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 철학

2012. 3. 2. 01:00교회사자료/3.중세교회사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 스콜라 철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안셀무스의 속죄론(공덕사상, 적극적인 의, 소극적인 의)과, 피터 롬바드의 성령의 은총론(은혜=성령,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창조되지 않는 은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혜의 주입론(성령이 주입된 후 새로운 성향의 은총이 인간에게 발현된다는 주장, 중생한 자의 자연적 힘 안에서 은혜가 발현됨, 인간 속에서 창조된 은혜의 강조)에 대해 비교 연구하면 좋은 논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 철학을 공부할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스콜라철학이었는데, 에드워즈나 개혁주의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건너뛰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워즈 목사님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어거스틴 신학 ,스콜라철학, 개혁주의 신학, 청교도신학, 근대 철학, 근대 과학을 연구하지 않으면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 모 싸이트에서 자료를 퍼와서 재정리한 글이다. 


스콜라 철학



스콜라 철학의 발생기


스콜라(Scholar)라는 말은 샬레만 대제의 궁정학교를 Scholar라고 부른데서 생겨났다. 그래서 그 이후로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을 변증법적, 그리고 철학적 방식을 통해서 설명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이라고 하였다.

스콜라철학의 시대적 구분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발생기로서 9세기부터 12세기까지이며,

제 2기는 전성기로서 13세기이다.

제 3기는 쇠퇴기로서 14, 15세기이다.


초기 스콜라철학자들은 대개 플라톤의 철학체계를 따르는 이상론 또는 극단적인 실재론을 따르고 있었다. 스코위스 에리게나(Scoyus Erigena)는 중세 최초의 위대한 사상가로서 알려져 있다. 그는 만년에 가서 Platon적인 범신론에 입각해서 하나님과 우주를 거의 동일시했다. 그의 신학방법은 곧 신학과 철학, 이성과 신학은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이나, 단지 형식만 다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안셀무스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극단적인 실재론자였으며, 개념은 실물을 떠나 있으며,실물 이전에 있다고 했다(Universalia ante rem). 또한 그가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한 말은 신앙이 이성보다 앞선다는 것을 말하지만, 반대로 신앙은 계시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연구해야 완성될 수 있다고 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같은 안셈의 가르침에 있어서 Universalia ante rem이라는 의미는 신앙은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전통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실재론(實在論;Realism)과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은 보편적 개념(Universal Idea)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느냐 혹은 명옥에 불과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전자가 실재론이요, 후자는 유명론이다. 로셀리누스(Roscellinus) 같은 이는 삼위일체에 대해 유명론적 입장, 즉 셋이면 셋이지, 셋이 하나라는 것은 명목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안셈이 삼위일체에 대하여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한 것은, 그가 먼저 삼위일체의 실재론을 전제로 하고 그 후에 이성적인 추리과정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자 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처럼 안셈이 교리적 체계에 대해 의지적 승복을 먼저 한 것에 비해, 아벨라드는 '믿기 위해서 안다',즉 이성에 의한 점차적이고도 주관적 시험을 먼저 하였다.


*참고-신앙과 이성

알기 위해 믿는다-안셈, 실재론, 존재가 있음을 전재로 그것을 알기 위해 믿음

믿기 위해 안다-아벨라드, 유명론, 존재는 명목상의 개념으로, 이성으로 알고 종합하는 것


속죄론

안셈(Anselm)의 속죄론인 CurDeusHomo?의 내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인간의 죄는 신의 영예를 더럽혔다. 그러므로 신은 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두 가지의 대응방식이 있는데, 그 하나는 형벌이다. 그러나 신의 형벌을 받게 되면 인간은 신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게 된다. 다른 한 가지 길은 인간의 죄를 적절하게 보상하는 한 가지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죄책이 무한한 인간이 죄의 보상을 만족시킬 능력이 있을까? 그러나 어쟀든 인간은 보상을 할 길 밖에 다른 길은 없다. 이를 보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은 곧 인간이며 또한 신인 분, 곧 신인(神人) 예수 외에는 안된다. 그러나 신인(神人)도 그의 행위를 통해서 만족한 보상을 채우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복종은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종을 초월한 자발적인 희생, 즉 분에 넘치는 공적(功積) 만이 보상을 만족시킬 수 있다. 신인이 치룬 자발적인 희생에 대해 신은 값(보답)을 치루어 주어야만 할 의무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신인인 성자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에, 이 보상은 신인 그리스도에 의해 인간들을 위해 쓰여진다. 이것이 속죄의 과정이다.



* 참고-에드워즈, 윗필드의 칭의론과 피니의 칭의론

에드워즈와 윗필드의 칭의론

죄책이 무한함(에드워즈), 복종과 자발적 희생-수동적인 의와, 능동적인 의(에드워즈, 윗필드).


피니의 칭의론

예수님의 행위는 만족할만한 보상이 못 된다. 신에 대한 의무는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니는 자발적인 희생의 개념을 배제한다. 공적, 공덕사상을 배제한다. 그래서 그는 칭의는 전가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된다고 했다. 법정적 칭의가 아니라, 자비의 칭의를 주장하며, 칭의는 법정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행정부)의 수반이신 하나님께 사면권이 있기 때문이다. 법정은 사면권이 없다.


안셈의 속죄론은 몇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지나치게 법률적이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마치 왕과 신하의 관계처럼 보인다. 그리고 배상을 너무 강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관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또 그리스도의 능동적 복종을 그의 구속의 역사에 포함시키지 못했으며, 그리스도의 공적을 개개인이 적용함에 있어서 '의로 여김 받는 신앙'이 요건이 된다는 것을 나타내지 못했다.


