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十字軍 Crusade]

2010. 9. 21. 23:33교회사자료/3.중세교회사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8차례 이상에 걸쳐서 서유럽 그리스도교도가 동유럽, 중근동 각지를 향해 실시한 군사원정의 총칭. 참가자가 의복에 십자가 표지를 붙인 것에서 13세기 후반 이후 십자군이라고 했으나, 그 이전 사료에는 <예루살렘여행> <성(聖) 분묘참예>라고 기록되어 있다.


 1 배경
중세 서유럽사회에서는 11세기 전반까지의 몇 세기 동안에 자연조건의 완만한 호전으로 생산·유통이 향상되고 인구가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기술혁신과 지적활동이 촉진되고 신흥도시권과 전통적 농촌지역 모두 생활상의 발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또 정신면에서는 그리스도교 보급에 따라 수도원문화가 번영하였고, 신학·철학·법학·문예의 발달은 신심형태(信心形態)의 세련된 표현 수단을 낳아, 로마네스크양식에 의한 교회예술의 완성을 보았다. 성유물(聖遺物)의 숭경(崇敬)이나 성소참예는 그 보편적 습속의 전형이었으며, 순례는 속죄행위로서 신도들 간에 전통이 되어 유행하였다. 예루살렘은 성도(聖都)로서 순례의 최고 목표지였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계가 있는 곳인 성묘에 참예하는 것은 신도의 평생 소원이기도 했다.

 

한편 11세기 중엽에 지중해세계를 구성하는 서유럽, 비잔틴제국, 이슬람권의 3대 정치세력 사이에 균형 변화가 생겨, 그때까지 닫혀 있던 서유럽이 이슬람세력의 포위망을 밀어제치는 형세로 옮아갔으며 또 비잔틴제국은 이슬람의 압박에 단독으로 대항할 수가 없어 서유럽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여러 국민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종교적 사명감에 불탔으며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야심을 채울 호기로 보고, 성지해방을 대의명분으로 하는 무장순례단을 대(對)이슬람 원정군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십자군운동>이라는 이와 같은 해외진출기운은 서유럽 전반에 넘쳐, 봉건사회의 모든 계급이 이에 관계되었고 미지의 동방세계에 대한 동경심과 생활수준이나 사회신분의 향상을 바라는 욕구가 결부되어 지속적이며 대규모인 <탈서유럽> 현상을 가져오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2 동기
십자군원정의 발동은 다분히 동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틴세국의 내외정세판단에 따른 것이며, 이슬람세력의 동태는 간접적인 동기를 이루는 데 지나지 않았다. 11세기 중엽, 셀주크투르크가 동(東)이슬람권의 실권을 장악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시리아, 소아시아의 요충지를 잇따라 점령하고, 1071년 말라즈기르트(지금의 터키 동부)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비잔틴제국은 위기감 속에서 국토방위와 실지회복(失地回復)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인 친서유럽정책을 채용하여 나폴리·시칠리아에 진출해 있던 노르만인 기사(騎士)나 성지순례 도상에 있는 서유럽 제후에게 용병파견을 요청하였다. 1054년의 동서교회 분리 이후 멀어졌던 로마교황청과 재접근을 꾀하는 등, 서유럽인의 개입에 길을 열었다.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1095년 피아첸차교회회의에 사절을 보내, 동방의 <이슬람화(禍)>를 과대선전하고 그리스도교신도, 교회, 순례가 입은 피해를 호소했다.

 

이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반 2세는 동서교회의 재결합, 동방에 교회국가 창설, 서유럽 여러 국민의 대량 이민 등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구원군 파견 계획을 구상하였고, 같은 해 11월 클레르몽공의회 개최중에 제 1 차 십자군 발동을 선언했다. 그 취지는 전(全)그리스도교도의 의무로서 성묘에 참예하는 서원(誓願)을 하고 이슬람이 점령한 성도를 탈환하여 시리아·팔레스타인의 교회를 해방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권설(勸說)하는 데 있었다. 교황 우르반은 즉위 이래의 현안이었던 독일(신성로마제국)황제와의 <성직서임권투쟁>을 교황 쪽에 유리하게 해결하려는 의욕과, 서유럽 봉건사회의 적폐였던 제후와 기사 사이의 사적 투쟁을 <신(神)의 평화운동>으로 억제하려는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서 고조된 십자군운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교황대리 르퓌, 주교 아데마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군단편성을 프랑스제후에게 호소하였다.


