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근대 기독교

2011. 9. 7. 22:51교회사자료/5.근세교회사

근대 기독교

1. 근대 과학과 철학의 시작

종교개혁이 중세기로 평가되어야 할지 근대사로 편입되어야 할 지는 큰 논쟁거리이다. 이 변화의 경계선을 정확히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변화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 가장 강력한 도구들은 새로 태동한 근대과학과 철학이었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태양 중심적 우주체계가 정교하게 발전되었고, 그것이 실제 승리를 거둔 것은 갈릴레오에 의해서이다. 뉴턴의 1687년의 [원리]가 가져온 영향은 심대했다. 사상가들에 있어서 물리적인 우주는 더 이상 자의적인 신적 행위의 장이 아니라, 설명이 가능한 하나의 법칙의 영역으로 나타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과학적 발견들을 기독교를 평가절하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철학도 이에 못지 않게 이성의 이름으로 기존 권위에 열정적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1637년 [방법서설], 1641년 [제일원리], 1644년 [원리]를 저술했다. 증명될 때까지는 모든 개념들을 의심해 봐야 한다는 주장과 재대로 증명되려면 수학적 증명의 확실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앞으로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합리주의를 강화시키는데 공헌하였고, 라이프니츠, 존 로크 등에 의해 종교의 합리성이 주장되게 되었다. 샤프츠베리 백작은 옳고 그름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지가 아닌 인간 본성 자체의 근본 성격에서 찾았다.

과학과 철학의 이러한 발전은 18세기를 특징지었던 계몽운동의 기초를 마련했다. 계몽운동은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의 다양한 측면들에 이성의 법칙을 적용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그것의 근본적인 원칙들-자율, 이성, 예정된 조화-은 근대 세계의 사고와 행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안에서 기독교가 움직이는 분위기를 지배하였다.

2. 기독교의 아메리카 이민

서구의 식민지 개척에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참여했듯이, 다양한 유형의 유럽의 기독교가 아메리카에서 재생되었다. 그러나 독특한 형태의 기독교가 태동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북미에서는 많은 개신교 교파들이 유럽의 모교회들로부터 독립하면서, 기독교 전통의 “미국화”와 “캐나다화”가 드러났다. 스페인의 중남미 정복의 의미 있는 모습은 로마 카톨릭의 국교 화였다. 프란체스코회, 도미니쿠스회 및 예수회들은 중남미의 개종 사역에 있어서 특히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들 수도원 출신 선교사들은 그들이 철저히 헌신해온, 스페인식 로마 카톨릭 기독교를 충실하게 재생산했다. 신세계에 있었던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에서는 하나의 지배적인 종교 전통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영국령 식민지들에서는 많은 교단들이 유입되었다. 영국 독점 식민지 메릴랜드에는 종교의 관용을 제도화함으로써 영국국교도가 법적으로 제도화되었지만 국교도는 주민 대부분으로부터 호감을 받지 못했고, 퀘이커, 장로교 및 침례교가 지속적으로 퍼졌다.

1620년 시작된 영국 필그림과 청교도들, 회중교회가 식민지에 정착했다. 특히, 매사추세츠만의 지도자들은 거룩한 공화국(holy commonwealth)을 지상에 건설하고자 하는 노력이 진지하게 착수되었다. 그리고 1636년 하버드 대학을 설립하였다. 인디언의 개종을 위한 노력도 무시되지 않았다. 뉴 잉글랜드의 회중교회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승인을 환영했고, 그것을 실제 받아들였으며, 언약 혹은 계약 신학을 강조했던 것이다. 17세기 말 하버드에 자유주의의 흐름이 나타나는 등 청교도 본래의 신앙이 흔들리자 1701년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예일 대학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감독교회는 1707년 스트랫포드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1722년 화려하게 전진했다. 영국국교회으 성장은 외지복음전파회(S.P.G)의 활동에 의해 큰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감독교회가 아주 약한 식민지에 대부분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로드 아일랜드는 종교의 표현의 자유를 찾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639년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설립되었다. 1628년 최초의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맨해튼 섬의 뉴암스테르담에 세워졌는데, 미국 최초의 장로교 교회 정치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퀘이커 교도는 1656년 선교사로 미국에 처음 발을 디디어,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관용을 얻었고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감독교회(성공회)의 사역은 18세기 초 이전 중부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캐나다의 삶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으로 인해 그 이후로 다양한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3. 이신론과 그 반대자들과 회의주의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계몽주의 정신의 확산의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종교에 있어서의 합리주의의 발전이었다. 종교적 합리주의를 발전시킨 강력한 힘은 종교전쟁의 광기와 잔인함에 대한 도덕적 반발이었다.

