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 대로 거둔다”(갈 6:7)
2012. 1. 29. 00:37ㆍ목양자료/2.설교자료
심은 대로 거둔다”(갈 6:7)
<본론>
1. 자연에서 본 심고 거두기
첫째로, 우리는 자연에서 본 심고 거두기를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옥토에 잘 심고 잘 가꾸어야 거둘 것이 많다는 것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지매 싹이 났으니 뿌리가 내리지 못하므로 햇빛에 말라 죽어버리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나 가시가 우거져서 기운을 빼앗으므로 죽어버리고 그 다음 옥토에 뿌려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볼 때라도 좋은 씨가 좋은 옥토에 뿌려지는 것은 4분의 1의 형상밖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씨를 뿌려 놓았다해도 잘 가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꾸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놓아서 씨가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김을 매고, 비료를 주고, 병충해를 방지하고, 가뭄과 홍수를 잘 다스리는 수리 시설을 잘해야 씨가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린다고 말했고 고린도전서 3장 6절로 7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 선생은 복음을 증거해서 고린도에 큰 교회를 세우고 난 다음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나는 와서 씨를 뿌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아볼로는 와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가르쳐서 물을 주어서 힘을 씨가 얻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싹이 터서 자라게 하고 열매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계적인 교회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씨는 제가 뿌렸고 물은 저도 주고 우리 최자실 목사님 살아계실 때 주시고 존 허스톤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물을 주시고 모든 사람들이 물을 주었었습니다. 그런데 자라게 하는 것은 주님이 자라게 했지 우리가 자라게 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씨는 누구든지 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은 누구든지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는 것은 주님밖에는 자라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우리는 드려야 될 것입니다.
저는 일정 시대에 자랐기 때문에 일정 시대에 농촌에 있는 상황을 잘 압니다. 토지를 일본 사람에게 다 빼앗긴 우리 농촌 농민들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기근이라는 것은 절망적인 기근이었습니다. 오늘날 아프리카 사람이 당하는 기근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겠다고 남부여대하고 우리 한국과 고향땅을 떠나서 만주로 간도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동리는 거의 태반이 다 텅비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농토는 모두다 일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간 것을 제가 어릴 때 저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오늘날 북한이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해마다 기근이 들어서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북한이 굶어죽는다는 소식이 온 세계에 퍼져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창피하기 짝이 없습니다. 북한 정권이 돈이 들어오면 전부 군비에 다 투입하는 것입니다. 원자핵을 만들고 비행기를 사고 전차를 만들고 폭탄을 만드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국민들에게 주어야 될 쌀과 밀가루와 보리나 양식은 사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리시설을 잘못해서 비가 오면은 홍수가 나서 논밭을 다 휩쓸어 버리고 한발이 오면 다 수리시설이 안되어서 불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돈을 다 쓰고 국민들의 복지를 돌비지 않으므로 국민들이 헐벗고 굶주립니다. 나는 오늘날 이러한 북한의 실상을 알면서도 북한을 향해서 찬양을 하는 사람 미쳐도 보통 미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국에 좌경화 된 것은 두렵지 않지만 친북 좌경화는 절대로 막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한국이 평안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보수적인 우리 국민들은 걱정만 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좌경화된 무리들은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와서 파괴를 하는 것입니다. 정부를 공격하고 사회사업을 공격하고 한국에 어지러움을 가져오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이 짧은 세월동안에 얼마나 잘사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짧은 이 세월 한 60년 사이에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열한째 잘사는 부자나라로 변화된 것은 말할 필요없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그 다음 우리 정부가 미리 내다보고 수리시설을 잘했기 때문에 홍수가 나도 논밭을 다 휩쓸어버리지 않고 또 한발이 와도 다 곡식이 불타지 않고 조절을 잘해서 해마다 풍년이 들어 쌀이 없어서 굶어죽는 현상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넘치는지 우리가 감사를 해야 될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감사로 제사 드리는 것을 원하느냐. 감사는 굉장히 긍정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정적인 힘이 너무나 많아요. 나는 못산다. 나는 안된다. 할 수 없다. 원망, 불평, 탄식이 마음에 안개와 같이 서리면 하나님의 축복을 다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세력을 통해서 마귀는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부정적인 세력을 다 쫓아내고 안개와 구름을 불어내는 바람처럼 마음을 청소하고 하나님의 맑은 밝은 햇빛이 비춰서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는 것은 감사인 것입니다. 감사가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공로를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보다도 감사를 하나님이 기뻐할 뿐 아니라 감사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부정적인 담을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헐어지지 않는 것도 감사하므로 헐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꽉 들어찰 때일수록 감사를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은 그런 때일수록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는 것이 바로 감사인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면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손길을 뻗을 수가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자기 운명과 미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리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시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 마음의 꿈, 마음의 믿음, 마음의 말씀,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지 사람 마음을 떠나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안정을 시키고 마음을 다스려야 되겠는데 마음을 못다스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원망, 불평, 탄식이 꽉 들어차고 부정적이고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마음이 꽉 들어찼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도와줄 수 있습니까? 