 3 십자군의 구조와 경과
넓은 뜻의 십자군은 그 무대가 되었던 서유럽과 동지중해세계의 정세변화에 따라 초기·중기·말기 십자군 및 그 이후의 십자군의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초기십자군(11세기말∼12세기말)

클레르몽공의회에서 있었던 교황의 권설을 이론적 근거로 하는 제 1 차 십자군(1096∼99)의 공식원정대 4개 군단(로렌인·노르만인·남프랑스인·북프랑스인의 각 부대)은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일대에서 획득한 세 봉건소령(에데사백령·안티오키아후령·트리폴리백령)을 포함하는 예루살렘왕국을 창설했다. 그리고 그 기초를 굳힘과 동시에 주변 이슬람세력에 대한 공세적 방위작전을 폈다. 이 시기에는 아미앵의 은인(隱人) 페트루스를 지도자로 하는 민간순례단 약 2만 명의 선발대가 공식십자군과 협력하여 싸웠다. 1101년에는 신흥 예루살렘왕국에서 살기를 바라는 약 20만 명의 이민희망자가 소수 기사대의 호위 아래 민중십자군으로서 동방으로 출발했으나 도중에 룸왕조 셀주크군의 습격으로 거의 전멸하는 참상을 겪었다.

 

 이것으로 보아 비무장의 민간인집단이 십자군운동의 주체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복지의 지배는 전략목표지역의 중심이 되는 성벽도시 점령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공명을 세운 군사령관에게 맡겨졌다. 당시 서유럽에 확립되어 있던 봉건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가신(家臣)의 봉토 위에, 왕·제후·기사·시민·농민 등의 피라미드적 신분계급제가 구성되었다. 예루살렘 왕위는 초대의 <성묘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부여된 바스로렌후(侯) 고드프루아 드 부용 이래, 여계(女系) 상속을 포함하는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서유럽 여러 나라의 군주와 동등한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보두앵 3세 시대에는 그 영토가 북쪽은 유프라테스강 연안에서부터 남쪽은 홍해의 아카바만에 이르는 최대 판도에 달했다.

 

이 광대한 면적에 비해 서유럽인 지배자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대부분의 피지배자층은 정복될 때 대학살을 모면했거나 도망 후 귀순한 원주민이었다. 왕국의 방위군사력은 12세기 초 서유럽에서 창설된 기사수도회(騎士修道會)의 해외 관구에 속한 성채와 기사군을 중심으로 하여 소수의 현지 제후를 섬기는 기사계층에 위임되어 있었다. 한편 십자군 진출기에 때마침 정치적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여러 정권 쪽에서 마침내 통일된 반격의 움직임이 일어 1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이슬람 쪽이 에데사백령 전역과 안티오키아후령 동반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12세기 후반에는 살라웃딘의 아이유브왕조 창시를 계기로 이슬람 쪽의 대규모 반십자군 <성전(聖戰)>이 창도되었는데, 그 결과 제 2 차(1147∼49), 제 3 차(1189∼92) 십자군이 발동되었으나, 끝내 좌절됨으로써 초기 십자군의 성격은 변질되게 되었다. 46년 5월 프랑스 중부 베즐레집회에서 당시 서유럽 제일의 정신계 지도자였던 클레르보의 C. 베르나르두스의 권설로 제 2 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 독일왕 콘라트 3세가 지휘하는 원정대에 템플, 성 요한 두 기사수도회와 예루살렘왕국제후군이 참가했다. 다마스쿠스를 공격했으나 농성군에게 패하여 안티오키아 방위에 유효한 상황을 가져오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장기왕조의 세력확대를 허용하는 결과가 되었다.

