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14. 23:35ㆍ교회사자료/5.근세교회사
근세교회사
들어가면서
근세교회사를 논하기 전에 근세의 기점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세속사적으로 본다면 근세는 14세기 이태리의 인문주의자인 페트라카(Petrarca)에 의해 시작된 문예부흥이 기점이 된다. 이 입장을 따른다면 종교개혁시대는 당연히 근세에 포함되는데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종교개혁의 중요성이 크기에 종교개혁사가 중세와 근세 사이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근세의 시초로 보는 견해는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시대까지 중세의 잔재는 남아 있었으며 칼빈마저도 중세적인 신율적 신정정치를 옹호하고 실천했던 것을 본다면 중세의 terminus ad quem은 훨씬 뒤로 밀려난다. J.Huizinga는 중세의 가을이라는 책 속에서 르네상스를 근세의 시작이라기 보다는 중세의 끝이라고 보기까지 한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모두 강력한 개인의식과 자본주의의 성장 그리고 중세교회의 비판으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둘 사이에는 공유하는 점이 많지 않았다. 즉, 르네상스의 본질은 현세를 즐기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었으나 종교개혁은 내세를 중시하고 육신보다는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가 부흥시키려는 것이 그리스 로마라면 종교개혁자들이 부흥시키려는 것은 바울과 어거스틴인 것이다. 무엇보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구조를 인정했다면 종교개혁은 중세제도와 교리를 철저하게 뒤엎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근세는 종교개혁이 이루어짐으로 시작되며 실질적인 면에서 본다면 근세는 종교개혁의 1세대가 사라진 16세기 중반에 시작 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에 가서야 중세를 지배하던 카톨릭 교회의 보편성이 현실적으로 기반을 상실하게 되는 아우그스부르그 화의(Augusburg Interim,1555)가 맺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폭풍이 지나간 후 사람들은 비로서 자신들의 주위를 살펴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혁의 본질들은 본의 아니게 왜곡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반대의 길을 가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흐름은 개혁의 1세대가 사라진 상황에서 본다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칼빈이 유언을 통해서 지켜주길 바랐던 것은 이제는 보수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Ⅰ.개혁의 지속:개신교의 自立
(1)아우구스부르그 화의
독일에서 개신교가 정식으로 발족된 해는 슈말칼덴동맹이 결성된 1531년으로 볼 수 있다. 이 당시의 독일의 개신교-루터파-는 대내외적으로 적이 많던 카알5세가 지닌 정치적 부담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1546년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 카알5세는 슈말칼덴동맹이라는 군사동맹을 이룬 개신교 영주들을 공격하게 되고 작센공 모리쯔의 도움으로 승리하게 된다. 그런데 모리쯔는 오히려 카알5세에 반란을 일으켜 승리하게 되고 결국 1555년 아우구스부르그 화의를 맺게 된다. 이 화의는 독일 내에서 카톨릭과 개신교의 공존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며 이때부터 교회사는 종교개혁사의 시대를 벗어나게 되고 사실상 세속사로 근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독일에서 아우구스부르그 화의가 맺어짐으로 일시적인 평화가 왔을 때,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1562-98)이 일어났다. 이 전쟁 역시 개신교-칼빈파-와 카톨릭간의 싸움이며 결국 독일처럼 둘 사이의 공존을 허용한 낭뜨칙령(1598)이 발표됨으로 마치게 된다.
(2)위그노 전쟁과 낭뜨 칙령
프랑스의 종교적 상황은 독일과는 차이가 많았다. 이 차이는 개신교 뿐만 아니라 카톨릭에서도 나타났으며 정치적으로 절대왕정의 모습아래 전개된 것이기도 하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카톨릭과 위그노-프랑스의 칼빈파-는 까뜨린 드 메디치의 섭정하의 시기에 충돌하게 되는데 그녀가 쌍제르멩 칙령을 통해 관용정책을 펴자 이에 반발한 카톨릭측의 선제공격으로 위그노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이 시작된 지 10년 후 성바돌로매 대학살이 벌어지고 이때부터 위그노들은 보다 강경한 대응을 하게 된다. 30년이 넘게 걸린 이 전쟁을 마감한 사람은 한 때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앙리4세로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즉위한 후 1598년 낭뜨칙령을 반포함으로 개신교에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게 한다.
