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중세 교회사

2009. 10. 23. 02:01교회사자료/3.중세교회사

중세 교회사

 

심창섭

 


*  중세기에 대한 견해, 편견들이 중세 교회사를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先理解를 가지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다. 보수주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보는 중세기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콘스탄틴대제 이후에 중세기가 물들기 시작해서 마틴 루터의 95개조항이 중세기를 못박는 것으로 보는데, 역사는 이렇게 어떤 기간을 못박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였다.
  르네상스의 주장은 고전으로 돌아
는 것이었다. 특히 언어문제에 있어서 그러하였다. 중세의 라틴어, 로마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것, 우리의 문화로 돌아가자는 것이 인문주의자(에라스무스)의 주장이었다.
   라틴어를 쓰기 보다는 그리스 시대의 문화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났다. 중세에 대한 비관과 더불어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중세기를 비관적으로, 고전을 화려한 것으로 본 사람들 중에는 루터나 칼빈도 포함된다. 중세 이전의 교회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초대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였던 반면에 중세교회는 잘못된 교회이다라는 사상이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 들어오면서, 중세기에 대한 발견이 다시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중세기의 찬란한 부분이 발견되자, 중세기를 재고민하게 되었다. 중세기의 병폐는 중세기나 초대교회에나 마찬가지로 있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계급의식은  중세시대보다 현대가 더 심하다. 그렇다면 중세는 나쁘고 현대는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역사를 관찰하면서, 중세역사의 과오를 분별하고, 장.단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중세 교회사에 나타나 있는 사상이나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의 교회는 중세교회와 비교해 볼 때, 어떤 위치에 와 있는가? 하는 것을 고찰해 내어야 한다.
  중세교회가 코페르니쿠스를 정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말에 와서야 그 정죄를 풀어주는 우서운 일을 저지러는 교황청과 마찬가지로, 오늘 교회에서도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는가?
  중세 교회사는 초대와 현대의 동일선상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고대와 현대를 비교하면서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발견하는 것이 과제이므로  20세기 개신교, 한국교회와 비교함으로서 우리의 나아갈 바를 찾아 보는 것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
 

   중세기라는 기간은 종교와 사회를 분리시킬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분리할 수 있다, 없다 하는 것을 두고(Separation   /Distinction) 논란을 삼았다.  Main Line Church에서는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를 Serpration개념으로 본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볼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극단< 온건<보수) 공식이 성립한다. 개혁을 통해서 승산을 거둔다는 것은 희생될수 밖에 없었다. 개혁이 승산이 없으면 혁명(Revolution)을 일으키게 된다. 종교혁명이 그와 같은 경우이다. 온건파의 세력은 다수의 세력을 지키면서, 유지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마틴 루터 킹의 말에 의하면 "나의 가정 큰 적은 KKK가 아니다. 흑인 중에서 나를 반대하는 세력도 아니다. 미국의 가장 큰 적은 미국 백인 중산층이라고 하였다."
온건,보수파에 속하는 사람은 Separation이라는 개념이 없다. 이권 문제가 있을 때는 국가와 손을 잡아 왔다.  말로는 국가와 교회는 분리라고 말하지만, 항상 손을 잡아왔다. 현실에서는 Distinction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온건이나 보수파는 항상 <실용적>이다.  한신은 반정부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정부의 반대세력으로 부상되어 왔는데, 한국의 역사를 보면, 일본이 세운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도리어 일본정부와 유착되어 있었다. 자유당 시대때도 유착되어 있었다. 고신측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Seperation의 개념을 가지고 싸웠다. 장면세력이 들어오면서 한신은 반대, 고신이나 보수는 손을 잡는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되었다.  군사 독재시대에는 신앙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수그러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유착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신이나 고신이나 합동이나 반대하나 찬성하든 정부에 간섭하고 있는 현실이다.   <제세례파>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세상과 완전히 결별되어 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면에서, 기능적인 면에서 가장 큰 기능은
세례를 주며, 성만찬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게 하며 성도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유지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면에서 중세 교회를 보면, 세속 권력자가 성직자가 할 수 있는 기능을 대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정부와 교회는 더 분리되어 있었다.  오히려 현대 교회가 더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초대교회>는 국가의 황제에게 신앙을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했다. <데오빌로 각하에게> 쓴 누가의 기록도 역시 국가 권력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기독교강요>도 프란시스 왕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계시록을 쓴 요한에게는 로마가 음녀, 사탄의 집단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바울은 롬13장에서 국가에 대해서 굉장히 온건하면서도 정부의 체제자체를 하나님이 세워주신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이 비록 못하더라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바울이 제 2기독교를 건설했다고 할 정도로 역할이 컸다. 바울의 롬 13장이 없었다면 서방교회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앉아 있는 자리와 바울이 앉아 있는 자리와는 전혀 다르다. 밧모섬에 앉아서 동굴속에서 쇠고랑을 차고서 채광해야 하는 도미티안 핍박하에서는 요한에게는 그들이 사탄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시민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House Arrest(가택연금)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편지도 쓸 수 있고, 가택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 정부에 자기의 상소를 올렸다. 로마제국을 자기의목숨을 지켜 주는 방패막이로 생각했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의 Version, 차이점이 난다. 
  초대 교회를 볼 때, 흑백논리로 보아서는 안된다. 초대교회가 국가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바울이 정교유착정책을 사용하였다고 볼수 있다.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며, 국가에 의해 기독교가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313년에 콘스탄틴대제 때부터 기독교가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다른 종교 중의 하나로 기독교를 핍박하지 말고 믿어도 좋다고 한 것이지 유일종교, 국가종교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유세비우스>의 갈리아 지방의 핍박을 보면, 아주 상황이 심각했다.  그 당시 시장에 나와 있는 우상 숭배한 제물을 두고 먹어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 먹지 않으면 안될 상황,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말했는가>  사 먹어도 좋다고 하였다.(Amoral)
  바울은 중간에 서서 온건하게 지혜를 사용하였다. <죄없는 자가 돌로 쳐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한 예수님의 지혜를 바울은 사용하였다. <로마시대에는 목욕을 하지 않으면 전염병이 걸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 들어 오게 된다. 화장실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비위생적인 도시였다. 그래서 한번 전염병이 생기면 온가족이 몰사하게 된다. 그래서 귀족들은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서 바닷가나 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공중목욕탕에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문화적인 형태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삶의 기본조건을 박탈해 버렸다. 공중목욕탕에 가지 말라, 거리로 나가지 말라. 사형, 구타, 돌던짐을 허락하였다. 감옥에서 죽으면 개의 먹이가 되었다. 시체 등은 불에 거슬리어 6일간 전시한 후 화장해서 물에 뿌렸다. 왜냐하면 부활할까 싶어서.
  <터툴리안>은 이런 말을 하였다.  터툴리안이 표현한 기독교인은 몰이군이게 몰리는 토끼라고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트에 보내는 문서에 보ㅇ면,   <하나님께서 제국에 독재권을 인정하였다. 제국의 성스러움과 영광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기독교가 몰리면서도 불구하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부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핍박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아리나스다고>의 경우에도 로마 황제의 통치권이 나날이 증가되어서 평화의 날이 오도록 기도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이 평안한 가운데서 안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권력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로마가 망하면 세계의 종말이온다고 생각했다. 로마라는 세계는 영원히 망할 수 없는 나라라고 기독교인들이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로마로 밀려든 것은 로마가 영원한 제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키프리안>교부도 " 기독교인들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위해서 , 풍부한 강우량을 위해서 항상 신에게 기도함으로서 이교도의 국가지만 로마 제국에게 평화와 구원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오늘날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과 똑같다. 바울적이다.
<터툴리안>" 우리는 황제에 장수와 확고한 통치, 용감한 군인, 안락한 가정, 충실한 원로원들, 평온한 세계, 모든 왕자들과 권력자들을 위해서, 황제를 위해서 모든 것이 평화스럽게 되도록 기도합시다"

  로마제국의 지속이 종말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 기독교는 로마가 그들의 국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긴박한 재림이라는 컨설트 가운데서 <바울은 결혼에 대해서>이야기 하였다. 바울은 <곧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생각하였다. 특별은혜 가운데서 생각할 때는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별은총에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신앙이 좋고, 결혼을 하는 것은 좀 못하다고 카톨릭에서 해석했다.  중세기에는 신부들이 첩을 많이 거느렸다.  그래서 헨리 7세가 종교개혁할 때 결혼한 신부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독신제>가 그 정도로 어려운 것인데, 바울이 그럼에도 독신제를 강조한 것은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전제를 가지고 오고 오는 세대에 모두 적용하려는 것이 문제이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것은 특별한 컨택스트에 적용한 것인데, 그것을 오고오는 세대에 적용하고 있다.
특별한 상황에 생긴 모드(Mode)를 가지고 예수님 오실 때까지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이다. 바울의 특별한 상황, 특별은총가운데서 생긴 그것을 로마 카톨릭은 계속 적용하고 있었다.
 
  헨리 7세는 성직자는 가정이 있을 때, 성직매매하면서 부를 축적하기 때문에 성직자는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해서 국가체제에 대해서 교부들은 (박해 속에서도 미워하면서도) 국가에 대항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탈출구를 마련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황제와 국가는 기독인들의 보호자라고 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는 가운데서는 <하나님이여, 지금 국가가 박해하고 있는 것은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국가가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국가 자체에 대해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돌려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콘스탄대제 이후에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됨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회복된다. 유세비우스 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를 (Mica of God)이란 표현을 하였다.(하나님의 사자)
   게르만 족의 한 종족이 로마를 정복했을 때, 로마는 하나님의 도성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게르만에게 패배했을 때, 기독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 어거스틴은 신국과 지상의 나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두개의 기둥(신국과 지상의 나라)이 있는데, 이 세상의 나라는 정복당할 수 있다는 글을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에서 쓰고 있다.  국가와 신국이 중세 교회의 두개의 폴로 서 있었다. 신국의 본질이 지상 나라의 본질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하였다.
   어거스틴은 신국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적인 제국주의를 만들어 내었다.
  중세기의 종교와 사회에 있어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고, Christiandom(기독교왕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정.교가 밀착되어 있었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유착되어 있는 이것을 완전히 팽창된 분위기를 깨뜨려서 새로운 개인적인 신앙의 자유로 교회상을 뒤바꾸기 위해서 생긴 것이 <종교개혁>이었다. 개인적인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과 자유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결국 종교적인 해방운동이었다.
  이런 조직적인 사회 전체와 통일화된 정책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중세기처럼 이렇게 신앙이 동일하게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교회의 정책이 정체화 되는 것이 인류역사에 일어나지 않았다.
 <이슬람국에서는 지금 토탈리즘 시키고 있다>

   중세기는 체제적인, 제도적인 면에서 기독교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4세기에서 오직 정통을 주장하고 순종하는 신자만이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서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로마교회의 신앙을 위배하거나 제도에 불복종할 때 불이익이 주어졌다. 

<토마스 아퀴나스>
 그들은 영원히 노예로 만들어져야 마땅하다.
 모든 재물을 빼앗아 버려야 한다.
 이단들과 같이 생각했다.
 유대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당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유지한 것 외에는 로마라는 사회는 Compulsory Society였다. 가장 종교의 자유가 없었던 시기가 중세교회시대이다.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이었다. 영세를 받으므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교회에 절대복종해야 하였다. 그것은 농노제도와 비슷한 복종이 요구되었다. 자발적인 것이 없었다. 강요로 기독교신자가 되었던 중세교회는 하나의 국가적인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중세 교회는 국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종교재판의 기능도 다 있다.
 중세기는 교회가 삶과 죽음의 모든 권한을 잡고 있었다. 그것을 잡고 있었던 제도가 7 Scraments( 7 聖禮) 였다.
세례/ 견진 / 성만찬 / 고백 / 결혼 / 성직수여 / 종부성사로 한 개인의 일생이 끝난다.  나중에는 죽음까지도 관장하는 연옥설을 만들었다.
  중세교회는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잘못을 했을 경우에는 벌을 받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엄청난 중세의 조직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교황은 엄청난 권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떨 때는 이교도와의 싸움을 해야 할 경우가 있었는데, 그 전쟁을 교황이 주장했다. 평화조약도 교황이 하였다.  중세 교회라는 것은 종교재판을 통해서 통치하기 시작했고, 세속통치와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속에 있는 황제가 교황을 도와 주었을 경우에는 중세 교황의 권한은 하늘을 찔렀다.   그러므로 자유주의가 허락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모든 중세사회가 복종하는 경우였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구원의 방주는 교회에만 있다고 주장하였다.
  우주적인 의미에서는 <중세사회를 관장하는 유일한 국가>(The State)였고, 하나의 거대한 사회 (The Society)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세교회는
Universialism(보편주의)로 나아갔다.
  중세교회에서 특히 어두운 점은 순교자들이나 성자나 그들의 유굴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성물숭배사상)
  특별히 성스러워지기 위해서 순교자의 무덤 위에 무덤을 만들었다. 초대 교인들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미신이 많았다. 그리스나 로마의 여자신을 받아들여서 마리아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무덤도 카타콤에서 훌륭한 지도자와 매장지 주위가 훨씬 더 비샀다.