 

또 63년 이래 예루살렘왕국의 카이로 파티마왕조에 대한 간섭행동이 원인이 되어 아이유브왕조는 이집트, 시리아와 통합작전을 펴, 87년 7월 하틴싸움에서 예루살렘왕국군을 참패시켰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 살라웃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십자군 국가의 운명은 위기를 맞았으며 제 3 차 십자군의 대대적인 발기를 촉진하게 되었다. 당시 서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로마교황의 권위도 위협하는 세력을 가졌던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붉은수염왕), 기사도정신의 귀감이라 하여 인기가 높았던 잉글랜드왕 리처드 1세(獅子王) 및 프랑스왕 필리프 2세(尊嚴王)의 3대 군주가 모두 모인 이 십자군은 지중해항로의 일부를 이용하게 된 새로운 경로를 따라서 아크레에 상륙하여 예루살렘 재점령을 목표로 전투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의 사고사에 따른 독일군의 불참과, 영국과 프랑스 양국 군주 사이의 불화가 화근이 되어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 그뒤 서유럽 십자군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2) 중기십자군(13세기 전반)

1192년 9월, 제 3 차 십자군의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했던 리처드 1세와 살라웃딘 사이에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예루살렘왕국은 티루스에서 야파까지의 해안부만으로 영토가 좁아진 상황에서, 아크레를 임시 수도로 하여 잔존영토의 수세적 유지에 급급하는 중기십자군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편 내륙 시리아를 회복하고 이집트와 연계한 아이유브왕조는 휴전기간중 그리스도교도가 순례하는 예루살렘의 통행권을 허가하는 관용정책을 내놓았다. 서유럽측은 이 시기에 새로이 영유한 키프로스섬을 중계지로 하여 바닷길에 의한 동서 연락 수단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또 1세기 동안에 걸쳐 이 해외식민지를 경영하여, 물심양면의 교류를 촉진할 수 있었다.일명 <방향전환십자군>으로 불리는 제 4 차 십자군(1202∼1204)은 교황권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또한 서유럽 수도제(修道制)의 이념을 표방하는 수사 F. 뇌이의 권설에 따른 것이었으나, 참가 제후·기사의 경제력 부족과 전략이념의 불일치가 화근이 되어 베네치아인의 상업지상주의에 끌려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틴제국을 공격,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라틴제국>을 건설하는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인 플랑드르백(伯) 보두앵을 초대황제로 한 이 신제국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그리스 각지를 정복하여 동방교회를 한때 로마교회 아래 통합하고 라틴문화를 동유럽에 보급시켰으나, 소아시아로 망명하여 부흥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비잔틴황제의 반격을 받아 1261년 멸망하였다. 제 5 차 십자군(1217∼21)도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향하지 않고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므로, 말하자면 방향전환십자군이었다. 이 십자군은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선포한 공식십자군이었으나, 참가자는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교국가의 헝가리왕, 오스트리아제후 외에 프리슬란트인 기사 등 대체로 약소한 군사력이었으며 여기에 예루살렘왕국의 현지군이 협조하여 다미에타를 점령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편 이슬람의 카이로정권 쪽에서는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조건으로 십자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교황대리 펠라기우스 추기경의 강경한 제안으로 이 조건을 거부하였고, 카이로공격을 계속한 십자군은 이슬람 쪽의 반격과 나일강의 홍수 때문에 아무 전과도 거두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시칠리아왕으로서 이슬람문화를 가까이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한 제 6 차 십자군(1228∼29)은 출발 지연을 이유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프리드리히를 파문하였기 때문에 공식 십자군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카이로의 술탄과 개인적 친교가 있어 결혼정책에 의해 예루살렘왕을 겸하였으며, 외교수단을 써서 1229년 2월 야파협정을 맺고 예루살렘에 무혈입성했다. 종교적 관용사상에 따라 십자군 본래의 목적이 달성되었으나 정치적·경제적 이해(利害)의 측면에서 서유럽인 사이의 조정을 보지 못했고, 파문당한 황제와 현지 제후의 대립, 출신지를 달리하는 여러 국민 사이의 불화가 표면화되어 왕국은 무정부상태의 혼란에 빠졌다.

(3) 말기십자군(13세기 후반)

1244년 호라즘 투르크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평화공존이 무너진 뒤에 중근동 정세는 다극적인 여러 세력의 이합집산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호라즘 투르크인 배후에서 몽골인이 시리아로 진출하였고 서유럽은 몽골인을 그리스도교도로 믿어 동맹을 구상하였으며, 이슬람권 안에서는 시리아와 이집트가 대립하는 한편 신정권 맘루크왕조에 의한 통일세력이 급속히 성장해 갔다. 서유럽에서는 프랑스왕국의 정치적·경제적 우위 아래 고딕예술이 번영하였고, 루이 9세(성 루이왕)의 경건한 신앙이 그리스도교도의 모범이 되었으며,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 수사의 해외포교활동도 활발했다.