아벨라드

가장 예민한 지성을 갖췄던 인물은 적극적으로 독자적인 원리를 창조한 아벨라드(Aberard,1079-1142)였다. 브리타니의 하급 귀족의 장남이었던 아벨라드는 학문을 위해 자기의 상속권을 동생들에게 이양하고 프랑스를 편력, 훌륭한 교사들의 강연에 참석하여 때로는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당당하게 토의를 벌였다. 나중에 그는 파리에서 강사가 되어 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저술에 손을 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시크 에트 논(예와 아니오)>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그는 교의에 관한 158개의 문제를 제시하여 성서, 교회 교부의 말, 이교의 고전에서 서로 모순되는 부분을 인용하여 거기에 답했다. "진리에 이르는 제 일의 열쇠는 끊임없이 또 빈번히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심하므로써 탐구하게 되고 또 탐구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 생각은 고대 그리스인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중세 유럽인에게는 받아들여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벨라드의 괄목할 만한 작품은 일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으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위험시되었다. 삼위일체의 성경에 관한 다른 저서는 1121년 소아송 교회회의에서 맹렬한 비난을 받고 저자는 수도원 유폐라는 판결을 받았다.


아벨라드는 그런 일에 굴복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 1년 후 그는 수도원의 허가를 얻어 파리 동남쪽에 있는 외딴 곳으로 옮겼다. 학생들은 아벨라드 곁에 몰려들어 그를 위해 오두막집을 짓고 밭을 경작하며 다시 한번 교편을 잡아달라고 간청했다. 아벨라드는 이성 탐구를 다시 시작하여 또다시 교회의 보수세력과 충돌했는데, 이번의 상대 중에는 기독교국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고위 성직자인 클레보의 수도원장 버나드가 있었다. 버나드는 제 2차 십자군을 권했을 때와 같은 열성으로 아벨라드를 추궁했다. "올바른 신자의 신앙은 논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버나드는 선언했다. 그에게 선동되어 1140년, 상스 교회회의는 아벨라드에게 이단의 판결을 내렸다. 아벨라드는 클루니 수도원으로 들어가 그곳에 은거한 채 인생의 마지막 2년을 거기서 보냈다.


유죄 선고는 받았으나 아벨라드의 탐구 방법은 그후에도 사용되고 성행하였다. 13세기에는 이미 교회의 비난으로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전유럽이 학문에 굶주려 있었다. 생활의 한 수단으로서의 지적 활동은 법왕의 이단 심문이라는 무서운 새 제도 밑에서도 성행했다. 남프랑스의 알비파 이단자를 박멸하기 위해 1233년에 설치된 이단 심문의 심리 법정은 소속이 분명치 않은 학자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아벨라드가 중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은 씨앗은 유럽 대륙의 도처에서 싹텄다. 그의 사후 100년도 되기 전에 파리, 오를레앙, 몽펠리에에서, 그리고 영국 해협 너머에서는 옥스퍼드, 켐브리지에서, 다시 볼로냐와 파도바에서 대학이 번영하기 시작했다.


-아벨라드의 속죄론

아벨라드는 안셈과는 반대의 입장에 서있던 자이다. 그는 '믿기 위해서 안다'고 말함으로서, 이성에 의한 점차적 시험을 중시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원죄설에 회의를 표시했고, 속죄설에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다만 회개할 마음을 일으키게 할 뿐이라는, 이른바 '도덕감화설'의 시조가 되었다.


아벨라드의 속죄론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원죄의 교리를 도외시하고 죄의 관념을 약화시킨 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사랑에 의해서 의인(義認)과 사죄(赦罪)의 기초가 이루어지고, 우리들의 하나님 사랑의 촉발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적은 그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완전한 사랑에 있는데, 이 사랑은 성례전을 통해서 주입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안셈과 아벨라드가 공통된 점은 오직 악마의 인류에 대한 주장을 부정한 점뿐이라고 본다.


요아킴

이 시대에 독특한 역사철학을 전개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요아킴(Joachim von Floris, 1202 d.)이다. 전통적인 어거스틴의 역사철학은 중세교회 보수적 운동의 배경이 되었지만, 요아킴의 역사관은 중세, 및 근세의 혁명적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천년왕국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고, 이를 신적 은총에 의한 교회의 지배와 동일시하였다.


요아킴의 역사관에 있어서 각 시대는 서로 겹쳐져 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특징은 언제이고 간에 새로운 역사적 단계란 어느 시기에 돌발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깊은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이 구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세 시대에 있어서 모두 포함되는 요소가 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시대의 신율(神律)의 자유는 역사 진전에 따라서 달성되어진다고 보았다. 이같은 역사관은 현실을 변혁하려는 강한 혁명적 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러므로 역사상 많은 종파주의자들이나, 계몽주의 철학자,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이같은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스콜라철학의 전성기


13세기의 전제

이 시기에는 대학들이 유럽 각지에서 설립되었다. 파리 대학(1186)과 옥스포드 대학(1200)은 신학으로, 살레르노 대학(1200)은 의학으로 각각 유명해졌다. 그밖에 캠브리지(1209), 피터 하우스(1284), 킹스 칼리지(1348)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서 유대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던 때였다. 그래서 아라비아의 학자들에 의해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가 전달되어 교회 내에 들어 왔으므로, 이 문화에 의해서 전통적 기독교는 크게 도전 받고 자기반성과 이해의 계기가 마련되어갔다.