아우구스부르그 화의나 낭뜨칙령은 모두 共存의 원칙을 근본으로 하면서 근세사회의 기본적 틀을 제공하게 된다. 다만 독일에서는 영주의 권한이 강화됨으로 인해 독일의 통일이 19세기에나 이루어진 반면 프랑스에서는 왕권이 강화됨으로 프랑스가 중앙집권적 민족국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3)네델란드의 칼빈주의
독일과 프랑스가 국내적인 분쟁을 통해 개신교와 카톨릭의 공존을 모색했다면 네델란드는 외세와의 투쟁이 곧 개신교 자립의 역사였다. 네델란드는 일찍부터 상업을 발달시켜 북해무역을 주도했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에 있었기 때문에 강대국의 침략을 많이 받는 나라였다.
종교개혁 당시 네델란드를 지배하던 자는 신성로마제국의 카알5세였는데 그는 왕이 된 후 개신교도를 핍박했으나 그의 생존시에는 그리 큰 문제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필립2세 때 네델란드는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네델란드의 스페인화(Hispanisation)였다.
1568년부터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필립2세가 죽은 후, 1609년 휴전조약이 맺어져 네델란드는 독립하게 된다. 이제 네델란드는 유럽에서 얼마 안되는 개신교 국가가 되었고 칼빈주의가 꽃피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였는데 바로 종교의 관용과 그 한계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618년 도르트레히트회의 전까지는 관용론이 앞서갔으나 이 회의 이후 원칙론자가 득세했고 결국 아르미니우스파에 대한 징계가 이루어짐으로 종교적 관용의 정신은 위축되게 된다.
(4)청교도혁명
대륙에서 피를 통한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이와는 다른 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헨리8세가 만든 영국국교회가 영국사회의 합법적 종교 형태인 가운데 카톨릭이나 칼빈주의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선택한 종교에 따라 그때마다 수 많은 피를 흘린 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가서야 영국의 종교상황은 어느 정도의 안정을 가지게 되는데 1563년 39개의 조령(Thirty-Nine Articles)이 발표되고 이것이 1571년 의회에서 통과됨으로 안정이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러나 여왕의 이러한 개혁안에 반발한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청교도로 이들은 보다 강력한 종교개혁을 이루어 카톨릭적인 요소를 제거하기를 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은 제임스1세는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이곳은 장로교회가 국민교회였기에 청교도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1세는 기대와는 달리 국교회를 중시하는 정책을 내걸게 되고 결국 그의 재임기간 내내 팽팽한 긴장이 감돌게 된 것이다.
1625년 찰스1세가 즉위했으나 그 역시 의회와 대립하게 되고 의회가 권리청원을 제출하자 의회를 다시 해산시킨다. 찰스1세가 스코틀랜드까지 감독교회로 만들려하자 스코틀랜드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저지할 군대의 운영을 위해 그는 의회를 소집(1640)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의회는 3주만에 해산되고 따라서 이를 단기의회라고 부른다. 다시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한 찰스1세는 배상금 문제로 의회를 소집하게 되는 데 이 의회는 약 8년간 계속되었기에 장기의회라고 한다. 이때 청교도는 청교도혁명을 일으켜 청교도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찰스1세를 사형시킨 영국의 상황은 혼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게 된 데에는 당시 군대의 수장이던 올리버 크롬웰이 권력을 잡은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강화된 청교도혁명은 영국을 공화국으로 만들기까지 나아가나 그의 사후 다시금 왕정이 들어서고(1660), 비국교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영국에서의 종교상황을 우울하게 만들게 된다.
(5)30년전쟁
아우구스부르그화의가 최종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제공하는 자유가 제한된 자유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1576년 왕위에 오른 루돌프2세의 친카톨릭적 성향은 개신교도들을 긴장시켰고 결국 1608년 복음주의 연맹을 결성하게 한다. 일년 후 카톨릭동맹이 결성되면서 전쟁의 암운은 짙게 드리우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주의자인 팔레티네이트(Palatinate)의 選帝侯 프리드리히4세와 카톨릭연맹의 막시밀리안1세가 지휘하는 진영간의 30년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차와 2차전쟁 중 개신교측은 큰 고통을 겪게 되고 카톨릭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일 때 구원의 손길이 스웨덴에서 오게 된다. 바로 구스타프 아돌프가 개입한 것으로 그는 독일과 보헤미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태를 우려하고 개신교도를 구원하기 위해 전쟁에 가담한다. 그의 가담으로 전세는 뒤바뀌고 그가 전쟁중에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가 승리하게 된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화약이 조인되고 독일 내에서 영주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의의는 전혀 다름 방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전쟁으로 종교개혁시대의 종교적 열기는 식게되고 전쟁과 종교는 단지 권력의 획득을 위한 수단이 되며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현대세속국가의 발전을 야기시켰고 신학적인 면에서도 합리주의의 발흥을 유도하게 된다.