 

13세기초 이래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던 소년십자군이나 목동십자군과 같이 민중종교운동에 대한 열의도 강했으나 군사력으로 십자군원정에 참가하는 제후·기사의 정열은 냉각되어 갔다. <예루살렘의 열쇠는 카이로에 있다>는 전략개념 아래 루이 9세가 일으킨 마지막 두 차례의 십자군(제 7 차 1248∼54, 제 8 차 1270)은 이집트와 튀니스를 향해 정예의 대군을 보냈으나 모두 이슬람의 포위망 속에 고립되어 성지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패퇴하였으며, 오히려 카이로의 신정권 맘루크왕조의 그리스도교도 소탕작전을 도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265년부터 91년에 걸쳐 시리아해안의 안티오키아후령·트리폴리백령을 비롯하여 잔존 영토 전부를 상실하였고, 예루살렘왕국 직할령은 마지막 거점 아크레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4) 이후의 십자군(14∼16세기)

그리스도교도에게 성지 상실은 십자군 그 자체의 종말을 뜻했으나, 대(對) 이슬람전쟁이라는 정략적 구상에 의한 동방관은 근세까지 지속되어 맘루크왕조에 대한 항쟁, 새롭고 강대한 적대자 오스만제국과의 대결은 <이후의 십자군>이라는 개념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1344년의 키프로스(로도스)십자군과 96년의 니코폴리스십자군이 특기할 만하다. 모두 서유럽에서의 활발했던 십자군운동과는 달리 동유럽 그리스도교 여러 나라의 수세적 공격이었다. 15세기에 들어오자 1440년 헝가리십자군을 전기로 하여 동서세력관계는 뒤바뀌었으며, 오스만제국군의 서방진출이 고조기에 달하여 53년에는 비잔틴제국이 멸망하게 되었고 16세기에는 동지중해제해권의 전면적 포기를 강요당함으로써 십자군은 소멸했다.


 4 세계사에서의 의의
십자군운동이 시작된 이래 오늘날까지 약 900년 동안, 그 평가는 찬부양론으로 나뉘어 학설도 구구했으나, 이를 단순한 군사원정의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서유럽 중세 후반기의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종합적인 전체상으로서 관찰하고, 거기에서 문화적 고양기의 서유럽인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바람직하다. 지중해 세계에서 수세기에 걸쳐 지속된 동서교류의 영향은 매우 현저하며, 연안 여러 민족이 장기적 교류를 통해 정신적·물질적 시야를 넓혀 마침내는 세계적 규모의 <대항해시대>를 여는 밑바탕이 되었다.


 5 연표

AD 1095 클레르몽공의회의 십자군 선언
1096 P. 피에르의 민중십자군. 제1차 십자군
1097 니케아 공략
1098 에데사백령 성립. 안티오키아후령 성립
1099 예루살렘 점령. 예루살렘왕국 성립
1101 후속 십자군 소아시아에서 괴멸
1102 트리폴리백령 성립
1109 트리폴리시 점령
1118 템플기사수도회 성립
1146 에데사백령 멸망
1147 제2차 십자군
1153 아스칼론 점령
1163 예루살렘왕국군 이집트 원정(~67)
1169 살라웃딘 아이유브왕조 창시
1187 하틴 싸움. 예루살렘 함락
1189 제3차 십자군
1190 프리드리히 1세 익사. 독일기사수도회 성립
1191 리처드 1세 키프로스 점령. 아크레 탈환
1192 리처드·살라웃딘협정(순례의 자유 확보)
1202 제4차 십자군
1204 콘스탄티노플 점령, 라틴제국 성립. 모레아후령·아테네후령 성립
1212 소년십자군
1217 제5차 십자군
1219 다미에타 점령
1221 이집트에서 패퇴
1228 제6차 십자군
1229 야파협정(예루살렘 회복)
1244 호라즘 투르크인 예루살렘 점령
1248 제7차 십자군
1250 만수라 싸움, 루이 9세 포로가 됨. 맘루크, 아이유브왕조를 무너뜨림
1261 라틴제국 멸망
1268 안티오키아 함락
1270 제8차 십자군. 루이 9세 튀니스에서 병사
1289 트리폴리 함락
1291 아크레 함락(십자군국가 멸망)

