도없이 단순히 선교사를 축출하고 교회당을 파괴하는 자발적인 투쟁만으로는 중국에서 침략을 몰아낼 수 없었고, 점차 본국의 봉건 통치에 반대하는 민주.민족 혁명의 조류에 편입되 갔다. 1900년대 이후 군중의 반기독교 투쟁은 비록 몇몇 지역에서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점차 감소되어갔다고 말 할 수 있다.

1. 아편 전쟁후 기독교의 재건과 저항운동


18세기초 청정부는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의 선교 행위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이후 1세기 남짓 중국에서 기독교의 선교활동은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옹정.건륭.도광제 때 금령의 조치는 더욱 심해졌다. 제 1차 아편 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하고 나서야 청정부는 비로소 금교를 풀었다.


강희.옹정황제는 천주교의 선교 금지에 적극적이었다. 도광제의 금령 선포에는 압박이 따랏는데 그 원인은 당시 중국이 독립적인 주권 국가에서 반 식민지화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제 1차 아편 전쟁후 천주교는 중국에 다시 들어왔다. 개신교 선교사도 다투어 계속 중국에 들어왔다. 이로부터 중국 내의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 사이에 충돌이 생겨 근대사에 반기독교 운동이 날로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은 제 1차 아편 전쟁중 부패한 청정부를 패배시겼다. 서양 선교사는 이것에 대해 희희 낙낙하여 중국 선교의 일대 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의 해외선교회 런던본부는 전세계 기독교회를 초청하여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한다” 고 결의하였다.


1844년 청정부는 미국인이 중국의 통상구 안에서 교당을 건립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해에 프랑스는 청정부를 강압하여 교회당 보호의 의무를 보증받았다. 1846년 프랑스는 청정부에게 선교 활동 금지를 해제할 것을 강박하고, 아울러 집으로 개조한 것을 제외하고 이전에 몰수된 교회당을 모두 중국 교도에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858년 프랑스는 또 청정부에게 프랑스 선교사가 내지에 들어가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2년후 청.프 북경조약에서는 교회 재산의 반환 범위가 교회당에서부터 분묘.전답.주택 등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조약의 번역을 담당한 프랑스 선교사는 조약문 가운데 중문조약서에 마음대로 “프랑스 선교사가 각 성에서 토지를 빌리거나 사들여 건물을 세우는 것을 허락한다”는 규정을 삽입하였다. 이를 선교사들은 불평등 조약의 규정을 근거로 치외 법권을 이용하여 대도시부터 구석진 농촌 마을까지 모두 그 자취를 남겼다. 프랑스 선교사 프까르는 나폴레옹3세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그는 “우리 선교사들이 장기간 봉쇄된 중국에 들어가 선교할 수있게 된 것은 모두 폐하의 관심과 프랑스 주북경공사관이 조약의 집행을 조정하고 감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뒤 “우리는 시종 중국인들을 기독교도로 하려고 노력하여 ..... 프랑스를 애호하게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들 선교사가 내지에 들어온 뒤 어떤 선교사는 일등 정복자로 자처하여 중국의 법을 무시하고 그 곳의 풍습과 전통을 고려하지 않은채 나쁜 일을 하여 관리와 군중의 증오를 가져오게 했다.