 

 UNIVERSALISM

  중세 교회 개념은 보편주의 개념이다. 이것은 종교 자체가 보편화 되어서 인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중세기의 색깔이 종교개혁과 비교하면, 종교개혁은 진리의 핵심을 외치는 반면, 중세교회는 문화 속에서 교회가 어울려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의 입장에서 중세교회는 미신적이었다. 성자들의 유골, 유품을 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자들의 유품이나 유골이 많이 모신 교회가 훌륭한 교회이기 때문에 순례자들이 많이 모이기도 하였다.
  말씀 중심보다는 신앙의 영성을 불러일으키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루터도 자기 조상을 숭배하였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민간신앙을 믿었다. 다윗이 도망할 때 미갈이 침상에 우상을 대신 눕혔다. 다윗의 집이 우상을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중세교회에 흘러내려오면서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 하면서도 이방신을 섬겼고 우상숭배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방민족이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섬기던 전통적인 이방문화와 접목시키는 경향으로 흘렀다. 예수님의 유품이나 세례요한의 유품을 가지고 신앙을 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1240년 이후에는 유골들, 유품들로 인해 교회가 돈이 많아지므로 유물들을 상으로 만드는 경우가 생겼다. 교황청에서는 가짜가 많았으므로 공증인들을 파송하기도 하였다.
  중세기는 역사가 흘러가면서 비진리와 진리가 함께 나타났다.
  <수도사들이 주로 한 설교>
      PAPARY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레고리 1세>
  부유한 집에 태어나서 자기 부모가 죽고 난 뒤, 시실리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원로원집에서 태어나 높은 지위에 있다가 회심하였던 사건이 일어났다.
313년에 콘스탄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기독인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2세기 600만, 3세기 5000만 정도 였다. 동방교회에서는 3세기에는 6백만, 4세기 1천백만정도가 되었다.  1세기 기천명, 2세기 7천명, 3세기 200만, 600만, 1천 5백만정도 늘어났다.

  전체적인 기독교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기독교가 완전히 자기 몸에 접목하기 위해서 추구했던 사람들이 수도원이었다. 개정했던 그레고리1세야말로 수도원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수도원을 생각할 때, 수도원 연구 자체가 좋지 못했다.
*수도원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간 이유*
1.세속의 부정과 세속의 생존을 도피하기 위해서
2.이교도의 금욕주의 영향을 받았다.
3.교회 안에 도덕적인 정화를 위해서
4.313년 이후에는 박해가 없어졌다. 그러므로 순교가 없어졌다. 순교의 열정을 가지고 있던 신앙인들이 순교을 대신할 있는 삶을 찾다보니 수도원 생활을 하였다.
5.신플라톤주의, 오리겐 등의영향으로 육신의 삶을 깨고 영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경향 때문.
  이 사람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완덕주의(Perfectionism)였다.
마 16;24 > 자기를 부인하고........../ 중세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재산 부인이다.(Poverty)
 *자기 육신과 가정의 삶까지 부인해야 한다(Celibacy)
 *순명
이런 것들은 자발적이었다. 결국 신앙이 협소화하였다. 그런 신앙만 신앙이라고 하는 < 특능주의 신앙 >이 유착되었다.

청빈, 가난 등을 주장하는 경향으로 이단들이 나타남.

수도원의 창시자 안토니오는 마 19:21,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사회에 예언자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였다.

 파코미우스 시대에는 수도원에서 대량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파코미우스적인 수도원)

<수도원이 나쁜 점>
  *극단적인 금욕주의
  *순진한 것이 극단주의적으로 나갔던 것이 나쁜 점이다.

  수도원에서 개종되어야 한다. 중세기의 신앙적 틀을 수도원에 근원을 두었다.
그레고리1세는 스스로 교황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레고리 1세의 세번째로 중요한 목회자의 원리는 실제 목회현장에서 필요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4.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것은 <굳은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레고리 1세는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경직성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스스로 경직되지 않도록 인격을 연마해야 한다고 하였다.
 ( Disposition = habitas)
  목회자는 고집과 믿음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목사는 모든 교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들어주어야 할 사람인데, 자기 스스로 고집과 교만을 부리면 안된다.

5. 목회자는 덕행으로 교인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 한국에서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면 정의감이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겸손이나 온유나 마음이 청결한 것을 말하면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자는 복이 있고, 고난을 받는 자는 천국이 주어진다고 말했다.
  덕행을 행함으로 공의와 진리가 교인들에게 심겨질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의 자질이 없다.  주로 수도원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명상, 사색 등이다.

그레고리 1세가 가지고 있는 <포괄적인 목회자관>에 대해서 두가지로 말하면,
1. 열정적으로 말씀의 직무를 감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 하나님에 의해 강제적으로 직무를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열정적으로 대답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수 없나이다"라고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레고리 1세는 이사야만이 복음 사역자가 아니라 예레미야도 복음사역에 참여하는 훌륭한 사역자라고 하였다.  외부적으로 다르지만 소명에는 똑같다. 그러면서 그레고리는 같은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모세는 40에는 사람을 죽일 정도로 소명이 있었지만, 나이가 많았을 때에는 가지 않을려고 했다. 같은 사람이라도 신분에 따라서 달라진다. 모세가 젊었을 때에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반응과 나이 많이 반응한 것은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다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는 것임에는 다름이 없다.


6. 자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목회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사역을 하려고 하지 말라.>
  이러한 모든 것을 말하면서 그레고리 1세는 <11개의 지침>을 이야기 하였다.

1) 영적으로 선한 삶의 모범이 된다.
2) 육체의 모든 정욕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이다.-물질이나 다른 모든 욕망으로부터 극복하고자 해야 한다. 물욕, 세상욕, 권력욕으로부터 멀어지라. 멀어질려고 노력하라.  자제력을 길러라.
3) 세상적인 영광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4) 순탄한 삶을 살동안에도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5) 내적인 부요함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자 (인성, 영성 등 )가 되라.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확실한 사람. 그것만 확실하면 사실 외적인 관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6) 다른 사람의 물건에 욕심을 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것은 아낌없이 주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7)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스스로 용서를 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히 결정적인 잘못을 했을 때, 고백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용서를 빌어라. 그것이 목회자의 바른 자세이다.
8) 합당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되라. 이유없이 고개 숙이는 자가 되지 말라.
9) 사심없이 대중속에 살면서 그들의 모범자로 은근히 비치도록 하는 목회자가 되라.
10) 딱딱한 교리로 마음이 굳어 있는 사람이더라도 촉촉한 물로 생기있게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기도에 능통하면서 사람의 영을 쪼개면서 사람의 인품을 온화하게 하는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하지 않으면 목회자의 생명력이 없어진다. 기도를 하면서도 시련을 극복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선포해야 한다. 이런 인품을 가진 자가 주님 앞에 쓰임 받는 종이 될 수있다.

  그레고리 1세가 유럽 교회사에 있어서 전초전은 유럽의 전도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서구화>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서구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2개가 있는데, 그 하나는 <수도원>과 <정치권>이었다. 수도원에는 교황이, 정치권에는 황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정치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화였다.
  중세기의 유럽의 기독교화를 이룬 진원지는 영국이었다. 영국 가운데서도  <켈틱>수도원을 중심으로 해서 대륙의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켈틱 수도원이 대륙의 선교를 중세기 초기에 하기까지 앵글로족과 색슨족과 루터족에 대한 선교가 로마 카톨릭에서 보낸 선교사들에 의해 된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어거스틴이 들어갔을 때, 40명의 동료를 거느리고 들어갔다. 40명이 들어간 이유는 이방인들에게 공동체적인 헌신을 통해서 기독교의 경이로움과 기독교의 영적 파워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때 앵글로-색슨족은 반기독교적이었다. 기독교를 받아 들일 수 없는 강한 정서가 형성된 영국에 어거스틴이 들어갔을 때, 역사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 주었던 여자가 나타난다. Heptarchy(7개의 왕국) 중에서 애텔베르그라는 왕의 아내 베르다가 있었다. 영국의 켄트베리 주변에 선교사들이 들어가고 있을 때, 왕의 아내 Bertha가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그 때, 40명의 선교사들이 그레고리 성가를 부르면서 들어갔다.
  (중세기가 천년동안에 기독교로 밀착되면서 종개혁시기까지 그 배경에 보면 트로틸다라는 여자 한사람이 프랑크 왕국의 챨스 마르텔왕을 개종시켜서 중세 천년을 이어나갔던 것을 볼 수 있다.)

<대륙의 선교의 중요성>
  블란스, 포르투갈, 스페인은 빨리 전도되었다. 독일쪽으로는 전도가 되지 않았다. 그 저지대에 살고 있었던 프러시아 족속들이 반대하고 있을 때, 로마는 영국으로 갔다. 로마 사람들이 전도할 때, 영국의 수도사를 통해서 저지대를 기독교화하였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보니페이스이다. 독일 전역에 전도하였다. 그는 이교도의 우상을 강하게 밀어부치지 않은 것이 선교정책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잘못이 스스로 깨달아질 수 있도록 유화정책을 선교의 원리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전통에 대해서 인정하면서도 개종할 수 있도록 유화정책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유를 가지고 너무 강압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선교정책의 근본원리였다.

  중세 초반까지 가장 큰 문제가 동방의 콘스탄대제의 콘스탄티노플과 그 사이에 놀아나던 동방황제/ 서방의 황제같이 놀아나던 교황간의 갈등이었다.
  당시에 상황을 볼 때, 영국으로 전도갔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개인적으로 갔다기 보다는 로마교황의 사절단으로 보내졌다.
  교황이 직접 (목장, 가축,재산, 회계, 임대문제, 부동산, 토지개혁,세제)등 모든 것을 통해서 계급을 형성하였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전도를 나갔다. 서구화 문명에 있어서 수도원, 정치권 이 2개가 정치제도의 근간이었다. 영국을 보내질 때, 켈틱쳐치가 형성되어 있었다. 앵글로 색슨 족들이 들어오자 마자 불행하게도 교회가 앵글로 색슨족과 유트족의 이방인들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켈틱 교회들은 반발심으로 앵글로색슨족과 유트족을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이 들어가서 국가관을 형성할 때, 기독교 신앙이 우주 박애주의적인 사상으로 일어나지 않고, 민족신앙과 기독교신앙으로 접목되어서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이 그렇다. 일본사람들이 아무리 기독교신앙이 좋아도 나라와 기독교를 택하라고 했을 때, 궁극적인 면에서 나라를 택한다.
(우리 나라도 36년동안 핍박이 있을 때, 주일학교 교제가 성경위주로 되어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민족을 위해서 싸웠는지에 대한 기록이 교제에 나오지 않는데, 사실은 독립투사의 대부분은 신자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의 기독교 역사가 민족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러한 교육을 중등부에 시켜야 한다. 중고등부 학생들의 성경교제를 다룰 때, 환경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와야 한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대처하지 못하는 경향이 없도록 하였다. 현세를 살아가는 삶의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교제가 필요하다.)