마음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길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드리면 마음이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햇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많이 드리는 개인이나 가정, 교회나 사회나 국가는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8절로 13절에 보면 야훼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야훼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야훼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바로 이 축복이 우리나라에 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아래 거한다 했는데 지존자는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그늘 아래 있기 위해서는 그 은밀한 곳에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은밀한 곳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밀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 날개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개로 덮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비와 같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면 우리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바로 이와 같은 은혜의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의 유래는 미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신앙으로 미국의 기반을 다지고 세웠습니다. 그는 1789년 감사절과 기도절 제정을 인준한 뒤에 이렇게 역사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의 뜻을 따르며, 그의 자비에 감사하고 겸손히 그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간구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의무다. 영원 전부터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영원까지 지켜 주시도록 예배드리자.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굳게 지켜 주실 것이다”
미국의 감사절은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이후 1863년 링컨 대통령에 의해 부활되어 미국은 번영하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미국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폐지하고 십계명을 철거했습니다. 그 후, 케네디 대통령 일가의 후손은 다 비운에 죽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청소년 범죄는 점점 심해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개인도 국가도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면 번영과 축복을 거둡니다. 그러나 잘못된 씨앗을 심으면 낭패와 실망을 거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인간 농사
둘째로, 우리는 자연의 농사 뿐 아니라 인간농사도 한가지입니다. 국가의 미래인 인간농사는 교육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나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혼탁했던 마지막 사사시대에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은 성전에서 자라게 하시며 제사장에게 배우게 했습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자라고 제사장을 섬기면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배우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3년 반 동안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대다수가 열두제자들 데리고 함께 먹고 함께 여행하시고 함께 주무시고 열두제자를 가르치는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쓰고 오셔서 하신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제자들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승천하고 난 다음에 그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이와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교회가 제자양성을 많이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교회를 통해서 자라서 밖에 나간 제자들이 모두다 큰 교회를 세우고 훌륭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한국 뿐 아니라 세계를 복음화하고 있는 것은 제자양성에 힘을 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제자양성에 힘을 써야 앞날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제나라의 정승인 관중(管仲)이 지은 「관자(管子)」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년지계 막여수곡(一年之計, 莫如樹穀), 즉, 한 해를 위한 계획으로는 곡식을 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고, 십년지계 막여수목(十年之計, 莫如樹木), 십 년을 위한 계획으로는 나무를 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며, 백년지계 막여수인(百年之計, 莫如樹人), 백 년 동안을 위한 계획으로는 사람을 길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년 계획을 할 때는 농사짓는 것 계획하고 10년은 나무를 10년 동안 심어야 베어서 제목으로 쓸 수가 있고 사람은 100년을 목표로 하고 키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교육하는 일은 한평생 기간이 필요하며 세상은 결국 사람이 움직이기 때문에 평생 동안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사람을 심는 일인 것입니다. 능력있고 좋은 사람이 들어와야 그 사회나 국가가 평안하고 잘되는 것입니다. 교육시키지 못하고 내버려 놓은 사람들을 불러다가 회사를 맡기거나 사회를 맡기면 낭패하고 실패하고 말 것인 것입니다. 국가의 미래는 인간 농사인 교육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잿더미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우리 부모들의 마음속에 교육에 열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6.25사변 난 이후 제가 자랄 때만해도 부모님이 자식들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아는 것보다도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 교육같은 것은 둘로 제켜 놓은 것입니다. 나는 폐병 걸려 피를 토하고 일어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사람 버린 사람되겠다 싶어서 열심히 고학을 했습니다. 집에서 있는 책이라는 책은 다 읽고 영어책을 빌려다가 사전 가지고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그러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저보고 하는 말이 아니 죽을 사람이 무엇 때문에 공부하고 야단이냐. 무슨 소용 있느냐. 그러나 제가 대답한 것은 죽더라도 알고 죽어야지 모르고 죽으면 안된다. 지금 제가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제게 배우고자 하는 열심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뜨거운 마음으로 배워서 오늘날 주의 사업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가르쳐야 되는데 그때 이후로 제가 장성한 오늘날에 뒤를 돌아보면 우리 한국사회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한국의 가정과 사회에 교육열을 퍼부어 주셔서 배워야 산다 가르쳐야 산다 그 열심히 집에서 내복을 팔아서라도 자식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빚을 지더라도 자식을 가르칠려고 해서 중고등학교 대학은 필연적으로 보내야 되는 줄 알고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 교육이 어떤 면으로 보면은 너무 무리한 것 같지만 우리 한국을 오늘날 잘살게 만든 기본이 된 것입니다.