1700년대에 마카오를 통해 중국 내지로 들어와 각 곳에 교회당을 건축했던 천주교회는 교회의 건물과 재산을 반환하여 달라고 하여 전 중국인이 서양 선교사에게 큰 불만을 품는 제 1의 물결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아니라 선교사들은 청조의 지방 장관으로 자처하고 권위를 함부로 하여 방자한 태도를 취해 모든 관리의 반발을 가져왔다. 예를 들어 프랑스 외방선교회 貴州 지역 주교인 파우리는 툭하면 자색 가마를 타고 악대를 동원해 요란한 행차를 하여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또 관가의 행정에도 관여하여 자신이 추천한 사람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고 여러 인사권에까지 간섭과 강요를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일부 선교사들은 조상 숭배와 유교학설을 반대하자 그들과 관리 및 봉건 지식인들과 대립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절대 다수의 선교사는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가 학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공자를 부정하고 유학(유교)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어려서부터 유학으로 훈도되고 그것을 입신의 계단으로 여기는 중국 지식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중국이 선교를 허용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세례을 받은 중국인 신도는 매우적어, 1869년 기독교도는 겨우 6천명이었고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5만8천명에 불가했다. 천주교도의 수는 제1차 아편 전쟁이래 반세기를 거치면서 배를 조금넘었을 뿐이었다. 선교사들은 중국인 신도 수가 많지 않은 원인을 주로 공자 사상과 조상 숭배 사상 때문이라고 여기고, 공자를 공격하는데 주력하였다. 곧 그들은 <공자아니면 예수>의 공식을 세우고 양자 간은 대립하여 서로 용인될 수없으므로 철저히 유가학설의 영향력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인의 마음속에 예수의 거대한 형상을 세우고 기독교가 중국에서 오래도록 발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의 공자와 유교의 공격과 비판은 중국 봉건 지식 계급의 혐오를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기독교를 불공대천의 원수로 보고 극력 저항하였으며 대량의 반기독교 선전물을 유포하여 그들의 사상을 고취해갔다. 호남성의 주한(周漢)이라는 사람은 귀교해사(鬼敎該死) 등의 소책자를 발간하여 호남에서 80만부가 인쇄되었다. 이것은 강서성 등에서도 대량으로 인쇄되어 중국 각지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지식 계급은 반기독교 투쟁의 중요한 역량이 되었다. 선교사는 신속히 <십자가로 중국을 정복>하고 중국을 기독교화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중국인을 흡수시켰는데 그중에는 선량치 못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들중 입교뒤에 범법을 저지를 경우에도 선교사들은 이들을 극력 보호하기 위해 소송에도 간섭하여 중국의 사법권을 침해하므로 인민의 원한을 샀다. 이것이 절대다수 반기독 투쟁이 발생한 주요하고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사법권 침해 사례 : 강소성관직 丁日晶>


천주교 선교사는 이르는 곳마다 옳고 그릇됨을 가리지 않고 많은 회중을 모으는 것을 능사로 여깁니다. 우민이 소송에 불리하거나, 빚을 져 핍박받아 빈번히 교회당으로 도망간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선교사는 한편의 말만 듣고 출두하여 교인을 비호함으로서 소송에 불리한 자가 유리한 자가 되고 빚을 갚아야하는 자는 갚지 않아도 됩니다. 범법자들은 선교사를 도피처로 삼고 선교사는 그들의 날개로 여깁니다. 떠도는 말에는 “아직 입교하지 않으면 쥐같이 되고 이미 입교했으면 호랑이같이 된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아 ! 이것이 백성의 쌓인 원한이 날로 심화되고 선교사들의 명성이 날로 나빠지게 되는 이유입니다.

2. 반기독교 투쟁의 4단계


- 제 1기 : 제 1차 아편 전쟁으로부터 1870년 천진투쟁


지방 관료와 지주 계급의 상층 인사가 투쟁의 주도자였고 지지자였다. 그 원인은 선교사와 교인 때문이었다. 선교사와 교인 모두가 지방관리의 통치권을 훼손하고, 전체 인민에 대한 권위를 무시하였다는 것이 그들을 참기 어렵게 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는 반기도교 투쟁을 하는 군중을 엄벌하였으며, 이에 공로가 있는 책임자들에 대해 우대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하여 관리층들이 반기독교 투쟁의 행렬에서 물러나게 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 제 2기 : 천진투쟁(1870)에서 1890년대


봉건 지식인과 양자강 유역의 군중은 반기독교 투쟁의 지지자였고 조직자였다. 이 지방에서는 대량의 반기독교 소책자가 인쇄되었고 호남.강서성 등지에서는 군중적인 성격의 반기독교 물결을 일으켰다. 그 세력의 크기는 예전에는 볼 수없는 것이었다. 특히 사천성에서는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서는 새로운 상황이 되었다.