앵글로 색슨족이 쳐들어 왔을 때,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족주의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 켈트족의 처지였다. 기독교가 민족의 차원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민족의식이다. 민족의 신앙을 떠날 수없는 것이 기본적 사상이다. 켈틱 족은 강하게 반발하던 차제에, 그레고리1세가 어거스틴을 통해서 선교의 문을 열게 한다. 40명을 데리고 간 어거스틴은 그레고리 송가를 부르면서 40명의 수도승들이 공동체적인 장엄한 헌신적인 삶을 가지고 찬송을 부르며, 왕 앞에 갔다. 앵글로 색슨 족이 들어갔을 때, 7왕국이 있었는데, 그중에 에텔베르트 앞으로 지나갔다. 그의 왕비가 간청해서 자기가 통치하는 왕국에서는 설교라도 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게 된다. 이것은 주로 베르타가 그렇게 한 것과, 클로틸다라는 프랑크 족의 챨스 마르텔과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여성이 촉매 역할을 해서 개종해 가는 역사를 볼 수 있다. 부활의 참여도 여자들이 있었고, 한국에도 여자들이 복음에 참여하였다.
    이 선교를 한 결과가 에텔베르트 지역에 선교가 되자 다른 지역에 반발이 일어났다. 앵글로 색슨족과 켈트족과의 갈등, 에텔베르트 지역에 대해 반대하는 개종자들, 그러한 경향으로 상당하게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벵갈 수도원의 원장은 앵글로색슨족은 잔인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장애로 1세기동안 긴장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켈틱 수도원의 아이렌이라는 사람이 앵글로색슨족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융화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와해형성이 이루어졌다.
  유럽에서 가장 전도가 되지 않았던 지역은 저지대였다. 독일 북부,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에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레고리 2세가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 전도하기 시작하는데, 저지대와 독일북부지역은 프랑크 지역이 점령하고 있었다. 저지대에서는 프랑크족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교회에서 프랑크 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로마에서 선교사가 파송되면 프랑크족과 관계된다면 그들이 반발할 것이기 때문에, 베네딕 수도원 같은 제 3의 세력으로 하여금 선교하도록 선교정책을 세웠다.(적개심의 상태에서는 선교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파송되었던 선교사는 누구인가?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전도했던 수도승을 알아야 한다.  페트릭, 대륙선교에 있어서 가장 공을 많이 세웠던 보니페이스이다. 처음에 취했던 선교정책은 강경책이었다. 점점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선교정책을 강경책에서 유화정책으로 바뀐다. 선교정책을 하면서 보니페이스가 무엇이라고 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현대선교에서도 배울수 있는 바와 같이, 비록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원리에 대해서 스스로 꺼집어 내어서 말하게 하고, 스스로 그대로 표현하게 두면서 그들로 하여금 그 안에 있는 모순들을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도록 만들 면서 기독교를 가지고 설득을 시켜가지고 할 것이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  못을 과장해서 누러면서 경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앙을 강압  적으로 막는 것이아니고 설득하면서 유화정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먼  저 복음사역지에 가서 취해야 할 태도는 그들을 인간적으로 존경해야 한다.  그들의 보잘 것 없는 문화지만, 그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  다.
 
  이런 유화정책을 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선교를 위해서 수도승들이 나와서 선교했는데, 그들의 목적은 단순한 선교라기 보다는, 가는데마다 수도원을 세우고 자기들의 수도원을 확장시키는 데 있었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신앙이 전파되었다. 단순한 선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구의 기독교화(基督敎化)였다.

 


     * 성상논쟁
   동서교회가 분리된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적으로 오랜 차이가 있었고,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신앙적인 내부문제가 더 심각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①그것은 바로 교리 논쟁이었다. 그 논쟁 중에, 아들로부터 성령이 나왔다는 말을 서방교회에서 말하니까 동방교회가 반발한 것이다.서방교회에서는 교리논쟁을 별로 하지 않았다. 교리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에서 하였다. 동방교회는 교리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굉장히 사색(speculation)에 집착하였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등등 )  교리논쟁은 심각해 갔다. 서방교회에서 보니까 성령이 하나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부터 온다고 하니 동방교회에서 문제 시비를 걸었다.
②또한 동부지역에 형성되었던 선교지역이 서방으로 넘어가니까 그것을 문제삼았다. 결국 교구싸움, 세력싸움이었다.
③또한 권력싸움을 하였다.

 성상논쟁을 지지하는 사람을 성상숭배론자(Iconoclaster)라고 하고, 성상파괴론자들을 Iconoclost라고 한다. 성상반대운동을 한 사람은 바로 황제였다. 황제가 성상반대운동을 하였다. 이것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상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 성상숭배를 하였다.
①  레오3세가 동방제국을 지배할 때, 가장 위험한 존재는 이슬람제국이었다. 그래서 모슬렘 위협이 가장 심하였고, 민중들은 이에 대항해야 할 입지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협 가운데서, 적들을 방어하고 황제를 도우기 위해서는 성상을 숭배했고 더 값비싼 성상을 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레오3세가 볼 때, 성상예배는 성상숭배 쪽으로 미신화 되어갔다. 레오3세가 성상파괴를 한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사실이다. 교회가 잘못을 했을 경우, 교회 밖의 세력에 의해서 교회가 개혁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교회 밖에서 해결책을 가져오는 것이다.( 문교부에서 목사의 자격에 대해서 권한을 가지고 있는 현실, 정통신학교를 위해서 무인가 신학교를 폐쇄시도하고 있듯이)
  레오3세가 백성들이 너무 많은 성상을 숭배하니까 이러한 구조를 파괴하기 위해서 성상숭배를 금지했다는 설이다.
②  또다른 설은, 모슬람 교회에 들어올 때 성상을 파괴하는 영향을 받았고, 성상숭배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모슬렘과 통합전선을 이루려고 하는 이유에서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에는 전쟁을 많이 하는 시대니까,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당시 성상숭배를 가장 많이 하던 곳이 수도원이었다. 그래서 수도원의 성상숭배를 파괴함으로 병력을 끌어내려는 경우였다고 한다.
③  성상숭배의 반대에 대해서 신학적인 이유를 가지고 나서는 사람도 나타났다. 일반시민들은 감정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신학자가 다마스커스의 요한이었다. 그는 찬성이론가로 나서면서 주장하기를 "싸인이 표시하는 것은 싸인이 실제는 아니지만 그 뒤의 실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상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십자가도 없애야 하지 않는가?라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서방교회가 이런 문제로 나뉘어지면서 줄달이기를 했는데, 동.서방교회가 정말 헤어져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들이 다툰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소한 문제였다. 예를 들면 서방교회는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동방교회는 아들로부터 나온다는 식의 사소한 논쟁이었다.
서방교회는 마리아 무오설을 주장한 반면, 동방교회는 마리아의 무오설을 반대했다.  서방교회는 교황도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동방교회는 교황은 유오하다는 주장이다.   서방교회는 성직자의 독신을 주장한 반면에 동방교회는 그 반대였다.   동방교회는 평신도도 성만찬에 참여가능하다고 한 반면, 서방교회는 그 반대이다.   서방교회는 누룩없는 빵을 썼다.   동방교회는 세례를 베푸는데  물속으로 세번 들어가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 서방교회는 물을 찍어서
세례를 베풀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서방교회는 성례식에 어린아이를 참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동방교회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대해서, 니케아 종교회의 --초대교회 7교회 공의회에 대한 모든 것을 동서방교회 모두가 다 믿었다. 성상을 같이 섬겼다. 7성례를 다 믿었다. 소위 말해서 빵과 피가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을 다 믿었다. 계급의식도 다 믿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방교회가 갈라진 것은 미세한 것이었고, 지엽적, 문화적이었다. 그리고 종교의 정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종교의 정서적인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키는데 심각하게 작용하였다.
  세례를 어떤 식으로 하느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결국 이들의 분열은 정서적인 문제가 작용한 것이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콘스탄틴대제보다도 더 확실하게 서구 문화의 정착을 이룬 사람이 칼 대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세기에 칼 대제가 이루었던 기독교 국가는 정말로 정치와 종교가 전혀 뗄 수 없이 프랑크 교회가 정착되어서 종교적 이슈가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프랑크 왕인 칼 대제를 로마 카톨릭에서는 상당히 평가하였다. 기독교 정신을 정치에 반영시켰기 때문이다.

  챨스 마르텔이 큰 공헌을 하는데, 이슬람 교도들이 쳐들어 와서 부터는 동로마제국이 아직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에, 북 아프리카 지역은 서양문화와 밀접하게 접하였다. 무수한 전쟁이 이 곳에 일어났는데 그것은 곡창지대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전체의 통합 - 방대한 지역이 이슬람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 때 획기적인 순간이 스페인까지 들어왔다. 스페인을 통해 유럽 전체를 쳐들어 왔다. 그 당시 유럽의 이슬람화시키려 하였다. 챨스 마르텔이 이슬람 군대를 멸망시킴으로 유럽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 버렸다. 역사적인 결정적 순간에서 하나님께서는 야만적 왕이었지만 그를 통해 이슬람교도들을 막았다는 사실이다. 그 때 프랑크 족이 동원되어 그들을 막았던 것이다.

  중세기에는 기독교 문화가 사회 문화와 접목이 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문화가 레디칼한 퓨리탄이 건너오면서 문화 없는 기독교 신앙, 교리가 들어옴으로 메마르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현실에 비한다면 중세기는 그렇지 않았다) 샤를마뉴 대제는 서구 사회를 기독교화하였다. 예술, 법, 조각활동을 할 때. 기독교 이념으로 하게 하였다.
  프랑크 왕국이 로마와 정치적 결합함을 한 것은 공식적인 임명이 교황으로 필요한 시기가 있었는데 페트리니였다. 교황청의 인준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보니페이스가 파송이 되어서 제관을 한 것이다. 피핀이 제관식을 하니까 보니페이스에게 어떤 약속을 하였다.  그것은 Donation  이태리 반도 전체를 교황에게 증여한다고 하였다. 피핀도 콘스탄대제가 한 것과 같이 교황에게 이태리 반도를 준다고 약속했다.
  그 때는 왕권이 제정일치였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 제정일치의 상황 가운데서 엮어진 역사적 사실 때문에 페핀이 정치하기 위해서는 종교를 끌여들여야 했다. 그래야 왕의 권위가 <신적 권위>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바로 로마 교회에서 협력을 해 주었다. 피핀의 제관식은 어떤 면에서는 교황들이 왕들을 지배할 수 있는 요인을 만들었다.
2. 아무리 그레고리 1세 같은 사람들이 국가의 어려움을 도와주었지만, 교황이 여전히 왕이 될 수는 없었다. 교황이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왕이 필요했다. 교황들은 자신의 안정과 보호를 위해서 어쨌던 국가권력(state Power)가 필요했다. 로마 교황의 직위가 높아지니까, 로마교황을 탐내는 귀족층들이 장난을 하게 된다. 교황을 두고 권력 각축전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황이 동방의 황제들을 상당히 두려운 존재로 여겼다. 소위 말해서 황제 주도를 교황주도로 하기 위해서, 이런 상황에서 제 3의 국가권력이 필요하였는데, 그 가능성을 프랑크 왕국에서 발견하였다.  교황청은 프랑크가 필요했기 때문에 교황청과 프랑크 왕이 결탁을 하게 된다.
   페핀의 제관식을 했을 때, 페핀의 아들로서 신성로마제국의 신성화시켰던 <챨스 대제>가 스판과 조약을  맺을 때, 12살이었던 챨스가 페핀의 제관식에 동참했기 때문에,  교황으로 인정해 주는데 스스럼없이 해주는 관습을 배웠다.

  사를마뉴 대제 때에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의 정교일치가 절정에 달한다. 프랑크 왕국의 통치령들을 그가 통일시키고 영토확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조각난 유럽을 종식시키고 서유럽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통치 가운데서 기독교가 확장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을 탄생시켰다.

