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0. 17:39ㆍ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중국 삼자교회의 통전신학분석(統戰神學分析)
심이반 목사는 이번 홍콩에서의 강연 “중국교회는 신학의 사고 중에 있다”에서 82년에 카나다 몬타리올신학회의 중에 한 강연과 85년 “금릉신학지”제3기에 발표한 문장보다 더욱 상세하고 조직화된 내용을 발표하였는데, 중국 삼자교회가 근년에 발표한 문서 중 가장 분량이 많고 대표적인 신학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삼자신학에 대해 분석과 평론을 한다면 이 강연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원래의 제목은 “49년 후 중국교회의 신학사상상에서의 발전”이었는데 심씨는 시작할 때 임시로 “중국교회는 신학사고 중에 있다”로 고쳐서 신학사고의 성과에 대한 관심을 신학사고의 과정으로 옮기려고 시도했다. 이부분이 아주 주의할 부분이다. 중국삼자회와 기독협회는 1950년에 성립한 이래 한번도 신앙선언을 해본 적이 없어 신학사고는 하나의 공인된 체계가 없고 부단한 사상과 격변중하는 과정에서 시기에 맞게 그 영활성과 창의성을 발휘해왔다.
심씨는 서두에 신앙은 2000년래 변화가 없음을 긍정하고 신학은 인식과 사고와 표현상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했다고 말했다. 그 뜻은 신학의 형식은 변했으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그가 이 주장을 떠나지 않는지를 본문에서 분석할 것이다.
그는 한 시간 밖에 안 되는 강연 중에서 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을 다루었는데, 조직신학의 모든 부분들을 섭렵하였다. 내용은 3대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하나님중국의 처한 환경에서의 5대 사실, 2) 신학의 새로이 사고해야할 10대 문제, 3) 신학의 8대과제의 정리. 아래 하나씩 분석하려고 한다.
1. 하나님중국이 처한 환경의 5대 사실
심씨는 “상황화”를 그의 신학사고의 시작 포인트와 방법으로 선택하였다. 그는 이것이 “토착화”보다 더욱 넓다고 생각하였다. 토착화는 신학과 전통문화의 결합을 중시하는데 20년대 신학자들은 반기독교운동 중에서 회답을 주었다. 그러나 심씨는 그들의 반응은 시대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들이 속했던 시대의 중국인민들이 진행했던 반식민지 반봉건주의 투쟁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금릉협화신학지” 후 3기 30페이지)
그가 말하는 상황은 중국공산당 통치 하에서의 신 중국이다. 20년대 중국공산당이 창당이후의 반식민지주의, 반봉건주의, 심지어는 반기독교운동은 중국의 당시 상황에 적합하였다. 중국공산당 정부가 상황화의 노선을 간다면 교회의 신학사상도 이 길을 가야한다.
“상황화”는 70년대 신학계에서 붐을 일으켰는데 선교사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는 당대 유행하는 신학과제이며 선교이론이다. 심씨는 그의 논술 중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이 신학방법은 시대성이 충분하며 50년대 삼자교회에서 19세기말 선교사가 제창한 삼자이론을 옮겨온 것과 같이 교계의 주목과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중국공산당이 시작한 “삼자”와 선교신학에서의 “삼자”가 다르듯이 심씨가 말하는 상황화와 해외교회들에서 말하는 “상황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심씨가 제출한 하나님중국의 처한 화경의 5대 사실은 신학사고가 정시해야할 부분이다. 1) 인민의 생활이 개선 되였다. 2) 사회죄악이 감소 되였다. 3) 혁명가들은 목숨을 버려 나라를 세웠다. 4) 중국사회는 더욱 단결일치 되었다. 5) 문화대혁명이후 발전이 신속하였다.