-제 3기 : 갑오 전쟁이후


마관조약의 성립이후 군중의 반기도교 투쟁이 폭발하여 사천 전체의 교회당 6~70곳이 훼손되었다. 미.영의 압력으로 사천성의 총독은 교회 보호에 힘쓰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해직되었다. 그 이후 사천성의 비밀결사대인 의화권(義和拳)의 영도하에 군중의 반기독교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그 봉기는 이후 기타 성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들은 청조의 통치 중심부인 북경까지 진입하여 전국을 석권함으로써 내외를 진동시킨 중대한 역사적 사건인 의화단운동을 일으켰다.

- 제4기 : 의화단 운동이후부터(1900) 신해혁명전의 10년간


이 기간 중에도 사천성 등의 자발적인 반 기독교 투쟁이 어느 정도까지 계속되었으나, 큰 물결 뒤의 여파같이 그 영향은 날로 감퇴되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3. 반기독교 투쟁 이후의 변화와 선교


- 중국의 내정. 자치권에 불간섭


의화단 운동이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유혈 진압됨에 따라 청조와 선교사들 모두가 엄청난 피해와 충격을 받았다. 신교는 구교에 비해 그 피해가 적었다. 의화단 운동이 진압된후 외국교회는 모두 몇가지 대책을 세워 인민과 교회간의 충돌을 완화하고 규모가 큰 반항 투쟁에 대한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 1903년 8월 영국의 공사관은 영국정부의 훈령에 따라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회에 통보하여 각지의 선교사가 직접 중국 정부를 찾아가 신도들을 위하여 소송에 간섭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 프랑스에 의해 주도된 중국내 종교 보호권이 각국 공사관에 이관


중국에 있는 종교의 보호권은 천주교 국가의 격렬한 쟁탈 대상이었다. 중국에서 천주교의 경우 처음에는 로마교황의 인가를 받아 프랑스가 보호하였다. 보.불전쟁후 독일의 국제적 지위가 높아지자 독일은 프랑스가 교회 보호권을 독점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후 투쟁을 통해 교황의 동의를 거쳐 중국에서의 독일 천주교는 독일이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신교 선교회는 여전히 프랑스의 보호 아래 있었다. 의화단 운동후 프랑스 주중 공사관은 1906년 1월 청정부의 외무부에 조회를 보내 프랑스 공사관은 프랑스 선교사와 관련된 사건만을 처리하겠다고 성명하고, 다른 나라 국적의 선교사에 관한 안건은 관련 국가의 공사관과 교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결정은 역시 의화단 운동을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 선교사들의 유교(공자)에 대한 이해와 접근


의화단 운동 이전 비록 몇몇 선교사들은 공자와 예수가 결코 상호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여전히 <공자 아니면 예수>의 공식을 신조로 여겼다. 의화단 운동 이후 일부 선교사는 <공자아니면 예수>를 <공자가 예수를 보태준다>는 것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힘써 선전하였다.


의화단 운동이 고조되었을 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알랜(Y.J. Allen)은 “만국공보”에 “중국의 이번 사태는 공.맹의 도를 준수하지 않은데서 기이한다는 설”이란 문장을 실었다.


미국 장로회 선교사였던 마틴은 1901년 출판한 책에서 “공자는 성현중의 성현”이고 “정확한 견해를 가진 유교신자라면 예수를 세계 복지를 위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공자가 중국인에게 특별한 스승이라고 하는 신념을 또한 포기할 필요도 없다. <공자가 예수를 보태준다>는 이 공식은 그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아니다”라고 했다.


