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世敎會史

2010. 9. 21. 23:10교회사자료/3.중세교회사

중세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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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함락 이후의 기독교권(476~590)
서방에서의 로마제국은 점진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제국의 중심지가 서방에서 동방으로 즉, 로마에서 콘스탄틴노플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상태는 오랫 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기독교 내에 영향을 주었다.
야만 민족들은 제국을 침략하여 유럽의 정신에까지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북아프리카에 최초의 왕국을 세웠던 반달족은 아리우스 주의 신봉자들이었다. 이들의 영향은 극히 미미했었다. 스페인에는 비시고트족들이 자리을 잡고 있었다. 이들도 아리우스 주의자였으나 주민들의 정통 보편적 신앙(Chatholicism)을 자기들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고울 지방에서 프랑크 족들에게 축출되었다. 이들은 스페인에 정착한 이후 40년 이상 아리우스 주의를 신봉하고 이 신조에 따른 고트어로 된 예배 의식과 왕권에 의지한 교회 조직을 정비하였다. 고울 지방의 프랑크 왕국은 자신들의 영토를 가지고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었다. 이들은 보편 교회의 종교적인 후원 아래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아리안 오스트로 고트족은 이탈리아를 지배하였다. 이들은 아리우스 주의자들이었다. 로마 제국의 초청으로 들어온 이들은 식민자로서 간주되었다. 아리안 오스트로 고트족 출신의 테오도릭은 타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폈으나 동로마 제국의 정책의 변화로 정통 교회에 핍팍을 가하게 되었다. 6세기에는 정·교가 일치되어 상반되는 종교적 사상으로 하나의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당시 야만 민족들에 의해 세워진 국가들의 생존은 피정복민의 문회에 적응하고 수용하는데 있었다. 이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로마인니자 정통 기독교인 이었기 때문이다. 6세기 말까지 프랑크 족과 비시고트 족은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정통 신앙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고전적 학문들은 보에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에 의해서 기독교 학문의 명목으로 중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6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신학적인 논쟁은 죄와 은혜에 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종교회의의 소집없이 교회는 죄와 은혜에 관한 교리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로마 함락과 대 그레고리 교황 제위 시기 서방에서는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베네딕트는 동료들과 함께 「계율(Rule)」을 작성하고 이를 실험해 본 후 완성하여 이에 따라 수도하였다. 수도사들은 하루 일과를 예배와 노동과 성경 및 독서와 연구로 보냈다. 하루의 생활은 규칙적이며, 검소하고, 정결과 빈곤과 순종 등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켰다.
수도원 운동은 그 권위가 더해져 제국 정부와 싸우는 무기로, 혹은 열성파들의 효과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동방 전역에 걸쳐서 있었던 수도원들은 그들의 교리적 입장을 동일시 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 때 단성론자들과 이성론자들 사이의 분재에서 칼세돈 회의를 통해 이성론이 채택되었다. 제노는 482년 통합칙령 혹은 헤노티콘을 발표하여 동방교회는 연합이 이루어 졌으며, 교리적 분쟁은 일단락 지어졌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이에 대하여 이 칙령에 서명에 모든 주교를 파문함으로 동방교회에 반발하였다. 이에 아카시우스 총대 주교는 동일하게 서방교회의 펠릭스를 파문함으로 이로써 동·서 교회는 분열이 시작되엇다. 아카시우스가 죽고 저스틴이 등극하자 칼세돈 기독론을 인정하고 동방교회에 양성론을 강요하였다.
유스티니안 치하의 기독교는 정치와 일치하여 황제가 마치 교황과 같은 시기였더, 그는 정통적 신앙을 유지하였고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정죄하였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는 비잔틴 예술과 문학의 황금시기로 이때의 대표적 건물로 성 소피아 성당이 있다. 그는 말년에 아프타르토 가현설 이라는 이단에 빠져 교회에 의해 파문 당하였다. 제6세기 조직과 예배가 동방교회에서는 거의 완전해 졌으며, 서방 교회는 일부 완성되었다.

2. 교황들과 서방 교회의 선교(590~756)
유스티니안 사후 교회는 더이상 제국의 종속에 있지 않아도 되었다. 제국은 거의 파산 직전에 있었으묘, 야만 민족들은 서구 유럽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방의 쇠퇴기 가운데 로마는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 제1의 시민인 주교에게 시민들은 통솔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7세기 이후 주교제도는 교황제도로 바뀌었고 서부 유럽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기독교의 확장을 가져 왔다.
시대의 요청에 의해 로마 교황이 된 그레고리은 세계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교황제도를 창조한 사람이다. 그는 롬바르드 족속들이 로마를 침략하자 공공 생활 문제와 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자 시민들은 교회를 국가로 보기까지 하였다. 그는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스페인의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정통신앙으로 전향 시켰다. 그는 예배 의식을 간소화 하고 설교를 중요시 하였으며, 그리고 예배시 스콜라 칸드롬(성가대)을 시작하였다. 그는 설교가로 신학 저술가로 활동하였다.
596년 그레고리는 베네딕트 수도사인 어거스틴을 앵글로 색슨족의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로마 교회의 영국 선교는 영국의 7왕국을 지리적 위치에 따라소 잔행되었다. 어거스틴과 그의 동료들은 타네트 섬에 상륙하여 복음을 전했다. 켄트왕 에텔베르트에 복음을 전하자 그와 그의 백성은 개종하였다. 604년 멜리투스는 초대 런던 감독이 되었다. 같은 시기 유스투스는 로체스터의 감독이 되었다. 파울리누스는 625년 켄터베리에서 노덤브리아 왕국으로 가서 에드윈 왕과 그의 각료들을 회심시켰다. 그러나 수년 후 이교도 왕 메시아가 에드윈을 살해하고 파울리누스가 도주하게 됨으로써 그 사역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노덤브리아를 회심시키려는 다음 시도는 635년 아이오나에 있는 켈트 교회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켈느 교회에 로마 교회의 차이점 때문에 파울리누스는 이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432년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도착한 이후 그 지역에서는 복음이 번창하였다. 스코틀랜드 최초의 선교사는 397년 솔웨이 퍼스의 휘톤에 교회와 수도원을 설립하고 픽츠 지역에 복음을 전하여 먼 북쪽 지방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니니안이었다. 성 콜럼바는 563년 아일랜드에서 아이오나로 건너와서  전도자로서 정치가로서 수도원장으로 일하였다. 635년 아이단과 그의 친구들은 아이오나로부터 린디스판이라는 노덤브랜드 해안의 작은 섬으로 건너갔다. 30년 이내에 그들은 노덤브리아를 복음화 시켰다. 로마 교회와 켈트 교회의 차이점을 논의한 휘트비 종교회의(664년)에서 노덤브리아의 왕 오스위는 로마 교회측으로 넘어갔다. 그 이후부터 켈트 교회의 영향력은 영국에서 점차 약해졌으나 그들의 업적은 기억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현재의 벨지움, 네델란드와 북해의 독일 해안 지방으로 복음을 전했다. 네델란드는 윌리브로드의 노력으로 점차 복음화 되었다. 윌리브로드의 동역자이자 조수였던 윈프리드는 독일 복음화에 가장 중요한 존재자로서 보니페이스(선행자)라는 별명을 가졌다.  보니페이스는 기존의 있던 기독교를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그의 전도활동은 완강한 이교도들에게까지 미쳤다. 그가 주로 활동한 지역은 라인 강 동부와 다뉴브 강 북부 독일 지방에서 이었다. 교회는 계속 확장되었던 것은 아니다. 스페인은 이슬람의 손에 들어갔다. 이때 용사 펠라요는 단신으로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계속 전개 되었다. 챨스 마르텔은 모슬렘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쳐들어 올때 투르에서 승리하여 모슬렘을 스페인으로 몰아내었다. 이 승리를 거둠으로 서부 유럽은 모슬렘으로부터 보호되었다.
게르만 족들은 개종으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이 발생하였다. 기독교가 전파되자 이교도 신전들은 파괴되지 않고 변형되고 개조되어 그 존재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들은 귀신들과 영웅들을 숭배하였으나 이러한 것은 점차로 성모숭배로 고정되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신자들의 마음에는 성유물, 성직자들 등이 숭배와 성스러움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기독교에는 신화가 익숙하였다. 그리고 미사의식은 매우 중요시 되었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에게 고행이 행해졌는데 이는 속죄의 수단이었다. 고기독교는 모든 문회에 침투하여 법률, 결혼등에 그 영향을 주었다. 학문은 서로 유기적이기 보다는 산폐하여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어거스틴 주의자였으나 중세의 어거스틴주의를 외곡 변형시켰다. 그리하여 사회·문화의 전반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종교로 집약되자 로마 교회는 각 주교는 영지들과 사람들 위에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에 교황은 영적 권위자로 새로운 정치적 군림자가 되었다. 교황은 교황령의 성립이 되므로 신학에 관심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정치가로서의 임무에 더욱 치중하였다.

3. 교리상의 갈등과 동방교회의 분할(565~717)
동방교회의 수도사들은 칼세돈 회의에 의해 성립된 정통 신앙은 이단적인 것이며 이것은 칼세돈 이전의 해석을 통해 올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티베리우스 2세는 단성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탄압은 그가 죽자 종결되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하나의 조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동방교회의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페르시아에서 동·서방 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단성론보다 발전된 단일의지론은 동방제국이 페르시아와 이슬람을 막아내는 신학적인 시도였다. 제 6차 세계 종교회의에서 이 단일의지론은 정죄되었다. 이 논쟁은 종식된 것이 아니었다. 이 투쟁은 제국과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또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자마자 이슬람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은 기독교에 중대한 도전이며, 세계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마호메드는 622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갔다. 그의 도피를 뜻하는 헤지라는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었다. 메카로 돌아온 그는 아라비아를 통일하였다. 회교도들에 의해 교회는 수많은 피해를 입었다. 제국의 영토느는  축소되었고 교회는ㄴ 이미 쇠약해 졌다. 이 시대에 나타난 사회의 외형적 모습은 매우 종교적 열정이 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주민들의 도덕은 지나체게 뛰어나지도 않았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의식보다 더욱 세련되어 지고 보다 아름다워졌다.

4. 카로링가 왕조의 문예부흥(756~882)과 브리튼의 부흥(871~899)
이 시대의 사건들에 정치적 연속성을 주는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다. 제국의 통치는 중세의 봉건제도로 이어졌고, 교회는 샤를마뉴 이후내적인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샤를마뉴 치하의 서방교회는 교회의 관리와 치리에 관한 문제, 수도원 운동의 개혁과 부흥, 각종 교회 건물과 관습, 예배 의식과 예식등의 측면, 기독교의 교리의 측면, 학교 교육의 실시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기독교 책임감을 가지고 이교도들을 무력으로 선교하였다.
샤를마뉴의 종말은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고 제국의 약화는 교황의 강화를 의미하였다. 레오 3세 이후 니콜라스까지 7명의 교황들이 교황의 영적권위의 우세를 위해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동일하였다. 니콜라스는 교회의 약점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의 행동은 명백하고 단순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서유럽의 최고의 위치에 놓이게 하였으며, 교황의 위치는 만민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중앙유럽의 슬라브 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권위는 하늘을 찌릇듯하여 교황의 권위는 신앙과 신조에까지 미쳤다. 그의 재위기간 그래서 많은 거짓 칙령들이 나돌았다.
9세기 서구사회가 학문과 독창적 사상의 르네상스를 이룩했던 중심적인 인물들은 아달하르드와 왈라가 이끌었던 코르비 사원의 학자들이었다.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문제는 수도승 곳곳촉크에 의해 제기되었다. 교회는 그으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를 감옥에 투옥하였다. 예정론 보다 더 오래 끌었고 따라서 당시 학자들에게 더욱 심각했던 문제는 성찬식의 성격에 관련한 교리 논쟁이었다. 화체설의 교리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으나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학에 있어서는 이 시대의 풍조와 유리되어 있었다. 브리튼이나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에서 비롯된 각종 사변들은 요오크의 알퀸의 도움 아래 샤를마뉴에 의해 대륙으로 이식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 가운데 현재까지 그 작품이 전해 오는 유일한 존재로 신플라톤주의의 부흥의 대변인인 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가 있다. 그의 기본 명제란 곧 종교란 실제에 있어서는 철학이며, 마찬가지로 철학은 곧 종교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론은 그의 당대인들이 이해하거나 반박하기에는 너무나도 승화된 것이라 당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침략으로 브리튼의 문화 문명은 물론 종교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알퀸을 배출했던 요오크를 비롯하여 북학파들은 종족을 감추었고, 무지, 미신, 공포가 만연하였고, 수도사들과 사제들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치태를 보일 때 알프레드가 출현했다. 그의 뛰어난 두가지 업적은 첫째는 정치, 군사적인 공로이다. 그는 데인족을 몰아내고  서부 색슨 왕실을 중심으로 영국인들의 힘을 모아 국가를 건설하였다. 둘째로 그는 국민들 가운데 학문과 교육을 진흥시키고, 성직자들의 도덕을 개혁시켰으며, 종교 조직과 규율을 다시 세우고 종교의 모습을 되찾아 이를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제5장 8,9세기의 비잔틴 기독교(717-886)
동방 교회는 인문적 수준에서 서방 교회에 비해 앞서 있었다.
동방 교회의 황제들은 교회를 항상 자신들이 돌봐야 할 유산으로 생각하였으며, 스스로들을 교회의 조정관으로서, 신학자로서 간주해 왔다. 이에 따라 성상 논쟁 역시 황제였던 레오 3세에 주도되어 손자 레오 4세에 의해 계속되었으며, 결국 비공개 종교회의에서 일단 막을 내렸는데 이 과정을 통해 황실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원래 황제및 몇몇 주교들의 진정한 종교적 관심들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곧 가장 중대한 정치 문제로 발전한 것이었다.
우상 철폐론의 시대에는 다마스커스인 죤이라는 동방 교회 최대의 신학자를 배출하였다. 동방교회 최대의 신학자인 죤은 기독론과 인론의 해석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자유와 그 구원을 위한 피조물인 자신의 책임을 과도하게 강조했으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구세주라기보다는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을 제공하는 스승으로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그리스도의 위격이 주된 신학적 관심사였고, 그의 구속 사역은 별로 큰 관심을 끌지 않았던 동방의 전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또 그는 동방 교회의 출신답게 성스런 신비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영구한 처녀성을 주장하였다.
우상 철폐론에 의해 시달리던 동방 교회는 또한 바울 당파라는 분파에 의해 시달리게 되었다. 이 당파의 기원은 확실치가 않으나대적들은 이들 분파가 마니교로부터 비롯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그들 자신은 제 7세기 중반 프리마 지역의 콘스탄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방 교회는 그 세력을 확대해 갔으며, 헬라적 기독교의 영향력은 증대되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수도원주의 즉 수도사들의 헌신과 정열 때문이었다. 이들은 일반 대중들의 인기와 후원을 얻고 있었다. 이 시대의 수도원의 정신과 성격을 잘 대변하는 인물로는 스투디움의 테오도레이다. 그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공동체의 복리를 지향하느는 새로운 규칙을 시행하였다. 그는 수도원은 가능한 한 오직 총대 주교의 지시만을 받고자 하였다. 이 시대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수도원 역시 주교들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당시 교회의 대체적인 성격과 정신은 수도원적 경건주의로 표현될 수 있겠다.
이 시대의 동방 기독교가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한 주요한 두가지 사건들이 9세기에 발생하였다. 동방 기독교의 활력은 새로운 지역에의 확장및 선교 활동에서 찾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북방에 거주하고 있던 슬라브족들을 향한 헤라클리안 왕조의 관심이 있었다. 모라비아인들은 헬라인들로부터 복음을 요청했으며, 불가리아인들 역시 공식적 선교 활동이 시행되기 이전 기독교에 대한 복음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모라비아나 보헤미아가 아니라 불가리아가 그 후 슬라브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거나 이교도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선교 복음화에서의 헬라 기독교의 업적은 두 개의 추악한 분열에 의하여 훼손되었다. 이에 따라 발생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분열은 그 후 동방과 서방 기독교의 최고 결렬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의 장본인은 포티우스였다. 눈 앞의 이익에 눈이먼 니콜라스는 이그나티우스의 입장을 지지하여 총대 주교직에 선출된 포티우스를 탄핵하였고 동방 교회 전체에 대한 그의 판결을 선포하였다. 포티우스의 몰락은 서방 교회와는 무관하며 그것은 정치적 문제로 야기되었다. 포티우스 시대의 두 분열은 단순한 개인의 성격적 대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통일과 질서 로마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서방 교회의 국가 제도와 교회가 단지 국가의 일부였으며 국민들의 정치적 사회적 갈망이 예배를 통해 표현되었던 동방 제국주의의 대결이라 하겠다. 양자간의 차이들은 교리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포티우스 이후 동방과 서방의 결렬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제6장 동, 서방 교회의 분열(882-1081)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발생한 포티우스시대의 제 2차 분열까지도 외형적으로는 9개월 후 총대 주교의 퇴위와 함께 연결되었다. 교리 및 교회 정치에 관한 결정들은 양 교회의 참석 하에 세계 종교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소집은 콘스탄틴 시절과 마찬가지로 동방 황제들이 담당하였으나 항상 로마 교황들의 사후 동의를 받고는 하였다. 1054년은 서로 다른 경로를 따라 너무 오랫동안 흘러오던 기독권의 동·서방 교회는 서로 공개적으로 서로의 상이점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분열을 정당화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동·서방 교회는 거의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처럼 되었다.
세르기우스 3세의 등장과 함께 속칭 “도색 정치(포르노 크라시)”가 시작되어 거의 60년 동안만을 가르키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무능과 부패와 실패로 만연하였다.교황의 자리는 귀족의 놀이개로 전락하였다. 이 새의 전형적인 타락의 모습과는 달리 클루니 사원이 생기게 되었다.
독일 황가는 종교 문제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였으며 최소한 처음에는 교황들의 부정 부패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실질적인 독일 국가의 창시자인 오토 1세는 교황직을 국제적 위치로 올려 놓았다. 당시 프랑크와 영국은 국가를 위협하는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러한 생활은 교회 생활에서도 반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라임스 대주교 아달베로 와 켄터베리대주교 둔스탄은 교회 내의 혼란과 성직 매매 족벌주의 도덕적 타락, 수도원의 나태 및 탐욕 기타 이들 국가들에게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던 부정 부패들에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오토 3세의 사망과 함께 교황청에 대한 제국의 고삐도 늦추어졌다. 이러한 로마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는 이 시기에 약간의 진보를 경험하였다. 비록 전쟁은 법으로 금지되지 않았으나, 최소한의 기사도를 통해 이를 기독교화 하고자 하는 노력이 행하여 졌다.
어느 사회 기반보다도 동방 교회의 경건과 헌신을 대변하고 있는 수도원 운동은 이 시대에 그 세력과 영향력의 절정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을 통한 새신자의 획득이나 혹은 기독교 영향권의 확대 역시 눈부신바 있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황제 사이에 때때로 충돌이 있었지만 이 때문에 교회의 이익이 훼손 당하지는 않았다. 비잔틴 통치자들은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만큼이나 전통 신앙의 수호에 전력하였다. 로마누스 레카페누스황제때 한동안 독립을 유지하던 교회는 다시 국가에 종속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제국이 영토를 넓힘으로 그 영역을 넓혔다. 이처럼 헬라 기독교가 급성을 이루었던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면 러시아의 개종을 손꼽을 수 있다. 처음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들 가운데는 키에브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태후 올가였다. 또한 러시아 기독교의 진정한 창시자는 올가의 손자였던 블라드미르라할 수 있겠다.
11세기 중반 경 새로운 지역을 향한 기독교의 확장은 일단 중지되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이미 고식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최종적 분열의 구실로 양 교회가 제시한 종교적 이유들은 사실상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 였고 또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것이기도 했다. 분열을 낳게 한 장본인들은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마이클 세룰라리우스이었는데 세룰라리우스는 동방 교회를 제국 정부로부터 독립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불가리아 대주교가 작성한 선언문을 출판시키고 공개장을 교황에게 발송하므로 이 결과 동·서방교회의 분열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분열 직후 동·서방 교회에 발생한 영향들은 거의 동일하였다. 동·서방 교회들은 자신의 영향권 네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으며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제한과 감독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서방 교회에 있어서는 이 문제에 관해 일단 성공을 거둔 듯이 보인다.