  챨스 대제의 정치적 야망이 유럽에서는 누구도 엎을 수 없을 정도로 공헌을 했다. 챨스 대제가 레오 3세한테 황제의 제관을 입기까지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난쟁이 피핀, 뚱뚱이 챨스 이런 별명을 붙임으로서 왕들을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년동안 교황을 하면서 분열된 시기를 가져왔다. 무능한 바울 1세기간 동안 크리스토프라는 사람이 교권을 남용했고, 그로 인해 데오드로 공작이 중심이 되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횡포하기 시작하였다. 귀족들이 교황청에 들어오면서 교황청 직위를 차지함으로서 혼란하게 되었다.
  그 때, 데오드르의 공작을 살해하고 당시 콘스탄틴의 두 눈을 뽑아 버렸다. 롬바드 족에 의해 눈이 뽑혀 버렸다. 그리고 당시의 수도원장 필립을 교황으로 세웠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3개의 세력, 교황청 세력, 귀족 세력, 롬바드족의 세력이 로마 통치권을 데지데리우스의 야욕은 스테판의 뒤를 이은 아데판을 통해 더욱 극성을 부렸던 것이다. 아드리안 왕이 데지데리우스의 동맹을 거절하자,

  챨스대제가 쳐 들어와서 야만족 롬바르드족을 제압하고, 유럽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교황과 우호를 다지고, 페핀의 교황 승인을 다시 인정하고, 교황청은 안정되고 , 교황 레오 3세를 다시 회복하였다. 레오 3세는 자신이 교황이 된 것은 칼 대제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충성을 다짐하고, 깃발을 선사하면서 군사통치권을 넘겨준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샤를마뉴 대제가 레오가 밀착한 관계가 있었는데, 레오 3세가 반대파에 의해서 성에라스무스 수도원에 감금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도 샤를마뉴 대제가 들어 와서 레오3세를 석방하였다. 1년 후에 샤를마뉴 대제가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교황은 로마시에서 7마일 떨어진 곳에까지 환영인파를 보냈다.  챨스 대제가 로마로 들어오게 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황제가 들어왔는데, 물론 황제가 들어올 때, 로마의 사건을 밝히기 위해서 왔으나 레오 3세가 싸웠던 사건을 밝히기보다는 레오 3세가 다시 교황으로 이루어진다. 황제의 배경을 받아서 다시 교황이 된다.
  사도의 교구는 모든 이들을 재판할 수 는 있으나 누구에게도 재판을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샤를마뉴 대제와 밀착 관계를 가진다. 800년에 크리스마스에 와서 샤를마뉴대제가 왔을 때, 베드로의 제단 앞에 기도하였고 교황은 그에게 접근해서 황제의 관을 교황은 씌어 주었다.  모든 군중들은 입을 모아 로마의 평화를 사랑하는 전능하신 황제여, 하나님에 의해서 제위가 되어 지고 옛날 고대 로마황제의 명칭 아우구스투스를 외침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였다.  교황은 이제 챨스 이마에 물을 붓고 황제됨을 선포하였다. 기독교 확장에 큰 힘을 입었다. 그동안 기독교가 샤를마뉴 이전에는 평화적이었다. 샤를마뉴 치하에서는 무력으로 기독교 신앙이 강요되었다. 기독교 세력과 황제의 세력이 융합되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했고, 문화적으로 기독교화하였다.

칼 대제를 평가하면서,
1. 프랑크 왕국과 교회의 융합, 결합을 완성한 사람이었다.
2. 성베드로의 무덤에서 칼 대제는 충성을 맹세한다.  칼은 기독교의 충실한 왕이 되러 것을 말하면서 로마 교회의 수호자 , 보호자로서의 왕의 자리 매김을 하게 되는 역사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개인이 아니라 서구의 모든 제국자체의 직무 자체가 교회를 보호해 주는 것으로 인식했다. 교황은 강력한 황제와 결합해서 두개의 폴이 형성된다.(정치와 교회) 신앙심과 정치심이 통일을 이루는 시기였다. 이런 것을 하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4500명을 죽이면서까지 정치와 종교가 통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독일 삭슨 지역이 칼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화 되었다. 후에 독일이 기독교 나라로 이어지면서 종교개혁의 뿌리가 싹텄다.
4. 그리스도교적 정신에서 왕의 권한을 이해하는 문을 열었고, 특히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었던 신국의 이상을 실현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신국을 챨스 대제가 부하를 통해서 읽도록 하였다. 정치적인 것만이 아닌 신학적으로 궁정학교를 통해 기독교의 이념의 실현을 갈구하였다. 신앙적인 바탕에서 기독교의 정치화를 이루었다. 종교, 문화 모든 분야에서 기독교화 하였다. 신정주의적인 사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자신이 구약의 다윗 왕으로 인식하였다. 다윗이 신정국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처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처럼 자신이 바로 그런 일을 이루는 자라고 생각했다.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제국과의 사이에서 황제라는 이름이 챨스가 가지게 되면서, 로마제국에서 동방에는 황제가 하나 밖에 없지만, 서로마제국에서는 이름이 상당히 중요했고, 그 가장 중요한 것은 다윗의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챨스는 다윗을 자기의 이미지 이미지 메이킹화시켰다. (박통은 이 충무공이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화 시킴으로서 권력을 유지해 나갔다)
  자신을 프랑크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하였다. 이제 왕이 국가의 재산을 마음대로 집행하였다. 수도원장, 교구장을 자기가 세우는 권한까지 자기가 가졌다.
칼 대제로부터 자기가 교회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성직자 임명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성직자는 국가 관리체제 안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체제로 되어 갔다.
이것은 오늘날의 로마카톨릭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히틀러가 루터란 교회의 권력을 잡아 총통이 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가장 중요시 한 것은  Freedom of Conscience 양심의 자유이다. 챨스 대제가 가장 무서운 범죄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양심을 짓밟아 버리고 교회의 통치를 받아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 문화적인 과제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기독교 일색의 문화가 강조됨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인격, 개성이 짓밟혀 버리는 것이다. 이것만이 기독교의 문화라고 한다면 문제가 있다.
  문화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기독교 양심을 가지고 생활하는 모든 것이 문화가 아닌가?

1.  칼 대제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정치화를 통해서 개인의 양심이 짓밟히는 동시에 기독교가 상당히 발전해 나갔다는 것.
2. 기독교가 사회에 엄청난 세력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상황까지 나아간 것
3. 서로마 황제도 동로마 황제의 권위와 같은 수준까지 나아간 것.
  동 로마 제국이 황제가 기독교를 잡고 있는 것과 . 칼 대제가 기독교 정치화를 한 것은 동 로마 제국의 제정일치를 본 것으로, 이런 과정 가운데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부패하고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Caesoropopism

  칼대제를 통해서 통일왕국을 이루었다. 야만인들의 낮은 교육수준을 양산시키면서 칼 대제 시대의 알퀸 궁정학교를 세웠다. 황제 칭호를 얻게 되었다. 특히 비잔틴 황제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교황 레오 3세의 경우 비잔틴 황제를 삭제한 후 칼 대제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했다. 칼 대제가 이루었던 카로링 왕조는  Ludwig를 거쳐서 교황 니콜라스 3세로 암흑기로 접어든다.  칼 대제가 이루었던 것을 그 아들이 잘 계승해서 그리스도의 제국을 잘 실천시켜 나갔던 것을 볼 수 있다. 

   <루드비히 개혁입법> 
     Rule of Benedit
** <Imperium Christianum : 기독교 제국을 이루기 위해서>**
  ①개혁입법조치를 취했다. 성직자들의 도덕성 생활규칙을 정했다. 수도의 법도 고치고, 성직자들과 수도입법을 고치면서 샘플로 삼은 것이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중세기의 수도원의 규칙의 모범으로 모든 수도원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 수도사들이 만든 것이었다. 일상생활을 룰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불편한 것이 있다면 사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동생활을 할 때, 젊은 사람들과 늙은 사람들을 섞어서 생활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벨트를 항상 풀지 않고 생활하였다. 이러한 생활 규칙들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수도원장(Abbot)-- Obedience-- 에게는 절대복종이다. 그러나 수도원장이 밑에 사람들에게 훈련시킬 때는 매우 인격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원칙으로 교육시켰다. 이러한 수도원 규칙을 가지고 도덕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반면에 루드비히는 ①<도덕>과 ②<빵>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였다. 영주들이 자기 사유의 교회를 가졌는데, 거기에 종사하는 성직자들을 세우기 전에 그에게 넉넉한 생활을 유지해 준다는 필요성을 법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로마카톨릭 주교들이 동의를 해야만 성직자들을 파면시킬수 있도록 법을 세웠다.
  그 당시 성직자들이 돈을 많이 기부할 때 좋은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 들어가서는 돈을 많이 뽑아내는 것이었다.  성직자들의 경제대책 문제가 중세기에 있었던 것에 반해 한국교회는 성직자들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것은 문제이다. 수도원 부속학교, 대성당 부속학교를 세우면서 루드비히가 신학논쟁, 성만찬 논쟁을 일으키면서 상당히 발전하였다.
  이 루드비히가 통치함으로서 북부지역에 ③<전도>하였다. 황제들은 항상 자신들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오도시우스와 씨릴이었다.  덴마크, 스웨덴 지역들이었다. 이 지역에 안스가라는 선교사가 왕들과 접촉하여 전도하였다. 슬라브족, 오늘날의 러시아에 전도하였다. 보헤미야, 헝가리를 포함해서 전도가 이루어졌다. 항상 선교정책이 황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숙원이었다.

루드비히가 죽은 후에 아들 3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해 서구 기독교 사회가 통일되지 못하고, 베르탕 조약을 하면서 중세기에 이루어놓았던 정치적 힘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친족들이 싸움을 하면서 제국이 분열하게 되었는데(동.서.중 프랑크), 이때 외부의 침략이 있어왔다. 외세의 침입이 일어나서 사라센 제국이 일어나서 서로마제국이 분열된 틈을 타 쳐들어왔다. 동방에서는 헝가리, 북방에서는 노르만 제국이 쳐들어옴으로서 서구 교회가 쇠퇴해 가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교권을 내세우면서 교황의 정치를 바로 세운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니콜라스 1세>이다. 이 사람은 교회의 권리와 종교를 대담하고 강력하게 변호했던 중세기의 엘리야와 같은 교황이었다. 교황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루드비히의 2째 아들이 다른 여자와 결혼한 데 대하여 저항하였다. 노타르 2세를 따르고 있던 대주교들을 즉석에서 파면, 파문을 시켜 버렸다. 황제가 잘못 했을 때, 교황이 그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던 분위기였다. (세례요한이 헤롯의 스캔달을 비판함으로서 죽음을 당했던 것처럼 교황은 왕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우리 시대에는 어떤 설교가 필요한가? 아모스나 예레미야를 설교해야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엘리야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나라의 왕이 잘못을 했을 때, 지적하였다.
동서로마의 싸움에서 니콜라스 1세가 당시 호시우스를 파면시키고, 교리싸움 등이 있었는데, 성상논쟁을 하면서 호시무스와 니콜라스가 서로 이름을 지워 버렸다. 그래서 1054년에 헤어지게 되었다.
  니콜라스가 국가의 세속적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교회의 영적 우두머리요, 윤리적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 교회가 교황의 문제에 간섭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선 여기서 인식해야 할 것은 교회는 영적 우두머리요 종교적 윤리적 질서에 있어서 보호자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단편적인 선행으로서는 카톨릭 정신이 아니었다. 군주의 잘못된 생활을 지적할 수 있는 예언자적 위치에 서는 것이 교회의 참된 권리라는 것이다.
 교권주장을 그레고리가 주장함으로 중세 암흑기로 나아가게 되는데, Pseudo-Isidore Decretals(역대 교황들의 훈령집) -여기에 콘스탄틴대제가 교황에게 왕궁을 증여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나오게 된다.
 이것이 가짜 임에도 불구하고 교황권의 권위를 높이는 역사적 문서로 작용하였다. 15세기에  와서야 의문이 제기되었다. 니콜라이 1세 사망 후 교황직은 몰락의 위기로 빠져들게 되었다.

