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0. 17:55ㆍ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 한국기독언론협회, 지난 9~14일 중국 실크로드 관문인 `돈황', 역사의 고도 `서안' 탐사 ■
본지를 비롯해 교계 초교파신문 5개 연합체인 한국기독언론협회(회장 조효근 목사)가 지난 9~14일까지 중국의 서안과 돈황 일대경교(네스토리우스 일파에 의해 전해진 기독교)의 활동 흔적을 탐방했다.
황하문명의 발상지로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중국 땅에 AD 635년 페르시아로부터 전파되어 1천여 년 동안 교세를 유지했던 경교의 역사이지만 오늘에는 무엇 하나 그럴듯한 흔적 없이 역사 속에 묻혀버린 현장을 아쉬움 속에서 확인했다.
동아시아교회 1천년 역사를 다시 일으키고 미래 동서의 균형 잡힌 기독교 모습을 재정비해 나갈 책임이 우리 기독교 언론인들에게 지워져 있음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왔다. 5박 6일간의 그 가슴 벅찼던 일정을 지면에 옮긴다. 〈편집자 주〉
첫날 여장을 푼 서안(西安)은 중국 산시성의 성도로 주나라 무왕이 세운 때부터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 동안 중국의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해 왔으며, 가장 번영했던 당대에는 동서 9.5km, 남북 8.5km 규모의 대성곽 도시를 이뤘으며, 현재는 명나라 때 구축한 주위 13km의 성벽이 남아있다. 중국의 역사적인 도시로 고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관공서와 상점들이 밀집해 있어 고대와 현대가 공존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 곳은 당나라의 황제인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한 온천휴양지 화청지, 그리고 이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인 진시황릉, 이곳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서 발굴된 병마용갱. 진시황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서 있는 군사가 수천 명이요 말과 병거, 마부 등이 정렬해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흙으로 빚어 실제 크기 그대로 만들어 매장된 병사들은 저마다 제각각의 엄숙한 표정으로 2천여 년의 긴 세월을 진시황의 안위를 지키고 있었다.
이어진 일정은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던 돈황. 전체가 사막지대인 이곳은 그 옛날 동과 서를 이어주는 동서교역^문화교류의 통로였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으로 떠나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여기며 떠나보냈다는, 실크로드는 목숨을 담보로 한 험난한 길이었다는 가이더의 설명을 들으며 모래산으로 뒤덮인 명사산에 도착했다.
해발 1,650m의 천연적 아름다움과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광활하게 펼쳐진 모래산을 낙타의 도움을 받아 거닐면서 이 관문을 통과해 중국 땅으로 들어왔을 경교의 경로를 되짚어 본다.
이쯤에서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치적 음모로 이단정죄를 받고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로부터 비롯된 경교에 대해 조금 살펴보자. 당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키릴루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정치싸움을 걸어왔고 결국 키릴의 승리로 끝났다. 방심했던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자가 되어(이후 복권) 이집트와 리비아 사막을 떠돌며 회복의 날을 기다리다 AD 451년에 세상을 떠났다.
네스토리우스가 추방될 당시 그를 따르던 무리가 당시 로마 기독교 인구의 1/5이였다고 하니 적은 수가 아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은 동로마 제국에 인접한 강국인 페르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상거래를 배워 사막 실크로드를 달려 중국으로 들어갔다. 경교, ‘빛나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AD 635년 당태종의 환대를 받으며 중국에 입성한 네스토리안들은 무섭게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당시 수천 개의 사원과 기도처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막막하다.
돈황에서 유명한 또 한 곳 ‘막고굴’은 중국 4대의 불교 석굴로 유명하다. 명사산 기슭에 길이 1.6km에 달하는 크고 작은 735개의 석굴로 이뤄졌다. 각기 굴 안에는 불상과 벽화들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사실 불교 석굴이라 하지만 문명과 문화 교류의 관문이었던 이곳은 여러 종교가 거쳐 가면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고, 송나라 전쟁 때는 러시아 병사들이 1년간 살기도 했다. 이 중에 한 곳 193호 석굴에서 경교의 역사가 발견됐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폐쇄되어 내부를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박물관에서 막고굴(16~17호)에서 발견된 경교와 관련된 문서를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다섯째 날 비행기를 타고 2시간 30분 정도 날아와 다시 서안에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날이자 이번 탐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정을 진행했다. 무엇보다 경교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中國碑)’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비석은 역대의 명필을 새긴 1095개의 비석이 마치 나무숲처럼 무성하다 하여 ‘비림’이라 불리는 비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AD 781년에 승려 경정(景淨)이 장안에 세운 이 비석은 총 219개의 글자로 경교의 교리와 인간 타락의 결과, 메시아 구원의 역사, 삼위일체, 생활법전 등에 대한 내용 그리고 신자들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어 경교의 전성기를 말해주는 결정적인 유물이다. 그러나 경교비 상단에 새겨진 십자가, 연꽃, 구름 문양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경교가 중국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포교하는 등 제 모습을 지켜내지 못하고 상황화에 실패했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때가 우리로서는 통일신라시대 선덕왕 2년에 해당되는데 당시 당나라와 통일신라와의 밀접한 관계에 비추어 볼 때 경교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625년에 발굴돼 경교를 역사 속에서 깨운 이 경교비를 없애려는 움직임도 유럽기독교로부터 감지되고 있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로마 가톨릭이 중심이 된 라틴 기독교는 경교비에 대해 위작 또는 네스토리우스에 의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며 격하시키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얘기였다.
이어서 방문한 곳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이슬람 사원인 청진사. 경교에 이어 바로 뒤따라온 것이 이슬람이었다. 마침 하루에 5차례 드리는 예배시간에 맞춰 그들의 예배의식을 볼 수 있었다. 청진사는 AD 742년에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둥근 돔이나 양쪽의 기둥은 없었고 중국 건축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웅장한 사원을 가득 메우고도 마당까지 채우고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는 이슬람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 한번 경교의 실패는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이번 탐사에서 우리는 아시아 기독교의 문을 활짝 열었던 경교의 1천년 역사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중국에서 경교 역사의 자료가 AD 1401년까지 나와 있는데 마테오리치가 중국선교를 시작한 582년까지 경교가 좀더 자리를 지켜주었다면 이후 유럽에서 들어온 기독교와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을 가져보기도 했다. 중국 본토에서 찬란한 수백년의 역사를 8세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의 기독교 역사를 16세기로 명명하게 된 슬픈 역사를 제 위치로 되돌리고 발굴하는 것 또한 오늘을 사는 크리스찬들의 몫이 되고 있다.
동교회의 1천년 역사와 그 실패를 보면서 그들의 선교열정은 되살리고 실패의 이유를 바로 따져보며 오늘의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그 일에 기독교 언론이 중심을 잡아가야 한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며 서울로 발길을 옮겼다.
들소리 신문 2006/10/2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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