 

Daum 백과사전


십자군 전쟁

 

1. 십자군 전쟁의 원인

 

① 정치적 원인
1)이슬람의 동로마 침입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게 침략을 당했다.  서방에 원병을 요청했다. 1071년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Manzikert전쟁에서 패배하고,  투옥당함. 다음 황제  미가엘7세(1071 - 1078)가 교황 그레고리7세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우스라는 사람이 황제가 되어서 1086년 안디옥, 베데사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도시를 빼앗겼다. 그래서  서방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레고리7세는 헨리4세와 서임권 논쟁을 하느라고 성공을 시키지 못했으나 다음 교황이 성공을 시켰다.


2)이슬람 세계의 분열
스페인 지역에서 1034년 회교 족장들의 싸움으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하던 칼리프  왕국이 멸망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스페인 지역을 탈환했다. 1060년 이후 시칠리 섬 탈환, 기독교인이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수 있었다.

② 경제적 원인
1)당시 영주의 장남이외의 아들들은 상속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2)도시 상인들의 시장개척의 노력

 

③ 종교적 원인
1076년 부터 성지가 셀주크 터어키에게  점령당했다. 이들이 성지 순례를 방해했고,  교회는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황권이 강화되어서 동방교회까지 지배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십자군전쟁은 한마디로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회가  개혁되고 신앙의 열정으로 일어날 수 있는 운동이었다.  

 

2. 공헌한 사람들

 

① 우르반2세
십자군을 정식으로 선포한 사람이었다. 그는 클루니 수도원의 부원장까지 지냈던 클루니 개혁운동의 중심이었던 사람이었다. 교황권이 강화되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수 있었다.

 

② 은둔자 베드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꿈에 크리스도가 나타나서 성지를 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구라파로 돌아와서 열정적으로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설교를 했다. 그는 남프랑스,  스페인, 로레인, 라인강 지역까지 나귀를 타고 맨발로 다니며 설교를 했다.
*우르반2세가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에서 행한 연설로  공식적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자리에 참석했던 4사람이 기록하고 있다. 그중 두사람의 글이다.


1)Fulcher :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은 십자군에 참여해서 죽으면 즉각적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 귀신을 믿는 천박한  민족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을 점령한 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가. 기독교인들의 자긍심에 호소했다. "같은  신앙인들끼리 부당하게 싸우는 자들은 불신자들과 싸우고,  봉건영주들은 잦은 싸움을 끝내고 이슬람교도와 싸우는 것이 낫다. 오랫동안 도적질을 했던 사람은  이번 기회에 기사가 되어라. 적은 돈을 보상으로 받고  용병으로 활동하는 자들은 이번 기회에  영원한 보상을 받기 위하여 이 전쟁에 참여하라.십자군에 직접 참여하는 자들은 땅을 팔아서 경비를  조달하라."   


2)Robert : 이슬람 교도들은 기독교도들을 붙잡아서  노예로 팔거나, 살해하고, 교회당을 파괴하고, 제단을 헐었다.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서 화살 과녁으로  삼았다. 잔인한 이슬람 교도들의 박해상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다. "이 땅에는 인구가 많다. 땅은 넉넉지 않다. 성묘가 있는 곳에 있는곳에 있는 악한자들을 ?아내고 그땅을  차지하자. 그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 설교에 나타난 것처럼 이교도들에 대한 적개심,  경제적인 동기, 새로운 땅을 찾아 개척하는 등의 동기에서 비롯됐다.


3) 십자군에 참여해서 죽으면 죄가 사하여 진다는 이러한 생각은  단순히 우르반2세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고대 오리겐의 '순교로의 권면'이라는 책에서 세례를  받고 짓는 죄에 대해서는 순교의 피로써 용서를 받을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을 받았듯이 순교자의 피는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4)레오4세(847 - 855) : 프랑스군에게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순교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설교하였다.

3.경과

 

① 십자군의 선발대(민중의 십자군)
1096년 출발.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 은둔자 베드로였다. 이 십자군에는 많은 농민들이나  기사들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가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진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라인강 유역에 가서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왜 유대인들을 학살했는가 하면 이들중에는 유대인들에게 빚진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빚을 갚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은 반셈족운동의 始原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서 니케아를  점령하러 갔다가 이슬람족에게 전멸당하고 은둔자 베드로만 살아 돌아온다.  


