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洋哲學史(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2011. 3. 18. 17:07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西洋哲學史(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철학은 인간이 처해 있는 세계 전체를 진실한 모습에서, 즉 세계 전체의 객관적 진실을 포착하고 이것을 개념적으로 일반화하려는 이론적 인식활동(세계관의 학문)을 말하며, 이것을 지침으로 인간의 개인적·사회적 생활을 보다 잘하려는 실천적 의도를 갖는 학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역사적 발전과정이 있다. 원시민족 간에 있던 여러가지 신화, 전(前)과학적인 해석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으나 적어도 과학적 사유(思惟)의 탄생을 볼 수 있는 시기를 그 시원(始源)으로 한다.

【고대】 철학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 시기에서 기원후 4,5세기, 즉 고대사가 끝날 때까지의 철학을 고대철학이라고 하고, 이 고대철학은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 창시기(創始期)의 철학:BC 6∼5세기를 말하며 자연을 대상으로 그 속에 존재하는 변화하지 않는 원질(原質)을 탐구하였다. 원질을 물로 본 탈레스, 무한정한 것이라고 생각한 아낙시만드로스, 공기로 본 아낙시메네스, 또 불생불멸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파르메니데스, 불이라고 본 헤라클레이토스, 다수의 원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다원론자들이 이 시기에 속한다.

〈제2기〉 아테네기(期)의 철학:BC 5세기 후반이 되자 지금까지 자연을 대상으로 하던 철학은 인간문제를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가 이런 전회(轉回)의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었는데, 결코 객관주의적인 해답은 얻을 수 없다는 상대주의의 입장에 있었다. 이에 반해 인간의 영혼을 철학의 주제로 삼은 것은 소크라테스였다. 그 근본 사상은 ‘덕(德)은 지(知)’라는 것이었고, 제자인 플라톤은 이데아론 사상을, 또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사상을 이어 받으면서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만들었다. 이 아테네기의 철학은 고대철학의 최성기였다.

〈제3기〉헬레니즘·로마시대의 철학:아리스토텔레스 사후에서 고대말까지의 철학을 말한다. 이 시기 초에는 키프로스의 제논이 창시한 금욕주의인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를 창시자로 하는 쾌락주의인 에피쿠로스학파, 퓨론이 창시한 회의학파가 있었으며, 이들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하려 하였는데, 후기에 이르러 점차 인간 이상의 초월적인 신을 찾고 구원을 얻으려 한다. 피론의 철학,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중세】 중세철학은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한다. 395년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자리를 굳히자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확립할 필요가 생겨 교부(敎父)들이 이를 담당하였다. 최대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진정한 기독교적인 철학을 세웠다. 그러나 중세 철학은 역시 스콜라 철학이 이를 대표한다. 본래 교회부속학교 교사들이 세운 철학인데 9세기에서 15세기 중반에 이르며 흔히 초기·중기·후기로 나뉜다.

〈초기〉 9∼13세기 초로 대표적인 사람은 안셀무스 등이다. 안셀무스는 “알기 위해 나는 믿는다”고 말하며 신앙내용을 지식에 의해 기초로 삼으려는 생각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 약 13세기이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교회의 정통적인 견해와 잘 융합시켜 큰 체계를 세운 스콜라 철학의 제1인자이다. 여기서는 신앙과 지식의 일치라는 확신은 다소 흔들린다.

〈후기〉 14∼15세기 전반이며 스콜라 철학의 쇠퇴기이다. 대표자 W.오컴은 경험적인 지식을 중시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결코 지식적으로 기초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런 신앙과 지식의 완전한 분리라는 주장은 스콜라 철학의 붕괴를 의미한다.

【르네상스기】 신앙과 지식의 분리를 주장하게 되자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구애됨없이 자유로 생각하려는 근대적 정신이 생긴다. 이런 중세적 속박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위한 과도적인 시기가 르네상스시대이다. 이 시기의 철학은 먼저 그리스 철학의 부흥으로 시작된다. 이른바 인문주의이다. 그 중심은 이탈리아였고 대표적인 사람은 플레톤이다. 이런 인문주의운동에서 J.뵈메는 우리들 내부에도 신의 생명이 활동한다는 신비적 범신론을 끌어내었다. 또 신은 자연 속에 내재하여 우주에는 전체적으로 완전한 조화와 미(美)가 성립되어 있다는 범신론적 자연철학을 말한 G.브루노 등이 있다. 종교개혁을 한 M.루터나 J.칼뱅, 국가를 강대하게 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N.마키아벨리, 근대자연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H.그로티우스는 근대적 정신에 깊은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근대】 이런 과도기를 거친 후 17세기에 근대철학이 성립된다. 인간자신의 입장에 자신을 가지며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려는 것을 그 근본성격으로 한다

〈합리론과 경험론〉 근대에 이르러 먼저 생긴 것은 유럽대륙을 중심으로 한 합리론적 철학과 영국에서 성행한 경험론적 철학이다. 이 두 입장은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합리론철학의 창시자는 R.데카르트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신뢰하고, 우리가 이성적으로 확실한 것에서 확실한 것으로 추리해 가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기치로 거기서 신의 존재, 물체의 존재라는 것도 추리에 의해 확실한 신뢰로서 연역된다고 생각하였다. 데카르트의 뒤를 이어 합리론 중에 꼽히는 사람은 A.괼링크스, N.말브랑슈 등의 우인론자(偶因論者),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자신의 저서 《에티카(倫理學)》를 논증하려던 B.스피노자, 기계론적 자연관과 종교적 목적관을 조화시켜려 한 G.W.F.라이프니츠, 독일계몽주의 철학자 C.볼프 등이 있다. 경험론 철학은 인간의 인식에서 경험이라는 것이 수행하는 역할을 중시한다. F.베이컨은 경험을 중히 여기며 자연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연연구에서의 귀납법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T.홉스도 기계론적 자연관을 절대라고 생각하고 정신적인 것도 똑같이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둘 다 경험론적 입장에 섰으나 진정한 경험론 철학의 기초를 세운 것은 J.로크이다. 로크는 인간의 인식은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두 가지 경험에서 생기며 이 경험으로 단순관념이 주어진다. 아무리 복잡한 관념이라도 그 기원은 단순관념으로 분해된다. 로크의 이런 개념은 G.버클리, D.흄 등에 의해 전개되고, 흄은 경험적으로 보증되지 않은 것을 모두 의심한다는 회의론적 경향을 보인다.

〈칸트의 비판철학〉 이런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넘어서려는 것이 I.칸트였다. 칸트는 인식은 경험없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경험론의 주장을 인정했으나 경험론에 철저하기에는 너무 강한 형이상학적 요구를 가지고 있어 합리론철학에 대한 공감을 버릴 수 없었다. 칸트는 “우리의 인식은 결코 사물 그 자체의 모습, 물자체의 세계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의 대상은 현상계(現象界)에 한정되는 것이나 물자체 세계의 존재의 여지가 남는 것이며 여기에 형이상학이 성립되는 길이 열린다고 말하였다. 칸트는 도덕적 실천의 입장에서 이 형이상학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칸트는 우리의 인식능력 그 자체를 비판함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으며, 스스로의 철학을 비판철학이라 불렀다.

〈독일관념론〉 칸트의 철학을 이어 독일에서 일련의 철학이 생겼다. J.G.피히테·F.W.J.셸링·G.W.F.헤겔의 철학, 즉 독일관념론이 그것이다. 피히테는 칸트 철학에서 출발하여 현상계와 물자체라는 이원론을 넘어 절대적 자아(自我)라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통일적인 체계를 만들려고 하였다. 셸링은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라는 개념을 넘어 모든 것의 근저에 존재하는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인 절대자라는 개념에 도달하고, 헤겔은 셰링 철학에서 출발하여 절대자를 자기동일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헤겔의 철학은 이성을 본질로 하는 절대자의 자기전개에 의해 모든 사상을 설명하려는 것이며 이성주의적 형이상학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현대】 헤겔의 철학은 헤겔 생존에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사후 비판을 받게 되었다. 즉 이성주의적 철학에 대한 비판에서 비이성주의 경향이 강하게 대두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러므로 헤겔 이후(1830년대 이후)의 철학을 흔히 현대철학이라고 한다. 헤겔철학의 비판은 실증주의적 입장과 비합리주의적 입장으로 나눈다. 실증주의적 입장으로부터의 비판은 헤겔학파 내부 즉 L.A.포이어바흐 및 K.마르크스·F.엥겔스이다. 포이어바흐는 철학은 육체를 가지며 공간적·시간적으로 존재하는 감성적(感性的) 인간을 존중하고 거기서 출발하는 인간학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장하였다. A.쇼펜하우어와 S.A.키르케고르는 비합리주의적 입장으로부터 헤겔비판을 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며 오히려 비합리적 맹목적인 삶의 의지라 생각하고 염세적 철학을 내세워 생의 철학의 연원이 되었고, 키르케고르는 헤겔과는 달리 역사 속에서 살고 행위하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입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른바 실존철학의 연원이 되었다. 헤겔비판으로 생긴 이런 비이성주의적 경향은 그 후 계속 이어져 현재에 이른다. 실증주의적 경향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지금도 하나의 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E.마흐 등의 실증주의, C.S.퍼스·W.제임스·J.듀이를 주로 한 미국 철학자가 주장하는 프래그머티즘, R.카르납 등의 분석 철학이 있다. 이 분석철학은 현재의 영미철학의 주류를 이룬다. 비합리주의적 경향으로는 철저히 생이라는 것을 긍정하려고 한 F.W.니체, 비약적·창조적인 생을 직감으로 포착하려는 H.베르그송, 생을 해석학적으로 잡으려 한 W.딜타이 등의 생의 철학이 있으며,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포착하려는 M.하이데거·K.야스퍼스·J.P.사르트르 등의 실존철학이 있다. 이 밖에 후설의 현상학도 극히 유력하며 실존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근 영미계(英美系) 언어분석철학에서는 마흐나 전기(前期)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논리실증주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경향도 보인다. 즉 프래그머티즘의 입장을 발전시킨 W.O.콰인 등의 네오프래그머티즘과 또 하나는 후기비트겐슈타인·G.라일·P.F.스트로슨·J.오스틴 등의 영국일상언어학파이다. 1960년 이후 위와 같은 활동은 상호비판과 융합을 보이며 광범위한 영어권 철학으로 부상하였다. 영미 외에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를 포함, 공통 사색의 장을 이루고 활동한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사회정세의 변화로 실존철학이 급속히 약화되고 E.후설의 현상학이 재조명되어 여러 과학과 교류하는 현상학운동이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확대되었다. 해석학도 H.G.가다머 등이 새로이 생명을 불어넣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는 정신분석·민족학과 관련을 가지며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흐름을 탄 비판적 사회이론은 영미계의 언어 행위론을 받아들이며 J.하버마스가 독일에서 추진하고 있다.

 항목차례

  1. 고대 그리스 시대

 

그리스 신화(Greek mythology)

 

  고대 그리스인(人)이 만들어낸 신화와 전설. 그리스 민족 고유의 신화를 중심으로 선주민족(先住民族)과 이웃 민족의 신화를 종합하여, 오랜 소장(消長)과 변천을 거쳐 발전시킨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 신화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그리스 옛 전설의 발전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이전의 변천과정은 옛 시인이나 문인, 또는 고대미술 유품(단지나 돌에 새긴 그림)에서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 모든 민족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화도 많은 초자연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내용도 매우 복잡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이야기나 영웅전설, 그 밖의 내용이 담긴 이야기를 미토스(mythos)라고 하였다. 미토스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그 내용이 신들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사(人事)·자연·문화 일반에 걸쳐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또 믿고 있던 것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시사나 암시가 들어 있다. 신들이나 초자연적 요소가 일상적 사실은 아니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인 특유의 미화(美化)과정을 거쳐 인간화된다. 이렇게 하여 이상한 기원(起源)을 가진 신들도 그리스 조각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름다움으로 묘사된다.

【신화의 성립】 그리스 신화의 주요 부분은 이미 선사시대에 형성되었다. BC 3000년 이래 지중해에는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하는 크레타 문명이 있었는데, 이것이 마침내 커다란 세력이 되어 그리스 본토에까지 퍼져 여러 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한편 BC 2000년경부터 아카이아인(人)이라고 하는 그리스 민족이 북방으로부터 펠로폰네소스반도로 남하(南下)하여, 문화적으로도 세력을 뻗쳐 미케네 문화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BC 12세기에는 도리스인(人)이라고 하는 그리스민족이 침입하여 먼저 그리스에 들어온 민족은 새로 들어왔던 민족에게 정복당하기도 하고, 지중해로 도망쳐 소(小)아시아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이주민과 그리스 본토의 선주민들이 섞여 고대 그리스 문화와 신앙을 이루었기 때문에 신화·전설에서도 자연히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그래서 신화의 내용도 복잡해져서 여러 가지 불일치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점이 그리스 신화의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비롯하여 신화와 전설을 전하는 문학작품의 작자들에 의해 그 내용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변형되기도 하였다.

【천지의 생성】 다른 여러 민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인도 세계 창조에 관한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신과 같은 절대자가 있어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만물은 자연히 이루어져 각기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들도 인간처럼 나중에 생겨난 것이었다. 세계의 시초를 제일 먼저 질서정연하게 서술한 작품으로는 BC 8세기의 서사시인(敍事詩人)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神統記)》이다. 이 《신통기》에 의하면, 최초로 ‘무한의 공간인’ 카오스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 ‘가슴이 넓은’ 대지(大地) 가이아와 ‘영혼을 부드럽게 하는’ 사랑 에로스가 나타났다. 카오스(혼돈)로부터 에레보스(어둠)와 닉스(밤)가 생겨나고, 닉스와 에레보스 사이에서 아이테르[上天]와 헤메라(낮)가 태어났다. 가이아는 우선 별이 빛나는 우라노스(하늘)와 폰토스(바다)를 낳은 다음, 우라노스와 교접하여 티탄이라고 하는 5명의 남신(男神)과 티타니스라고 하는 6명의 여신을 낳고, 마지막으로 크로노스를 낳았다. 이것이 티탄족(族)이라고 하는 신들인데, 그들은 신적(神的) 존재인 동시에 아득히 먼 인간의 조상으로 숭배받았다. 가이아는 또 3명의 키클로프스(외눈 혹은 둥근 눈의 거인)와 3명의 헤카톤케이르(손이 100개인 거인) 등 괴물을 낳았다. 이들 티탄·키클로프스·헤카톤케이르 등은 혼돈상태에 있는 대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신들이었다.

【올림포스의 신들】 티탄족 가운데 나이가 가장 적은 크로노스는 아버지의 생식기를 자르고 세계의 지배권을 차지한다. 그에게는 6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자식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식을 낳기만 하면 삼켜버렸다. 마지막 아들인 제우스(인도유럽 어원:하늘·낮·빛의 뜻)를 낳았을 때, 아내인 레아는 돌을 산의(産衣)에 싸서 아기라고 속여 남편에게 삼키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목숨을 구한 제우스는 예언대로 왕위를 차지한다. 제우스는 성장한 뒤 아버지 크로노스가 삼켜 버린 형들을 토해내게 한 후 형제력(兄弟力)을 키워서 세계를 통치한다. 형제끼리 제비를 뽑아 제우스는 하늘을, 포세이돈은 바다를, 하데스는 명부(冥府:지옥)를 각각 지배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최고봉인 올림포스산은 신들의 공유지(共有地)로서 함께 그곳에서 살며, 제우스가 올림포스의 주신(主神)으로 군림한다. “어떠한 신이나 여신도 나의 뜻을 어겨서는 안 된다. … 만약, 내 뜻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 자를 붙잡아 캄캄한 타르타로스[奈落]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 때 그 자는 내가 다른 어느 신들보다 얼마나 힘이 센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절대 권력을 장악한 제우스는 번갯불로 싸움에 이기고 우주를 지배하였다. 제우스의 지배하에 있는 올림포스의 주요 신들은 다음과 같다. 제우스의 아내이며 누이이고, 여신 가운데 최고인 헤라, 다음에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과 출산의 여신 아르테미스, 이 세 여신은 모두 제우스의 딸이었다. 곡물의 성장을 주관하는 여신 데메테르, 화로의 불을 주관하는 헤스티아, 이 두 여신은 제우스의 자매였다. 태양신이고 음악·의술·궁술(弓術)·예언의 신으로 위엄이 넘치는 아폴론, 전령(傳令)이며 나그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 불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 군신(軍神) 아레스 등 이상의 네 남신은 제우스의 아들이었다. 이 밖에도 포도주의 신으로 주연(酒宴)의 상징이며 일명 바쿠스라고도 하는 디오니소스가 있는데, 이들이 올림포스 신들의 중심을 이루는 12신이다. 이 신들은 올림포스산에서 영생(永生)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먹고 신주(神酒)인 넥타를 마시면서 향연으로 나날을 보낸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신들의 생활은 외관상 인간의 생활과 비슷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어야 하는 운명인 인간과는 달랐다. 또, 신들은 형체를 마음대로 바꾸어 동물이 될 수도 있고 생명 없는 물체로도 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신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랑·미움·노여움·선망 등의 감정에 움직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신들에게 적의(敵意)를 가진 인간에게는 적대하고 존경을 나타내는 인간에게는 무한한 호의(好意)를 보였다.

【인류의 시초】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출현에 관하여도 여러 가지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생각으로는 인간은 신들과 마찬가지로 가이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들과 동족이라는 생각이다. 즉 인류는 대지에서 자연히 생겨났다는 생각이다. 헤시오도스의 교훈시 《노동과 나날》을 보면 올림포스의 신들이 인간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 속에 나오는 ‘인간의 5세대(世代)’에 따르면 신들은 먼저 황금의 종족을 만들었고, 이어 백은(白銀)의 종족, 청동(靑銅)의 종족, 영웅들, 철(鐵)의 종족 등을 차례로 만들었다. 지금은 철의 종족의 세대로, 노동과 괴로움으로 차 있어 마침내 화(禍)와 자멸(自滅)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이다. 또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의하면 티탄 신족(神族) 출신인 프로메테우스(먼저 생각하는 사나이라는 뜻)가 인간의 은인으로서, 제우스를 속이고 인간의 이익을 꾀했다고 하여, 제우스가 노하여 인간을 벌하기 위해 인간에게 불을 주기를 거절했다. 제우스는 신들과 인간의 운명(모이라)을 구별하기 위하여 큰 소 한 마리를 잡아 두 몫으로 나눴다. 프로메테우스는 몰래 쇠고기와 내장을 가죽에 싸고 밥주머니 속에 넣어 감추었다. 그리고 먹을 수 없다고 판단한 뼈를 번쩍이는 흰 지방(脂肪)에 싸서 제우스가 뼈무더기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뼈는 소의 썩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불멸의 신의 운명을 나타내며, 고기와 내장은 썩어 없어지는 인간의 운명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인간은 그로부터 소를 잡으면 고기와 내장은 먹되 신들을 위해서는 뼈와 지방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웠다. 뼈에서 나오는 구수한 냄새는 곧 그리스 신들을 상징하고 인간의 운명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인간이 곤란해지자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씨를 훔쳐 지상으로 가지고 와 인간에게 주었다. 제우스가 이 사실을 알고 쇠사슬로 그를 묶어 문책하는 한편, 인간에게도 그 보복으로 재앙을 주기 위해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명하여 진흙으로 최초의 여자 판도라(모든 선물을 주는 여자라는 뜻)를 만들어, 신으로부터는 어떠한 선물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형 프로메테우스의 충고를 잊은 에피메테우스(뒤에 생각하는 사나이라는 뜻)에게 주었다. 판도라는 온갖 재앙이 담긴 상자를 지상으로 가지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여자 특유의 호기심에서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속에 담긴 온갖 재앙과 죄악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고 한다. 그 때 궤 안에는 ‘희망’만이 남았고,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 ‘희망’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제우스는 인간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거니와, 후세에 와서는 그가 인류를 만들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외에도 만물의 어머니이자 대지의 뼈라고 할 수 있는 돌을 던졌더니 그 낱낱의 돌이 모두 인간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으며, 용(龍)의 이빨을 뿌렸더니 인간이 싹터나왔다는 등의 여러 설(說)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의 각 지방마다 인간의 기원(起源)을 설명하는 고유의 전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웅들의 전설】 그리스 신화의 대부분은 신들의 자손인 영웅들의 이야기로, 매우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아르고나우타이 전설은 영웅 이아손이 중심인물로서,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를 포함한 아르고나우타이라고 하는 영웅의 일군(一群)이 거선(巨船) 아르고호(號)를 타고 유명한 황금 양털을 찾아 원정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테바이 전설은 카드모스에 의한 테바이(테베)시(市)의 건국과 그의 자손인 오이디푸스왕(王)의 기구한 일생, 그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왕위쟁탈전, 테바이를 공격하는 7명의 장수(將帥), 에피고노이(후예들)라고 불리는 이 7장수의 아들들에 의한 테바이 원정 등, 일련의 이야기가 테바이 전설권(傳說圈)을 이루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등 많은 비극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트로이 전설은 올림포스의 3여신의 미인 선발대회를 발단으로 하여,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 의한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의 유괴, 그녀를 탈환하기 위하여 아가멤논을 총대장(總大將)으로 하는 그리스군(軍)에 의한 트로이 원정, 용장 아킬레우스, 지장(智將) 오디세우스 등의 활약, 유명한 목마(木馬)의 계략, 트로이 함락 후 오디세우스의 귀국 이야기 등으로 되어 있는데, 호메로스는 이 전설들을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읊었다. 헤라클레스의 전설은 그리스 신화 가운데 최대의 영웅 무용전(武勇傳)의 골자를 이루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덧붙어 또 하나의 전설권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들의 모험과 몇 가지 공적(功績)이 중심을 이루는데, 수많은 민간 전승(傳承)의 이야기로부터 종교적 유래를 가진 설화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도 헤라클레스를 닮은 일련의 영웅 모험담을 이루고 있는 테세우스 이야기와 괴물 고르곤의 하나인 메두사를 퇴치한 페르세우스 이야기 등이 있다.

【신화의 구성】 신화·전설은 단순히 신들의 계보(系譜)나 영웅들의 공적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변형(變形)이나 윤색(潤色) 또는 설명 등 끊임없이 수정을 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명부(冥府)의 왕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유괴하자, 그녀의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비탄에 잠기는 동안은 작물이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신들은 1년 중 어느 기간은 페르세포네를 어머니 품으로 돌려주도록 조처하였다. 이 이야기는 신이 4계절의 변화라는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을 다룬 신화로는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전설처럼 복잡한 인간의 심리나 행동을 설명하는 것도 있다. 또, 트로이의 전설처럼 어느 정도 사실(史實)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든지, 각 지방의 구전(口傳)이나 그것을 해석한 것, 여러 자료를 합쳐 창작된 것 등도 있다. 이같은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차차 확장되고 발전하여 전설상 일련의 계보(系譜)나 그룹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는 이야기의 원줄거리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단순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이야기도 있어 이야기를 윤색하는 작용을 계속하였는데, 2,500여 년 동안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하나의 위대한 문학 유산이 되고 있다.

【신화의 전승】 그리스 신화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공동재산으로서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은 첫째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이다. 호메로스는 그리스 신화를 체계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신들이나 영웅들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리스 신화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를 가장 뛰어난 형태로 전해 주는 것은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 등 3대(大)비극 시인이다. 비극은 신화 전설을 그대로 전해 줄 뿐만 아니라, 충분한 이성적(理性的) 고찰에 의하여 전승함으로써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 신화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지식은 보다 후세의 체계화된 작품에서 얻어낸 것으로서, 특히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이야기》에서 얻는 바가 많다. 그리스 신화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이나 미술 등 문화의 각 분야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가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시대와 인종을 초월한 인간 심리의 비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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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철학(Greek philosophy)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철학. BC 585년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아카데미학원이 폐쇄된 529년까지 1000년 이상 지속된 고대의 철학을 말한다. 그리스 철학의 절정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속했던 시기, 즉 아테네가 ‘헬라스의 학원’이었던 고전기인데, 그리스 철학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필로소피아(愛知學)의 형성기이다. 이 때의 관심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 있었는데, 이오니아 식민지의 그리스 사상가들이 동방에서 습득한 기술에서 ‘원리와 원인에 관한 지식’으로 전환하여 철학의 정초를 이루었다. 제2기는 아테네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원래 아티카에는 독창적인  철학자들이  없었는데, 페르시아 전쟁(1차 BC 490, 2차 BC 480) 이후 아테네가 그리스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명성이 있는 사상가들이 대거 아테네에 몰려들어 여기에 그리스 철학이 꽃피우게 되었다. 이 때 대우주(자연)에 쏠렸던 관심이 소우주인 인간에게 돌려졌다. 제3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BC 336∼BC 323)에 의한 헬라스(Hellas, 고대(古代) 그리스인(人)이 그리스를 자칭하는 경우의 이름. 현대 그리스인도 마찬가지로 자국칭(自國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엘라스’라 발음하고 있다. 그리스인은 그들의 나라는 전설적인 영웅 헬렌(Hellen)이 만든 것이며, 그들은 모두 헬렌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일컫는다.) 통일과 동방원정이 있은 후 그리스 철학은 순수한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의 특색을 상실함과 동시에 세계의 그리스화를 꾀하는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상의 3시기를 살펴보면 그리스 철학은 지역적으로도 지중해 전역에 걸쳐 있어 그리스 본토뿐만 아니라 아시아·남이탈리아·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이른다. 민족적으로도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로마인·유대인·이집트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사용어도 그리스어 외에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광범위한 그리스의 철학을 한마디로 특징짓기는 힘들다.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I.칸트가 표현한 대로 그리스 철학은 ‘하나의 학문의 확실한 진로’를 보여주었다. 인류의 긴 암중모색 이후 그리스인은 인류가 더 이상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확실한 진로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철학은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만물의 원리와 원인을 추구했던 최초의 철학자들이 탄생한 곳은 이오니아 식민지의 밀레토스이다. 식민지에 나온 사람들은 타향살이에서 전통적인 풍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 닦은 생활지반에서 오는 여유로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자연에 대해 활기 있는 질문을 하였다. 만물이 그것으로 이루어지고 최초로 그것에서 생성되고, 또 마침내 그것에서 소멸되는 것, 실체는 변하지 않고 모습만 변하는 것, 그런 근원이 무엇인지를 추구하였다. 이오니아학파에 속했던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메네스는 각각 그것을 ‘물’ ‘무한한 것’ ‘공기’라고 하였다. 이들의 탐구방식은 자연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설명이었다. 한편,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나 남이탈리아로 이민한 사상가들이 있다. 사모스섬에서 크로토네에 갔던 피타고라스와 콜로폰에서 남이탈리아의 엘레아로 갔던 크세노파네스가 바로 그런 사상가들이다. 영혼의 불멸을 믿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희구하는 남이탈리아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그들은 이오니아 사람들의 경험적 태도와는 달리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하면서도 철학하는 목적을 영혼의 정화에 두고 종교 교단을 창설하였으며, 크세노파네스는 그리스 대중이 신봉하는 의인적인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전체로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격적인 유일신을 소개하였다. 이탈리아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의 철학적 유산에 의해, 그리스철학에서 감각에 의해 알 수 있는 것과 정신에 의해 알 수 있는 것 2개의 세계로 구분된다. 엘레아 출신인 파르메니데스는 정신의 활동이 감각의 활동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말하여 플라톤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실재는 부동·불변의 ‘있음’이라고 보았던 파르메니데스에 맞서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았다. 한편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부정한 데서 초기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사물의 혼합과 분리라는 방향으로 추구하여 다원론(多元論)이 대두되었다. 여기에 엠페도클레스의 ‘4개의 뿌리’, 아낙사고라스의 ‘씨앗’,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原子)’가 나온다. 여기에도 이탈리아와 이오니아의 흐름의 특질이 있어,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정열로써 혼의 정화를 외쳤고, 아낙사고라스는 클라조메나이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을 이어받아 태양은 신이 아니고 불붙은 돌덩이라고 외쳐 화를 입었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아브데라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따라 기하학적으로 분할할 수 있으나, 물질적으로 더 분할할 수 없는 원자를 말하였다.