신명기 6장 6절로 7절에 보면은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
교육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교육할 때 앉으나 서나 누워있으나 깨나 자나 말씀을 교육시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교육을 등한이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자라나서 바울신, 아세라신, 우상과 사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버림을 받아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이렇게 가르치라고 했지 않습니까?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릴 때 배운 것은 좀처럼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같은 사람에게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사이 3,40대 치매가 굉장하대요. 우리는 치매라는 것은 60이 넘어서 치매에 걸리는 줄 알았는데 요사이는 3,40대 젊은이가 치매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어느 가정에서는 남편이 안들어오기에 사방으로 남편을 찾다가 열흘 후에 찾아보니까 노숙자가 되어서 공원에 벤치에서 살고 있더랍니다. 왜그러냐니까 집을 잃어버렸어요. 퇴근하고 나오다가 집을 잃어버려가지고서 찾지 못해서 얻어 먹고 공원 벤치에서 자는 노숙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오늘날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은 사회환경이 그렇게 경쟁이 심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들은 어린 아이에게 열심히 잘 가르쳐서 그들의 삶이 스트레스를 심히 안받고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인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뜨거운 교육열이 미국 오바마 대통령 단골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나 안 던컨 미 교육 장관은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50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게 한 토대가 되었다며 부러워했습니다. 내가 한말과 오바마 대통령이 한 말이 맞아떨어졌어요. 저도 늘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바마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나와 동의를 해주니 고맙습니다. 미국의 교육부 장관인 던컨은 “한국은 한 세대가 조금 넘는 기간에 세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노동력을 배출하고,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한 국가가 되었다.” 이와 같이 칭찬을 했으며 미국 교육의 분발을 위해 본받아야 될 으뜸 사례가 한국이라고 극찬을 한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2009년 3월 교육정책 비전을 제시하는 연설에서 한국 교육에 대해 언급한 이후, 얼마 전에 또 다시 한국의 교육열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우리나라가 잿더미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은 교육에 대한 열정적인 부모와 사회적 분위기로 심은 씨앗이 결실해서 오늘날 우리가 세계적인 잘 사는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도 신학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올바른 신학교육이 있어야 미래 한국교회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여의도순복음처럼 예수 십자가 중심, 성령중심으로 되어야 되는데 잘못가고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신신학이나 자유주의신학 교육은 장차 교회를 묘지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로 8절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러분 성경은 저주하지 않습니다. 늘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말하는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저주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이단과 사설을 전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 그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을 꾀어서 지옥으로 끌고가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나 신신학은 무엇이냐. 자유주의 신학은 18세기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서의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해 버립니다. 사람들이 다 적은 책으로써 성경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오늘날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성경을 인본주의로 해석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 감정, 경험, 도덕적인 능력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교리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과학이나 심리학 등으로 해석하는 등 인간중심주의를 따릅니다. 기적 그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자연 현상으로 해석이 안되면 그 때 사람들이 신비주의적으로 기록한 것이지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 그때 만조와 간조 현상으로 말미암아 물이 드러난 것에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간 후에 하나님이 기적을 행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연환경으로 해석하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해야 중지하라 달아 중지하라 했을 때 해가 중지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때 사건을 신비하게 만들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미래는 신학 교육에 달려있는데, 신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은 장차 교회를 묘지로 만들 뿐인 것입니다. 신학 교육은 예수님 중심과 성령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그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하니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로운 행동으로 여러분의 수고한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설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못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 입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통으로 우리의 죄가를 대신 청산하고 피를 흘려주시므로 그 보혈 밑에 들어가면 용서와 의로움을 얻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내가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주님 앞에 가슴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주장하고 인간의 행위를 플러스해서 구원받는다고 하면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말을 