   Pornocracy(도색정치)를 시도하게 된다. 교황 니콜라이 1세로부터 약 200년간 계속된 정치가 암흑정치였다. 이 때 50명의 교황과 6명의 반 교황이 주로 이태리 사람이었다.  귀족층들이 교황을 중심으로 싸움을 하게 된다.
 하드리안 2세 교황은 결혼한 자였다. 요한3세는 친척들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스테판 6세같은 경우에는 전임자 호루무수스 교황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9개월 무덤에 있던 그를 꺼내어 교황자리에 앉혀서 정죄시킨 후 교황의 손가락을 짤라 티베르 강에 던졌다. 그러자 민중들이 스데반 6세를 교살시켜 버렸다.
  무지와 미신, 야만, 폭력이 난무하였다. 교황청은 귀족층들의 여자들에 의해 놀아났다.  데오드르, 딸 마로찌/ 떼오드라의 도색정치를 창출해 냈다. 교황이 성직매매, 도색을 행했다.
  베네딕트 7세, 성직매매 하였다. 돈을 지불하고 교황의 자리에 오르며, 상속하는 형태도 나타났다.
  여자 교황이 13세기 전에 나타났다. 마인즈 지역에서 변장하고 레오4세 후에 2년동안 교황이 되었는데, 아이를 낳음으로 들통이나서 죽게 되었다.

  이 무질서의 상황에서 고급 성직자들은 결혼하거나 Mistress를 두었다. 도덕적 타락을 하였던 것이다. 귀족 권세화가 심화 되어서 왕에게 의존하며, 수도원장도 이와 같이 영주 이상의 속권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수도원이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수도원은 청빈원칙에서 살았지만, 돈이 많아지자  땅을 사게 되고 나중에는 수도사들이 먹는 그릇은 금쟁반으로 바뀌어졌다. 풍부한 음식을 먹으면서 세속적인 물욕을 누렸다. 수도원이 부패해져 갔던 것이다.
  교회 바닥에는 어린 아이들의 뼈가 많이 나왔다. 신부와 수녀들의 관계가 있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직에서나 수도원이나 교회들이 타락하게 된다.
오토 황제가 교황직의 상황을 보고, 귀족들의 당파싸움에서 새로운 정책을 취했다. 이 이유는 오토 대제가 일어나 정치적 개혁이 있을 때, 사라센, 헝가리등 외세들이 쳐 들어왔을 때, 공작들의 반란을 제압하고 주교직에게 통치권을 부여해서 주교들이 통치하도록 하였다. 주교들은 교회재산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독신들인 주교들을 이용하였다. 주교 독신들이 정치하도록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왕권과 잘 연합되도록 하였다. 대신에 백작의 권리, 조화권, 시장권, 면세특권, 통치권, 재판권을 주게 됨으로 중세의 봉건제도의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그래서 주교가 이제는 교회(샤를마뉴 대제에서는 국가가 교회를 국유화로 되는 반면에)가 국가의 재산이 교회화되게 되었다.         church- state
1803년에 와서는 독일같은 경우에는  주교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이 너무 많아서 교회 재산을 대대적으로 국유화하는 경우가 일어났다. 불란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주교들이 가지고 있는 땅에 대해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일반 서민들은 너무나 어렵게 살고 있었다. 종교개혁 때에 국민들이 요구한 것은 우리가 성직자들을 임명하게 해달라. 교회 소유지역에서 사냥하게 해 달라, 연못에서 고기낚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제국 교회들은 독일 왕권의 확실한 지지가 되었다. 왕이 성직을 수여했기 때문에 주교들은 로마 교황보다는 헨리 4세의 편을 들게 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이 부활
교회의 국유화, 국가의 교회화 이 모두가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왔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것은 교회의 진정한 자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몸부림이 일어난 것이었다. 종교적 정신적 생활이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몸부림이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수도원>에서 일어났다. 수도원이 개혁운동과 자각운동이 일어났다. 종교적, 수도원, 개인적 개혁이 일어나야 하면, 사회문화에 까지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그레고리 7세이다.


    그레고리 7세
  그의 종교개혁은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성공적인 교황직도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그가 교황에 오르기 전에 8명의 교황직을 보좌하면서 주된 인물로 부각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수도원 출신이었고, 그가 소속된 <클로니 Cluny 수도원>이었다. 전임 교황 알렉산더 2세가 죽자 장례식을 집전하고 있던 힐데브란트에게 군중들이 외쳤다. 힐데브란트가 우리의 교황이 될 것이라고 외쳤다. 그래서 힐데브란트가 교황이 된 것이다. 모든 청중들이 다 지지해서 교황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 때 그는 '제발 그만두라'고 하였다. 할수 없이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추기경 휴대가 나와서 그의 교황을 선언해 버렸다.
  로마교황청 단독으로 세워 버렸다.


  <교황권의 확립>
 그레고리 7세에 대해서
  중세 2번째 위대한 종교개혁자라고 할 수 있는 그레고리 7세가 클리니 수도원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아서 알렉산더 2세의 장례식에서 군중들이 밀어올려서 교황직에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청중들이 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 세울 때, 자기는 거부했지만 결국 그가 교황의 임직이 허락되고 말았다. 그 때 군중들이 한 말은 "성베드로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황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십자가 운동을 할 때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쓴다. 'Will of God' 이라는 말을 쓴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힐데브란트 자신도 눈물로 반대했지만 결국 승복해야 하는 결론을 가져오게 한다. 그가 교황직에 올라선 후에 가장 큰 이슈는 교황권의 독립(Independent)였다. 오토1세 때에 교회가 세상 재산과 권력을 관리하는 교회 봉건화가 시작되었는데 그 결과 모든 영주와의 관계에서 하나로 일치되어 성속의 구분이 없었다. 그 결과 신성로마제국이 타락하게 된 것이다. 정교유착은 교회의 부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힐데브란트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세속화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교황 철학을 자신의 교령집에 교황칙령(Dictatus Papae)을 수정하였다. 교황권 독립을 주장할 때는 가짜 교령집을 이용해서 교황의 권위가 요구된다고 하였다. 가짜 히스토리안집. 자기의 교령집에 반영하면서 세상의 모든 죄악으로부터 교회가 자유로와야 된다고 하였다. 진정한 개혁은 평신도로부터 교황까지 모두가 교회에 복종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플라톤이 말했듯이 <현인의 정치>를 할 때, 바로 된다고 보았다.(요한 칼빈도 그런 정치를 주장하였다) 모든 교황과 황제가 복종할 때, 국가 발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세속권이 지금까지 교권을 장악한 것을 반대하였다. 성직자들의 세속권 종사를 반대하고 그래서 그레고리는 악의 뿌리의 근원이었던 Investitue(성직수임: 반드시 시험에 출제)를 청산하였다. 교회가 봉건화 되었기 때문에 왕에게 재물을 상납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직수임과 돈이 항상 상관관계에 있었다. 성직수임을 받기 위해서는 재물을 상납해야 하였다. 성직수임을 할 때, 좋은 자리를 두고 경쟁을 붙여서 돈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정교유착에 고리에 있었다. 그레고리는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성직수임을 반대하면서 교황의 위치가 올라갔다. 그래서 교황이 황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교황이 황제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휴라는 추기경을 스페인에 보내서 그곳의 교황청을 로마 카톨릭의 봉신(Fiet)으로 만들고, 거부하는 추종자들을 파면시키고, 보헤미야 지역의 교회가 국가에 소속된 것을 교황청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이태리 귀족층을 교황청에 복종시키도록 하였고, 스페인, 노르웨이, 덴마크의 정치적 간섭을 교황이 간섭하게 되었고, 중재역할을 하였다. 헝라리 왕을 자기의 봉신으로 만들었다. 당시 독일왕의 치하에 있었다. 또한 독일 왕과 삭슨 사이에 중재역할을 하였고, 십자가 운동에 지지하는 것을 교황이 하였다. 그레고리 7세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세속 통치로 말미암아 제왕들이 제사에 간여하는 사람이 정치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1074년 로마 종교회의에서 개혁법령안을 그레고리 7세가 만들어낸다.
1)교회종사하는 성직자들이 Simony(성직매매)행위의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활동, 예를 들면 목사가 교회를 위해서 하는 성만찬, 결혼주례, 견신례등 공식적인 활동을 금했다. 성직수행직능을 금지시킨 것이다.
2)교회재산을 산 사람들은 교회로 다시 환원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세금을 내는 것은 금지되었다. 교회재산을 함부로 살 수 없도록 하였다. 교회재산을 산 사람은 사유화 시켰기 때문에 못하도록 하였다.
3)결혼을 하였거나 첩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은 성직자들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내렸으며, 그들의 축복은 저주가 될 것이며, 그들은 황금율을 위해한사항이었다고 하였다. 그런 사제들은 성직자들이 기능을 중단시켰다. 유럽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결혼생활로 부패되었던 그런 상황을 개혁할 수 없었다 대부분 이미 결혼한 성직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힐데브란트의 개혁은 아이러니칼하다. 워낙 그 당시의 상황이 부패한 상황에서는 개혁을 하게 될 경우 개혁자가 지게 된다. (중세기의 이단으로 지칭을 받았던 왈도파의 경우에서는 워낙 권력층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힐데브란트의 결혼문제, 로마 황금율의 잣대를 가지고 성직자들을 개혁하려고 했지만 고통을 당했다. 그레고리 7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의 재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칙령을 내렸던 것이다.
4)평신도들이 성직자들로부터 어떤 행정적인 것을 받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되면 성직자들의 임명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나 군주들도 평신도였다. 그러한 평신도들로부터 성직수임을 받은 것은 잘못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힐데브란트의 조치는 급진적인 조치였다. 이 급진적인 4개의 조항을 가지고 각 지방으로 명령을 내렸다. 황제 헨리4세에게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칙령한 기득권을 가지고있던 성직자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이들은 사도들이나 초대교회의 감독들이 결혼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개념은 성직자들의 결혼을 경시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즉각적으로 돌아온다(Imminant return of Jesus)는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일반 성직자들은 많은 여성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기가 힘들었다. 로마 카톨릭은 성직자들을 제도적으로 양육시켰다. (로마 카톨릭 개념은 어릴 때부터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키워서 성직자들로 키웠다)

* secularization  (나중에 참고)

 어떤 지역에서는 허락하는 지역이 있었고 어떤 지역에는 거부하는 지역이 있었다.