【아테네의 철학】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급속한 발전을 하여 봉건적 귀족제도가 붕괴되고 민주제도가 형성되었다. 페리클레스의 문화정책(BC 460∼BC 429)으로 학자들이 각지에서 아테네에 모여들어 젊은이들에게 삶의 교양을 가르쳤다. 이들이 궤변론자라고 일컫는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의 대표적 인물은 아브데라 출신인 프로타고라스, 레온티노이 출신인 고르기아스, 엘리스 출신인 히피아스, 케오스 출신인 프로디코스 등이다. 이들은 넓은 분야에 걸쳐 스스로 지자(知者)라고 말했으나, 진리를 구하기보다는 진리에서 생기는 이득을 얻는 데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플라톤은 그들을 ‘정신양육의 무역상인이나 소매업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여, 사람은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또 장소와 시간에 따라 동일한 것도 다르게 판단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참과 거짓, 선과 악이 없다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에 의하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고, 각자의 감각에 의해 파악된 세계가 곧 그에게는 참된 세계이며, 각자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참이라는 것이다. 이런 진리의 상대론을 펴나가면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진리가 없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수립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소피스트의 주장이 참인지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해 물음과 답에 의한 대화방식을 택하였다. 이 방식으로 그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여 수정을 통해서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게 하였다. 가령 ‘덕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제를 놓고 개개의 덕행을 검토하여 귀납적으로 덕의 본질에 알맞은 정의(定義)를 구한다. 이 보편적인 정의를 얻어야 비로소 덕에 대한 지식이 확립된다.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행위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하여야 할 것을 알면서 그 반대의 행위를 하는 자는 지자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철학적 순교 역시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세계관에서 유래된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보고 자기 삶을 스승이 못다한 일을 완수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보편적인 것이란 인간의 감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피타고라스학파가 사물을 ‘수의 모방’이라고 했던 것처럼, 감각적인 것은 그 본질과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이 정신적인 눈을 떠서 볼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존재라고 보고, 그는 이것을 ‘이데아(idea)’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 20년 간 철학을 배웠는데, 나중에 독자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아 경험의 세계를 중요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데아론(論)에 대하여 그는 같은 종류의 여러 사물 속에는 하나의 공통개념(이데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통개념을 사물에서 독립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떠난 본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데아[形相]와 감각적 재질[質料]의 결합을 강조하여 ‘질료·형상설’을 내세웠다. 플라톤의 경우, 인간은 모름지기 이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갈망하여 감각의 세계를 떠나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충동, 즉 에로스(eros:사랑)를 목표로 하는 데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을 이성에 의한 영혼의 활동으로 규정짓고,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사랑이 아닌 시민의 상호협조로서의 필리아(philia:우정)를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출현은 그리스 철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알렉산드로스가 건립한 대제국 밑에서 종래의 도시국가(폴리스) 중심의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이 그 의미를 잃고, 세계국가(코스모폴리스)의 성격을 띠게 되어 국가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삶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로마의 J.카이사르의 세계 통일(BC 46)이 이루어진 후, 그리스 철학은 아테네에서 서쪽은 로마로, 동쪽은 알렉산드리아로 옮아갔다. 국운이 쇠잔해진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론적 추구의 여유가 없어지고 옛 철학이론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실천철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BC 3세기에 아테네에서는 키프로스 출신인 제논이 붉은 주랑(柱廊)에서 창설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가 그의 정원에서 가르친 에피쿠로스학파가 대립되었다. 스토아학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무욕의 생활’을 이상으로 했던 키니코스학파(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과 ‘쾌락이 선이다’라는 키레네학파(역시 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인간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인생은 자연에 따르는 생활에서 그 행복이 획득된다고 믿었으나, 스토아학파는 그 행복이 자족생활(自足生活)에 있다고 보는 데 반하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에 있다고 보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의 ‘무감동(apatheia)’이나 에피쿠로스학파의 ‘혼의 평안(ataraxia)’은 다같이 인간의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비슷한 입장이라 하겠다. 한편, 엘리스 출신인 피로가 체계화한 회의론은, 원래 인간이란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으므로 헛된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중지’를 내세워, 그것으로 혼의 평안을 얻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입장이다. 스토아학파는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의 교사였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학자들로 이어졌고, 에피쿠로스학파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어머니 플로티나 같은 신봉자를 로마에서 얻었다. 동쪽 알렉산드리아로 뻗어나간 그리스 철학은 동방의 헤브라이종교와 접촉하여 이른바 ‘구제(救濟)의 철학’으로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론은 플라톤 철학과 헤브라이종교의 결합을 꾀하여 인간은 하나님 속에 머무는 행복을 위하여 자기 의식에서의 탈출(황홀)을 지향하였고, 세계와 하나님과의 중간자로서 ‘로고스신학’을 제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플로티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은 이집트인으로 후에 로마에 가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인데, 그는 플라톤에 따라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보았다. 태양에서 광선이 비추어 나오듯, 이 일자에서 예지(nous)가 유출되고, 이 예지의 하부에서 영혼이 흘러나오고, 영혼 다음에 감각계가 뒤따라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내려오는 길을 보여주었는데, 인간은 상고(上告)라는 기도와 주술의 작용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플라톤의 학원을 폐쇄하자 고대의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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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Sophist)

 

  BC 5세기 무렵부터 BC 4세기에 걸쳐 그리스에서 활약한 지식인들의 호칭. 아테네를 중심으로 당시의 그리스 전역을 편력하면서 변론술과 입신출세에 필요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르쳐, 많은 보수를 받았다. 아브데라의 프로타고라스, 레온티니의 고르기아스, 엘리스의 히피아스, 케오스의 프로디쿠스 등이 유명하다. 소피스트란 원래 ‘현인(賢人)’ 또는 ‘지자(知者)’를 의미하였다. 그들은 거의가 지방출신 학자들로, 각기 자부하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어 개인이나 국가에서 돈을 받고 그것을 제공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가장 중요한 과목은 변론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신(一身)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선(善)을 도모하고, 언론이나 행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길’을 청년들에게 가르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 선이란 이런 것이라는 지혜가 아니라,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힌 것이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다. 이후 ‘소피스트’란 말은 ‘궤변을 일삼는 무리’를 의미하게 되었고, 궤변학파라고도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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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BC 414?)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키아의 아브데라 출생. 소피스트로 자칭한 최초의 인물이다. 아테네를 여러 번 찾았고, 만년에는 시칠리아섬에 있으면서 명성을 떨쳤다.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와 친교를 맺었고, 새로이 건설된 남이탈리아의 식민지 투리오이(BC 441)의 헌법을 기초하였다. 그의 유명한 인간척도설(人間尺度說)은 플라톤에 의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라는 말로 전해진다. 이 말의 해석은 여러 갈래이나 일반적으로는 진리의 기준을 개개의 인간의 감각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유력하며, 그 때문에 이 말은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고 상대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우주의 이법(理法)에 관해서 과학이 주장하는 것에 회의를 품었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불가지론(不可知論)의 태도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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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 출생. 자기 자신의 ‘혼(魂:psyche)’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추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平靜淸朗)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像)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愛知:철학)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照明)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로 그 용모는 추하였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의 말에 매료되고 그의 내면에 사로잡혔다. 이렇듯 외면과 내면의 이율배반에 그의 존재의 본질이 있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하였는데,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물음은 자기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초월)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형이상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내면은 근거에 의해 질문당하는 데서 생기는 막다른 벽 안에 끝까지 머무는 애지의 동반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외부와 내면의 틈을 통해 개시(開示)되는 근원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을 중심으로 그 생(生)과 사(死)의 증거를 가지고 정착시킴으로써 서양철학의 무게를 한몸에 짊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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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파술(maieutike)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 여기에는 소극적 측면인 소크라테스적 반어(反語:eironeia)와 적극적 측면으로서의 산파술을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대화의 상대자로부터 로고스(論說)를 끌어내어 무지(無知)의 자각, 아포리아에로 유도하는 소크라테스의 독특한 무지를 가장(假裝)하는 태도이고, 후자는 상대방이 제출한 논설이나 질문을 거듭함으로써 개념규정을 음미하고 당사자가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을 낳게 하는 문답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 이제 새로운 지혜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은 없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낳는 것을 도와 그 지혜의 진위(眞僞)는 식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활동을 어머니의 직업인 산파에 비유, 산파술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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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aporia)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는 것’ ‘길이 막힌 것’이라는 뜻. 철학용어. 사물에 관하여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해결이 곤란한 문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상대를 아포리아에 빠뜨려 무지(無知)를 자각시켰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포리아에 의한 놀라움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대화에서 로고스의 전개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난관을 아포리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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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Platon, BC 429?∼BC 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이상학의 수립자. 아테네 출생. 명문(名門)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philosophia(愛知:철학)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5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神域)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는 사이 80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 준다. 생전에 간행된 거의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는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종의 희곡작품으로서 여러 가지 논제(論題)를 둘러싸고 철학적인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對話篇)》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연대에 따라 ①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로 ‘덕(德)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대체로 아포리아(aporia)에 빠진 채 끝나는 전기 대화편(前期對話篇:《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메논》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등), ② 영혼의 불멸에 관한 장려(壯麗)한 미토스(mythos:神話)로 꾸며지고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데아론(論)이 펼쳐지는, 문예작품으로서는 가장 원숙한 중기 대화편(《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론》  등), ③ 철학의 논리적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고, 영혼과 이데아설이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후기 대화편(《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노모이》 등)으로 나눈다.  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소크라테스 속에 구현(具現)되는 ‘철학자’를 변호·찬양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을 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한 《파이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향연》이나 《국가론》도 또한 그와 같은 뜻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필로소피아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데 있었다. 이 ‘무지를 깨닫는 일’ 속에 머물며 아포리아 속에 있으면서 근원으로부터의 물음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이다. 전기 대화론에서, 대화가 항시 아포리아에 수렴(收斂)되고 무지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아에 머물기 위한 필로소피아의 술책이 미토스와 디알렉티케(dialektike:問答法)이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形相)라 불렀다. 이데아는 생성(生成)에 대한 존재, 다(多)에 대한 하나, 타(他)에 대한 동(同)이며,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目]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可視界)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分有)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국가론》의 선분(線分)·동굴·태양의 비유, 《티마이오스》의 우주창성론(宇宙創成論) 등). 인간이 탄생과 죽음에 의해서 한계지어진 ‘이 세상(여기)’과 ‘저 세상(저기)’의 구별을 플라톤은 이 두 세계를 따로 상대하는 것으로 구상하였고(《파이돈》 《파이드로스》 등), 이 양계(兩界)를 편력하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광채육리(光彩陸離)한 미토스로써 이를 장식하였다. 영혼은 원래 천상(天上)에 있으면서 참 실재(實在)의 관조(觀照)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 때문에 지상에 전락하고 땅(육체) 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육체=묘표(墓標)’설). 애지는 영혼이 지상의 사물 속에서 천상의 사물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참 실재를 상기하여(‘상기설(想起說)’), 이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에로스설’)라고 설명할 수 있다(《파이드로스》 《향연》 《메논》). 그러나 미토스를 도그마로 하고 거기에서 고정된 철학설을 구성하는 일은 플라톤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토스는 오히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자기가 놓여 있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포리아 밖에 내던진 자기 존재의 겨냥도이며, 아포리아로서 응축된 ‘근원에의 관련’을 형상으로 하여 우주론적인 규모 속에 틀을 만들고 투영하는 것이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미토스의 형상을 거부 배척하고, 아포리아에서 묻고 있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를 ‘말’ 속에서 질문하는 데에 디알렉티케가 성립된다.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된다. 질문은 사물이 ‘무엇(A)인가, 아닌가’를 질문하나, 그것은 그 무엇인가(A)를 그것과 다른 것(A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며,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은 이 양자(A와 A가 아닌 것)를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와 부분과의 뒤얽힘에서 다(多)를 꿰뚫는 하나를 보는 것이 애지자(愛知者)이다(《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플라톤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로서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근원을 묻는 애지의 진행에서 이 물음을 묻게 하고, 이 진행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애지의 진행(흐름) 속에 어느 때 갑자기 보이게 된다.

 

哲人政治(rule of philosophers)

 

  플라톤의 정치사상으로 대표되는 이상정치.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진정한 학문이며 인생지도의 지침, 인간형성의 힘으로서의 철학으로 국가지배가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실현방법은, 선(善)의 이데아의 인식과 올바른 인간의 개념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지배한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배자에게 있어서의 ‘지배의 논리’로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이상정치(理想政治)’만을 의미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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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 스타게이로스 출생.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논리학】 학문적인 인식은 사물이 지닌 필연적인 관련을 그 원인에 따라 인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3단논법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3단논법이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제1전제를 말한 공리론(公理論)도 뛰어났다. 그의 논리학서는 《오르가논: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하여졌다.

【자연학】 운동·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연구가 자연학이라고 불린다. 그는 여기서 네종류의 원인[四因論]을 들었다. ① 질료인(質料因:사물이 ‘그것’에서 되어 있는 소재), ② 형상인(形相因:사물이 ‘그것’으로 형상되는 것으로,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③ 동력인(動力因:‘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는 힘), ④ 목적인(目的因:그 사물 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②, ③, ④는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으로 자연물은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 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된다. 질료는 거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디나미스[可能態]로, 최종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최종목적(텔로스)인 엔텔레케이아[完成態], 에네르게이아[現實態]야말로 자연 존재의 우월하는 원인이라고 한다(목적론적 자연관).

【형이상학】 존재자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으뜸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소피아(지혜) 또는 제1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고귀한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이기도 하다. 신(神)은 으뜸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신은 질료에서 떠나, 영원 불변한 관조(觀照) 안에 머무는 자기사유자(自己思惟者)로서 최고의 현실태이고, 그것 자신은 부동이면서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제1동자(動者)’이다. 그것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자연계의 근거로서의 종극목적이다. 이 학문은  뒤에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이 학문이 뒤의 전집 편집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윤리학】 행위의 종극 목표는, 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놓여 있으나, 이것은 약간의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中庸)으로서의 덕이 행위의 목적이다.

【정치학】 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다.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善)은 실현된다. 그런까닭에,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가 교대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나라 제도가 있다고 한 정체론(政體論)은 온건한 민주주의의 뛰어난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시학】 창작의 본질은 모방(模倣)에 있다.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져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의 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정서를 정화(淨化)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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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論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심적인 사상의 하나로서 덕(德)은 과잉과 과소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mesotes)’에 존재한다는 설. 예를 들면, 쾌락에 관한 과잉과 과소는 방탕과 무감각이지만 그 중간에는 절제(節制)의 덕이 있다. 또한 금전의 수수(授受)에 관한 과잉과 과소는 낭비와 인색에 있지만 그 중간에는 대도(大度)의 덕이 있다. 여러 가지 덕목(德目) 중에서 그 중간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은 양 극단을 기준으로 하여 양적(量的)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 극단은 ‘적당한 정도(程度)’로서의 중간을 기준으로 하여 그 곳으로부터의 일탈(逸脫)로서 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적당한 정도는 행위자인 인간의 존재에 의거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중용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있어 한층 원리적인 존재론(存在論)에 의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개념을 초과와 부족에 대한 균제(均齊)라 하고 또 산술적인 비례중항(比例中項)으로 대표되는 것과 같은 사항 그 자체에서의 중용과, ‘우리들(지식층)에게서의 중용’으로 구별하여 후자를 윤리적인 덕의 본질적 속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중용을 본성(本性)으로 하고 최선(最善)으로 하는 덕(진실)에 대하여는 초과(진실에 대한 虛飾)도 부족(卑下)도 악덕(惡德)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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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理學(logic)

 

  인간의 지식활동에 관련된 특정한 종류의 원리들을 분석하고 명제화하며 이들을 체계화하는 분야의 학문. 이 지식은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김씨의 큰 아이는 아들이다’와 같은 지식이다. 또한 ‘김씨의 큰 아이는 아들이고 그의 둘째 아이도 아들이고 셋째도 아들이다. 그리고 김씨는 현재 세 아이밖에 없다. 고로 김씨의 아이들은 모두 아들이다’와 같은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을 사실적 지식(事實的知識)이라고도 하고 귀납적 지식(歸納的知識)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모든 남자는 사람이다. 그리고 에디슨은 남자이다. 그러므로 에디슨은 사람이다’에서와 같은 지식이다. 이를 관계적 지식(關係的知識) 또는 연역적 지식(演繹的知識)이라고 한다. 두 경우의 지식은 모두 간단히 명시될 수 있다. 귀납적인 경우 ‘김씨의 아이들은 모두 아들이다’라는 주장과 연역적인 경우 ‘에디슨은 사람이다’라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논리학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근거로서 제시된, 첫째 경우의 사실들과 둘째 경우의 명제(命題)들이 각기의 주장들에 대해 어떤 종류의 원리에 입각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조사한다. 첫째의 근거와 주장의 추리관계를 귀납적이라 하고, 둘째의 근거와 주장의 추리관계를 연역적이라 한다. 논리학은 이러한 특수한 관계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지식의 원리를 취급하는 물리학이나 사회학과 구별된다. 따라서 논리학은 크게 귀납논리학(歸納論理學)과 연역논리학(演繹論理學)으로 구분된다. 양자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특히 후자는 19세기 말부터 크게 발전하였고 대부분의 논리학 교재는 이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연역논리학은 연역적 추리에 관련된 많은 문제를 다룬다. 애매와 모호의 구조를 밝히고 오류의 유형을 나누며 추상·정의·분류의 개념을 명확히 한다. 의미의 표준을 제시하고 번역의 가능성을 논의한다. 사유(思惟)의 법칙과 추리(推理)의 개념, 그리고 체계에 대해서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사유의 법칙으로 알려진 것들은 보통 3가지가 있다. 첫째는 ‘A는 A이다’라는 동일률(同一律)로서 참인 명제는 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모순율(矛盾律)로서 ‘어떠한 명제도 동시에 참이면서 또한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어떠한 명제도 참이거나 거짓일 뿐 그 중간치는 없다’라는 배중률(排中律)이다. 과거에는 이 세 명제들이 법칙으로 불렸고, 영원하며 절대적이라 믿었다. 그래서 논리적 법칙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이에 근거한 논리학은 역사가 없다고도 하였다. 논리학은 수정할 수 없으므로 변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치논리학(多値論理學)의 체계는 배중률을 거부하고, 시제논리나 직관주의 논리는 모순율을 수정한다. 그리고 양자논리는 동일률까지 재고하고 있다. 이 명제들을 받아들이는 체계에서는 법칙명제일 수 있지만 모든 체계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체계에 따라서는 이 명제들이 추리의 원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추리에는 타당한 추리와 부당한 추리가 있다. 추리란 전제들과 결론의 관계이며 타당성은 이 관계의 어떤 성질이다. 그리고 전제들과 결론으로 이루어진 명제들의 집합을 논의라 하므로 타당성은 논의의 성질이 된다. 타당이란 전제들이 참일 때 결론이 거짓일 수 없는 논의의 성질이다. 앞의 에디슨의 논의가 그 예이다. 또한 ‘한국의 모든 대학들은 시골에 있다. 그리고 이화여자대학은 한국의 대학이다. 그러므로 이화여자대학도 시골에 있다’라는 논의도 그 전제와 결론이 실제로 거짓이지만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제들이 참이라면 결론이 거짓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당이란 전제들이 참이라 할지라도 결론이 거짓일 수 있는 논의이다. 예를 들면, ‘모든 프랑스 사람은 프랑스를 사랑한다. 그리고 드골은 키가 크다. 그러므로 드골은 프랑스를 사랑한다’라는 논의는 전제들과 결론이 모두 참이라 하더라도 부당하다. 왜냐하면 전제들이 참이라 하더라도 결론이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리의 기술 및 그 장치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삼단논법(三段論法)을 유형별로 논의한 데서 비롯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기호체계(記號體系)를 이루어 강력한 장치를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명제논리학’과 ‘기호논리학’을 참조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어떤 논리학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제안된다. 예를 들면 B.A.W.러셀의 논리체계는 앞의 3개의 사유법칙 명제들 중 어느 하나도 그의 4개의 공리(公理)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명제들은 러셀의 체계 안에서 정리(定理)로서 유도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어떤 체계 안에서는 그러한 어떤 명제가 유도될 수 없다. 그러면 어떤 명제는 이 체계에서 거짓이지만 러셀 체계에서는 참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 논리체계란 채택하는 공리들과 추리의 규칙에 따라 상대화한다. 그리고 어떤 비약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이용해 볼 수 있다. 논리체계란 어떠한 이론에도 스며들어 있으므로 어떤 인식(認識)은 체계에 따라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이론의 논리체계를 분명히 하는 경우 그 인식의 논리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 ‘개념(槪念)의 논리’라는 표현이 가능하고 개념분석이 근본적으로 논리적 활동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귀납논리학은 현재의 관찰된 사실로부터 어떤 보편적인 명제를 끌어내는 추리에 관한 연구를 한다. 이 보편적인 명제는 현재 아직 관찰되지 않은 경우도 포함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경우도 포함한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에 특정한 수의 황새가 빨간 다리를 가지고 있다는 관찰을 근거로 ‘모든 황새는 빨간 다리를 하고 있다’라는 보편적 명제를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때의 추리의 정당화에 대해 D.흄이 의문을 제기하였고, J.S.밀, 러셀, J.케인스, R.카르납이 확률이론(確率理論)을 통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C.S.퍼스, J.듀이, 그리고 K.R.포퍼는 이러한 귀납논리학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였다. 그것은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하여 아직 반례(反例)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퍼스는 그 보편명제가 참이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직 거짓이 아니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보편명제는 ‘법칙’이라기보다 ‘가설(假說)’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퍼스의 귀납성은 빨간 다리의 황새들을 열거하는 데서 찾지 않고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한 있을 만한 반례의 경우들을 찾아보면서 아직 반례를 얻지 못하는 데서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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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네 학파<Kyrenaioi>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 창시자는 북아프리카의 키레네에서 태어난 아리스티포스이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하여 소(小)소크라테스학파의 하나로 꼽힌다. 이 학파의 특징은 쾌락주의로서, 쾌락을 선(善)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아리스티포스의 딸 아레테, 손자인 아리스티포스와 테오도로스, 헤게시아스, 안니케리스 등이 있으나, 그들이 주장하는 쾌락설은 다양하다. 창시자인 아리스티포스는 현재의 육체적인 쾌감을 쾌락이라고 하면서도 쾌락의 대부분은 불쾌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려(思慮)로써 쾌락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로스는 쾌락이란 것은 사려에 의한 즐거운 기분이라 하였고, 안니케리스는 우애나 조상에 대한 사랑, 조국애 등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헤게시아스는 불쾌를 수반하지 않는 쾌락은 없다고 생각하여 생활에 무관심한 태도를 현명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생활에 무관심할 수 없을 바에는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여 자살 권유자(페이시타나토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쾌락주의가 이와 같이 염세관으로 귀착한 사실은 역설적이며, 이 학파는 나중에 에피쿠로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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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니코스(Cynics/Kynikos) 학파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가 창설한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학파. 견유학파(犬儒學派)·시니시즘이라고도 한다. 이 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극기적인 철학의 일면을 계승하여 덕(德)만 있으면 족하다 하여 정신적·육체적인 단련을 중요시하였으며, 쾌락을 멀리하고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족자제(自足自制),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의지의 우월성을 존중하였으며, 권력이나 세속적인 일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원하였고, 세계시민으로 자칭하여 헬레니즘 세계로 설교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키니코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안티스테네스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가 아테네 교외의 키노사르게스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시노페의 디오게네스(BC 412?∼BC 323)로 대표되는 ‘개와 같은 생활(kynicos bios)’에서 유래한 듯싶다. 가진 것이라곤 남루한 옷과 지팡이, 목에 거는 수도사의 주머니밖에 없으며, 나무통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거지 철학자는 스스로 ‘개와 같은 디오게네스’라고 이름하였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의 특징이며,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신에 가까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버릇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인 습관은 물론, 이론적 학문이나 예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옛 사람은 그들의 이러한 점을 평하여, 키니코스주의라는 것은 ‘덕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이 키니코스라는 말에 어원을 둔 cynical이라는 형용사는 ‘냉소적인’ ‘조롱적인’의 뜻을 가진다. 이것은 디오게네스의, 세상의 모든 질서에 대한 철저한 조소적 자세에서 유래한다. 대낮에 디오게네스는 등불을 켜 들고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방황하였다고 한다. 이 학파의 생활방식은 나중에 스토아학파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학파는 BC 3세기경에 융성하였고 그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나 로마제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던 1세기경에 다시 융성하였다. 루키아누스(Lucianus)는 키니코스학파 사람들의 거지와 같은 생활 태도나 무교양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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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헬레니즘(Hellenism) 시대

 

  고전(古典)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사상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 이같은 의미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대범위】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역사】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 대왕이 갑자기 병사하자,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를 분할하였다. 입소스전투(BC 301), 쿠르페디온전투(BC 281) 등을 거쳐 디아도코이의 세력 범위는 대개 결정되었다. 카산드로스(훗날의 안티고노스)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의 3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하였으나 결국 로마에 합병되었다. 그리스 본토는 아이톨리아동맹·아카이아동맹이라는 두 도시동맹을 만들어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으로서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지로 코린토스가, 그리고 에게해(海)의 섬 가운데서는 델로스섬과 로도스섬이 노예매매의 중개 무역지로서 번영한 것 외에는 쇠퇴 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역시 로마령(領)이 되었다.

【사회·경제】 헬레니즘 제왕국(諸王國) 가운데 마케도니아는 국력이 가장 약하였으나, 시리아·이집트에는 오리엔트풍의 강력한 군주국가가 성립되었다. 이집트는 지리적 조건이 좋고 물산(物産)도 풍부하여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지배가 확립되었다. 전국토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국왕에게만 소속되었다. 신하에게 주는 사여지(賜與地), 병사에게 주는 봉토(封土), 신전령(神殿領) 등이 있었으나 이것도 점유권이 주어져 있을 뿐, 왕은 언제라도 이를 회수할 수가 있었다. 왕의 부(富)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간(開墾)이 필요했는데, 유력한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개간시키고 개간이 되면 다시 몰수한 실례도 알려져 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왕료지(王料地)는 ‘왕의 농민’이라고 불리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농노적(農奴的) 소작인이 경작하였다. 상공업과 그 밖의 모든 산업경제는 왕 한 사람의 부를 위해 강력하게 통제되어 제유식물(製油植物)의 재배, 착유(搾油)와 맥주양조·제염(製鹽)·제지(製紙) 등 거의 모든 산업은 전매제였다. 광업·은행 등도 모두 왕이 독점하고 수입은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며, 수출은 국내 소비를 채우고 남은 것만 사인(私人)이 행하였다.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나우크라티스·프톨레마이오스 등 그리스풍의 폴리스가 셋 있었다. 이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업항으로서 번영하였고, 또한 무세이온·대도서관 등이 있는 그리스적 학예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雪]뿐’이라고 할만큼 번영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관료군(官僚群)이 이집트를 강력하게 지배하였는데, 고래(古來)의 토착종교와 왕가의 극단적인 근친결혼과 같은 풍속·습관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집트 토착민과의 마찰을 피하여 현명하게 통치하였다. 신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감독하였으나, 토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관(神官)의 힘은 마침내 강력해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말기 왕권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는 가장 오랜 왕국으로, BC 30년 로마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한 시리아에서도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영역은 헬레니즘 왕국 중 가장 광대하여 호족(豪族)과 어떤 종류의 자치권을 가진 민족(유대인 등), 영내(領內)에 많이 만들어져 있는 그리스풍의 폴리스 등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지극히 복잡하였다.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한 점은 분명치 않으나, 이곳에서도 전국토가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였다. 그리고 왕유지(王有地)는 ‘왕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농노적 농민이 경작하였다. 국토가 광대하고 정치적으로 복잡하였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이 고루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 멀리 파르티아·박트리아와 서쪽의 페르가몬 등이 독립하였고, BC 64년에는 로마에 합병되어 그 속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그 정치·경제 등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로마와 싸워 패하여 BC 168년 로마령이 되고, BC 146년에는 그리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문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와, 그 뒤 셀레우코스왕들이 영내(領內)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문화는 오리엔트의 오지(奧地)에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어가 공통어(코이네)로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前代)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그러나 한편 폴리스의 강력한 지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꾀하는 개인주의적인 철학의 제파(諸派)가 출현하였다. 제논이 시작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학파, 디오게네스의 키니코스학파, 아리스티포스의 키레네학파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철학파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매우 훌륭하나, 전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는 약화되고 보다 사실적·육감적으로 되었으며,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 등을 나타내기를 좋아하였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들이다. 이 시대의 학예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아테네·페르가몬 등이었는데, 특히 문헌학·자연과학 등이 발달하고, 창조적인 문학 등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는 그리스문화의 창조성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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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Roman Empire)

 

로마시(市)로부터 흥륭하여 이탈리아반도 및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였던 고대 서양 최대의 제국(帝國). 로마는 BC 8세기 무렵부터 전설적 왕정기(王政期)에 속하며, BC 510년부터 공화정기(共和政期)로, 옥타비아누스 이후는 제정기(帝政期)로 들어간다. 그러나 395년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동로마(비잔틴)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 로마가 이룩한 지중해 세계의 통일은 세계사상 불멸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초기의 로마】 로마는 인도 유럽계의 고대 이탈리아인에 속하는 라틴인과 사비누스인의 일부에 의하여 BC 7세기 무렵 티베리스강(현재의 테베레강) 하류의 라티움 땅에 건설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건국자인 로물루스(BC 753 즉위) 이래 7대의 왕에 의해 지배되었고, 마지막 3대의 왕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초기의 로마가 왕제(王制)를 채택하고, 그 말기에 에트루리아인이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왕은 군사·정치·제사(祭祀)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강력한 임페리움[命令權]을 가졌으나, 사실은 원로원·민회(民會)가 이것을 제약하여 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시민은 세 개의 트리부스로 나뉘고, 각 트리부스는 다시 10 클리어로 나뉘었다. 이 체제는 정치적·군사적으로 초기 로마의 근본을 이루며, 민회도 클리어회(會)의 형태로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 후 중장보병제(重裝步兵制)가 보급되자 재산의 다과를 기준으로 하여 종군권(從軍權)·참정권을 계급화한 재산정치적인 병원회(兵員會:켄투리아회)는 더욱 중요한 민회가 되었다. 시민에게는 파트리키[貴族]와 플레브스[平民]의 구별이 있어, 파트리키의 여러 씨족은 많은 클리엔테스[被保護民]를 소유하고 있었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를 구별한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역사가 분명해진 시대에는 파트리키란 특정한 가계에 속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 이외의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영직(榮職)에 있더라도 파트리키가 될 수 없었다.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인(人) 왕의 압박이 심해졌을 때, 왕을 국외로 축출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주체도 바로 이들 파트리키였다. 왕제폐지 직후의 시대에 로마의 정치조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제폐지에 이어 정원 2명, 임기 1년의 콘술이 선출되어 국가 최고의 지위에 오르고, 비상사태에는 임기 반 년, 정원 1명의 딕타토르[獨裁官]를 두었다고 하나, 실제로 그와 같은 상태는 BC 4세기 전반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공화제의 초기는 로마의 정치제도가 앞으로 서서히 형성되어가려는,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기간에 지금까지 왕이 지니고 있던 절대적이고도 무제한적인 ‘명령권’에 여러 가지 제한이 가해지게 된 것이다. 즉 명령권 보유자를 민회에서 뽑아 그 정원을 복수로 하여 서로 간섭·견제하도록 하고, 또 임기도 1년으로 한정하여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 등 명령권의 운용에 대한 제한체계가 공화제의 조직으로서 완성되어 갔다.

【신분투쟁】 한편 공화제 초기에 갖가지 제도들이 어떻게 되었든 국가의 지배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파트리키였으며, 플레브스는 정권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플레브스의 대다수는 파트리키의 억압하에 있었다. 즉 플레브스는 해마다 종군하게 되어 있어 생업인 농업에 전념할 수가 없었고, 또 외적의 침입으로 소유지는 황폐화되었으며, 더구나 무거운 세금 때문에 파트리키에게 빚을 지게 되고, 그 이자때문에 드디어는 채권자인 파트리키에 의하여 몸을 구속당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플레브스는 정치적·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하여 파트리키에 대하여 격렬한 신분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투쟁과정에서 생겨나 그 주역으로 활약한 것이 호민관(護民官)이었다. 호민관은 BC 494년의 ‘성산사건(聖山事件)’ 때에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마침내 파트리키에게도 승인을 받아 그 ‘신성불가침’의 권력에 의하여 플레브스의 자위(自衛)와 투쟁을 지도하였다. 또 플레브스 자신들도 성산사건을 계기로 하여 평민단(平民團)으로서의 기구를 형성하고 ‘국가 속의 국가’로 불릴 만큼 독자성을 가지는 존재가 되었다. 호민관에게 통솔된 플레브스의 첫번째 뛰어난 투쟁성과는 ‘12표법(十二表法)’이라고 불리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의 성립·공개이다(BC 450?). 이에 따라 종래 귀족에 의한 법률지식의 독점이 깨어져 일단 귀족과 평민에게 균등하게 법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법에는 귀족과 평민의 혼인을 금지하는 명문이 있어, 이것이 극단적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심한 반대에 부닥쳐 BC 445년에는 호민관 카누레이우스의 제안에 따라 이 금지는 해지(解止)되었다. 이에 따라 평민 가운데 유력한 자는 로마의 파트리키 명문과 혼인관계를 맺어 차차 자신의 지위를 높여가게 되었다.

【노빌리타스의 지배】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BC 367년의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法)에 의하여 플레브스가 파트리키와 동등하게 콘술에 취임할 수 있게 되어 플레브스의 정권참여가 확정된 일이다. 이후 수십년 사이에 다른 주요관직도 플레브스에게 개방되어갔다. 이 시대 이후 로마 지배층을 형성한 것은 에키테스[騎士]라고 불리는 부유한 신분이었다. 당시 고급관직은 명예직으로서 봉급이 없는 데다 많은 출비(出費)가 요구되었으므로 적어도 에키테스로 꼽힐 만큼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관도(官途)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키테스 가운데서도 정치가·장군이 되는 것은 특정가문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사실상 거의 세습적으로 관도에 오르고, 어느 정도 이상의 높은 관직을 지낸 뒤 원로원의 종신의원이 되었다. 원로원은 정치적 전문가를 망라하는 곳으로서 고대 ‘정치인’ 사이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 권위에 의한 지배의 안정이 공화제의 전성기(全盛期)를 특징짓는다. 그러나 콘술·딕타도르라는 국가 최고의 관직은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한정된 노빌리타스라고 불리는 소수의 가문에 독점되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공화제는 노빌리타스를 정점으로 하는 원로원의 권위에 이끌려 민회를 결정기관으로 하고, 정무관직(政務官職)을 집행기관으로 하는 부유한 계층의 지배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의 정쟁(政爭)은 주로 선거전과 입법의 두 가지 형태로 행하여져 그 어느것도 민회의 투표에 의하였으므로 정치가들은 유권자인 일반시민의 지지를 구하여 그들과 사적인 은고관계(恩顧關係)를 맺게 되었고, 이러한 은고관계로 이루어지는 피호민(被護民)을 새로운 의미에서 클리엔테스라 불렀다. 그 뒤 로마 정치사는 여러 당파 사이의 세력투쟁으로 충만되지만, 이들 여러 당파의 통솔자는 노빌리타스 중에서도 특히 다수의 군소 정치가를 수하에 두고 광대한 클리엔테스를 거느리는 실력자였으며, 이들은 국가의 ‘제1인자들’로 불렸다.

【이탈리아의 통일】 로마는 왕제시대에 인접국가를 제패하였고, 왕제폐지 직후의 시대에는 차차 쇠미해지는 듯했으나, 그 후에도 착실히 세력을 넓혀 BC 4세기 후반에는 라티움 통일에 성공하였다. 또한 BC 4세기 후반부터 BC 3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 중·남부 산악지대의 삼니움족과 싸워 항복시키고, BC 3세기 전반에는 남이탈리아의 타렌툼과 싸웠다. 타렌툼은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의 도움을 얻어 로마군을 크게 괴롭혔으나, 로마는 고전 끝에 피로스를 이탈리아에서 퇴각시켰다. 이리하여 로마는 BC 3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세력하에 두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탈리아의 각 공동체에 대해 내정면에서 자치를 허용하고, 다만 군사·외교의 주권만을 쥐고 있었다. 이윽고 이탈리아반도는 전승국 로마를 맹주로 하는 일대 군사동맹체로 완성되었으나, 이 군대는 로마시민이 정규 군단을 편성하는 데 대하여 동맹국은 별도로 편성된 보조군이 되어 로마 시민의 지휘에 따르게 하였다.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넘어 해외로 진출하였을 때에도 처음에는 그러한 형태의 군대였다.