한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그러므로 신학교육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과 성령의 은혜를 필수적으로 강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무오한 계시의 말씀인 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로 준 말씀이요 하나님 자체인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우리들은 설 곳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신앙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과 성령 은혜의 강조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로 5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선생의 말인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우리보다 지혜롭고 총명하고 교육을 더 많이 받고 하나님의 율법의 지식에는 따를 자가 없는 사람이지만 자기의 지혜와 지식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고 십자가 이외에는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이 잘된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가 많습니다. 자기 교육에 의지하고 말씀을 말씀대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서 해석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게 될 위험성이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3. 50년 동안 심은 믿음의 씨앗
셋째로, 저는 오늘날 제가 50년 동안 심은 믿음의 씨앗을 종종 뒤돌아보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살았고, 10대에는 폐병에 걸려 학교를 중퇴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저는 먹고 살기가 곤란하고 살아갈 길이 막막한 좌절과 절망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있을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위해서 금식할 때는 희망이 있어요. 배도 덜 고파요. 없으면 왜 그렇게 배가 고픈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먹을 것이 없어요. 배는 고프고 객지에서 앞길이 캄캄할 때가 정말 서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회를 시작할 때에도 가마니를 깔고 찢어진 천막을 걸머지고 나가자니 사회의 최하, 저소득층 사회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가마니 깔고 찢어진 천막치고 목회하는 사람이 부자촌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나보다 더 팔자 고약한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야지요. 그래서 내가 목회한 곳이 천막촌에 들어가고 가마니촌에 들어가서 그들 가운데 같이 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입고 살아야 될 수밖에 없는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하루 하루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존 경쟁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내가 처음 목회할 때 본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살기가 깊어요. 내일에 먹을 양식이 없어요. 그들을 향한 복음증거는 어떤 지적인 요구나 도덕적인 요구보다도 먼저 생존의 요구가 지대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적인 것을 말하거나 윤리나 도덕 강연을 하거나 종교의식을 말했다가는 매맞아 죽습니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없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희망을 줘야 되는 것입니다. 살 수 있는 희망을 줘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제가 십자가를 재해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율법적인 십자가가 아닌 지금 희망을 주는 십자가, 지금 나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청산하고 지금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해주시는 예수님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닙니다. 하루하루 생존 경쟁에서 살아나야 하는 절박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용서와 화해, 성결과 성령충만의 복음을 전했고 치료와 축복, 영생의 소망과 꿈을 전하자 그들은 피부에 닿는 은혜를 받게 되고 용기와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절망에 처할 때 용기와 희망을 줘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는 용기와 희망을 줄 근거가 없습니다. 말로써 위로하려니까 내가 뭐 있어야 말로 위로하지요. 내가 직장을 주겠습니다. 양식을 주겠습니다. 치료비를 대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한 오직 우리가 다갈 곳은 성경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 대신 피를 흘려서 대속해 주신 예수님께로 가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통한 마음, 섭섭한 마음, 답답한 마음을 그 예수님 십자가에 와서 가슴을 치고 울고 통곡을 하고 그곳에서 오늘 양식을 주실 것이다. 오늘 치료해 주실 것이다. 오늘 위로를 주실 것이다. 이 예수님은 죽은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 살아서 지금 당신과 같이 계신다. 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 희망의 메시지를 붙잡고서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살아 일어난 것입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복음은 많은 사람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과 꿈을 심어 주었고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전인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사이 와서 잘먹고 잘입고 잘사는 시대에 주의 종들이 저를 공격합니다. 축복신앙을 전한다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은 조용기가 만든 축복신학이라고... 내가 그 공격을 들을 때 괴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시대에 태어나서 잘 교육받고 평안하게 살다가 지금 강단에 섰으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같이 절박한 시대에 절박한 사람들 앞에 서서 종교나 철학이나 문학이나 학문이나 지식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몰라서 안 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알았지요. 그러나 바울선생같이 내가 너희들 가운데 갔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힌 것 이외에는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른 말 전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소망을 줘야 돼요. 당장! 당장 오늘 살아갈 소망이 있어야 되고 당장 내일을 살아갈 소망을 줘야 되는데 여러분 정말이지 정말이지 여러분 소망은 십자가에서 밖에는 없습니다. 