이신론의 선구자는 에드워드 허버트였다. 이후의 이신론자들은 모든 역사적 기독교와 계시의 권위를 파괴하는 듯했다. 그들의 사고에 의하면 종교를 미신적인 것에 대한 속박에서 구출하고, 원시적 자연의 소박함과 순수성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이신론은 종교의 역사적 발전의 실재적 사실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장점은 일반적으로 고도의 윤리적 각성과 인도주의적 관심에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조지 버클리는 세계를 거대한 메커니즘 즉 큰 시계로 보는 견해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이신론은 전지 하신 조물주가 단번에 만들어 놓으시고 이제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이것 대신에 신의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영적 활동을 내세웠다. 조셉 버틀러는 [종교의 유추]를 통해 이신론을 반박했다.

이신론과 반이신론을 동시에 공격한 이는 데이비드 흄이었다.역사적 비평이 그에게서 동터 올랐다. 흄이 일으킨 가장 큰 충격은 당시 게시와 기독교를 방어하는 주요 수단이었던 기적을 비판한 것이었다. 증거에 의해 특별한 사건들의 발생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그 사건들이 신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일어났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그 사건들이 무엇을 확정한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고 한다. 기적을 기독교의 최고의 증거로 보지 않게 되었다. 그로부터 회의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은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의 역사]의 제15,16장에서 기독교 초기 역사에 대해 회의적으로 비판함으로 주목을 끌었다. 기본의 피상적인 설명은 직접 초자연적 원인을 찾지 않고, 다른 데서 기독교 확장의 원인을 찾아 주었기 때문에, 흥미를 유발시켰다. 이로 인해 성서와 기독교의 근원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자극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일이었지만 말이다. 윌리엄 팔리의 작품 속에는 영국에서 정통적 기독교 진술마저 합리화되는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신론은 기독교 변증을 자극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직접적인 영향으로 회의주의 사고를 촉발시킴으로써 아주 심원한 영향을 행사했다. 과격한 반기독교 이신론도 있었다. 피터 안네트와 토마스 페인이 그러한데, 페인의 [상식]은 미국혁명에 크게 기여하였고, [인간의 권리] 역시 이에 못지 않게 프랑스 혁명의 기조 원칙들을 성공적으로 옹호하였다. 그의 [이성의 시대]는 가장 공격적인 반기독교 이신론의 대명사격이었다.

프랑스 이신론의 대가는 볼테르였다. 그는 신의 존재와 단순한 도덕성에 그 본질이 있는 원시적 자연 종교의 존재를 믿었고, 성서나 교회의 권위에 근거한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의 작품이 프랑스인 들의 마음을 프랑스 혁명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 막대하고 중요한 영향을 미첫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영국과 미국의 유니테리언주의

18세기 초 정통적 그룹과 이신론 그룹은 모두 합리화 경향과 종교의 본질을 도덕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로 인해 반삼위일체론 입장이 매우 강화되었다. 사무엘 클라크로 시작된 아리우스의 물결은 영국에서 독자적으로 조직된 유니테리언주의의 발전에 길을 닦아 놓았다. 국교회 성직자 테오필루스 린제이의 유니테리언주의 입장으로 1773년 린제이는 국교회에서 추방되었고 다음 해 런던에 유니테리언 교회를 조직했다. 영국의 유니테리언주의는 형식적이고 지성적이며 “인간이 만든 신조”들을 명백히 거부하였고, 인격에 의한 구원을 강조했다. 그것은 종종 지적으로는 우수했으나, 일반 대중의 신앙 생활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영국 유니테리언주의는 뉴 잉글랜드에서 비슷한 운동을 태동시켰다.