제7장 용사들의 시대(1073-1124)
이 시대는 진정 용사들의 시대이다. 라틴 역사는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투쟁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헬라 역사는 특히 종교뿐 아니라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극심한 변화를 초래했던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었다.
25년간 힐데브란드는 수도사의 몸으로 서방 교회를 통치하였다. 그의 스승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 7세의 칭호를 선택하였다.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선출된 그레고리는 기독교권 전체의 개혁이라는 그의 이상을 추호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은 무엇보다도 성직자들 사이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즉각적으로 상당수의 성직자들의 반발이 있었다. 두번째로는 평신도들에 의한 성직 수임으로부터 교구들 및 교회 기관들을 해방시켜 교회에 대한 세속 권력의 간섭을 방지시킨다는 것에 있었다. 1075년의 로마 종교회의에서 그는 평신도에 의한 성직 수임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1076년 1월 24일 독일 웜스에서 독일 주교회의에서 그레고리를 정죄하였으며 파문까지 행했다. 그레고리는 헨리왕을 파문시키고 프랑스 국민들에게 그에 대한 충성을 해제시켰다. 헨리 4세와의 대결로 국제 정치 무대에서 그레고리 7세는 중세의 도덕적 영웅으로서 우뚝 섰다.
유럽의 관심은 동방 모슬렘제국을 향한 서방 기독교의 군사 원정으로 옮겨져 갔다. 동방 제국의 변화는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고난을 겪게 하였고, 거룩한 나라 이스라엘로부터 이러한 신성모독을 제거하고자 하는 종교적 열정에 불타게 되었다. 1081년에 즉위한 동방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서방에 새로운 지원병들을 요청하고 종교를 이용하기 위해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였다. 교황 우르반 II는 원정을 위해 서부 유럽이 연합하면 기독 교권의 통일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제 1차 십자군의 원정은 곧 터키인들에 대한 제국 영토의 확장을 의미했다. 알렉시우스는 니케아 함락 후 최 남단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소아시아 지방의 전체 해안을 다시 정복하였다. 그는 그가 판단하였던 교회 및 제국의 이익을 위해 과격한 방법도 불사하였다. 서방인들이 항구적으로 자기들의 영주국들과 국가들을 설치한 성읍들과 지역에서는 동방 교회가 역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권에서 가장 오래되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예루살렘에서는 라틴 예식이 헬라적 의식들을 대체하였다. 제 1차 십자군의 원정으로 인하여 자기와 다른 종교 형태와는 기꺼이 경쟁을 불사하는 보다 적극적 라틴 기독교적 요소가 동방에 유입되었다. 또 로마와 콘티탄티노플사이의 분쟁으로 시작된 동서방 교회의 분열은 동방 제국 전체에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해외에서 십자군 제 1차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우르반 2세의 정력적인 11년간의 통치는 이미 서방 국민들의 관심이  교황청과 제국간의 분쟁으로부터 떠났지만 여전히 내부에서는 성직 수임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터지기 시작하였다. 최종적으로 평가해 볼 때 그레고리 7세의 원칙들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서부 유럽은 예배와 신앙의 소박한 꽃을 피움으로 경건의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 결과 수도원 운동이 활짝 꽃피게 되었다. 수도원 운동의 진정한 만개는 12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수도원적 경건성이 미친 영향은 교황청의 조직및 권위를 강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 정신에 의해 일반인들의 세속적 권익까지도 증진되었다. 사제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실행하기 위하여 교구들을 조직하였다. 수도원주의는 따라서 사화복음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며, 결국 이러한 혁명적인 경향은 마침내 봉건제도를 타파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수도원주의의 부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스콜라 학파라 불리던 새로운 철학의 발흥과 이 학풍이 신학의 발전 및 기독교 교리의 정립에 미친 영향이다. 이는 처음에는 순수한 방법론으로 시작되었으나 결국 그 경계 내에 시간과 존재를 포함하는 거대한 체제로 발전하였다. 11세기의 Anselm 과 12세기의 피터 아벨라르드의 천재에 의해 변증법은 신학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Anselm은 이를 통해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라 불린 반면 아벨라르드는 이단으로 정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Anselm이 기독교를 비합리주의와 비논리적이고 자기 모순적 명제로 인한 부조리로부터 기독교를 구했다는 점만은 평가되어야 한다.

제8장 제12세기(1124-1198)
제12세기에 혁신을 이룬 약 75년간의 기간은 아마도 변동의 시기라고 불릴 수 있겠다. 이 시기에 다음 세기를 장식한 찬란한 문명을 예기할 정치적·문화적 르네상스를 경험하였다.
동방 교회와 제국은 12세기에 두차례의 서방으로부터의 십자군 원정에 시달렸다. 교황 파스칼2세와 알렉시우스 콤네누스황제 사이에 시도되었던 동서방 보편 교회의 재결합을 시도를 위한 회합은 결렬되었고, 12세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었다. 재결합 시도는 역시 비슷한 길을 걸어갔다. 1146년 부활절에 행해진 버나드의 설교에 자극을 받아 시작된 제 2차 십자군 원정은 다른 부위기로 흘러갔다. 동방 황제는 이들을 적대시하였고, 군사적, 정치적으로 대외적인 실패였다. 12세기는 비잔틴제국 내에서 문학적 예술적 활동이 고조되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동방과도 대조적으로 12세기의 서방 기독교권은 중세 전체에 걸쳐 가장 절정에 달하기 직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버나드의 시대는 혁명적인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모든 혁명적 경향에 대항하였다. 그야말로 사회·정치·종교적 보수주의의 방파제였다. 그는 교회와 국가에 걸쳐 기성 체제를 유지하였다. 그의 보수적인 신학의 영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그는 개인적 경건성에도 불구하고 이단들을 끝까지 처치하곤 하였다. 그의 열렬한 설교를 통해 제 2차 십자군의 원정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패배로 끝나자 그 결과는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의 결과라고 확신시킴으로써 이러한 군사적 실패를 영적 승리로 전환시켰다.
보나드 이후 절대주의를 부르짖은 두 명의 군주들이 나타나 그가 이룩한 업적을 무효화 시키고자 하였다. 먼저는 독일의 프레데릭바바로싸 혹은 ‘붉은 수염’였고, 다른 하나는 영국 헨리 2세였다. 17년 동안이나 교황과 황제 사이에는 전쟁이 계속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알렉산더 3세가 프레데릭 1세를 물리치게 되었다. 교황은 각 지방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독립과 자주를 열망하던 도시들을 자극하는 작전으로 황제를 대항하였다. 독일의 강성을 두려워했던 프랑스 역시 교황의 편을 들었다. 비록 프레데릭은 계속해서 3명의 반교황을 선출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다른 군주의 도움은 일체 받지 못하였으므로 알렉산더에 대항한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독일 황제는 제3차 십자군의 원정을 떠남으로써 38년의 긴 제위 기간을 끝맺었다.
헨리2세는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집사였던 토마스를 수상직에 오르게 하고 또 켄터베리 대주교에 선출되도록 함으로써 문제는 일어났다. 그는 완전한 권력을 교회에 행사하고자 했고 그는 성직자가 수도사들에게 세속의 법을 적용할 것을 주장함으로 5년간의 분쟁이 야기되었고 왕의 기사가 대주교를 살해함으로 끝 맺게 되지만 왕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과 증오가 너무 커서 결국 잉글랜드 헨리 역시 교회의 의지에 고개를 숙였다. 12세기의 교황청은 성공적으로 세속 왕국들의 문을 열므로써 13세기의 교회가 그 안으로 진군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교회는 또한 내부에서 일어난 이단으로 괴로움을 겪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은  그 옛날 마니교와 동방 제국에서 일어났던 바울당파의 중세적 표현이라 볼 수 있는 카타리였다.그들의 모든 선행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순교자로서의 죽음이었다. 카타리파는 기성 성직 체제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출석을 거부하였으며, 기존 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 재판은 이 카타리를 분쇄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는데 종교재판법은 교황 루시우스 3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그는 이를 통해 위험지역의 주교들이 최소한 1년에 한번씩 교인들을 검사하고 모든 교인들이 선서 하에 그들의 전통성을 고백할 것을 의무화시켰다.
예루살렘이 이교들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윌리엄은 성지를 수복할 것을 맹세하였다. 서방에서 제일 강력한 프레데릭이 제 1차로 진군해야 하였다. 그는 역사상 가장 잘 장비를 갖추고있는 대군을 이끌고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그는 죽고, 아들이 이어받았으나 역량부족으로 고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그 결과 원정의 무거운 짐은 영국과 프랑스 인들의 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제 3차 십자군의 원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사르트르 학파의 최초의 인물은 길버트 드 라 폴레, 그의 뒤를 계승한 티에리, 샤르트르학파의 마지막 인물인 살리스베리의 죤 이들의 기본적인 개념은 플라톤적이었다. 성빅토의 리챠드는 12세기 신비주의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용어로 삼위일체를 해석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제12세기에는 또한 상징성이 극도로 중시되었다. 성경의 언어들과 사건들은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이를 통해 보다 은밀한 그 무엇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탐구되었다.

제9장 지상의 전투 교회(1198-1303)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헬라 교회의 몰락을 초래한 중요한 요소들은 서방으로부터의  십자군 운동이었다. 십자군의 원정은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하였으며 반면 이슬람은 그 세력과 그 영향력이 최고도로 부흥되었다. 또한 서방 교회는 최고의 절정을 이루었는데 반해 동방교회는 가장 낮은 위치로 전락하였다.
이노센트 3세는 그의 임무를 크게 네가지로 볼 수 있다. ① 교황령을 내외부적 간섭으로부터 해방하여 직접 감독하도록 하는 것. ② 사회 일반, 특히 신성로마제국을 로마교회의 정책에 맞추어 재구성함으로써 국민들과 아울러 정부들을 로마의 교구의 감독 아래 두는 것. ③ 이단을 물리치고 순수한 교리를 보장하며 올바른 치리를 행하는 것. ④ 모슬렘 이교도들의 세력에 대항하여 기독교 영향권을 확장하는 것 그리하여 이 네가지 범주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노센트 3세 시대에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탁발 수도회들의 출현은 당시 사회가 처했던 도덕적 ,영적 욕구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체의 세속을 떠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찾고 남들에게 낭누어 주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명예를 포기 하였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찾고자 하던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학문을 기초로한 중세 최초의 수도회였다. 각 수도사는 오직 복음에 의해 생활할 것이며, 아무것도 소유해서는 안되었고 처음부터 학문과 설교의 중요성을 부정하였으므로 그 전도의 방법은 교훈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다. 프란시스와 도미니크는 전세기 수도원 운동에 관련된 제 3종 수도회의 계획을 실행하였다.
어린이 십자가 운동이 이노센트의 치세중 실시 되었으나 이는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였다. 이노센트가 계획하였으나, 실제로는 노령의 호노리우스 3세에 의해 실행했었던 제5차 십자군 원정은 실질적으로 두 개의 독립된 원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5차 십자군의 원정이 실패로 끝났다. 프레데릭 치하의 6차원정도 실패하였다. 국가 정책이기에 어쩔 수 없이 원정을 일으켰고, 교회의 저주를 받으며 출발하였다. 그 원정은 외교로 이루어졌다. 루이 9세의 7차 원정도 역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 시대의 라틴 교회의 변천은 헬라 교회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노센트 3세는 한창 일하 나이에 객사하고 말았고 그의 뒤를 이은 교황도 나이가 많앗다. 동방 기독권이 분열되는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서방 교회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호노리우스3세, 그레고리9세 이후 군주뿐 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로부터도 교황은 경원과 미움을 받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유명한 아나그니 폭행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10장 서방 중세 기독교 문명의 극성(1198-1321)
제 13기의 스콜라 학풍은 완전히 교회에 속한 것이었다. 13세기 철학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탁발 수도회원들이었다. 아퀴나스는 스콜라 철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그의 이후 철학의 주류는 종합을 중요시하는 데서부터 개별에의 경향으로 흘러갔다.
새 철학은 진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견이 이루어  가능하였는데 서방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접근을 이룬 최초의 인물은 신학자 오버뉴의 윌리암과 과학자 로버트 그로세테스테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의 지적 동반자로 발견한 것이 아퀴나스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였다. 중세 라틴 신학은 아퀴나스와 스코투스를 통해 헬라 신학이 제 8세기에 도달하였던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철학과 신학에 의해 대변되었던 교회의 내적 생활은 예술과 음악을 통해 외적으로 표현되었다. 고딕 예술의 가장 뛰어난 모습은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고딕 성당의 가장 큰 특색은 그의 건축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비 및 도덕극의 형태가 나타났다.
13세기에는 법률이 백성들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공식적 기관으로서의 병원은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해 13세기에 시작되었다. 나병 전문 수용소도 등장하였다. 각종 전문 직업 길드들은 회원들의 작업 조건을 개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들은 정치적 특권까지 요구하게 되었다. 상업은 13세기에 지방, 혹은 국가적 차원을 초월하여 발전하였다. 한자 동맹은 중세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국제 교역 기구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13세기에는 법률이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제정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점진적이었으나, 국민들을 위한 크나큰 혜택이 되었다.
고등교육의 발전에 의해 혁명적인 단계를 이룩한 대학교들이 출현하였다. 대학교는 구조상 각종 직업 길드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중세가 남겨준 가장 소중한 재산은 대학이라 할 수 있다.
제11장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전의 기독교권(1303-1453)
보니페이스 8세의 죽음과 콘스탄틴 함락 사이의 150년간은 중세의 최후를 기록한다. 동방에서는 그 파괴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서방에서는 종교개혁과 아울러 여러 국가 및 다양한 교파라는 새로운 형태으 재구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교황청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던 서부의 사회적 통일성은 민족주의의 이름 아래 무너졌으며 여러 국가들은 서로 경쟁하였다.
14세기 15세기 전반의 교회의 모습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우유부단과 경솔함 충돌 등으로 일관되었다. 헬라와 라틴의 통일 노력에 공시적인 통일은 이루어졌으나 폭동들이 발생하였고 영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제국의 영토 축소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 주위의 제한된 종교활동은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열심당”과 “정치파”들 간의 투쟁으로 한층 격화되었다.
 프랑스의 민족주의의 발흥과 급속한 교황청의 약화는 같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실질적으로 73년간이나 교황들은 프랑스 왕들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던 이 기간을 가리켜 흔히 교황청의 바벨론 포로 시대라고 불린다. 이 기간에 교황들은 로마를 지키지 못하였다. 그레고리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귀한 시킴으로 바벨론포로시대는 끝난다.
교황청이 로마로 귀환한지 채 2년도 안되어서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들 사이의 불화로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각국의 이해 관계가 얽힌 정치 외교 문제들이 이에 관련되어 있었다. 그 결과 라틴 기독교권은 크게 양분되어 하나는 로마에, 하나는 아비뇽에 충성을 바쳤다. 교황청 통일의 계획은 대학교들 특히 파리 대학교와 이에 속한 신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이는 결국 서방 교회의 보편 종교회의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교황청보다 우월한 권위가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분열의 해결은 교회의 상실된 건강과 활력을 되찾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 시기의 종교회의 뿐만 아니라 사고 형태들은 교회가 하나의 기관으로서 경험하였던 과정들과 맥락을 나누고 있다. 특별히 독일의 경우 신비주의가 융성했다.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책이 나타났는데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죄인들의 경험과 예수님의 행동을 본받기를 강조했던 신비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이들과 같은 시기에 성례 중시 주의를 통한 종교의 형식화가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을 포함한 일반 신자들은 성례 중시 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고행을 지나치게 중시하였고 이러한 영향은 죄를 고백하고 약간의 돈만 내면 일체의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가 나타나게 되었다. 13세기와는 달리 이 시기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성을 신앙의 동맹자로서가 아니라 그 대적으로 파악했다. 성직 제도의 해석에 있어서 판이하게 달랐으며 기독교권의 회의장에서는 이제 사제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도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당시 기존 교회의 교리,조직 ,치리 등에 관한 영국의 죤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죤 후스들이 발한 비판들은 비록 당대에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할 지 모르지만 후세에 미친 영향은 훨씬더 중대한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교황 제도를 공격하였고 성경적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화체설을 부인하였다. 또 그는 가난한 사제들을 보내어 일반인들의 복음화에 노력하였다. 죤 후스는 교회 자체의 교리 개혁을 요구하였고 면죄부에 관한 그의 의견은 종교회의에 의해 이단으로 판결하여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는 당시 발생 초기에 있던 보헤미아 민족주의의 종교적 상징이 되었고 그가 주장한 교리들은 전체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였다.
교회의 분열과 고위 성직자들의 부정 부패,철학적 회의주의 그리고 종교 문제에 침투하였던 민족적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카톨릭 교회에 기존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업적은 가히 기록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선교 활동은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 활동들은 13세기와 뚜렷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때의 계획들이 후에 열매를 맺은 것들이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업적이라 한다면 플로렌스 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일시적 교회의 통일이라 볼 수 있다. 교의로서 정립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성례에 관한 교리들이다. 성례 제도의 정립은 중세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의 업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성례의 숫자는 일곱으로 고정되었는데 이들 성례들은 그리스도 사역의 결과이며, 역사 속에서 그의 고난을 계속 지키고 이에 따른 혜택을 신자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중세는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

 

제 1 장 총  론

 

     1. 종교의 필요성

   · 제임스(Wm James, 1842-1920, 미국의 심리학자, 절학자) - '믿으려는 의지'가 있다.

   · 구약 전도서 - '하나님이 ……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3:11 하반)고 갈파.