이상의 중국사회상황의 관찰은 모두 좋은 일면이며 중국공산당 치하에서의 성과이다. 심씨에게 있어서 이것이 신학에 대해 새로이 사고할 수 있는 출발점이며 지도방향이 되었다. 그러나 심씨는 방법론상의 관건성문제를 처리하지 않았다. 현상으로 신학을 해석하는가? 아니면 신학으로 현상을 해석하는가? 현상의 선택과 해석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일수가 없으며 필연적으로 모종의 전제와 가설을 갖고 있는데 이는 과학발견과 역사해석이 인정하는 것이다. 심씨가 해석한 현상의 전제와 가설은 맑스, 레닌주의 세계관인가? 아니면 기독교적인 세계관인가?
심씨가 중국에 대한 관찰은 어느 정도의 진실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료의 객관성과 시간의 명확성이 결핍하다. 역사의 해석은 반드시 사실에 의존해야한다. 심씨가 한 비교와 평가는 구체적인 시간과 사실적인 수치가 결핍하므로 그가 말하는 사실도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중국공산당 치하에서의 인민 생활은 진정 이전보다 개선되었는가? 만약 88년과 49년을 비교하면 이 점은 동의할 수가 있다.
그러나 현시대의 중국의 상황을 보면 가격개혁으로 인해 거리마다 불만이 넘쳐나고 개방이후 창기와 도박 등이 또다시 도시의 엄중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사회의 죄악이 신속히 만연되고 당원들의 탐오와 권리로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정황이 심화되고 있다. 옛날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던 일은 찾아 볼 수가 없고 티벳 폭동, 학생시위 등은 심씨가 말하는 공산당 독재 하에서의 단결의 현상이 가짜라는 것을 설명해준다. 당원들은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당의 공덕을 칭송하는 것은 시대가 지났다. 당 일간지도 좋은 소식만을 싣고 나쁜 소식은 알리지 않는다.
만약 교회의 지도자로서 이렇게 거짓을 말한다면 그것은 양심과 본분을 저버린 것이다. 이상의 중국의 상황의 5가지 현상(사실이 아니다)을 신학의 기점과 방향으로 삼는다면 그 논점은 공격할 여지조차 없다. 이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이런 신학사고를 하는 동기와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중국공산당의 성과를 칭송하고 당의 영도를 긍정하기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공산혁명입국의 3대 법보의 하나인 “통전”의 수단의 제일 중요한 원칙이다. 삼자회는 통전부와 종교사무부의 지휘 하에서 “통전”의 원리를 순종하고 영활하게 운영해야 할 것이다. 심씨의 통전이론과 삼자신학에의 최대의 공헌은 통전“수단”을 신학사고에 응용해서 하나의 정치수단을 신학의 출발점과 지도방향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3. 신학의 8대과제 정리
심씨의 연설의 주체는 제 3부분에 있는데 바로 조직신학의 8개 과제위에 있다. 전통적인 관점을 규정하고 그가 대표하는 삼자신학관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위 1부와 2부에 대한 분석은 여기 와서 더욱 명확해진다. 총괄적으로 그는 전통신학의 이원론을 비판했고 그가 힘을 들여 포장한 일원론을 강조한다. 아래에 종합적인 분석과 비판을 한다.