5. 독일의 경건주의

스콜라적 루터교의 발전은 루터가 가르친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생동적 관계를 경직시켰다. 평신도의 역할은 수동적이었다. 이른바 “죽은 정통”이었다. 경건주의는 이러한 스콜라적 경향에서 벗어났는데, 기독교적 체험과 감정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평신도에게 기독교적 삶의 형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고, 세상에 대한 엄격한 금욕 자세를 강조했다. 중심 인물은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이다. 그는 요한 아른트의 저작 [진정한 기독교]에 자극을 받았다. 소규모의 경건의 모임에서 경건주의(Pietism)라는 말이 나왔다. 1675년 [경건한 열망]의 저서로 교인에게 경건 생활을 고취시키고, 교회 안의 교회의 회중의 모임을 제안했다. 기독교는 지적 지식이기보다는 오히려 삶이다.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정상적이라면 그런 생활은 영적 변화 즉 의식적인 중생에서 시작한다. 그는 청교도와 같은 금욕,절제를 주장했다. 그는 강조 점을 신조에서 성서로 옮겼다. 성서와 대중사이의 벽을 허물어 주었고, 성서가 가르치는 궁극적 논리의 형태였던 신앙고백의 기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성서 연구의 결과 성서의 본질 및 역사에 대한 연구의 길을 열었다. 또한 슈페너는 청년층의 종교 교육을 전면 개선하였다. 이렇게 해서 보다 활기차고 진지하며 성서적으로 윤택한 기독교인의 생활을 대중에게 소개하려는 그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는 할레 대학을 경건주의의 중심지로 만들고 유지시켰다. 또한 1710년 친구의 도움을 얻어 성경 출판 및 염가 보급을 위해 성서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할레에서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선교열의 고조였다. 개신교가 아직 선교를 의무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프랑케와 그의 동료는 선교 활동에 눈을 돌렸다.

경건주의는 라인 상부 지역의 독일 개혁 교회에도 전달되었다. 경건주의의 누룩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지의 루터파 교회에 스며들어 그곳의 신앙적 열정을 자극했다. 그러나 프랑케의 별세를 정점으로 경건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요한 알브레흐트 벵겔로 인해 계속 확산되었지만 말이다. 이것은 더욱 생동감 있는 형태의 경건을 조성시켰다. 그리고 교직자의 영적 자질, 설교, 그리고 젊은이를 위한 기독교 훈련을 크게 개선했다. 그것은 교회 생활에서 평신도의 역할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성서를 대중화시켜서, 성서의 헌신적인 연구를 고조시켰다.

한편 경건주의에서 부정적인 사항들도 있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오직 투쟁을 통해 의식적으로 회개하는 것만을 고집한 것, 세상에 대해서 과도하게 금욕적인 태도를 취한 것, 경건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비신앙적이라는 식으로 편협하게 판단한 것, 신앙의 지적 요소를 무시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경건주의는 독일 개신교 신앙 생활에 아주 가치 있는 기여를 하였다. 고트프리드 아르놀트는 그의 1699년과 1700년 작품인 [비당파적 교회와 이단의 역사]에서, 그의 시대가 그를 이단으로 간주했다고 해서 오늘날도 그를 당연히 이단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이단이라 불리는 견해일지라도 기독교 사상사에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가진다.

6.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아주의

모라비아 형제단(Moravian Brethren)은 진젠도르프 백작이 주도했다. 1727년 8월 13일은 모라비아 교회라고 부르는 형제단이 다시 태어난 날로 기념되고 있다. 그는 헤른후트 공동체를 새로운 형태의 개신교 수도원주의로 조직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면 어디든 기꺼이 가려하는 모라비아 인의 자발성은 선교운동에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하여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개신교 어느 교파도 이들 만큼 선교의무를 절실히 느끼지 못했고 그 어느 단체도 수에 비하여 그렇게 크게 선교사역에 헌신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인디안 에게 선교하기 시작했고 순회단체도 설립했다. 헤른후트는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선교는 수리남, 가이아나, 이집트,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도 시작되었다. 그의 사후 실제상의 지도력이 슈팡겐베르크에게 돌아갔다. 슈팡겐베르크의 뛰어난 조직력과 강력하고도 지혜로운 지도로 모라비아파를 강화하고 개선했다. 모라비아 교회는 기독교계에서 공인된 위치를 차지했으며 선교열과 모라비아인 디아스포라 사역을 통해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7.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 웨슬리와 감리교