   · 어거스틴(참회록 1장 1절) - "하나님은 인간을 다만 당신을 위해 만드셨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당신에게서 안식을 얻기 전에는 참 평안을 가지지 못하나이다."

   · 시편(42:1-2)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고"

   이와 같이 인간 심령의 심각한 요구에 응해 주는 것인 만큼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2. 종교의 기원과 발달

   원시 미개인에게는 고상한 도덕적, 정신적 욕구보다는 물질적 욕구가 지배적이었던 만큼, 그리고 그들이 그 물질적 욕구를 만족 시키려 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역량이 부족하므로, 초자연적이며 초인간적인 존재의 힘을 빌고자 하였던 동기에서 발생한 종교는 인류 문화의 다른 사건들과 함께 종교도 저급의 상태에서 높은 데로 발달하여 왔다. 그리고 종교의 발달은 신관의 발달과 병행한다. 따라서 신관의 발달은 동시에 종교의 발달이기도 한다.

· 종교적 신앙 즉 신관의 발달

   (1) 마나설(Manaism) - 자연물, 인간, 사건 등에 접하여 있어서 비상한 행동이나 사건등에는 '마나'라는 신비한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 것.

   (2) 정령설(精靈說, Animism) - 자연의 흐름 속에 사람의 혼령 혹 생명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 중 어떤 것들로부터 원조를 받으려 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하는데서 종교는 생겨 낫다고 보는 설.

   (3) 주물 숭배(呪物崇拜, Fetishism) - 나무 조각, 조개 껍질 등의 것에 신이나 신비한 마력이 있어 사람에게 화나 복을 내린다고 믿는 것.

   (4) 주술(呪術) 혹 마술(魔術, Magic) - 요술 사가 신비한 영력을 부리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행동을 가리킴.

   (5) 토템(Totem)숭배 - 자기 조상이 식물 혹 동물에게서 나왔다고 믿어 그것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

   (6) 자연숭배 - 자연물들은 인간보다 더 지혜와 힘이 있어서 인간에게 화와 복을 줄 수 있다고 믿어 그것을 숭배하는 것. (천, 지, 일, 월, 성신, 비, 바람, 불, 물 등)

   (7) 다신교(多神敎) - 이 세상에는 무수한 신들로 차 있다고 믿는 것. (山神, 太陽神, 雨師, 風伯, 月神, 星神 등등)

   (8) 조상숭배 - 인간의 조상을 숭배.

   (9) 만유신교(萬有神敎) 또는 범신교 - 만물은 다 신이요 신은 만물이라고 보는 신앙.

   (10) 유일신교(唯一神敎) - 가장 발달되고 합리적이며 인간의 심령에 최고의 만족을 주는 신관. 단일신교(單一神敎) - 여러 신중에서 한 신만을 택해서 섬기는 신앙.

   (11) 인도교 혹 인간교(Humanism) -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 신의 실재를 인정치 않고 인간과 또는 그가 품은 이상과 최고의 가치를 신앙과 노력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상.

     3. 종교의 분류

   ·첫째 분류법 - 부족적 종교, 국가적 종교, 세계적 종교

     - 부족적 종교 ; 각 개인의 소관사라 함보다는 부족 전체의 소관사.

     - 국가적 종교 ; 부족이라는 작고 좁은 형태에서 국가적인 규모로 발달.

     - 세계적 종교 혹 예언자적 종교

        ; 신관은 세계적이며, 동시에 개인주의적이며, 형식적인 것 보다 윤리적이며, 의식주의적인 것보다 신비주의 혹 정신적이다.(불교, 기독교, 회회교)

   ·그 밖의 분류법 - 자력교와 타력교, 현존 종교와 사멸 종교

 

     4. 종교란 무엇인가

   ·통속적 정의 ; 종교는 사람이 자기가 지존자 혹 최상자라고 믿는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숭경(崇敬)의 태도이다.

 

     5. 현존한 종교들

        

표1 (미개인이나 후진국에 유행하는 민간신앙을 제외한 현존 종교)
 종교명
 창시연대
 창시자
 신도수
 
힌두교(인도교)
  2000∼1500 B.C.
 없음
 230,150,000
 
유대교
        1275 B.C.
 모세
 15,315,359
 
신  도
         660 B.C.
 없음
 25,000,000
 
자라투스트라교
         660 B.C.
 자라투스트라
 50,000
 
도교(노자교)
         604 B.C.
 노자
 50,000
 
자이나교
         599 B.C.
 마하비라
 1,610,000
 
불  교
         560 B.C.
 석가모니
 150,180,000
 
유  교
         551 B.C.
 공자
 300,000,000
 
기독교
           4 B.C.
 예수
 900,000,000
 
회  교
         570 A.D.
 마호메트
 315,000,000
 
시크교
        1469 A.D.
 그루 나낙
 6,210,000
 
천도교
        1860 A.D.
 최제우
 3,000,000
 

 

     6. 비교 종교 연구의 태도

다른 종교를 연구함에 있어서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태도로서 다른 종교의 장점을 찾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도바울 -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 버리라"(살전5:2-22)

   ·저스틴 - "모든 사람이 올바로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재산이 될 것이다."

 

 

제 2 장  인 도 교(Hinduism)

 

·신도 - 인도 전 인구 3억 9천만 중 2억 3천만

·특색 - 계급 제도(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인도교의 발달 - 여러 시대를 통해서 여러 사람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하여 발전된 종교.

 

   1. 초기 자연 숭배기 (1,000 B.C.)

·산출된 경전(Veda경) - ① 시경 ② 성례전 ③ 성가 ④ 주문

·신앙의 대상 - 신격화한 자연물 천체(天體) 76종, 이 중에 가장 중요한 신은 '인드라'(Indra, 공기와 비의 신) 이다.

 

   2. 제사 시대 (1,000 - 800 B.C.)

·산출된 경전 - 브라마나스(祭典) ; 각종 제사 법과 전설이 실려 있음.

·제사장을 존중하였으며, 절대의 권위자로 인정되어 베다 시대의 신들도 제사로 말미암아 불멸의 신이 되었다고 함.

 

   3. 철학 시대 (800-600 B.C.)

·산출된 경전 - 우파니샤드

·중심 사상 - '부라마'신 사상

 

   4. 계율 시대 (250 B.C.)

·산출된 경전 - '마누'법전

·마누에 의한 구원 방법 - 계율의 준수, 계급 제도의 엄수

 

   5. 경신(敬神)시대 (1 A.D.)

· 산출된 경전 - 바가바드 끼타

·구원은 계급과 지위를 막론하고 '크리쉬나'신을 전심으로 공경함에 있다고 봄.

 

   6. 통속적 인도교 (1-250 A.D.)

·특색 - 인도교가 통속화된 것과 지금까지의 각 시대의 특점이 종합된 것.

 

   7. 인도교의 개혁 운동 (557 B.C. - 1917 A.D.)

   (1) 첫 개혁 운동 - 귀족 출신인 마하비라가 기원전 557년에 시작. 개혁의 요점은 브라만 계급의  배타적 정신, 지나친 베다경 숭배, 무자비한 동물 제사, 우파니샤드 철학의 일원론 반대 등. 자이나교 창설

   (2) 제 2의 개혁 운동 - 기원전 548년에 귀족 석가모니에 의해. 세습적 계급 제도, 제사장에게 드리는 공물에 의한 구원, 지나친 철학적 사색, 의식주의, 알지 못할 고대어 경전을 중시함에 반대. 불교를 낳게 함.

   (3) 티루발루바(Tiruvalluar) - 하층계급의 사람으로 기원후 800년경. "신의 은혜에 의하여서만 구원을 받는다" 함.

   (4) 망카바사가 - 하층계급의 사람. 구원은 신의 은혜의 선물임과 죽은 후의 영생을 가르침.

   (5) 라마누자 - 브라만 계급의 사람(12세기). 인격적 신 주장, 계급주의와 여성 멸시의 사상을 반대.

   (6) 라마난다 - 14,15세기의 사람. 구원은 신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라마신의 무차별적 사랑을 말 함.

   (7) 나낙(1469-1538 A.D.) - 제 3계급의 사람이며, 회회교의 영향 아래 인도교와 회교의 신을 동일시. 시크교가 생김.

   (8) 다두(1400 A.D.) - 인격적 유신 사상을 말함.

   (9) 람 모훈 로이 - 브라만 계급이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개혁을 주장. 신약 성경 발췌 집을 발행하여 평화와 행복의 지침인 예수의 교훈 이라 함. 그는 1828년 '브라마 사마아지'운동을 일으킴(타고오르와 깐디등이 이 운동에 참가)

 

   8. 결 론

    

표2 인도교의 장단점
 장


  전 우주에 편재한 최고의 영적 실재에 대한 신앙과 이 신에 대한 지식과 이 신과의 합일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응을 받는다고 믿는 인과응보 신앙등.
 

 


 신봉하는 신의 인격성을 인정치 않으며, 인생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치 않는다는 점. 현실 세계를 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결점은 계급 제도이다. 그러므로 인도교는 우리에게 가장 만족한 종교라 하기 어렵다.
 

 

 

제 3 장 자이나교와 시크교

 

【1】자이나교

 

   1.자이나교의 창설자

   ; 마하비라(인도 제2계급의 인물)는 30세시 그 부모가 별세하기까지는 극도의 호화스런 생활을 하다가 입도한 후 수도 생활을 하기 13년간 비상한 난행고행 끝에 성도 하여 열반의 경지에 이르름. 성도후 수도사의 은둔생활에서 나와 72세의 임종까지 그의 깨달은 도를 선포하기에 전력을 기울임.

 

   2. 경  전

   '아가마스'(계율의 뜻)라는 것인데12편으로 됨. 대개는 그의 서거후 200년 이후에 기록된 것. 경전을 이해하는 교도는 많지 않으며 일부만 매일 규칙적 읽을 뿐임.

 

   3. 교  의

   (1) 신관 - 인도교의 신관을 배척하며 기도를 부인. 다라서 사라미이외에 다른 숭배할 존재를 인정치 않음. 그러나 후일에 교조 마하비라 자신이 신격화되어 교도의 숭배의 대상이 됨. 

   (2) 인생관 - 인간관은 이원론(사람은 악한 물질과 영원한 영으로 구성)임.

   (3) 인과율 - 인도교의 인과의 법칙과 윤회 전생설을 믿음.

   (4)구원관 - 영이 육에서 해방 받는 동시에 우주적인 인과율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

   (5)윤리관 - 개인적으로 극단적인 금욕주의 강조. 사회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대한 사랑과 미움, 동정과 냉담, 협조와 손해 끼침 등을 초월해야 한다고 함. 마하비라가 그의 교도들에게 오계(불상생, 불망어, 불도취, 금여색, 금집착)를 줌.

   (6) 사회 생활 - 자이나교의 독신자가 되기 위해 속새 생활 절대 불가능. 승가 제도                      창설하여 공동생활.

 

   4. 자이나교의 종파

   ·백의파 - 여성의 수도와 구원을 인정하며, 여성을 위한 사원을 허락,

   ·탈의파(공의파) - 여성의 구원을 인정치 않음. 남자로 환생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                        다고 봄.

 

   5. 자이나교의 현황

   ·분 포 - 인도 북부, 서부, 남부에 분포.

   ·신 도 - (1951년 인도 정부의 집계) 1,618,406명

   ·교 세 - 국내외에 확장하고자 선교 활동을 일으키고 있음.

 

   6. 결  론

    

표3  자이나교의 장단점
 장


  교조의 숭고한 인격과 종교적 정열, 교도들의 종교적 목적을 위한 자기 부정의 정신, 인도교와는 달리 영혼과 육체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점, 생명 존중의 사생과 함께 동물 애호의 정신, 계급 부정 등.
 

 


  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신을 부인, 자력 구원의 신앙, 지나친 금욕주의, 정상적인 감정까지 부인, 여성을 죄악시 하는 점. 무엇보다 자이나교의 구원의 목표인 열반은 불교의 그것과 함께 가장 소극적 일뿐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며, 장려해야 할 만한 정서 즉 사랑, 동정심까지 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은 이해 불가능한 교리임.
 

 

【2】시 크 교

 

   1.시크교의 창설과 전도

   ·창시자 - 나낙(1469-1538 A.D.)마틴루터와 동시대의 사람. 그는 인도교와 회회교를 혼합하여 한 새 종교를 만든 것이다. 그는 득도 이후에 그의 종이던 회교도 마다나를 악사로 하여 그와 함께 여러 곳으로 전도 행각을 하였으며, 만년에는 서쪽으로 아세아와 아라비아의 회회교 성지 메카에까지 선교 여행.

 

   2. 시크교의 경전 

   ·그랜드 - 기독교의 시련과 잠언 같은 책. 제일 대 교조 나낙과 그의 후계자들의 언행록과 기도시. 9대,10대 교도의 교훈과 회회교와 인도교의 저명한 현자들의 교훈을 수록.

 

   3. 교 리

   (1) 신관 - 유일신 신봉

   (2) 세계관과 인생관 - 전능하고 영원한 신관에 비하여 이 세계는 공허하며 순간적이며, 인간은 무력한 존재이며, 신에게 복종해야 할 창조물이라고 믿음.

   (3) 구원관 - 신에 대한 지식이나 신을 얻는 것이나, 신에 몰입되는 것인데, 인간은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구원은 신의 은총에 의하여서만 얻어진다고 봄.

   (4) 예배 의식과 제도 - 그들의 신을 명상하는 것(반복구송), 우상 숭배와 제사를 극력반대(그러나 그들은 경전을 경배함). 구루(선생)를 통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믿음.

 

   4. 시크교의 발전과 현황

   ·구루 나낙에 의해서 창시된 시크교는 2세기 동안 10의 구루들에 의하여 발전/변모 되어 옴.

   ·교도 수 - 6,219,134(1951현재)

   ·신전의 대부분이 파키스탄에 있어서 회교도와 갈등과 충돌이 격심.

 

   5. 결  론

    시크교는 인도교와 회회교를 종합한 종교이므로 독특성은 거의 없다.

     표4  시크교의 장단점
 장


  교조 나낙의 숭고한 인격과 종교적 열정과 높은 전도열, 철저한 유일신 사상,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 점, 배움을 중요시한 검, 그들의 강력한 교단 조직 등.
 


  현실 세계를 환영으로 보는 점, 경전 자체를 우상화 하는 점, 구원의 방법 중 신의 이름 자체에 신통력 있어 구송함을 중요시한 점, 개아의 영이 우주에 몰입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점등.
 


 

 

제 4 장   불   교

 

   · 창 설 자 : 석가모니

   · 신앙대상 : 원래는 신을 인정치 않았으나 후에 불타 자신이 신앙의 대상이 됨.

   · 현    황 : 1억 5천만(1953년 대영 백과 사전)의 신도. 동남아 지역, 버마, 타이세일론에 퍼져 있으며, 티베트에는 라마교 형태로 유지, 중국, 한국, 일본에 큰 세력을 가짐.

   ·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시대 이르러 '숭유 억불'정책으로 탄압 받아 깊은 산 속에서 명맥을 유지.

 

   1. 교조, 석가모니(560∼470 B.C.)의 생애

   석가모니는 기원전 560년 4월 8일 북인도 가비라성 주 정반왕의 태자로 태어남. 본명은 실 달다. 19세에 결혼하여 10년간 지내다가 아들을 낳았고, 29세에 우울한 그의 심회를 잊어 보고자 사유 문관을 하였다. 궁중에서 세고(世苦)를 모르고 자라난 그는 큰 충격과 번민을 가지게 되는 동시 자신도 결국 사유문관시 본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인생 고에서 해탈 방법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왕자의 영화와 처자를 버리고 수도사가 외었다.  처음 그는 자이나교의 금욕주의와 난행고행으로 인생 고에서의 해탈을 얻어 보려 했다. 이렇게 수도하기 6년 마지막에 하수가 보리수 아래 단정히 앉아 7일간을 고요히 깊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그는 크게 깨달음이 있어 그로부터 그는 일체의 번뇌에서 놓임을 받고 무상 정각을 성취하여 불타(깨달은 자)가 되었다고 한다.

   성도후 4년 출가한지 10년만에 귀향하여 자신을 꾸짖는 부왕을 불법으로 설복하였으며, 그의 아내 야소에게 설법하여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라골라도 불문에 들어갔다. 그는 그의 전도로 얻은 60제자를 각처로 보내어 그가 깨달은 해탈의 도리를 널리 전하게 하였다. 그는 유능한 포교자 였으며, 그의 설법과 비유 중에 예수님의 비유와 유사한 것들이 많이 있다.(탕자의 비유, 씨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등)

   향년 80세에 노쇠하고 병들어 설법하다가 임종(기원전 480년 2월 8일)하였는데, 그가 최후에 남긴 말은 "만상은 후패하니 너희들은 마음을 경계하고 잘 지키며 근면하고 정진하여 '법'을 잘 수행하라, 그리하면 생의 고해를 무사히 건너가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2. 불교의 교설

   (1) 무상정각

      ; 불타가 깨달은 부상정각 - 4聖諦(苦, 集, 滅, 道)

   ·고체(苦諦) - 모든 존재는 고 아님이 없다.

   ·집체(集諦) - 고의 원인을 구명하는 것. ; 불교에서 고의 원인을 업(業)이라 함.

     ⇒ 업(業) : 사람이 한 번 만든 업은 인과율의 철칙에 의하여 현세나 내생에서도 업보(業報)를 받는다. 이 업을 멸하기 전에는 고계(苦界)에 윤회전생한다. 그러므로 악업은 물론이고 선업 가지도 멸하지 않으면 열반에 이를 수 없다.

   ·멸체(滅諦) - 고의 원인인 무지와 욕망을 없애고 업을 멸하여 윤회 전생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남으로 나고 죽는 경지에 벗어나 진지에 도달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

   도체(道諦) - 고의 원인이 되는 무지와 미망과 온갖 욕망과 업보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가는 방법. 팔정도를 지킴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룬다 함.

   ⇒팔정도(八正道) : 정견, 정지(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렴, 정정. 이 팔정도는 고행과 및 향락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한 수양의 방법으로서 불교의 중요한 계율.

   (2) 삼법인(三法印)

   ·불교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설파하는 교의

   ·삼 범인

     ① 제행무상 - 우주 만상은 다 무상 즉, 영원하지 못하자는 뜻.

     ② 제법무아 - 우주 만상은 영원하지 못하므로 나 라는 존재도 영원성을 가진것도 아니며 실재도 아니라는 것.

     ③ 열반 적정 -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깨달으면 생로병사의 경지에서 벗어나 일체의 근심, 슬픔 고뇌는 구름인 듯, 안개인 듯 사라져 버리고 마침내 평정 안일의 정지, 아무 구속 없는 상태 이른다는 것.

     ④ 범인 - 진리를 말함

   (3) 인연관(因緣觀)

      ; 삼법인과 병행하여 우주 만상의 연관 관계를 구명하여 무아의 이치를 설명한 것.