1. 신관: 창조와 구속의 관계
심씨는 과거의 신학이 하나님의 구속을 강조하였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경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를 흑암 속에 있는 희망 없는 것으로 말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보여준 영광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학상의 이원론을 조성하였는데, 즉 창조와 구속의 대립이다. 하나님이 최종 세계를 소멸시키려면 왜 창조를 했겠는가? 이 문제는 심씨가 여러 번 중복하는데 말 중의 뜻은 단지 질문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할 가능성을 부정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소멸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 중국의 사회는 광명의 세계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세계를 흑암과 죄속에서 멸망에로 가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이미 중국의 상황에 부합되지 않는다. 구속은 인제 우선순위가 아니며 필수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구속은 창조를 부정하면 안 된다.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의 연속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심씨는 먼저 이점을 논술하면서 창조와 구속이 조직신학의 제일중요한 과제의 중점일 뿐만 아니라 이는 “우리중국교회가 보고 있는 모든 신학문제와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심씨의 변증방법은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유물론적 변증법과 통전의 수단이 여기서 모두 드러난다. 이렇게 새로 신학을 정리하고 중점과 방향을 바꾸고 구속에서 창조로 돌아가는 것이 성경신학과 부합이 되는가? 심씨가 빠뜨린 것은 창조관에서 낡은 창조와 새로운 창조로 나뉜다는 것이다. 낡은 창조는 시조의 범죄로 인해 부패해졌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신도의 영적생명의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며 장래 하나님이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여 옛 창조를 대신할 때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금의 신도들을 옛 창조와 새로운 창조사이에 있어 육체는 옛 창조에 속하고 심령은 새 창조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옛 창조와 새로운 창조사이에 있다. 그러므로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 세상에서 특별히 신도들의 몸에서 행할 중요한 역사이다. 구속은 옛 창조에 기초하여 새로운 창조를 열고 있다. 구속은 옛 창조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하나님이 시간의 공간에서의 역사는 예정된 순서가 있는데 바로 “옛 창조-구속-새로운 창조, 이런 각도에서 보면 심씨가 중점과 방향을 구속에서 옛 창조로 돌린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성령의 역사(5번째과제)도 위의 형태로 이해 할 수 있다. 그 구속의 역사는 신도들의 개인적인 영적생명과 창조의 역사 속에 국한되어 있어 아주 넓다. “성령은 사람들을 모든 진리 속으로 인도하는데 과학문화의 진리도 포함된다. 여기에는(Argument by quantity)의 원칙과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모든 사람들을 통해 세계 속에서의 운행과 구속의 역사가 소수인의 심령 속에서의 운행을 포함하는데 후자는 전자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다.
심씨의 신학체계 중 구속이 전혀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창조에 귀속된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변해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말할 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만 말하고 십자가의 은혜는 언급도 하지 않는다. 심씨는 말씀이 육신이 됨을 말하면서 금세의 물질적인 삶과 속된 일의 성화를 주장하고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하나로 혼합시킨다.
이런 하나님이나 인간의 역사와 활동에서 창조가 구속보다 더욱 넓고 세계가 심령보다 더욱 넓으며 어느 것을 신학의 중점과 방향으로 잡고 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성령론과 기독론에서 심씨의 사상에 문제가 생긴 곳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의 역사의 점진성과 우주성을 잊은 것이다. 특별계시는 자연계시보다 더욱 진보된 것이다. 특별계시는 언어와 목소리가 있어 자연계시에 없는 것이다. 구속의 과정 중에 그리스도와 성령의 강림 후 하나님의 계시, 은혜, 구속의 역사는 이전 보다 더욱 커졌다. 그리스도가 육신님이 되어 가져오신 새로운 은혜는 옛적의 것보다 더욱 큰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생로운 창조의 은혜와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는 모세의 구약보다 더 큰 것이었다. 성령의 성도들의 몸에서의 사역도 “영광에 영광을 더하여”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을 누리며 내생에 부활하는 것은 더욱 큰 영광이다.
옛 창조-구속-새로운 창조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 은혜와 진리는 모두 시간적인 점진성이 있다. 구속의 시기의 은혜는 옛 창조의 때보다 크고 장래 새로운 창조의 은혜와 진리는 현재의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성경신학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 속에서만 구속이 창조보다 우월한 것임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구속도 우주성적인 일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구속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며 죄의 파괴는 우주적이고 구속의 범위도 우주적인 것이다. 그러나 천지의 재창조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이 세계를 심판하고 파멸할 때에 발생하게 되면 옛 창조와 새로운 창조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옛 창조
사람과 세계: 먼저 세계를 창조 그다음 인간
사람의 생명: 먼저 육체 다음 영
새 창조
인간의 중생/ 다음 새로운 세계창조
영혼 중생/ 다음 육체의 부활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현재의 초점은 구속이며 이 사역은 옛 창조에 기초하여 새로운 창조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씨의 통전신학의 초점과 방향은 모두 진리를 바꾸어놓은 것이며 중점을 창조로 되돌아가게 하여서는 안 된다. 이는 신학적인 퇴보이지 진보가 아니다.