(6)미국에서의 개신교
미국의 뉴잉글랜드로 이민간 최초의 사람들은 청교도였다. 이들은 이곳에 종교적인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 갔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가 연관되면서 철저하게 청교도적인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은 희석되어 갔다. 이 가운데서도 식민지의 종교적 획일주의 내지 불관용주의와 인종차별에 대해 비판한 사람도 나오게 되나 이들은 식민지에서는 소수였다.
그러나 북부의 9개,남부의 4개 식민지로 구성된 13개의 식민지는 대체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는데 이것은 종교적인 박애정신의 산물이기 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에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대륙과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민 오는 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미국의 종교는 다양해지고 이것이 미국이라는 사회를 특징지우는 것으로 작용하게 된다. 미국은 종교의 영역에서도 개척과 실험이 이루어진 것이다.
많은 댓가를 치루기는 했으나 이제 개신교는 각처에서 자리를 잡게 되고 오히려 역사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개신교의 정신은 중세의 그늘을 벗어나 근세사회로 나아가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자본주의의 시작을 야기했다. 그러나 이처럼 개신교가 승리의 함성을 내뱉기도 전에, 알게 모르게 개신교 내에서 굳어져 버린 정통주의는 내부에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Ⅱ.정통주의:경건과 이성의 도전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시대를 흔히 절대왕정시대라고 한다. 이는 사회학적 측면에서 본 정의이지만 신학적인 면에서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16세기의 흥분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종교와 정치를 혼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고는 종교보다는 정치가 우선되며 교리적 일치보다는 민족적 일치가 점차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강화된다.
근세교회사의 3대 축을 들라면 정통주의,경건주의 그리고 합리주의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각자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서 발생했으며 나름대로의 대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이제 주도권은 점차 합리주의가 쥐게 되며 이것이 근세사회의 발전을 주도하게 된다.
종교개혁이 한 세대를 지나면서 그리고 종교전쟁의 피비린내를 맡으면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교리에 대해 懷疑하게 되고 결국 이에 대한 반발로 두가지 형태를 보이게 된다. 정통주의와는 다른 주장을 펴는 자들은 주위 환경과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게 되었고 이들은 경건주의자나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한편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지리적 발견으로부터 야기된 이성의 확대를 받아들인 자들은 이른 바 자연종교를 따르게 되고 합리주의를 꽃피우게 된다. 종교개혁은 100년도 지나기 전에 큰 소용돌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1)신비주의와 경건주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교리에 대한 논쟁은 지식인이나 일반 백성 모두를 신비주의로 이끌게 된다. 신비주의는 기본적으로 냉정한 교리주의에 대한 반발이면서 형식적인 교회의 의식에 대한 반동이다. 따라서 이들은 개인주의적이고 내면적인 예배형식을 추종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회의적인 세계관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요소를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이와는 다른 유형을 보여준다. 개혁파 정통이 스위스 일치신조를 내던 1675년 필립 야콥 스페너는 Pia desideria라는 경건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책을 내게 된다. 그는 이 책에서 루터파 정통의 악덕을 고발하면서 경건훈련과 성경공부의 시행을 주장하게 된다. 그의 신학은 루터파의 약점인 성화부분에 대해 공격함으로 사실상 칼빈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스페너를 이어 프란케가 독일 경건주의를 완성하고 있다. 프란케는 조직가였으며 교육자였고 경건주의로 시작된 세계선교 사역에 뛰어든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또한 경건주의는 미국에서의 대각성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경건주의는 이제 탁월한 활동가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가 바로 진젠도르프이다. 그는 모라비안파에 가담한 후 헤른후트 공동체를 창설하게 되는데 이 공동체는 전 세계를 향한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며 이러한 노력은 19세기의 선교 열정을 자극하게 된다. 그러나 모라비안 일파의 중요성은 이들이 존 웨슬레에게 미친 영향, 그리고 그를 통해 전체 감리교에 미친 영향 나아가서는 미국의 대각성운동에 미친 영향 가운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감리교운동
18세기 영국은 국교회 내에서의 소집단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웨슬레 형제가 1729년 신성클럽을 결성하여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가지게 된다. 존 웨슬레는 얼마 후 미국으로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모라비안인 슈팡겐베르그를 만남으로 모라비안파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미국에서 돌아 온 후 그는 모라비안파의 일을 돕다가 1738년의 올더스게이트 회심을 체험하고 헤른후트 공동체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는 영국의 사도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큰 반향을 영국사회에 끼쳤으나 기본적으로 감리교를 영국국교회 안에 위치시키기를 원했다. 그래서 감리교를 협회의 형식으로 조직화 하면서도 국교회안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2년만에 결국 감리교회는 분리되게 된다.