   (4)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

      ; 우주간에 편재한 '행동의 법칙'으로서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비인격적인 것이요 공정 무사한 도덕적 보응의 원리.

   (5)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

사람이 열반에 들어가기 전에 끝없이 삼계(욕계,색계,무색계)와 육도(천상,인간,축생,수라,아위,지옥)를 윤회.

   (6) 열반(涅槃)

불교의 이상경이며 기독교에서의 천국, 삼계육도를 윤회하지 않는 경지. 아무런 속박과 거리낌이 없는 절대 평등, 절대 안일의 실체에 돌아가는 것.

   (7) 보살과 아미타불

   ·보살 - 부처가 될 단계에까지 도달하였으나 중생 제도를 염원하여 보살로 처져 있 는 부처 다음가는 성자

   ·아미타불 - 여러 부처 중의 하나로서 현세 불로서 중생이 제도를 받는데 제일 큰   관계가 있다고 믿음.

   (8) 소승 불교와 대승불교

       ; 불교교설의 해석의 차이로 생겨진 것.

   ·불신관 ; 소승불교 - 불타는 해탈의 도를 가르쳐 주는 위대한 스승으로 믿음.

             대승불교 - 선재설을 믿어 중생 제도의 원력에 의하여 화신하여 세상에  출생하였다 믿음.

   ·구원관 ; 소승불교 - 교회,승려본위이며 이기주의적,개인주의적,열반은 출가수도  한 수도승이 아니면 아무나 얻을수 없고 아라한에 만족.

               대승불교 -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을 가졌으므로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함.

   ·성격/분포 ; 소승불교 - 소극적, 귀족적, 비사회적 / 인도남방

                대승불교 - 적극적, 대중적,박애주의적 / 북방전파되어 중국,한국,일본까 지 전파

 

   3. 불교의 경전

   ·결집 - 석가 서거후 백년 경부터 시작되어 2세기초까지 4차에 걸쳐 완성

   ·경(불타의 교설), 율(계율을 모은 것), 논(불타의 교설을 해설)으로 구분

   ·팔리어 기록

 

   4. 불교의 윤리

    (1) 자력주의 - 자력으로 극기, 도덕적 수련 강조

    (2) 평등주의 - 인도교의 게급주의 반대

    (3)계율 - 오계(살생 말 것, 도적질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술마시지 말 것)

 

   5. 결  론

     표5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
 비  교
 불   교
 기 독 교
 
우 주 관
 ·우주의 존재를 부정

·자아를 부정

·부정한다는 까지도 부정

  (데카르트의 논법을 따르자면)
 ·하나님과 실재성을 인정

·자아의 주체인 영혼의 존재를 인    정 하며 이것은 창조주 신의 부    여하신 것으로 봄.
 
인 생 관
 · 인생의 실재와 가치 전적 부인
 ·자아의 존재와 그 가치를

  진적인정
 
구 원 관
 ·구원은 극소수의 수도사에게

  만 가능(현세부정)

·사회적 책임있는 사람에겐  

  실현불가능의 것
 ·내적 구원이므로 현세부정하거나    떠날 필요 없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성결케     됨으로 구원
 


 

 

제 5 장 유  교

 

   공자는 천(天)혹은 천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그의 의지와 생활을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유교는 역시 종교로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창 설 자 : 공자외 다수

·신앙대상 : 천(天)에 대한 신앙이 아닌 사회 생활 규범과 질서를 중시 (仁義禮智, 孝悌               忠信)

·현  황 : 300,297,000명(아시아 3억이상, 유럽 5만, 아프리카 7천, 북미 9만, 대양주 5만)

 

   1. 공자의 생애

   주 영왕 2년 노양공 22년(기원전 551년 11월 21일) 노국 창평향 추음에서 태어남. 3세때 - 그의 아버지 72세의 고령으로 별세. 유년 시절 -  당시 사대부 집안은 13세부터 교육을 받으나 그는 15세에 교육을 받기 시작.  34세 때 - 주 나라의 어진 임금들을 방문하여 성덕을 배웠으며 도교의 창설자 노자를 찾아 예를 묻기도 함. 36세 때 - 주에서 돌아온 그는 3천명의 제자가 있기도 했다. 55세 까지 - 그는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실현할 관직을 얻어 보고자 여러 제후국을 역방하며 여러 관직 맡으며, 내치뿐만 아니라 외교에도 혁혁한 공을 세워 이웃나라에까지 그 이름을 떨치게 됐는데 이를 시기한 제 나라의 뇌물과 미인계에 실망하여 모국 노를 떠나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유랑하다가 68세의 고령에 다시 돌아왔다. 그후 그는 노에서 추밀고문격의 대우를 받으며 시서와 예악 편집, 역학 연구, 노학역사를 편찬하였다. 그는 기원전 479년 4월 11일 향년 74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2. 맹  자

   기원전 371년에 태어나 어머니의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孟母三遷), 장성한 후 공자의 제자 자사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자신을 공자의 후계자로 생각하였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여 그의 윤리, 정치, 철학의 기본 사상을 삼았으며, 사단설(四端說)을 주장하였다. 청치론에 있어서는 백성을 중시할 것과 경제생활의 중요성을 고조하였다. 그의 사상과 교설은 맹자 7권이 전하며, 기원전 289년 향년 83세로 서거하였다.

 

   3. 유교의 경전

   · 사서 삼경 혹, 육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역경, 서경, 시경이며, 여기에 춘기, 예기, 효경을 추가)

 

   4.유교의 교설

    (1) 군자(君子論) - 유교의 도덕적 이상인물(이상적 인격형)

     · 군자 - 인(仁)을 존중하여 생의 최고 목표로 삼으며, 예(禮)를 존중하며, 실천을   중히 여김. 天命과 大人과, 聖人을 두려워함.

     · 배우고 가르침의 목적 - 수기치인(修己治人) 혹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  家治國平天下)

    (2) 정치론

     · 예치주의(禮治主義)와 덕치주의(德治主義)를 높이어 이 이상을 실현해 보고자 함.

    (3) 인의 해설

     · 내심에 있는 인이 경우에 따라서 어떻게 사람의 태도와 행동으로 표시되는 것.

     · 인의 본질 - 순결하고 때가 끼지 않은 마음씨.

     · 중용에서 仁은 誠으로 표시되어 성은 하늘의 道요 성을 이루는 것을 사람의 도 라하였다.  

    (4) 공자의 천(天)의 관념

     · 사시의 변천, 만물의 성장과 움직임은 하늘이 하는 일이라 봄.

     · 死生有命, 富貴在天

     · 죄를 하늘에 얻으면 빌곳이 없다.

        ; 이와 같이 천에 대한 신앙을 가졌음에도 내세를 가르친바 없음.

    (5) 오륜(五倫)과 효도(孝道) -  중시하는 도덕률

     · 오륜 - 君臣有義, 父子有親,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 이 중 父子有親의 덕목이 가장 중시되어 孝의 관념(제사, 조상숭배의 사상이 생김)으로 표시.

 

   5. 결 론

     표6  유교의 장단점
 장


   만인이 추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상적인 인간형인 군자의 주장, 도덕의 실천을 중히 여긴점, 수덕의 요체에 있어서 자신에게 출발한다는 점,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법치주의보다 덕치주의를 강조한점.
 


 뚜렷한 신관의 결핍(천을 말하였으나 숭배하는 것은 천자에 한함.)으로 인해 종교의 특징인 초월적인 존재자의 위안을 얻고자하는 신념의 기초가 빈약. 지나친 복고주의로 인해 창조력이 결핍
 


 

 

제 6 장 도   교

 

   중국에서 발생하였으며 창시자는 노자(老子 604-517 B.C. ?)라 한다. 노자는 그의 독특한 철학적인 도설을 주장하여 사람들이 모든 인위적인 것과 사욕을 버리고 자연에 돌아가 도와 합일함으로 지복의 경지에 이를 것을 주장하였다.

 

   1. 도교의 경정과 교설

     (1) 경   전

   도덕 경은 두 편으로 나뉘어졌는데 상편이 37, 하편이 44, 합 81장으로 되었으며 상편은 형이상학적인 우주 원리인 도에 대한 것이요, 하편은 도를 윤리와 정치에 관련지어 논술한 것이다.

     (2) 도   론

   중심 사상은 도이다. 무위의 원리인 도는 만물이 자연적, 자생적으로 스스로를 만들어 내도록 할 뿐이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율배반의 법칙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한다. 이것이 도의 본질이며 위무위다.

     (3) 우주관

   우주 만상은 도로 말미암았다. 이 도에 의한 우주 생성의 과정은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는다. 이리하여 우주 만물의 생성의 원리가 되는 음과 양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만물이 생겨나는 생명, 즉 삼이 생긴다.

     (4) 윤리관

   윤리의 교훈도 무위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첫째로 강조한 것은 온순의 덕이며, 둘째로 검소한 덕을 높이 평가한다. 인, 의, 효를 부덕(不德)으로 봄같이 그의 윤리관은 소극적이며 부정적이다.

     (5) 정치론

   '무위'의 철학을 주장한 그의 정치론도 역시 부정적이요, 반사회적이다. 모든 원칙적인 것을 제거하고 자연 그대로를 따라 사는 자유로운 사회를 이상 사회 혹은 이상국 가로 보았다.

     (6) 종교론

   무신론자이며, 천(天)을 자연물로서 땅과 상대되는 것으로 여김과 상제를 인정했으나 이는 도에 의하여 생긴 피조물의 지위에 있다. 귀신을 인정했으며, 인간을 해할 수 있으나 선정으로 귀신의 발동을 막을 수 있다 봄.

 

   2. 열자

   노자와 같이 우주의 본체를 '허무'로 보았으나 이 무에서 만물이 생기는데는 태역, 태초, 태시, 태소의 네 단계를 거친다 하였다. 그의 정치 이상국으로 화서국이란 것을 묘사하였는데 이화서국이란 통치자도, 스승도, 미워함도, 사랑, 친함, 소원, 두려워함, 꺼리는 것등이 없이 평등 무차별의 사회이다.

 

   3. 장자

   열자와 함께 노자의 사상을 조술한 사람으로서 그도 역시 천지 만물이 생기기전에 도가 있었으며, 도에 의하여 천지 만물이 생겼다고 생각하였다. 장자 철학의 특이점은 이 도 안에는 모든 상대적인 것이 소멸되어 혼연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주 삼라만상의 무상과 비실재성을 주장했으며, 우주 만물은 무한에서 나와 무한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인생관에 있어서 그가 역설한 것은 인생과 현실은 한 꿈이라는 것이며, 사람은 꿈을 꾸고 있으면서 참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사관에 있어서 삶과 죽음이란 밤과 낮 혹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서로 뒤바꾸임과 같은 것이라 보았다. 그는 인간 최대의 행복은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이라 보고. 이상의 나라는 달관의 힘을 가지는 곳이라 하였다. 이상적인 정치는 무정부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안정, 평온, 조화, 및 부활 동의 상태에서 전체 속으로 흡수되는 희열을 갖는데 있다.

 

   4. 노·장 이후의 도교

   노장 이후의 도교는 그들이 주장한 고원한 교설 에서 멀리 떠나 일종의 미신 종교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처처에 사원을 세우고 승려가 있어 오늘의 대중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5. 결론

     표7  도교의 장단점
 장


   우주의 일관한 이 법인 '도'를 인정하여 사람이 이 도와의 합일을 이상으로 하는 점과 온순,겸허, 검소의 덕을 추장한점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가르침등.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도의 원리
 


 

 

제 7 장 자라투스트라교

 

·창시자 : 자라투스트라

·발생지 : 페르샤국

·현황 : 전세계 12만명정도(인도내는 10만이며, 이들은 교육수준과 생활 수준이 유여함)

 

   1. 자라투스트라의 생애

   기원전 600-580년경에 생존했으며 그의 출생은 3천년 혹은 3백년 전에 이미 예언되었으며, 15세의 처녀 모친이 그를 잉태할 때에 마즈다신의 영관이 그에게 둘어 비쳤다고 전한다. 30세시에 마즈다신의 부름을 받아 예언자로서 사명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부터 10년간 그는 마즈다 신으로부터 일곱 번의 계시와 문답이 있었다 하며, 그의 전체를 신에게 바쳐 사명을 수행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한다. 그가 42세 되었을 때 그 나라의 비스타스파 왕과 왕제와 왕자가 고관들이 개종한 후 89명의 신도를 얻었으며, 전설에 의하면 그는 투라니아 족이 침입하였을 때 향년 77세로 순교하였다 한다.

 

   2. 경전과 교설

     (1)경전

   젠드 아베스타경인데 젠드는 주해서란 뜻이요, 아베스타는 원전이라는 뜻이다. 다음은 비스페트라경이고, 세 번째는 벤드다드경이며 나머지 두부는 야쉴이라는 찬송시와 토르다.아베스타라는 일반 신도들을 위한 기도문이다.

     (2) 교설

       (가)신관

   이원론에 입각하여 이 우주는 선신과 악신이 대립하여 투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신은 '흐라.마즈다' 인데 창조의 신이며, 빛과 생명과 의와 진리와 선의 신이며, 영원 존재자이며, 전지자이며, 자비의 신이다. 원래 우상이 없었으나 훗일 패르샤 왕들의 개종과 함께 신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밖에 아후라신을 주신으로 하는 일곱 신의 집단과 야즈다, 미드라, 발비드.아나히라, 불의신인 '아타르'가 있는데 선신과 적대적 관계에 있으며 악신'앙그라 마이뉴' 혹 '아리만'의 존재를 믿는다.

       (나)내세관과 부활의 신앙

   사후 심판과 선악응보의 신앙, 육체의 부활 신앙을 가졌다.

       (다)세계관

   세계사는 12,000년을 3,000년씩 4기로 나누어 제1기는 창조주의 생각 속에 세계의 형태의 계획이 있던 시기, 제 2기는 창조주에 의하여 세계가 창조된 시기, 제 3기는 선신과 악신의 쟁투의 시기, 제4기는 선신의 승리로 쟁투가 끝나는 시기다.

       (라)윤리관

종교적 의식과 도덕적 행동에 분간을 두지 않는다. 선한 생각, 선한 말, 성한 행동은 그들의 최고의 도덕적 이상이다.

       (마) 제례, 기도, 정결법

   사제는 종교적 의식의 이행과 함께 정치적 고문 역활도 하며, '야스나'라는 기도집이 있다. 시체를 만지거나, 접근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 여긴다.

3. 오늘의 자라투스트라교

   오늘날 불의 숭배가 가장 중요한 행사로 실시하며, 신도의 거의 대부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문을 암송하며, 전통적인  신앙을그대로고수한다   4. 결론    . 표8  자라투스트라교와 기독교의 비교
 신관
 ·아후라신과 하나님의 속성이 상통

  -창조신으로 여기는 점. 윤리적이며, 인간에게 선을 권장하며 인간의 행복을 위하는      신으로 믿음(기독교의 유일 신관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됨)
 
내세관
 ·기독교와 완전 일치하지 않으나 선악응보의 관념에 있어 공통점이 발견됨.
 
특점
 ·신앙생활과 도덕 생활을 같이 중요시하는 점.
 


 

 

 

제 8 장  유 대 교

 

현황 : 유대인 총수 1천만 2백만 명에 대하여 90%가 넘는 11,303,050명의 교도

   1. 유대교의 발생과 발전

     (1)여호와 종교의 창설자 모세(1,200 B.C.)

   창설자는 모세다. 그는 팔레스틴에 흉년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후예이다. 그는 나일강 갈대밭에 버려졌으나 애급 공주의 구출로 왕궁에서 길러지게 된다. 그의 나이 40세에 궁중 생활을 버리고 미디안 광야로 망명하여 거기서 40년간 생활을 하다 여호와 신의 부름을 받고 동복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다. 출애급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40년간 기도하며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중심 하여 유대교의 경전의 핵심이 되는 법전을 받았다고 한다.

     (2)가나안 입주로부터 왕국의 건설까지(1200-1030 B.C.)

   창설자인 모세는 가나안 입주를 보지 못하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 의해 이스라엘족의 가나안 입주가 가능하게 된다. 입주 후 그들은 목축 생활에서 비교적 발달된 농경 생활과 좀더 진보된 문화적 생활에 접함에 따라 유일신 사상에서 떠나 여호와 경배와 바알신 숭배를 동시에 하게 된다.

     (3) 왕국의 건설로 포로 시기까지(1030-586 B.C.)

   사사 시대를 지나 사울을 왕으로 추대하므로 사사 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동시에 예언자로서 최초의 인물인 사무엘과 그의 영도 하에 있는 예언자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사무엘 시대에 설립된 유다왕국은 사울,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 왕시대에 불행히도 남북 왕국으로 갈라져(933B.C.) 북왕국을 이스라엘, 남왕국을 유대라 하여 수 삼세 기를 계속 하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앗수르에의해 멸망하고, 남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신흥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였다. 최초의 문서 예언자는 아모스로 기원전 8세기에 남국 유대에서 출생하였으나 주로 북왕국에서 예언하였다. 아모스의 후배인 호세아는 기원전 746-735년경 이스라엘에서 예언했으며, 이사야는 유다에서 740-700까지 40년간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언한 예언자의 거성이다. 이사야와 거의 동시대 즉, 유다 열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시대에 모라셋 사람 미가는주로 북왕국에서 그 수도 사마리아의 멸망에 관하여 예언하였다. 북국의 멸망 후 남국 유다는 스바냐, 나훔, 하박국등이 예언하였다. 유다국이 기원전 596년에 바벨론에 정복당하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기 전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의 소년 시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하였다.

     (4)포로 생활 중의 예언자의 활동(586-539 B.C.)

   에스겔은 기원전 593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언자가 되었고 597년에 바벨론에 잡혀가 거기서 포로 된 유대인들에게 예언하였다. 에스겔과 함께 포로 생활 중에 활동한 예언자를 제2이사야라 한다.

     (5) 율법 종교의 성립(538-400 B.C.)

   기원전 537년 신흥 바샤국의 고레스왕에 의하여 유대 포로들이 해방된 후 유대교는 점차로 율법과 제사 종교로 변모되었다. 이 율법주의 운동의 중심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등에 나타난 세밀한 규정이다.

     (6)계시 문학 운동(400 B.C - 100 A.D.)

   이 운동은 강대한 이민족의 정복과 압박을 당하되 자력으로 이를 벗어날 수 없는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호소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7)시내곡(회당, Synagogue)의 발생

   이것의 발생은 유대인의 포로 생활 중 종교 생활을 계속할 필요에서였다고 본다.

     (8)오늘의 유대교

   오늘의 유대교는 세파로 나뉘는데, 정통파로서 재래의 유대교의 율법을 고수하는 파이며, 제2는 자유 파로서 현대인에게 부적당한 옛 의식과 조문을 포기하고 이를 현대인들에게 적응하려는 혁신파이고, 셋째는 위 둘의 중간적 태도이다.