그레고리의 강경책으로 인해서 깊은 수렁에 빠져있던 성직자들이 장래의 문제에 대해서 곤란을 겪었다. 그레고리의 개혁은 너무 강경하였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었다 하더라도 너무 강한 개혁이었으므로 실패하게 된다. 설득없는 개혁은 실패하게 된다. 교황의 권위를 가지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개혁하므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고, 반대세력을 형성하도록 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헨리 7세를 미치광이로 몰아붙이게 되었다. 가족을 버리기 보다는 성직을 버리겠다고 하였다. 교황의 칙령을 따라가는 자들에게 살인하는 경향이 일어났다. 파리에서는 종교회의에서 성직자들을 투옥하는  경향이 일어났다.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밀고 나갔다.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결국 독신제를 가져왔지만, 실패가 컸다.
  성직 매매란 성직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초대교회의 Simon Magnns의 이름을 따서 Simony라는 단어로 발전했다. 성직자들의 세속 권력 수단이 되어 버렸다. 교회봉건화와 더불어 자연히 교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폰라드는 팔아넘겼다. 여러 교구를 다스리는 총감독들은 소교구들을 팔아넘기는 매매가 자행되었다. 이들은 모두 합법화 하는 현상이었고, 정치적 요소가 밀착하여 부패되었기 때문에 그레고리 7세는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직매매의 현상을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
 Secular Clergy 나 Regular Clergy는 성직을 수임받기 위해서 뇌물을 상납해야 했고, 반지를 받게되었는데,  반지를 주는 전통은 로마의 전통에서 나왔는데 그 반지는 교회와 권한과 결혼한다는 의미이고, 지팡이는 교회의 양무리들을 보호한다는 입장에서 지팡이를 주었다(Protection of the Flock) 그렇게 함으로써 성직수임의 징표를 삼았다. 고급 성직자들은 귀족층에서 나왔다. 교회를 망쳐 먹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레고리 7세는 로마에서 종교회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왕이나 귀족이나 성직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감독이나 수도원장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들을 감독이나 수도원장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고, 백성들은 승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75년 로마에서 공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pro & con 논쟁이 일어났다. 그레고리7세와 헨리4세와 싸움을 하였다. 아무리 교황이 명령해도 헨리4세는 자기 마음대로 성직자를 임명하였다. 헨리는 1076년 웜스에서 회의를 열어 교황을 대항했다. 그리고 교황의 하직을 종용했다.
  그레고리 7세는 황제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세속인들에 의해 성직수임이 이루어졌다. 그 권위가 짓밟혀 버렸다. 어떤 세속인들에 의해서 주교직이나 대주교의 직을 받아서는 안된다. 왕이라도 그렇게 한다면 파면시킬 것이다. 라고 하였던 것에 대해서 헨리 4세는 분개하고 사절을 보냈다. 그는 교황에게 "나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뜻 안에서 황제의 직임을 받았다. 나는 교황이 아니라 일개 수도생에게 편지한다고 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교황이 되었다면, 나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 너는 교회의 질서를 어리럽혔다. 성경도 왕을 존경하라고 하였다. 너는 교황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파면시켜 버렸다. 서로가 파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 그레고리7세의 칙령
   로마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왕이 감이 어떻게 건드릴 수 있는가? 로마 교황만이 우주의 보편적인 성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교황만이 감독을 파면, 복귀시킬 수 있다. 교황의 사절(Legate)은 감독보다 낮은 등급에 있다 하더라도 모든 감독들이 모여 있는 종교회의에서 우선권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감독들을 처벌하고 파면시킬 수 있다. 교황이 직접 갈 수 없기 때문에 사절을 보내는데 그들은 교황의 명령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Legate를 통해서 교황이 정치하였다.  교황만이 제국의 Insignatia를 사용할 수 있고, 유일하고 독특한 것이다.  교황이 왕을 파면시킬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모든 책이나 헌장들은 교황의 인정 없이는 합법화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문서 활동에까지 간섭하였다.  로마교회는 지금까지 지금까지는 잘못한 적이 한번도 없고 앞으로도 로마교회는 영원히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서 신성로마교회는 신성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로마교황이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레고리 7세는 법적이고 제도적인 교황권의 확립을 주장하면서, 이기적인 것만으로만 볼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한 가장 중요한 것은
  ①정의 구현을 위해서, 정의가 올바르게 시행되려면 교회가 세속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토1세는 교회가 사회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레고리7세는 교회가 세속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② 교회가 정의를 실현하려면 다양한 제도 속에서 상하복종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가 교회를 독식하고 교회가 국가를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 신분은 육체고 성직신분은 영혼이라고 하면서 교황은 해고 황제는 달이라고 말하면서 그 관계를 말했다. 결국 교황은 머리고 황제는 몸이다라고 하면서 정의가 실현되려면 교황과 황제가 다이나믹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다양성 원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③진실한 생활규범, 계율, 순종 등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수도원에서 나오는 이러한 계율들을 주장하게 되었다.
카톨릭에서 의Rightheouness라는 개념이 매우 와일더 하다. 롬17장이나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의는 교황과의 싸움에서 주장한다. 의는 속죄라는 뜻과 윤리적인 면을 다 합해져야 진정한 의미가 살아난다. 이 의는 속죄적인 의미와 윤리적 도덕적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의를 속죄적인 면만 강조함으로서 잘못된 길로 나아갈 경향이 있다. 기독교의 정당성은 지식적으로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으로 변증해 나가야 한다.
  정의에 입각한 수종을 강조하였다. 복종을 강조하였다. 교황은 신정정치를 하기 위해서 교황청, 사제제도, 사제직등을 만들었다.
  그레고리 7세는 교회에서 세속의 권한을 배제시키기 위해서 국왕과 싸움을 했지만, 교회의 활성화를 이루었고, 클루니 수도원도 부유해지면서 부패해 져갔다. 그래서 베네딕 수도원이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또한 십자군과 같은 부패가 일어나게 되었다. 부패와 개혁,개혁과 부패과 연속되면서 중세교회가 이어지게 된다. 결국 카노사의 굴욕에서 그레고리 7세가 이기게 된다.

  그레고리 7세가 죽으면서 유배지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정의를 사랑해 왔고, 죄를 미워해 왔노라,. 그로 말미암아 나는 유배지에서 죽어가노라"


* The Crusades   십자군 운동

   기독교인들이 성지순례를 하지 못하게 한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분노, 야만적 행위 때문에,   동서방 교회가 연합을 위한 교황청의 계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을 구해 준다는 서구의 강한 지원책 때문에, 영혼을 구원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지를 탈환한다는 것이다.
  성지 순례자들이 성지에 가서 예수님의 무덤을 성묘하고 예배하는 것이 엄청난 서구 기독교의 전통적 소망이었는데 그것을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낭만적으로 일어났다.
  엄청난 구라파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십자가 전쟁은 감정이라는 태풍의 눈이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 신앙심이 유발되어서 열기를 쏘아올려서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동참하도록 하였다. 성지 순례 자체가 죄가 사해지고, 모슬람의 사람들이 베카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기의 성지 순례의 개념은 실제적인 의미로 와 닿았고 그 신앙이 그 근저에 흐르고 있었다. 성지 순례에 대한 우상화가 이루어졌다. 성지순례는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우르반 2세가 종교회의를 했다.

 <동방의 형제들이 여러분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늘 약속을 해 왔던 도움을 즉시 주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들어온 바와 같이 터키, 사라센, 모하멧 족들이 쳐들어와서 동방 제국을 점령하고 서방으로 와서 지중해 연안까지 침범해 왔고 그들은 기독교 제국을 정복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7전쟁에서 그들을 정복했다. 그들은 죽이고 많은 사람을 사로 잡고 교회를 파괴하고, 로마 제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들을 무방비 상태에서 쳐들어 오게 해 온다면 하나님의 제국이 파괴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보다 우리 주님이 당신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전령자로서 온 세상에 전하도록 원하고 계신다. 온 세상에 이것을 알려서 기사든 가난한 사람이든 동방의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의 땅으로부터 나쁜 종족들을 몰아 내어야 한다. 나는 여기에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에게 전한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은, 이방인을 대항해서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은 (Remission of sins) 누구나 죄사함 받는다고 하였다. (이슬람 테러분자들도 암살하는 것이 하나의 순교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죽는 그들에게 보장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장한다. 나한테 주어진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들의 죄가 사해 짐을 보장한다. 아! 얼마나 은혜스럽지 못하고 불미스러운 일인가? 마귀를 섬기는 종족들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만들어진 성도들이 그들에게 죽는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 있는 형제들을 우리가 도우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
  여기에 모인 군중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Deus vult. God wills it.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쳤다. 수도원장, 감독들이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십자군 운동 중에 가장 감동을 준 사람은 St. Bernard는 열정적 웅변가로서 그가 한 말을 보면,
  "나는 정말로 작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적은 사람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형제들이여.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자기의 땅을 하나님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땅이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지는 하나님의 땅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가르치신 땅입니다. 거기에서 그 분이 30년 이상 사셨습니다. 그는 기적으로 그 땅을 밝게 비춘 그곳입니다. 자기의 피로 거룩하게 만든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그의 부활의 첫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의 원수들이 모독스런 기치를 들고, 약속의 땅을 검의 칼날로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들을 대항해서 일어서지 않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를 완전히 불태워 버릴 위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죄되는 그 성소가 완전히 오염될 위경에 있습니다. 점없는 양이 있었던 그 지역을 오염시키고 피로서 더럽힐 지경입니다. 십자가의 종들이여, 지금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들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져 주며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겠느냐?" 많은 사람들은 이 설교를 듣고 십자가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의 감동을 받아 참여했던 십자군 운동은 베이통은 이렇게 묘사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묘사했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들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이것은 자비로운 것이었다) 화살로 쏘아 죽이고, 어떤 사람들은 더 오래 고통을 받도록 불에 던졌다. 머리와 손과 발이 쌓여서 예루살렘 도시 거리에 많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예루살렘의 거리를 지나가려면 말과 사람의 시체를 치우며 지나가야 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에서 일어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일어난 것을 상세히 이야기하면, 그 성전문에 사람이 무릎까지 피가 올라와서 피 속으로 걸어다닐 정도로 비참한 죽음이 있었다. 정말 이것은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었다. 바로 이 적들을 쳐부수어서 원수들의 피가 채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었다. 하나님의 신성모독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심판은 당연하다. 이제는 우리 시가 탈환되었고,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전쟁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Holy Sepulchare)을 빼앗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주님을 향하여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9번째 찬가를 부를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 날은 유명한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뇌와 슬픔을 즐겁게 바꾼 날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독교의 정의를 표시하는 날입니다. 이교도는 멸망하고 기독교의 정의가 표시되는 날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었고, 주님께서 이 날을 회복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당시 십자군 운동에 동참한 자들 가운데 죄인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약탈과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래서 사라센 제국에 있던 기독교인들 4만 명이 환영 나왔음에도 그들이 적인 줄 알고 다 죽여버렸다. 나중에는 소년을 데리고 갔으나 참패하고 만 것이었다.

  왜 이렇게 강행했던가? 이것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이 전쟁을 Holy War,즉 정당한 전쟁, 거룩한 전쟁이라고 인식했다. 거룩한 전쟁의 개념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도대체 엄청난 손해를 감내 하고서라도 거룩한 전쟁에 대한 개념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성전의 개념에서 왔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전쟁을 모세를 통해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가나안 거민들을 죽이는 방법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정복해서 전쟁의 방법까지 설명해 주셔서 정복하는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모세의 사상이 사무엘, 사사까지 이어지면서 거룩한 전쟁으로 행해졌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전쟁이 승리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전쟁을 경험했고 이것은 성전holy war개념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개념은 신약시대에 오면서 소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전쟁을 반대하면서 (Pacifism 평화주의)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경우에 전쟁을 언급한다. 세상에 전쟁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만 전쟁을 옹호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였다. 산상보훈에는 전쟁에 관한 윤리가 없다. 도덕과 사랑만이 강조되어 있다. 바울서신에도 보면 혹시 기독교를 십자가의 군대라고 표현을 하지만 군사적 내용은 은유적으로 사용하지 실제적인 군대의 전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예수님과 바울의 사상을 받아 들여, 대부분의 초대교부들은 평화주의를 옹호하였다. 군대에 봉사하는 것조차도
싫어했다. 그러다가 2세기 말부터 기독교 신앙양심으로 군대의 복무에 대해서 양심의 갈등을 느꼈다. 그야말로 평화주의자였다. 터툴리안을 예로들어 보면,
"검을 두들겨 쟁기를 만들고 창을 두들겨 호미를 만들 것이다. 옛날에는 복수하라고 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히려 빵을 만드는 쟁기를 만들 것이라"는 표현으로 평화주의적 사상이 팽배하였다. 이것이 오리겐에 오면서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 당시 셀수스(기독교를 가장 공박했던 초대교회 철학자)에 대한 반박으로 contra celsus라는 글을 썼다. 그는 변호를 통해서 기독교의 전쟁참여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평화주의, 반 무력주의를 주장했다. 로마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군대의 힘이 아니라 기도의 힘으로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무기를 가지고 대항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의 홍해사건도 기도로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평화주의적인 교회의 입장이 십자군 운동으로 가게 되느냐? 콘스탄대제와 어거스틴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기독교가 공인된 콘스탄틴대제 시대에는 군대에 대해 긍정적이 되었다. 콘스탄틴대제에 들어와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군대를 지키는 것이 사명으로 생각했다. 국가의 세속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것이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함으로 말미암아 달라지게 되었다.
  나아가 어거스틴은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었다.(Just war) 할수만 있으면 사랑이 우선되고, 전쟁은 명예스러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초대교부와 달리 군대는 폭력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를 섬기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 완전히 신학적으로 이념적으로 그 틀을 만들었다. 이러한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서 종교와 국가가 병합되었던 중세기에 들어오면서 그것이 정당화되었다. 따지고 보면 중세기는 '군사문화'였다. 중세기에는 전쟁을 한 경우가 많았다. 프랑크 왕국도 전쟁의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전쟁의 개념이 초대교회와 관계없이 전승되어 왔다가 어거스틴이 이념적으로 신학적으로 틀을 세웠고, 어거스틴으로 말미암아 그 정서가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서를 인용하여 <그들의 손에 피가 없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
  십자가 운동이 일어나면서 수도승들도 그 때까지 지켜 온 신앙을 버리고 전쟁에 참여한다. 명상, 기도의 전통을 버리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성전기사단 (Templars)와 수도기사단(The Hospitalers)가 일어났다. 이러한 성전의 개념이 현대까지 미치고 있다.
  이 십자가 운동의 거룩한 전쟁의 개념은 종교개혁시대에도 도입되어서 근대종교개념에 도입된다. 유럽의 30년 전쟁을 보더라도 정당화된다. 휘그너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독립과 신앙양심을 위한 전쟁이었다. 파리 시내에도 1만명이 죽어야 했다. 농민전쟁도 폭력을 통해서 일어난 것을 알 수 잇다. 30년 전쟁이야말로 근대 종교전쟁의 개념에 새로운 시각을 주었고, 신교와 구교가 대립된 원인이었다. 국토와 곡창지대가 황폐하였다. 30년 전쟁을 하고 난 뒤, 많은 지성인들은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30년 전쟁 이후 과학문명과 더불어서 유럽에서는 기독교를 떠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천년동안의 기독교 문화는 전쟁의 문화였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은 전쟁을 직접 일으키기도 하였다. 중세와 근세에 오면서 종교전쟁은 가속화되었고 그래서 식민지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은 원주민들을 죽이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며, 오스트리아, 남아공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세웠다.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주의자였다. 평화를 위한 전쟁을 옹호하지 않았다. 현대에는 정치와 종교가 다른 기능을 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전쟁이 종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방어를 위한 수단을 제외하고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 필요한 악으로 전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Poverty Movement  ( 청빈운동 )