【로마와 지중해 세계】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시칠리아섬에서 카르타고와 충돌, 이로부터 로마의 지중해 지배에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BC 9세기에 세워졌고, 특히 BC 6세기 이후는 서부 지중해 최대의 상업민족(商業民族)으로서 활약하고 있었으나, BC 264년부터 BC 201년에 걸친 제1·2차 포에니전쟁에 의하여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서부 지중해의 패권(覇權)을 완전히 탈취하였다. 또 당시 지중해 세계의 동부에서는 여러 헬레니즘 왕국, 여러 도시가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로마는 여기에도 개입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시리아 왕국·아이톨리아 동맹 등과 싸워 이 방면에서도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프로빈키아(屬州)라는 형태로 해외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 전체의 국제정치도 로마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노빌리타스의 지배가 확립됨과 더불어 로마에서는 과두정치적(寡頭政治的)인 사고방식이 뿌리를 뻗어, 현 체제에 충실한 자는 ‘훌륭한 인사(人士)’라 하였고, 특히 현 체제의 정상에 선 보수파 족벌집단은 ‘최량의 일족’이라 불렸다. 또 긍지 높은 지배계층에서는 ‘위엄 있는 한가(閑暇)’가 존경을 받고, 위엄 없는 우민(愚民), 한가하지 않은 빈민에게는 절대로 정치를 맡기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은 로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로마의 지중해 진출에 의하여 지중해 세계에 널리 강요되었다. 즉 로마는 새로운 세계로 진출하여 거기에 세력을 펴면 원주민 사회의 토착 지배계급에 대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를 유지시키고자 하였으며, 또 로마의 손으로 원주민 사회의 정치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혁하여야 할 기회가 있을 때에는, 부유한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부여하였다. 또한 각지의 지배계급도 지중해 세계에서의 로마의 압도적 우월 앞에 자진하여 로마와 손잡음으로써 자기 지위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지배층 중심 체제에 대하여 지중해 세계의 일반 민중은 반(反)로마적일 때가 많았다. 특히 각지에서 일반민중 사이에 용솟음치는 ‘변혁’에 대한 욕구(특히 借用金의 말소, 토지 재분배 등에 대한 요구)가 강력하여, 로마는 그들과 결탁된 정치세력과 자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원주민 사회의 ‘제1인자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하나는 로마와 결탁하고, 둘은 로마 이외의 국가와 결탁하고, 셋은 자국의 민중과 결탁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 당파(黨派)가 형성되었다. 원주민 사회의 여러 당파의 대립·상극(相剋)은 부유한 계급으로 이루어진 친(親)로마파의 우세 속에 전개되어 로마가 해외 경영을 진척시킴에 따라 로마의 ‘제1인자들’의 여러 당파는 전(全)지중해적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카이사르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로 불렀으나, 이미 BC 2세기에 지중해는 거의 로마인의 바다가 되었고, 로마의 원로원이나 원로원의원은 지중해 세계의 주민에게는 신(神)과도 같은 존재였다.

【공화제 말기의 위기】 그러나 로마의 지배계층이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로 웅비할 때, 로마의 대외 발전이 이탈리아에 끼친 경제사적 반작용은 심각한 것이었다. 전쟁 포로의 형태로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노예를 사용하여 부유한 지배계급의 대토지 소유가 날로 발전하는 한편, 새로이 로마에 굴복한 해외 각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값싼 곡물은 이탈리아의 농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각지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은 병사로 출전한 이탈리아 소농민의 생활을 파멸로 몰아넣어 수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무산계급으로 떨어져 도시로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과두정치가(寡頭政治家)는 진정한 위기를 통찰하지 못하고 자기와 자기 당파의 이익과 명예만을 탐하였다. 이리하여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로마의 발전도 시민간의 빈부차(貧富差)를 심화시키고 중소농의 몰락에 의한 군사력의 위기를 불러 로마는 대내적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희생시켜 빈민에게 토지를 주어 중소농민을 재생시키고자 꾀하였으나 실패에 그치고 횡사하였다. 그들의 법안은 그 자체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으나 그들의 활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즉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공동화(空洞化)하였던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 제도와 민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치가의 활동 패턴으로서, 정치적 결정은 원로원의 권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최량의 일족’으로 불리고, 그것이 민회의 결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포풀라레스(평민파)’정치가로 불렸다. 배타적인 족벌정치가 속에 포함되지 못한 혁신파 정치가는 ‘포풀라레스’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공화제 말기의 ‘최량의 일족’으로는 술라·키케로 등이 있으며, ‘민중파’에는 마리우스·카이사르 등이 나타났다. 그라쿠스 형제가 활약한 10여 년 뒤, 포풀라레스의 마리우스가 나타나 로마의 국방 위기문제를 들고 나섰다. 로마 당국은 이전부터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는 병사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정의를 축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BC 107년에 병제개혁(兵制改革)을 단행, 프롤레타리아를 지원병으로서 채용한다는 마지막 단안을 내려, 이후 이것이 종전의 징병보다도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장군과 사병을 특수한 신의관계(信義關係)로 결속시켰다. 즉 장군은 병사를 그 세력하에 보호함과 아울러, 무산자(無産者)인 그들이 퇴역한 뒤 노후 생활에 곤란을 겪지 않도록 부동산 분여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병사는 무력으로써 장군을 지원하는 외에 민회의 투표권에 의하여 장군(정치가)의 정치행동의 큰 지지집단(支持集團)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공화제 말기의 ‘사병(私兵)’이라 불리는 집단이다. 이후 로마 내정에는 사병을 거느린 무력투쟁이 많아진다.

【지중해 세계의 통합】 그러나 광대한 영역에 걸친 로마의 방대하고 어려운 군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는 마리우스의 병제개혁만으로는 부족하여, 마침내 외인부대가 보조군으로서 쓰이게 되었다(로마 판도 안에 사는 자라도 로마 시민권이 없는 자는 외인으로 불린다). 외인부대 역시 개인관계로 로마의 장군과 결탁하게 되었고, 장군으로서도 명장의 권위를 소중히 하면서 평소부터 원주민 전사 계급의 지도자층인 왕후귀족에 대한 보호자적(保護者的) 지위를 확립하고자 힘썼다. 이 무렵부터 로마의 ‘제1인자들’은 원주민 전사 계급의 리더로서 귀족층과 결탁함으로써 그들의 군사력을 로마의 국방조직 속에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로마의 주도권에 의해 지중해 세계의 전사계급을 통합하려는 색채가 짙어 갔다. 동방 여러 도시의 ‘제1인자들’도 그와 같은 구실을 하였으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도시화되지 않은 지역이 넓고, 그런 지방의 왕후귀족은 여러 가지 형태로 종사(從士)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인은 이것을 그들의 클리엔테스(피보호자)라고 불렀는데, 로마의 유력자들은 이 왕후귀족들을 자기의 클리엔테스로 끌어들임으로써 중층적(重層的) 클리엔테스 관계를 맺어 넓게는 원주민 전사층(戰士層)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즉 ‘로마의 원로원의원-외지의 제1인자들-그 사회의 일반민’이라는 3단계의 상하 결합을 기본적인 축으로 하여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여 갔다(뒤에 로마 세계의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이들 ‘제1인자들’은 도시 귀족이 된다). 더구나 원로원의 의원들은 저마다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를 좌우하는 클리엔테스를 가지는 한편, 그 자신들 사이에도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맺어, 유력한 의원 밑에 군소 의원이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원로원 안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자는 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지중해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제정 성립의 진통】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지중해 세계의 지배층의 통합이 실현되기 전에 극복해야 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로마의 낡은 도시국가적 제도였다. 이를테면, 도시국가시대의 직접민주정치의 전통을 물려받아 전시민의 참가를 전제로 한 민회가 로마 최고의 결정기관으로서 엄존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 국가로 팽창한 로마의 현실에는 맞지 않았다. 또 이 무렵부터 정치적으로 큰 세력이 된 실업가로서의 기사(騎士) 신분을 가진 자는 징세청부인(徵稅請負人) 또는 고리대금업자로서 속주민(屬州民)을 착취하였다. 지중해 세계 전체에 눈을 돌리는 정치가는 로마의 시정(市政)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가와 대립하여 보수적인 원로원에 반역하고 오히려 민회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지중해 세계 전체의 ‘부유한 자’를 살리려는 정치가는 공교롭게도 로마의 ‘부유한 자’의 이해를 대표하는 그룹과 충돌하였고, 그 때문에 로마 시정(市政)에서는 민중파가 지향하는 방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여러 세력이 뒤엉켜 격렬한 당파싸움이 일어났으며, 원로원이나 민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다시 사병(私兵)의 무력을 사용하여 지중해 세계의 동서에서 처참한 혈투를 전개한 것이 공화제 말기의 내란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BC 80년대의 마리우스파와 술라파의 싸움을 제1차 내란이라 부르고, BC 40년대 전반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의 싸움을 제2차 내란이라고 부른다. 아뭏든 제정(帝政) 성립 전(前) 1세기의 로마사는 크고 작은 격렬한 정쟁(政爭)으로 일관하였으며, 이것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제1차 3두정치(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 및 제2차 3두정치(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레피두스) 시대를 지나 옥타비아누스의 당파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세력을 확립함으로써 제정(帝政)이 확립된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및 지중해 세계의 ‘제1인자들’의 으뜸 가는 자로서 ‘제1인자[元首]’의 정치를 펼치는데, 이것을 보통 제정이라고 부른다.

【제정의 개막】 BC 44년 카이사르 암살 후 전개된 내전의 궁극적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BC 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었고, BC 27년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 특별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공화제국가를 회복시켰다. 이에 대하여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주었고, 이렇게 하여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적으로는 공화제를 재건하였으나 여러 가지 권한·권능은 아우구스투스 한 몸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체제는 원수정치(元首政治)라 불리며, 그는 호민관 직권, 프로콘술 명령권, 콘술 명령권 등 공화제적 관직에 부수하는 권한을 종신토록 보유하고 전제국(全帝國)의 약 절반에 달하는 속주(屬州)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제국 최대의 부호인 동시에 사병(私兵)이나 다름없는 대규모 상비군을 거느린 원수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은 황제 이상의 것이 되었으며, 도시국가 이념과는 상반되는 개인숭배가 생겨나서 평화와 질서를 회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새로운 평화세대의 구세주로서 숭앙받게 되었다. 한편 체제의 영속화(永續化) 문제는 원수가 되는 기본적 원리와는 반대로 세습의 원리, 즉 왕조적인 것으로 변모하여 후계자 선택에 부심하던 아우구스투스도 결국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의 한 사람인 티베리우스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음침하고 시의심(猜疑心)이 강한 티베리우스(재위 14∼37) 시대는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으나, 속주 통치와 제국관료(帝國官僚)의 기구는 정비되었다. 9년 아우구스투스황제 시대에 토이토부르거발트전투에서 입었던 패전의 상처와 동요도 일소되고 변경의 군사정세도 호전되었다. 동쪽은 유프라테스, 북쪽은 다뉴브와 라인강이 자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제3대 칼리굴라(재위 37∼41)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엄청난 낭비를 거듭하여 국고는 바닥이 나고 시민의 재산몰수가 계속되었으며, 또 자신의 신격화를 극단적으로 추진하였으므로 황제예배(皇帝禮拜)에의 길을 한 걸음 빠르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가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된 뒤, 황제에 추대되어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재위 41∼54)는 제국(帝國)의 도시화,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측신제도(側臣制度)를 제도화하여 일종의 궁정관료제도를 완성하고, 제국의 행정·재정조직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재위 54∼68)는 차차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어 모친과 비(妃)와 처남을 죽이고, 로마시에 불을 질러 그 죄를 그리스도교인에게 씌워 많은 그리스도교도를 살해하여 일종의 공포정치를 폈다. 제국의 동쪽 변경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각지로 침투하여 들어오고, 베드로·바울로의 순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네로의 폭정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제국 각지에서 4명이 황제를 지칭하였으나, 유대 반란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되찾았다. 유대 진압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계승되어 70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는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원로원과의 협조 아래 거대한 관료조직을 정비하여갔다. 제위(帝位)는 티투스(재위 79∼81)·도미티아누스(재위 81∼96)로 계승되었으나, 전제군주적인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이 왕가의 지배도 끝이 났다.

【5현제시대】 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帝位)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 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영국의 역사가 E.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절찬한 5현제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 96∼98), 최초의 속주(屬州)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 반평생을 속주순행(屬州巡幸)에 바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경건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는 각각 전(前) 황제의 양자가 되어,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고 비교적 평화가 계속된 데에 있다. 특히 트라야누스는 동방 나바타이왕국을 합병한 데 이어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아라비아(나바타이)·메소포타미아·아시리아 등의 속주를 추가하여 제국의 판도가 가장 넓은 시기를 이루었다. 북쪽은 라인·도나우 두 강을 자연적 국경으로 하고, 도나우강 하류에서는 다키아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사막, 남쪽은 사하라사막에까지 판도가 미쳤다. 다음의 하드리아누스 때에는 수세(守勢)로 바뀌어 제국 각지를 순수(巡狩)하면서 국경방위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속주의 통치조직·제국행정제도·관료제도·군제(軍制) 등을 개선·정비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들어와 동부 국경에서는 파르티아군의 침입을 받고, 제국 각지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인구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황제는 동분서주하면서, 특히 북쪽 변경 수비에 몰두하였다. 더구나 다뉴브강 중류 유역에서 밀려온 게르만인의 침입을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그들 일부에게 제국 내의 토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제국 방위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번영과 싹트는 위기】 5현제시대, 즉 로마의 평화시대는 ‘도시화’ 정책이 침투하고 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제국 각지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져, 속주민에게는 널리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고, 로마문화가 속주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이리하여 도시의 번영은 2세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다다랐다. 중앙에 광장을 두고, 신전·바실리카·극장·원형극장·공공목욕탕·수도를 구비한 로마식 도시가 세워지고, 도시문화의 주체를 이룬 것은 도시의 부유층이었다. 그들은 도시참사회(都市參事會)를 구성하고, 도시의 관리[政務官]에 취임, 무보수로 도시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한편 제국정부는 도시 부유층의 경제활동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정책을 취하여 제국은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하였다. 제국 각지의 특산품 거래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안정된 통화의 뒷받침으로 게르마니아·인도·중국과의 교역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위기는 이미 5현제시대의 제국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제국의 번영을 노예제에 의존하여 온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생산품의 대부분을 수출하여오던 공화제 말기부터 제정 초기의 이탈리아 노예제 대농장 경영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노예는 노동력인 동시에 자본투하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공급원의 감소, 투하자본으로서의 불안정, 상품판로의 정체(停滯) 등 노예제사회를 뿌리째 뒤흔드는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노예제 자체가 지니는 비능률성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순이 따라다녔다. 확대 정책에서 수세로 전환하던 제국의 정책과 더불어 이미 그 징후를 보이고 있던 노예제 농장경영에서 소작제로의 이행도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다음에는 산업의 원심적(遠心的) 경향, 즉 중심(重心)의 이동과 경제권의 분립, 게다가 시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 수송의 난점(難點)과 신용의 불확실성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또 ‘고대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던 속주의 징세청부와 고리대금자본의 형성·발전이 두절되고, 확대재생산도 불가능하여 속주의 각 블록 경제권 번영에도 불구하고 차차 자유로운 사기업이 저지되어갔다. 더구나 시장이 한정되어 있었던 점, 즉 건전한 사회적 중산층이 형성되지 않아, 일반시민이 구매자가 되는 사회가 이룩되지 못했던 점은 번영의 저변이 매우 취약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대토지소유제의 보급은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촉진시켜 경제의 중심이 도시에서 농촌 및 사유지로 옮아갔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도시의 노화현상이며, 나아가서는 농촌 및 사유지에서의 계층의 분화였다. 이리하여 로마제국의 세포라 할 도시들이 그 기능을 잃어가는 한편 소작인에게 가하여지는 부담도 점차 무거워져갔다.

【세베루스왕조와 군인황제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아들 코모두스(재위 180∼192)가 전제정치를 행하여, 그가 암살된 후 혼란을 수습한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였다. 동쪽에서는 강력한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맞서는 한편, 안으로는 수많은 모순을 지닌 제국의 위기에 대처한 것이 세베루스왕조의 여러 황제였다. 먼저 북아프리카 출신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재정의 재정비를 위하여 통제경제에의 제일보를 내디뎠다. 그의 뒤를 이은 카라칼라(재위 211∼217)는 공동통치자인 동생을 살해한 뒤 212년에 칙령을 공표하여 제국 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하였다. 세수(稅收)의 증가를 노린 칙령이었다고도 보이나 이 칙령에 의하여 로마 시민권은 제국 전체에 확대되고, 화폐가치의 하락, 인플레이션의 격화는 멈출 줄을 몰라 안정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세베루스왕조 시대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군대와 관료가 지배하는 국가체제가 분명하게 형태를 갖추고, 통제경제와 인플레이션이 진전되어 제국의 구조가 변하여가는 시대였다. 이 새로운 지배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적 이데올로기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에 의한 태양신의 국교화(國敎化)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났다. 세베루스왕조 최후의 황제 세베루스알렉산더(재위 222∼235)가 살해당한 뒤 약 50년 동안은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황제’시대로 바뀐다. 페르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던 발레리아누스(재위 253∼260)의 아들 갈리에누스(재위 253∼268)는 황제 직속의 기동대와 독립기병대를 창설하여 군의 주력부대로 삼았고, 제국을 중흥시킨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는 기병을 한층 강화하여 외세의 압력에 대처하고 대상도시(隊商都市) 팔미라를 지배하에 두는 한편 서쪽 갈리아의 지방정권 독립을 취소하고 제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이 통제적 강제국가체제, 더구나 이민족까지 포함한 혼성국가에서는 제권(帝權)의 절대화가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신총제이념(神寵帝理念)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로마제국은 3세기에 대외적·대내적으로 동란시대를 겪게 됨으로써 사회·경제·정치이념의 모든 면에서 고전·고대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갔다. 이 변질의 시대에 제위에 오른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였다. 한편 그리스도교 박멸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조직적인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3세기의 일이었다. 이미 네로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씌우기도 하였고,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는 그리스도교도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여졌다. 또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는 민중의 선동에 의하여 자주 일어났으며, 본래는 외래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왔던 로마제국 정부도 분명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250년 데키우스황제의 포고, 즉 모든 주민은 로마의 신에게 희생을 바쳤다고 하는 증명서를 지녀야 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자 그리스도교로부터 많은 이탈자를 낳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257년 및 258년에 발레리아누스에 의한 박해가 가해졌다. 그러나 그 아들 갈리에누스는 교회에 대하여 신교(信敎)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재건】 내란을 수습한 제국에 평화를 가져온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는 변경 수비를 또다시 굳게 하고 통치기구를 정비, 로마를 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로 바꾸었다. 286년 부제(副帝)인 막시미아누스를 정제(正帝)로 승진시켜 그에게 서방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동방의 통치를 맡았으나 293년에는 다시 부제를 각각 새로 임명하여, 사분통치제(四分統治制)를 확립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군대의 재건, 재정의 재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301년에는 최고가격령을 공포하였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현물징발을 하나의 제도적인 장치로 하는 세제(稅制)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모든 부과금(賦課金)은 공평하게 토지 단위(iugum)와 인두(人頭) 단위(caput)로 할당되었다. 또 행정상의 개혁으로는 속주 수를 배로 늘리고 제국 전체를 관구(管區)라고 이름 붙인 12개의 속주 그룹으로 재편성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전제군주정체를 한층 견고하게 한 것은 황제 퇴위 후 내란을 수습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였다. 황제는 312년 하늘에서 십자가의 표지(標識)를 보고 대립자 막센티우스를 격파, 로마로 입성한 다음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회담, 그리스도교 공인의 칙령(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황제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교의논쟁(敎義論爭)의 해결을 꾀하였다. 이어서 330년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를 개설하여 제국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을 더욱 더 굳건히 하였다. 황제는 라인·다뉴브의 국경선에서 게르만인을 격퇴하는 한편, 게르만인을 제국 영내에 정주하게 하여 국가 방위를 맡기기도 하였다. 전제군주 정치하에서 로마 시민의 직업 세습(世襲)과 강제화가 크게 진전되고, 또한 세제의 강화와 함께 징세의 임무를 맡는 도시참사회원 신분의 세습화도 촉진되었다. 더구나 농촌에서는 소작인의 이동이 금지되어 ‘콜로누스’로서 신분상 많은 구속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국에서 자유로운 시민생활은 사라지고 군사국가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과 일족(一族)의 내분으로 제국은 황폐화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이끌어 가던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F.C.율리아누스(재위 361∼363)는 전통적 제의(祭儀)와 이교(異敎)를 부흥시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로마 고제(古制)의 회복을 꾀하였으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그의 치세는 단명으로 끝났다.

【게르만의 민족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율리아누스가 죽은 뒤, 동방에서나 라인·다뉴브 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되었다. 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375)와 그의 동생 동제(東帝) 발렌스(재위 364∼378)의 활약도 소용없이 서부에서는 알라만인(人)이 침입하고, 갈리아의 바가브타에란(亂)도 격화하였으며, 브리타니아·파노니아·북아프리카 등도 어지러웠다. 한편 동부에서는 365년 고트족(族)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흉노(匈奴)에게 쫓긴 서(西)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 전토를 짓밟고 마침내 발렌스 군대를 괴멸시켰다. 내외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국가화하였으나 그 군대는 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停滯)는 극도에 달하였다. 고트족은 한때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에게 쫓겨났으나 결국 382년의 협정에 따라 제국 영내에 정주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동안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교리논쟁과 종교정책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380), 전통적인 제의를 금지, 이단을 억압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제국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395), 제국은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리되어 동반부는 아르카디우스, 서반부는 호노리우스가 영유하였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정치의 실권을 게르만인 무장(武將)인 스틸리코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뒤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정(政情)은 어지러웠다. 410년에는 알라리크왕이 거느리는 서고트족이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그 뒤 서고트족은 방향을 돌려 에스파냐로 이동하였으며, 역시 게르만인인 반달족은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각각 왕국을 세웠다. 또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리아에 침입하고, 색슨족은 브리튼섬으로 건너갔다. 한편 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가 서고트와 프랑크의 힘을 빌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격퇴하였으나(451), 455년 로마시는 반달족에게 약탈당하였다. 그 후에는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의 정치적 실권을 쥐었으며, 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하여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476). 한편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에 비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활력이 있었고, 통치기구도 정비되어 있었으므로 서쪽의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여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즉 로마제국의 정통으로서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의 이념과 전통이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800년 샤를마뉴의 대관(戴冠)은 로마제국의 부흥을 의미하였고, 또 ‘로마황제’라는 호칭은 오토 2세 이후 줄곧 사용되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로 알 수 있듯이 황제들은 로마적·그리스도교적 전통의 보호자로서 그 권위를 지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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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Epikouros, BC 342?∼BC 271)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사모스섬[島] 출생. 35세 전후에 아테네에서 학원을 열었다. 그 학원은 ‘에피쿠로스 학원’이라 불렀고, 부녀자와 노예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각자 형편에 맞는 기부금을 내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함께 우정에 넘치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문란하지 않은 생활(아타라쿠시아) 실현에 노력하였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원자론(原子論)에 의하면 참된 실재(實在)는 원자(아토마)와 공허(케논)의 두 개뿐으로서, 원자는 불괴(不壞)의 궁극적 실체이고 공허는 원자가 운동하는 장소이다. 원자는 부정(不定)한 방향으로 방황운동을 하는데, 이것에 의해 원자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나서 이 세계가 생성(生成)한다. 그러므로 세계에 있는 모든 것, 즉 인간이나 신(神)들이나 모두 원자의 결합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인식(認識)이란 감각적 지각에 지나지 않고 물체가 방사(放射)하는 원자와 감각기관과의 접촉에 의해 성립한다.

이 자연학에 의하여 그는 죽음과 신들에 대한 공포를 인류로부터 제거하려 하였다. 죽음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산일(散逸)이며, 죽음과 동시에 모든 인식(자기)도 소멸한다. 신들도 인간과 동질의 존재이며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며, 명예욕·금전욕·음욕(淫慾)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공공생활의 잡답(雜踏)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것, 빵과 물만 마시는 질박한 식사에 만족하는 것, 헛된 미신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우애(友愛)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것 등이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주의의 골자였다. 《자연에 대하여》 등 300여 권에 이르는 저서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산일되고 단편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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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 school)

 

  에피쿠로스의 학설을 신봉한 파. 에피쿠로스가 죽은 뒤 이 학파는 약 600년간 계속되었으나, 그동안 스승의 학설을 변경하거나 발전시킨 사람은 없으며, 오직 한 사람 눈에 띄는 제자로는 루크레티우스(BC 94∼BC 55?)가 있을 뿐이다. 그는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책을 써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및 쾌락설을 상세히 논하였다. 에피쿠로스 자신의 저서는 대부분 산일(散逸)하여 겨우 단편적(斷片的)인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아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이 책에 의해 후세에 전해진 셈이다. 그의 쾌락주의는 감각적인 쾌락을 물리치고 간소한 생활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는 데 있었다. 따라서 원자론을 기초로 하는 그의 방대한 체계는 이 윤리적 생(生)의 실현을 초점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학파는 쾌락주의라는 기치(旗幟) 때문에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아 오다가, 겨우 근세에 와서야 P.가생디가 에피쿠로스 철학을 부흥, 이것이 J.로크를 통해 영국 경험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쾌락주의자라는 뜻으로 쓰이는 ‘에피큐리언’은 원래 ‘에피쿠로스의 무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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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주의(hedonism)

 

  쾌락을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의 목적이라 생각하고 모든 행동과 의무의 기준으로 보는 윤리학의 입장. 행복주의의 한 형태로 키레네학파, 특히 아리스티포스는 순간적 쾌락만이 선(善)이라 하고 가능한 한 많은 쾌락을 취하는 데 행복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감각적·순간적 쾌락을 부정하고, 지고선(至高善)인 쾌락은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면서 아타락시아를 역설하고 쾌락의 질적 구별을 인정하였다. 금욕적인 생활을 한 에피쿠로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오해는 쾌락주의에 대한 편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의 이 두 학파는 쾌락주의의 두 전형이며 근대에 와서 벤담은 여기에 사회적 관점을 도입하였다. 그는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쾌락의 양적(量的) 차(差)에 바탕을 둔 쾌락계산(快樂計算)을 제창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였다. 또한 물질적 쾌락의 추구는 많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고 더 많은 고통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쾌락을 버리는 일이야말로 쾌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나오게 되는데, 이런 생각을 쾌락주의적 역설이라고 한다. 또한 미학(美學) 영역에서는 미적 쾌락을 미의 본질적 요소라고 하는 설을 미적 쾌락주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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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학파(Stoicism)

 

  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帝政)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개조(開祖)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세이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柱廊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애지(愛知:철학)는 논리 부문과 윤리 부문, 자연 부문으로 나뉘나,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애지를 구성하는 3요소가 된다. 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 애지(愛知)는 이러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의 연습이며, 이러한 재주를 갖는 사람이 현자(賢者)인 것이다. 그리고 현자의 지혜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충동’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병으로서의 정념(情念)이 있다. 이 정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데에 ‘활달한 삶의 흐름’이 있다. 스토아파의 현자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익이라고 불리는 비정한 금욕주의적 심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자연물(인간)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그대로의 자기의 ‘운명’을 알고,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써 본원(本源)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 바로 신 그것인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존재에서의 개별성(個別性)과 전체성(全體性)의 두 계기의 강조와 양자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 원리의 집성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철학원리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연구·논리학·인식론에서도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전통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를 많이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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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asceticism)

 

  인간의 정신적·육체적인 욕구나 욕망을 이성(理性)이나 의지로 억제하고 금함으로써 도덕이나 종교상의 이상을 성취시키려는 사상이나 태도. 금욕을 뜻하는 금제(禁制)가 따르는 연습·수련을 말하는데, 이에서 유래되는 금욕주의에는 2가지 경우가 있다. ①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을 단련시킨다는 본래의 뜻과, ② 육체에 대한 불신(不信)에서 몸을 파괴하거나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금욕주의의 역사에는 이 두 가지 전혀 다른 견해가 섞여 있다. 원래 금욕주의는 의지가 생활 앞에 내세우는 이성의 명령과, 생활 속에 있는 자연적인 여러 가지 욕구와의 모순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모순은 당연히 고통이나 불쾌감을 수반하게 되므로,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육체를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단련시키거나, 영혼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아 이를 제거하려고 한다.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이원론(二元論)은 인생을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싸움터로 보고 후자의 소멸에 의한 전자의 승리를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와 결부된 금욕주의가 이원론적 금욕주의이다. 여기서는 이성만이 선(善)의 근원이며, 감성(感性:충동·욕망)은 악의 인연(因緣)으로 보고, 후자의 억압이 도덕생활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감성 그 자체를 악으로 볼 때에는 금욕의 정도가 극단적으로 기울어 마침내 고행(苦行)을 적극적인 선(善)으로 생각하는 입장이 된다. 피타고라스파(派), 퀴닉파, 스토아파, 중세의 수도원 생활, 쇼펜하우어의 윤리설, 간디의 순결사상 등은 모두 이런 뜻의 금욕주의 계통에 속한다. 한편, I.칸트는 수도사의 금욕은 덕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광신적 속죄(狂信的贖罪)를 꾀하는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하여 본원적인 도덕적 금욕이 있다는 것을, 스토아파의 “인생의 우연한 화악(禍惡)에 견디고 쓸데없는 오락이 없어도 지낼 수 있도록 길들여라”라는 격언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도덕적 금욕은 자기 자신을 도덕적으로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양생법(養生法)으로서, 자연충동에 대한 투쟁과 그 지배가 인간을 건전하게 만들고 재차 획득한 자유의식이 사람을 기쁘게 해준다고 강조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일부 사람만이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된다는 J.칼뱅 등 예정설(豫定說)과 결부시켜, 자기가 선택되었다는 확증을 일상생활에서 구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은총에 의하여 주어진 재화(財貨)의 관리자, 영리추구의 기계로서의 의무를 지게 되며, 금욕은 목적으로서의 부(富)의 추구를 악(惡)이라고 배척하면서도 부의 추구를 직업노동의 성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팽창되어가고 있는 시민사회의 윤리로서 반권위적 성격을 가지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절대주의적 봉건사회에 항의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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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疑學派(skeptikoi)

 

  스토아학파·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을 이상으로 한 헬레니즘시대의 철학파. 그러기 위하여는 회의(skepsis)에 안주(安住)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인식은 모두 상대적이어서 진리를 알 수는 없고 어떤 주장에도 반드시 반대 주장이 성립된다고 논하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판단중지(判斷中止:epoke)’를 권장하였다. 퓌론과 그의 제자 티몬(古懷疑學派)이 제창한 이 학설은 아르케실라오스, 카르네아데스 등의 신(新)아카데메이아를 통하여 키케로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또한 아이네시데모스, 아그리파, 섹스투스 엠페이리코스 등의 신(新)회의학파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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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플라톤의 전통에 입각하여 2∼6세기에 유럽에서 흥성하였던 그리스 철학의 일파를 가리키는 사상사상(思想史上)의 명칭. 창시자는 암모니오스 사카스(175?∼242)이고, 대성자(大成者)는 플로티노스(205?∼270)이며, 그 밖에 아멜리오스·포르피리오스·이암블리코스·테오드로스·프로클로스 등이 잘 알려졌다. 만물의 본원인 ‘일자(一者)’로부터 모든 실재가 계층적으로 ‘유출’하여, 보다 낮은 계층은 그 상위의 것을 모방하며, 보다 복잡·불완전하다. 또 만물은 ‘관조(觀照)’에 의해 일자에 계층적으로 되돌아가려고 애쓴다. 이 상하 두 방향에의 운동이 실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인간도 이 운동에 의해 감각적인 것을 벗어나 일자로 향하며, 이것과의 직접적인 합일, 즉 ‘탈아(脫我)’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희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사상은 형성기에 있던 그리스도교에 받아들여져 오리게네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등 교부(敎父)뿐만 아니라, 후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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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세

 

  기독교(Christianity)

 

  1세기에 태어난 나자렛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종교. 불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를 이룬다. 원어(原語)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그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점과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인류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교의로 삼는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 교회·그리스 정교회(正敎會)·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그리스 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리스도교를 아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시대와 신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를 보인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영원하고 참된 진리를 내포한 종교이며, 보편적인 구원의 종교라는 두 가지 기본원리 아래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순전히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밝히려는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자존(自存)하는 신으로서, 그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하여 ‘사랑(agape)’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존재와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존재 그 자체로서의 사랑이다. 하느님은 그 사랑으로써 세상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이룩하는데, 그 사업은 바로 인류의 역사 속에 구현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와 구원 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역사 속의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었는데,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계약의 근거와 핵심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을 ‘사랑의 계약’이라고 한다. 본질이 선(善)이요 사랑인 하느님은 인간과의 계약에 절대적으로 충실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겨 계약을 파기했을 때에도 하느님은 사랑의 계약을 지켰다. 하느님은 그 계약의 실현인 인간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이 스스로 사람이 되었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4절에서는 이것을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셨다”고 표현하였는데, 이때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이 이 세상에 구현되는 원리로서, 이의 육화(肉化)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교를 알려면 가장 특징적인 신관(神觀)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느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은 신으로서, 그 자신이 3위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곧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의 3위로서, 이 셋은 각기 독립적인 위격(位格)이면서도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3위로써 하나의 하느님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이다. 3위는 하나의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樣式)의 차이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역사의 주인이요 심판자로서 구약성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었다. 아들로서의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살았고, 또 죽었다가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있는 예수그리스도이며,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생명의 힘으로 작용하고 활동하는 영적 존재이다. 이같은 삼위일체의 신앙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교가 곧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형상으로서, 그의 본질은 역시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함께 참여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구현하였으며, 그의 사랑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의 핵심이며, 본질을 이루는 원리이다. 이와 같은 교의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계시(啓示)한 것으로 믿는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 또는 자연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나, 자연계시에 의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부분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으로서, 다만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올바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종교(啓示宗敎)라는 특수성을 가지지만, 그 계시는 인류역사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또한 역사적인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인류 역사와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정신적인 기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 단체로 형성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정확히는 오순절(五旬節)의 성령 체험 이후 신앙심이 굳어진 사도들이 각지에서 전도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력(西曆)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起點)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기원 1년에 탄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최근, 사학자들은 유다 나라 헤롯대왕(BC 37∼BC 4?) 통치 말기에 실시한 ‘호구조사령(戶口調査令)’을 근거로 BC 4년경 출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에 의하여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종말신앙(終末信仰)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BC 6세기부터 바빌로니아·페르시아·그리스 등 외국의 지배를 받아 왔었다. 특히 BC 3세기 초부터는 그리스의 지배하에서 유대교가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까지 약탈당하였으며,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살되었다. BC 2세기 중반에는 반(反)그리스 전쟁으로 한때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을 하였지만, BC 63년에는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교도들은 그들의 유일한 신으로 믿고 있는 야훼신(하느님)이 그들 민족을 구하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의 세상은 얼마안가 끝이 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과 믿음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새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서 ‘메시아(Messiah)’가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 ‘메시아’의 원어는 헤브라이어의 마샤(mashiah)로서,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상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종말사상이 팽배해 있고, 그에 따라 메시아를 기다리는 열망이 높아 있을 무렵에 예수가 태어나서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福音)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 가르침의 중심사상은 바로 ‘사랑’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예수의 이 말 속에 그의 모든 가르침이 요약되어 있다. 예수는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여, 병든 사람과 불구자들을 고쳐 주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를 가까이 하며 죄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으며, 예수의 제자들도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따랐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신에 기초한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은, 율법주의에 묶여 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고, 마침내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을 자칭한다는 정치적인 반(反)로마 운동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사도들의 전도〉 하느님으로서 인성(人性)을 취한 예수는 신적(神的) 사랑의 극치를 보이는 죽음을 당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증거하고 구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부활신앙은 예수의 탄생·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의(敎義)가 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근거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사마리아에서 시리아·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예수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에 정착하여 초대 교회를 이끌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사도 바울로가 그들에게 합세하면서부터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것은 사도 바울로의 선교활동이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격한 유대교도로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두에서 활약하였으나, 마침내 결정적 계기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회심(回心)한 이후 열렬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인도 포함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민족의 범주를 벗어나 지중해 연안의 종교로, 세계종교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사도시대로부터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시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쌍방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 형성되었지만,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 같은 데서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바울로가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들에 의하면, 그 무렵에 이미 사제(司祭)로서의 감독(監督)·장로(長老), 부제(副祭)로서의 집사(執事) 등의 교직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대는 또한 신약성서(新約聖書)가 쓰여진 시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확립된 때이기도 하다.