13세기에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이 많이 연구되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온건한 실재론이 성행하였다(Universalia in re.). 온건한 실재론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는 개념이 실체보다 먼저 있고, 사물 자체 안에서는 개념이 실체 안에 있고, 우리의 오성(悟性) 안에서는 개념이 실체보다 후에 있다"는 사고체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 연구로 인해 어거스틴적 전통을 극복할 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는 삶의 전 영역을 다룬 완전한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갔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어거스틴이 신을 내적으로 체험한다고 본데 반해서, 세계구조의 존재론적 분석을 통해서 신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한다고 하는 감각적 경험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든 체계적인 철학을 만들어야 할 필요에 몰렸다. 고대 그리스인의 저서가 대량 유럽으로 흘러들어 신앙심을 약화시키며 이단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전모가 밝혀지고 그의 형이상학이나 과학에 관한 작품도 발견되고 있었다. 우주의 본질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사람들의 마음에 신의 계시에 대한 의혹을 심어 나갔다.


이 당시에는 또한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프란시스코회는 행동적인 사랑의 삶에 대한 이념을 강조하였다. 이 수도회를 통하여 종교적 실체가 민중에게 확대되는 결과를 낳게 되어, 평신도 운동에로까지 확산되어 갔다.


도미닉(Dominic) 수도회에서는 당시 조정적 변증신학의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활동하던 곳이었다.


후에 프란시스코회의 주의주의(主意主義)는 도미닉파의 주지주의(主知主義)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서 중세 후기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나 윌리암 오캄(William Ockam) 등의 유명론(唯名論)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와 동시대의 유명한 신학자로는 헤일스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1185-1245), 존 보나벤투라(John Bonaventura, 1221-1274), 알버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1193-1280) 등이 있다. 특히 알베르투스는 아퀴나스의 스승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생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나폴리 근처의 아퀴나(Aquina)에서 한 백작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나폴리 대학에 입학하여 거기서 도미? 수도사들의 모임에 1243년에 가담하여 수도사가 되었다. 그후 그는 파리와 꼴레뉴 대학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밑에서 공부하고 알베르투스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토마스가 알베르투스 밑에서 공부할 당시 에스파니아으로부터 마호멧교 철학자 아베로에스(Averroes)와 유태인 철학자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의 작품이 흘러들어와 회의주의를 퍼트렸다. 그 영향이 가장 현저한 것은 파리 대학이었다. 교회는 물론 무관심할 수가 있었다. 소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열성적인 도미닉 수도사 토마스가 이태리로부터 파리에 파견되었다.


그는 1252년에 다시 파리 대학에 돌아와 가르치기 시작하여 1257년에는 파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베로에스, 마이모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비난만 하지 않고 그들의 학설을 일일이 음미하여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기독교에 조화시켜 나갔다.


우선 그는 지식은 다만 신의 계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신이 부여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사려깊은 자유로운 행위에서도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단순한 덕 만으로는 불충분함으로 인간은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한 것이다.


둘째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통해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고전학자와 신학자는 벌써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쾌한 논증에 놀라고 있었으나 이 철학을 기독교에 결부시키려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이모니데스에 대한 이같은 토마스의 관대한 태도는 이 소동을 가라앉히기는커녕 더 큰 소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파리의 사교는 토마스에게 이단의 오명을 씌우고, 토마스설을 지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파문한다고 위협했다. 켄터베리 대사교도 2대에 걸쳐 같은 태도를 취했다.


한 사나이가 이 정세를 보고 궐기했다. 20년도 더된 옛날에 토마스를 가르친 도미니코 수도사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였다. 84세의 고령인 알베르투스는 쾰른에서 파리로 여행하여 도미니코회 수도사에게 동료인 탁발수도사 토마스를 편들도록 간청했다.


도미니코 수도사들이 50년에 걸친 노력이 열매를 맺어 교회는 토마스를 성인이라고 선언하고 그의 저작을 교회의 교의에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인 토마스주의는 이리하여 예로부터의 기독교 사상 조류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흘러가게 되었다.


그는 1261년부터는 이태리에서, 그리고 1272년에는 나폴리에서 가르쳤다. 그는 1274년 리용 종교회의에 참석차 가는 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겨우 48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그의 저서는 60여권이나 된다. 특히 그는 [신학총론](SummaTotusTheologia)의 대작을 남겼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신학적 지식의 집대성 신학대전이었다. 이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논리학, 형이상학, 신학,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 등을 다룬 21권으로 된 방대한 논고이다.


-철학과 신학

그의 사상체계는 신플라톤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철학에다가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종합하고 통일시킨 성격을 지닌다. 그는 신학 연구의 목적을 '하나님을 알고, 인간의 기원과 미래와 운명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지식은 이성으로부터와 계시로부터 얻어지는데, 이성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계시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 계시는 성경에 있고, 성경은 유일한 궁극적인 권위이며, 성경은 교회회의와 교황들의 해석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토마스의 철학과 신학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철학은 이성으로부터 자연적 질서를 모색하는 것이며, 신학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초자연적 질서를 연구하는 것이다. 자연적 진리와 초자연적 진리는 다 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것을 연구하는 철학과 신학 사이에도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이라 함은 결코 반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신의 존재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해서, 신은 제1원인이며, 신은 순수한 활동이며, 그는 가장 참되고 완전한 존재이며, 절대적인 본질이며, 그리고 만물의 근원이요 끝이라고 했다.


그는 신존재 증명에 있어서 우주론적 논증을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그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최고 존재인 신을 상기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운동에는 운동의 원인이 있는 것이고, 그 원인에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신이라고 했다.모든 결과에는 결과의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제일 원인이 되는 것은 신이다. 모든 우연에는 우연의 궁극적인 필연성이 있는데, 이것이 곧 신이다. 그리고 모든 목적에는 최후의 목적이 있는데, 이것이 신이다. 그리고 모든 완전성에는 완전성의 정도가 있기 마련이며, 절대적인 완전자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신이라고 보았다.아리스토텔레스를 본받아 인생의 목표는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아퀴나스를 포함해서 중세의 신 관념은 우선 인격적인 신이라는 관념은 일반적으로 적합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불변성, 완전자가 강조). 신 관념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 '제1존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신이 세계창조의 근거임을 말해준다.