2. 인간관
전통신학에서의 인간의 본성은 죄로 인해 완전히 부패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었다. 그러나 심씨는 이런 주장이 성경에 부합되지 않고 현사회의 현실에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사회의 5대 현실은 신자가 아닌 사람도 완전히 부패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며 사회에 공헌이 있고, 귿이 죄인이지만 완전히 부패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이도 상황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신도와 비신도의 인정중의 죄는 심씨에게 있어서 정도상의 차별의 근본적이 분별이 아니다.
성경을 인용하여 논증을 할 때 심씨는 인간이 범죄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류하고 있음을 창 9:1, 아 3:9 또 로마서 7장을 응용하여 신자와 불신자의 마음속에도 선악의 싸움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죄인의 본성은 완전히 부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씨의 변증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통전신학의 죄성관은 어떤 잘못된 점이 있는가?
1) 인간이 완전히 부패했다는 성경구절을 해결하지 않았다. (예, 롬 3:10-12, 시 14:1-3; 53:1-3)
2) 죄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지만 이미 파괴된 것이다. 깨진 거울도 거울이지만 이미 반사의 작용을 하지 못한다. 인간의 가장 큰 비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3) 죄인의 일부 표면적인 선량한 행위는 최고선인 하나님에 대해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입을 수가 없다.
4) 신학중의 인성의 완전부패의 관념에 대한 오해이다. 이는 심씨가 생각한 것처럼 행위수량상의 모든 악을 행하거나 선을 행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성의 모든 부분이 죄로 오염되어 범죄의 경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완전부패의 관념은 죄인에게 양호한 덕성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 방면으로 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고 또 하나님이 인간의 양심 중에서 보편적인 은혜의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모종의 정도에서 그 완전히 부패된 상태를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5) 신도는 새로 창조된 사람들이다.(고전 5:17; 엡 4:24;) 이미 의롭다함을 입었고 비신자와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
심씨가 인간의 죄성을 다시 정리할 때 신자와 비신자의 인성상의 구별을 없애려고 했고, 통전의 목적과 수단이 보인다. 이런 관점은 자유주의의 만인구원론과 일치하며 구원의 은혜의 절대성과 선교의 필요성을 약화했다. 이는 정통신앙파가 받아 드릴 수 없는 부분이다. 심씨는 이미 교묘하게 사상과 표현의 형식에서 사상내용의 개조를 추진했다. 다른 말로 하면 심씨는 상황과 타협하기위해 2000년 불변의 믿음을 팔았다. 이는 인간의 죄성관에서 드러난다.
3. 교회관
전통신학에서 신도의 생활의 제일기본과 최고원칙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이며 모든 의로운 행위는 신앙생활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심씨는 이런 불신자들에 대한 관점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맞는것”도 틀렸다하는 것은 성경에 부합되지 않고, 중국의 현실에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불신자의 옳고 맞음에 고도의 평가를 한다. 그는 그들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공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니”(요일2:29)에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심씨는 일부신도들이 믿음만 강조하고 행위를 페함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심씨의 변증방법을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심씨는 비록 이신칭의의 원칙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은 행위로 칭의를 받을수 있음을 암시하고 행위의 중요성을 믿음보다 강조한다. 여기서 심씨가 좋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상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성경처럼 하나님을 상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신학관념의 혼돈이며 다른 한 편으로 심씨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착오를 범했다. “하나님이 나으심”은 육신적인 출생을 말하여 비신도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요한의 저술에서 이 단어는 성령으로 거듭난 신도를 말한다.(요삼 3:9, 4:7, 5:1,4,18).