② 제1차 십자군 운동
교황의 명령으로 로마의 귀족들이 참여했다. 3개의 부대가 개별적으로 진군을 했다. 이 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십자군의 도덕적 영웅이었던 Godfrey였다. 가장  순수했던 마음으로 거룩한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운동에 참여했던 운동이다.


1)로레인, 플란더스   2)북부 프랑스   3)남부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

1096년 겨울에서 1097년 봄까지 도착했다. 십자군 전설에 의하면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60만명, 기사만 10만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타이어니의 책에 보면 실제로는  8천에서 만2천명정도 그리고 기사는 3천명 정도였을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 동방의 황제가 원한것은 원병이었다. 병사들이 자신의 휘하에 와서 자신을 도와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목적은 단순히 동로마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1097년5월 니케아를 점령하고, 10월에는 안디옥에 이르렀다.

 

안디옥에 이르러서 8개월정도 고생하다 1098년 6월에 안디옥을 점령했다. 그다음에는 이슬람의 반격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 성안에서 그리스도를 찔렀던 창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반격을 가해서 승리를 했다. 이 사람들은 기분에 좌우되는 사람들이었다. 1099년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 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람들이 점령한 다음에 이곳에 라틴왕국을 건설했다. 고드프리가 성묘의 수호자가 되었다. 고드프리가 1100년 죽은 다음 그의 동생이 왕위를 계승했다. 서방과 같은 봉건제도가 형성되었다. 종교도 라틴의식으로  재조정되었고, 많은 수도원들이 생겼다. 처음에는 이 왕국의 실권은 대제후의 모임이 가지고  있었다. 대궁정(High Court)에서 모였다. 그러나 아모르가 왕위에 오른뒤 왕권을 강화하고  대제후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라틴왕국의 보호를 위해서 기사종단들이 생겼다.


ⅰ)성전 기사 수도단 : 시토회를 모방하고, 불신자와 싸우고, 성지를  지키고, 순례자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땅을 기증해서 성전 기사 수도단은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ⅱ)성 요한의 병원 수도단 : 세례요한의 교회부근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순례자들을 진료하고 구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ⅲ)독일 기사단 : 나중에 프로이센을 점령한 아주 악명 높은 기사단이었다.


③ 제2차 십자군 운동
1144년 이슬람이 에데사를 점령함으로써 1147년 클레르보의 버나드가 십자군을 주장했다.  


④ 제3차 십자군 운동
1187년 성지를 점령했으나 다시 패배하여서 예루살렘과 성지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⑤ 제4차 십자군 운동(1202 - 1204)
성지를 공격하기 위해서 먼저 이집트를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집트원정을 먼저 시작했다. 베니스의 상인들과 협력해서 헝가리에서 먼저 짜라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베니스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줄것을 요청했다.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 폭동이 일어나서 많은 베니스의 상인들이 약탈을 당했는데 여기에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알렉시우스라고하는 왕자가 다른 알렉시우스3세라고 하는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빼앗겼는데, 만약에 십자군들이 자신의 왕위를 되찾아 주면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십자군들은 정통왕조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1204부터 1261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중요한 부분을 서로마  제국에서 지배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에 라틴왕조와 라틴교회를 세웠다. 명목상으로는 동방교회과 서방교회이 하나가 되었다. 1261년 동로마 제국이 남아있던 라틴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래서  라틴왕조와 라틴교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라틴왕조와 동로마 제국의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었고, 결국 1453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하여 동로마 제국이 멸망되었다.  


⑥ 소년 십자군 운동 1212년
프랑스에서는 스데반이라고 하는 12살된 목동이, 독일에서는 니콜라스라고 하는 10살 된 소년이 중심이 되어서 많은 어른들과 함께 일부는 마르세이유  항구까지 도착하였다. 이 어린아이들이 생각할때는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하면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둘로  갈라져서 성지까지 걸어갈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다가 나누어지지 않았다. 상인들에게  유혹되어서 상인들의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일부는 파선을 당하고 일부는 아프리카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다. 십자군운동이 얼마나 환상에 의한 것이고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⑦ 제5차 십자군 운동(1218 - 1221)


⑧ 제6차 십자군 운동(1228 - 1229)
황제 프리드리히2세가 십자군 서약을 했다. 1229년 이집트의  술탄과 계약에 의해서 1244년까지 예루살렘을 기독교가 보유하게 되었다.