17세기의 투쟁상황이 끝났을 때 영국 국교회와 비국교도는 모두 전체적으로 영적 무기력상태에 빠져있었다. 합리주의는 모든 불의의 종교사상에 침투하였다. 그래서 정통신앙 조차도 기독교는 신의 재가를 받아 지탱하는 도덕체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드디어 심원한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 변화는 일차적으로 “복음주의적 부흥”의 결과였으며, 이 복된 흐름이 넘쳐흘러 모든 영어 사용권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의 감리교, 휘트필드의 칼빈주의적 감리교, 영국 국교회 복음주의 교회로 인해 비로소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 거대한 물줄기로 등장했다. 1729년 옥스퍼드에서 웨슬리 형제와 커크햄, 모건 등의 학생의 모임은 “신성 클럽”이라고 불렸는데 마침내 어떤 학생들이 “메소디스트”라는 정곡을 찌르는 별명을 생각해 냈다.

1735년 초기 조지 휘트필드의 가입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는 교파의식을 갖지 않았고 길이 열리는 대로 어느 곳 어느 강단에서나 기꺼이 설교했다. 교역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웨슬리 형제는 1735년 8월 미국으로 항해하는 중 26명의 모라비아 교도 일행을 보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사바나에 도착 직후 존 웨슬리는 슈팡겐베르크를 만났는 데 그는 곤란한 질문을 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웨슬리가 대답했다. “그분이 구세주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슈팡겐베르크는 대꾸했다. “그렇습니다만 당신은 그분이 당신을 이미 구원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1738년 존 웨슬리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개최된 국교회의 한 모임에 참석해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게 되어 큰 변화를 체험했다. 웨슬리 형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설교했다. 존 웨슬리는 조직가의 재능을 탁월하게 발휘했다. 1739년 그는 브리스톨에 최초의 진짜 감리교회를 창립했다.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와 분리할 생각이나 의도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따로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다. 1742년 “속회(Classes)”제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야말로 감리교의 고유한 특징이 되었다.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두개의 논의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다. 완전과 예정이 그것이다. 1770년 연회에서 웨슬리는 강력히 아르미니우스주의 입장을 고수했다. 웨슬리 감리교 운동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동생 찰스는 찬송가 작가로서 감리교 뿐만 아니라 영어권 기독교 계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웨슬리는 감리교가 국교회 범위안에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상황은 분리의 압력을 불가항력적으로 만들었다. 1791년 동료들의 국교회 이탈을 반대한 웨슬리가 작고한 후에야 감리교는 국교로부터 분리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국교회파 장로교회는 서약파와 반서약파로 인해 동요를 겪었다. 합리주의가 스코틀랜드를 관통하자 중도주의가 자라났다. 일반적으로 중도파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강한 체험이나 교의라기보다 오히려 주로 윤리였다. 18세기 말 수십년 동안 스코틀랜드 국가 교회를 주도한 것은 바로 이 중도파였다.

8. 대각성 운동

18세기 미국의 종교 생활에서 가장 광범위한 변혁 운동은 대각성 운동이었다. 대각성 운동은 교회에 들어오는 규범적 방법으로 중생의 변화인 “회심”을 강조했다. 엄격한 도덕과 열정적인 경건이 이 운동의 전반적 특징이었다. 대각성운동은 개신교 사회에 새로운 신앙 이해와 행동원리를 제공함으로써, 개신교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데, 기여했으며, 합리적 종교의 도전에 맞서 새롭게 신앙을 변증했다. 이 운동의 영향 아래 교육 생활이 자극을 받았고, 새로운 대학들이 건립되었다. 한편 이 운동은 식민지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게 함으로써 직접 미국 혁명 즉 독립전쟁을 위한 길을 예비해 주었다.