심씨는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삼층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군중을 인정하고 뿌리를 민족에 두고 삼자를 실행하며, 신도끼리 사랑하고 종파를 없애며, 불신자를 책망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고 위협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을 전하는 대사명은 어디에 있으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인지? 교회가 사회에 대한 선지자적인 작용은 무엇인지? 이런 중요한 교회관의 과제들은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다.
4. 역사관과 말세관
현세의 역사와 미래의 신천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통신학은 양자의 불연속성을 강조며 양자의 연속성은 경시한다. 신 중국의 상황은 심씨로 하여금 “현재와 영생사이에는 일정한 연속성이 있다”고 보게 한다. 이는 직접적인 완전한 연속성이 아니므로 일부 불연속성이 있다. 내세까지 연속시킬 수 있는 사물은 무엇인가? 심씨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과학과 역사문화방면의 성과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파멸시킨다고 믿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새로운 천지를 창조해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는 공산주의와 공산사회이상과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대내로는 중국공산당 종교부에 잘 보일 수 있고, 대외로는 자유파교회들과 연합 할 수 있게 하여 일거양득이다. 심씨의 변증방법은 아래와 같다.
심씨가 제기한 문제는 현세와 내세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인데, 이는 성경의 하나의 비밀이다. 성경은 이 부분에서 상세하고 정확한 계시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심씨가 말하는 것보다는 더욱 확실히 보여준다. 현세는 옛 창조와 새로운 창조의 역사의 병행의 시대이며 현세에 속한 옛 창조의 물질은 분명히 말세에 파멸되며 금세에 새로운 창조를 받은 물질들을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된다.
인간의 존재는 새로운 계단으로 진입하고 있다. 영혼은 죽을 때 금세의 육체를 떠나 부활 시에 영성의 신체와 결합하여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며 믿지 않는 자들은 부활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결론
심씨의 신학체계를 통전신학이라면 삼자신학이나 중국신학이라기보다 더욱 적절하고 대표성과 상황화를 말하며 심씨가 통전신학의 대표적인 이론가라고 말할 수 있다. 통전신학은 조직신학의 형식을 이용한 동시에 조직신학의 내용을 변개시켰다. 통전신학은 50년 전의 삼자신학보다 우월하며 4년 전에 심씨가 말한 것처럼 “50년대에 비교하여 80년대의 신학사고는 더욱 건설성이 있고 비판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교의 방면의 해석에 더욱 중점을 두고 성경의 해석과 해석원칙방면의 토론에 그치지 않고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연구에 더욱 중심을 두고 인성과 윤리방면에 만 그칠 것이 아니다. ”(금릉협화신학지3기32p ) 이 강연에서 심씨가 요구한 신학사고의 표준은 : 목적-건설적이어야 함, 내용-신학과 교의, 초점-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이다.
심씨의 사고 방법은 맑스 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의 유물론적 변증법이며 통전술이다. 통전을 출발점으로 하여 지도방향과 최종목적, 표현의 내용중점이 더욱 분명해지고 방향이 명확하고 끌어당기고 때리는 힘으로 충만하며 참신과 시대감이 있어 유럽과 미국의 신학대가들을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심씨는 조직신학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중국의 상황으로 성경의 최고권위를 대치한 것,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상황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곡해한 것, 조직신학의 최종목적(딤후1:13-14)을 ”중점식“ ”단장취의‘로 고친 것, 등이 착오이다.
통전신학은 현대의 중국사회의 상황을 강조하고 성경의 비슷한 사회배경을 찾아 진리를 찾지 않는 이것은 해방신학의 노선을 따른 것이다. 현세의 물질생활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서양의 세속화신학을 따라간다. 통전신학이 발전되어 가면 창조만 필요하고 구속의 하나님은 필요 없고, 행위만 필요하고 신앙은 필요 없고, 물질만 있고 영혼의 생활은 없는, 금생만 있고 내세는 없는 맑스 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의 공산주의 세계관과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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