정부가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상당한 기간이 걸리고 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저 하층민에게는 그 손길이 좀처럼 미치지 않습니다. 신문에 구제한다 적극적인 구제를 실천하겠다. 말은 참 좋습니다만 내가 판자촌에 살아보니까 그림의 떡입니다. 우리에게 오기 전에 중간에서 다 날라가 버리고 오지도 않아요. 이 사람들에게는 절박하게 주님 기적을 행한 도리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주님이 와서 소망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2천년전에 예수가 아니라 지금의 예수,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가 아니라 지금 한국에 있는 예수, Here now!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예수님, 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소망의 복음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저는 열심히 사람들에게 전했고 50여년의 목회생활 동안 이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은 결과에 오늘날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서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잘살아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씨앗은 효과가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 십자가에서 오중복음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마음에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오중복음의 첫째가 죄의 용서와 의로움을 선물로 받는 것인데 아무리 잘 살 때라도 죄는 용서받아야 돼요. 의로움 얻어야 되기 때문에 효과가 있습니다. 둘째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축복은 믿고 거룩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인데 허물을 사함 받고 거룩함을 얻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되는 것인데 그 효과가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가 모든 허물에서 용서를 받고 성령을 받아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치료를 받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만 병든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사람은 다른 종류의 병에 걸립니다. 제가 못살 때는 위장병 걸린 사람 별로 발견하지 못했어요. 먹을 것이 있어야 위장병이 걸리지요. 그때의 병은 대개 폐병입니다. 잘못 먹어서 폐병, 영양실조 그리고 영양실조로 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의 질병이 많은데 오늘날은 잘먹으니까 위장병이 많고 암이 많고 비만증으로 오는 여러 가지 당뇨병, 고혈압이 많고 부자병이 많아요. 그러니 가난한 사람도 병들고 부자도 병든다구요.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국민소득 3만불에서 5만불이 되는 구라파에서 복음 전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를 증거하니까 입추여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병자들이 다 답답하고 괴로우니까 병나으러 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 대답을 줍니다. 저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도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 질병을 걸머졌으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을 얻고 소망을 얻고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 저주를 짊어지셨습니다. 물질적인 저주만 짊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저주를 짊어졌습니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의 저주를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잘 사는 사람이 물질적인 저주는 없고 잘사니까 그 복음이 소용없다고 하는데 소용없기는 왜 소용없어요? 오늘날 옛날보다 더 가정적인 파괴가 심합니다. 옛날에 못사니까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나 합쳐서 일을 해야 되므로 싸움할 여가가 없어요. 무엇 조금만 것 있으면 갈라 먹어야지 혼자는 먹을 수도 없고 그러나 오늘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시간 있으니까 서로 쳐다보고 평가해야 되고 평론하게 되고 잘났니 못났니 잘해주니 못해주니 의견 다툼을 하게 되고 옛날보다 많이 싸워서 가정이 파괴되는 가정이 굉장히 많아요. 가정에 가시와 엉겅퀴가 꽉 들어차 있어요.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 불평과 대립이 많고 분열이 많아요. 염려, 근심, 불안, 초조가 더 많아요. 부자들이 더 걱정이 많은 것은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 내일이 어떻게 계속해서 부를 계속할 것이냐. 걱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없는 사람은 내일 걱정할 것이 없어요. 없는 사람은 오늘 있는 것만 먹고 살면 될 것이고 물론 내일은 뭐 먹고 살 것인지 걱정되겠지만 부자만큼 걱정은 없어요. 그러므로 어느 곳에 가나 가시와 엉겅퀴는 있는 것입니다. 그 가시와 엉겅퀴를 어디에서 해소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해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평안과 기쁨이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로 오는 것이 아니고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사랑이 속에서 나오고 기쁨이 속에서 나가고 은혜가 속에서 넘쳐나고 평안이 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바깥에 없어도 괜찮습니다.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속에서 그리스도의 축복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속에서 은혜가 있으니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속에서 생명이 넘쳐나니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깥에서 아무리 핍박해도 속에 주님이 같이 계시니 주님과 같이 나가므로 버림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져서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속에서 생명의 힘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바깥에서 오는 신앙이 아니라 속에서 넘쳐나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 속에서 넘쳐나는 신앙을 주신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지금 와서 계신 것입니다.