'앎'의 요소이다. 이는 자신과 또 자신과는 다른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신의 관념으로서, 헬라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의 요소이다.

'의지'의 요소이다. 이는 기독교적, 또는 어거스틴적 전통의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신은 심리학적 기능만이 아닌, 모든 생동적인 사물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이 의지로서의 신은 곧 사랑이다.


신의 앎과 의지에 관한 문제를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즉 앎은 인간과 신의 첫째가는 특성이다. 그러므로 앎에 의해서 비로소 의지는 자기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스코투스(Scotus)는 의지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신의 질서적인 의지의 힘은 모든 것을, 즉 앎까지도 초월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후에 나타난 모든 실증주의(實證主義)는 스코투스의 사상에 근거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실증적으로 주어진 것은 무조건 복종할 것을 강요당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같은 것은 실증주의의 위험한 면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과 은총

토마스는 자연과 은총과의 관계를 서로 결합시켰다. 즉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완성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자연을 완성시키는 은총이란 것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곧 초자연(超自然)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연과 함께 초자연의 은총을 주셨다. 그는 이 초자연의 은총에 의해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에 머물 수 있었다.


이처럼 토마스에게 있어서 자연과 은총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실제의 구조는 두 단계로 되어있었다. 마찬가지로 계시도 이성을 파괴하지 않고 이를 성취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계시 안에서의 이성의 깊이(depth of reason)는 이성의 형식을 초월해 간다고 보았다.


그는 아벨라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속성 중에서도 특히 이성을 존중했는데 학식도 학식이지만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서도 유명했다. 그는 신앙과 지식 사이에는 이성의 힘으로 조화시킬 수 없을 정도의 모순은 없다고 생각했다.


-죄와 은총

지음 받은 인간은 그의 타고난 기능에 부과하여, 믿음, 소망, 사랑의 덕을 실천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근본적인 의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믿음, 소망, 사랑의 덕을 실천할 수 있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에게는 자연적 은총과 함께 부가적(附加的)인 초자연적 은총이 주어진다고 스콜라철학자들은 보았다. 죄에 대한 관념은 다분히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입장에 서있었으나, 어거스틴적 유산도 많이 받았다. 일반적으로 원죄는 소극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으나, 아퀴나스는 이를 적극적인 정욕이요 죄된 성질과 형벌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중대한 죄(mortal sin)와 가벼운 죄(venial sin)로 구분하면서, 전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라고 보았으며, 후자는 자신의 의도적이거나 적극적인 의지의 사용이 없이 하나님으로 터 유리(遊離)되는 것이라고 보면서 이는 현세에서의 형벌에 의해 속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은총에 대한 아퀴나스의 해석은, 은총이 주입됨으로서 인간의 본성은 회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의인(義認)은 인간의 점차적 회복의 과정으로 보았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의 구원에 필요한 분량보다 더 많은 공적을 쌓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성례전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은 성례전(聖禮典)을 통해서 주어진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완전한 구원의 기관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이 교회에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어거스틴적인 전통적 해석에 따라 스콜라철학에서는 성례전을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표시'라고 보았다. 그 당시에 성례전이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이유 중에는 불확실한 구원관 속에서 개인적 구원에 대한 실제적 관심이 높았던 점과, 그리고 성례전을 하나의 은총에 의한 지배수단으로 사용했던 당시의 교권주의적 영향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각 성례에 있어서 질료(matter)는 형상(form), 즉 말씀으로부터 구분된다. 그러므로 사제의 축원(祝願)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기까지는 잠재적 실체인 질료에 불과하다. 성례전의 효험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덕을 힘입어 본래적 의(義)를 회복케 하는 것이었다. 성례전의 효과는 '그 자체의 작용에 의해서'(ex opere operato, 사효론) 유효해진다. 물론 이는 성례를 행하는 사제와 참여한 자들이 믿는 마음으로 동참하는 조건을 전제로 할 때이다.


피터 롬바르드(Peter Rombard) 후에 7가지 성례의 제정이 있었고, 1439년 프로렌스(Florence)회의에서 이를 확정하였다.



스콜라철학의 후기


존 둔스 스코투스

이 시기에 고대로부터의 사상적 조류가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이제 옛 스콜라철학의 사변적 체계에 흥미를 잃은 14, 15세기 사람들은 다시 어거스틴과 플라톤적인 신비주의 체계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 고대로부터의 조류란 벌써 8세기 전에 어거스틴에 의해 표명된 것으로써, 모든 유용한 지식은 추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계시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 구원에 있어서는 정신의 맑음보다도 마음의 순수함이 더 중요하다는 신념이었다(주지주의<주의주의).


이같은 철학은 13세기에 보나벤츄라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 가장 정확하게 표현되었다. 후에 프랜시스코 수도회의 총장이 된 보나벤츄라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 대학에 있을 무렵 거기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는 통달하고 있었으나, 토마스와는 달리 그것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적응시켜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보나벤튜라는 이성보다도 신비주의에 마음이 끌렸다. 지식은 사랑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또 한사람의 프란시스코파 수도사인 둔스 스코투스도 지성에 대한 사랑의 우월을 존중했다.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55-1308)는 영국 출신으로, 프란시스코(Fransisco) 교단에 들어가 여러 대학에서 공부한 후, 1304년 파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아퀴나스와 달리, 그는 인식론에 있어서 신플라톤적인 직접적인 인식이나 토마스적인 인식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 지성의 힘을 탐구하여 신에 대한 합리적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토마스와도 상반되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대신 교회의 권위가 철학적으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들을 대답해 준다고 했다.