 

   2. 성문학의 발생

   유대교의 경전이 비로소 생기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9세기경이었다. 이를 2세기에 편집하여 한 권으로 만들었다.

   (1)율법서인데 성경의 첫 다섯권

   (2)예언서 인데 전 예언서와 후 예언서

   (3)성록

   (4)탈무드, 유대교의 경전은 아니다.

 

   3. 메시야 대망의 사상

   유다를 구원하고 그들의 행복과 번영을 누리게 할 것으로 믿었는데 그러한 구원자를 그들은 '메시야' 혹은 '기름 부은 자'라고 불렀다. 메시야 사상은 건전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참된 의미에 있어서 메시야사상은 정치적이며, 복수 적이며,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이며,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것이다.

 

   4.시온주의 운동(Zionism)

   이 운동은 1897년에 발생하여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더 활발해 진 운동인데 고국 복위 운동이다. 1948년 5월14일 신생 이스라엘국이 창건되었다.

 

   5.유대교의 신조

   뚜렷한 신앙 개조가 없다는 것이 특색이다. 유대교의 절대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유일성이다.

 

   6.결  론

   유대교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집단으로서 가장 고상한 신관과 구원관을 전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교 신봉자인 유대인은 편협한 민족사상과 배타주의와 지나친 율법주의 때문에 그들의 예언자들이 전한 숭고한 교훈과 정신을 몰각하고 그들의 혈통 가운데서 혜성처럼 나타난 위대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배척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기독교에게 귀중한 유산을 주어 인류 전체에 큰 공헌을 끼쳐 줄 수 있는 종교가 되도록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제 9 장 기 독 교

   ·창설자 : 예수 그리스도

   ·신봉자 : 9억

 

   1. 창설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는 다윗의 계보에 속하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으며, 일시에 애굽에서 망명하여 살았으며, 추후에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가 거기서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예수의 나이 30세에 사생활에서 나와 전도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빈들에 나가서 40일간 금식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심사숙고하는 중 그것을 당시의 일반 민중의 경제.정치문제의 해결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일으키며 세속적인 영예와 권세의 획득보다도 영의 왕국의 건설을 그이 목표로 할 것임을 깨달았다. 광야에서 40일이 지난 후 그의 공생에 3년의 서막을 열었다. 그는 갈릴리와 유대를 활동 무대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활동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반감과 의구의 느낌을 일으켜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처치할 흉계를 모색하여 십자가에 달아 죽인다.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가장 감격적인 것이었으니 이것을 통하여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자신의 체포, 치욕, 십자가에 죽이는 그들을 위해 저주하는 대신 그의 숭고한 신적인 사랑과 용서심을 나타냈다.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한 후 장사된지 3일만에 다시 부활했다.

 

   2.예수 그리스도의 품격

   사복음서를 보면 첫째 그는 역사적 실존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초자연적 방법에 의하였다 하나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장 하였으며, 침식하였으며, 희로애락의 정을 가졌으며,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과 유혹을 당하는 등 인성을 가졌으며, 신성도 겸비하여 순결성, 무죄 성이 재증된다고 볼 수 있다.

 

   3.기독교의 창립과 발전

     (1)초대 교회(30-50 A.D.)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 그의 신도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수리아 수도 다메섹과 안디옥과 그 밖의 여러 지방에 불길과 같이 일어났다.

     (2)사도바울의 회개와 그의 활동(50-65 A.D.)

   박해자였던 그는  다메섹으로 가던 중 환상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개종하고 3차에 걸쳐 소아시와 유럽 각지에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웠다.

     (3)신약 성경의 편찬(65-150A.D.)

   한사람이 한때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원 후 65-150년 사이에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 목적으로 기록.

     (4)기독교의 박해 시대(150-1054 A.D.)

   가장 극심한 박해는 기원 후 650년 네로 황제때 였으며 그후 325년경 큰스탄티 대제의 개종으로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되었다.

     (5)교황 전권 시대(1054-1517 A.D.)

   여러 가지 폐단도 없지 않았으나 박애 사업과 교육 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6)종교개혁 시대(1517-1648 A. D.)

   교황의 전권과 교회의 부패에 반기를 들며 일어났다. 영국에서 위글리프와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 독일의 마틴 루터와 스위스의 즈윙글리, 프랑스의 칼빈이 대표적 인물이다. 종교개혁후 전 세계 기독교도의 수는 904,332,500인(구교도;550,305,000,신교도;216,949,000)이다.

     (7)교파의 분립과 연합 운동

   종교 개혁후 신교는 신앙의 권위를 성경에 두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나 이로 인해 무수한 교파의 분립이 생겼다. 오늘에 와서는 협동 내지 합동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교단 합동이 아직 불가능하다 하여도 그 사업에 있어서 연합 전선을 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5.기독교의 중요 교리

     (1)기독교 교리

   (가)성경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하나님의 계시의 글로 믿는다. 여러 가지 형태의 문학이 들어 있으며 종교적 목적 외에 인생의 가장 좋은 교육서다.

   (나)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의 중심 이념, 죄로 인해 타락된 세상을 구원하고자 인간의 몸을 입어 탄생했으며, 십자가에 달여 죽었으며, 역사의 종말에는 전 인류의 심판자로 임할 것을 믿는다.

   (다)하나님

   무형 무상이신 영, 인격적 존재, 전지의 주제, 자연계의 섭리자, 인간 생활의 주관자며 보호자, 인류의 아버지, 예수 자신의 아버지

   (라)성령

   삼위일체중 삼위에 해당하며, 인간의 도덕적 갱신과 인격 향상의 원동력, 인간을 진리에로 인도하여 죄에서의 자유를 부여한다.

   (마)인간관, 구원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격)대로 창조되었으나 죄를 지음으로 범죄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바)교회관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는 세계적, 우주적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에 의하여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화해가 이룩된 성도들이 그 지체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직능과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던 일을 이어받아 그것을 완수함이다. 교회에 가입은 세례 혹은 영세에 의한다.

   (사)천국관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의 건설을 위하여 화신 하였다고 믿는다. 현실적인 실재이나, 완성은 현세에서는 실현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땅 즉 세상 사회는 역시 천국이다.

   (아)윤리관

   일반적 윤리는 대인관계의 규정이나, 기독 윤리는 신인의 관계와 대인의 관계의 규정이다. 특색은 외면적인 행동보다는 내면적인 동기를 중시한다.

 

   6. 결  론

   현재 전 세계를 통하여 이 신도의 수는 9억에 달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인간의 참된 욕구에 대하여 만족을 주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가장 만족한 신관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우수한 경전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가장 만족한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자부로 추대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주로 믿고, 그를 따르며, 가장 우수한 정신적 양식이 되는 경전을 소유하고 있으며, 가장 만족한 인간관 세계관을 제공하는 기독교는 인간의 감정과 이성과 이지의 만족을 주는 종교라 칭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제 11 장  회 회 교

 

   ·창시자 : 마호메트(Mahomet, 570-632)

   ·특  색 : 절대적 유일신을 신앙

              선전 방법에 있어서 무력을 사용함.

 

   1.마호메트의 생애

   서기 570년 아라비안 반도의 중심지이며 잡신 숭배의 중심지인 메카시에서 출생, 장성하여 대상을 따라 다니며 상업을 하였다. 이때에 유대인, 기독인들과 접촉하면서 후일 그가 창설한 종교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대상을 따라다니던 중 부유한 가정의 사환으로 고용되어 일하다 그 미망인의 청혼으로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으며,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깊은 산중에서 홀로 명상과 기도에 잡기는 시간이 많았다. 이러한 생활을 12년간 계속하다 신의 계시와 환상을 얻어 신의 예언자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다. 당시 메카시는 잡신 숭배로 해마다 많은 참배 객들로 인해 시민의 수입이 막대한 터라 그의 유일신 종교의 선포와 우상 숭배의 배척으로 메카 시에서 이웃 도시 메디도시로 그의 본거지를 삼아 종교 선포와 교세 확장에 전력하였다. 62세의 일기로 그의 별저에서 운명하였다.

 

   2.경전과 교설

   (1)경전

   회회교의 경전은 코란경이다. 이 내용은 아라비아 부족들의 종교적 신앙과 전설 등이 포함되며, 유대교의 구약과 기독교의 신약 성경에서 나온 것도 적지 않다. 코란경은 총 114장으로 되었으며, 제4장에는 여인, 제24장에는 광명, 제40장에는 신도, 제50장에는 달 등과 같다.

   (2)교설

   신조(6조)와 실천 조목(신앙고백, 예배, 금식, 자선, 순례)

 

   신  조

   (가) 신

   절대적인 유일신 '알라'에 대한 신앙을 기초 도리로 삼음

   (나)천사와 사탄

   천사와 사탄을 믿었으며, 사탄은 천사의 타락한 자로 봄.

   (다)경전

   코란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믿으며, 토라와 다윗의 시편, 예수님의 복음서도 알라신이 내린 것이라 보았다.

   (라)예언자

   마호메트 외에 62명의 예언자를 말함.

   (마)천명 혹 예정 사상

   인간 만사를 예정으로 봄.

   (바)내세

   천당과 지옥을 믿음.

 

실천 조목

   (가)신조의 구상

   "알라신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마호메트는 그의 예언자다"라는 것을 아랍어로 매일 구송.

   (나)기도

   신도는 매일 다섯 차례 성지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고, 코란경에는 하루 세차래 동 틀 때와 정오, 저녁에 기도할 것을 지시한다.

 

   3.회회교의 약사-사라센 왕국 건설

   마호메트 서거후 제1대 아브.베클(632-634), 제2대는 오말(Omar,634-644), 제3대 오트만(Ottman)이었는데 코란경을 수정 편집하였다. 제4대는 마호메트의 사위인 알이(Ali)가 계승하였다. 알 리가 암살된 후 칼리프의 계승 문제로 2파전 혹은 3파전이 벌어져 동서 사라센 왕국으로 갈라져 회교 왕국을 건설하였다. 제11세기에는 터어키가 회교국이 되어 20세기에까지 회교의 중심지가 되고 파키스탄 공화국이 1947년에 인도에서 독립하여 회교국을 건설하였다. 회교 왕국의 건설과 함께 특필한 사건은 대학을 새워 중세기 세계 문학의 요람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4.회회교의 종파

   (1)수니 파(Sunni Sect) 터어키국의 회교도들로서 회회교의 주류 파이다.

   (2)쉬아 파(Shia)법통을 주장하는 파로서, 자기들은 교조의 가족인 알리의 후계자라 믿는다.

   (3)수피 파(Sufi)그들은 즐겨 입는 옷의 재료인 거친 양털의 명사 수프에서 온 명칭인데, 그들은 신의 화신의 도리를 믿으며, 금욕주의와 신비적 경험으로 보통 인간도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5. 결 론

     표9  회회교의 장단점
 장


  철저한 유일신 사상, 신의에 절대적인 복종 정신, 교조 자신의 종교적 열정과 전도열, 신도들의 기도 열과 전도열, 문화적 유산
 


 신관-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관에 비해 훨씬 저열하다.

천당- 관능적이며 물질적

종교와 정치를 혼동하여 포교에 무력을 씀
 


 

 

제 11 장  천 도 교

 

   1.교조의 생애와 천도교의 발달사

     (1)제1세 교주 최 제우

   1860 신라 명유 최치원 선생의 후손 최제우 선생에 의하여 창시된 종교다. 그는 1824년 12월 28일 경북에서 출생하여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서적을 탐독하는 이외에 홀로 앉아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며, 혹은 고명한 도승이나 이름 있는 유학 선생을 찾아 의문되는 것을 묻기도 하였다. 선생이 30세 되던 해 경남 울산에 옮기어 살 때 한 도승이  한 책을 보였는데, 이 책을 빌려 밤낮으로 해득하여 도승에게 전하자 크게 기뻐하며 하늘이 귀하에게 주신 책이라 말하고 사라졌다 한다. 33세시 통도사에서 49일간 하늘에 기도하는 중 천명을 듣고 그의 종교적 신념을 더욱 깊어 원명 재선을 제우로 바꾸고 다시 고향 용담으로 돌아가 1860년 선도를 시작하였으며, 후계자로 최시형을 선택하고 그의 포교 4년인 1864년 3월 10일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2)제2세 교주 최시형

   1827년 3월 21일 경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잃고 19세에 전도를 받았다. 최제우의 처형후 줄곧 교도가 박해를 당했다. 그는 1897년에 손병희에게 법통을 전하고 자신은 그 이듬해에 포교중 관원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되어 72세의 고령으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3)제3교주 손의암과 그 이후

   3세 교주 손병희선생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주군에서 출생 22세에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최시형을 강원도에서 만나 법통을 전수 받았으며, 동학의 난이 평정된 후 다시 교세를 만회해 보려 했으나 여 의치 않아 일본에 망명하였다. 노일 전쟁시에는 진보회를 조직하였으나 정부의 탄압을 받아 많은 교도가 희생되었다. 그의 부하 이 용구는 구명 책으로 진보회를 친일파 송병준이 영도하는 일진회와 병합하여 1905년 11월에 치욕적인 을사 보호조약을 맺었다.  이에 1905년 12월 1일 자신이 인도하는 동학을 천도교라 하여 정치 노선과 분리하였으며 제도의 대 혁신을 단행했다. 그는 다시 박인호에게 대도주를 넘겨주어 그가 4대 교주가 되었다. 손의암은 1919년 독립선언 당시 33인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922년 5월 19일에 별세했다.

 

   2.교의와 경정

     (1)경전

   1세 교주 최제우에 의해 쓰여진 동경대전이 있다.

     (2)교의-신관, 인간과, 구원관

   천도교의 교의의 핵심을 교조 최제우가 37세시 고향에서 비상한 종교적 체험을 가진 후에 선도를 하려 할 때 지은 부문에 요약되어 있다. 이 주문에는 우주관, 인생과, 그리고 수도의 요체를 전부 표시하고 있는데, 근본 종지는 '시천주'라는 어귀에 집약되어 있다. 제3세 교주 손병희는 이 '시천주'의 사상을 '인내천'으로 표시하고,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고 했다. 제 2세교주 최시형은 '시천주'를 '각천주'라하여 자신 속에 천주를 모시고 있는 사실을 깨닫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구원관은 사람이 자신의 본질 즉 인내천의 뜻을 깨달아 그 본성을 회복하고 유지함으로 천인 합일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3.종교적 행사

     (1)주문의 복송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2)신입 회원의 참회문

   입회하는 사람은 참회문을 신 앞에 염하며. 일반 교도의 일상 행하는 종교적 행사는 아래와 같다.

       (가)청수를 모심 - 매일 오후 9시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말은 물 한 그릇을 떠놓고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기원을 올린다.

       (나)시일 - 매 일요일은 모여서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다.

        (다)성미 - 신도는 아침과 저녁에 자기의 식량에서 숟가락 식을 떠 모았다가 이를 천사에게 바친다.

 

   4.결  론

   제1세 교주의 인격과, 신앙의 열정, 진리 탐구심과, 순교적 정신은 높이 평가할 만 하나 그도 역시 결점과 과오가 있는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천도교는 유, 불, 선 세 종교에서 사단취장하여 성립된 종교이다. 인간의 가치를 고조한 나머지, 실존적 인간 이상으로 인간을 평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제 12 장 각 종교의 비교

 

   1. 이 땅위에는 적어도 현 인구 35억 중에서 20억에 가까운 숫자의 사람들이 어느 형태든지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종교적 신앙이 얼마나 집요하게 또 넓히 인간의 정신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신관 : 세계의 여러 종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종교가 하나 같이 우리가 경배하거나 혹은 높여야 할 신 혹은 최고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3.구원관 : 세계의 모든 종교는 그 개념과 내용은 같지 않으나 다 같이 구원관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4.계시에 대하여 : 신의 계시에 대하여 현존하는 종교 중 대체로 유신 종교(有神宗敎)가 이를 믿고 있다.

   5.내세관 : 많은 종교가 내세나 혹은 이상의 세계를 믿으며 그것의 실현을 하고자 한다.

   6.도덕률: 어느 종교나 그 종교 나름대로 최고의 도덕률을 가지고 있다.

 

   이상에서 서술한 바 있는 종교가 가진 여러 요소들을 통관한다면 종교는 인간의 다른 활동과 같이 현실에 만족치 않고 좀더 낳은 이상의 세계를 주구하면서 끝없이 올라가고 나아가는 인간의 생활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와 같이 그의 종교적 행동을 통하여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나가는 만큼 그에게는 신앙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성경의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한다"(고후5:7)하였다.