【고가톨릭교회】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를 지나 2세기 이후에 교회의 조직이 정비되었다. 또 경전으로서 신약성서를 편찬하였고, 유대교에서 계승한 경전을 신약의 준비서로 보아 구약성서(舊約聖書)라 하여, 신·구약성서를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 채택하였다. 이 때부터 중세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회가 형성되기까지의 초대교회를 고(古)가톨릭교회라고 한다. 이 시기의 교회에 명확한 개념을 부여하여 교회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 키프리아누스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통일에 대하여》라는 저서 속에서, 교회는 지상에 세워진 유일한 구원기관(救援機關)이며, 교회의 주교(主敎)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적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주장하였다. 또 그리스도가 하나요 진리가 하나인 것처럼 교회도 하나임을 주장하였다. 그가 사용한 ‘카톨릭’이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카톨리코스(katholikos)에서 유래하는데, ‘전체적’ ‘보편적’ ‘공적(公的)’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로마교회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되어, 오늘날 ‘카톨릭’이라고 하면 곧 로마가톨릭교회를 가리키게 되었다. 고 가톨릭교회는 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이단을 배척하면서 정통신학의 확립을 추구하였다. 키프리아누스 외에 유스티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의 교부(敎父)들은 성서적인 증언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를 정립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노시스파(派)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派)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그들에 의하여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3위격(三位格)으로써 일체(一體)를 이룬다는 삼위일체 신학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325년의 니케아공의회(公議會)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본질에 있어서 하느님과 같은 신격(神格)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3세기 이후 교회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더욱 심하여졌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과 충돌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 문제였다. 그 무렵 쇠퇴하고 있던 로마 제국은 황제숭배에 의하여 국세를 만회해 보려는 의도로, 황제숭배를 국민의례로 강요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이 완강히 거부하자, 결국 전국적인 그리스도교 박해가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53∼260)는 가톨릭교회 그 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듯, 대규모의 박해를 감행하여 무수한 순교자를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인들은 더욱 단결하여 믿음을 지켰고, 교회를 키워 나갔다. 이렇게 되자 로마 제국에서는 회유책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는 313년에 밀라노칙령(勅令)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승인하였고,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선포하였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그리스(동방)정교회의 분리〉 국교로서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된 로마 교회는 교세를 확장하여 전체 교회를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의 5대 교구로 나누어 관할하였다. 이 중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의 세 교구는 7세기에 사라센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교구가 동서(東西) 양쪽에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두 교회는 각각 비잔틴제국과 게르만족 국가 사이의 상이한 정치상황 탓으로 서로 분리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는 황제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하는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를 따르고 있었고, 서방의 로마교회는 황제권과는 독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협조체제는 무너져 갔다. 이 후 11세기에는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케룰라리우스와의 정면충돌로 결정적인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교회는 로마교회와 갈라져 그리스정교회(正敎會)로 독립하였다.

〈교황권의 전성기〉 게르만 민족 중에서 중세 유럽 사회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프랑크족은 이미 5세기에 로마가톨릭교회로 개종하고, 교회와 제휴하여 그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교황의 지지를 얻어 카롤링거 왕조를 창시한 피핀은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벌하고 중부 이탈리아를 교황에게 헌납하였다(756).이것이 교황령(敎皇領)의 시초인데, 이러한 경제적 거점을 얻게 된 교황은 세속적으로도 서유럽 사회에서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황은 황제와 대립하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가 죽은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둘러싸고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여 굴복시켰다. 그 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교황파와 황제파가 서로 다투었으나, 결국은 교황권이 황제권을 완전히 제압하였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 1198∼1216) 때는 교황이 서유럽의 전 군주(君主) 위에 군림하였다. 이같이 교권(敎權)이 강대해짐에 따라,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부패와 세속화도 심화되어 갔다. 교황은 교황령의 지배자로서, 또 주교나 수도원장은 영주(領主)로서 세속적인 일에 관계하여,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게 되었다.

〈수도원의 개혁운동〉 교회가 부패되어 가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 본연의 영적(靈的) 생활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중심을 이룬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4세기경 이집트에서 비롯된 은둔생활에 그 기원을 두지만, 이것을 사회적 공동체로 성립시킨 사람은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이다. 그는 6세기에 몬테카시노수도원을 세우고, 청빈(淸貧)·정결(淨潔)·순명(順命)의 생활로써 하느님을 찬미하고 세상에 봉사하는 수도생활을 창시하였다. 10세기에 이르러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자는 운동은 이 베네딕투스파의 클뤼니수도원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그 후 11∼12세기에는 각지에 많은 수도원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창설한 프란체스코회(會)와 도미니쿠스가 창설한 도미니크회(會)가 유명하다. 이들 수도회는 사유재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탁발생활을 하는 가운데 마음의 청결을 유지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이들 수도회를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라고 한다. 수도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과 청빈생활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교 안에 신선한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으며, 학문연구와 사회봉사 등을 통하여 세계역사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교황권의 쇠퇴】 절정기에 이르른 교황권은 봉건영주의 호응을 얻어, 십자군 원정(1096∼1270)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원정은 처음에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으나, 후에는 새로운 땅을 개척하려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변질되어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과 대립하여, 1309년에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유폐(幽閉)시켰다. 이를 ‘교황의 아비뇽 유폐’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교황권 쇠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은 스콜라 신학으로 대표된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기초가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신학을 집대성하여 완성한 것으로서, 그리스 철학의 힘을 빌려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스콜라 신학자로는 안셀무스, 보나벤투라, 롬바르두스 등을 들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신과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다같이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를 세워 《신학대전(神學大全)》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에 의하여,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는 신적(神的) 권위를 지니게 되었으며, 1439년의 종교회의에서 ‘세례(洗禮)’ ‘견진(堅振)’ ‘고백(告白)’ 등의 7가지 성사가 제정되고, 하느님의 은총은 이들 교회의 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교의가 확립되었다. 스콜라 신학은 이 아퀴나스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3세기 이후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둔스 스코투스, W.오캄 등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성으로써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킴으로써 스콜라 신학의 토대를 흔들어 놓았다.

【종교개혁】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상 가장 파고(波高) 높은 변화는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반기를 들고 1517년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운동은 몇 가지 시대적 흐름이 한 곳에서 만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 흐름들은 중세 신비주의·회의주의·르네상스·민족주의 등이었다. 중세 신비주의운동은, 후기 스콜라 신학이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고 하느님 이해의 이성적 추구의 가능성을 부인하자, 이에 따라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순수체험적인 영적 차원에서 얻으려고 한 데서 일어난 것이었다. 에크하르트, J. 타울러, T.아 켐피스 등이 이 운동의 대표자인데, 이들에게 있어 공통적인 것은 신의 내적 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람 안에서 탄생하는 신(God being born within)’을 주장하였다. 이 신비주의운동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스콜라 신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앙의 생동감과 역동감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중세기 회의주의운동은 15세기 전반부를 특징짓는 종교운동으로서, 교황청의 분열과 부패 등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였다. 이들은 중세 말기의 교회의 타락을 공박하고 교황의 절대성에 항거하여, 교황권이나 황제권의 근원은 모두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 권한은 각기 자체의 한계 내에서 선용되어야 하며, 교회는 재산을 가져서는 아니되고, 교회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 모두 처형되고 개혁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들에 의하여 장차 16세기에 이루어질 종교개혁의 기틀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5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는 고전(古典)의 연구와 인문주의(人文主義:humanism)로 집약시킬 수 있는데, 이러한 근대정신이 종교의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고전연구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인문주의는 인간을 교회의 제도적 권위 아래서 해방시키려는 운동을 싹트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을 태동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의 인간중심적인 사상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였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는 그 때까지 로마교황청에 예속되어 있던 각 민족의 독립의식의 발로에서 형성되었다. 독일은 교황청의 착취를 가장 심하게 당하고 있던 지역의 하나였는데,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아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에서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본 입장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된다. 그는 첫째, 가톨릭교회의 전승주의(傳承主義)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경에 있는 것이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개인의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교회의 성사(聖事)와 같은 외적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가톨릭의 사제제도(司祭制度)에 반대하여 모든 신자가 하느님의 사제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위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에 찬성하는 제후(諸侯)들의 보호를 받아 개혁운동을 성공시켰다. 그는 지방군주적 교회통치제를 확립하고, 1529년에는 제후들의 공동 커뮤니케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를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루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에서는 H.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가톨릭측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 태생의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다.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같은 흐름을 이루면서도 루터보다 더욱 철저하여 생활 전체의 성화(聖化)를 주장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직업도 하느님의 소명(召命)으로 보고, 세속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려는 근세적인 종교관을 구체화하였다. 칼뱅의 개혁운동은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개혁파교회’를 형성하여 루터교회와 함께 프로테스탄트의 2대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특이하게 종교개혁이 국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에서 발단하여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국왕이 곧 교회의 지배자가 되는 ‘수장령(首長令)’이 선포되었다. 그 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이르러 ‘영국국교회’로 분립되었는데, 한국에서 성공회(聖公會)라 불리는 이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중에서 가톨릭에 가장 가까운 편이다. 유럽 각지에 프로테스탄트운동이 퍼져 나가자 가톨릭에서는 무력(武力)으로 반(反)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면서 내부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을 시도하였다. 1545년부터 63년에 걸쳐 여러 차례 열린 트리엔트공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교의(敎義)가 재검토되고 가톨릭 신학이 재확인되었다. 또 I.로욜라가 창시한 수도회인 예수회는 가톨릭의 포교를 위해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획기적인 전도사업을 폈다.

【근대의 그리스도교】 종교개혁운동은 제도적인 가톨릭교회에 묶이어 있는 신앙을 개인에게로 돌리려는 데서 일어난 운동으로, 신학적으로는 그 때까지 교회의 정통적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자유주의·합리주의 사상이 발흥하고 과학이 진보하자, 그리스도교 신학사상은 그 자체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신론(理神論)은 17∼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신학사상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합리주의 사상인데, 이것은 근세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유물론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이신론은 우주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신의 계시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한편 독일의 합리주의는 성경을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에 반대하여, 성경을 사람의 손에 의하여 쓰여진 역사적인 저술로서 연구 비평하려는 운동이었다. 이같은 합리주의적인 흐름에 반대하여, 근대 조직신학(組織神學)으로의 새로운 길을 연 사람은 독일의 F.E.D.슐라이어마허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종교론》(1799)과 《그리스도교 신앙》(1822)은 당시 궁지에 몰리게 된 그리스도교 신학에 새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종교와 철학 및 윤리를 엄밀하게 구별하여, 직관과 감정에 의한 개인의 절대귀의(絶對歸依)의 체험을 종교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개인의 주체적 종교를 역사종교로 완성시킨 것이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의 A.리츨은 칸트의 인식론 위에 그 가치판단설을 세워, 근대 그리스도교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가장 근본적인 가치판단은 인간이 자연존재인 동시에 정신적인 인격이라는 판단으로서, 이러한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정신의 승리를 얻는 실천적 활동이 종교라고 정의하였다. 이 실천적 입장은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 건설의 기초라는 판단을 가져오게 하였고, 여기에서 비로소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로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확인되었다. 영국에서는 18세기 중반에 J.웨슬리를 중심으로 하여 합리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이 일어났다. 웨슬리의 경건주의는 이성적·신학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영감(靈感)에 의한 종교체험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운동은 개인의 금욕적인 생활방법을 요구하게 되어 메서디즘(Methodism)이라 불리었으며, 영국의 산업근로자들에게 사회사업을 추진하면서 널리 전파되어, 메서디스트 처치(감리교회)를 형성하였다. 감리교회는 그 뒤 미국으로 전파되어 침례교회(浸禮敎會:Baptist Church)와 함께 2대 복음주의 교회를 이룩하였다. 근대 교회,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밖에 여러 교파를 파생시켰는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Presby- terians)가,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에 의하여 조합교회(組合敎會:Congregational Church)가 파생하였다. 이 조합교회는 곧 미국으로 건너가 큰 교파를 형성하였는데, 조합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작은 교파이면서도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퀘이커파(Quakers)와 유니테리언교회(Unitarian Church) 등과 함께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여, 근대사회에 휴머니즘 신상을 전파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현대의 그리스도교회】 계시종교이며 또한 역사종교로서의 특징을 지니는 그리스도교는 지난 2,000년 동안 다른 어떤 요소보다 더 강하게 인류역사에 영향을 끼쳐 왔고, 인류역사상 그 어떤 세력보다도 깊은 변화를 초래한 영적 세력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가 세속화(世俗化)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종교적 이해와 통찰력으로써는 파악될 수 없으며, 영적 신앙의 차원이 아닌 세속적인 지성의 이해와 통찰력으로써 파악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종교가 신앙을 잃고 속화(俗化)된다는 뜻으로, 극단적으로는 그리스도교가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신앙의 종말론이다. 이러한 논의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일부, 특히 변증신학(辨證神學)에 의하여 지지를 얻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교를 ‘비신화화(非神話化)’하려는 신학적인 시도 역시 그리스도교를 세속화시키는 데에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위기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교회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교회는 2,000년의 긴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난관을 겪었으나 늘 새롭게 변모하면서 그 본질을 지켜 왔다. 그리스도교회는 본래의 영적 위치로 되돌아가는 힘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으며, 그 힘은 바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20세기의 위기 속에서도 그리스도교는 끊임없이 갱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이 갱신운동들은 20세기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초월 체험을 겪음으로써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새로이 부상(浮上)하고 있는 전례(典禮)·종교음악·명상·기도·경건신앙 등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현대 그리스도교회에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의 하나로, 교회일치 운동이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유물론적 경향에 맞서서,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단결하려는 움직임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1910년 이래 루터교·장로교·성공회·감리교·침례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이 일어났다. 교회일치운동으로도 번역되는 이 운동은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호응을 얻어, 48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교회일치운동이 목적하는 바의 일치는, 특정한 교리나 의식(儀式) 등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한 분의 성령이 가져다 주는 신앙정신적 일치를 상호 대화 속에서 발견하자는 것이다. 또한 그 일치를, 다만 교회 안의 일치에 한정시키지 않고 전인류의 일치라고 하는 넓은 관점에서 파악하여,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위해 교회 전체가 일치 협력하자는 데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교회는 세계 역사 속에서의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회】 한국에는 18세기에 가톨릭이 처음 전래되고, 프로테스탄트가 19세기에 들어온 이래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는 가톨릭을 천주교(天主敎), 프로테스탄트를 개신교(改新敎) 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부른다. 가톨릭은 처음에 서학(西學:서양 학문이란 뜻)이라 하여, 일종의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李光)이 베이징[北京]에서 마테오 리치의 저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가지고 돌아와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천주교로 개칭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서양 학문으로서 한국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진 형식적인 주자학(朱子學)에 반대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학운동(實學運動)의 발생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 학자들은 점차 가톨릭의 종교적 진리를 깨닫게 되어,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하여졌다. 이 무렵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가톨릭 선교활동의 첫 열매이었다. 가톨릭이 한국에 전래된 것은 당시 정치·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약소민족으로서의 고난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는 어지러웠고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이러한 때였으니,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새 이념과 사상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역사의식이 강한 학자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주자학을 배척하고 새 학문인 서학에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 한국 가톨릭교인 가운데 많은 지도자들이 실학자들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는 200주년을 맞았는데, 이는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전도 없이 학자들에 의한 자발적인 연구로 성립되어, 세계 가톨릭 전교사상(傳敎史上) 커다란 특징을 이루었다. 당시 주자학에 지배되고 있던 조정(朝廷)과 충돌하게 되어 많은 박해사건을 초래하였다. 1791년(정조 15)의 신해사옥(辛亥邪獄),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辛酉邪獄), 39년(헌종 5)의 기해사옥(己亥邪獄) 등이 일어나 외국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교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45년(헌종 11)에는 김대건(金大建)이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도 곧 순교하였고, 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에 의한 병인대박해(丙寅大迫害)가 일어나 9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82년(고종 19)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면서, 비로소 한국땅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 후 조선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에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주요 종교의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85년(고종 22) H.G.언더우드 목사와 H.D.아펜젤러 목사가 정식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 무렵, 한국은 주변 열강국과 서유럽 열강국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이 점차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나라안으로는 부정과 부패정치에 의해 정부는 약체였고 국민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1860년대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로테스탄트는 먼저 서민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프로테스탄트는 개혁의지를 담고 있었으므로, 우리 서민층에게 개혁의 에너지로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교육사업·의료사업·사회사업 등을 통하여 사회개선에 큰 몫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의한 국권피탈 때는 우리 국민의 자주정신을 고취하고 직접·간접으로 독립운동에 지대한 협조를 하였다. 그 후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세계 그리스도교 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보였으나, 반면 많은 교파의 분열 등을 초래, 난립상을 드러내기도 하여 현재 대한 예수교 장로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파가 있다.

 항목차례

聖書(Bible)

 

  그리스도교의 정전(正典). 또는 유대교의 성전(聖典)을 말한다. 영어의 Bible은 ‘책들’이라는 그리스어 ‘비블리아(biblia)’에서 나왔다. ‘책들’이란 표현은 《다니엘》에서 예언자적 저술, 《집회서》의 ‘책들의 여분’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구약을 가리킨다. 이 단어의 용법은 구약을 사용하는 그리스도교회로 넘어갔으며, 마침내 5세기경에 와서는 경전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성전(聖典)으로서 성서는 구약성서(Old Testament)와 신약성서(New Testament)로 이루어진다. ‘구(舊)’는 그리스도 이전을 가리키고, ‘신(新)’은 그리스도 이후의 내용이며, ‘약(約)’은 인간에 대한 신의 구원의 계약을 의미한다. 라틴어 testamentum의 문자적 의미는 ‘의지’였지만 70인역과 신약에서 ‘언약’을 의미하는 헤브라이어 브리트(brit)의 역어로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testament(의지)가 covenant(언약)로 변형된 것이다. 구약은 ‘옛 언약’이며, 신약은 ‘새 언약’을 뜻한다. 구약은 모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신의 약속이며, 신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신의 약속이다. 구약과 신약을 함께 성서(biblos)라고 부른 것은 크리소스톰(345?∼407)이 최초이다.

【언어】 구약은 헤브라이어로,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구약에서 헤브라이어로 쓰여지지 않은 부분(에즈라 4:8∼6:18, 7:12∼26, 예레미야 10:11, 다니엘 2:4∼7:28 등)은 아람어로 쓰여졌는데, 이 아람어는 유대인 포로기 이후에 점차로 유대인의 구어(口語)로써 헤브라이어를 대신하게 되었던 방언이었다. 신약의 그리스어는 1세기경 로마제국의 통속어인 코이네(Koine) 그리스어이다. 이 그리스어는 단순하고 강조적이고 모험적인 표현을 즐겨 쓰는 특성이 있다.

【내용과 구분】 성서의 내용은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으로 되어 있으나, 주로 역사·시가·예언·서간문 등으로 되어 있다.

⑴ 구약의 책들이 쓰여진 연대는 BC 1200년부터 BC 2세기에 이르기까지로, 그 기간이 1,000년 이상이나 되며, 다음과 같이 3부로 나누어진다. ① 율법(律法, Torah, 5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② 예언서(豫言書, Nebiim, 21권):《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상》 《사무엘 하》 《열왕기 상》 《열왕기 하》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바꾹》 《스바니야》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 ③ 성문서집(Kethubim,13권):《시편》 《잠언》 《전도서》 《욥기》 《에스델》 《룻기》 《아가》 《애가》 《다니엘》 《에즈라》 《느헤미야》 《역대기 상》 《역대기 하》 등이다. 예언서 가운데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은 대예언서라고 하며, 그 이외의 예언서는 소예언서라고 한다. 율법에 속하는 5권의 책을 흔히 모세 5경(五經)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모세가 썼다는 근거에서 그렇게 부르는 듯하지만 실은 모세가 쓰지 않았다.

⑵ 신약은 다음과 같이 4부로 나뉜다. ① 복음서(4권):《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② 역사서(1권):《사도행전》, ③ 서간문(21권):《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야고보의 편지》 《베드로의 첫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셋째 편지》 《유다의 편지》, ④ 묵시문학(1권):《요한의 묵시록》 등이다. 신약의 복음서 가운데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를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하고, 《요한의 복음서》를 제4복음서라고도 한다. 그것은 전자의 세 책이 자료상 공통적인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며, 후자인 《요한의 복음서》는 연대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어 앞서의 세 복음서를 보충한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책이다. 구약의 역사는 비록 사실적인 역사는 아니지만 천지창조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발생과 성장,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모세에 의한 율법, 가나안의 정착, 왕국의 건설과 멸망, 민족의 포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BC 516)에 이르고 있고, 신약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잡이인 세례 요한의 탄생으로부터 예수의 탄생과 일생, 교훈과 사업, 그리고 그의 뒤를 계승한 사도들의 활동으로 되어 있다. 구약의 성문서집에서 특히 《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등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호소·찬양·감사를 문학적 표현을 빌어서 쓴 작품들이며, 예언서들은 왕국의 분열기로부터 멸망에 이르는 동안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신의 감동을 받아 남긴 예언(豫言)들이다. 신약의 서간들은 사도 바울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개인 또는 교회들에 복음의 교훈,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 신앙생활의 교훈 등을 서신으로 보냈던 것을 추려서 모은 것들이며, 성서의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의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한 세계의 종말에 관한 환상의 기록이다. 이 글은 카이로스적 역사철학에 근거한 것이며 박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성서는 편집된 내용으로 보아도 세계와 역사의 시작으로부터 역사의 종말,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포함된 책이라 할 수 있다.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은 1,000년이 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성서는 1,000년이 넘는 시대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표현에 있어서 서로 모순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저자나 편집자도 모세와 같은 한 민족의 지도자가 있었는가 하면, 아모스와 같은 목자, 루가 같은 의사, 바울로와 같은 학자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어느 저자이든간에, 어느 시대에 쓰여졌든간에 신의 사랑의 뜻, 그의 세계 통치, 그리스도의 구원의 활동이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정경(正經)과 외경(外經)> 정경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카논(Kanon:영어로는 canon)은 ‘곧은 막대기’라는 뜻인데, 그것은 카나(Kanna), 즉 ‘갈대’라는 말에서 파생된 낱말이다. 갈대는 인류가 제일 처음에 사용한 척도를 재는 도구였다. 카나는 헤브라이어 카네(Kaneh)에서 온 말인데, 그것은 ‘재는 막대기’의 뜻을 지니고 있어서 목수들이 사용하는 자(尺)를 가리킨다. 이 말은 라틴어의 규범이나 규칙(norma/regula)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때 그리스 작가들은 가장 훌륭하고 규범이 될 만한 문학작품에 카논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러므로 ‘정경’이라는 말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 모범이 되고 표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정경이라는 말이 성서에 적용된 것은 신앙과 행실의 규범이 성서 가운데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의 문서가 정경으로 집성되기까지에는 매우 오랜 기간이 걸렸다. 율법서는 BC 5세기에 정경으로 인정되었으며, 예언서는 BC 200년경에, 성문서는 AD 1세기에 대개 윤곽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의 정경 결정은 AD 100년경에 모였던 유대교 얌니아(Jamnia) 전체회의에서였다. 신약의 정경화 작업은 몬타니즘과 마르시온의 반동운동에 의해서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4세기에 이르러 《요한의 묵시록》만이 아직 논의가 되고 다른 책들은 정경으로 인정되었으며, 서방교회에서는 로마 전체회의에서 비로소 정경을 문제삼았는데, 382년 로마 감독 다마수스 주재하에 히에로니무스의 협력을 얻어 정경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때 작성된 신약의 순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도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요한의 묵시록》 《사도행전》, 그리고 다음에 7공동서신이 오는데, 이 서신의 순서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야고보의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셋째 편지》, 그리고 《유다의 편지》이다. 이 순서는 동방교회가 결정한 순서, 즉 4복음서 《사도행전》, 7공동서신, 14통의 바울로 서신, 《요한의 묵시록》과 비교할 때 차이가 많다. 서방교회에서의 정경의 확정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사를 받으면서 만든 것이다. 정경의 형성은 고의적이거나 강제적·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문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설득력과 진리성에서 교회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정경의 범위가 한정되어간 것은 이단과 교리상의 이설(異說)이 교회 내에 침입한 때문이었다. 많은 단편들이 유포되어 있는 가운데서 신앙생활에 가장 표준이 될 만하다고 인정되는 책들을 교회회의가 정경으로 확정하자 여기에 포함되지 아니하는 그 이외의 책들을 외경이라고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마카베오 상》 《마카베오 하》 등인데, 이 책들이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다만, 교리상 불충분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인정된 것들로서, 이 경외서(經外書)들을 ‘아포크리파(Apocrypha)’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역사·교훈·예언·복음·서신·묵시 등이 있다. 신약 부분에서 정경으로 확정될 때 논쟁이 심했던 책들은 《야고보의 편지》 《유다의 편지》 《요한의 둘째 편지》 《요한의 셋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등이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신약의 모든 책들이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은 라오디게아 회의(363?)와 카르타고 회의(397)에서였다.