토마스의 합리적인 이론보나벤튜라와 스코투스의 직관적인 이론은 그후 한 동안 사상계에서 공존하게 되었다. 이윽고 대학은 철학과 신학을 별도로 다루게 되어 전자를 인간 이성의 산물, 후자를 신의 계시의 결과라고 했다.


윌리암 오캄

윌리암 오캄(William Occam, 1280-1348)은 보다 더 극단적인 유명론자로서,그는 보통 [유명론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그는 신학에서 철학을 더욱 더 분리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교권과 정권과의 분리를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황제와 교황의 권위에 대하여 그는 세속적 권한과 영적인 완전한 권한은 어느 무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음을 주장함으로서 교황의 권한을 비판했다. <대화론>에서 그는 이단적인 교황의 폐위를 인정 또는 암시하고 교회를 대표하는 공동의회의 구성을 언급했다. 그는 스코투스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권위를 말했으나, 교황의 종교회의의 결의보다는 성서의 권위에 더욱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신 관념에 있어서, 유명론에 의하면 신은 만물과는 별도로 특정한 위치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형이상학은 이미 신 인식에 있어서 불가능하게 되며, 단지 전적으로 신앙적인 문제가 될 뿐이다. 신에 대한 간접지식이란 없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권위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며, 신앙이란 권위 아래 자신을 맡기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교회의 구성 요소로 보고 교회를 믿음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모임, 믿음을 고백하고 진실하고 참된 사람들의 공동체로 보았다. 그러므로 오캄에게 있어서 가장 첫째가는 권위는 교회의 전승(傳承)이 아니라, 우선 성서였던 것이다.


이성과 계시

13, 14세기 신학자들의 신 인식론어거스틴 대 아리스토텔레스, 즉 '신이 우리 인식의 맨 처음이냐 아니면 맨 끝이냐?'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다음의 표를 참조하면 당시의 신 인식에 있어서 계시와 이성 사이의 관계가 점차 변천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성과 계시에 대한 이같은 변천은 곧 스콜라철학 안에서 이성과 권위에 대한 해석상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권위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교회의 신앙적 전통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명한 <명제집>의 저자인 피터 롬바드(Peter Rombard)는 이성의 기능이 권위의 명제를 수집하고 조화시키고 주석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성은 어디까지나 전통을 해석하는 것이지, 전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아퀴나스는 권위와 이성을 서로 모순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이성은 권위를 해석함에 있어서 적합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에 와서는 권위와 이성을 서로 분리시키려는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성은 권위를 해석함에 있어서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표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중세 말기에는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타율적 체계를 받아들이고, 또 동시에 세속적 인식에 있어서는 자율적인 과학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양립화되어가게 된 것이다.



중세교회 후기


르네상스


-배경

르네상스는 14세기 이태리에서 먼저 시작됐다. 르네상스가 일어난 먼 원인으로서는 9세기 초 샬레만 대제가 문예를 장려하고, 기독교의 수도원들은 학문에 힘쓰고 학교가 발달함에 따라 르네상스의 조짐이 다가오게 되었다.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다시 고대 세계로 눈을 돌렸다. 제일 먼저 주목을 받은 것이 로마이다. 그러나 학자나 시인들은 장대한 로마 문화의 배후에 그보다도 더 힘차고 매력이 넘치는 문화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았다. 거의 두터운 장막은 차츰 열려졌다. 그래서 거의 천년 동안이나 수도원에 간직되어 있던 옛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명이 다시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시대에 있어서 그리스 문화에 대한 신뢰도는 지극히 높았다. 과거의 여러 교의나 우주관과 이미 작별을 고한지 오래인 현대에 있어서도 그리스적 인생관은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생활 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교회에 끼친 영향

13세기로부터 십자군 운동을 통하여 동방과 서방의 문화가 교류하게 되었고, 각지의 발달된 문화를 수입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각 처에서 학자들이 몰려와 그리스와 라틴의 고전 문학 연구열이 높아졌다.


르네상스로 인해 다음과 같은 영향이 당시 모든 교계와 사회 내에 급속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 고전의 연구가 활발해 졌다. 그 결과 학문적 비판주의가 발전하게 되었고 에라스무스는 헬라어를 연구하여 벌게이트의 오역을 지적하였고, 로렌조 발라는 콘스탄틴의 기증서가 거짓 문서임을 발견했다.

● 인본주의: 인간 해방을 뜻하며, 이는 당시에 있어서 특별히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철학과 신학의 사조에 있어서도 신중심적인 관심으로부터 인간의 이성중심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를 겪게 되었다.

● 회의 운동(the Council Movement): 이 회의의 목적은 교황권의 개혁에 있었다. 당시 교황권의 부패를 시정하기 위해 파리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교회의 최고 결정권은 교황이 가질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체회의가 가져야 하고, 따라서 교황도 이에 굴복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 민족주의: 중세의 민족주의는 르네상스와 교회회의 운동 등에 의해서 자각된 사상이다. 로마 교황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은 극에 달하여, 많은 나라들이 제국주의적인 교황권의 착취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남부 이태리지역

페트라르카(Petrarca)와 보카치오(Boccacio) 그리고 단테(Dante) 등을 선구자로 들고 있다. 페트라르카와 복카치오는 단테와 더불어 이탈리아 문학을 창설했다.