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속에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에 있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이 우리의 죄를 청산하시고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의 병을 고치시고 우리의 저주를 해소하시고 그 속에서 영생복락 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오중복음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속한 은혜 다섯가지 축복을 우리가 조목조목 알아서 그를 깨닫고 그를 감사하고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 능력이 우리 속에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오중복음을 믿게 되면 여러분의 생활 속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전인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전인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성경말씀을 읽고 연구를 하면서도 성경말씀을 구체적으로 자기 생활 속에 적용해서 이루어지게 할지를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심을 줄을 몰라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하나님과 내가 함께 손을 잡고 일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함께 손잡고 살아가고 하나님 말씀을 성경에만 두지 말고 내 생활 속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 주님이 제게 4차원의 영성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말씀과 우리는 동행할 수 있다. 생각의 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가 있다. 내 소원을 꿈꾸므로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꿈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시고 말씀을 구체적으로 내 생애 속에 가지고 살 수 있다. 그 다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같이 역사할 수 있다. 그 다음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 생활 속에 하늘나라가 임하게 할 수가 있다.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입술로 하나님 말씀을 고백하므로 그 말씀이 내 주위에 기적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4차원의 영성을 통해서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 하나님.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나와서 나의 생활 속에 역사하는 말씀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4차원의 영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고 생각 속에 구체적인 내일에 대한 꿈을 갖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어떠한 역사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그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제켜 놓고 혼자서 여러분 위해서 일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제자들을 만나서 하신 말씀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내가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하려고 해도 너가 믿어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하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마르다의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여러분 속에 역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갖고 있는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입술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도 늘 입술로 고백하면 이것이 여러분에게 굉장히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이 자체가 희망의 복음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 중심의 복음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의 복음은 십자가 중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어떠한 희망도 어떠한 미래도 없습니다. 십자가 중심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한 것을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복음 이외에는 우리가 의지할 복음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뭘 믿습니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해서 여러분 대신 죽은 이가 있어요. 여러분 위해서 대신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여러분의 병과 여러분의 저주와 여러분의 지옥을 걸머지고 죽은 이가 있어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분을 여러분이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하고 내가 너와 영원토록 같이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지금 이 자리에 계세요. 여러분 안에 계세요. 그분을 모신 여러분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7절로 9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우리는 50년 동안 합쳐서 울어가며 씨를 뿌렸는데 그 결과로 우리 교회가 서게 되고 우리 전국에 우리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전세계 7백여 선교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해서 심은 대로 거두게 된 것입니다.
엘리자 에드먼즈 히윗(Eliza Edmunds Hewitt)은 어느 겨울날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서 척추를 다치고 꼼짝 못하게 누워있어야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누워서 원망하다가 신앙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앙을 회복한 것은 그의 병실에 매일 청소하러 오는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면서 늘 감사하고 찬송하고 웃습니다. 그 아주머니를 보고 감동했습니다. 네 팔자나 내 팔자나 거의 같은데 나는 이렇게 불평하고 너는 그렇게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느냐. 거기에서 감동을 받아서 그가 지은 시가 주안에 있는 나에게 이 시를 지어서 곡조를 붙인 것이 오늘날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는 찬송인데 우리 찬송 한번 불러 보십시다.
(1)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후렴)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4)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 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후렴)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결론>
천신만고를 겪고 난 뒤 추수를 하게 되니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제사를 받으시고 영화로움을 느끼십니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행위를 옳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최고의 기도는 감사 찬양의 기도인 것입니다. 감사 찬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마귀의 진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원의 손길이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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