  십자가 운동을 전후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운동은 사도시대로 돌아가서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 삶은 단순한 삶, 청빈한 삶이었다. 그것과 맞물려서 대학 운동이 일어나고 대학이 일어나다 보니까 지성인들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① 지난번 십자가운동을 보면서 제대로 조직되지 않는 군인을 동원해서 200년동안 전쟁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공동체 의식이 강화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정교일치 시대가 되었지만, 이슬람 교도를 향하여 싸웠던 것은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이 사실이다.(유럽의 EU 같은 것은 이러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② 유럽에 있는 야만족으로 구성되어 신성로마제국을 이루었던 자들의 시야를 넓혔다.
③ 회교 문화권의 접촉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도입하고 그리하여 스콜라 철학을 수용하게 되었다.
④그외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도시가 발달되고, 교육이 일어나고, 자각운동이 일어나고, 상업운동이 일어나 화폐가 개혁됨으로 근대국가로의 기초를 놓았다.
⑤서구의 봉건제도의 체제하에서 봉건제도가 붕괴할 수 있는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영주들도 수도원장의 권고로 해서 자기의 농토를 버리고, 봉신들도 농토를 버리고 십자가 운동에 참여 했을 때, 그들은 죽어버리고 농부들도 죽어버리니까 옛날처럼 봉건제도가 유지 될 수 없었다. 봉건제도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자 지중해를 중심으로 상업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14,5세기에 자본주의를 형성하게 된다. 인류문화를 교류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⑥청빈운동에 대한 시각이 열렸다는 것이다. 순례자들이 순례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십자가 운동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신앙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그 당시 예수님에 대한 시야가 떠졌다. 예수님이야말로 가난한 분이였다. 중세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지은 교회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위 성직자들이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데, 십자가 운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이 가난하고 청빈하였던 시각이 열려지자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자하였다. 이 때, 일어나는 동기는
(1) 이단적인 경우와
(2) 중세교회의 제도적 모습에 대해서 반대하는 경우, 혹은
(3)수도원 안에서 자기들의 성찰에 대해서 반성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Pattern I  {봉건제도하의 교회} -
  재산 권력, 명예를 위해서 투쟁한 시기였다. 주교가 영주 행세를 하면서 봉토를 내려주어서 봉신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거이 중세기의 하나의 패턴이었는데 중세기 전에 이런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다. 여기에 물론 교황과 황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의 싸움이 있었다.

Pattern II  {시민계급 형성} -
  도시가 번영하고 평신도들의 자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평신도들의 각성이 일어나자 자기 주위의 환경을 보게 되는데, 고급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세력들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1)네덜란드의 Tanhelm은 이렇게 말했다.
  "성직자의 재산 소유를 전면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성직자들의 모든 재산 소유를 반대하고, 세속성화를 청산하고 거듭나야 한다. 성사적이고, 제도적이고, 의례적인 신앙에서 신령화를 추구해야 한다."
 성만찬 할 때에 빵이나 피가 전부다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거부하다 어떤 신부에게 피살되었다.  물론 이들은 청빈이라고 해서 물질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2) Arnold of Brescia는 교회는 재산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교황에 대해서 거부하였다.
3)피터 왈도에 대한 개혁운동(Waldensis / Peter Waldo (이에 대해서 연구필요)
   W. Cartos Martyn 의 서술.
 (1)그는 프랑스 리용 출신으로서 상인의 아들이었다. 한 친구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제시할 때, 가진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 특히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듣고 변화를 받았다. 그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정신과 유사한 것들을 주장하였는데, 왈도가 주장한 것은 신앙과 원천은 전통이나 교부의 권위와 관계없이 성경이다. 특히 그는 신약을 강조했고 구약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반대파들에게 내몰림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구약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2)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기둥은 사도신경이라고 하였다. 중세기의 신앙을 보면 "council of Father"(교황 훈령집)이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피터 왈도는 그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3)세례와 성만찬을 제외하고는 교회의식을 반대했다. 7성례 중에서 세례와 성만찬을 거부하였다. 그는 중세 시대에 수많은 의식들을 반대했다. 그는 제복에 대한 반대와 성상반대, 십자가의 의미부여 반대, 성지순례의 미신적 사상도 반대, 거룩한 성유물에 대한 반대, 여러가지 종류의 불필요한 성례의식을 반대하고, "모든 외형적인 의식은 사타의 발명품, 육체의 발명품, 미신의 발명품"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쯔빙글리가 가지고 있었던 사상과 유사하다.
 (4) 중세기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Pugatory(연옥)의 교리를 반대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미사를 드리는 것을 반대하였다. 오직 Heaven & earth만 있다고 주장하였다. (연옥설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초대교회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는 Embrio의 문제였다. 어리 아이들이 태어나자 마자 죽었을 때,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에 연옥에 간다는 사상이 나왔다.)
 (5) 면죄부, 고해성사를 반대했다. 그래서 믿는 사람끼리 서로 고해성사하면서 위로하고 교훈을 하였다.(오늘날 Para-church운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6)성만찬에 있어서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피와 몸으로 임재한다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미 종교개혁자들이 있기 전에 이러한 소동을 통해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7)성직계급의 질서는 감독과 사제, 집사(deacon)로 제한하였다. 그 외의 여러가지 종류의 모든 계급은 부정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결혼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교황정책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다.
(8)로마 교회야 말로 '바벨론의 창녀(Whore)'라고 하였다.
지역교회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한 영향으로 이노센트 3세가 반대하게 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칙령이 내려지자 재산을 몰수하고 화형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정신적 기초의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Pattern III
          after           the crusade      before
신학적 이단들이 많이 일어났다.

①Paulician, Bogomils 이단들이 일어났다.
 (1)그들의 사상은 초대교회의 전반적인 사상인 이원론적(Dualism) 사상에 근거하였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영지주의,메니키안, 말시온과 같은 이단들과 연관을 시킬 수 있다.
 (2)바울파들은 완전히 이단들이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구약의 신에 의해서 이 세상의 창조는 완전히 악하다. 그래서 신관에 있어서 완전히 이원론이었다.
 (3)기독론에 있어서도, 어머니 마리아의 피는 전혀 이어 받지 않았다. 그 결과 예수의 탄생과 죽음은 전혀 비현실적이었다.(Docetism)
 (4)구약성경을 배척하였다. 신약은 대부분 채택하였다. 그들은 베드로 서신은 버리고 바울서신을 최고로 보았다. 그들은 성경을 전체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상만을 주장하는데 근거가 되는 것만 채택하였다. 성경 중에 성경이 있다고 보고, 말씀 중에 말씀이 있다고 보는 차별화를 두었다.
 (5)영아세례를 거절했고,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아서 30세가 되면, 강에서 세례를 주었다.
 (6)성찬식은 밤에 하였다. 이 때 포도주를 사용하지 않고 물을 사용하였다. 애찬식은 포도주를 사용하였다.
  (우리 기독교에서 잃어버렸던 것은 문화의식이었다. 종교란 생활 속에 있는 역사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문화를 통해서 역사가 풍성해 진다. 서구사회는 기독교 문화가 몸에 배어 있다.)
 (7) 그들 가운데 성도의 등급을 나누어서 ⓐ단순히 듣는 평신도들(the Hearers), ⓑ귀의자들(금욕주의적 생활로 세례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신앙인들)The Adherents, ⓒ진짜 믿는 사람들(The Perfect) 이렇게 3단계로 구분하였다. (워치만 니가 위험한 것은 성도들을 구분한 것이었다. 구원체험 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8)바울파들은 로마 카톨릭을 완전히 배격하였다. 명예를 용납지 않았고, 성자를 불러서 기도하는 것, 성상을 사용하는 것, 분향과 초불과 같은 상징물을 배격하였다. 이단들이 중세의 보편적인 의식을 배격한 것은 큰 반동이 아닐 수 없었다.
 ②보고밀 이단은
(1)신론과 창조론에 있어서 영지주의였다.
(2)가현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십자가를 하나의 혐오의 대상으로 보았다. 나무 자체가 하나의 물질로서 죄인데, 그것을 예수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면서 십자군 전쟁의 중하반기에 카타린을 중심으로 강한 이단이 일어났다. 신학 이단 가운데, 특히 카타린과 같이 중세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과 보고밀, 바울파, 탄셀숨, 아놀드, 왈도를 싸잡아 메니키안으로(?) 보고 종교재판(Mgeuisitian)을 시작하였다. 초대교회에 로마황제가 기독교를 핍박할 때 하지도 않은 것을 교황이 하기 시작하였다.
  이노센트 3세는 십자가 운동에 호소해서 이단 멸절을 위해서 카타리파와 전투하면서 20년동안 운동하였다. 지방이 황폐화되고 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 버렸다. 이 이단들의 멸절을 위해서 종교재판을 열고 이단을 색출하였다.
  (이단 규정에 있어서 중시해야 할 것은, 가만히 있는 사람까지 색출해서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이 때 일어났던 것이 <마녀 사냥  Witch  Hunting>이 나온 것이다. 분명히 이단을 색출하는데 있어서 광신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광대 파장을 일으키는데, 중세에서는 이 이단들을 정치적 적으로 보고, 교회를 흔들고 국가의 기초를 흔드는 것으로 규정하고 강한 핍박을 하였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반대하였다. 분명히 객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만, 객관적 진리를 가지고 거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때, 가혹하게 할 것이냐, 설득력으로 유도할 것이냐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후자를 택했다.  루터나 칼빈 등은 그와 같은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가혹하였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 의해서 드디어 마녀사냥이 폐지되었다. 신앙 양심이 주장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교단도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의 것을 답습한다고 볼 수 있다.

②또한 Carthaki이단이 나타났는데 나중에 Ablgonis가 되었다.  이 이단들은 신학적으로 나타났다.
 