【사본(寫本)과 번역본】 성서의 원본은 현재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는 여러 사본에서 비교하여 만들어진 성서를 번역한 것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 된 구약성서 사본은 1947년 이래 사해(死海) 근방에서 발견된 이른바 ‘사해 두루마리’에 포함된 ‘사해 사본’이다. 대영박물관에는 9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5경의 사본이 있고, 레닌그라드 박물관에는 후예언서의 사본(916)이 있다. 그러나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이사야서》의 두루마리는 어느 것보다도 1,000년이나 앞서는 BC 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헤브라이어로 된 성서가 처음으로 인쇄된 것은 1488년의 일이다. 헤브라이어 성서의 최초의 번역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진 70인역이다. 신약의 사본에는 대자사본(大字寫本)과 소자사본(小字寫本)이 있다. 전자는 그리스어의 대정자(大正字)를 단어와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도 없이 연속하여 쓴 것이고, 후자는 현재의 그리스어 성경체와 같은 초자체(草字體)로 단어와 단어 사이도 띄어서 썼고 구두점도 있는 사본이다. 전자에 속하는 사본으로 바티칸 사본(부호 B)·시내 사본(부호 S)·알렉산드리아 사본(부호 A)·에프레임 사본(부호 C)이 있고, 후자에 속하는 사본은 대개 8세기 이후의 것으로, 현재 2,300가지 이상이 있다. 사본을 읽는 데는 후자가 더 쉬우나, 연대가 후대의 것이고 정정·가필 등이 많아 원본을 회복해 보려는 본문비평에는 대자사본이 보다 유효하다. 사본의 자료로서는 무엇보다도 파피루스(papyrus)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이집트의 나일강(江) 연안에 있는 갈대의 일종인 다년초이다. 이 자료가 BC 11세기부터 문서에 사용되었고, BC 2세기 말경부터는 점점 송아지가죽이나 양가죽이 이에 대용되게 되었다. 현존하는 신약의 사본 중에서 가장 일찍 성립되었고, 또 신약문서를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중요한 사대본의 부분은 양피지로 되어 있다. 이 자료가 15세기까지 사용되다가 종이가 출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서는 수많은 번역본이 있다. 번역본은 사본과 함께 성서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취급되고 있다. 이런 번역은 2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중에는 현존하는 사본보다 일찍 성립된 것이 많이 있다. 신약성서의 고대 번역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라틴어역이다. 히에로니무스 시대에 교양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속어로 번역한 역본들이 많이 있었다. 히에로니무스가 불가타역(Vulgata 譯)을 내기 전의 모든 라틴어역을 고(古)라틴어역 또는 고(古)이탈리아어 역본이라 총칭하였는데, 이와 같은 번역본 중에서 현존하는 것만도 약 40여 종이나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라틴어역은 ‘불가타’인데, 고라틴어역이 잡다하기 때문에 그 의미에 혼동을 가져올 우려가 있어 그 통일의 필요성을 느껴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366∼384)가 히에로니무스에게 명하여 고(古)라틴어역을 개역하게 하였다. 다마수스는 가장 권위 있는 그리스어 본문으로부터 번역하여 전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려고 했으나, 역자 히에로니무스는 반작용을 염려하여 급진적인 수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33년에 복음서만을 완역하였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어 405년에 신·구약의 번역을 완료하였다. 이것이 곧 불가타역으로서, 불가타는 ‘일반’이라는 뜻인데, 처음에는 고(古)라틴어역과 함께 쓰이다가 후에 가톨릭교회가 불가타를 공인성서로 지정하자 다른 역본을 배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1532년 종교개혁자 M.루터에 의한 독일어 번역과 1611년 영국의 제임스 1세에 의한 흠정역(欽定譯:King James Version)은 근세에 이르는 성서번역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지금은 거의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개역본(改譯本)이 출판되고 있다. 모든 개역판의 특징은 가능한 한 원문의 뜻을 현대 용어로 바르고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새 영어 성서 New English Bible》가 그렇고 《현대인을 위한 성서 Today’s English Version》가 그와 같은 목적으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의 성서번역】 한국에 성서가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1810년 알세스트호(號)의 함장 M.맥스웰이 첨사 조대복에게 건네준 한문성서가 그 효시이다. 그 후 R.모리슨, X.A.F.구츨라프, R.J.토머스 선교사 등에 의해 한문성서가 속속 전해졌다. 이후 성서의 한국어 번역은 만주와 일본에서 각각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만주에 와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J.로스와 J.매킨타이어가 만주 우장(牛莊)에서 한국인 이응찬·백홍준·서상륜 등의 협력을 얻어 1882년에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84년에 《마르코의 복음서》 《마태오의 복음서》, 85년에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등을 번역 출판하였고, 87년에 이르러 《예수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가 완역되어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곧 ‘로스 번역(Ross Version)’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 수정이 일본 성서공회의 총무인 H.루미스 목사의 도움을 얻어 한문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를 1884년에 요코하마[橫濱]에 있는 대영 및 외국 성서공회를 통해 출간했는데, 이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는 85년에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를 요코하마의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1,000부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H.G.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우리말 성서였고, 언더우드는 그것을 94년에 서울에서 수정·출판한 바 있다. 한국 내에서의 성서 번역사업은 1893년에 공선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되어 1900년에 신약이 완역되었으나, 미흡한 점이 많아 1904년에 개역이 완료되었고, 1906년에 다시 수정하여 공인역으로 출판하였다. 이것이 37년 개역성서가 출간될 때까지 사용되었던 성서였다.구약성서는 1910년에 완역되어 11년에 신약성서와 함께 《성경젼셔》로 합본, 간행되었다. 이것은 실로 한국에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들어온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기념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교가 구약성서를 번역 완료한 1910년 한국 가톨릭교회는 비로소 한기근 신부가 불가타역을 대본으로 신약성서 중 4복음서만을 번역 완료하여 《성경(四史聖經)》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한기근 신부는 22년에 《사도행전》 《종도행전(宗徒行傳)》을 번역 완료하여 4복음서와 합해서 간행하였다. 신약성서가 완역 출간된 것은 41년의 일이었고, 이 역본이 71년까지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인역본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의 성서번역의 역사에서 가장 뜻있는 일의 하나는 가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가 합동으로 번역 출판한 《공동번역성서》이다. 68년 ‘신구교 구약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됨으로써 번역이 시작된 이 공동번역은 71년 부활절을 기해 신약성서가 출판되었고, 77년 부활절에 때맞추어 구약성서 번역이 끝나 신약과 합본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성서의 사역(私譯)은 57년 8월 그리스도교 잡지인 《기독교계》 창간호에 실린 박창환의 《에베소서》 사역이 그 첫 시도였다. 그 후 《빌립보서》 《골로새서》가 사역되었다. 동지 제4호에 김정준의 《시편》 사역이 몇 편 실렸다. 61년에는 복음동지회에 의해 《마태복음》이 출판되었으며, 순수한 국내 성서학자들에 의한 성서번역이 마침내 본격화하였다.

【장과 절】 성서에 오늘날과 같이 장과 절이 구분된 것은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부터였다. 물론 탈무드 시대 이전에도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읽기 위하여 율법은 이른바 파라쇼트(paras퓍)라는 부분들로, 예언서들은 이른바 합타로트(haptar퓍)라는 부분들로 대략 구분한 일이 있다. 또한 그들은 오늘날 절이라고 하는 것과 유사한 프슈킴(p’s엚im)이라는 소규모의 구분도 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장·절 구분은 카로의 위고(Cardinal Hugo de Caro)에 의해 13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장과 절의 구분이 불가타에 채택되었고, R.나탄에 의해 1440년경에 헤브라이어 성서에 채택되었다. 신약성서의 분절(分節) 깊이는 R.스티븐스의 1551년판 그리스어 성서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성서의 장·절은 독자를 위한 편의제공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므로, 사본에 따라서 절이 다를 수도 있다.

【통일성과 영감】 신·구약 성서가 편집·기록된 기간은 1,000년이 넘는다. 그러므로 성서의 시대적 배경이란 대단히 다양하며, 성서의 66권은 그 쓰인 장소·사람·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사상적·역사적·사회적인 배경이 다르고 문체도 다르다. 그러므로 성서의 각서는 따로 그 내용에서 모순되는 경우도 있고, 문화적 또는 윤리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따르기가 불가능한 것도 있다. 성서에는 근동의 종교의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고 신화적인 요소도 있다. 또 성서 본문은 여러 자료를 모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대한 비평을 하게 된다. 이것이 성서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다. 구약의 율법서에는 J·E·D·P의 자료가 있고, 신약의 공관 복음서의 형성은 [표]와 같다. 그러나 이렇게 각각 다른 시대·역사·장소·사람·문화 등에 의해서 집성된 성서 66권은 《창세기》부터 《요한의 묵시록》까지 일관되는 통일성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성서는 하나로 묶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성서를 읽을 때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통일성의 빛에서 읽어야 성서의 바른 뜻을 알 수가 있다. 성서를 통일케 하는 것은 신의 역사이다. 즉, 성서의 능력이요 역사이다. 성서가 인간들에 의해서 각 시대, 여러 장소에서 편집, 기록되었으나 그 인간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신은 그 인간을 통해 뜻을 계시한 것이다. 신은 역사의 현실에 현존하기 때문에 그의 계시는 역사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정치·경제·사회·역사의 배경이 있다. 그러나 그 역사현실에서 신은 그의 의지, 구원의 계획을 나타낸다. 성서의 각 책은 그 시대에 있어서 신의 구원의 경륜·섭리를 계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다양한 역사적 배경에서 신의 존재, 신의 삶의 양태를 읽게 되면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성서가 신의 영감에 의해 쓰여졌다는 데서 영감설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 영감설에는 축자 영감설(verbal inspiration theory), 기계적 영감설(mechanical inspiration theory)이 있다. 이 영감설은 성서의 모든 글자 하나 하나가 모두 신에 의해 되었고, 인간은 다만 기계같이 받아 쓴 것뿐이라는 설이다. 이 설보다 약간 온건한 설로서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 theory)이 있는데, 이것은 글자로 적은 부문에 인간의 작용을 인정하나 전체적으로는 신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 세 학설에 모두 공통되는 것은 성서는 그 문자 하나하나에 오류가 없다는 문자무오설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문자가 무오해야 성서가 신의 말씀이 된다고 믿는 입장이나, 이 설들은 보수주의 신학 계열에서의 주장이고 진보주의 신학 계열에서는 성서 본문비평을 통해 성서의 참뜻을 찾고 본문 회복 작업을 하기 때문에 문자에 오류가 있음은 인정하면서도 성서를 신의 말씀으로 고백한다. 신의 말씀인 이유는 문자에 오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책에서 신이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성서의 이해는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

 항목차례

모세(Mose(s))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민족적 영웅. 구약성서의 맨 앞에 있는 다섯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그 내용이 모세와 관련되는 바가 많아 ‘모세 오경(五經:五書)’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레위기》 《신명기》의 율법(律法)은 ‘모세의 율법’이라 일컬어진다. 최근의 고고학적·금석문학적(金石文學的)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입국, 이집트 탈출, 야훼 종교의 채용, 가나안 정복 등은 그 대체적인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에 아주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어, 이 역사적 사실의 중심인물로서의 모세의 실재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스라엘의 일부인 라헬의 후예들은 이집트로 들어가 라메스 2세(재위 BC 1290∼BC 1223)의 박해를 받았다. 그 일족인 레위 가계의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태어난 모세는, 파라오왕(王)의 이스라엘인(人) 영아학살을 피하여 나일강에 버려졌는데, 다행히도 파라오의 딸에 의해 구출되어 왕궁에서 양육되었다. 그가 40세 때 동포가 몹시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유목민 미디안족(族)의 사제(司祭) 이드로(르의엘)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아 게르솜과 엘리에젤이라는 두 아들을 얻었다. 그가 80세 되던 해 호렙산(山)에서 미디안족의 신(神) 야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형 아론의 협조를 얻어 파라오와 싸워 이겨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였다. 이어 시나이산(山)에서 야훼로부터 십계명(十誡命)을 받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契約)의 중개자가 되었다(출애 20:1∼17, 신명 5:6∼21, 출애 34:14∼33). 그 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민수 33). 모세는 야훼의 명에 의하여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 예리고 맞은 편 모압 땅의 느보산(山)에서 향년 120세에 죽었다(신명 33·34장).

 항목차례

예수(Jesus Christ, BC 4?∼AD 30)

 

  그리스도교의 개조(開祖). 예수라는 이름은 헤브라이어로 ‘하느님(야훼)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예수 탄생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제16장 16절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는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써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생애】 예수는 어머니가 되는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이 호구조사의 등록을 하러 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예수가 태어나던 날 밤 천사가 목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고하며,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가 2:4). 예수 탄생 후 그 일가는 헤롯왕의 유아살해(幼兒殺害)를 피하여 이집트로 여행하고, 헤롯이 죽은 후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나자렛에서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는데(루가 2:51),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逾越節) 명절을 맞아, 해마다 그랬듯이 부모를 따라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예수는, 성전에서 학자들과 성서(구약)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학자들은 예수의 지혜와 그 대답에 경탄하고 있었는데, 그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던 부모를 보고 예수는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루가 2:48). 예수는 30세경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였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예수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마태 4:1) 40주야의 단식기도를 하면서 악마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을 받았다. 성서에 기록된 말들을 인용,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마태 4:11, 루가 4:8) 광야에서 머무른 후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마태오·마르코·루가의 세 복음서는 예수의 선교활동에 관한 똑같은 기록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예수의 발자취를 정확히 더듬는다든지, 그가 방문한 고장을 차례대로 추적하기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에 의하면, 광야에서 나와 베다니로 돌아갔는데, 여기서 첫 번째 제자를 얻어 그들과 함께 갈릴레아(갈릴리)로 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기적을 행하였다. 공생활에서의 최초의 유월절(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거기서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었다. 예수는 유월절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어느날 밤 조용히 찾아온 바리사이파(派) 지도자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에게 자신을 계시(啓示)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일러 주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중생(重生:거듭 남) 또는 신생(新生:새로 남)의 교리이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유다 지방을 떠나 사마리아를 지나서 갈릴레아로 향하였다. 도중에 사마리아 지방 시카르(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기가 메시아임을 밝혔는데, 그녀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구세주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요한 4:42)고 한다. 그 뒤 갈릴레아의 가버나움으로 내려간 예수는 그곳 회당(시나고그)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신약의 복음을 전하며, “사람의 아들[人子]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루가 6:5)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온 갈릴레아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었다. 이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신들린 사람·간질병자·중풍병자들을 모두 그의 앞에 데려왔다. 예수는 그들도 모두 고쳐 주었다. 그러자 갈릴레아·데카폴리스·예루살렘·유다, 그리고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예수를 따랐다(마태 4:23∼25). 예수는 이 무렵 유명한 산상(山上) 설교를 하였으며, 또한 12제자를 선발하였다. 예수는 고향인 나자렛으로 돌아갔는데, 나자렛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낭독하였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사람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예수는 예언자 엘리야가 동포인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이방(異邦)의 어떤 과부에게로 보내졌다는 사실, 예언자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는 고쳐주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알려, 그가 말하는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구원에 그치지 않고 전인류의 구원이라는 뜻을 비쳤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으나, 예수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갔다(루가 4:25∼30).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스왕(헤롯왕)에게 살해된 사실을 안 후, 예수는 갈릴레아를 떠나 필립비의 가이사리아 지방으로 떠났는데, 그 길에 제자들에게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말해주었다. 예수가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을 때 예수가 그들 앞에서 변모하여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같이 눈부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 즉, 예수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계시(啓示) 방법으로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예언자의 신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깨달았던 것이다(마태 17:1∼8, 마르 9:2∼8, 루가 9:28∼36). 그 후 예수는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가 설교도 하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곤 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지닌 권위에 놀란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인가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예수는 요르단강을 건너 베레아 지방으로 가,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동생 라자로를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었다. 이때 예수는 마리아의 자매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라고 말하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죽은 라자로를 예수가 살려냈다는 이야기가 전파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위험시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하며 의논하였다(요한 11:47∼48).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요한 11:53). 과월절 전날 목요일 밤에 예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들고, 그날 밤은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였다. 게쎄마니에서 잡힌 예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선고받고, 이튿날 아침 십자가를 지고 온갖 조롱과 멸시·천대를 받으며 골고타 언덕길을 올라가 거기서 강도들과 함께 신을 모독하였다는 중죄인으로서 십자가 나무틀에 못박혀 죽었다. 일요일 아침, 예수가 묻힌 무덤은 비어 있었다. 예수는 생전에 자신이 예언한 바와 같이 부활하였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제자들은 그 후 여러 곳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복음서들은 그 사실과 함께 그가 올리브산(감람산)에서 승천(昇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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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Paulus, 10?∼67?)

 

  그리스도교의 사도(使徒)·성인(축일 6월 29일). 길리기아의 다소 출생의 유대인. 신약성서의 《사도행전(使徒行傳)》 등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사울이다. 그는 그리스 문화의 교육을 받고, 로마시민권을 가졌으며 고명한 율법박사(律法博士) 가믈리엘의 제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열렬한 바리사이파로서 그리스도 교도들을 잡으러 다메색으로 가던 중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출현을 경험하고, 3일간 실명 상태가 되어 소명(召命)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3회에 걸친 대전도여행(大傳道旅行)으로, 로마에까지 그 발자취를 남겼다. 그 동안 옥에 갇히는 등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방인(異邦人)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하였으며, 그의 높은 학식이 더욱 빛을 발하여 그리스도교의 기초를 굳히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 로마인·고린토인·갈라디아인·에페소인·필립비인·골로사이인·데살로니카인·히브리인 등, 자기가 전도한 지역의 사람들과, 또 개인적으로 디모테오, 디도, 필레몬 등에게 조언이나 충고의 말을 적어 보내곤 하였는데, 그것이 14통의 서간(편지)으로서 신약성서에 수록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殉敎)하였다고 한다. 바울로는 그리스도교의 최대의 전도자였고, 또한 최대의 신학자였으며,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있게 한 그리스도교 형성사상 가장 중추적 인물이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그에 의해서 틀이 잡혔으며, 후세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가 없다. 여러 서신 속에 전개된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살아야 할 우리 인간은 우선 죄지은 인간으로서 죽었다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몸소 그것을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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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Peter the Apostle, ?∼AD 64 ?)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 흔히 수제자(首弟子)라고 일컫는다. 원래 이름은 ‘시몬(Simon)’이라는 그리스식 이름이었는데, 예수가 그에게 ‘케파(Cephas:반석이라는 뜻)’라는 아람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이름을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 ‘페트로스’이다.

【복음서에서의 베드로】 그는 어부로서, 원래는 베싸이다에 살았으나, 예수의 공생활이 시작될 때쯤 결혼을 하여 가파르나움에 살았다. 《요한의 복음서》에 따르면, 시몬은 베타니아에서 예수를 만나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고 제자가 되었다. 한편, 공관복음(共觀福音)은 그 장소가 갈릴레아였다고 전한다. 어쨌든 성서에는 그가 출중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의 지도력은 여러 경우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제자들 전체를 대표하며, 제자들의 이름으로 ‘약삭빠른 종들’의 비유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청한다(루가 12:41). 또 예수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물었을 때, 메시아라고 선언한 것도 베드로였다(마태 16:16, 마르 8:29, 루가 9:20). 복음서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12제자를 열거할 때 베드로를 제일 앞에 둔다.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언한 첫번째 사도였고, 교회가 세워질 반석(그 이름 그대로)으로 선택되었다(마태 16:16∼19). 이 사실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확인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수난 때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고, 부활 후 그에게 특별히 나타내 보였다고 한다.

【초대교회 전승에서의 베드로】 예수의 승천 후, 베드로는 명실공히 교회의 으뜸가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마티아를 새로운 사도의 일원으로 뽑을 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이른바 오순절(五旬節) 이후 ‘성령의 도움으로’ 많은 군중에게 설교하여 교도 수가 급증하였다. 또 그는 사도들 중 첫번째로 기적을 행하여, 절름발이를 고쳤다(사도 3:1∼11). 그 후 헤로드 아그리파 1세에게 체포되었으나 기적에 의해 풀려났다. 전승(傳承)에는 그가 로마로 가서 바울로와 함께 로마교회를 세우고, 네로의 치하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2세기 후반~3세기에, 베드로의 로마 체류와 순교는 거의 확실한 것으로 믿어져 왔다. 또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티칸 언덕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말은 로마의 사제 가이우스가 하였는데,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그 점을 입증하였다. 바울로가 이방의 그리스도 교인들의 사도였다면 베드로는 유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사도였다. 오늘날까지 2,000년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가톨릭교회의 교황 수위권(首位權, Primacy)은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6절 이하에 의거한 베드로의 사도적 수위권(로마의 초대 주교로 인정)에 그 전통의 기원과 의의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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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을 세계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파. 단순히 가톨릭이라고 할 때에는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그리스 정교회)까지를 포함하여 지칭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최고의 직위가 로마 교황인 정통 가톨릭교회를 이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로마가톨릭이라고 한다. ‘가톨릭(카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2세기 무렵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또 4세기에 이르러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公議會)가 그 신앙선언 속에서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 이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특정한 개인·인종·시대를 초월한 전체 인류를 위한 것이므로 이 명칭은 그 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조직】 현재 가톨릭교회는 약 6억의 신도를 가진 세계 최대의 종교단체로, 유럽·남북아메리카·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의 여러 나라에 퍼져 있으며, 그 거대한 집단은 일정한 조직을 가지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 조직을 만드는 원리를 ‘히에라르키아[敎階制度]’라 부르며 상·하 관계에 따른 계급을 뜻한다. 이러한 교회조직을 피라미드에 비유하면 그 하부구조로서 가장 폭넓은 신자층이 있고, 그 위에 성직자층이 있다. 교회는 통할의 편의상 많은 교구로 나뉘고 통상 주교가 관리한다. 교구는 다시 소교구로 분할되어 사제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최고 권위자는 교황이라 불리는 로마의 주교이다. 그 근거는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권위를 계승한 데 있다. 따라서 교황은 교회의 모든 사건을 재정(裁定)하는 권력을 가진다. 이 교황의 권위는 제1바티칸 공의회(1869∼70)에서 선언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과 관련한 교의(敎義)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교황은 라테란협정(1929)에 따라 인정된 바티칸시국(市國)의 주권자이기도 하다. 또한 교황은 교회의 통치를 위한 기관으로서 교황청을 두고 있다. 영어에서 ‘Holy See(聖座)’라는 말은 교황과 교황청을 합친 명칭이다. 교황청의 기구는 교회의 발전에 따라 차츰 커져, 현재는 국무성성(國務聖省)을 중심으로 성성(聖省:성의회)·사무국·법원·사무처·위원회(20여 개가 있다) 등이 있으며, 파견기관으로는 바티칸 대사·공사·교황사절 등이 이에 속해 있다. 그리고 이들 업무의 책임자로 추기경(樞機卿)이 있다. 추기경은 교황이 임명하는 최고 고문으로 12세기 이래 교황을 선출하는 권리도 행사한다. 교황이 공석이 되면 추기경들은 회의를 열고 투표를 통하여 2/3 이상의 득표자를 교황으로 선출한다. 이렇게 하여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이 그것을 정식으로 수락하면 추기경 조제장(助祭長)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코니에서 새로운 교황의 결정을 선언하고, 다음 일요일이나 축제일에 대관식(戴冠式)이 행해진다. 이같은 교황선출 방식은 오랜 시대와 더불어 정착된 것이며, 교회사를 보면 초대 성 베드로 교황부터 현재의 요한 바오로 2세까지 264대에 걸친 교황의 이름이 나타난다. 교황 밑에서 각각 지역 교회를 관리하는 것은 주교와 사제(司祭:신부)이다. 주교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바에 따라 사도(그리스도의 제자)의 후계자가 되며, 일정한 자격이 있는 신부가 성성식을 받고 주교가 된다. 주교는 사제로서의 완전한 권능을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으며, 자신의 사제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도 있게 된다. 한편 사제 서품(敍品)에 의해 사제가 된 자는 제한된 사제의 권능만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주교도 사제도 모두 일체가 되어 교회를 관리하고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하고, 성화(聖化)를 돕는 일을 그 본래의 책무로 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큰 층(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일반신자이다. 신자는 직위적인 사제직은 가지지 않으나 이들을 공통사제직이라 일컬어 역시 그리스도 유일의 사제직에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성세성사(聖洗聖事)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할 것을 그 사명으로 삼는다.

【역사】 가톨릭교회는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가르침에 의해 창립되어, 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교회에 속하였다. 예수는 제자 중에서 12명을 선정하여 그 장(長)에 베드로를 임명하고 그에게 전체 교회를 통치하는 권위를 부여하였다(마태 16:18∼19).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다음 제자들은 성령(聖靈)에 의해 신앙이 강화되었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널리 폈다. 사도의 장인 베드로도 예루살렘을 떠나 먼저 안티오키아에, 그리고 로마에 사도의 자리를 정착시켰다. 당시 교회에는 유대교로부터의 개종자와 순수한 그리스도교도가 있어 이들 사이에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할 것이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이 일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를 열고 그리스도교도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였다. 로마제국의 모진 박해 속에서 교회는 점차 조직을 강화해갔으나 전부터 로마제국에 있었던 이교(異敎)의 영향으로 교회에는 그노시스·몬타누스·마르키온 및 마니교(摩尼敎) 등의 이단(異端)이 생겼다. 이 이단에 대항하여 교부(敎父)라 불리는 뛰어난 교회사상가가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클레멘스, 오리게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특히 유명하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교에 자유를 부여하고 보호하였으며, 4세기 말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도교 국교령’을 발포하여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배척하였다. 한편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한 중요한 공의회에서는 가톨릭의 교의를 명확하게 확정지었다. 중세에 이르러 처음 로마제국의 영향 밑에 있던 교회는 동(東)로마제국의 지배를 피해, 마침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는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였다. 로마가톨릭은 신성(神聖) 로마제국의 속권(俗權)과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여 마침내 ‘보름스 협약’에서 서임권을 획득하고 교권을 확립시켰다. 이리하여 교회는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밖으로는 7회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였으며, 안으로는 학문과 문화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15세기가 되자 유럽의 경제력은 증대하고 생활은 현저하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교회는 차차 세속주의에 빠져들었고, 교회 지도자는 권력을 둘러싼 싸움의 계속으로 분열을 일으켜 대립교황(對立敎皇)이 출현하였다. 또한 성직자나 수도자의 무지와 도덕성의 퇴폐도 심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고 M.루터의 등장으로 결정적 단계를 맞게 되어 가톨릭교가 분리되면서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에서도 예수회 등의 신수도회에 의한 쇄신운동을 진행시켜 교회는 점차 새로운 힘을 회복시켜 해외 선교활동 등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 통일이 붕괴되면서 근대국가가 탄생하여 주권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자 가톨릭교는 이들 국가와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었다. 1929년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로마가톨릭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어 세계 최소의 독립국 바티칸시국(市國)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교회는 전쟁과 박해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인종·국적·종교의 차별없이 원조하였고, 전후에는 평화 확립에 노력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와 같은 세계정세를 감안하여 제2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이 공의회는 교회의 현대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주의) 등 뛰어난 교의를 선언하였다.

【교의】 가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통적인 교회임을 주장하는 점에서, 그 창립자의 사랑의 가르침이 곧 가톨릭의 교의(敎義)이다. 가톨릭의 교의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바탕을 둔다. 성서는 신약과 구약으로 되어 있으며, 성전은 사도시대부터 구전해 내려오는 글로 쓰여지지 않은 하느님의 말을 뜻한다. 가톨릭교의 교도권(敎導權)은 성서와 성전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을 인류에게 널리 전파하고 권위로써 이것을 해석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가톨릭 신앙은 이 교도권에 복종하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와는 다르다. 가톨릭의 신관(神觀)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이라 하며, 이 신관은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에서 확립되었다. 하느님의 본성은 하나이지만 위격은 셋(성부·성자·성령)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의 조상인 아담의 죄로 하느님의 은총을 잃은 상태를 원죄(原罪)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속죄하여 또다시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중개자가 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사(聖事)에 의해 그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푼다. 성사는 은혜를 베푸는 의식으로서 일곱 가지가 있다. 즉 ‘성세'‘견진(堅振)'‘성체(聖體)’‘고백(告白)’‘혼인(婚姻)’‘병자(病者)’‘신품(神品)’성사이다.

【한국의 천주교】 동양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성직자들은 인류애의 사상과 개척정신에 불타고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었는데, 한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수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한 이수광(李光)이 M.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 등을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한편, 이수광과 같은 시대의 허균(許筠)도 베이징[北京]에서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인 《십이단(十二端)》을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써온 결과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당쟁만을 일삼는 주자학(朱子學)이 성행하였고, 이같은 풍조에 싫증을 느낀 일부 학자층에서는 현실적인 학문, 즉 실학(實學)을 내세우게 되었으니 이수광은 바로 그 선구적 인물이었다. 실학은 필연적으로 천주교를 믿는 서학(西學)과 결부되어 그로부터 100년이 경과한 1700년대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그의 문인 안정복(安鼎福) 등과 더불어 천주교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특히 M.리치의 《천주실의》, 아담 샬[湯若望]의 《주제군징(主制群徵)》, 이탈리아 신부 판도자의 《칠극(七克)》 등을 애독하고 이들에 대한 발문(跋文)을 쓰기도 하였다. 이익과 안정복 사이에 검토된 천주교는 마침내 이들 문인에 의해 이것을 믿는 신봉운동(信奉運動)으로 발전하였으니, 그 주동자는 권철신(權哲身)·일신(日身) 형제와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의 3형제 등이었다. 이들은 교리연구회를 열어 권철신 지도하에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권철신의 매부 이벽(李檗)도 참가하였다. 또한 정약전의 매부 이승훈(李承薰)도 참가하여 그는 교리연구차 베이징으로 건너가 1784년 2월, 귀국에 앞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梁棟材]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領洗)신자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이벽·권철신 형제에게 대세(代洗)를 주었는데, 이들은 후에 조선교회 창설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 이리하여 정약전 3형제, 중국어 역관 김범우(金範禹)·최인길(崔仁吉), 상인(常人) 출신의 이단원(李端源) 등 수십 명에게 대세를 주어 84년 겨울, 역관 김범우 집 대청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고 최초의 조선천주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국의 천주교는 박해가 계속되는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야 했으며, 그러한 박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때까지 계속되었다. 먼저 85년에는 전해 겨울에 창설한 조선천주교회가 형조 금리(禁吏)에게 발각되어 서적·성화가 압수되고 김범우가 희생되었다. 86년에 재건하였으나 91년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고발로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이 터져 정약용의 외종(外從)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처형당하였다. 95년 교회가 창설된 지 11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자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이다. 주신부의 내한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4,000명의 신도수를 헤아리게 되었으나 그의 밀입국을 밀고한 자가 있어, 주신부를 피신시키고 신부로 가장하였던 지황(池璜)·윤유일(尹有一)은 포도청에서 타살·순교당하였다. 그 후 주신부는 6년간을 숨어서 전교에 힘썼으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총회장 최창현(崔昌顯)이 투옥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써서 교인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임금의 교서가 전국에 내려지자, 포졸들을 전국에 풀어 이단원을 비롯하여 이가환(李家煥)·현감 이승훈, 승지 정약용, 홍낙민(洪樂民)·권철신·정약종, 여회장(女會長)인 강완숙(姜完淑)과 그 가족을 잡아냈으며, 이어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희생된 교인수는 300명이 넘었으며, 나중에 자수한 주문모 신부도 한강 새남터에서 효수(梟首)되니, 이때부터 외국인 성직자를 새남터 형장에서 처형하는 선례가 되었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다시 지하로 잠복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36년간이나 목자(牧者) 없이 지내다가 강원도로 피신하였던 신대보(申大甫)와 그의 고종사촌인 이여진(李如眞) 등의 노력으로 재건되었는데, 이여진은 수차 베이징에 가서 조선 교회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재건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인 11년, 조선 국왕은 다시 전국에 명령하여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게 하여 이른바 ‘지방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도·강원도 등에서 수백 명이 잡혀 사형 또는 귀양을 갔으며, 일부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박해가 일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교회재건운동을 일으킨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둘째 아들 하상(夏祥) 바오로이다. 정하상은 16년부터 거의 해마다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전교에도 힘썼다. 그러는 사이에도 27년 또다시 박해가 전라도 지방에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90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순교자는 10여 명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되었다. 31년 9월 9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두 가지 교서를 발표하였으니, 그 하나는 조선교회를 베이징교구로부터 분리, 독립된 교구로 승격시킨다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브뤼기에르(한국성 蘇) 신부를 조선교구 초대 주교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교회 창설 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소신부가 조선 입국의 길을 찾다가 35년 뇌일혈로 급서하자 프랑스의 모방[羅伯多祿] 신부가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입국에 성공하였고, 뒤이어 샤스탕[鄭牙各伯] 신부가 입국하여 전교에 힘썼다. 이때 나신부는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착안하고 최양업(崔良業), 최(崔)프란체스코, 김대건(金大建)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로마 인류복음화성성[傳敎聖省] 동양경리부에서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이들은 조선시대에 해외로 보내진 최초의 유학생이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선각자들이었다. 37년, 로마 교황청은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전교 중이던 앵베르[范世亨] 신부를 조선교구의 제2대 주교로 임명하여 그가 이듬해 정월 무사히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 창설 7년 만에 비로소 주인을 만나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김조순(金祖淳)은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하였으므로, 그들 세 신부는 열심히 전교하여 2,000명 가까운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전국의 교인수가 9,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조순이 죽고 풍양조씨(豊壤趙氏)가 세력을 잡자 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 118명이 체포되고, 그 중에서 정하상·유진길(劉進吉)을 비롯한 69명이 순교하였으며, 이때 외국인 신부 범주교·정신부·나신부 등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가장 큰 일을 이룩한 순교자는 정하상이었다. 그는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잡힐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上宰相書)>의 글을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렸다. 이 글에서 천주교가 조금도 그릇된 교가 아님을 역사적으로 변호하고 주자학의 허례허식을 논박하였는데, 이 글은 87년 홍콩에서 책자로 간행되어 중국 전교에도 사용되었다. 한편, 마카오로 유학하였던 김대건은 44년 부제(副祭)가 되고 이듬해 조선교구 제3대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高] 주교의 집전으로 상하이[上海]에서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安敦伊] 신부와 함께 어렵게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700여 명에게 성사를 주었고 교우의 수는 갑자기 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페레올 신부의 명령으로, 앞서 함께 유학을 떠났던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李] 신부를 맞이하러 연평도에 갔다가 체포되어 ‘병오(丙午)박해’가 일어났다. 김대건 주교는 새남터에서 순교하고 현석문(玄錫文) 이하 20여 명이 잡혀 그 중 9명이 처형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1925년 한국 순교자 79명을 시복(諡福)하였다. 철종(哲宗)시대에 이르러 천주교는 보호받아 교세를 크게 떨쳤으며 베르뇌[張敬一] 신부를 비롯한 10여 명의 신부가 내한하고 최양업도 신부가 되어 귀국하였는데, 그는 전국의 3,700여 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그러나 철종이 죽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원군이 집정하자, 다시 병인(丙寅)박해를 일으켜 1871년까지 근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외국 함선의 내침으로 박해를 거듭 겪어오다가 86년 한·프랑스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가까스로 전교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용산신학교의 개설, 성 바오로수녀회의 진출, 성서 활판소를 개설하였고, 98년에는 명동 대성당의 축성식을 올렸다. 1900년 전국에는 프랑스 성직자 40명, 한국인 신부 12명, 41곳의 성당과 4만 2000명의 신자가 있어 그 교세가 제주도에까지 퍼졌는데, 1901년 제주도에서 다시 한 번 박해를 겪어 700여 명의 교인이 희생을 당하였다. 이같이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도 가톨릭교는 발전을 거듭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인 41년에는 9개 교구와 169명의 외국인 신부, 139명의 한국인 신부, 18만 명의 신자로 증가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일어 사용이 강요되고 일본식 이름으로의 창씨개명·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는 한편, 각 교구의 외국인 성직자를 가두었다가 미국인 성직자는 본국으로 추방하고 기타 성직자들은 행동을 감시하였다. 42년 서울 교구의 라리보 신부가 그 직책을 노기남(盧基南) 신부에게 넘기고 은퇴하자, 노신부는 교황청 지시에 따라 평양과 춘천교구장도 겸임하였다. 같은 해 12월 노신부는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주교 임명장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주교가 되었고, 43년에는 홍용호(洪龍浩) 신부가 평양교구장이 되어 이듬해 성성식(成聖式)을 가졌다. 한편 일제는 대구와 광주교구에 일본인 신부를 임명하고 각 성당들을 병사(兵舍)로 사용하는가 하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한국인 신부들을 구속하는 등 온갖 횡포를 자행하다가 8·15광복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국토가 양단되고, 북한 지역은 공산집단에 의해 종교 자체가 말살되면서 이 지역 천주교는 또다시 큰 박해를 받았다. 각 교구의 주교를 비롯하여 신부·수사(修士)·수녀가 모조리 체포되고, 수많은 교인이 수난을 당하는 한편, 성당·수도원·신학교·병원 등의 시설은 모두 몰수하여 그들의 기관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50년 6월 25일 남침을 자행한 북한군은 미처 피난가지 못한 남한 지역의 성직자·수도자를 납치하여 갔으며, 성당·학교 등은 파괴되고 많은 평신도가 희생당함으로써 한국 천주교 사상 마지막으로 여겨지는 박해를 겪어야만 했다. 6·25전쟁 후 북한지역의 천주교는 거의 그 명맥을 잃었고 교인들도 자신이 교인임을 표면에 내세우지 못하는 비참한 환경에 처하였다. 반대로 남한지역의 천주교는 54년, 6개 교구에 교인수 18만 9000명에 불과하던 것이 94년 12월 현재 15개 교구에 교인수 334만 명이라는 큰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성직자도 대주교 2명(한국인), 주교 18명(한국인 16, 외국인 2), 한국인 신부 2,072명, 외국인 신부 210명, 수사(修士) 한국인 496명, 외국인 21명, 수녀 한국인 6,632명, 외국인 212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문화·복지사업도 유치원 230, 초등학교 6, 중학교 26, 고등학교 36, 대학 10, 대신학교 6, 기타 특수학교 19곳에 이르고 있으며, 그 밖에 병원·의원 36곳, 종합복지기관 270곳 등을 운영하고 있다. 69년에는 서울대교구의 대주교 김수환(金壽煥)이 추기경(樞機卿)으로 임명되었다. 68년에는 100년 전 병인박해에서 순교한 근 1만 명의 신도 중에서 24위에게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諡福)함으로써 한국의 복자위(福者位)는 모두 103위가 되었는데, 83년 9월 로마 교황청은 이들 복자를 다시 성인(聖人)으로 승품시켰고, 84년 5월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서울식전에서 이들 복자위 성인 승품식을 친히 집전하였다. 이어 88년에는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였다.