웨슬레의 부흥운동은 영적으로 피폐해 가던 영국사회를 회생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교육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선교열을 향상시켰다. 또한 사회개량사업에도 힘을 썼다. 무엇보다도 그는 청교도 정신을 다시 소생시켰으며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선 영국 사회에 정신적 힘을 제공하였다.
(3)미국의 대각성운동
미국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교파주의(denominationalism)이다. 교파주의는 미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반면 연합사업을 힘들게 했고 따라서 미국이라는 깃발 아래 모이는 국민적 통합은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종교적 다원주의는 종교적인 무관심과 타락을 불러오게 되었고 청교도적인 모습은 훼손되고 있었다. 바로 이 때 대각성운동이라는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인물에 의해 확고하게 진행되었다.
1734년 대각성운동이 일어날 때 지도자는 에드워드와 프렐링호이젠 그리고 조지 휫필드였다. 이들은 서로 연합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결국 미국의 회중교회와 장로교회가 연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회에 반대가 없진 않았으며 부흥회가 진정한 경건을 훼손하며 학문 대신 감정만을 부채질한다는 비난이 있었다. 결국 부흥회를 찬성하는 신파와 반대하는 구파가 분열하는 지경에 이르고 결과적으로 침례교가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대각성운동의 가장 큰 기여는 미국인들에게 일체감을 제공한데 있을 것이다. 이제 교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심한 기독교인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결국 이러한 통합은 독립전쟁(1775-83)을 수행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4)합리적 사고
절대왕정시대의 사상은 합리주의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제 진리는 이성의 검증을 통해야 하며 계시마저도 그러하다. 정통주의는 철저하게 공격을 받게 되는데 첫 공격은 개신교의 천국인 네델란드에서 시작된다.
네델란드는 일찍부터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었다. 따라서 많은 지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있었다. 데카르트는 전적 회의를 통해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보았고 정신과 물체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이들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사고는 근세인에게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제공하였으며 스피노자에 의해 일원론적으로 자연을 해석하는 길을 열어놓게 된다.
대륙의 합리론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귀납적 방법을 중시하는 경험론이 득세하게 된다. 존 록크는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부터 나오며 이러한 경험은 외부적 경험과 내면적 경험을 모두 포함한다고 했다. 그는 1695년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를 발표하여 기독교가 최고로 합리적이며 기독교란 결국 인간들이 자연적 능력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던 진리와 법칙들의 보다 명료한 표현이라고 했다.
이러한 록크의 견해는 결과적으로 진정한 종교는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自然神論의 지지를 받게 된다. 자연신론은 셔베리의 허버트가 선구자로 그는 만인에게 공통되는 종교의 다섯가지 교리를 주장하면서 자연신론의 3요소-하나님,덕,영혼불멸-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성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결국 흄에 의해 비판받으며 진정한 지식의 범주가 생각보다는 매우 좁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5)슐라이에르마허
합리주의가 정통주의를 공격했다면 합리주의는 자유주의의 공격을 받게 된다. 19세기 신학을 주도한 자유주의를 시작한 사람이 슐라이에르마허이다. 그는 칸트에 의해 인식된 관념론의 구조 안에서 기독교의 가치들을 재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의 영역이 너무나 광대하여 그 이후의 신학이 모두 그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우며 칸트에게 주어진 철학 영역의 찬사가 신학에서는 슐라이에르마허에게 돌려져야 할 것이다.