페트라르카는 단테와 마찬가지로 과격한 기질의 소유자였으나 신비주의나 풍자에 대한 기호는 없었다. 페트라르카는 쾌락적이고 세속적인 생활을 찬미했다. 페트라르카는 라틴 문학과 키케로의 문학을 연구하였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으로 유명하다. 복카치오는 단테가 한 것처럼 자기작품의 도처에서 선과 악을 다루었지만, 단테와는 달리 완전함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종류, 모든 신분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단테는 <신곡>으로 유명하다. 단테의 이 <신곡>은 베르길리우스에 인도되어 지옥과 연옥을 돌아 베아트리체의 영혼과 함께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줄거리이다. 그 여행 동안 그는 때로는 철학자가 되고, 풍자가가 되어 법왕이나 극악한 정치가를 지옥과 연옥에서 살게 한다. 모든 것을 신학자식으로 신비주의의 복잡한 체계에 맞춘다. 역겨웁고 음침한 지옥은 서민이 애용하는 미신적인 말로서 묘사한다. 그러나 역시 베르길리우스를 골라 자기를 구원에로 인도케 함으로서 단테는 일관하여 닥쳐올 르네상스식 방법으로 냉정한 지혜와 고전적인 우아함을 찬미하고 있다.


단테는 그의 <군주론>에서 파리의 존의 주장을 채택하고 복음주의적 정치에 대해 폭력이라는 의미로 첨예화 시켰다.


●왕, 황제의 권한과 교황의 권한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선언하고 왕, 황제의 권한을 교황의 권한이 제한하지 못함을 주장.

교황의 영적 지배권은 세속 생활에 많은 부분에까지 미침을 주장함으로서 왕과 황제는 교황에게 경의를 표해야함을 암시

●인간의 평화와 행복의 희망은 영적 지배권과 세속지배권의 조화, 협조에 있음을 믿었다, 후에는 교황의 권한을 불신.


이들은 새 인문주의를 수립하고 문화적 갱신을 초래할 현대문명의 길을 연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인문주의(Humanism)는 내세적, 교권적, 그리고 금욕적이었던 중세의 이상에 반대하였다.


인문주의의 출현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오히려 제르베르나 필베르 같은 사람들의 직관적인 통찰, 아벨라루두스 같은 사람들의 대담성,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의 용기 속에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 단테는 이 모든 것이 뿌려진 바탕에서 그 열매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또한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생운동으로서, 특히 인간 본유의 권리와 가치를 선양하자는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북부 이태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들이 많이 연구되어, 남부의 플라톤적인 인간관을 배격하고 자연과학적인 인간관을 많이 말했다. 즉 인간 자체가 우월하다는 Plato적인 노선보다는, 순간 후에 사라질 동물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와 함께, 영혼불멸설을 부정하는 경향이 짙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레오날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등의 작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문화적인 심미운동은 문학과 예술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은 상류계층을 통해 교황청에 많이 나타났다. 이 운동은 종교개혁을 통해 잠시 잠재되었다가 17세기 말부터 다시 서구에 나타나게 되었다.


북부 프랑스, 옥스포드, 독일지역

이 지역 인문주의 운동의 대표자로는 에라스무스(Erasmus,1466-1536)를 들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이태리보다는 덜 과격하고, 조정적인 형태로 나타났는데, 특히 스콜라주의 체계에 대한 불신감 조성과 언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촉발된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로히린(Reuchlin)이 [히브리어 문법]을, 그리고 에라스무스가 [희랍어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선교


-탐험과 선교

르네상스의 탐험은 시초부터 신과 황금은 표리일체가 되어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 제국은 언제나 이 두 가지 목적을 강조했다. 그 무렵 전도단체를 갖지 않았던 개신교 제국은 개종에는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똑같은 목적을 표명하였다.


정부도 민간인도 이교도를 개종시키는 일은 유럽의 천명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콜럼버스는 원정의 성패는 그가 발견하는 황금이나 향료에 의해 평가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헤아리건대 폐하의 참 뜻은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앙으로 개종시키는 일이다"라며 거짓없는 성의를 가지고 쓰고 있었다.


-새로운 깨달음

유럽인이 시행착오 끝에 다른 민족이 어떻게 살며 생각하는가를 이해하게 된 것은 탐험이나 무력 또는 세속적인 통치나 식민 같은 것이 이유가 아니라, 종교가 원인이 되어 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도 선교사들은 새로 발견된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서 되도록 유럽인과 가까운 인간으로 만드는 일에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열렬한 선교사들은 그들이 마주친 상이한 습관이나 사회 체제 등이 수세기에 걸쳐 배양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고 다른 종교조직이 자기들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이것을 배운다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프랜시스 자비에르가 1549년에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이 지적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주입하기는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그가 파견한 선교사들은, 기독교는 선종(禪宗)이나 신도(神道) 등, 그 땅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번영하는 복잡한 신앙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변화된 선교관

르네상스인이 미지의 사람들에게 대해서 가졌던 태도는 그들을 경멸적으로 보던 태도에서, 비교하면서 보는 태도로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제 피선교지의 토착문화를 멸시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유럽의 생활방식과 그 토지 고유의 습관을 비교하여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비로소 그들은 깨달은 것이다.


탐험에 이은 전도사업에 의해서 단적으로 말하자면 유럽인은 다른 문화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어떤 점에 관해서는 그것을 존중할 줄도 알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우선 기성의 많은 종교들과 및 이들 분파와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어서 신뢰할 만한 상담역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각자의 유럽식 습관이나 태도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독교의 선교는 중국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 이유는 전도자들이 그곳에서 지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불교, 도교, 유교사상의 어지러운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련된 중국이나 일본과의 접촉에 의해 선교사들은 전혀 비중세적인 자질, 즉 종교에 있어서의 이해와 관용의 정신을 배웠다.



