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십자군 원정에 대해...(1096-1272)

2010. 5. 2. 23:42교회사자료/3.중세교회사

십자군 원정에 대해...(1096-1272)



(1)원인

십자군의 발원은 유럽이지만 전쟁의 장소가 중동 지역이므로 이곳에서 다루기로 한다.
셀주크트루크가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기독교전파로 개인 또는 단체가 성지 순례를 하였는데 회교인의 방해가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8차에 걸쳐 감행한 대 원정이다.참가한 군사의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십자군이라 부른다.
기독교와 회교 전쟁의 명분아래 봉건영주(제후)와 하급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 야망을 위하여,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의 발생을 바라고,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탈출을 위하여, 일반인은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더러는 약탈 욕심채우기 위하여 가담하는 등 저마다 다른 욕심을 신앙 열정이라는
포장 속에 가담하였다.

셀주크투르크의 통일이 깨지고 왕족간의 영토분할이 있자,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1세는
재흥의 기회로 삼아 교황 우르바느스2세에 십자군 제창을 권하였다.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4세 보다 성직임명권이 우위에 있는 비잔틴황제와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황아래 두고자 십자군을 모집하였다. 이 처럼 각자의 목적이 달랐다.성지해방전쟁을 성전이라고 하였고 참가 전원은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처음에는 기사로 구성하려고 하였으나 농민 군대가 먼저 구성되어 동쪽으로 떠났으나

헝가리 지나 갈 때에 양식이 떨어져 약탈자가 되었고, 어느 농민군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은
분풀이로 유대인을 박해하였는데 그것은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 십자군은 성지에 도착도 하기 전에 헝가리 군대에 괴멸당하였다.





<십자군 지도>

(2)1차 원정(1096-1099)

베르망두아의 위그, 보에몽, 보에몽 생질의 레몽, 플랑드르의 로베르 같은 기사들이 군대를 일으켜,정식으로 군대가 결성되어 1096년에 출발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여 출발하였다.97년에 5만 명이 니케아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진군하였으나, 질병, 더위,
굶주림으로 많이 죽어 안디옥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정문에 이르는데 14개월이 걸렸다.
99년 7월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여자와 아이를 무참하게 사살하였다.
십자군 정신은 광적 신앙과 이교의 증오로 형성되었다.유대인은 그리스도를 빌라도에 넘긴 백성이라고 탄압하여 희생양이 되었다.



<위그, 보에몽, 레몽, 로베르1차 원정 때 4명의 거두>


(3)2차 원정(1147-49)

시리아의 다메섹을 공격하려다가 성과 없이 돌아왔다.



(4)3차 원정(1189-92)

명군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과 그외 모두 회복하면서 다시 원정이 시작되었다.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먼저 시리아로 진군하다 강에 빠져죽고 군대는 계속진군 하였다.
프랑스 필리프2세는 1년8개월 뒤에 도착하여 아콘을 공격한 후에 귀국하였다.영국의 리처드1세(사자왕)는 키프로스 섬 정복 때문에 필리프보다 2개월 늦게 도착하여 아이유브왕조의 살라딘과 싸워 몇 개 도시만 탈환하고 예루살렘정복에는 실패하였다.
살라딘이 리처드1세의 용기에 탄복하여 3년간 성지순례를 보장받고 돌아왔다.
황제가 돌아간 뒤에 십자군의 극렬한 내분으로 다시 예루살렘을 잃었다.







<십자군 원정>



(5)4차 원정(1202-04)

교황 권의 절정기인 인노켄티우스 3세(인노센트,1198-1216)에 의하여 이루어졌다.황제나 국왕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프랑스군대가 중심이었다.거점인 이집트를 정복하지 않은 것이 전에 원정의 실패한 요인으로 보아 이집트 정복이 급선무였다.
이집트로 수송을 맡은 베네치아는 이집트와 교역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수송비를 문제삼아
베네치아의 요구대로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였다.
1204년 베네치아는 비잔틴제국이 십자군 때문에 혼란한 틈을 타 전에 제노바나 피사보다 불리한
위치에서 교역하던 비잔틴을 공격하여 수많은 교회유물과 보물을 약탈하고 수도일부와 항만과 섬을
점령하였다. 십자군 지휘자들도 비잔틴을 분할하고 라틴제국을 건설하여 비잔틴은 재흥은 도리어
쇠퇴하게 되었다. 1261년에 회복하나 이미 힘이 상실되어 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살라딘>


살라흐 알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1138~1193, 재위 1169~1193)

쿠르드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시리아의 장기왕조를 섬겼고, 1169년 경 이집트 파티마왕조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1171년 파티마왕조를 넘어뜨린 뒤 시리아 정복에 나서고,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집트에 군사적 봉건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군대를 편성하는 한편, 국가가 공인한 종교를 시아파(派)로부터 수니파[正統派]로 바꾸어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회복하였다. 또한 십자군전쟁을 수행하여 제3회 십자군의 리처드 1세와 휴전협정을 맺어,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티나에서 권력을 확보하였다.