그는 종교에 대해 이성적인 접근을 하기를 포기하면서 오직 직관에 의한 그리고 그의 표현처럼 절대의존의 감정으로 접근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합리주의나 정통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결국 그에게 종교의 궁극적 목표인 구속은 이러한 감정의 회복이며 이 회복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가 경건주의의 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러한 반합리주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시대의 아들이기에 계몽주의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며 실상 주관성이 신앙의 규범이 됨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호도할 우려를 남기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주관성을 벗어나서 객관적 인식을 세우려고 노력한 것이 필요없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Ⅲ.혁명의 불길
절대왕정은 근세적 발전의 소산이기는 하나 아직도 봉건잔재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이러한 잔재를 없애고 근세적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는데 이러한 움직임속에서 기독교도 변화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시민혁명과 근세사회의 건설은 종교개혁에 의해 시작된 정신을 완성하게 되며 자본주의를 꽃피우게 된다. 다만 이러한 정신적 토양을 제시한 기독교가 점차 역사속에서 그 영역이 축소되는 아이러니가 나타난 것도 이 시대이다.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제3세계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심겨지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1)미국독립
미국의 독립전쟁은 일종의 민주혁명이라고 불린다. 특별히 자유를 위한 혁명이었으며 이러한 사상은 독립선언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자유에 종교의 자유는 포함되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식민지들은 상당한 독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정부는 식민지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773년 보스턴 차사건이 일어나고 이듬해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려 본국과의 통상단절을 선언한 후 마침내 1775년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민병대가 격돌함으로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이듬해 독립을 선포한 식민지 대표들은 계속 승리하게 되고 마침내 1783년 파리조약으로 독립을 승인받게 된다.
미국의 독립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라는 사상이 생기게 되었고 자연적 종교 또는 본질적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강화되는 계기도 되었다. 이제 인간의 자유와 지적능력을 보다 강조하게 되었고 교파를 초월한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신학을 자유주의로 인도하게 된다.
(2)프랑스 혁명
프랑스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bourgeois revolution)으로 그 근본원인은 앙시앙 레짐(Ancien R gime), 즉 혁명전의 프랑스 사회인 구체제의 모순에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절정기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많은 체제 유지비가 필요한 때였다. 게다가 종교적으로 극도의 불평등이 상존하였으며 결국 곧 터질 용광로 같은 상황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무엇보다도 왕실의 재정위기를 넘겨보려는 개혁 정책을 귀족들이 반대한 데 있다. 결국 루이16세는 180여년 동안 한번도 열지 않았던 삼부회를 1789년 소집하게 된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발로 제3신분-평민계급-은 삼부회에 출석하지 못하게 되며 이에 반발한 제3신분의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결성하게 된다. 루이16세는 이를 얼마 후 인정하고 국민의회가 삼부회를 대신하게 된다. 그런데 1789년 7월 초 왕이 파리에 군대를 집결시킨 것을 시민들이 알고 14일 바스띠유 감옥을 공격함으로 프랑스혁명이 시작된다.
루이16세를 처형한 혁명정부는 카톨릭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핀 반면 개신교에 대해서는 관용정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프랑스의 혁명의 여파가 자신들의 나라에도 미칠 것을 염려한 주위의 절대왕정과 교황청을 자극하게 되고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수차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의 공화정은 무너지고 나폴레옹이 다시금 왕정을 복구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카톨릭의 협조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또한 대외적으로도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카톨릭 교회와 제휴해야 함을 알고 프랑스 협정을 1801년 맺게 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2년 무모한 러시아 정벌에 나서 큰 피해를 보게 되며 결국 1814년 제위를 물러나 엘바섬에 유배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계승자도 결산자도 아니다. 다만 그는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 성과를 분배하며 프랑스 국민에게 위대한 프랑스의 모습을 심어준 자였다. 게다가 프랑스혁명의 사상을 전 유럽에 퍼뜨림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를 일깨웠다. 그럼으로 전제정치와 구체제의 몰락을 앞당긴 것이다.