⑨ 제7차 십자군 운동(1248 - 1250)
프랑스의 루이9세는 이집트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는  풀려난뒤 1270년 다시 공격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성 루이라고 불렸고, 십자군에 온 인생을 바쳤던 사람이다.


⑩ 제8차 십자군 운동(1271 - 1272)
영국의 에드워드왕자(나중에 에드워드1세가 되었다)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실패하고 돌아와서 그의 소원은 다시 십자군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결국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291년 마지막 땅까지 상실하였다.
*1096년 시작되었던 십자군 운동은 1291년까지 약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루터 [터키인과의 전쟁에 대하여](1529)


1)터어키와의 전쟁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군이어서는 안된다.  교황이 십자가의 깃발아래 전쟁에 참여해서는 안되고 황제가 중심이 되어서 터어키인들의 침략적 행위를  저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2)터어키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앙때문에 터어키인들을 공격해서는 안된다. 터어키인들이 유럽을 침략했기 때문에 그 침략에 대한 응징으로 터어키인들을 공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지탈환, 이슬람군의 진출을 저지, 동로마를 지원함으로써 동서방교회의 일치를  이루겠다
는 등의 목적은 실패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원정 때문에 동서방교회  사이의 앙금은 더 깊어졌다
.

4.결과

① 귀족들이 전사를 하게 된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왕권신장의 결과를 가져왔다. 근대절대왕권형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②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십자군전쟁은 클루니개혁운동으로 교황권이 절정에 올랐을때 시작되었으나 십자군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1309년부터 1377년까지는 교황청의 바빌론 유수기이다. 교황청이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가서 프랑스왕의 지배를 받던 시기이다. 1378년부터  1417년까지는 교회의 대분열 시기이다.
③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자처한 타락한 교황이 나왔던 르네상스 교황의 시기이다. 십자군전쟁이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 한명도 안나왔다.  그래서 교황이 공공연하게 적그리스도라고 공격을 받았다.
④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상업의  발전및 도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유럽 사회가 봉건 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하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유럽 사람들의 정신적 지평을 확장시켜주었다.
⑤ 4차 십자가 전쟁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콘스타티노플에 있는 동방의 서적들과 학자들이 서방으로 유입되었다.


 

5.교훈

① 헤겔의 주장
서방사람들에게 좀더 영적이고 정신적인것에 관심을 가지도록했다.  이 사람들이 처음에 시작할때는 예수님이 활동했던 거룩한 성지로 가면 무언가 거룩한 자취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묘교회에 가보니 아무것도 없는 빈무덤이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느낀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데로 왜 산자를 죽은 가운데서 찾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다 높은 정신의 세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② 교회는 칼로써 승리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는 평화의 메세지로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십자군의 중지에 대한 이론
① Palmer Throop
'Criticism of crusade'라는 책에서 13세기에 와서 십자군 운동이 비판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반대자들은 십자군운동의 원리와 실행을 거듭 비판했다는 것이다. 십자군운동은  이슬람세력들을 개종시키는데 방해요인이 되었다. 13세기 탁발수도회에서 십자군운동을 특별히 반대했다.
② Flahiff
십자군운동에 대한 비판은 12세기부터 나타났다.
③ Siberry


1985년 'Criticism of crusading'이라는 책을 써서 Palmer Throop에  대한 반대입장을 나타냈다. 12,13세기에 십자군운동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십자군운동이 이슬람세력을 개종시키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십자군운동이 성공하게 되면 이슬람에 대한 개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탁발수도회나 도미니크회는 이 운동에 반대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12,13세기에 십자군운동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군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십자군의 잘못을 비판한 것이다. 특히 십자군들이 동로마 제국을 점령한 것에 대해 비판을 했다. 극소수가 십자군 자체를 비난했지만 이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중의 루터의 교리(교황이 일으킨  십자군운동에 반대)와 연결시켜  보면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1291년 십자군운동이 끝난후 서방의 여러 문헌들을 보면 십자군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문
헌들도 보인다. 오히려 8차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끝난후 좌절감으로 말미암아 십자군 무용론이 대두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