 


안식일 개념 변천사 
김광웅   02/06/27 15:59 | 조회수 10
 
 
-------------------------------------------------------------------------------- "안식일 개념 변천사" 예수 사역 당시도 논쟁거리, 콘스탄틴칙령 후 '주일은 쉬는 날' 안식일은 교회사를 통하여 줄곧 심각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특히 구약·유대교의 안식일이 그리스도인의 주일 성수와 어떻게 연관되는가와 관련하여 그러했다. 안식일은 이미 예수의 사역 당시 논쟁거리가 되었으며(마 12:1∼14, 요 5:1∼18),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그러했다(골 2:16∼17). 일찍이 주후 2세기 중엽 이전에 사도 교부들은 주일을 안식일과 연관시켰는데, 그러나 그들은 이 두 날을 쉬는 날로서가 아니라 예배를 위한 날로서 연관시켰다. 사실 주일이 일을 안하고 쉬는 날로 간주될 수 있게 된 것은 콘스탄틴 대제 칙령(주후 321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적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가 확립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에 의해서였다. 아퀴나스의 안식일 엄수주의는 주일을 안식일에 대한 기독교적 대체일(代替日)로 간주하며, 따라서 주일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킬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스콜라 철학적 안식일 엄수주의를 강력히 공격하였으며, 철저히 포기하였다. 예를 들어 칼빈은 안식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따라서 폐지되었음을 명백히 했다. 더 나아가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편의와 질서를 위한 것일 뿐이며, 그에 반해 일요일에 쉬는 것은 예배 드리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음을 명백히 했다(「기독교강요」,2.8.28-34). 여전히 입장간 격차 많아 하지만 종교 개혁자들의 스콜라 철학적 안식일 엄수주의와의 결별은 그들의 후계자들에 의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17세기에 이르러 청교도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안식일 엄수주의로 돌아가 버렸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에서 전형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 청교도적 안식일 엄수주의는 후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미국 등지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대부분에 의해 그대로 혹은 약간 수정된 형태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안식일 엄수주의적 전통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안식일 엄수주의를 따르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틴데일(1531) 헤일린(1635) 도드리지(1763) 헤시(1860) 등이 그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칠일 준수운동들이 있었는데, 제칠일 침례교(17세기 중엽 이후)와 제칠일 안식교(19세기 중엽 이후) 등이 그러한 운동들이다. 하지만 이 운동들은 영향력에 있어서 청교도적 안식일 엄수주의와 견줄 만한 것이 못된다. 오늘날 서로 다른 견해들 사이에 대화를 해보려는 다양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다른 입장들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좁아질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4∼5 가지 입장들이 현존하는데, 각각의 입장들은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청교도적 안식일 엄수주의적 입장(R.T. Beckwith and W. Stott / This is The Day·1978) △제칠일 안식교 입장(S. Bacchiocchi / From Sabbath to Sunday·1977) △수정된 안식일 엄수주의적 입장(P.K. Jewett / The Lord's Day·1971) △급진적인 반(反)안식일 엄수주의적 입장(W. Rordorf / Sunday·1968, 1962) △(Rordorf의 입장보다는) 덜 급진적인 그러나 명백한 반(反)안식일 엄수주의적 입장(D.A. Carson (ed.) / From Sabbath to Lord's Day·1982). 앞에 나열된 대부분의 저작들은 성경으로부터의 자료들과 사도 이후 시대의 증거에 근거하여 각각의 입장들을 세우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자주 성경의 자료들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며, 때로는 문제의 성경 본문들에 대한 석의적 논의를 거의 결(缺)―빼서 부족―한 경우들도 있다. 그 결과 그러한 저작들은 결정적인 논점들에 있어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만일 그 저작들이 성경적 자료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였다면, 사도 이후 시대 교회의 증거와 관련된 그들의 재구성 역시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본 연재에서 안식일 본문들 가운데 한 집단, 즉 마태복음의 두 안식일 논쟁 단락들(마 12:1∼8, 9∼14)에 대한 철저하고 포괄적인 석의적 연구를 제공하고자 한다. 필자가 이 본문들을 선정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안식일에 대한 책임 있는 연구 지속해야 첫째, 이 본문들과 공관복음서 평행 본문들은 예수와 안식일 사이의 관계(마 12:8) 및 사람과 안식일 사이의 관계(막 2:27) 그리고 안식일 행동 원리(마 12:7, 12) 등에 관한 핵심 선언들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 이 본문들의 그와 같은 결정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의 긴 역사를 통한 안식일 논의들에 있어서 이 본문들은 자주 간과되거나 오용(誤用)되어 왔다. 사실 이 본문들에 대한 적절한 석의적 이해가 없이는 어떤 안식일 교리도 타당성 있게 확립되었다고 주장될 수 없다. 그런데도 앞에서 언급된 저작들에 있어서도 이 본문들을 위해 얼마나 적은 지면이 할애되고 있는가를 주목해 보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셋째, 본 연구의 대상 본문들을 마태복음의 것들로 선정한 이유는 아마도 안식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율법주의적 경향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마태복음 독자들의 상황이 청교도적 안식일 엄수주의 전통을 물려받은 오늘날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특히 한국 교회)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사성은 특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본서의 결론에서 석의적 연구의 결과들을 오늘날 교회의 주일 성수 문제에 적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연재될 글이 다루는 범위는 여러 면에서 제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 글만으로 그동안 안식일이나 주일과 관련해서 제기되었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 연재와 더불어 안식일과 관련된 여러 본문들에 대한 보다 책임 있는 석의적 연구 및 그 결과들을 오늘날 교회 상황에 적용시켜 보려는 적극적인 시도들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뉴스엔 죠이- 양용의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주일 문제와 관련해 양용의 교수의 글이 연재됩니다. 앞으로 연재될 글은 필자의 책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이레서원 펴냄·2000)의 내용을 <뉴스앤조이> 독자들을 위해 매우 요약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보기 원하시는 분들은 위의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양용의 ( 

 

알라와 야훼 
김광웅   02/05/27 09:12 | 조회수 4
 
 
알라와 야훼 김 용 재 ?????????????????????????????????????????????????????????????????? 하나님이 그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말하였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저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으셨다. 너는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위로하라. 내가 그의 후손을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 창세기 21:17-18 (현대인의 성경) ?????????????????????????????????????????????????????????????????? 이슬람교[回敎]를 이야기할 때는 대부분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Quran)’을 주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것만 보아도 우리들의 이슬람교에 대한 생각에는 ??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 다소 왜곡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잘 모르는 이슬람교의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약속을 기억한다.(창세기 15장) 하지만 하나님과 하갈의 약속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창세기 21장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히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큰 민족이 되게 할 것을 약속하였다. 언약(言約)의 하나님이신 야훼가 아브라함과의 약속만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언약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이 좋지 못한 관계에 이르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말한대로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주고 사막으로 내보냈다. 하갈은 빵과 물이 떨어지자 초열의 사막에서 물을 찾아 ‘싸파’와 ‘마루와’ 구릉을 일곱번이나 오르내렸고 이스마엘은 거의 빈사 상태였다. 그때 기적이 나타났다. 사막에서 갑자기 샘물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하갈은 뛸듯이 기뻐 넘쳐나는 샘물을 보며 “멎어라, 샘물이여!(잠 잠; Zam Zam)”하고 외쳤다. 이 잠잠 샘물은 오늘날까지도 솟아나고 있으며 성수(聖水)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이슬람교의 신앙적 배경(信仰的 背景)의 하나로써 ‘신은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창세기 21장에도 소개되고 있다. 이스마엘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가끔 아들을 찾아와 돌봐주며 이 샘물 근처에 카아바 성전(聖殿)을 건립하였다. 카아바 성전은 그로부터 아랍인의 사당(祠堂)이 되었으며 매년 순례(巡禮; Hajj) 기간에 세계 각국에서 이슬람 신도(信徒)들이 이곳을 찾아들게 되었다.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유일신 사상(唯一神 思想)은 점점 쇠퇴하여 우상숭배(偶像崇拜)의 신앙과 혼합되어 버렸다. 이러한 신앙의 암흑 시대에 무함마드(Muhammad)가 탄생하였다. 무함마드라는 이름의 뜻은 ‘칭송받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배우지 않았으나 성실하여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무함마드는 25세에 40세인 아내 하디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가 40세 되던 해(610년)에 히라(Hira)의 동굴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 자신도 믿지 않았지만 그 것이 천사의 계시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아내에게 털어놓자 아내는 주저 없이 그의 말이 진리임을 받아들여 그의 최초의 추종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무함마드는 수 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알라가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전파하였다. 무함마드는 그를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하였다. 이 해(622년)를 ‘회교력 기원(回敎曆 紀元; Hijra)’이라 한다. 8년 후에 그는 메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메카로 귀환하였다. 그는 선두에서서 카아바 성전으로 들어가 오랜 시대를 두고 카아바 성전의 신성(神聖)함을 더럽혀 온 우상(偶像)과 잡신(雜神)들을 손수 치워 버렸다.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배우지 않은 사람[無學者]’임을 강조한다. 이는 그가 인간의 지식을 가지지 않고 알라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위에서 볼 때 무함마드가 전한 알라는 우리가 아는 하나님, 야훼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알라(Allah)’라는 이름은 단순히 ‘the God’의 의미만을 가질뿐이다. 이슬람교의 초기에는 메카가 아니라 예루살렘(Jerusalem)을 향해 절을 한 것을 미루어 보아도 알라는 야훼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교는 바로 우리 형제 종교인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세계 3대 유일신 종교라 불리우는 유대교, 이슬람교, 크리스트교가 모두 하나의 신, 야훼를 섬기고 있다는 점이다. 부족한 이 글이 이슬람교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이슬람교의 전통에 대한 내용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점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뿐만 아니라 하갈과의 언약도 이루신다는 것이며, 이슬람 민족이 그 언약의 증거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부분적으로 자기의 생각대로 해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나의 생각을 버릴 때만이 하나님의 바른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 참고자료 > * 현대인의 성경 - 생명의 말씀사 * 마호멧 전기 * 세계 종교사(上) - J. B. 노스 * 김승혜 교수님의 ‘세계 종교사의 이해’ 강의 노트 

 

샤머니즘 연구 
김광웅   02/05/27 09:09 | 조회수 1
 
 
샤머니즘연구 Ⅰ. 서 론 수천년 동안 한국민족의 의식구조와 신앙의 패턴 (Pattern)을 지배해 온 것은 불교도 유교도 아닌 무격신앙 혹은 무교 (巫敎)라고 부르는 샤마니즘(Shamanism)이었다. 이렇게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샤마니즘은 이상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샤마니즘은 우선 너그럽다. 다른 종교나 사상을 핍박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수용해서 샤마니즘화 시켜 버리는 특별한 기능이 있다. 자신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으면서 접촉하는 모든 것을 자기 색깔로 물들여 버리는 무서운 저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씨를 뿌릴때 우리는 최소한 그 땅의 토양과 풍토와 지질을 세밀히 검토해야 한다. 제주도의 귤감나무를 북쪽에다 이식시켜 놓으면 죽어버리거나 기형으로 자라거나 열매를 맺더라도 먹을 수 없는 열매를 맺는것과 같이 기독교의 복음도 그 복음의 씨가 어떤 토양,어떤 기후에 떨어져 자라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때로는 심각히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한국인의 종교적 욕구를 채워주면서 한국인의 마음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샤머니즘은, 지금까지 그것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그래왔듯이,분명히 기독교신앙을 변질시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동안 열매에는 별 관심없이 크는데만 관심이 집중되어 온 감이 없지 않다. 우리는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냉정히 반성하고 혹시라도 샤마니즘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가는 부분은 없는지, 복음의 중심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가지는 않는지 깊이 살피고, 샤마니즘에 물들어 있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샤마니즘에 물들지 않는 올바른 복음의 열매가 맺히도록 해야할 것이다. Ⅱ. 본 론 1.한국 샤마니즘의 특성 샤마니즘은 한국에만 있는 고유의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몽고, 만주, 한국, 일본등에 널리 퍼져 있으며 특히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우세한 보편적인 종교현상이다. 샤마니즘은 원래 체계적인 교리나 조직을 갖추지 못한 애니미즘(animism)에 연유한 원시종교이다. 따라서 샤마니즘은 그것을 수용한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서 그 특성을 달리하고 있다. 한국의 샤마니즘은 북방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다른 민족의 샤마니즘에 비해서 발달한 형태의 것이다. 한국 샤마니즘의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한국의 샤마니즘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수천년동안을 민족과 함께 내려오면서 민족성, 사고방식, 신앙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실로 고대로 부터 현대무속에 이르기까지 일관해서 한국문화사 속을 흘러온 역사적 종교현상이다. 따라서 "샤마니즘의 연구는 한국인의 정신구조와 문화의 심층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공사에 속하는 기초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샤마니즘의 끈덕진 생명력과 놀라운 수용력이다. 대륙에서 불교, 유교, 도교등의 대종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크게 번창하기도 했으나 어느종교도 샤머니즘을 완전히 제압해 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이들 외래 종교가 수용과정에서 샤마니즘에 흡수되어 변형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타종교의 영향을 그렇게 많이 받으면서도 샤마니즘 자체는 변질됨이 없이 발전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샤마니즘의 끈덕진 생명력과 놀라운 흡수력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한국의 샤마니즘은 현대문명의 첨단을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신앙태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샤마니즘은 오늘도 이 백성의 골수에 깊이 스며들어 그들의 정신과 생활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2. 한국샤마니즘의 사고체계 1) 神 觀 샤마니즘에는 교리라고 부를만한 사상적 체계가 거의 없다. 그러나 다른종교들의 교리체계와 비교해 가면서 몇가지 중요한 사고체계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神觀을 중심으로 보면 샤마니즘은 多靈崇拜(Poly - demonisl)또는 多神論(Poly - theism)적 원시종교이다. 한국의 무속에서 신앙하는 神은 태곤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총 273종에 달하며 다시 계통적으로 분류하면 자연神이 22계통, 인간神이 11계통이 되어 총 33계통이 된다. 최고神으로 天神이 존재하고 巫神들은 상층, 중, 하 최하층으로 구분된다. 한국 샤마니즘에 있어서 가장 모호한 것이 이 최고神 개념이다. 샤마니즘은 원래 多神論이지만 한국인은 전체의 영계를 지배하는 최고神을 하느님이라고 불러왔다. 이 하느님이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神이며 이 하느님이 비도주고 수확도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시우제도 이 하느님께 드린다. 이 최고神 하느님에 대한 개념의 모호성을 초기 선교사였던 클락(Clark)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비와 추수를 주시며 그의 은혜로 숨쉬고 살고 있다고 말한다. 위급한 경우에 한국사람이 지르는 첫마디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해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고 하나님은 그들의 생활을 주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들이 결코 진정으로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추수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면서도 정작 가을 추수때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山神이나 家神이나 조상神에게 드린다. 하나님은 한국사람들에게 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만사가 잘 돌아갈때 하나님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봐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클락의 관찰은 정곡을 찌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하느님에 대한 한국인의 애배모호한 태도는 한국인의 기독교신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샤마니즘에서는 神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 샤마니즘에서는 엑스타시(ecstasy) 상태에서만 특정한 神을 접촉 할 수 있다. 샤마니즘에서 이 神의 체험은 극히 중요하며 이 체험이 있은 후에야 降神巫로 대접을 받게 된다. 샤마니즘에서는 또한 조직적인 교리체계를 못하였기 때문에 고등종교에서 볼 수 있는 윤리적 관계를 찾아보기 힘들다. 神과 인간과의 개인적인 구원의 관계라든가 神을 행한 신앙적 결단보다도 생활상의 당면한 현실문제를 초월적인 神의 능력에 의지하여 해결해 나가려는 것이 샤마니즘의 주축이 된다. 즉 소원 성취로서의 행운, 招福, 차멸등의 극히 현실적이 문제들로 집약되는 것이다. 또한 그 기원방법도 "정신성 보다는 神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서 그 제물의양과 질에 비례하는 神의 응답을 기대하는 공리적 신앙에 의존되고 있다." 샤마니즘의 神관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다. 샤마니즘의 神관에서는 신의 인격성이 희박하고 善神과 惡神의 구별이 구별이 명확하지 않으며 최고神 하느님의 개념이 극히 모호하다. 또한 다른 종교의 神에 대해서는 아주 너그러워서 萬神展에는 神이란 이름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인다. 여기에 한국 神관의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2) 靈 魂 觀 "샤마니즘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이원적 결합체로 보고, 영혼이 육체의 생존적 원력이라 믿는다." 영혼은 무형의 기운으로 인간생명의 근원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샤마니즘에 있어서 영혼은 높고 고상한 것도 아니요 이상적인 것도 아니고 해방자도 아니다. 샤마니즘에 있어서 영혼은 "살아있는 사람과 동일한 인격을 갖는 것으로 상정하여 무의식 (巫儀式)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다." 샤마니즘의 靈은 善靈과 惡靈으로 나타난다. 인간을 炳으로 괴롭히거나 재앙을 갖다주는 靈은 악영계통에 속한다. 현세에서 평생을 유복하게 보내 한없이 살다 죽은 사람은 사후에도 그 靈이 善靈이 되고 반대로 현세에서 원한을 품고 고통과 억울한 일을 당하고 죽은 영은, 특히 妖邪나 橫死한 사람의 영혼은 死後에도 인간을 괴롭히는 악영적 성격을 띄게된다는 것이 샤마니즘의 영혼에 대한 지배적 관념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善靈과 惡靈의 분계선이 명확치 않아 인간을 수호해 주던 善靈이라도 때로는 惡靈的 성격을 띄는 경우가 있게 된다. 그것은 영을 소홀이 대접했을때나 비위를 거슬렸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이런 경우를 가리켜 [덧났다]는 용어를 쓰게 된다. 3) 來 世 觀 한국무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순수한 내세의 형태는 현세를 [이승]으로 내세를 [저승]으로 표현하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다. "또한 이 [저승]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불교의 극락과 같이 그 위치가 뚜렷이 나타나지도않고 그 낙원적인 성격이 강조 되지도 않는다." 죽으면 응당 [저승]으로 가는 것이고 거기서는 [이승]과는 다른 생활이 시작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또한 그 [저승]이란곳은 천상이나 지상이나 지하라는 한계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저승은 막연하게 지상에서 수평으로 가는 먼곳이면서 이승과 저승의 구분을 [모탱이](모퉁이)를 돌아간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샤마니즘의 내세관의 또하나의 특징은 내세의 구원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고등종교들이 신앙을 통해서 내세에 종교적 구원을 얻게 되는데 비하여,샤마니즘에서는 이와같은 신앙의 관문을 거치지 않고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후에 응당 모두가 다 저승에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자연적인 요소에는 특별한 상벌이나 구원개념이 들어 있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 클락(Clark)도 그의 책 에서 지적한바 있다. "샤마니즘은 심판날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죄의 개념이나 도덕문제들에 대해서는 샤마니즘이 크게 발달되어 있는것 같지 않다." 4) 降神체험과 엑스타시 (Ecstasy) 샤마니즘은 엑스타시의 종교다. 샤만(Sha - man) 에게는 엑스타시의 체험이야말로 탁월한 종교적 체험이다. 그래서 엘리아데 (Elia - de)는 샤만을 자유자재로 엑스타시에 빠져들어 갈 수 있는 엑스타시의 전문가라고 정의한다. 샤만 (무당)은 엑스타시를 통해 神과 만나고 神과 교통한다. 엑스타시는 神을 체험하고 접촉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 엑스타시의 경험이나 기술이 없는 무당은 선무당이며 영험이 없는 무당이다. 이 엑스타시를 통해 병을 고치기도 하고 예언의 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이 엑스타시는 권위의 표요 선망의 대상이 된다. 5) 무당과 굿에 대한 한국인의 기대 굿은 샤마니즘의 일종의 예배의식이다. 그리고 굿의 중심은 무당이다. 굿을 의뢰한 사람은 무당에게 모든 것을 위임해 버린다. 심지어는 자기의 인격까지 맡겨 무당이 시키는 대로 맹종한다. 사람들은 무당이 神을 불러오고 달래주고 또 악신을 쫓아내 주기를 기대한다. 무당 (Shaman)은 다음과 같은 4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능을 잘 행사할 수록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무당이 된다. ①사제적 기능 : 神과 인간의 중간에서 인간의 소원을 神에게 알리는 神의 지시를 인간에게 전달하여 굿을 진행시키고 지우제를 주관하는 등 神과 인간을 이어주는 대표기능을 말한다. ②치병적 기능 : 무당의 대표적 기능이다. 치병에 대한 일반의 기대가 아주 높기 때문에 치병의 효험이 없는 무당은 선무당 취급을 당하며 인기가 없다. 치병의 기술이 있어야 신접한 강신무로 쳐준다. 치병을 목적으로하는 굿에는 병굿, 환자굿, 푸닥거리, 영장치기, 산거리, 중천굿, 명두조,손풀이, 살풀이 굿 등은 다 치병 굿들이다. ③예언적 기능 : 점을 쳐 주거나 공수를 받아 神의 말을 전달해 주는 기능이다. 이것도 신앙적이고 윤리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재앙과 액운을 막고 운수를 고쳐 보자는 것에 그치고 만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었고 거기에 어떤 역사관은 없다. ④오락적 기능 : "靈 (영)과 사귀는 과정에 있어서 퉁구스 (Tungus) 족의 샤만은 타계로 날아가지만 한국의 무당은 神靈을 불러 내린다." 굿에는 일조의 유희적이고 오락적이 요소가 있다. 북소리와 방울소리 요란한 속에서 무당의 신명나는 춤이며, 카리스마 (charismatic) 적인 언어와 표정은 일상의 억압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 (Catharsis) 를 가져온다. 3. 샤머니즘이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에 끼친 영향 1) 神觀이 끼친 영향 샤마니즘의 최고주제신 개념으로서 하느님 사상은 유일신 여호와를 같은 용어로 번역한 기독교의 하나님을 아무 저항감 없이 쉽게 받아 들이게 했다. 우리 민족이 몇 천년전 부터 우주의 최고神을 그렇게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그렇게 잘 받아들이고 부르는 하나님이 과연 얼마나 기독교의 본래적인 하나님일 것인가 하는 것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샤마니즘적인 사고방식이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끼친 몇가지의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神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눅 15:20)이시며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이시며(롬 5:8), 우리의 전존제를 꿰뚫어보시며 우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우리의 소원을 아시는 분(마 6:8),이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는 부모와 자식보다 더 극진한 생명적 관계가 맺어지는데 반해 샤마니즘의 하나님은 소원성취의 도구로나 불리워질 뿐이다. 그것도 윤리적인 결단이나 神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신앙적인 결단과는 관계없이 제물을 바쳐서 그 효과를 기대하는 극히 공리적인 관계를 가질 뿐이다. 샤마니즘의 神觀은 불교를 비롯한 모든 외래종교들을 변질시켜 버린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역시 극히 현실주의적인 除災招福의 기복종교로 변질되게 했다는데 한국기독교의 문제점이 있다. "한국인은 질병이나 재앙을 만났을 때 누구보다도 열심으로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도와 예배가 다분히 무교적인 신사역할을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 결과로 일반신자들은 성경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차원높은 결단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생명적인 순종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기적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신앙태도를 갖게 되며, 가정방문이나 안수기도하는 교직자들이 샤만(Shaman)적인 중재역할을 하도록 요청하며 기대한다. 하나님의 인격적 섭리에 대한 기대보다 그의 영력의 주술적인 효과를 기대하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의 기독교가 특별히 오염되어 있는것이 성령에 관해서이다. 마니즘에서의 神은 엑스타시(Ecstasy)를 통해서 체험하도록 되어 있다. 神이 내렸다는 증거, 神과 교통하고 있다는 증거가 모두 엑스타시를 통해이루어 지기 때문에 수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개체와 성령의 개성, 성령의 사역, 성령의 세례 같은 문제에 대해 크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령을 받았다', '성령으로 거듭났다',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케 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성령의 열매를 그생애에 맺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갈 5:22),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마치 입신해서 엑스타시에 빠져야만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신비체험이나 방언, 엑스타시 (Ecstasy)만 높이 평가하고 갈구하는 일이 교회내에서도 흔하다. 또한 그런 엑스타시의 체험을 누구에게나 요청하며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성령과는 거리가 먼 육적인 사람으로 평가하는 풍조가 교회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2) 샤마니즘의 영혼관과 내세관이 끼친 영향 클락 (Clark) 이 적절히 지적한대로 샤마니즘에는 심판사상이나 인간의 신앙유무나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내세의 구원개념이 없다. 저승의 개념도 극히 막연하여 모퉁이를 돌아선 "어느곳"일 뿐이다. 그러므로 샤마니즘에는 윤리적이고 신앙적인 결단이 필요없다. 내세는 누구나 자연적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것이고 혹 그렇지 못한다 할찌라도 무당을 통해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세나 구원을위해 자기의 사상이나 생활태도를 바꿀필요도 없고 굿이 끝나면 자신에게 아무 달라진 것이 없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타신앙이 자랄 토양을 형성케 했다. 기독교의 근본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를 우리는 누구보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한국인의 마음에 맞고 매력을 끌 수 있다. 예배시나 특히 부흥회때 열띤 음성으로 "믿습니다!", "믿사오니"를 크게 외치는 것을 얼마든지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믿는다는 것 즉 믿음의 개념이 어느 정도나 신앙의 자기결단과 관련되어 있는가가 문제다. 도대체 무엇을 믿는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은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관이 없이 심지어는 자기 인격까지 이양해 버리고 그것이 가장 잘 믿는 것으로 확신하는 샤마니즘적인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국인은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어느 정도나 체득하고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신자의 수가 늘지 않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 곧 새로운 존재에 이르지 못하는데 있는것이다." 3) 降神체험과 엑스타시 (Ecstasy)가 끼친 영향 강신체험과 엑스타시가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샤마니즘적 사고방식은 기독교 안에서도 신비체험과 엑스타시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있어야만 옳은 교회요 성령받은 신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성령의 사역과 은사로 오해되었고, 무당의 강신체험이나 엑스타시 비슷한 경험의 간증이 교회에서 환영받게 된 이상풍조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김테곤 교수가 기독교의 성령체험을 샤마니즘에서의 입신현상과 비교해 조사한 것을 보면 성령체험자 거의 모두가 성령체험의 증거로 손끝이 떨리고,진동이 오고, 몸에 화끈하는 불을 느끼고, 방언을 말하며, 환상과 환청을 체험하는 등 모두가 외형적인 것들 만을 제시하고 있다. 4) 무당과 굿에 대한 기대가 끼친 영향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치병적인 기능을 과다하게 기대한다. 목회자들도 그 기능을 전문적으로 행사하려고 그 기능을 전도와 교회부흥의 수단으로 까지 삼으려 한다. 그리고 교인들의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안수기도나 치병의 효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등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게 된다. 병의 치료를 하나님께 맡기고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고 겸손히 그 결과를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강제하여 억지로라도 기적을 발생시키려는 태도이다. 神靈을 [불러 내리는] 샤마니즘의 의식처럼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불러내리겠다는 생각이다. 안수기도나 통성기도나 금식기도를 하나님을 불러내리고 그에게 내 간절한 소원을 더 인상깊게 전달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극히 위험한 오류에 속한다. 치병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본 받아야할 것이다. 예배의식에 있어서도 상당수의 일반신자들이 말씀과 복음중심의예배에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큰소리로 울고 통성기도하며 열광적인 분위기를 유도하는 집회에서만 만족을 느끼고 은혜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말씀과 복음중심의 예배는 어쩐지 답답하고 이해하기도 힘든데 반해 열광적이 집회에 참석하고 나면 비로소 가슴이 후련하고 새로운 힘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씀의 변화시키는 능력에서 만족과 희열을 느끼는 것이아니고 열광과 엑스타시와 소음과 격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종의 샤마니즘적인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Ⅲ. 결 론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기독교는 많은 공헌을 남겼다. 우리민족의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고 크게 부흥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했다. 다른 종교들이 퇴보내지는 답보상태에 빠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기독교만은 교회없는 마을이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양적으로 놀라운 발전과 팽창을 거듭해 왔다. 최근에