 항목차례

  

  東方正敎會(Eastern Orthodoxy)

 

  사도시대부터 예루살렘·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이집트·인도·그리스·동유럽·러시아 방면으로 발전하여 분포되고 오리엔트의 헬라문화권 안에서 성장한 그리스도교회의 총칭. 서방(라틴) 교회의 상대적 의미로 동방교회라 호칭되지만 더 깊은 뜻은 죽음에서 부활한 빛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이 동방(東方)에서 떠오른다는 데 있다. 파스카(Πασχα)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서방에서는 아직도 ‘East Day’(동방의 날)라고 한다. 동방정교회라고 할 때 정(正:Orthodox)이란 사도전통·교부전통의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믿음, 올바른 예배의 의미를 지닌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 신앙의 교회이므로 그냥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최고의 권위】 정교회에서는 세계공의회(世界公議會:Ecumenical Council)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 주교들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할 때 전체교회의 승인과 동의를 받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래야만 공의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히 인정되는 것이다.

【일곱 공의회】 정교회에서는 일곱 공의회, 즉 325년의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81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의 제3차 에페수스 공의회, 451년의 제4차 칼케돈(할키돈) 공의회, 553년의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80년의 제6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787년의 제7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 일곱 공의회에서 결정된 주요내용은 먼저 교회의 신조(Creed: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가 확정되어 교회의 신앙으로 지금까지 고백되고 있다. 다음으로 전체 그리스도교회의 가시적 조직이 선언되었는데, 대표적인 행정구역으로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인데 이를 펜타르키(Pentarchy:5집정 관할구역)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화(成肉化:Incarnation)의 교리와 연관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호칭은 테오토코스(θεοτοκοζ:하느님의 어머니)로 결정되었으며,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확고히 하였다. 끝으로 성화상(聖畵像:이콘) 공경은 성화상이 상징하는 내용을 공경하는 것임을 확실히 하였다.

【교회의 이교】 그리스도교계의 대표적인 문화권은 셈문화권·그리스문화권·라틴문화권 등 3문화권으로 대별할 수 있다. 초대교회 때 신학자들과 저술가 그리고 교회학교로 번성했던 셈문화권의 교회(Oriental Church) 곧 네스토리우스교회와 아르메니아교회, 시리아교회(Jacobite Church라고도 함), 이집트교회(Coptic Church), 에티오피아교회, 인디아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소위 단성론파(單性論派:Monophicism)라는 이름으로 갈라져 나갔다. 두번째로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한 라틴문화권교회(Western, Latin, Roman Catholic Church)와 그리스문화권교회(Eastern, Greek Orthodox Church) 간에는 문화적·정치적·경제적 요소들과 교황권 및 필리오퀘(Filioque)라는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후 1274년에는 리옹에서, 1438년에는 피렌체에서 터키의 위협에 직면한 그리스교회가 라틴교회와 화해의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 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터키에 함락되어 그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고 역사적인 성 소피아대성당은 터키의 박물관으로 바뀐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터키 치하에서 동방정교회는 제2등급 종교로 전락되는 한편, 교회조직은 터키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려면 터키 정부의 재가를 얻어야 했고, 상당한 대가(세금과 같은)를 지불해야 했다. 총대주교의 자리는 주로 반라틴적인 인물에게 주어졌다. 터키 정권은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 등의 총대주교좌를 형식적으로는 정교회의 독립관구로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에 예속시켰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도 콘스탄티노플에 종속되게 하였다.

【지역 정교회들의 독립】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터키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국가의 정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간섭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스는 1833년, 루마니아는 64년, 불가리아는 71년, 세르비아는 79년에 각각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치적 교회로 행보함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관할구역은 아주 작아지고 말았으며, 아직도 터키정부의 압력하에 있다.

【러시아 정교회】 기원 후, 1세기경 사도 안드레아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북동쪽 대륙으로 선교의 발걸음을 옮겨서 흑해(黑海) 주변 시노페와 코르순 지역에서 선교했다고 한다(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 사도 안드레아가 방문 선교했던 지역은 후일 키예프와 노보고라드라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988년 키예프공국의 블라디미르대공(980~1015)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1019년 야로슬라브 공(1015~1054)이 키예프 러시아의 권력자가 되어 러시아를 그리스도교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1037년에는 테오 펨프스 대주교가 키예프 러시아의 수좌주교로 착좌하였다. 1237년 11월 바투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입하여 1240년에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대공의 막내아들 다니엘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전쟁으로 찌든 러시아 백성들은 모스크바로 몰려들었고 이반 1세(다니엘의 둘째아들) 때에는 모스크바가 전체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1380년 9월 8일, 약세의 러시아 군대는 40만 몽골대군을 격전 끝에 격파함으로써 러시아는 정교회 국가로 남게 되었다. 1472년 이반 3세(1462~1505)는 마지막 비잔틴 황제의 조카 소피아 팔라이올로고스와 결혼하고 쌍두(雙頭) 독수리 문장(紋章)을 취하고 자칭 짜르, 곧 황제가 되어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로서 러시아를 제3의 로마라 불렀다. 1589년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축성되어 욥(1589~1605)이 초대 총대주교로 취임하였다. 1917년 이래로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파괴했다. 18년 2월 1일 총대주교 티콘은 무신론 정권을 파문하고 무신론 정권에 동조하는 성직자들의 집단, 곧 ‘살아 있는 교회’를 단죄하였다. 20년 11월 20일 티콘 총대주교는 자기가 투옥될 것을 예견하고 주교들의 자치적인 조직을 증언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21년 세르비아 총대주교의 입회하에 칼루프치에서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를 조직하였다. 22년 서유럽의 엑사르크 에블로기 수좌대주교와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주교들은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를 재조직하였다. 1921년 이후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는 유고슬라비아의 칼루프치에서 독일 뮌헨으로 그 본부를 옮겼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41년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던 스탈린은 교회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러시아 안의 정교회에 다소 자유를 주었다. 당시 소련 헌법에는 반종교활동의 자유가 있다는 조항을 두어서 교회의 사회활동 금지, 사제교육 금지, 종교교육 금지, 액션단체 조직 활동 금지, 교회내 도서실 폐쇄, 성경 및 교회서적 출판금지, 교회의 토지·건물·현금은 언제든지 몰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90년 이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자 교회의 개방은 급격히 증가되어 90년 모스크바 관구에는 40개의 성당이 문을 열었다. 93년에는 300여개가 넘는 성당들이 문을 열고 열심히 선교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동방정교회】 러시아정교회는 1897년 러시아정교회 시노드가 한국(조선)에 선교사 파송을 발의함으로써 러시아정교회의 한국선교사업은 시작되었다. 1898년에 니콜라이 부제가, 1900년에는 크리산토스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청일전쟁, 러일전쟁, 무신론 공산주의 혁명, 제1, 2차 세계대전, 6·25전쟁을 겪는 동안 한국에서의 러시아정교회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러시아정교회 한국인 첫 사제는 요한 강탁(1912년 서품)이었으며 두번째로 루가 김희춘 신부가 방인사제로 활동했고(24), 50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강제 납북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의 활동이 있었다. 56년 한국의 정교회 공동체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이 됨으로써 한국에서 러시아정교회 선교사업은 사실상 막을 내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94년 부활절에 러시아정교회 시노드(해외)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정교회 신학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유스틴 강태용(姜泰鎔) 신부를 러시아정교회 한국선교부 주관사제로 임명함으로써 한국에서의 러시아정교회 선교활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스정교회는 1954년 주한 그리스군 종군사제로서 활동하던 안드레아스 할키오풀로스 신부가 보리스 문이춘을 사제로 추천하여 일본정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게 하였다. 56년 보리스 문이춘 신부는 한국에 남아 있던 정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관할 미국 그리스정교회 대관구에 소속되었다가 70년 이후 뉴질랜드 대관구로 소속을 옮겼다. 75년 말 그리스정교회 아르키 만드링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신부가 내한하여 그리스정교회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93년 초에 주교로 서품되었다. 95년 4월 8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로톨로메오스 1세(이스탄불 주재)가 5박 6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가르침과 전통】 정교회의 가르침은 성경과 성전(聖傳:Sacret Tradition)에 기초한다. 성경은 70인역(Septuaginta)으로서 구약 49권과 신약 76권이다. 구약에 붙어 있는 제2경전(외경)은 교리나 신학적으로 권위는 없다. 교회력은 대체적으로 율리우스력을 사용한다. 교회력의 중심이 되는 부활절은 춘분이 지나고 음력 보름이 지나서 다시 한 주간이 지난 주일이다. 성탄절은 1월 7일이다. 성사는 대표적으로 7가지 성사가 있다. 그러나 수(數)에 구애되지는 않는다. 집행상 라틴교회와 다른 것은 견진성사에서 주교가 축성한 성유(聖油)로 사제가 집전한다. 성체·성혈 성사는 아기에게도 해준다. 신품성사에서 독신 남성, 기혼 남성 모두가 서품될 수 있지만 서품 후에는 결혼 또는 재혼은 할 수 없다. 주교는 독신 성직자와 홀로 된 성직자 중에서 선임된다. 정교회 예배는 다양하다. 연중 매주일 아침(때로는 토요일 밤)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 곧 조과(早課)가 집전된다. 물론 성령강림절은 제외된다. 그리고 만과, 시과예배가 있고 절기와 교회력에 따른 다양한 예배가 있다. 정교회 예배 중 대표적인 것은 리투르기아라고 하는 ‘거룩한 성찬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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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파(Arianism)

 

  4세기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아리우스의 주장을 교의로 삼는 일파.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는, “성부(聖父)·성자(聖子)·성신(聖神)의 세 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養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 후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 아래서는 전 로마 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361)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이른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후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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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medieval philosophy)

 

  4∼5세기 로마 제국 몰락부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철학적 사변. 좁은 의미의 중세철학은 서(西)로마 제국의 멸망을 고대의 종말로 보고 그 이후를 중세로 보는 역사학상의 시대구분을 따라 5세기 말에서 15∼1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의 서양철학을 말한다. 이 좁은 의미의 중세철학은 스콜라 철학과 거의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중세철학은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도 할 만큼 그리스도교 신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교부시대(敎父時代)를 더 거슬러 올라가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까지 중세철학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중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세철학은 그리스·로마 초기의 고대 철학과는 당연히 이질적인 관심과 요구에서 출발하였다. 그 발단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복음의 선포, 사도들의 선교활동, 초대교회의 형성이라는 종교적 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중세철학의 근본 주체는 그리스도교와 그 모태가 된 유대교의 종교적 세계관 속에 그 싹을 볼 수 있다. 이 세계관은 이미 구약성서의 《창세기》 가운데 신화적인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신(神)은 유일(唯一)의 절대자요, 세계와 그 안의 만물은 ‘무(無)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하고 인간에게 ‘신의 모습(imago Dei)’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세계관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적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명확히 자각되면서 처음에는 ‘이 세상의 지혜’인 그리스적 자연관이나 합리주의와의 대립으로서 나타났다. 이 자각은 그의 논리적 심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리스 철학을 방법으로서 채용하게 되고, 신앙적 세계의 이해는 점차 신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는 중세철학의 걸음은 이러한 신앙적 세계관의 논리화, 체계화라고 볼 수 있다.

【중세철학의 방법】 중세철학은 우선 그리스도교가 자기의 신앙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지적인 반대자의 공격이나 비웃음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한 변증(辨證)의 도구로서 출발하였다.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철학의 자립성이 더욱 증대되었는데, 이러한 입장은 중세철학의 어떤 시기에도 해당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중세철학에 중요한 구실을 한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도 공통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중세철학은 그리스적 논리나 이성만을 논증의 유일한 방법으로 삼지 않고 대체로 다음 세 가지 방법을 병용하였다. ① 인간이성에 보편적으로 승인되어야 하는 논리학적인 제원리, ② 세계나 인간에 대한 경험이나 관찰에 근거한 지식, ③ 종교상의 권위에 의하여 진리로 인정된 계시나 교의이다. 이 중에서 첫째 원리는 그리스 철학에 의존했는데, 교부시대에는 주로 플라톤 철학을 규범으로 삼았으며,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論理學)이 이에 덧붙여졌다. 그 후에는 신(新)플라톤적인 절충주의가, 13세기 후에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가 주류를 이루었다.

【중세철학의 전개】 그리스철학을 최초로 교부학(敎父學)과 결부시킨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론이다. 플라톤 철학은 그를 중개로 하여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공통사상이 되어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계승되었다. 보이티우스는 그리스도교적은 아니었으나 플라톤 이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제저작을 번역·해설하여 그것을 서유럽에 소개함으로써 다가올 스콜라철학의 준비를 갖추었다. 최고 존재자인 신으로부터 질료적 피조물(質料的被造物)에 이르는 세계의 제존재의 질서를 신플라톤적 색채가 짙은 신비주의적 세계상(世界像)으로 종합 정리한 위(僞)디오니시우스는 그 후의 중세적·세계적 세계관의 윤곽을 제공하였다. 스콜라 철학 시대가 되자 논리적 요구가 더욱 고조되고 신앙에 가능한 한 합리적 기초를 부여하기 위한 신학의 학적 정비(學的整備)가 적극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화해(和解)를 구하는 신앙(fides quaderens intellectum)’이라는 안셀무스의 입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나타낸다. 중세 최고의 예리한 변론가인 아벨라르는 이와 같은 논리적 요구를 한층 더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촉진제가 되었다. 13세기에는 풍부한 그리스 철학의 문헌을 가진 아라비아 문화권 철학자들의 영향으로 스콜라 철학은 전통적인 신학적 형이상학에 더하여 자연철학(自然哲學)에의 확대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T.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적 방법을 채용함으로써 이 방면의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그때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성과를 종합하는 일대 체계를 완성하여 중세철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중세철학이 사용한 제2의 논거인 관찰·경험에 의거한 지식은,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가 키케로를 통하여 배웠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자체의 내면성이 이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계시(啓示)나 종교상의 권위를 논증의 근거로 하는 경우에는 대개 교회가 승인한 사항이 증거로 제시되었는데, 스콜라 철학 시대에는 교부, 그 중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철학의 의의】 중세철학은 이와 같은 몇가지 근거로 나타나는 진리를 상호 모순되는 일 없이 조화시키려 함으로써 고대와 근대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정신적 세계를 구축하고, 그 논증법을 개발하였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종교적 제약도 있었고, 또 철학이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로서의 역할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중세철학은 그 독자성과 심원성(深遠性)을 지닌다. 신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통일적인 질서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의 확실한 근거를 추구해 온 점은 중세철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르네상스 이후 경시되었던 중세철학은 19세기 후반부터 급속하게 재인식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C.보임커, M.울프, M.그라프만, E.H.질송 등의 연구로 점점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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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철학(patristic philosophy)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의 철학·사상 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 고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저술로써 설명하고, 성스러운 생활을 함으로써 신도의 모범이 된 사람들을 교부라는 이름으로 존중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이들 교부의 저술이 정통교리의 권위로서 후대에서도 인용되었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를 통틀어 교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교부의 저술에 대한 연구는 교부학(敎父學)이라고 한다. 교부는 대개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예에 정통한 사람들로서 그 중에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도인 사람도 있고 커서 개종한 사람도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고대문명의 유산, 특히 시인과 철학가의 학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스도교는 처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단일성 때문에 고대 이교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인 원천에서 나온 종교로 등장하였지만, 차차 고대 이교세계까지 교세를 넓힘에 따라 고대문명, 특히 그리스 철학사상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들이 교부인데, 이들 교부들이 고대문명 속에서 불멸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진리 그 자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이를 섭취하였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이성으로써는 해명될 수 없는 신비이기는 하지만,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교리 그 자체도 이성적인 구조(構造)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그리스도 사상이 하나의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세워진 것이다. 교부시대는 2~7세기 또는 8세기까지에 이른다. 그리스 교부란 그리스어(語)로 저술활동을 한 동방의 교부를 말하고, 라틴 교부란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한 서유럽의 교부를 말한다. 19세기에 J.P.미뉴가 편찬한 《그리스 교부집성》 162권과 《라틴 교부집성》 221권은 이 방면에서는 가장 총괄적인 것이다. 그리스 교부는 사변적(思辨的)이어서,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궁극의 철학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명하려 하였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통일성이 없이 혼재하고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조화된 그리스도 사상으로 통일되어 갔다.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를 거친 다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접촉한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아테나고라스는 “이것만이 유일한 참된 철학”이라고 부르짖은 2세기의 교부이며 호교가였다. 3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의학교(敎義學校)를 지도한 클레멘스·오리게네스가 있고, 4세기에는 카파도키아 지방에서 활약한 그레고리우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그리스 교부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라틴 교부로는 그 유명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푸리아누스·암브로시우스·아우구스티누스 등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명한 로마의 변론가인 그는 이교도적 교양으로부터,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고백록》을 썼다. 이것은 이교문명으로부터 그리스도교 문명으로 옮겨가는 시대의 고뇌와 환희를 한 사람의 내면의 역사로 부각시킨 것으로서, 정신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록이 되어 있다. 그가 여기에서 그려낸, 인간의 내면의 지주(支柱)가 되고 빛을 밝혀주는 ‘내면의 신(神)’의 사상은 그 후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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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11.13∼430.8.28)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사상가.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성인(聖人).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告白錄)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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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Scholasticism)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철학. 중세 초기에 샤를 대제(大帝)는 유럽 각지에 신학원(神學院)을 설립하고 학문육성에 진력하였다. 스콜라학의 명칭은 이 신학원 교수(doctores scholastici)에서 유래하며, 그 후 중세의 신학원과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을 널리 스콜라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한 부문인 철학 분야이다. 스콜라학은 이 때문에 중세의 신학(神學)·철학 연구 전반을 총괄하는 것으로 매우 다방면에 걸친 것이지만 거기에는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도 있다. 그것은 중세의 학문연구방법(스콜라학적 방법)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에 의하여 중세철학의 본연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규정되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대체로 성서와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자, 기타 저술가의 저서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저서의 독해·주석·해석이 그 첫째 작업이었다. 이 무렵 성서는 신(神)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성서의 권위). ② 신의 말은 먼저 신앙에 의하여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앙’은 인간이 거기에 내포되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 사람으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라는 것이 스콜라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 때 신앙과 이해(또는 이성)는 서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요구하면서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 용해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중세철학을 구성하는 두 요인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을 ‘신학의 하녀’라 하여 한편에 대한 예속관계로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스콜라철학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예속되는 곳에서는 상실되며, 긴장관계에 있는 양자의 종합에 의해서만 스콜라학이 성립된다. 스콜라학의 다양성은 이 종합의 다양성에 있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작은 이를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하나의 문제점에 따라 참조되는 여러 전거(典據)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설(說)이 수집·정리되었다. 12세기 초, 페트루스 롬발드스의 《명제론집(命題論集)》은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아벨라르두스는 이들 여러 견해를 하나하나의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양자로 분류하는 방법(그렇다와 아니다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슴마(완전한 단일로서 간결한 총괄)는 이들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의 조화와 종합의 시도로서 여러 영역에 관하여 이루어진 여러 설의 집대성이며, 참으로 학술의 종합이라고 할 만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은 그 중 가장 저명한 것이다.

【초기】 샤를 대제 시대부터 12세기까지이며 신(新)플라톤파 철학을 도입하여 가짜 디오니시오스(Dionysios)의 번역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스코투스 에류게나, 신앙과 이성(理性)의 관계를 명확히 한정시키고 스콜라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켄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神)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증명은 유명하다.

【전성기】 13세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서(自然學書)를 아라비아 철학에서 이입함으로써 종래의 신학으로부터는 독립된 지적 연구(知的硏究)가 일어난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적으로 채용하고 게다가 이것을 전통적인 스콜라학의 체계 속에 혼연히 융화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 전체는 신학의 체계로서 종합되었다. 이에 비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

【말기】 14세기로, 신앙과 이성과의 조화가 점차 상실되었다. 유명론자(唯名論者) W.오컴,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 M.J.에크하르트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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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의 侍女(ancilla theologiae)

 

  중세 이탈리아의 신학자 P.다미아니가 신학에 대한 철학의 위상(位相)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명칭. 즉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당시 성서의 권위에 대하여 이성(理性)의 권위를 강조한 변증학(辯證學:dialectica)이라는 철학적 학문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변증학이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경우의 기준을 만들고, 변증학은 여주인에게 봉사하는 시녀와 같이 신학에 예속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철학이 신앙의 진리나 신학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를 표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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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3. 7)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신학자.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 출생. 성주(城主)의 아들로 처음에 나폴리대학에 입학했으나 설교 및 학문연구를 사명으로 하는 도미니코회(會)에 들어가 파리와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하였으며, 그 동안에 사제(司祭)가 되었다. 1252년 파리대학 신학부의 조수로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성서 및 《명제집(命題集)》의 주해에 종사하였고, 57년 신학교수가 되었다. 59년 이후 약 10년 간 이탈리아 각지에서 교수 및 저작에 종사, 68∼72년 재차 파리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나폴리로 옮겼다. 74년 리옹 공의회(公議會)에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는데, 그 종류는 그가 대학교수 및 수도회원으로서 행한 각종 활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선 《신학대전(神學大全):Summa Theologiae》(1266∼73)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Summa de Veritate Catholicae Fidei Contra Gentiles》(59∼64) 등의 교과서적·체계적 저작을 꼽을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하여》 《신의 능력에 대하여》 등 그가 교수로서 지도한 토론의 기록과 성서의 주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 그리고 프로클로스, 가짜 디오니시오스, 보에티우스 등의 저작 주해 및 신학과 철학의 갖가지 문제에 대하여 논한 소논집(小論集) 등이 있다. 그는 ‘스콜라철학의 왕’이라 불리고,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또 ‘공동(共同)의 박사(Doctor Communis)’라는 존칭이 주어졌다. 그는 《대이교도대전》의 권두에서 예지(叡智)의 탐구는 모든 인간의 영위(營爲) 중에서도 가장 완전·고귀·유익하여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라 찬미하였지만,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할 말을 고른다면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 바로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 예지의 탐구란 신학·철학의 어떤 말로 불리든 간에, 주체 외부에 체계 혹은 작품을 쌓아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궁극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자기실현의 발걸음이었다. 거기에 토마스 철학의 ‘실존적’ 성격이 있다.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복도, 그리스도교화도 아니며,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철저한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思辨)을 양립시켰는데, 이와 같이 독자적인 종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창조(創造)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존재(存在)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비길 데 없는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사상의 완성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가 신(神)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相對的自律)을 확립한 일은 곧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세속적인 근대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인(近代人)이며, 그 영향은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훨씬 초월하여 현대 사상 전역에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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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大典(Summa Theologiae)

 

  중세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표적인 저작. 3부로 된 대작으로서 제자들에 의해서 보완되었다. 저작연대는 1272~73년까지이다. 제1부에서는 유일신의 존재와 본질 및 창조, 천사·인간, 신의 세계통치 등 즉 신론(神論) 119문제를, 제2부는 1·2편으로 나누어 189문제의 인간론을 다루었다. 1편에서는 인간의 목적·행위·죄·법 등 도덕의 근본문제, 2편에서는 신앙·희망·사랑·정의·용기·절제 등의 덕(德)에 관한 부분을 다루었다. 그리고 제3부에서는 그리스도론을 비롯한 신학적 문제 180문제를 서술하였다. 미완인 채로 죽자 제자 피페르노의 레지날도 등이 아퀴나스의 다른 작품을 인용하여 신학상의 문제 90개항을 보완하여 펴낸 것이다. 그 구성은 13세기에 완성한 대전의 전형으로 각 부는 많은 ‘문제(quaestio)’로 나누고, 문제는 다시 ‘항(articulus)’으로 세분하였다. 각 항은 문제형식으로 주제가 주어지고 여기에 대한 반론과 본문, 반론에 대한 응답 순서로 논지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중세대학 특유의 수업방식인 ‘토론(討論)’에 입각하여 짜여진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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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普遍論爭(controversy of universal)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중세 유럽에서 ‘보편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존재론적·논리학적인 철학논쟁. ‘보편에 대한 문제’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대결이라는 형태로 이미 논의한 문제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중세에 들어오자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어 중세의 논리학·존재론의 정치(精緻)한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① 보편은 ‘명칭’ 또는 ‘음성의 흐름(flatos vocis)’에 지나지 않고 실재(實在) 안에는 개물(個物)만이 존재한다는 설(說)로 이것은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이라고 불리며 대표자는 로스켈리누스이다. 14세기에 오캄은 이 설을 다시 들고 나와 중세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근세 철학에의 이행(移行)을 준비하였다. ② 보편이 실재 안에 실체(實體)로서 존재한다는 설로 이것은 실재론(實在論:realism)이라고 하며, 대표자는 기욤(샹보의)이다. 이 설에 의하면,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공통된 실체에 우유성(偶有性)이 가해져서 개개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③ 이 양극론(兩極論) 중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P.아벨라르의 설이 유명하다. 이에 의하면 보편은 ‘언어(sermo)’이다. 즉 그것은 음성이나 실체라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여기에선 개물)에 대하여 ‘말하여지는 것’이라 하였다. 이 설은 사고(思考)에 의해 파악되는 ‘뜻’의 영역을 ‘존재’의 영역과는 다른 영역으로서 확립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중세의 의미론·존재론의 정밀한 전개는 그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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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名論(nominalism)

 

  보편자(普遍者)는 명사(名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그 실재(實在)를 부정하는 철학상의 입장. 명목론(名目論)이라고도 한다. 실재론(實在論)과 대립한다. 실재하는 것은 개체(個體)뿐으로, 예를 들면 빨강이라고 하는 보편개념은 많은 빨간 것을 갖는 빨강이라는 공통 성질에 대하여 주어진 말, 혹은 기호로서, 빨간 것을 떠나서 빨강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극단적인 유명론은 이 명사를 주어진 근거로 하여 사물간의 유사성(類似性)이라는 것마저 부정한다. 실재론·개념론과 함께 유럽 중세(中世)의 보편 논쟁으로 일파(一派)를 이루었다. 11세기 후반기에 로스켈리누스가 이 입장을 대표했으며, 14세기에는 W.오컴이 체계적 이론을 전개하였다. 17세기 때 영국의 경험론 속에서 부활하였는데 T.홉스가 그 대표자이다. 중세에서는 플라톤적 실재론과 결부하였던 정통신학(正統神學)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위험사상시되었고, 명백히 유물론적 색채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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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在論(realism)

 

  인식론(認識論)의 사고 방식으로 의식·주관과 독립된 객관적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올바른 인식의 목적 또는 기준으로 삼는 입장. 관념론(觀念論)과 대립되는 입장이지만 보편개념의 실재를 인정하는 의미에서는 대립되지 않는다. 즉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스콜라신학의 정통파, F.브렌타노, B.볼차노, E.후설 등의 현상학(現象學)이나 A.마이농 등의 대상론(對象論)의 입장과 같이 개물(個物:하나하나의 책상이나 삼각형의 도형 등)의 실재를 인정하는 입장도 실재론이라 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경험적 실재로서의 개물과는 다른 초월적(超越的) 관념론적(觀念論的) 대상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이다. 그 때문에 이 경향은 개물 이외에 보편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명론(唯名論)과 대립되고 용어로서의 ‘실념론(實念論)’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 실재론에서는 보편적인 문제는 별도로 하고 다음 입장과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① 지각(知覺)·경험(經驗)을 그대로 실재라고 생각하는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다. 이것은 소박한 형이상학적 유물론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있으나 직접 여건의 주관성(主觀性)·상대성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심리학의 발달과 함께 예시(例示)되는 ‘착각(錯覺)’ 등에서도 명백하다. ② 따라서 빛깔·냄새와 같은 주관적인 제2성질(性質) 배후에 실재하는 객관적 성질로서의 물리적인 연장(延長)·고체성(固體性)·운동과 같은 제1성질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데카르트, 가생디, 특히 로크), 이는 인식의 근대과학에 의한 설명과 물질의 기계적 고찰의 진전에 따라 유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험적 실재로서는 심리적 착각 등의 예에서 제1성질이 제2성질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것이 분명하며 연장이나 운동 그 자체는 경험에서의 추상(抽象)의 소산이다. 게다가 과학적 탐구는 실재적 성질의 정의를 부단히 변화시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입장도 결함이 있다. ③ 이 때문에 I.칸트는 제1성질을 포함한 경험적 인식의 모든 대상을 ‘현상(現象)’이라 하고 그 배후에 인식의 가능성을 초월한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를 상징하였다. 칸트 이후의 다양한 실재론의 입장은 물자체라는 문제의 개념을 둘러싸고 생겨났다고 할 수도 있다. ④ 또 19~20세기에 걸쳐 G.W.F.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반동·비판으로서 전유럽에 다채로운 실재론과 실증주의의 입장이 생겼다. 칸트를 실재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신칸트학파의 일원(A.릴, N.하르트만 등), 유물론·모사설(模寫說)을 주장하면서도 소박실재론과 객관의 정적(靜的)인 인식을 버리고 동적(動的)인 과학적 실재론(科學的實在論)의 입장을 취하는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 등이 그 예이다. ⑤ 이상의 유럽 대륙,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흐름 외에, 영미(英美)에 유력한 현대실재론(現代實在論)이 있다. 즉 20세기 초에 영국 헤겔학파의 관념론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 대두한 B.러셀, G.무어, L.비트겐슈타인등 케임브리지학파는 미국의 R.B.페리 등 현대실재론과 함께 신실재론(新實在論)이라고 한다. 프래그머티즘도 일종의 경험적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케임브리지학파의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또 이 학파의 무어, 그리고 후기의 L.비트겐슈타인과 흐름을 같이 하는 영국 일상언어학파(英國日常言語學派)의 경향은 경험적 실재론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논점을 내포한다. 논리실증주의는 실재론과 관념론 및 양자의 대립 그 자체가 언어 용법의 혼란에서 생기는 형이상학적 의사문제(形而上學的擬似問題)라고 생각하고 일상언어학파도 공통의 논점을 계승하지만 다시 철학용어에 의한 비일상적인 추상적 개괄화(抽象的槪括化)를 버리면 경험적 대상의 실재를 인정하는 상식적(常識的) 입장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이 경향은 역사 및 문체 양면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점을 내포한다. 첫째, 그것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파에서 볼 수 있는 실재론 이론에 더욱 세련되고 면밀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둘째, 앞에 서술한 전통적인 여러 실재론은 어쨌든 경험적 여건의 배후에 제1성질이나 물자체를 가정하고 거기에 객관성과 올바른 인식의 근거를 찾는 모사설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비경험적인 실재의 성질에서 그것과 경험적 여건의 연관을 말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난점이 있으나 이들 현대실재론은 이와 같은 사고법을 배제한다. 셋째, 그 때문에 그것은 객관적으로 가정되는 실재의 과학적인 여러 성질이나 법칙도 구체적 경험에서 추상(抽象) 또는 구성된 기호체계(記號體系)로 생각한다. 더구나 그것들을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과 같이 실체화하지 않고, 특히 프래그머티즘과 같이 경험해명(經驗解明)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이해하고 경험적 실재론의 입장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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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社會

 

  고대사회 이후 지속되고 근세사회에 선행하는 역사적 사회 개념. 원래 중세라는 말은 고대와 근대의 중간 시대란 뜻으로 사용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시대구분법은 고대·근대의 이분법에서 고대·중세·근대의 삼분법으로 바뀌었다. 서양에서는 그리스·로마시대가 고대, 게르만 민족이동 이후 동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중세, 그 이후를 근대로 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중세라면 무가치한 시대요, 암흑 시대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중세를 처음 비판하고 나선 르네상스기의 인문주의자들과 그 이후의 근대주의자들이 신랄하게 중세의 문화와 사회를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근대 문화와 근대사회가 가지는 자체 모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면서 중세가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또, 중세라는 시대구분은 본래 유럽사를 서술하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동양사에서는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중국사뿐만 아니라, 한국사·일본사에서 중세란 어느 때부터 시작되며 어느 때 끝나는가 하는 것은 매우 큰 문제거리이며, 나아가서는 동양의 역사에 중세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까지 의문시되고 있다.