(3)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를 산 가장 흥미있는 인물이다. 그는 헤겔철학이 득세하던 시기에 그것을 따르지 않고 진리는 항상 소수안에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던 자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기반은 합리성도 아니고 절대의존감정도 아니다. 기독교는 결국 신앙의 문제이며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그는 신앙이 결코 안이하거나 조용한 삶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언제나 위험을 안고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에게 가장 위험한 신앙의 적은 이러한 신앙의 실존을 가로막는 기존의 기독교권인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고 했으며 기독교인의 흉내를 내는 그리고 그것을 유도하는 성직자들을 공박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이러한 물음은 결국 종교개혁의 불꽃이 다 사라지고 재만 남아버린 교회를 향해 던진 비수인 것이다. 개혁자들이 거부하던 의식과 형식적인 신앙의 양태가 다시금 나타나고 신학적으로도 조직화가 기세를 떨칠 때 키에르케고르는 체계의 환상을 버리고 인간의 본질을 찾으며 신앙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외치는 것이다.
(4)제3세계의 기독교
정치적인 또는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19세기는 식민지의 급격한 확장이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는 새로 독립한 미국이 식민지 쟁탈의 대열에 가담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달과 생산의 증가가 거대한 자본과 보다 넓은 시장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는 탐욕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오히려 교회는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의 선교열에 휩싸이게 된다. 19세기 선교활동의 특징은 선교협회의 설립으로 특히 평신도에 의한 선교협회가 많이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선교협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식민지주의의 앞잡이라고 불린다는데 있다. 물론 이들이야말로 식민지주의를 반대한 자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식민지 확장과 선교영역의 확장이 중복된 것은 사실이며 이들 양자가 서로 돕기도 했던 것도 사실인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당시의 선교는 인도 대륙에 우선적으로 실시된다. 18세기 초에 첫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간 인도는 윌리암 케리라는 현대 선교의 창시자가 사역한 곳으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실을 맺지는 못한 곳이다. 중국 역시 많은 투자가 있었으나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의 난 등을 통해 기독교가 부정적으로 중국인들에게 刻印 된다. 결국 의화단의 난(1899-1901)이 일어나 수천명의 선교사와 개종자가 살해되고 만다. 우리나라의 경우 1884년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상륙하게 되고 이 후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개신교는 계속 성장하여 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성장을 이루게 된다.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는 점진적이었으나 대부분의 지역이 1914년 경에는 교회가 모두 세워진 상태였다. 아프리카 북부의 모슬렘 지역에 대한 선교는 오히려 카톨릭쪽에서 결실을 거두어 유니에이트(합동동방카톨릭교도)를 흡수하게 된다. 그러나 모슬렘에 대한 선교는 아직까지도 쉽지 않은 상태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대부분의 나라에서 독립과 함께 개신교회가 세워진다. 왜냐하면 새로운 정부는 이민을 적극 장려하게 되는데 이는 필요한 인력의 충당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신교도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신앙도 받아들이게 되며 원주민들 사이에 개신교 신앙이 자연스럽게 전파되게 된다.
마치면서
역사 연구에 있어서 모든 사건이 동일한 중요성을 지닐 수는 없다. 그런데 역사의 과정 중에서 분명 큰 역할을 하는 사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歷史家의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공통점은 분명 있다. 교회사에 있어서도 한 시대를 규정짓는 중대한 사건이 있으며 근세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한 순간의 轉移點을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먼저 개신교가 새로운 思考가 아니라 旣成의 모습이 될 때 까지를 한 개의 전이점으로 잡아보았다. 이 전이점을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로 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제 개신교가 공인되어졌다는데 있다.
다음으로는 이것을 도전하여 극복하려는 노력들을 또 하나의 전이점으로 보았다. 이런 도전들은 작은 종교개혁이었으며 기독교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계속 사라지지 않고 잔존하여 있던 중세의 잔재를 폭발적으로 제거시킨 혁명의 모습을 최종적인 전이점으로 삼아보았다. 아마 현대로 접어드는 새로운 전이점은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지 모르나 제3세계의 선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약 350여년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다루지 못하거나 빈약한 부분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역사는 주관성이 지배하는 객관화의 무대이기에 나름대로 타당한 대답을 했다고 여겨진다. 1차로 정리된 이 근세교회사가 점점 풍성해지고 무엇보다도 생산적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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