 


우주의 연대 
김광웅   01/12/27 21:36 | 조회수 5
 
 
우주의 연대 작성일: 2001/12/22 작성자: 김광웅 교수 우주의 창조 시점은 언제일까? 1. 지구 및 우주의 연대가 길지 않다는 창조과학자들의 주장 진화론 입장에서 지구의 나이는 지질학적 동일 과정설에 의해 50억년으로, 우주의 나이는 천문학적 대폭발이론에 의해 약 150억년(80-120억년)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반인들에게 여과없이 받아져서 잘 확립된 과학적 사실로 인식되고 있다. 오랜 연대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나 창조과학자들은 이러한 동위원소 측정법에 의한 연대 측정이 결코 정확한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동위원소 측정법 자체는 매우 정확한 방법이지만 그 결과를 해석하여 연대를 계산하는 것은 여러 가지 확실치 못한 가정들을 가지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초기 조건에 대한 가정이나, 물질계가 폐쇄적 시스템이라는 가정, 방사성 붕괴가 항상 동일했다는 가정들은 증명할 수 없거나 틀린 가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측정결과를 보면 진화론적인 가정에 의한 연대와 맞지 않는 연대가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화산 폭발 후 형성되는 암석의 연대는 매우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결과들은 단지 진화론적인 가정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이 지구의 연대를 측정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에 지구의 젊은 연대를 지지하는 매우 강력한 증거들이 있다. 지구 대기내의 헬륨은 지각에서 계속 생성되는 안정된 가스로서 지구 연대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이 대기 중에 있다. 현재 약 35억톤의 헬륨이 존재하는데 연간 헬륨의 생성속도가 30만톤 정도이므로, 이것을 기준하면 지구의 나이는 12,000년을 넘지 못한다. 대기 중의 헬륨이 지구 대기권을 떠나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이론이 제시되지 않는 한 지구 연령이 오래 되었다는 주장은 하기가 힘들게 된다. 그밖에도 빠른 대륙의 침식, 불충분한 대양저 퇴적물 등은 지구 연대가 오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퇴적암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 즉, 층리면 형상이 보존되어 있고, 생물활동 흔적이 없으며, 층리면이 깨끗하게 나누어져 있고, 다지층 화석이 있으며, 부드러운 퇴적층의 변형 등은, 퇴적암이 단기간 내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진화론적인 지층 형성이론에 의한 오랜 연대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우주의 연대가 짧다는 증거도 많다. 태양은 그 열량을 자체의 핵융합 반응에 의한 것이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아질 것이다. 이런 이론은 실제로 관찰 결과에 의해 입증되었고, 이런 추세가 과거에도 계속되었다면, 10만년 전에는 태양이 지구를 덮는 크기 였을 것이다. 따라서 10만년 이상 태양이 지속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토성에 형성되어 있는 고리는 점차 중력에 의해 고도가 낮아지고 있는데 50억년이상 오래되었다면 이미 토성의 고리는 토성과 부딪쳐 없어져야 했을 것이다. 태양계 내에 혜성도 태양계에 접근할 때마다 엄청난 질량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10만년 이상 존재하기 힘들다. 이 우주가 오래되었다면 오래 되었을 때 보이는 어떤 현상들이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반대 현상이 보인다. 즉, 달에 있는 분화구의 모양은 매우 선명하며,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나타나는 흘러내리는 현상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달에 아폴로 우주선이 착륙할 때 과학자들은 40억년의 나이로 보아 6m 두께로 우주진이 쌓여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긴 다리를 가진 우주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달의 우주 먼지는 불과 2.5 - 5 cm에 불과하였다. 과거에는 우주진이 매년 1400만톤 정도 떨어진다는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훨씬 적은량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cm의 우주진은 달이 형성된지 오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태양계내의 운석이나 우주진들은 태양의 중력에 의해 태양 속으로 나선형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이것을 포인팅 로벗슨 효과라고 한다. 하루에 약 10만톤의 운석이 태양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데 태양계에 아직도 많은 운석이 존재하는 것은 태양계가 젊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밖에도 나선형 은하들의 존재, 우주 내의 많은 수소의 양도 젊은 우주 연대를 지지하고 있다. 또한 열역학 제 2 법칙의 입장에서 봤을 때 우주가 현재처럼 고도의 질서를 150억년 동안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젊은 우주 연대를 주장하는 창조과학자들에 대한 비판 그러나 우주의 연대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우주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한다. 이들 중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리스도인 과학자들 중에 우주 연대가 짧다는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기존의 과학적인 증거들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편협한 주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우주 연대에 관한 과학적인 주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무리하게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주장들은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앙과 과학지식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창조과학자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기존의 과학지식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성경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 생성에 대한 현재까지 연구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잘 설명되어지는 모델은 대폭발 이론이다. 우주가 대폭발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도 우주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폭발 이론은 그전까지의 우주가 변화가 없이 정지되어 있다는 우주론을 뒤엎은 것이었다. 대폭발 이론이 등장했을 때 어떤 신문은 '드디어 과학계도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머리기사를 쓰기도 했다.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개념은 그전의 정지 우주론을 뛰어넘는 놀라운 발견이며, 정지 우주론에 비해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개념과 보다 가까워진 개념이 분명하다. 대폭발이론은 배경 복사, 적색 편이 등 천문 과학적인 관찰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는 이론이다. 우주의 복잡한 관찰 사실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대폭발이론에 대하여 창조과학자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고, 대폭발이론이 아닌 다른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다른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자들이 과학적 관찰에 근거하여 이론을 정립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신념에 여러 가지 이론들을 억지로 맞추는 무리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창조과학자들은 대폭발 이론이 정지 우주론보다 하나님의 창조 쪽으로 한걸음 다가선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을 지지하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대폭발에 의해 이러한 우주의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대폭발 이론은 물질이 폭발에 의해 흩어지면서, 우주 먼지가 저절로 뭉쳐서 별들을 형성하고, 이런 별들이 모여 은하계, 또한 전체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 냈다는 것인데 이런 일들은 저절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과학 이론 전체가 진화론적인 사고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관찰된 사실에 대한 해석에 진화론적인 세계관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치게 긴 우주 연대(약 200억년)는 진화론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조과학자가 아닌 우주 과학자들 중에도 우주 연대가 지금의 주장처럼 오래 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창조과학자들처럼 수 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 창조과학자들은 우주의 연대가 지구의 연대와 마찬가지로 수만년 이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수 만광년 이상 떨어진 별들의 거리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이 불과 수만년 이내라면 이런 별들이 어떻게 관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된다. 이에 대한 창조과학자들의 답변 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별들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식 자체가 우주 생성에 대한 진화론적 가정을 따르기 때문에 실제보다 멀리 있는 것으로 계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론은 부분적인 별들에 대하여만 설명된다). 둘째로는 빛의 속도가 절대적이지 않고, 과거에는 무한대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수만광년 이상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별들이 있어도 과거에 빛의 속도가 무한대였다면 지구에서 이 별들을 지금 관찰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과거 300년간에 걸쳐 164차계 측정한 빛의 속도에 대한 자료를 모으면 빛의 속도가 점차 감소하였음을 보인다는 것이다 (Barry Setterfield). 그의 계산에 의하면 과거 6천년만 거슬러 가도 빛의 속도가 무한대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빛의 속도가 변할 수는 있지만 빛의 속도가 10배, 20배가 아닌 그 이상으로 빨라지면 피조세계를 설명하는 여러 법칙들을 설명하기 매우 힘들어진다고 말한다. 3. 어느 것이 옳은 지에 대한 판단의 근거 지구와 우주의 연대가 오래되었는지, 그렇지 않은 지에 대한 양쪽의 과학적 증거들이 서로 대치되는 결과를 보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판단이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판단을 과학적 증거에만 의지해서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성경이 이런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가? 창조과학자들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지나치게 매달려서, 과학 지식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를 연구하는 자세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지식과 성경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성경이 과학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사람들을 통해 쓰여진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된 피조 세계에서 관찰되는 사실이 피조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주장이 옳은 지에 대한 판단은 성경과 과학적 지식의 두가지 틀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성경에 대한 해석이나 과학적 지식에 대한 해석 모두 불완전한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성경 자체는 완벽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의 지식 수준은 완벽할 수 없을 것이다)에 의거해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성경의 진리를 모두 다 알고 있지 않다. 또한 위대한 과학자라고 해도 피조 세계의 원리를 모두 알고 있지는 못하다. 사실 많은 과학적 지식이 그 시대의 패러다임과 과학자들의 주관에 따라 해석된 부분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과 과학적 지식의 두 가지 틀을 가지고 어떤 사실들이 옳은 지에 대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단 한번의 판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feed-back이 필요할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 해석의 한계,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성경과 과학의 주장을 오가면서 성경이 주는 정확한 답변과 과학이 주는 정확한 답변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성경과 과학이 서로 다른 대답을 주는 것에 대하여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다. 내가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고, 또는 과학지식이 잘못되어 있거나, 내가 잘못된 과학적 지식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과 과학지식의 두 가지 틀을 가지고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단하려고 할 때 두 가지 틀이 끝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 성경에 대하여 바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성경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성령님은 언제나 바른 해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물론 성경에 대한 해석에는 우리의 지성과 지식을 성령님께서 사용하시고, 다른 사람의 지식도 사용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 존재한다. 우리 나라의 개혁주의 신학은 이런 점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뜻을 바로 해석하기보다는 성경을 하나의 고대 자료로서 다루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인본주의 또는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주변적인 것에 대하여는 잘 설명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깜깜하다. 과학과 성경의 갈등을 다룰 때 인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성경을 자신의 주장이나 과학의 틀에 맞춰 억지로 해석해서 그 갈등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성경과 과학의 갈등이 있을 경우 이러한 갈등도 성경의 저자이며 피조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가지고 가야 해결될 수 있다. 인간적인 지식에만 의지하지 말고, 시간이 걸리고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을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한다. 하나님은 그 해결 방식에서 성경과 과학 모두를 사용하실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갈등이야말로 도리어 성경에 대한 더 깊은 해석과 과학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진화론 비판 
김광웅   01/12/27 21:35 | 조회수 2
 