【유럽】 중세의 시작은 보통 5세기의 게르만 민족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보고 있고, 그 끝은 15세기 르네상스로 보는데, 이 1000년간을 다시 전·후기로 나누어 10세기까지를 중세 전기, 그 이후를 중세 후기로 나눈다. 일설에 따르면 중세는 르네상스로 끝나지 않고, 18세기의 프랑스 혁명까지 계속된다고 보고 있으며, 또 18세기의 계몽사상, 17세기의 과학혁명, 16세기의 종교개혁 등을 중세의 끝,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등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대체로 중세의 끝을 17, 18세기로 늦추는 것이 최근의 특징이다. 먼저 중세 전기의 사회를 고찰해 보면, 원시적인 게르만 사회가 로마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봉건사회로 이행하여 가는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경제는 극히 제한된 원거리 무역과 사치품 교역을 제외하면 자급자족적인 실물경제 단계에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일부 수도원에 고대 라틴문화가 계승되었을 뿐 일반 농촌사회는 암흑시대와 같았다. 정치적으로도 아직 봉건제도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여 불안한 중앙집권국가(프랑크 왕국)가 성립되었다가 다시 분열되었다. 11세기 이후 유럽의 중세사회는 전환기를 맞게 된다. 상업이 부흥하여 도처에 정기시(定期市)가 설치되어 그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중세도시의 발생은 지중해 무역이 다시 일어나고 상업이 부흥하게 된 이유 이외에도 농업 생산의 증대, 인구의 증가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도시는 자치권을 획득하여, 농민이 도망간 뒤 1년만 정착하게 되면 농노신분에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해방시킨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서로 동업조합을 조직하여 농촌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중세도시는 점차 확대 발전, 대학을 비롯한 문화시설이 들어서게 되어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기초를 닦아갔다. 도시로부터의 경제적 압력으로 농촌 경제의 구조가 변화하게 되었는데, 장원제도의 발전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봉건제도가 발전하였다는 사실이다. 때마침 십자군운동이 일어나 봉건기사 계급이 성장하는 가운데 유럽의 중세사회는 고도 봉건사회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13세기를 고비로 유럽 중세사회는 큰 위기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증상은 흑사병의 유행(1347∼51), 백년전쟁(1337∼1453), 농민 반란(1388) 등 일련의 사건으로 나타났다. 또, 이탈리아에서는 상업도시가 발달하면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 유럽 전역에 이데올로기 위기를 조성하였다. 한편, 지리상의 발견으로 세계관이 바뀌어 전통적인 가톨릭 사상을 부정하는 새 사조를 낳았다. 봉건체제의 위기가 심화되자 봉건지배층은 이에 대응되는 절대왕정 체제를 형성하였다. 절대왕정은 봉건제도의 증대되는 사회불안을 진압하기 위한 보다 조직적인 관료행정 체제라 할 수 있으나, 결국 영국·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근대 시민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근대개혁이 단행되었다. 동유럽 대다수의 나라들과 아시아·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도 혁명 대신 개혁이 단행되었다. 역사상 근대혁명이나 개혁이 중세사회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같으나, 혁명이냐 개혁이냐 하는 문제는 그 나라 의회민주정치의 발전여부와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다.

【중국·한국】 역사를 고대·중세·근대로 구분하는 방법은 유럽 역사의 시대구분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이 방법을 그대로 동양사에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그 불합리성에도 불구하고 시대구분의 불가피성과, 달리 대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고대와 근대로 나누는 2분법과 고대·중세·근대로 나누는 3분법이 동양사에서도 활용된다. 중국사에서 앞의 2분법에 따르면 19세기 중엽의 아편전쟁 이후와 이전을 근대와 고대로 보고 중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구분은 왕조중심의 시대구분보다 합리적이나 고대가 너무 길고 동양사회의 정체성 이론에 근거를 두는 것이므로 그대로 수긍하기 어렵다. 한국사에서도 1876년의 개항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는 시대구분이 있었으나, 똑같은 모순을 안고 있어 오늘에는 이미 낡은 견해가 되고 있다. 고대·중세·근대의 세 시대로 구분한다고 할 때에도 고대의 끝과 중세의 시작을 어느 때로 잡느냐에 따라 의견이 갈라진다. 일본학자들 사이에 당대까지는 고대, 송대부터 청말까지는 중세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봉건제도가 확립되었으므로 전혀 다른 시대구분이 필요하게 된다. 한국사의 경우에도 통일신라시대까지를 고대, 고려·조선 시대를 중세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이와 같은 시대구분의 불합리성이 지적되어 최근 새로운 시대구분이 시도되고 있다. 즉, 중국사에서와 같이 중세사회의 상징적 체제라 할 봉건제도가 이미 삼국시대(三國時代)에 확립되었으므로 서양의 시대구분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의 시작 역시 18세기의 실학사상 운동까지 소급시켜야 한다는 설이 강화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중세사회는 일본을 제외하면 서양의 봉건제 사회와 전혀 다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중앙집권적이며 관료주의적 가부장적 지배체제인 동양의 중세사회를 먼저 솔직이 시인하고, 유럽사의 시대구분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야 바른 시대구분이 성취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경제사에 집착하는 시대구분을 지양하고, 문명 상호간의 접촉을 중시하는 새로운 세계사 서술이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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封建制度(feudalism)

 

  중세 유럽에서 봉토수수(封土授受)에 의해서 성립되었던 지배계급 내의 주종(主從)관계, 또는 씨족적·혈연적 관계를 기반으로 했던 주(周)나라의 통치조직. 원래 봉건제도란 용어는 중국의 고대사에서 군현제도에 대응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주로 서양의 feudalism의 역어(譯語)로서 사용되고 있다.

【봉건제도의 개념】 학문상 통일된 개념이 없어 학자에 따라 제각기 상이한 봉건제도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나, 다음과 같이 3가지 개념으로 대별할 수 있다.

〈법제사적 개념〉 봉주(封主)와 봉신(封臣) 간의 주종서약(主從誓約)이라는 신분관계와 거기 대응하는 봉토(封土)의 수수라는 물권(物權)관계와 불가분의 결합체제를 말한다. 서유럽에서는 대략 8, 9세기에서 13세기까지 해당한다.

〈사회경제사적 개념〉 노예제의 붕괴 후에 성립되어 자본주의에 앞서서 존재하였던 영주(領主)와 농노(農奴) 사이의 지배·예속관계가 기조를 이룬 생산체제를 말한다. 이 생산체제에서 영주와 농노는 토지를 매개로 봉건지대를 수취·수납하였다. 봉건지대는 부역지대에서 생산물지대 또는 화폐지대로 바뀌어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어 갔으나, 여전히 영주의 경제외적인 지배와 공동체의 규제가 농민을 극심하게 속박하였는데, 서유럽에서는 6, 7세기에서 18세기 시민혁명 때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사회유형으로서의 개념〉 국왕 또는 황제를 정점으로 계서제(階序制)를 이루고, 신분제의 견지, 외적 권위의 강조 또는 전통의 고수라는 형태로 개인역량의 발휘와 내면적 권위의 존중 등이 억압된 사회를 말한다. 봉건사회가 세계사적으로 어떤 뜻을 지니느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씨족제의 붕괴과정에 있는 사회가 보편적인 국가이념과 종교를 이용하여 새로운 정치형성을 도모해 나갈 때에 생긴 역사적 조건의 우연한 산물로 보고 있으며, 필연적인 한 단계라고는 하지 않는다. 관료·군대가 없고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 있어서는 주종관계라고 하는 인적 결합의 강화에 의한 통일이야말로 국가 통치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봉건제 개념의 형성사】 봉건제 개념은 일반적으로는 프랑스에서 앙시앵 레짐(구제도) 하의 상황에서 생긴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봉건제(feodalite)’라는 용어 자체는 봉(封)을 뜻하는 라틴어 fevum, feodum의 형용사형인 feodalis에서 유래한다. 이 말이 프랑스어 속에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초기에 이르러서인데, 처음에는 어원에 충실하게 봉의 법적 자격이나 봉에 부수되는 고유의 부담(負擔)을 뜻하는 법률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봉건제라는 말이 ‘하나의 문명 상태’를 나타낸 역사용어로서 최초로 사용된 것은 불랭빌리에 백작의 《프랑스 구정체의 역사》(1727)에서이다. 그는 샤를 루아소 등의 절대주의 이론가에 대항하여 귀족의 봉건적 제권리를 옹호하려는 의도에서, 주권(主權)의 세분화야말로 게르만인의 침입 후 출현한 봉건정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었다고 논하였다. 불랭빌리에의 저서의 영향을 받은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48)에서 프랑크왕권의 성립과 그 해체의 과정 속에서 확립된 봉건법은 역사적 산물로서, ‘세계에서 한 번 이상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주장하고, 또 봉건정체에서는 주권이 대소 무수의 봉(封), 즉 영주지배권으로 분할되어 있어서 아나르시(anarchie:무정부상태)에의 경향을 가진 ‘봉(封)의 법(法)’이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볼테르는 정복 위에 구축된 봉건제는 특수한 유럽적인 역사현상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도, 《여러 국민의 습속·정신론》(56)에서 그 역시, 카롤링거 왕조 붕괴에 이은 10, 11세기에 프랑스나 독일 및 이탈리아에서는 정치권력이 성채를 거점으로 한 ‘무수한 소폭군(小暴君)’에 의해 분할 소유되어, 원수(元首)도 경찰도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 아나르시가 지배하는 ‘완전한 봉건정체’가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립적 영주지배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중세의 묵은 지배구조가 이미 소멸되어 단순한 역사적 추억으로 되어 있던 절대왕정시대에, 절대주의의 이상인 통일적·주권적 국가의 반전상(反轉像)으로서 주권의 세분화를 표지(標識)로 하는 봉건제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봉건제라는 말을 일반화하고, 혁명 전후의 상황으로 해서 새로운 봉건제의 개념이 정형화되어 갔다. 89년 8월 11일의 포고는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완전히 폐기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된 ‘봉건제’의 내용은 ‘봉건적 제권리’의 잔존물, 정확하게 말하면 토지영주제(土地領主制)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토지영주제야말로 봉건사회를 지탱하던 진정한 토대였다는 시각에서 귀족에 의한 농민의 정치적·사회적 지배기구로서의 봉건제 개념이 성립하게 되었다. 대체로 상술한 바와 같은 경과에 의해서 오늘날 관용되고 있는 3가지 봉건제의 개념의 원형이 성립되었었다. 그리고 그 후 19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의 사회학·문화사, 영국의 국민경제학, 독일의 중세국가논쟁을 통하여 봉건제의 개념은 다채로운 전개와 교류를 계속해 나갔다.

【봉건사회의 구조】 봉건사회에서 정치사회구조의 기축을 이루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봉(封), 즉 가신제(家臣制)였다. 한 개 또는 몇 개의 성채를 소유하는 성주(城主)는 성주지배권의 영주인 동시에 스스로 봉주로서 몇 사람의 기사(騎士)들로 구성된 봉신단(封臣團)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성주층도 각각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이 봉신(封臣)이 되어서, 대제후의 봉신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들 대제후 위에는 또한 국왕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기사를 최하층에 두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적인 계층서열이 형성되어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러나 봉건제는 그것 자체가 항상 아나르시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건사회가 하나의 정치질서로서 존속되어 나가기 위해서는 봉건제 외에 그 기초나 토대가 되는 비봉건적인 요소, 구체적으로는 각 층의 봉주가 자기의 봉신단에 대해 봉건법상의 의무의 충실한 이행을 강제하기에 족한 만큼의 봉주로서의 권위와 그 권위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직접적·가산적(家産的) 지배영역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현실의 봉건사회는 더욱이 부분적으로만의 봉건사회로서, 그 내부구조는 봉건제와 가산제(家産制)라는 이원적 원리에 의해서 편성되어 있었다. 먼저 대제후 지배권에 대해 살펴보면, ① 대제후의 직접적 지배하에서, 대관(代官)이라는 직명을 가진 관리가 관리하던 직할성주 지배권, ② 대제후의 봉신인 성주층의 지배하에 있는 수봉(授封)성주 지배권의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왕국 전체에 대해 살펴보면, 국왕의 지배권의 대상은 ① 국왕의 직할성주 지배권, ② 국왕의 직속신하인 성주층의 수봉성주 지배권, ③ 대제후 지배권의 셋으로 나누었는데, 그 중 ①과 ②가 결합되어 국왕직속의 대제후 지배권을 형성하였다. 그 위에 다시 봉건제와 가산제라는 이원적 조직원리는 성주 지배권의 내부구조에도 관철되어서, 직할·수봉 성주 지배권은 ① 대관과 성주의 직접적 지배영지, ② 그들의 봉신인 기사층(騎士層)의 영지 등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①은 한 개 내지 몇 개의 촌락규모를 가지는 많은 관할구로 나누어져, 각 구마다 대관과 성주의 권한을 대행하는 관리가 배치되었다. ②는 봉토 외에 일반적으로 기사 자신의 조상전래의 자유지(自由地)가 포함되었는데, 그 전체 규모는 대략 촌락 하나의 규모에 상당하였다. 기사층은 토지에 밀착된 생활을 하였던 촌락의 향사(鄕士)인데, 법적으로 귀족신분의 말단을 차지하였으나 사회적으로는 촌락 관리의 처지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기사와 촌락의 관리 사이에는 관리의 기사화나 기사의 관리화와 같은 신분·권력관계의 상호 교류가 자주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일한 교류관계가 성주와 대관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던 점으로 보아 봉건제와 가산제를 엄격하게 고정적·대립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며,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

【봉건제도의 발전 과정】 〈유럽〉 서유럽을 중심으로 봉건제도의 발전과정을 보면, 그 법제사적 의미에서나 부역중심의 고전장원(古典莊園)의 성립 및 가톨릭적 통일문화권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유럽에서의 봉건제도는 대략 8,9세기의 카롤링거왕조의 프랑크 왕국에서 성립했다. 10세기~13세기가 그 전성기였으며, 13세기 이후 도시의 발달에 의한 화폐경제의 보급·지대형태의 변화 등에 의해서 점차 지배형태가 변화하였고, 국가제도의 변질을 초래하여 영역지배를 중심으로 한 왕권 또는 영방(領邦) 군주권이 강화됨으로써 인적 결합(人的結合) 관계의 요소가 더욱더 희박해져 붕괴하고 말았다. 봉건제도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공동의 모체에서 출발했는데도 프랑크 왕국의 해체 후 각국이 독자의 발전을 시작하자 지역에 따른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특색 있는 봉건체제를 나타냈다. 사회경제의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지만, 국가체제의 면에서는 달랐다.

① 독일:독일에서는 종족공국(種族公國)의 자생적 통합현상이 나타나서 그 통합 위에 형성된 신성로마제국은 처음부터 연방적 봉건국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오토 1세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의 교회정책, 즉 여러 공국(公國) 제후들의 분립적 세력에 대한 중화적(中和的) 세력으로서 교회의 세속적 세력을 배양하는 정책을 강행하였던 이유였다. 말하자면 독일에서 법(法)의 근원은 황제 또는 그의 관리에 의한 위로부터의 관직적(官職的) 명령 외에 촌락단체·가우(Gau)·훈데르트샤프트(Hundertschaft)·종족공국의 순서로 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자생적 지배권이 있었으며, 대소(大小) 귀족의 영지에도 위로부터 받은 봉토 외에 조상전래의 자유세습지가 많았으므로, 법의 이원주의가 일관하여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법제사적 의미의 봉건제는 독일에서는 예상 외로 관철되지 못하였다.

② 프랑스:독일의 경우와는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로마제국 말기로부터의 전통도 있어 영주와 민중과의 사이에는 부족적인 연결이 없었으며, 귀족의 대부분은 프랑크 왕실과의 관계에 의해서 발생했었다. 따라서 독일에서와 같은 자생적인 힘의 작용은 대단치 않았고, 노르만족의 침입에 대처할 수 있는 실력자에 의한 통일의 필요성이 크게 요구되었기 때문에 군웅할거의 봉건적 분열의 현실 속에서 실력에 의한 왕권 신장이 달성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0, 11세기의 프랑스는 분권적 봉건제의 대표적 형태를 취하여 ‘나의 봉신의 봉신은 나의 봉신이 아니다’라는 주종관계의 전형적 원칙이 수립되었고, ‘봉토 아닌 것이 없다’는 상황을 나타내었다. 프랑스 왕실은 12세기 말 이후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도시의 경제력과 결탁하여 정기금(定期金)을 가신(家臣)에게 수봉(授封)함으로써 봉건왕정의 실력을 강화하여나갔다.

③ 이탈리아:이탈리아에서는 남부의 고전고대·사라센·노르만적 제요소, 북부의 로마·랑고바르드·프랑크적 제요소 및 교회국가의 전통 등으로 인해 모자이크와도 같은 복잡성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비잔틴 제국의 영향하에 있던 제도시가 먼저 발달했기 때문에 봉건체제도 남부와 북부로 크게 분류된다. 남부에서는 노르만의 집권적 지배하에 봉건제후의 통치가 도시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였으며, 북부에서는 봉건제후나 가신군(家臣群)의 시민화와 도시에 의한 주변농촌의 정복으로 도시국가의 할거를 초래하고, 아울러 농민이 조기에 소작관계로 전화하여 전반적으로 일찍이 봉건체제를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④ 영국:앵글로 색슨 시대에 이미 봉건제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는 제제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봉건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1066년의 노르만인의 정복에 의해서이다. 즉 영국봉건제는 정복민족에 의해서 대륙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점이 처음부터 결정적인 특색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봉건법상의 예는 86년 솔즈베리의 서약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보유하고 다소의 세력이 있는 모든 사람이 윌리엄 1세에게 충성을 선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직속신하이거나 가신이거나를 막론하고 국왕과 일반민과의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 우선해서 일반적 신종(臣從)의 관계가 유지되었는데, 프랑스와는 정반대로 영국이 집권적 봉건제의 대표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양〉 ① 중국:고대 주(周)나라의 봉건제도가 대표적이어서, 봉건이란 말의 원래의 뜻은 곧 주나라의 국가체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봉건(封建)이란 토지를 봉(封)하여 나라를 세운다[建]는 뜻을 지니며, 군주가 관료제도로써 전국을 직접 지배하는 군현제와 대응되는 말이다. 주의 봉건제도는 BC 11세기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국도를 산시성[陜西省]의 호경(鎬京:西安 부근)에 정하여 주왕조를 건설하였을 때 나라의 기초를 굳히기 위하여 주왕실의 일족과 공신을 요지에 봉건하여 왕실의 번병(藩屛)으로 삼았던 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왕이 죽은 후 은나라의 왕족 무경록부(武庚綠父)와 주나라의 일족인 관숙(管叔) 등 3감(三監)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주공(周公)·소공(召公) 등은 다시 한번 동국(東國)정벌을 감행하였으며, 제후의 봉건을 다시 고쳐 시행, 제도를 정비하고 허난성 뤄양[洛陽] 부근의 땅에 동부 낙읍(洛邑)을 건설하여 동방지배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 결과 주나라 초에 황허강[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이 50여의 주나라 왕족의 제국을 건설하여 종래의 800제후를 지배하는 결절점의 역할을 맡게 하였다. 그들 제후가 봉건되는 경우에는 먼저 조정에서 책명(策命)이라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여기서 읍토(邑土)와 백성을 수여한다는 내용의 임명서인 간책(簡策)이 수여되고, 동시에 왕실 권위의 상징으로서 이기(彛器:청동제의 제기)와 거마구(車馬具), 의복과 금옥의 장식, 깃발류[旗類]와 관구(官具) 등이 주어졌다. 제후는 그것들을 가지고 부하를 이끌고 새 지배지의 성시(城市)로 부임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주변의 여러 읍을 복속시켜 나갔다. 제후들은 혈족(血族)을 중심으로 한 경대부(卿大夫)를 중핵으로 지배조직을 편성하고, 그들에게 관직과 채읍(采邑)을 주어 공실(公室)을 수호케 하였다. 따라서 주왕실과 제후, 제후와 경대부의 관계는 다같이 종족적인 친족집단의 습관에 의거한 혈연적 조직의 원리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었으며(宗法封建制), 그 정치도 제사(宗廟와 社稷)에 의한 결합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왕실에서 거행하는 특정의 중요한 제사에는 제후가 참가하여 공물을 바칠 의무가 있었고, 제후는 왕의 군역(軍役)이나 토목 사업에도 종사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봉건제도의 주목적은 ‘친척을 봉건하여 주왕실의 번영이 되게 한다’는 데에 있었지만,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제후의 세력이 점차 강력해지면서 독립적인 세력이 되어가자 왕실의 권위는 명목화되고 말았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존왕(尊王)을 대의명분으로 하는 봉건의 유풍이 잔존하여 맹주(盟主), 즉 패자(覇者)가 제후를 이끌고 왕실을 받들었으나,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들어서자 제후들은 완전히 독립국화하여 실질적으로 봉건제도는 붕괴하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 이르러서 오히려 유가(儒家)들에 의해서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이상화되었다. 그 후 전한(前漢)·서진(西晋)·명(明) 등에서 일부 봉건제도가 실시되었던 일이 있었으나 오래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② 일본:에도[江戶]시대의 유학자들이 당시의 사회를 봉건제도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일본 전국에 약 300의 다이묘[大名]가 분립한 상태가 중국 주나라 때의 정치형태와 외견상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이묘의 영지(領地)를 한[藩]이라고 부른 것도 그것이 왕실의 번병(藩屛)이었다는 중국적인 발상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제도는 오히려 유럽의 그것과 흡사하여, 무사(武士)의 발생 및 무가정권(武家政權:세습적 무인정권)의 성립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상부구조인 봉토제와 하부구조인 농노제를 갖춘 것으로 보고 있으나, 유럽봉건제와는 상이점이 많다. 봉토제는 은급(恩給)과 봉공(奉公)이란 형태로 헤이안[平安]시대 말기의 무사단(武士團) 사이에서 생겨나서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하에서 공적인 지배체제가 되고, 전국시대(戰國時代:15세기 후반∼16세기 후반)에는 봉건적 아나르시로 발전하였다. 에도시대에 다이묘의 봉토권을 막부의 전국통치권에 포함시키는 등 막부와 한 사이의 권력구조의 정비에 대하여는 그것을 봉건제의 재편성이라고 보는 설과 순수봉건제로 보는 설이 있다. 농노제에 대하여는 장원(莊園:律令制 실시 이후 중세까지 존속한 귀족·寺社의 사유지)의 공납전 소유자층, 막부제도하의 경작자층 등 어느 것을 농노로 보느냐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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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대

 

  近代

 

  역사상 시대구분. 세계사에서는 봉건시대·봉건사회 단계가 끝난 다음에 전개되는 시대를 말한다. 그렇지만 봉건시대의 다음 시대를 지칭하는 관점에서 공동체에 대한 ‘나’라는 개인의식의 성립이나 개인존중 등의 ‘개인우월 사상’을 내세워 따진다면 유럽에서는 보통 15∼16세기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의 시기 이후가 되고, 자본주의의 형성이나 시민사회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7∼18세기 이후가 된다. 일반적으로 후자를 근대라고 한다. 이때 르네상스에서부터 절대주의·중상주의가 전개되는 17∼18세기까지의 시기를 근세(近世)라고 한다. 그러므로 근세와 근대는 구분되어 근세 다음에 근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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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社會

 

  봉건제사회(封建制社會)가 끝난 뒤에 나타난 사회.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로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근대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선행된 봉건사회를 극복해야 했다.

【서양】 〈봉건사회의 변질〉 유럽의 근대사회는 봉건사회 그 자체에서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유럽의 봉건사회는 11∼12세기경부터 크게 변질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운동이 촉진제가 되었다. 이러한 변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현상으로는 우선 경제적 근대화를 들 수 있다. ① 도시의 발전:십자군 이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무역과 저지대(低地帶)를 중심으로 하는 발트(북해) 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2개의 무역권을 연결하는 내륙의 상업로(商業路)도 발전하게 되어 이탈리아·독일·플랑드르·샹파뉴 등지에 도시가 번영하였다. ② 부역(賦役)의 소멸과 지대(地代)의 금납화(金納化):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화폐경제가 진전함에 따라 영주들은 비능률적인 부역 대신 공납징수(貢納徵收)를 강화하더니 이윽고 농민으로부터 직접 화폐를 입수하고자 생산물지대(生産物地代)를 화폐지대로 바꾸었고, 약간의 해방금(解放金)을 받고 농노(農奴)의 신분을 농민으로 해방시켰다(농노해방). ③ 농민 반란:농민층의 일반적인 상승 기운에 대하여 영주들은 농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부역의 부활을 도모하는 등 봉건강화(封建强化)를 강행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는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반란은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농민들의 자립적 경향이 강해져서 농민들은 차차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장원제도(莊園制度)도 해체되어 갔다. ④ 길드(guild)의 변질:농민층의 일반적인 상승과 함께 농촌의 수공업이 발달하고 도시의 수공업자 길드의 독점적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한편, 도시 길드의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주장(主匠:master) 간의 대립과 주장과 직인(職人:journeyman)과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특히 그 때까지만 해도 길드와 관계가 없던 상업자본가들이 상당한 세력으로 도매체제(都賣體制)의 지배를 강화하여 길드는 본래의 성격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인 면에서의 변질로서는, ① 로마 교황권의 쇠퇴:십자군운동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교황권의 정신적 권위가 현저히 손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세속적 지배권도 또한 쇠퇴하였다. 본래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은 봉건 제후(諸侯)로 하여금 세습적인 황제나 국왕과 대립하도록 조정함으로써 권력이 유지되어 왔으나, 십자군운동 이후 제후나 기사들이 몰락하였고, 반대로 국왕의 권력 강화(집권화)에 의하여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은 쇠퇴하였다. 게다가 교황의 이른바 아비뇽 유수(Avignon 幽囚:1309~l377)와 교회의 대분열(1378~1417)에 의해서 그 쇠퇴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각지에서 이단운동(異端運動)이 일어나 교회의 혁신, 더 나아가서는 교황의 권위마저 부정하는 경우도 나타나 종교개혁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② 중앙집권 국가의 형성:십자군운동으로 전사·도산(倒産) 등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중소영주(中小領主)인 기사나 제후들이었다. 게다가 총포의 사용 등 전술의 변화로 기사의 존재가치가 무용화되면서 제후나 기사들은 점차 국왕의 신하로 변신하였다. 한편, 이에 따라 대두된 도시의 상인자본가들도 지방분권적인 봉건적 지배체제가 상업발달을 저해하는 것이라 하여 국내의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실현하려는 국왕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14∼15세기경부터 유럽 각국에서는 점차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형성되어 근대국가로서의 길이 열렸다.

〈유럽 근대사회의 성립〉 봉건사회의 변질에서 싹튼 근대사회의 싹은 l4∼16세기경부터 18세기에 걸쳐 한층 더 성장하였다. ① 도시 중심의 상공업이 15세기 말부터 신대륙·신항로의 발견(지리상의 발견) 등에 의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아시아 무역,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무역 등의 전개로 상업은 세계적인 규모로 발전하였고, 대서양 연안의 여러 도시(리스본·안트베르펜·런던 등)는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의 경제적 발전에 수반하여 시민계급의 경제력도 향상됨으로써 근대사회의 주역으로서의 발언권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신대륙으로부터 금·은 등의 귀금속이 대량으로 반입되어 가격혁명(價格革命)이 발생하여 해체되어 가던 장원과 봉건적 경제사회는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② 로마교황권의 쇠퇴:이단운동의 전개는 16세기 초 M.루터나 J.칼뱅 등의 종교개혁운동 전개에 의하여 결정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종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종교전쟁의 결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 신앙의 자유 확립 등 근대사회의 기본적 성격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개성의 자각, 또는 폭넓은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의 수립에 크게 기여한 것이 르네상스 이래의 휴머니즘의 발전이었다. 특히 17∼18세기에 보급된 계몽사상(啓蒙思想)은 자유·평등 등의 기본적 인권과 민주주의·사회계약설 등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사상을 넓혀서 시민혁명의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③ 중앙집권국가의 발전은 17∼18세기에 절대주의 국가(절대왕정)를 탄생시켰다. 군대와 관료를 기반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군주가 통치하는 절대주의 국가는 그 본질에 있어서 봉건국가의 재편성이지 결코 근대국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행정기구의 정비나 관료제도와 같은 통치기구의 집중성(集中性)에서 보면 근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후, 귀족·승려 등의 봉건적 지배층을 대신해서 시민계급이 집중권력을 쥐고 지배층이 되었을 때 근대국가(정치적 근대사회)가 성립되는 것으로서, 이것이 곧 시민혁명이다. 그러나 시민혁명에 의하여 근대사회가 성립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은 산업혁명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업혁명은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비롯되었고, 19세기 중엽부터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전개되어 자본주의 사회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이 두 가지가 유럽 근대사회 확립의 필수요소인 것이다.