<사자왕 리처드>


리처드 1세(1157~1199, 재위 1189~1199) -
플랜테저넷 왕조의 잉글랜드 왕



십자군 전쟁



봉건제도와 카톨릭 교회를 가반으로 안정을 이룩하게 된 유럽사회는 이윽고 넘치는 힘을 외부로 쏟아낸다. 그 출발 신호를 올린 것이 바로 십자군의 대원정이었다.
그리스도교가 번성하여 감에 따서 유럽에서는 많은 신도들이 예수가 일생을 마쳤던 팔레스타인 지방의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기나긴 순례의 길을 떠나곤 하였다. 이것을 성지순례라고 하는데, 그 당시 이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 교도들은 그리스도 교도들의 순례에 대해서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10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제국의 동부로 이동하여 열렬한 이슬람 교도가 된 셀주크투르크족이 급속하게 그 세력을 팽창시켜 11세기 중엽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그들은 이슬람제국의 지배자가 되자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제국이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황제가 포로가 되는 등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비잔틴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마침 교황권의 위세를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던 우르반 2세는 투르크족을 공격하여 성지를 이교도로부터 되찾고 비잔틴교회를 로마교회에 통합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은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고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교황은 이슬람의 승리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하면서 유럽의 귀족들이 내부의 싸움을 그만두고 그들의 칼을 신앙에 동려 동방교회를 도와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웅변술이 뛰어난 우르반 2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그리스도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동방에서 투르크인이 가해오는 위협을 조리있게 설명하고, 이슬람에 대한 싸움은 성전이며 이전쟁에서 전사하는 자는 모두 천국에서 그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아가 그는 동방에 금은 보석 및 온갖 재화가 수없이 깔려 있음을 들어 세속 제후들의 이기심을 충동질하기도 했다.
이어 우르반 2세는 프랑스를 순회하면서 십자군을 제창하였으며 많은 열성적인 설교사들이 여러 곳을 다니면서 십자군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리하여 때마침 팽배해 있던 유럽의 힘과 강렬한 신앙심이 결합하여 대대적인 십자군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다.



사자왕 리처드1세의 활약



예루살렘 왕국이 이슬람군에게 다시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유럽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십자군 사상 가장 막강한 전력으로 당대의 대표적인 국왕들이 참가한 제 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프랑스의 필립왕, 독일황제 프리드리히 1세 그리고 누구보다고 가장 힘차게 일어섰던 왕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국왕이라고 불리웠던 영국의 리처드 1세였다.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의 영토인 노르망디 문제로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자 독일황제 프리드리히가 단독으로 먼저 출발했으나 소아시아에서 강물을 건너다 실수로 익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는 애통해하면서 곧 원정준비를 서둘렀다. 우선 부하들 속에서 용맹하다는 기사들을 모두 모았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사자왕 리처드는 프랑스로 건너가서 자기 영지인 노르망디와 브레타뉴 지방을 돌며 씩씩한 용사들을 모집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기당천의 용사를 갖춘 리처드는 1191년 100척의 배에 4000명의 기사와 4000명의 보병을 싣고 의기양양하게 출진하였다.프랑스왕 필립 2세도 50척의 배에 군대를 태우고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립 2세의 세력은 리처드왕에 비하여 아무래도 약했으므로 결국 원정군의 중심은 리처드일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은 지중해 동쪽으로 진군하는 중에 큰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필립의 함대는 무사히 목적지인 시리아 해안에 당도할 수 있었으나 리처드가 거느린 대함대는 폭풍에 휩쓸려 바로 키프로스 섬에 도착하였다.
100척의 배가 무사히 당도했다는 것만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제 아무리 용맹스런 사자왕이나 그 기사들도 지중해의 위력 앞에서는 그저 신의 가호만을 외쳐댔던 것이다.
키프로스 섬에서 숨을 돌린 원정군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배를 몰아 그해 6월에 시리아 해안의 아크레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에게 다시 뺏긴 이후로 기독교와 이슬림교도 사이에는 예루살렘을 놓고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프랑스 출신의 기사 귀이도 군대를 모아 우선 아크레를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살라딘이 지원군을 보내왔다. 삽시간에 귀이는 살라딘의 군대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어 밖으로는 살라딘의 응원군과 안으로는 아크레의 이슬람군 사이에 끼어 양편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귀이의 군대는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용감하다고 소문난 살라딘의 군대도 이를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싸움은 장기전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맹렬한 싸움이 2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제는 양편이 다 지쳐서 어느 편이 더 비티어 내느냐 하는 경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자왕인 리처드가 8000명의 원정군을 데리고 온 것이다.
포위 당해 있던 귀이의 군대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 갑자기 사기가 충천하였다. 리처드의 용맹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군도 은근히 겁을 먹고 있었다. 당시 리처드는 열병에 걸려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한시 바삐 포위되어 있는 그리스도군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씩씩하게 선두에 나섰다. 그 뒤로 4000명의 기사와 4000명의 보병이 말발굽에 먼지를 날리며 힘껏 달렸다.