 
진화론 비판 작성일: 2001/12/22 작성자: 김광웅 교수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소고 신 재헌 (과기원창조론연구회,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 <글의 순서> I. 서론: 용어의 정의와 중요한 논점들 II.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 III.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 IV. 성경과 과학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 I. 서론: 용어의 정의와 중요한 논점들 진화론을 신앙안으로 수용하자는 주장 ―유신론적 진화론― 이 최근 기독인들 중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 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과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성경해석학적 고찰을 통하여 진화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근본주의적 창조과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성경과 과학의 올바른 관계정립에 대한 도전을 주고자 한다. 앞으로의 논리전개를 위하여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련된 용어들을 간략히 정의 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는 소진화와 대진화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고, '진화론'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과학 이론이다. '소진화'란 보통 어떤 종(species)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과 종분화(speciation) 과정을 수반하는 작은 변화를 의미한다 [1,2]. '종분화'란 어떤 종이 지리적 격리 등과 같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어미종(원래 종)과 상호 교배할 수 없을 만큼 생식적으로 격리된 새로운 종을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3]. (종분화의 정의는 종의 정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예를 들면 유전적으로는 교배가 가능하지만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절대로 교배하려고 하지 않는 두 생물군을 같은 종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다.) '대진화'란 현재 생물계의 모든 분류군들이 오랜 시간동안 소진화 즉 종분화와 같은 미세한 과정의 축적에 의하여 최초 (무생물의) 형태로부터 유래했음을 의미하는 (가설적) 과정이다 [1,2,4]. 많은 진화론자들은 종분화 자체를 대진화로 여기면서 종분화에 대한 증거들을 가지고 대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데, 애석하게도 창조/진화 논쟁의 격렬한 싸움들은 이와 같이 진화에 관련된 용어들의 정의를 엄격하게 사용하지 않는데서 대부분 비롯된다 [5].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창조적 진화론이라고도 하는데 진화를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태초에 시공과 물질 그리고 자연법칙을 창조하셨고 그 이후에는 부여하신 자연법칙 하에서 자연적인 과정으로 우주를 형성시키셨고 생물들을 진화시키셨다는 것이다 [6,7,8]. 온건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최초 생명체의 발생과 인간 영혼의 창조 등 일어나기가 매우 어려운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특별히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직접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물의 기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많아지는 기준으로 몇 가지 기원론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신론적 진화론 → 이신론적 진화론 → 유신론적 진화론 → 점진적 창조론 → 순간(명령)적 창조론 여기서, '이신론(理神論)적 진화론'이란 태초에 빅뱅을 시작시킨 원인이 초자연적 존재냐 아니냐 라는 점에서만 무신론적 진화론과 틀리고 나머지는 무신론적 진화론과 같다 [9]. 이러한 이신론적 진화론은 우주와 생명의 발전에 있어서 어떠한 신적 목적이나 계획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전적으로 비기독교적 견해이다. '점진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매우 긴 지질학적 시간동안 단계적으로 창조하셨는데 각 창조의 사이사이에는 소진화를 사용하셔서 종들을 다양하게 하셨다 라는 것으로 지질학적 발견들을 성경과 조화시키면서도 대진화는 인정하지 않는다 [10,11]. '순간(명령)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행위를 통하여 사실상 거의 즉각적으로 모든 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으며 그 생물들이 원래의 종류에서 크게 벗어남 없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라는 것으로 [9], 홍수격변설과 함께 창조과학의 이름으로 활발히 주장되고 있는 창조론이다. 점진적 창조론과 순간적 창조론은 창세기 1장에 나와 있는 '종류대로의 창조'를 지지하는데, 이 때의 '종류'는 현재 생물분류학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취급하는 '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속(genus)'이나 '과(family)'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종류라는 단어를 종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하면서 종분화까지도 부인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좀 더 온건한 창조론자들은 종분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5]. (앞으로 특별한 수식어 없이 그냥 '창조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점진적 창조론과 순간적 창조론을 함께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다.) II.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 과연 대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과연 모든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발생되어 어떤 자연적인 과정을 거쳐 현재의 복잡한 형태로까지 되었다는 주장을 사실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본 장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과연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 첫째, 진화론자들은 소진화의 사실성이라는 측면을 연장해서 그대로 대진화에 부여하는 우를 범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소진화는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종 내에서의 다양한 변이로부터 어미 종으로부터 딸 종으로 분화하는 종분화 현상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식물의 경우 종분화는 관찰 가능한 과학적 사실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비록 직접 관측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16종의 갈라파고스 핀치새'라든가 '수백 종의 하와이 초파리' 등과 같이 종분화를 지지하는 몇 가지 '상황 증거'들이 있는데, 그 증거들은 ―물론 '종류' 내에서의 다양한 변이라는 창조론적 해석도 가능하지만― 일단 종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는 된다 [12]. 신다윈 종합설에 의하면 이러한 종분화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것은 '자연선택', '유전적 (돌연)변이', 그리고 '지리적 격리'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종분화 현상을 그대로 대진화로 여기면서 대진화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믿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인) 학자들은 소진화의 사실성이라는 측면을 연장해서 그대로 대진화에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13-17]. 금붕어와 지네의 차이나 낙지와 꿀벌과의 차이와 비교해 볼 때, 하와이 초파리의 종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너무나 미소하다 [17]. 그러한 미소한 형질의 변화가 쌓이고 쌓여서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형태의 기관'을 만들어낸다는 진화론적 설명은 실제적 증거가 아닌 가설과 유비를 근거로 한 추론에 불과한 것이다 [13]. 비록 우연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소진화의 메커니즘은 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매우 다른 형태의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내는 대진화의 메커니즘으로써 역시 동일하게 사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마이클 덴튼(M. Denton)은 이러한 상황을 '날씨 변화'와 '계절 변화'에 비유하는데, 매일 매일의 날씨 변화를 설명하는 고기압이나 저기압과 같은 현상을 가지고 계절 변화와 같이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7]. 종분화가 대진화의 메커니즘이 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논증은, 종분화 과정이 유전정보가 새로 생성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잃는' 과정이라는 주장에 기초한다 [18]. 새로운 기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 기관의 특성을 규정하는 유전정보들이 새롭게 생성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파충류가 진화해서 조류가 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던 날개가 생겨야 될 뿐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허파나 심장 같은 여러 기관들도 그 형태가 엄청나게 변화해야 하는데 [19], 이러한 과정이 실제로 일어나려면 새로운 기관의 특성을 규정하는 기능적 정보들이 하나 둘 생성되어 기존의 유전정보에 첨가되거나 아니면 기존의 것을 대체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종분화 과정은 특정 유전정보를 잃음으로써 어미종으로부터 분리되어져 가는 현상이므로 이와같은 대진화적 변화의 근거로 제시되기가 힘들다 [18]. 최근에 필자는 만약 대진화가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새들이 점점 진화해서 나중에는 우주를 날라다니는 새들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새가 수 억년 (또는 수 십 억년) 뒤에 우주를 날라다니는 생물로 진화될 수 있을까? 혹자는 허황된 소리라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대진화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 먼 훗날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화론의 가능성에 너무나 심취된 나머지, 진화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식의 어떤 '신앙'적 형태로 진화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 줄리안 헉슬리(J. Huxley)는 다윈 100주년 기념식에서 "생명의 진화는 이제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의 근거이다... 우리는 의미론과 정의라는 수렁에 빠져서 꼼짝 못하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라는 식의 교조적 발언을 했다 [13]. 반면, 그 바로 전 해인 1959년 독일의 동물학자 베른하르 렌쉬(B. Rensch)는 대진화는 소진화 과정을 연장해서 설명할 수 없으며 현재 알려진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당시 지도적 생물학자들의 리스트를 제시하였다 [20]. 이러한 의견 차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진화론의 두 번째 문제점은 진화계통수상의 가상적 공통 조상들과 전이 형태의 생물들이 화석 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대진화가 사실이라면 원시 단세포 생물과 현재의 복잡한 생물들 사이에 있을 법한 수많은 '공통 조상' 또는 '전이 형태'의 화석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오히려 전이적 형태의 부재가 더 일반적인 법칙임을 보여주고 있다 [21, 22]. 거의 모든 주요 무척추동물 문들의 대표들이 어떤 전이 형태 없이 갑자기 등장한 소위 '캄브리아기 폭발'이나, 대부분의 '피자식물' 즉 꽃식물들이 이들이 속하고 있는 군의 분류 형질을 그대로 갖고 특수화 된 채 백악기에 돌연히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출현초부터 고도로 특수화 되어 있고 서로가 고립된 분류군으로서 돌연히 출현하고 있는 '어류군' 등은 아직도 해석이 안되는 골칫거리로 남아 있고 [21, 22], 이 외에도 화석상의 수많은 의문점들이 점진주의적 다윈 진화론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현재 주류 기독인 생물학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리처드 라이트(R. T. Wright) 교수는, "화석은 진화에 대한 단 하나의 진실한 역사적 증거이지만 이는 점진적 다윈주의자들이 제안한 계속적 변화이기보다는 불연속적 기록이다. 즉, 전이적 형태들보다는 공백이 더 많은데 이는 대량 멸종이 발생하며, 새롭고 복잡한 것들이 화석 유물에 아주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들은 감지할 만한 변화 없이 수백 만년 동안 존재한다... 즉, 진화론의 경우 문제점은 화석 증거의 부족 ―전이적인 형태의 부재― 에 주로 기인하며.." 라고 말한다 [21]. 이외에도 대진화의 가설적 추론적 성격을 보여주는 몇 가지 논점들이 더 있지만 그것들을 다 살펴보는 것은 본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본 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최근 몇몇 주도적 신학자, 과학자, 과학철학자 등 여러 분야의 기독인 학자들에 의하여 활발히 주장되고 있는 '지적설계가설' (intelligent design hypothesis, ID)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ID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발견된 많은 생물학적 지식들이 생물이 진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적 설계에 의하여 탄생한 것임을 증거해준다고 말한다 [23]. 이것은 세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물학적 기작들이 '환원'될 수 없을 정도의 복잡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명현상이 자연적으로 탄생했다고 믿는 것 보다는 어떤 설계자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 훨씬 더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모래 사장에 쓰여진 어떤 글자를 볼 때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파도와 바람에 의해 저절로 생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그 글자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이듯이, 그리고 과학자들이 외계에서 오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것도 그러한 메시지가 자연적으로 날라온 것이 아니라 어떤 외계의 지성적 존재가 보내 준 것이라는 지극히 정당한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듯이, 복잡하고 정교한 생명현상을 보면서 지성적 존재에 의한 설계를 추론해 내는 것이 결코 '비과학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24]. 이러한 논의는 다분히 과학철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차후에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행해질 것이라고 기대된다. 

 


한국 프로테스탄트 
김광웅   01/12/27 10:23 | 조회수 4
 
 
한국 프로테스탄트 작성일: 2001/12/25 작성자: 김광웅 목사 과 목 : 한국교회사 및 성결교회사 담당교수 : 강 근 환 박사 한국에 정착된 프로테스탄트의 유형 ( 한국교회의 신앙형태 구형과의 관계성 ) 발표일 : 1992.5.6. 제출자 : 박종석 박종천 박필현 백운모 변미경 봉근옥 서경란 서한태 성수환 손동식 손선일 손성국 손유태 송기주 송영득 신동운 신동은 서 울 신 학 대 학 Ⅰ. 머릿말 그리스도교 신앙은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그 어떤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역사를 뚫고 들어와 일어난 실존의 사실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곧 하나님 자신이 문화속에 들어오셨듯(Incarnation),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또한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아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에 접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인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기구로서의 역사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역시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특수상황속에서 선교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한 견지에서 서구 교회를 필두로 시작된 미국 교회와 그외의 나라의 선교활동을 살펴봄과 동시에 이것을 다시 국내에 정착된 교파(Domination)에 촛점을 맞춰 심도 깊은 연구를 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때(kairos)와 문화적 제약성으로 인한 문제점을 살피고, 이러한 복음과 문화의 이중구조속에서 형성되어진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를 고찰하고자 한다. Ⅱ.서구(유럽) 교회의 선교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될 결실을 남기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다가 지나가고 말았다. 서구형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파형의 미국적인 기독교와는 달리 국가적인 범위로 확대되어 있어서 교회의 유기적인 연결과 결속면이 강조되고, 따라서 공동체의 신학과 교회론적인 신앙의 의식이 훨씬 강했다. 이렇게 한국선교를 시도했지만 언제나 바닷가만 지나간 서구교회의 선교에 대해, 선교사들의 모습과 실패의 원인, 의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선교사들 먼저 벨트브레(John.J.Weltvree)와 하멜(Handrik Hamel)은 서양의 사람으로 발을 내딛기는 했으나 한국의 기독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 바질 홀(Basil Hall) 1816년 서해안 측량을 목적으로 배를 탔으나, 그해 9월 1일 황해도 백령도, 청도 근방에 상륙하여 물품과 한문 성서를 나누어 주었고, 군산으로 가서 관리들을 만나 선물과 성서를 전했다. 전라도 다도해 근방을 10일간 순항하면서 추자도에도 상륙하였다. 2) 칼 구츨라프(karl A.F. Gutzlaff) 프랑스 신부 바텔레미 브루지에가 최초의 한국 신부로 임명받던 1832년에 한 사람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도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의 이름은 칼 구츨라프이다. 그는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박으로 상로 탐색차 황해연안을 답사하러 왔던 전(前)네델란드 선교회(The Netherland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서구교회의 선교사였다. 그는 모리슨의 영향으로 동양에 눈길을 돌렸고, 중국에 와서 사이암어로 신구약을 번역하였고, 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백 도, 대청도, 소청도를 들러 충청도 홍천 길대도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성서를 나누어 주었으나, 상륙은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얼마 안되어 광명한 날이 한국에 임할 것을 소망했다. 그는 선교사다운 열의와 함께 상역(商易)과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이양선(異樣船) 문제에 대해서는 근대사에 잊을 수 없는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3) 로버트 토마스(Robert J.Thomas)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는 1840년 영국 웨일스의 라야더(Rhayader, Radnoshire)에서 태어나서 런던 대학교 뉴 칼리지(New Collge University of London)를 졸업하고, 1863년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했으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또한 상해의 런던 선교회 총무인 무어헤드(Wm. Muirheard)와의 불화로 선교사 사직원을 제출하고 세관에서 근무하다가 조선인 동지사 일행을 만나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알렉산더 월리엄슨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4일에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한다. 이때 그는 한국말을 배우고 성서를 나누어준 뒤 북경으로 돌아간다. 얼마후 제너럴 셔만호(General Sherman)에 편승하여 1866년 8월 대동강 입구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함으로 결국 모든 선원이 살해되고, 토마스 목사는 칼로 그를 치려는 사람에게 성서를 주려했으나, 받지 아니함을 보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다가 순교하였다(1866. 8. 3). 토마스 자신의 행동과 선교방법론에는 엄연히 서구적인 교회신학이 그 기조가 되고 있었다. 4) 알렉산더 월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1866년 스코틀란드의 장로교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한국인 상인들과 그리고 동지사 일행을 만나 그들의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놀랐다. 그는 토마스 목사 순교후에 한국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만주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고 고려문에 와서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성서를 팔았다. 또한 한국 선교에 대한 열의로 해서, 한국에 대한 서구 기독교 여러나라의 무력 간섭을 꾀하였고 그 무력의 시위로써 개국을 강요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5) 존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스코틀란드 선교사인 존 로스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는 1872년 만주에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3년 때마침 의주 청년들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를 만나 신문화를 가르쳐주고 한국말을 배웠다. 그것은 1875년에 성서번역의 대업을 착수했으며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1883년에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884년에 마태복음이 발간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마침내 신약전서가 번역, 간행되었다. 2. 실패원인과 의의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되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고 지나갔다. 그 이유는 서구형의 교회 생리가 기독교국(Christendom)의 관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관계되는 한 로마 카톨릭과의 형태적 동일성이 두드러졌고, 그에 따라 시대적으로나 교회론적으로 조선풍토에 도입될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여러모로 단절된 순수한 형태의 복음, 소위 복음주의적이고 부흥회 타입의 교파적 교회에서 가능성이 열릴 수 밖에 없었다는 필연을 가진다. 이렇게 한국정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성서를 보급함으로써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닦은 점에서 한국교회사 최초의 장(page)에서 길이 빛날 공헌을 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이응찬, 서삼륜과 함께 한국말 성서 번역을 한 것과 그들과 관련된 한국인 전도자들을 한국 민족 교회사의 첫틀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Ⅲ. 정착된 프로테스탄트교회 유형 1.미국 교파형 교회선교. 1) 미국 북 장로교.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중에서 처음으로 주재 선교사를 파송한 영예를 가진 교회는 미합중국 북장로교회였으며, 한국에서 체재하면서 일한 최초의 선교사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 - 1932)이라는 의사였다. 알렌은 1883년 10월 11일 상해에 도착하여 지내던 중 중국 산둥성 주재 미국 선교사 레이드가 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회고하자 한국으로 갈것을 결심하였다. 알렌은 1884년 6월 22일 서울에 들어왔으나 선교사로 들어올 수 없었기에 미국 영사관의 공의로 일하면서 전도하였다. 갑을정변으로 인해 민영익이 상처를 입었으나 알렌의 의술로 치료하여 왕실의 시의관으로 임명되고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정하게 되어 미국 선교사의 선교의 전도에 밝은 전망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복음 선교사로 언더우드가 들어오게 됨으로서 본격적인 선교가 추진 되었고, 이후 북장로교는 해방전까지 300명의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여 한국에서 장로 교회가 가장 큰 교세를 차지하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2) 미국 남장로교. 미국 장로회의 외지 선교는 1861년까지는 단일 사명으로 추진되었으나,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장로회가 따로 조직됨으로 외지 선교도 갈라지게 되었다. 미국 남장로회의 외지 선교회의 목적은 '기독교의 전파와 교회의 조직'이라 하였다. 남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북장로교회보다 8년 늦게 시작 되었다. 그것은 1891년 10월에 안식년으로 귀국한 언더우드가 내슈빌에서 모인 외국선교를 위한 신학교 협의회에서 조선선교를 호소함으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데이트(L.B.Tate), 존슨(C.Johnson), 레이놀즈(W.D.Reynolds)등이 선교사로 임명받고 1892년 내한하였다. 이것이 남장로교의 한국교회선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후 그들은 최초의 선교지부를 전주에 세웠고 1898년 목포에 지부를 세웠다. 따라서 제주도를 포함한 한국 남서부지방은 사실상 한국에 온 남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남장로교는 주로 호남지방에서 선교하였는데 해방전까지 178명이 내한하였다. 3) 미국 북감리교. 미국 북감리교는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함으로 정식선교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선교부 개설은 그보다 1달 늦게 내한한 스크랜톤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펜젤러는 부인과 함께 왔다가 국내사정이 어수선하여 일본에 갔다가 두달 후에 다시 내한하여서 1 886년 배재학당을 세우고 교육사업과 함께 성서번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스코랜톤은 1885년 5월 3일 내한하여 서울 정동에서 병원사업으로부터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 스크랜톤 여사는 이화 학당을 세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을 시작한 공로를 세웠다. 4) 미국 남감리교. 남감리교의 한국선교는 1895년에 시작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1887년) 후 미국에 유학하여 남감리회 본부에 한국선교를 요청했던 윤치호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한국선교는 1895년 10월 13일 중국에 있던 리드(C.E.Reid)가 내한 함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남감리회는 서울과 개성 및 춘천 이북의 강원도 지역에서 선교하였다. 2. 그외 교파형 교회의 선교 한국선교에서 비록 미국계의 교파는 아닐지라도 교회의 이해에서 교파적 형태의 신학을 취하는 교회의 선교가 여럿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교회는 다음과 같다. 1) 호주 장로교. 미국에 이어 그 다음으로 한국선교를 개시한 선교회로, 호주의 빅토리아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해외 선교회였다. 18 89년 선교사 데이비스(J. Henry Davies)목사와 그의 누이동생이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교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 밖에 안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열은 왕성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무대로 삼아 선교하면서 한국선교에 체계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너무나 먼 거리를 도보로 여행한 것이 무리가 되어서 병약하던 중 아깝게도 천연두에 감염되어 입국한지 1년이 되어 부산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 호주 전체 장로교회에서 한국선교에 대한 열기가 높아져 이후 해방 전까지 77명이 내한하여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호주교회는 경남지방에서 농촌교회와 부녀자 교육을 위해 남다른 공헌을 하였다. 2) 영국 성공회. 영국 성공회(The sowety for Propaagation of the Gospel in Forign parts 약칭 S P G) 는 영국 해군 군목이던 코르프 (C.J.Corfe) 신부를 1889년 11월 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한국 주교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9월 29일 내한함으로 성공회의 한국선교가 개시되었다. 성공회의 한국에서의 첫 교회는 1891년 5월 17일에 서울 충무로(지금의 대연각 건물이 있는 지역)에 선교본부와 함께 성당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부활의 집"이라 하고 공동생활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