대각성의 초기 징조는 1720년대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프렐링후이젠 목사는 교인들에게 보다 깊고 체험적인 기독교 신앙을 권면하였다. 대각성 운동이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것은 1734년에서 1735년까지 부흥 운동이 휩쓸 때였다. 특히 노스 햄프턴 회중교회 목사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대각성 운동에 관한 글을 써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각성에 대한 반동으로 인하여 아르미니우스와 나중에는 회중교회 안에 있는 유니테리언 사상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침례교에서는 각성 운동이 계속되어 교세가 크게 증가했으며,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급속히 퍼졌다. 대각성은 또한 남부 식민지로 확산되었고 비국교도 교회의 성장에 공헌했다. 감리교는 독립전쟁 기간 중에도 계속 성장했고, 많은 현지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그 운동에 헌신했다. 감독교회들은 각성 운동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루터파 교회들은 대각성의 영향을 직접 심하게 받지 않았다. 대각성 운동의 논쟁으로부터 18세기의 최고의 미국 신학이 뉴잉글랜드에 등장했다.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학파의 작품이었다. 에드워즈는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거기서 그는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칼빈주의를 옹호하는 데 자신의 신학적 철학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로부터 18세기 자유 신학 사조의 특성을 밝혀냈다. 그는 [의지에 관한 논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본원적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할만한 도덕적 능력 즉 성향(inclination)은 결여되어 있다. 에드워즈 학파는 대각성 운동이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에서 전성기를 경과한 후에 나타났지만, 이후의 미국 발전에 큰 영향을 준 복음주의적 칼빈주의를 소개하고 옹호했다. 이 운동은 캐나다에도 얼마간 영향을 주었다. 헨리 앨린은 독특한 “각성 신학”을 창안했다.

9. 복음주의적 부흥의 영향과 근대 선교의 발흥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은 오래된 비국교도파 교회들이 큰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장로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양한 형태의 복음주의자들은 신앙적이며 인도적이며 자선을 베푸는 사업을 했다. 존 하워드는 ‘감옥 개량의 아버지’라고 불릴만 하다. 클라람파는 영국 및 연방의 노예제도 철폐에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1787년 부터 평생을 노예 제도와 전투를 시작했다. 그 결과 1833년에는 노예제도 자체가 온 영국 및 영연방에서 폐지되었다. 부흥운동은 기독교 문학의 확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소책자협회 등과 같은 기관들로 인해 성경의 대중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성공적인 대규모 기독교 교육사업은 1780년의 주일학교였다. 이것은 국교회 복음주의파 평신도인 로버트 레이크스에 의해 창설되었다.

복음주의적 복음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근대 개신교 선교의 발흥이었다. 종교개혁기의 로마 카톨릭의 선교는 급속하게 발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내부 문제와 오랜 신학적 확신과 아울러 지리적 약점으로 인하여 이에 상응하는 선교의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복 활동에 따라 실론, 자바, 포르모사에서 선교 사역을 개시했다. 영국의 윌리엄 케리는 지리상의 발전의 자극을 받아 꺼지지 않는 선교적 열정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학자와 식물학자로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영국의 선교의식이 깊어지자 다른 나라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초 미국과 유럽 대륙에서는 광범위한 교파적 처교파적 선교회가 설립되었다.

