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0. 17:53ㆍ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중국선교, 실패한 역사를 기억하자
교세 확장 목적 아닌 현실적이고 제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중국선교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중국선교에서 결실을 거두려면, 비교적 최근 사례라 할 수 있는 19세기 서양의 중국선교에서 교훈을 얻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서양 교회의 19세기 중국선교의 성적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 2가지는 바로 의화단운동과 태평천국운동이다. 의화단운동은 1900년에 화북 일대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외세를 반대하는 동시에 기독교를 거부하는 운동이었다. 한편,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은 배상제회가 중심이 된 민족주의적 반외세 농민투쟁인데, 이는 기독교를 수용하면서도 기독교를 중국식으로 변형한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19세기의 중국인들은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기독교를 거부하든가 아니면 기독교를
중국식으로 받아들이든가 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서양 교회는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중국에 전파하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다.
그럼, 이 글에서는 19세기 중국선교의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는 태평천국운동을 통해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한 가지 방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교회가 19세기 서양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태평천국운동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얻어 내야 하리라 본다.
먼저, 태평천국운동을 간략히 개관해 보기로 한다. 태평천국은 청나라 말기에 홍수전(洪秀全, 1814~1864년)의 농민군대가 세운 혁명국가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중심이 된 조직은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중국식 기독교다. 역대 중국 왕조들의 경우와 같이, 당시의 청나라도 중앙집권의 약화, 관료 및 군대의 부패, 농민의 몰락, 자연재해의 빈발, 사회적 무질서 등의 왕조 말기적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 중국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배상제회였다.
배상제회의 탄생 모티브는, 24살(1837년)의 나이에 세 번째로 과거에 낙방한 홍수전이 좌절감 속에서 어느 날 밤에 꾼 ‘꿈’에 있다. 꿈에서 승천한 그는 금빛 수염의 노인(하나님)으로부터 검(천명)을 하사받은 뒤에 중년 남자(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마귀(만주족 정권)를 없애고 세계(한족의 중국)를 구원한다. 홍수전은 이 꿈을 바탕으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으로서 아버지인 하나님으로부터 천명을 받아 만주족 정권을 없애고 한족정권을 세움으로써 중국을 구원할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확신을 기초로 그는 1846년에 배상제회를 정식으로 창설하였다. 이 조직은 주로 광서성의 농민·서민들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지방세력과의 끊임없는 무장 충돌 끝에 1851년 1월 11일 드디어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는 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같은 해 3월에 홍수전은 천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양수청(동왕)·소조귀(서왕)·풍운산(남왕)·위창휘(북왕)·석달개(익왕) 등이 천왕을 보좌하게 되었다.
이후 태평천국은 농민·유랑민·노동자들과 천지회(비밀결사) 회원들을 흡수하면서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853년 3월에는 남경을 장악하고 그곳을 천경(수도)으로 정했다. 하지만, 1856년부터 태평천국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지방세력의 거센 저항과 함께 태평천국의 내부 분열이라는 요인이 작용했다. 명목적 지도자인 홍수전과 실질적 지도자인 양수청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태평천국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는 일종의 내란이라 할 수 있는 천경사변(1856년)인데, 이 사변에서 실권자 양수청이 살해당하고 홍수전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태평천국은 한때 부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증국번이 이끄는 상군(의용군)과 고든이 이끄는 상승군의 계속적인 압박을 받아 결국 1864년에 멸망하고 만다.
이상이 태평천국운동의 줄거리다. 다음으로는, 배상제회와 태평천국이 어떤 면에서 이단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띠었는지 간략히 검토하기로 한다.
첫째, 기독교 교리가 한족이 만주족을 멸망시키는 논리적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위에서 홍수전의 꿈을 언급할 때에 이야기한 것처럼, 한족이 만주족을 없애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지’를 받는 일이라는 논리가 등장했다. 또 태평천국은 남경을 장악한 뒤에 그곳을 수도로 정하면서 ‘남경은 소(小)천당’이라는 논리를 만들었는데, 이는 만주족이 장악하고 있는 북경을 지옥으로 몰아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하나님 자신 혹은 하나님의 둘째 아들로 자처하였다.
1853년 12월에 양수청이 스스로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의식을 거행한 것이나, 홍수전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으로 자처한 것 등이 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천경사변으로 양수청이 죽은 뒤에 홍수전이 양수청을 하나님의 셋째 아들로 선포해 버린 점이다. 양수청 본인은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자처했는데, 양수청이 죽은 뒤에 양수청의 라이벌인 홍수전(자칭 ‘하나님의 둘째 아들’)은 양수청을 하나님의 셋째 아들로 격하시킨 것이다.
물론 태평천국운동은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와 강력한 대외투쟁을 주창한 농민투쟁으로서 중요한 정치적·역사적 의의를 띠고 있지만, 적어도 기독교적인 면에서는 위와 같이 파행적인 이단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서양 교회의 요란한 중국선교가 거둔 실적은 위와 같이 고작 태평천국운동과 의화단운동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서양 교회의 중국선교는 실패한 선교인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19세기 서양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19세기 서양 교회가 했던 방식대로 중국선교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19세기 서양 교회가 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의 중국선교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중국선교전략을 수립함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다음 2가지를 진지하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중국문화를 존중하여야 한다.
중국인들의 특성을 고려하고 중국의 역사·사상·현실에 맞는 선교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화단운동에서 드러난 것처럼, 중국인들의 노골적인 거부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실패를 경험하지 않으려면, 한국교회가 중국학 학계와 연대하여 중국문화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 중국교회를 제어하여야 한다.
중국인들은 사방에서 들어오는 외래문화를 자기 문화로 만들어 버리는 용광로 같은 특성을 갖고 있다. 중국문화를 존중한다고 하여 아예 중국인들에게 내맡기게 되면, 중국인들은 19세기에 태평천국이 했던 것처럼 또다시 중국식 기독교를 만들어 버릴 것이다.
중국교회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제어하려면, 중국교회가 외국 교회들과 끊임없는 국제적 유대를 가질 수 있도록 제도적·국제적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의 중국선교방식을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위와 같은 2가지 원칙을 고려하여 새로운 중국선교전략를 수립한다면, 한국교회는
19세기 서양 교회가 하지 못했던 일, 달리 말하면, 14억 대륙을 ‘좋은 밭'으로 만드는 일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글: 김종성 / 전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 현 <뉴스 615> 발행인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대학원 중국외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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