이 위세에 살라딘군의 포위망이 풀리고 귀이의 군대는 위기를 모면하였다.
리처드군은 내친 걸음에 바로 진격을 계속하여 아크레를 공격하였다. 그들은 성벽에서 빗발치듯 던져오는 돌과 불덩어리도 아랑곳없이 앞을 다투어 성벽으로 기어올라 갔으나 성안에서는 그들을 겨누어 화살을 퍼붓고 다가오는 적에겐 창을 들이대었다. 리처드군의 기사들도 겨우 성벽 위까지 올라가기가 무섭게 저항을 받고 아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용감한 기사들은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연달아 성벽으로 기어 올라갔다. 마침내 성벽이 돌파되었다.물밀둣이 성안으로 뛰어들어간 리처드군은 빠져나갈 구멍만 찾고 있는 사라센군대를 몰아내고 아크레를 점령하였다. 그런데 프랑스군대와 독일군대가 아크레 점령후 곧 귀국해 버리자 리처드왕만이 예루살렘 탈환에 나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 3차 십자군의 싸움은 그리스도교도를 대표하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와 이슬람교도를 대표하는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의 불을 뿜는 맞겨룸이 되었다. 1191년 가을 양편 군대는 아르스프라는 곳에서 맹렬히 싸웠다.12월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목표로 삼는 예루살렘의 교외에까지 쳐들어 갔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럽 사람들이 겪어 보지 못했던 지독한 폭우였다. 리처드왕의 기사나 병사들은 비를 맞고 그만 꼼짝 못하게 되었다. 살라딘군으로서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즉시 공격해왔다. 사막기후에 익숙한 사라센군은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했다. 그리하여 피투성이의 싸움이 또다시 벌어졌는데 여기서는 리처드군이 패배하고 말았다.


사자왕은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지만 사막의 호우라는 대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음해 1192년 8월 얍파라는 도시에서 양편 군대는 또다시 부딪쳤다. 이때 리처드왕의 휘하에는 50명의 기사와 2000명의 보병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결전이었다. 기사들도 말을 버리고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 들었다. 언제나 리처드왕이 선두에서 돌격해 가자 이를 본 살라딘 왕은 자신도 말에서 내려 칼을 휘두르며 맞서 왔다.
이렇듯 장기적인 대치 상태에 있을 때 영국에 남아 있던 리처드왕의 동생 존이 프랑스왕 필립 2세와 짜고 영국 왕위를 노리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 조건으로는 '예루살렘이 살라딘의 영토임을 인정한다. 그대신에 순례지들의 자유로운 예루살렘 출입을 보장하라.'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3차 십자군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프랑스왕 필립, 영국왕 리처드 등 유럽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이 참가했지만, 예루살렘을 다시 찾지도 못하고 자유로운 출입만을 보장받는데 그치게 되었다.

리처드는 서둘러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운수 사납게도 항해 도중 지중해에서 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만 건져 이탈리아의 해안에 당도하였다.리처드는 신분을 속이고서 귀국할 생각으로 순례자의 몸차림을 하고 오스트리아로 들어갔다. 리처드는 끝까지 운이 나빴다. 오스트리아공은 전부터 리처드 국왕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그를 잡아 감옥에다 가두고 말았던 것이다.


수소문하여 각처를 찾아 보았으나 사자왕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브론텔이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겨우 리처드가 오스트리아 감옥에 잡혀 있다는 것을 탐지하여 곧 본국으로 알렸다. 이에 영국이 오스트리아측에 리처드왕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자 오스트리아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해 왔다. 영국에서는 하는 수 없이 여러 사람들이 돈을 모아 가지고 간신히 왕을 구출해 내었다. 리처드왕은 5년만에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국민들은 리처드왕을 성대하게 환영하였다.

리처드로서는 자기 동생을 충동질하여 왕위를 빼앗게 하려던 프랑스의 필립 2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십자군 원정 때도 서로 크고 작은 다툼을 벌여 왔기 때문에 곧 프랑스로 건너가 필립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전쟁은 여러 해를 끌었다. 그러던 중 리처드는 적군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자왕은 중상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무리한 행동으로 상처가 악화되어 며칠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유럽을 포효했던 사자왕 리처드는 이렇게 일생을 마쳤다.

출처 : 행복†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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