교황권에 대한 도전


-교황권의 쇠퇴

교황권이 쇠퇴하게 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이 차츰 자주독립을 요구하며 외부의 간섭을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흥계층인 중산계층들의 지식이 발달하고 그들의 재산과 정치적 세력이 급증하게 되자, 봉건제도가 급속히 붕괴되어 나가게 되었다. 또 많은 학자들이 고대 로마법을 연구하게 되자, 이제는 국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종래의 교회법(Canon Law)을 배척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당시 교회의 부패상과 정치적 야욕에 대한 사회의 비난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래서 당시 단테나 마르셀리우스 등은 교황권의 남용을 신랄한 필치로서 공격하였다. 단테는 <제국론>(De Monarchi)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황이 우리의 영적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과 같이, 황제는 우리의 현세적 안녕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권과 정권은 다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서로 충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마르셀리우스(Marselius, -1342)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고 권리는 민중에게 있다. 국가로 보면 인민에게, 그리고 교회로 보면 교인에게 권리가 있는 것이니, 그들은 교황이나 황제를 선출할 권리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정권과 교권은 각각 민중의 복리를 위해 힘을 다하고, 결코 다툴 것이 아니다".


아비뇽

교항 보니파시우스 8세와 프랑스 왕 필립은 교권과 왕권을 서로 확충하려다가 큰 충돌이 일어났는데, 이때 프랑스가 강해져서 교황이 잠시 붙잡힌 일이 있다. 교황이 죽은 후 프랑스 추기경들은 프랑스인 교황 크레멘스 5세(1305-1314)를 세워, 교황청을 아비뇽(Avignon)으로 옮겼다.


법왕으로 선출된 클레멘스는 로마로 갈 생각은 않고 고향에 가까운 곳에 머물면서 국왕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다. 클레멘스에 의해 결국 고대 유대인이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한 것에 비유하여,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1304-1377)라고 부르는 기간의 시작이 된 것이다.


크레멘스 5세 이후에도 여러 명의 꼭두각시 프랑스 교황들이 있었다. 클레멘스의 뒤를 이은 6대에 걸친 법왕은 모두 프랑스 출신으로서 로마에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비뇽이 법왕의 성지가 되었다. 작은 마을이었던 아비뇽은 이윽고 인구 8만의 번화도시가 되었다. 방대한 수의 성직자 관료기구가 만들어지고, 극도로 사치스러운 교황청이 세워졌다. 아비뇽의 법왕들이 솜씨를 보인 장기는 재정면과 행정면이었다. 영적인 면에서의 지도력은 빈약한 듯했다.


그러나 이태리인들의 반발이 점차 거세어가서, 프랑스 추기경들은 다시 이태리인 교황을 삼고, 그를 우르반(Urvan) 6세라 하였다(1378). 그러나 우르반 6세는 자기를 뽑아준 프랑스 추기경들을 공공연히 비난하므로, 프랑스 추기경들은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가서 같은 해에 클레멘스 7세를 세웠다. 이래서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에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교회 회의들


-화해주의자들

교회 상황과 대분열 때문에 전체종교회의가 공개적으로 요구되었다. 이 시기에 교회 법학자들과 14세기말과 15세기 초에 이 목적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화해주의자라고 지칭한다. 이들은 특히 교회의 권위가 전신도 조직체 또는 모임에 주어지며 이 권위는 공동의회에 의해서 표현됨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강조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회중으로서의 교회와 교회의 모든 권한을 가지며 그것을 행사하는 교황 안에서 체계화된 것으로 간주되는 교회 사이에 구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

●권위는 신앙인 전체 조직체 속에 귀속되며 만약에 교황에게 권위가 부여된다 하더라도 변경될 수 있으며 남용시 철회될 수 있다. 특히 현재의 교회의 위기 때문에 교황의 권한 없이 추기경 또는 능력있는 기독교인이 종교회의를 소집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종교회의가 교황의 그것보다 우월한 권위를 가지고 있도록 주장했다. 회중의 본래 권한의 집행권을 찾으려고 할 때 전체종교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기에 교회의 권위는 그에게서 나오고 교회의 신비한 몸의 단일성은 완전히 그리스도의 단일성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권위를 가지고 교회의 단일성을 보호할 수 있고 전체종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파리 대학장의 제자인 진 데 게르송(Jean de Gerson,1363-1429)은 이같은 교회의 타락을 회복하는 길은 기독교국 간의 대회의를 열고 그 회의의 권력을 맡기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즉 교황의 독재정치 대신 일종의 의회정치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이같은 성격의 회의는 다음 3차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피사회의 (1409)

피사(Pisa) 회의의 목적은 대분열을 해결하고, 교회 내부를 개혁하며, 이단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첫 종교회의로서 큰 성과가 없었다. 당시에 있던 두 교황을 폐위시키고 새 교황을 세웠으나, 폐위된 두 사람의 교황이 각각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어, 결국 세 사람의 자칭 교황이 된 셈이다.


-콘스탄츠회의(1414)

콘스탄츠(Constanz) 회의는 종교적 대분열의 공식적 종식을 가져온 회의이다. 세 사람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마르틴(Martin)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세웠다. 교회 일치의 효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존 후스(John Huss), 존 위클리프(John Wicliff) 등을 교회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처형시켰다. 교회의 내부를 개혁하는 일은 성과가 없었다.


-바젤회의(1431)

바젤(Basel) 회의는 교회 전체를 개혁하고, 이단을 전멸하고, 그리고 기독교국 간의 평화를 도모할 목적으로 열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를 '사단의 집회'라는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회의에서는 교황 없이 회의를 강행하였다. 주요 결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 대회의는 교황의 위에 있다.