중국 동북에서 다년간 선교하였던 영국 스코트랜드 장로회 선교사 JOHN ROSS는 <공자윤리 중에는 무수한 방법이 있다. 단지 선교사가 관심과 지혜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높이기 위해 공자를 낮추는 임시 방편적인 가치가 있을 것> 이고 <기독교를 높이기 위해 공자를 낮추는 임시 방편적인 계책은 불필요하다>라고 했다. 후에 그는 또한 문장에서, 선교사에게 <유교가 중국의 정치와 종교문화에 기여한 바는 다른 종교에 비할 것이 못된다. 우리 선교사는 공자를 동맹자로 여겨야하며, 그를 원수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서방교회가 중국 지식인의 교회에 대한 반감을 완화하고 무마시키기 위하여 <공자가 아니면 예수>의 공식을 <공자가 예수를 보태준다>로 바꾼 것은 선교 계책의 중대한 전환이었다.

- 교육 선교를 통한 선교의 새로운 페러다임


의화단 운동이 선교사들에게 많은 충격과 각성을 주어 중국내의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 계기가 되어 중국인들의 교육 문화 분야에 치중하게 되어 지난 날 교회당과 건축과 교리강습, 교회조직 확대에서 탈바꿈하여 기독교 인재와 일반 교육 수준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교육기관 설립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은 천주교와 예수교를 불문하고 중국에 대학을 세우는 것이 인민의 반기독교 의식을 소멸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의화단 운동 이전에 교회들은 중국 각지에 많은 초등학교를 세워 교인들의 자녀를 주요 대상으로 기층의 역량을 보충하려 하였다. 교회는 이들 학교에 또한 몇몇 비교도 자녀들을 입학시키기도 했으나, 대학을 설립하지는 않았다. 의화단 운동후 개신교 계통과 천주교 계통의 교회가 세운 대학이 점차 늘어났는데 그중 전자가 더욱 많았다. 1930년대까지 교회가 중국에 설립한 대학은 모두 16개였다. 개신교는 화북에 연경대학, 화동에 금능대학, 화남에 복건대학, 화중에 화중대학, 화서에 화서협대학을 설립하였다.
천주교는 상해에 진단대학, 북경에 보인대학, 천진에 진고대학이었다. 상해에 진단대학은 중국 최초의 교회대학의 하나로 1903년 건립되었다.


교회는 대학을 세워 신식 지식인 계급을 양성하였는데, 그들은 구식의 봉건 지식 계급과는 달리 중국의 미래 건설 사업에 일정한 유익한 작용을 하였다. 교회가 대학을 세운 출발점은 배출된 학생이 직접. 간접으로 중국의 선교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희망한 것에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교인들의 자녀만을 입학시켰으나, 후에 범위를 확대하여 비기독교인의 학생들도 흡수하였다. 바로 교회가 채택한 이러한 조치는 천주교도와 개신교 교도의 증가를 가져와 예전같은 반기독교 운동을 점차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 중국교회의 자립화를 위한 움직임과 공산주의 태동


1919년의 5.4운동은 중화 민족이 새롭게 각성한 중요한 이정표를 나타낸 것으로, 중국 공산당의 탄생을 위한 사상적 조건과 간부를 배출하는 조건을 준비하였다. 각지에서 반제. 반봉건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중국인민과 중국에 있는 교회 세력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모두 일정한 조치를 취하여 중국의 민족적 각성에 대응해갔다.


천주교가 실시한 주요 대책의 하나는 소위 <천주교의 중국화>였다. 중국 선교 조직을 보면 장기간 동안 외국국적의 선교사가 교회 및 수사회(천주교)의 중요 직무를 차지하고, 중국인 선교사는 단지 하급 직위에만 충당하였다. 국가별 피부색에 따라 다른 성직을 수여받는 이러한 차별은 자연히 중국 선교사의 불만을 가져왔다. 특히 민족의 각성이 점차 두드러졌을 때 더욱 그러했다.