10. 미국 독립 전쟁 시대

1775년 독립 전쟁이 발발하고 1789년 합중국 헌법에 따라 통치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혁명기의 철학은 종교에 대해 합리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었고 따라서 교회의 특권을 최소화했다. 이 시기에 미국 종교계의 최대의 사건은 신앙의 자유의 성취였다. 이것은 혁명적 진보였으며, 천년 이상 서방 문화를 특징지었던 획일성과 국교회의 원칙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난 것을 의미했다. 신앙의 자유를 국가 원리로 수용한 것은 새로운 것이었다. 대각성 운동은 신앙자유에 대한 욕구를 더욱 촉진시켰으며, 실제로 비국교도 교회의 성장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미국의 독립 쟁취는 모든 교파에게 모교회에서 독립하여 교회를 재구성할 필요를 느끼게 했다. 영국 국교회 계통의 감독교회가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미국 감리교, 네덜란드와 독일의 개혁교회 등이 그러했다. 물론 로마 카톨릭 교회들은 독립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마와 관계를 재정의하고 국가적 조직을 이루었다. 모라비아교회는 19세기까지도 자율적이지 못했다. 회중교회, 침례교, 퀘이커 등 일부 교단들느 이미 혁명전에 독립했으며, 독립전쟁의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 장로교회도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재조직의 기회를 잡았다. 루토교도 자율적이었지만 독립전쟁 동안 조직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만인구원교회는 독립전쟁 기간동안 발달한 새로운 국내 종교단체였다. 조직된 만인구원론은 존 머레이(1741-1815)가 시조였다..

독립전쟁은 종교에서 중대 국면이었다. 신앙의 자유는 교회에 새로운 배경을 의미하는 바, 교회는 자발적으로 생존과 성장 방식을 채택해야 했다. 약 14세기 동안 기독교 세계를 특징짓던 공적 국교제도는 국가 차원에서 폐기되었다. 그 빈 자리는 이른바, “생생한 실험”이 차지했으며, 그것은 신생 독립국 미국 뿐만 아니라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서 신앙 생활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11. 독일 계몽주의

독일에서는 감정을 강조하는 경건주의가 계몽주의에 앞서 일어났으나, 18세기의 비판적 합리적 정신, 이신론 등이 독일에 침투하여 그 결과 독일 계몽운동(Aufklarung)이 급속히 확장되었다. 이것은 심각한 신학 변동의 길을 예비해 놓았고 19세기 개신교 국가 전체에 널리 확산될 것이었다.

크리스챤 볼프는 수학처럼 논리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는 주장을 했다. 그는 계시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시는 이성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것도 포함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의 견해는 할레의 경건주의적 동료들의 반감을 일으켜 1723년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로 하여금 볼프를 추방케 하였다. 1740년 볼프는 다시 명예 복귀를 하였다. 그는 독일 사상에 큰 획을 그었다. 할레에서 경건주의의 지배가 끝났던 것이다. 모샤임은 모든 사건을 사실 그대로 서술하려는 목적으로 교회사를 저작함으로서 “근대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릴만 했다. 더욱 극단적 합리주의를 대표한 사람은 라이마루스였다. 그는 이신론을 지지하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레싱의 견해 역시 독일 지식층에 수용되어 역사적 기독교는 인간 발달 단계의 과거(유년기)에 속하며 현재(청년기)보다 열등하다는 정서를 널리 확산시켰다.

계몽운동은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성서에서 오직 가치있는 것은 자연종교 및 도덕성의 진리라는 견해를 널리 확산시켰다. 예수는 신앙의 인격적 중심이라기보다는 도덕 교사였다. 이것은 합리주의였다. 합리주의는 1800년 경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신학적 사고였으며, 19세기 동안에도 위력적으로 존속했다.

18세기 독일에는 성서의 본문 및 역사연구가 현저하게 발달했다. 프랑스의 아스트룩은 그의 「창세기 해석」에서 창세기의 복합적 성격을 주장했다. 그후 “구약 비평의 창설자”로 불려진 아이히호른에 의해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에르네스트는 고전 문학에 적용하는 해석 원리를 신약 해석에 도입했다. 제믈러는 성서에서 영원한 진리와 시대적 요인을 구별했다. 또한 계시는 성서안에 있으나 성서 전부가 계시가 아니라고 가르쳐사 특히 초대교회에서 유대적 당파인 베드로와 반유대적 당파인 바울 사이를 구분했는데, 그것은 이후의 논의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출처 : 시골농부의 집
글쓴이 : 시골농부 원글보기
메모 :

'교회사자료 > 5.근세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본주의 vs 신복음주의  (0) 2012.08.13
근세교회사   (0) 2012.01.14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   (0) 2011.03.18
청교도 운동 이해  (0) 2010.03.12
신학총론 찾기  (0) 2009.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