● 교황의 권세와 강제 징세는 제한한다.

● 교직자일지라도 죄가 있으면 처형한다.

● 장로와 집사 등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결의 내용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다만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크게 부각시킨 데에서 그 업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이는 종교개혁자들에게 개혁에의 길을 제시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당시의 동로마제국의 형편을 잠시 소개하면, 동로마제국은 1453년 터키 왕 모하메드 2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되고, 동방교회도 그 운명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러나 코란(Koran)의 원리에 따라, 기독교인은 비록 전도는 할 수 없으나 신앙유지는 가능하게 되었다. 교리와 조직과 예배는 변함이 없었으나, 날로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부과되지 않는 각종의 과다한 세금을 내야 했다. 기독교 교직자의 권위는 하락되고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기독교도에 대한 여러 가지 학대가 심했다.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사상가들

교리적 개혁사상가


-존 위클리프

존 위클리프(John Wyclif,1324-1384)는 영국 출신으로서, 부패한 성직자들의 교권 남용을 비판한 것으로서 유명하다. 교회는 부와 정치적 세력과 연합함으로 부패되었으므로 근본적인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지배의 법이 있다고 그는 보았다. 하나는 시민적 지배법이고, 또 하나는 신적 지배법으로서 이는 다분히 요아킴(Joachim)의 혁명적 사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는 교황을 혹평하기를, "그는 적그리스도(Anti-Christ)이며, 오만하고 세속적인 로마의 감독이며, 가장 착취를 잘하고 약탈을 잘 하는 저주 받은 인물이다"라고 했다. 교황도 역시 오류를 지닌 인간이기에 그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보았다. 위클리프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부인하고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말했고, 로마교회의 무오성(無誤性)이라든지, 비밀 고해, 연옥사상, 성지순례, 성자 숭배 등은 비성경적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교황은 1377년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그를 처형시키려 했으나, 영국 왕후와 민중의 후원 때문에 손댈 수가 없었다. 위클리프는 영국 왕의 지원 아래 하나의 종파적 비판을 로마에 가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완전한 개혁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14, 15세기에는 교회의 전통과 대립되어 평신도운동, 성서주의 운동이 크게 일어나던 시대였다. 중세교회는 어거스틴-토마스적 전통에 따라 예정교리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정된 사람들의 전체 조직체라는 어거스틴의 불가시적 교회론을 수용했지만,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 선택된 자들의 불가시적 교회를 분명히 동일시한 신비한 몸에 대한 새 해석의 교회론을 주장하였다. 위클리프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기초한 신비한 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 속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hierarchia 속의 교회를 대항하여, 그 체제 안에도 예정되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최초로 영어성경을 번역했는데, 이전까지는 제롬(Jerome)이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Vulgate역 뿐이었다. 영국인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이는 교황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가 최상임을 은연 중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교회론의 강조점은 주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이 주권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으며, 교황의 성직자의 세속에 대한 지배권을 제거하고 성서의 권위가 그것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회의 법률은 오직 성경뿐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성서의 권위가 전승의 권위를 압도하는 것이라고 본 것은 틀림없으나, 아직 그에게 성서는 '용서의 말씀'이 아니라 '법의 말씀'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 종교개혁가들의 성경관과는 구별될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정신은 롤란드(Lollard) 운동, 즉 백성들에게 성경을 보급하며, 제자들을 둘씩둘씩 전도에 파송하며, 사도적 청빈주의에 입각하여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맨발로 전도하는 단체운동이 지속되었다.


-존 후스

존 후스(John Hus,1369-1415)는 보헤미아(Bohemia) 출신으로서, 위클리프의 교훈을 추종하였다. 그는 교회 안(in)의 사람과 교회의(of) 사람을 구별하였고, 교회 안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참된 교회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주적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며, 교황과 감독들의 통치는 교회에 불필요하다고 했다.


민족주의와 개혁운동의 지도자였던 그는 성직자의 부패와 성직 매매를 반대하는 글과 강연을 했다. 그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공격한 후 교황이 그를 파문함에 항거하여 종교회의에 교황을 고소했으나, 결국 모략에 걸려 화형 당했다.


실제적 개혁사상가


사보나로라

사보나로라(Savonarola,1452-1498)는 이태리 출신의 도미닉파 수도사로서, 그는 교리적인 면에서의 개혁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태리인들의 부도덕과 악습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교황의 무오성(Papal Immorality)에 대해 비난하다가 1498년 5월에 화형 당했다.


-피터 왈도(왈도파 연구는 중요하다)

피터 왈도(Peter Waldo, -1197)는 프랑스 리용 출신의 부자 상인이었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게 된 후 그는 세속적인 재화와 부를 포기하고 그 대신 빈곤을 강조했다. 그의 활동 초기에는 가톨릭의 교리와 지시를 받아들였고, 노방전도를 주로 실시하였다. 그들은 신약성서를 암송하며, 이를 문자적으로 실천했으며, 은밀한 기도생활과 금식을 많이 실행하였다. 그는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생활규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의 허가없이 그의 추종자들은 스스로 설교하고 성서번역을 하여 사용했다.


그가 회의에서 설교자의 자격을 달라고 했을 때, 교황은 그가 무식한 평신도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왈도는 "교황은 하나님의 음성을 거절하는 인간의 소리"라 외치며, 동지들과 전도를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교황 루키우스(Lucius) 3세는 이단이라는 이유로 1184년에 그를 파문시켰다. 왈도의 파문은 로마교회가 사랑보다는 법으로서 다스린 결과였다. 결국 교황의 처사는 왈도파의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