1919년 교황베네딕트 15세는 중국에 있는 천주교의 수회들(천주교조직) 모두 중국 국적의 성직자로 기용하라고 명하여, 중요 직위를 주로 중국 국적의 선교사가 맡게 되었다. 그는 <이 지역은 충분히 훈련된 본지인의 선교사가 있으므로 선교사의 공작(사역)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고 교회도 진정 건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교회가 적극적으로 중국인을 성직자로 배양한 것은 주로 중국인으로 하여금 중국인의 분규를 해결하도록 하고 외국 국적의 선교사는 앞에 나서지 않도록 함으로써 <中國化>의 계획을 실시하기 위해서 였다.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개신교도 소위 <本色運動>을 실시하였다. 중국 선교조직회는 신해혁명후 150여개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중국 교인들은 각 선교회(差會)의 주요 직무가 외국 국적의 선교사에게 맡겨져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민족적 각성이 날로 고조되는 상황하에서 이러한 불만은 더욱 가중되었다. 한 중국기독교인은 소위 <본색운동>에 대해 <한편으로는 중국 신도에게 책임을 지우고 한편으로는 동양 고유의 문명을 일으켜, 기독교로 하여금 양교(洋敎)라는 악명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에 있는 몇몇 선교회는 연합하여 회명 앞에 중화<中華>라는 글자를 더하였다. 1922년 국제 선교협회 모트(J.Mott)의 주재로 상해에서 전국기독교 대회가 개최되어 <중화전국기독교협진회>가 성립되고 <본색교회>의 구호가 제기되었다. 개신교의 본색화와 천주교의 중국화는 같은 것에 한층 보호색을 씌운 것에 불과하였다. 실권은 여전히 외국 국적의 선교사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 중국의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반응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되고 중국 공산당이 성립됨에 따라 서양 선교사는 크게 두려워하여 종교 유심주의적 연합전선을 조성하고 공동으로 유물주의에 대항하였다. 제국주의의 문화 침략기구인 선교회인 상현당<尙賢堂>의 책임자이고 미국 장로회 선교사인 길버트 레이드(Gillbert Reid)는 동분서주하며 기독교.유교.불교.회교.도교 등의 수장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각 교의 연합방법을 토론하여 <인심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도덕을 제창해야 한다. 각교의 도리나 교화만으로는 인심을 바로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떠들어댔다.


1930년 미국의 북침례교,장로교 등 7개종파는 <평신도조사단>을 조성하여, 1932년 중국과 인도 등지에 가서 조사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중국에서 2개월 정도 머무르며 <선교사업평의>를 출판하였다. 그 책에서 그들은 <금일 각교가 직면한 것은 반종교운동>이고 <각교의 최대의 적은 기독교가 아니라 마르크스, 레닌, 러셀류의 철학이다. 금일 곤란은 하나의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해당된다>라고하여, 각 종교의 연합을 적극 선동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반대하였다.


미.영국의 선교사들은 항전 발생후에도 여전히 일본 점령구 내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의 활동도 제한을 받아 심지어 감금되는 선교사도 있었으나, 천주교와 기독교를 불문하고 그들 다수의 기본적인 태도는 반공이고 친국민당 장개석측이었다. 중국 교인들 대부분은 애국적이어서 중국의 독립과 강대함을 희망하였다. 이로인하여 그들과 외국 국적의 선교사 간의 모순은 나로 커졌다. 애국적 중국 천주교도는 교회의 속박을 벗어나 로마와의 연관을 단절하였고, 애국적인 중국 기독교 교인도 자치.자양.자전(自治.自養.自傳)의 삼자(三自)라는 혁신적인 기치를 내걸었다.


신중국 설립후 중국천주교의 <독립.자주.자변교회>와 개신교의 <삼자>에 대한 희망은 결국 실행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 중에는 명확히 <나이 18세의 중국 공민은 종교 신앙을 불문하고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 공민에게는 종교 신앙의 자유가 있고, 여하한 국가 기관, 사회 단체와 개인이 공민에게 강제로 종교를 믿게 할 수 없다. 종교를 믿는 공민에 대해서는 국가가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하도록 보호한다. 종교 단체와 종교 사무는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받지않는다> 등등이 규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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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 1917년생으로 중국사회과학근대연구소 연구원으로 저서로는 <제국주의의 중국침략사> 등이 있고 의화단 운동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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