 
  Pattern IV
 3 가지 패턴이 십자가 운동 이후에 나타났다. 특별히 2와 3의 패턴과 Pattern IV 대학과 스콜라주의가 합해지면서 중세 수도원의 큰 개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탁발수도원>이었다. 지금까지는 공동체로서 봉신, 봉주체제로서 완전히 부패되었던 것이다. 베네딕 수도원의 청빈사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재산을 거부하면서 신학사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생활모범을 통해서 영향을 주려고 세웠던 것이 탁발 수도원(머리를 깎고 얻어 먹는 수도원)이었다.
      The Medicant Orders
  이 탁발 수도원은 13세기에 들어와서 수도원의 부와 부패가 심화될 때 일어난 것이다. 수도사들은 귀족들이 되어 버렸고, 수도원 주변은 공원화 되었고, 수녀들의 정절이 망각되고 창녀의 집으로 돌아가 버린 곳이 되었다.

  성베나드의 말
" 교회는 사람들이 없고 사람들은 사제들이 없이 남겨져 있고, 사제들은 그들의 잘못 때문에 존경심을 잃어 버리고 교회는 회당으로 간주되고, 교회는 더이상 성소로서 거룩한 곳이 못되었고, 성례식은 없어졌고, 종교적 행사는 권위적이 못되었다. 사람들은 죄사함 없이 죽어갔고, 환난에 빠졌다. 성사고백에 의해서 혹은 성만찬을 통해서도 그들의 영혼이 회복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떤 수도원은 부랑자들이 들끓었고, 부패해갔다. 성직자들은 세속화되었고 부를 축적하였다. 고급 성직자들은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하급 성직자들은 거지 취급을 받았다. 이때 바로 이단들이 번져나갔다. "

  이 때,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칸이 생겼다. 교회가 청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프란시스칸은 재산을 전혀 가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도미니칸은 재산을 어느 정도 필요한 정도로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쨌던 청빈운동이 주장되었고, 교회 안에서 주장하기 위해서 온건적인 신앙운동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고, 교황의 허가 아래서 설교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선교에 관심을 가졌고, 이론보다는 실제에 관심을 가졌고, 도미니칸들은 대학의 지성인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중세 대학의 대부분이 도미니칸과 도미니칸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여기서 보나벤튜라, 옥캄 등과 같은 인물이 나왔는데, 이 두파는 각각 실념론과 유명론(옥캄)을 주장하였다. 이것들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교회가 새로운 운동으로 들어가면서 여기에 합세해서 이노센트 3세가 중세 교황의 권위를 피크로 세웠다. 이러한 것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져 나갔다. 근대 국가의 생성으로 말미암아 근대국가의 주권을 찾으면서 교황청이 70년동안 바벨론에서 유수하는 것을 알수 있다. 교황의 세력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안되니까 인문주의가 나타나고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면서 중세기가 문을 닫아 버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세기에 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스콜라 철학을 주도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바벨론의 유수를 통해서 교황들이 아비뇽에서 통치를 하는데, 불란스 국가기관에 시녀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종교회의가 일어났다. 이것을 통한 민중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대학의 교수들과 지성인들이었다. 중세기의 중반에 들어가서 대학을 통해서 의식이 개혁되면서 인문주의가 나타나고, 거기서 에라스무스가 나타났다. 루터와 캘빈등이 나타나서 서구 문명과 근대문명을 이루어내는 것인데, 그 뿌리가 대학이었다. 당시 대학은 그 배경을 보면 십작군 운동의 영향을 미쳤다. 상업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달했고, 길드가 발달했다. 길드(어떤 한 감독 아래서 형성되어 있는 기술을 배우는 공장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예술 분야, 학문세계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 Universitas라는 말이 생겼을 때, 집합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 칼리지들을 모아 놓은 것들이다. 특히 당시의 집합의 형성은 공통된 목표를 위해서 모였다. 상업,공장, 예술, 학문을 목표로 모였다. 주로 학문을 목표로 해서 모인 길드가 유니버시타스가 되어서 교수와 학자들의 집단이 되었고, 학자 집단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교수들의 명성이 학교의 명성을 좌우하였다. 이것들이 중세기의 대학들의 전통이었다. 대학들은 지식조합식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교수들은 직업 길드를 형성하였다. 북유럽의 파리, 옥스포드, 캠브리지 대학은 대학 교수들의 길드였고 대학교수들이 개업하여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남부지역에서는 (볼로냐 대학 같은 경우) 학생들이 길드를 조합하여 교수를 초빙하였다. 12세기에 대학들이 세워졌고 그 후에 계속 대학들이 일어났다.
  학위의 초기 형태는 학부에서는 7학을 가르쳤고, 거기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 신약이나, 의학이나, 법학 중에 하나를 전공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학위는 정말 학위였다. 그 방면에 권위가 있었다. 교수가 만족할 만해야 졸업을 시켰다. Master라고 하면 모든 분야에서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중세기의 학위는 정말 학위의 권위가 있었다. (칼빈의 경우, 그 해박한 지식을 기본 지식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중세기에 이루어 놓은 신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신학이 학문의 꽃이었다. 중세기의 특징이 신학을 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볼로냐 대학은 법학이 유명하였다. 유럽에서 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볼로냐 대학에 모여들었다. 이 대학은 학생들의 입김에 세어서 학생장을 선택하였다.(Rectors) 그리고 학생들이 제정한 법을 교수들이 지키는지를 학생들이 감독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학위를 주는 것은 교수들이 관장하였다.   교수가 학생장에게 복종 맹세를 하고, 강의를 빠질 경우 벌금을 내었다. 무능할 교수들을 학생들이 쫓아내었다.
 그러나 북쪽의 대학들은 교수가 중심이 되어서 학생들을 관장했다. 결국 교수가 미성숙한 학생들을 관장하는 것이 정착되었다.
  중세를 뒤엎었던 사상이 신학을 중심한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루터와 칼빈이 그 경우이다. 신학이야말로 도덕과 양심을 외치면서 하나님의 법을 외쳤고, 정의를 외쳤다.

  서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은 파리대학이었다. 파리 대학은 노틀담 성당학교의 명성에 끌려서 그 전에 노틀담 성당학교에 있던 교수들에 의해서 강의하였다. 교수들이 방을 세 내어서 학생들이 듣고 강의료를 내었다. 학위 수여는 학무관에게 주어졌고, 때로는 교수들과 학무관들이 갈등이 있었다. 필립 2세가 학생들에게 권위를 주었다.
  이 파리에서는 총장을 선출하였다. 그 총장이 교양학부의 우두머리였다. 교양학부가 커가니까, 오랜 투쟁 끝에 신학부에 그런 갈등을 느끼면서 인문주의 계통에서 관리하는 현상이 있었다.
  철학과 신학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은 13세기 300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배움을 갈구하는 지성인들이 모여 들어 공부하였다. 이 후에 옥스포드에서 교수들이 나와서 캠브리지 대학을 세웠다.
이 각 대학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성속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투쟁을 많이 했다. 특히 교황권의 권력을 벗어나기 위해서 투쟁을 많이 하였다.(총회의 경우 상명하달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교의 발달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중세기에도 없었던 것이다. 공립학교가 정부에 시녀노릇을 할 때, 부패하게 된다. 교육현장에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들어와서 학교를 간섭하게 되면 학교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게 된다. 인간 교육, 신학교육을 위해서 공부시키는 곳이 신학교인데, 한국교회는 그러한 자유가 없는 곳이다.)
  대학이 부패한 사회와 교회를 진단해서 고쳐나가는 역할을 중세시대에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대부분 미혼이었고, 주민들의 생활방식과 달랐다. 그래서 많은 마찰이 일어났다. 대학안에서는 도둑, 폭행, 강간, 살인도 있었다.

 13세기 후반에는 대학 등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서로 도와주는 현상이 일어났고, 하숙비와 집 값이 오르자 학생들이 데모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와 공급이 균형이 맞지 않아 어려운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자선가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도와주었다.(칼빈의 경우에도 아버지의 친구의 집에서 공부하였다) 중세 대학의 이러한 개괄적인 모습에서, 대학은 학문의 도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식이 바꾸어지고 학문이 발달하고, 종교개혁으로 나아갔던 제3의 영향이었다. 나아가 근대의 문명을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만약 길드와 조합의 영향을 받아 대학이 형성되지 않았다면,(인도나 동양처럼 되었다면)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식발달과 학문이 발달하자 신비주의(Mysticism)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묵상, 고행 등을 통해서 신비체험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자가 聖버나드나 엑카르트이다. 성버나드의 경우, 그리스도와의(with Christ) 연합(Union)을 이야기하였다. 일반 사먀니즘에서는 하나의 결합을 이야기할 때, 하나의 융합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자기의 의지가 있음에도, 자기의 의지는 말살되지 않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것이었다. 신인합일, 신과 합일되어 지면서도 자기의 개체는 살아 있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스콜라식이 아니고 '믿게 때문에 이해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엑카르트는 도미니칸의 사제로 공부를 많이 했는데, 인간의 심층부의 영혼에서 신성의 탄생이 있다고 보았다. 결정적으로 신과 융합할 수 있는 것을 해석할 때는 Divine spark(하늘의 불씨)가 남아 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신성의 불씨로 말미암아 신과 합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유한성을 벗어나 신성으로 충만케 됨으로 말미암아 신과 합일하게 되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감동, 슬픔, 존경, 악에도 움직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순수성을 신인합일의 특징으로 보았다.

  그의 제자였던 Tauler, Suso 등 독일 중심의 신비주의가 라인강의 줄기를 따라 네덜란드로 올라간다. 그 중에서도 구르트(Grute)라는 사람이 '공동생활의 형제단(The common life of Brother)을 창설한다.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루터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근대 경건주의로서 종교개혁의 뿌리에 영향을 미쳤다.
  칼빈주의의 경건주의는 중세기에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중세기에 이러한 여러 가지 교회 정치적인 전통(Ecclesiopolitical Tradition)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캠브리지 대학의  Ullmann 교수가  이에 대해 2가지를 이야기했다.
권력의 구조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결국은 국민으로부터 올라가는 형태가 있고, 하나는 위에서 내려오는 형태가 있다고 보았다.
  울만은 여기서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의 구조는 이방문화에서 근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나와 있는 세속정치의 형태로 보았다.
 위에서 내려오는 하향식의 권력구조는 성직자들의 의식과 구조는 기독교의 원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셨고, 하나님이 세운 왕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신정적 전통(Theocratic)

  중세기는 대학교수들이 교황청을 회복하기 위해서 연 종교회의 같은 것은 권력이 상향식이었다고 보았고, 교황청들의 법들을 연구한 교회 법학자들(

  그러나 옥클리는 교회정치야말로 신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중세기에도 밑에서 올라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그레고리 1세와 7세는 모든 민중들이 원해서 올라간 경우이다.
(egalitarian)
  세속적인 정부도 일률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올라간 경우만이 아니었고 독재하는 황제의 경우 하향식이었다고 하였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기독교 공동구역의 이념을 가지고 기독교가 발전하고 붕괴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행사하였다. 기독교가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대리권자라는 Pre-eminent에 기초하였다.
  종교적 권위가 힘의 체제로 발달되었다.
종교체제에서 권력 소스를
① Bible로 보았다. 그리고
② Church tradition이다. 그리고
③역사적 사례들이었다.
이 3가지가 교회의 권위를 지탱해 주었다.

믿음이 이성을 짓누르는 상황 가운데서 모든 사회를 이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기에서 반기를 든 현상을 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이 파리의 쟌과 마르실리우스이다. 파이의 쟌 같은 경우에는 지금까지 중세의 두개의 구조를 가지고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는 식으로 믿음이 이성을 짓누르는 것에 대한 이론을 반대하면서 "국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통치자로 여기지 않고, 국가가 최고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가는 실제적이고 완벽한 정의가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도덕적인 덕이 있기 때문에 국가 자체는 교황이나 신적 서임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가가 교회의 권위 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평화의 수호라는 글을 통해서 "교회가 세속 권한에 너무 침투해 있기 때문에 국가가 불안하고 사회가 부패한다"고 하였다. 그 권력과 힘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람, 민중에게 있다고 하였다. 민중이야말로 세상의 권한의 소스, 원천이라고 하였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교회(김종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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