〈유럽 근대사회의 발전과 성격〉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겪으며 확립된 유럽 근대사회의 특색은, 바로 일반적인 근대사회의 특색이기도 하다. ① 종래의 거간제 수공업(居間制手工業)이나 공장제 수공업을 대신하여 공장제 기계생산이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등장, 값싼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즉, 생산력의 현저한 증대를 가져 왔다. ② 농업보다 공업이 현저히 발전하여 인구의 도시집중화 현상이 촉진되었으며, 신흥 공업도시가 많이 나타났다. ③ 종래의 지배계급이던 지주·귀족이나 절대왕권에 밀착된 상업자본가 계층이 후퇴하고, 공업생산에 투자하여 대단위 공장을 건설하고 많은 임금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에 종사하는 산업자본가의 세력이 커졌다. ④ 이러한 산업자본가의 성장에 수반하여 정치면·경제면에서 많은 민주적 개혁이 시도되었다. 예를 들면, 의회정치의 확립, 선거권의 확대, 경제적 자유(자유무역주의)의 확립 등 한마디로 말해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수립되기 시작하였다. ⑤ 공장과 기계 등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 계층과 노동력 이외에는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임금노동자 계층이 완전히 분리되어 사회적으로 계층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⑥ 산업혁명의 진행과 함께 노동자의 임금이 하락하여 생활상태가 악화됨으로써 노동문제가 발생하였다. ⑦ 이러한 계급대립의 결과, 노동·사회 문제의 발생과 함께 사회주의운동·노동운동이 전개되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이상사회 실현의 사상과 운동이 진행되었다. 이들이 대략 유럽 근대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성격으로, 19세기 말이 되자 이러한 근대사회에도 여러 변질이 나타나 다시 현대사회로 옮겨 가게 되었다.

【중국】 〈청조의 붕괴와 군벌〉 쑨원[孫文]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서 중국인을 ‘산산이 흩어진 모래’에 비유하였다. 이는 국민을 결속시킬 근대사회의 유대성(紐帶性)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중국의 봉건사회는, 유럽의 여러 국가는 물론 동양의 다른 국가와도 달라서 할거제(割據制)가 아니고 수많은 공동체 위에 중앙집권적으로 군림하였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 안에는 강력한 지주제(地主制)가 존재하고 있어서 농민을 궁핍으로 몰아넣고 독립 자영농민층의 성장을 억제하였는데, 청조(淸朝) 말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태평천국(太平天國:1850~64)은 이의 타파를 위한 농민전쟁으로 중국의 근대혁명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으나, 청조의 비호아래 결속되어 있던 지주들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압살되고 말았다. 그 후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국을 실현하였는데, 이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결국은 군벌(軍閥) 세력에 의하여 유린되고 말았다. 즉, 청조를 기구적(機構的)으로 붕괴시켰을 뿐, 변혁은 사회구조에까지 미치지 못한 것이다. 청조라는 하나의 절대정권이 무너진 후에 군벌이라는 복수의 절대정권이 성립되어 중화민국의 공화정권도 이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에 불과하였다. 이 균형을 깨고 전국적 규모의 지배권력을 수립하기 위하여는 서로 투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각 단위(單位)에 열강의 이해가 결부되어 이른바 군벌혼전시대(軍閥混戰時代)를 가져 왔다.

〈반봉건·반제국주의 투쟁〉 군벌들은 그들의 존립 기반을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직업적인 사병(私兵)을 양성하였고, 이의 유지를 위한 경비조달을 목적으로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결국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어야 할 계급 간의 대립이 실제로는 군벌의 바탕인 지주층과 착취의 대상이 되는 농민층의 대립으로 나타났는데, 더욱이 유럽의 봉건사회나 근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단일조직의 사회가 어느 정도나마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신분질서)가 그 조직의 취약성을 나타내었다. 즉, 유교적 윤리가 폭력정치에 의한 지배를 내부적으로 대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변혁은 우선 낡은 인간관계를 타도하기 위한 사상의 변혁이 선행되어야 하였다. 문학혁명(1917)에서 5·4운동(1919)에 이르기까지의 이른바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 즉 유교 타도운동의 의의는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5·4운동이 ‘근대화’를 타개하는 전환점이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였다. 아편전쟁(阿片戰爭:1840∼42) 이후 중국이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 정책에 말려들고, 개개의 군벌들이 열강들의 이해와 결부되어 각기 봉건적인 구체제를 강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근대화의 전망은 어두웠다. 그러나 반제(反帝)·반봉건(反封建)이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청년학생을 선두로 중국 국민들이 이러한 점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5·4운동은 급격히 확대되었다. 국민을 눈뜨게 하는 일, 즉 ‘민중을 환기(喚起)시키는 일’은 각자가 올바른 인식을 가지면 되는 것이었다. 봉건제도와 제국주의 하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국 국민은 20세기 초의 세계정세와도 연관성을 가지면서 변혁을 향하는 저력을 축적하였다. 쑨원이 5·4운동 시기에 ‘알고자 하는 바는 어렵고, 행하고자 하는 바는 쉽다(知難行易)’라고 설파한 것은 단순히 《서경(書經)》의 말을 역전(逆轉)시킨 것이 아니라 근대사회가 다가왔음을 올바르게 예언한 것이다.

〈근대화와 노동자 계층〉 지역단위로 또는 내재적으로 성숙되어 온 계급대립은 공동체의 최소단위에서 더 격돌하였다. 특히, 연해(沿海)지방과 내륙지방 간의 경제적 불균형으로 인하여 혁명정세에도 불균형이 나타났다. 이리하여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은 사상변혁을 수반하면서 사회의 최소단위에서의 권력탈취에 의한 혁신으로 지방정권 내부를 구조적으로 전환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체제의 유지가 가능한 범위인 현(縣) 정도의 단위별로 농민들이 ‘단체를 결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단체들이 횡적으로 연결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을 때 비로소 ‘흩어진 모래’는 굳게 결합되어 구(舊)체제를 무너뜨릴 수가 있다. 이 최소단위인 농민들의 무장단체를 쑨원은 ‘농단군(農團軍)’이라 명명하였다. 쑨원이 농단군의 결성을 착상했을 때 발표한 ‘지권평균설(地權平均說)’은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원칙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근대사회의 바탕이 되는 독립자영농의 창출(創出)을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24년의 국공합작(國共合作)에서 처음으로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과정에서 근대화된 중국사회는 유럽적인 근대사회는 아니었다. 쑨원이 시도했던 경자유기전의 원칙은 농업의 협동제로 변질되어 오히려 중국의 근대화를 역행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한국】 한국 근대화의 기점은 사상적으로 동학(東學)의 대두와 정치적으로 대원군(大院君)의 혁신적인 정책이 시작된 1860년대로 보는 견해와 76년 강화도조약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이 조약을 계기로 유럽 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고 부산·원산·인천 등지의 개항통상을 보게 되어 비로소 열강과 우호국가로서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 대세에 발맞추어 나가는 개화운동의 세력이 형성되는 반면, 한편으로는 외래문물을 거부하고 봉건적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수구세력(守舊勢力)이 존속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94년 개화내각이 출현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중앙관제 및 지방제도의 개혁과 함께 계급타파·노예해방·조혼금지(早婚禁止)·과부의 개가허용(改嫁許容)·과거의 폐지·적서(嫡庶)의 차별 폐지 등을 포고하여 그 개혁은 사회적으로 전면적인 개혁이 되었지만, 실제 사회생활에 있어 즉시 큰 효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봉건사회 조직의 붕괴와 신시대적 체제의 형성을 의미하는 사실임에는 틀림없었다. 96년 건양(建陽)의 새 연호를 사용함과 함께 음력 대신 양력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연호를 광무(光武),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고치고, 신교육령에 의한 보통학교·중학교·사범학교 등의 설립을 보는 등 비로소 근대국가로서 모든 형식과 체제를 이루었다. 형식뿐 아니라, 실지로도 외세에 지배되지 않는 독립국가·독립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여야 한다는 자주정신에 의해서 신진투사들이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문의 건립, 《독립신문》의 간행,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개최 등으로 한국민의 자주독립의 정신을 내외에 선양하고 국민의 세계 조류에 대한 자아인식을 일깨웠다. 독립협회에 이어 대한자강회 등 많은 정치·교육·문화 단체들이 민중의 계몽과 자각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위정자들의 지식과 성의, 그리고 단결·봉사의 정신 부족으로 국내적으로 수구파와 개화파의 알력, 또는 친청(親淸)·친일(親日)·친로파(親露派) 등의 대립과 분쟁, 대외적으로 일본·청국·러시아 등 강대국의 간섭을 받아 국가의 운명은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악랄한 지배와 압박·착취에 대한 반항운동으로 독립운동이 계속되었을 뿐 참된 근대화란 요원(遙遠)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38선이 그어지고 6·25전쟁까지 겪어야 했으며, 전쟁 후 수립된 제1공화국은 전후 복구사업에 바빴다. 따라서 어느 의미에서는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근대화가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아울러 70년부터 불붙은 새마을운동에 힘입어 한국의 근대화, 특히 산업화는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항목차례

十字軍(crusades)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그때 이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 부른다. 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다.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모험심·약탈욕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정열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南)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원인】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후 시리아는 동로마 통치하의 속주가 되고, 7세기 전반에는 이슬람교도인 아라비아인에게 정복되었을 뿐 아니라, 638년 성도 예루살렘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더불어 예루살렘을 성도로서 숭앙하는 생각이 점차 높아졌는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많은 그리스도교도가 개인 또는 집단을 이루어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 무렵 동방의 이슬람 세계에서는 셀주크투르크가 세력을 신장시켜 비잔틴제국 영내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아르메니아·소아시아를 지배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1092년 셀주크왕조의 통일이 깨어지고 그 영토는 왕족간에 분할되었다. 이 기회에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비잔틴제국의 재흥을 꾀하여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최초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알렉시우스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 하면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의 와중에 있었는데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방원정이라는 어려운 사업을 통하여 유럽에서 교황권을 확립하고, 비잔틴에서의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회 산하에 통일하려 했던 것이다.

【제1회 십자군】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공의회 회의석상에서 십자군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들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하여 각지에 사람이 파견되었다. 교황이 계획한 십자군은 주로 기사(騎士)들로 편성할 예정이었다. 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달리 멋대로 십자군에 대한 열을 부채질하고 다니는 자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은자(隱者) 피에르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동쪽을 향해 떠난 것은 농민을 대부분으로 하는 민중십자군이었다. 우선 고티에가 이끄는 일단, 이어서 은자 피에르를 따르는 한 부대가 출발했다. 양군은 헝가리·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심한 보복 공격을 받았다. 양군은 합동하여 소아시아에 건너가 투르크군과 싸움을 벌이기는 했으나 결과는 대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이밖에도 3개의 민중십자군부대가 이어졌는데, 그들에 의해서 유대인 박해가 개시된 것이다. 특히 라이닝겐의 백작인 에미코의 박해는 처참하였다. 십자군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일찍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어단 유대인에게로 쏠렸는데, 거기에는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증오심도 깃들어 있었다. 이 3개 부대는 헝가리인의 공격에 의해 괴멸되었다. 정규 십자군은 1096년 여름부터 4개 부대로 나뉘어 출발, 육해(陸海) 양로를 지나 이듬해 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군세였는데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중 주력을 이룬 것은 프랑스인과 노르만인이었다. 합류한 십자군은 니케아 공략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진군했는데, 그 길은 험난했다. 소아시아를 진군하는 동안 투르크인의 공격, 그리고 심한 더위와 굶주림 등으로 상당수의 인원과 말을 잃었다. 시리아에 도착하여 첫 공격목표인 안티오키아의 공방전에만 8개월이 걸렸다. 점령 후에도 전력 회복과 주변지역을 정복하는 데 6개월을 소비했으며 그 동안 유행병에도 시달렸다. 그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지휘자들이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부하들의 불평을 싹트게 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전면에 도착, 99년 7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거기서 처참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십자군 병사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열광적인 신앙과 이교도에 대한 격한 증오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십자군의 정신을 형성한 것이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십자군 병사들의 일부는 시리아에 정주(定住)하였다. 정복지에는 예루살렘왕국·안티오키아후령(侯領)·트리폴리백령(伯領)·에데사백령 등 4개국이 들어섰다. 또 왕국 안에는 요한기사단·템플기사단, 조금 늦게 독일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이 되었다. 영주는 성을 거점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상인은 도시에서 특권을 얻어 이익을 증대시켰으나 농민은 희망도 없이 예속상태에 놓였다.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되고 교회조직도 정비되어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옮겨졌다.

【제2회에서 제4회까지의 십자군】 1144년 에데사가 이슬람군에게 탈취되자 제2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지휘자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 공격이 계획되었으나 시리아 주재 십자군 병사가 적측의 감언에 속아 전열을 이탈했기 때문에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두 국왕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였다. 12세기 후반에 이집트의 명군(名軍) 술탄 살라딘이 하틴전투에서 그리스도교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각지의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제3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왕 필리프 2세, 영국왕 리처드 1세 등이 참가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강에서 빠져 죽었고 남은 군사만 시리아를 향해 진군하였다. 현지에서는 아콘 포위작전이 벌어졌는데도 필리프왕은 1년 8개월 늦게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게다가 그는 아콘 공략후 곧바로 귀국해버렸다. 리처드왕은 키프로스섬 정복 때문에 필리프왕보다 2개월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 후 리처드는 살라딘과 교전, 몇 개의 도시를 탈환하지만 예루살렘 해방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그리스도교도의 성도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후 아콘은 시리아에서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제4회 십자군은 교황권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발동되었다. 군단의 편성은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황제나 국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최초의 십자군과 비슷하였다. 다만 먼젓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이슬람군의 거점이된 이집트가 원정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이에 대해 군대의 수송을 담당한 베네치아는 이집트와의 평화적 교역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수송비가 모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그들은 우선 달마티아의 츠아라를 치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하였다. 전부터 베네치아는 비잔틴제국 내에 유리한 상업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최근의 정변으로 그것을 잃은 상태에 있었고 제노바와 피사에 눌려 있었다. 1204년 십자군은 정정(政情)의 혼란을 틈타 비잔틴제국를 무너뜨렸다. 수많은 성유체(聖遺體)와 보물을 약탈당하고 수도의 일부와 항만과 섬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 그 밖의 비잔틴 영토도 십자군의 지휘자들에게 분할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다. 이 제국은 약 반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제5회 이후의 십자군】 제5회 십자군은 또다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이 십자군은 아콘으로부터 이집트에 원정하고, 다미에타를 포위하였다. 작전은 성공하였으며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시리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고 카이로에 진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제6회 십자군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프리드리히는 ‘세례를 받은 시칠리아의 술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라비아의 풍습에 매혹된 황제였다. 그는 무력이 아닌 외교수단으로 이슬람측으로부터 예루살렘과 그 밖에 영토를 양보받았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뒤에는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어 그 사이에 예루살렘도 잃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회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루이 9세는 키프로스섬에서 이집트로 건너가서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때에도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해왔으나 전과 같이 이를 거부하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으나 만슬러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잠시 시리아에 머물면서 약간의 항구와 요새를 탈환하고 철수하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가 이슬람군에게 함락되자 루이 9세는 최후의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는데, 튀니스를 공격하였을 뿐 그곳에서 죽었다. 시리아에서는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1291년 아콘마저 빼앗기자 십자군 국가와 그 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실패의 원인】 제1회 십자군의 성공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한 데에 큰 이유가 있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자 반격을 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십자군은 전력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와 종교 기사단, 새로 도착한 십자군병사, 상인 등은 상호간, 또는 각 내부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영토문제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있었고, 또한 형성되어가고 있던 국민적 감정 등에 의한 대립이 얽혀 있었다. 또 십자군 국가에서는 소수의 정복자가 많은 피정복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 기초는 항상 흔들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무지와 광신과 편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슬람교도들의 증오심만 부채질하였다. 그리스도교도를 성지로 가게 한 서유럽의 팽창운동은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십자군도 종말을 고하였다.

【영향】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항목차례

르네상스(Renaissance)

 

  중세와 근세 사이(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역사 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운동.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독일·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知的)·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당시 L.브루니는 자기 시대의 학문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16세기의 미술가 G.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조각가·건축가의 생애》에서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쇠퇴한 미술이 조토에 의해 부활했다고 하여 ‘재생(rinascita)’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다시 볼테르는 14·15세기의 이탈리아에 학문과 예술이 부활했음을 지적했으며, J.미슐레는 16세기의 유럽을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라고 하여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J.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60년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시대’로서의 르네상스라는 사고방식이 정착하여 오늘까지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르네상스는 다면적인 복잡한 국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간단히 개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는 이탈리아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까지 파급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래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 온 곳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혜택으로 이슬람세계 및 비잔틴과의 접촉을 항상 유지하여, 이들과 서유럽을 연결시키는 소임을 맡아왔다. 특히 11·12세기의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도시가 활성화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에는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도시로 조직되었다. 이들 자치도시들은 주위의 농촌지대도 지배하여 도시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또, 기존 봉건귀족층과 토지소유자계층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도시의 경제활동과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3세기 후반의 경제적 발전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도 심하여, 상인의 현실적인 감각이 사회의 모든 면에 침투함으로써 이탈리아 특유의 시민문화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인 조건과 상업상 교류의 필요에 따라, 이슬람과 비잔틴문화와의 접촉 가능성이 가장 많았고, 또 실제로 그런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전통면에서도 스콜라 철학으로 대표되는 서유럽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 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의 정치는 도시국가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그리스·로마의 고대문화 역시 도시국가에서 발생·발전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의 도시국가와 이탈리아의 코무네(자치도시)와는 사회적인 기초구조에서 크게 다르지만, 형태 등의 면에는 공통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과 정치이론이 코무네에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와 같이 특수한 사회구조와 독자의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잔틴과 이슬람문화권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코무네가 르네상스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와 초기 르네상스】 고대문화에 대한 동경은 중세를 통하여 계속 이어졌다. 샤를마뉴의 ‘로마제국’이나 오토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도 사실은 고대 로마황제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로마의 정통성 계승 의도를 르네상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르네상스의 특징은 고대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신문화를 만들어내려는 자각적인 태도로서, 고대가 지난 후 암흑시대가 있었고 이제 새로운 재탄생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역사의 3분법(三分法:고대·중세·근세의 시대구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운동의 근거는 고전연구로부터 공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고전은 수사학·역사·도덕·철학 등의 인문학이며, 이와 같은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학문에 휴마니타스(Humanita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피렌체의 L.브루니였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시인 F.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의 도덕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텍스트의 발견과 교정에 전력을 쏟았다. 고대인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르게 파악하고 다시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인문주의의 전통은 페트라르카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14세기 이탈리아에는 또한 새로운 스타일의 회화와 조각이 등장하였는데, 공간과 시간을 다루는 데에 고대의 스타일을 부활시켰으며, 조토는 이 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G.바사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고대의 재탄생이란 고대의 모델을 모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고 모방하는 능력까지를 일컬었다. 법률 분야에도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는데, 볼로냐대학을 중심으로 부활한 로마법 연구는 바르톨루스에 의하여 새로운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인문주의 시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피렌체를 중심으로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이 일제히 전개되었다. 피렌체공화국의 서기장관(書記長官) C.살루타티는 키케로의 서간(書簡)을 발견하여 고전기(古典期) 라틴어의 수사법(修辭法)을 처음으로 공문서에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소위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의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시민의 자유와 그것을 보호하는 공화정(共和政)을 중요시하였다. 이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었는데, 공화정은 로마의 귀중한 유산이며 그것을 보존하는 일은 피렌체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로마공화정시대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열린 시대였으나, 카이사르를 비롯한 독재자들이 국민의 자유를 빼앗아 버렸으므로 피렌체의 이상은 로마공화정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당시 피렌체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북이탈리아를 지배한 비스콘티가(家)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으며, 살루타티는 적(敵)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하여 독재자로 규정하고 이로부터의 자유수호를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이와 같은 시민적 인문주의는 역시 서기장관으로 봉직한 살루타티의 후계자 L.브루니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저서 《피렌체국민사》에서 피렌체의 자유의 역사는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자유도시를 세우기 이전부터 이미 투스카니(Tuscany)의 토양에 깊숙이 뿌리박혔다고 주장하고, 평등은 정의의 균등한 기회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밀라노 쪽의 인문주의자들은 로마공화정 말기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이를 수습한 것은 카이사르라고 찬미하고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함으로써 그들의 치정(治政)을 합리화시켰다. 피렌체와 밀라노 간에 이와 같은 의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치정의 정통성을 고대에서 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현실이 과거에 투영된 결과, 고대문화의 부흥은 단지 학문상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보다 넓은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역사와 학문을 배우고 여기에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정치와 도덕의 원리를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인의 생각과 생활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본(寫本)을 비교하고 정확한 텍스트를 확정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문헌학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이 방법이 단순히 연구의 보조수단이라기보다 참다운 전체적인 인간성을 추구하여 자기를 자각하려는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중세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의 근거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寄進狀)’을 후세(後世)의 위작(僞作)이라고 밝혀낸 L.발라는 이러한 언어문헌학의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미술에도 고전주의적 이상주의가 확립된 시기로서 회화의 마사치오, F.안젤리코, 그리고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S.보티첼리가 있고, 조각에서는 도나텔로가 뛰어났으며, 건축분야에서는 F.브루넬레스키 등이 배출되어 르네상스 미술의 황금시대를 구축하였다.

【르네상스의 변질】 15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현실경정(現實更正)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활동도 중시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지식인들 간에 현실도피의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고대문화 부활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코무네 체제가 쇠퇴하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장하고 있던 군주국현상(君主國現象)이 발달하였다. 피렌체의 경우 명목상 코무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434년 이후 메디치가(家)의 지배하에 놓임으로써 시민적 인문주의는 크게 쇠퇴하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판도는 비교적 단순하였는데, 북에는 스포르차가의 지배를 받는 밀라노와 귀족지배의 공화국 베네치아가 있었고, 중부에는 피렌체와 교회국가, 남에는 아라곤가의 나폴리 등 강국 간에 일종의 세력 균형이 성립하였다. 비교적 소규모의 도시에서도 각기 군주국을 형성하고 화려한 궁정생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공화정의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으며, 지식인은 궁정에 기식하는 궁정문화인이 되거나, 현세를 도피하는 자세를 택하였다. 또, 비잔틴 학자들의 영향이 더해져서 지식인들은 학문연구 중심의 사변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전후하여 플레톤이나 베사리온과 같은 다수의 뛰어난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 와서 그들의 학문, 특히 플라톤 철학을 전하였고, 그 영향으로 C.메디치는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창설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의 시민적 인문주의는 도덕철학·정치학 등에 주된 관심을 두었으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C.란디노와 같이 명상적(瞑想的)인 생활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중심인물인 M.피치노의 학문도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신학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친 문화는 군주들의 보호 아래 궁정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B.카스틸리오네가 쓴 《정신론 Il Cortegiano》은 이상적 인물로서의 궁정인을 묘사하고 있다. 이탈리아 문학도 단순한 고전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현상을 나타냈으며, 중세 기사도에 대한 로맨틱한 관심은 귀족적인 서정시의 경향을 띄게 되었고, T.타소와 L.아리스토의 작품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미술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는데, 개성과 활력에 넘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거장이 배출된 뒤로는 차차 바로크 미술양식으로의 전환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반이 쇠퇴함으로써 르네상스에도 변화가 왔다. 오랫동안 동서간의 무역을 독점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외국상인, 특히 절대주의 국가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상인들과의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 에스파냐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신항로의 발견과 동양과의 직접무역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위를 떨어뜨렸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정치적 관여로 이탈리아 내 국가간의 세력균형과 타국가간의 관계가 힘에 의해 지배되어 그들의 독립성조차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는 샤를마뉴의 꿈을 재현해 보려는 듯 나폴리에 침입하였으나, 그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의 관여와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 및 프랑스 발루아 왕가간의 세력 다툼 속에 끼여 정치적으로 쇠퇴하였다.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간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은 1521년부터 44년까지 네 차례 되풀이되면서 이탈리아의 국토를 유린하였다. 사실상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에스파냐와의 연결을 위해서도 이탈리아의 지배는 매우 중시되었다. 후기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가 1527년 황제군(皇帝軍)에 의하여 약탈당하면서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점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로 보고 있다.

【인문주의자의 활동과 여러 나라의 르네상스】 시민적 인문주의자가 르네상스 초기에 이탈리아의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하였다. 고대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인문주의자가 코무네와 군주국에 관직을 구하는 예가 증대하였다. 인문주의적 교양이 출세의 수단이 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는데, 정치체제는 다르지만 알프스 이북의 절대군주국가에서도 인문주의자를 관료로 등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외국으로 나가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이로써 알프스 이북에서의 인문주의의 보급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프랑스·영국·독일 등 여러 나라가 그들 각자의 문화적 전통과 결합된 독자적인 르네상스를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대부분이 종교문제에 무관심했거나 플라톤 철학과 신학의 융합을 도모하였음에 반하여, 알프스 이북의 인문주의자들은 언어문헌학적 방법을 성서연구에 적용하여 신앙문제를 취급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지역의 르네상스는 종교개혁과 연결되었는데, 이와 같은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로는 구약성서의 이해를 위하여 헤브라이어 연구에 헌신하고 이탈리아 유학까지 했던 독일의 J.로이힐린과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J.르페브르 데타플 등이 있다. 영국의 J.콜레트와 T.모어도 이들의 범주에 속하며, 북방의 기독교적 휴머니스트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시대의 지식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D.에라스무스도 초대 교회의 순박함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인문주의자였다. 이러한 종교적 특징과 더불어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절대왕정의 전단계적 과정이라는 특징을 띠었는데, F.라블레와 M.몽테뉴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강한 귀족적·궁정적 성격을 띠며, 이는 곧 루이 14세의 절대왕조문화에 연결되었다. 영국의 경우에도 E.스펜서의 《선녀왕(仙女王)》과 같은 대서사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송시(頌詩)였으며, 셰익스피어가 낳은 드라마의 극치는 절대주의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에스파냐의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는데, 세르반테스의 소설도 가톨릭 신앙과 기사도 정신이 강조되었던 에스파냐 절대주의의 산물이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는 나라에 따라 각기 성격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던 복잡한 문화현상이고, 따라서 근대문화와의 관계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고전고대(古典古代)의 문화를 의식적으로 부흥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활동에 종사하는 인문주의자들은 공통의 교양과 언어와 이상을 통하여 공동영역을 분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부의 지식인에 국한된 것이지만 에라스무스가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위스 등을 주유했던 것과 같이 종교 이외의 세속문화에 대해서도 공통의 지반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사상은 이곳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뿌리를 르네상스에서 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실상 르네상스시대에는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이나 창조는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기(手記)에 나타난 견해를 근대과학의 예견(豫見)이라고 보았던 종래의 생각도 수정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기록은 중세 말기의 스콜라 학자에 의하여 이미 발견되었던 것을 다만 메모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측면에서 보는 르네상스의 중요성은 근대과학의 진원지로서가 아니라, 종래의 학자적 사고의 전통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직인(職人)의 전통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어 실험과 실용의 정신을 낳았다는 데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르네상스 정신은 중세를 이어온 과학의 변화와 더불어 16·17세기의 J.케플러, 갈릴레이 등을 낳게 하였으며, 이는 다시 뉴턴으로 이어졌다.

【르네상스에 대한 여러 견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등장함과 동시에 학문 부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갔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고전부활이 서구문명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 속에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관심은 그들 각자의 분야에 따라 이탈리아와 자기 분야와의 관계 탐구에 쏠리게 되었다. J.러스킨과 같은 비평가와 더불어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보편화하기 시작하였고, 휴머니즘이라는 말도 고전 스타일의 범주를 넘어선 지적 운동을 가리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55년 J.미슐레가 그의 《프랑스사》의 제7권을 ‘르네상스’라고 이름붙였을 때 그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미슐레는 르네상스에 대한 근대적 사상을 거의 모두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시대를 중세와 정반대되는 시대로 묘사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세계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르네상스관(觀)은 프랑스 중심적인 데에 문제가 있으며, 아마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적 배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보다 보수적이며 초연한 입장에 서려고 노력했던 스위스 문명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미슐레와 같은 민족주의 성향이나 중세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중세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히 근대의 시작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하나의 구분된 시대, 즉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그 자신의 어머니를 가진’ 문화 시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주로 새로운 문명의 정신적인 특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이 배태된 정신과 이탈리아인의 사회·정치적인 경험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 즉, 14세기의 시작과 함께 생성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험은 새로운 정신의 발달을 가져오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과 황제 간에 진행되었던 오랜 갈등이 이 무렵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러한 장기간의 투쟁은 양편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유럽의 어느 곳에서나 봉건주의는 중앙집권적 군주국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공화국이든 군주국이든 간에 이들 국가들의 특징은 ‘개인주의’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개인주의는 바로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의 발현에 중대한 소임을 담당한 것이 인문주의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개념은 이후 엄청난 양의 연구를 촉진·자극하였고, 수많은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일부 저명한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는 부분적으로 과장과 잘못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해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물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중요한 몇 가지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사상에는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이탈리아 중심적인 그의 주장과는 달리 유럽의 다른 지역,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북부 제국의 르네상스도 이탈리아의 그것과 평행하게 전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경제사의 등장은 사회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고, 르네상스 사가(史家)들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도전해왔다. 도시사회와 자본주의가 고대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중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한 재해석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사포리는 서유럽의 결정적인 르네상스는 11세기 십자군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에 따르면 12세기에 이탈리아에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는데, 이때는 도시중심, 상업자본주의, 자치적인 도시국가, 대중의 새로운 문화의 출현으로 특징짓는 시대이다. 레인 또한 르네상스가 12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 페거슨의 시대 구분에 동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르네상스는 재생이나 시작의 국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중세의 말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부르크하르트적인 해석을 앞지를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예견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르네상스가 하나의 뚜렷한 구획이 되는 역사적 시대 구분 용어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항목차례

종교개혁(Reformation)

 

  16∼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그리스도 교회의 혁신운동. 이 운동을 통해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 부르는 교파가 생겼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17,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퓨리터니즘도 넓은 의미로는 이 운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역사적 원인】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公議會)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었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派)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

【경과】 ⑴ 독일:종교개혁운동의 횃불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면서 신학교수인 루터가 <면죄부(免罪符)에 관한 95개조 논제>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대학의 성(城)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올려졌다. 이 항의문은 마인츠의 대주교(大主敎) 교회의 알브레히트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판 면죄부에 대해 루터가 그 성사적(聖事的) 효과를 신학적으로 문제삼은 것이었다. 이것이 루터 자신의 예상을 넘어 유럽 전체에 파급되는 대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루터가 이와 같이 가톨릭교회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4,5년 전 그가 수도원 생활의 악전고투 속에서 바울로의 ‘하느님의 뜻’이라는 복음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인간의 영혼 구원이란 인간의 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가장 깊은 근원은 구원문의 정확성을 둘러싼 루터의 내적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95개조 논제>는 경제적으로 로마에 의해 많은 수탈을 당하여 온 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문제가 일개 수도사가 제기한 신학논쟁에서 독일 국민 전체의 정치적·경제적인 문제로 확산되어 갔다. 당초 교황 레오 10세는 이 문제를 경시하였다가 문제의 해결이 어렵게 되자 유화책을 강구하기도 하였으나 루터는 1519년의 J.에크와의 라이프치히 논쟁 때 결정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정면대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 논쟁에서 루터는 보헤미아의 후스를 본떠 교황과 교회회의의 가류성(可謬性)을 주장하고 그 권위의 절대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20년 6월 드디어 루터에 대한 파문(破門)이 단행되었다. 이어 21년에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황제의 심문을 받았는데, 여기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관철하였다. 그는 심문을 받고 돌아가다 작센의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 곧 신성로마제국의 제후 가운데 황제의 선거에 관여할 수 있었던 7명의 제후) 프리드리히 현공(賢公)의 호의로 바르트부르크성(城)에 보호되어 1년에 걸친 체재 중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 루터역 성서는 문학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독일 국민의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는 21년 카를슈타트(본명은 Andreas Bondenstein)가 지도하고 있던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미사의 폐지, 평신도에 대한 성배(聖杯) 부여, 성상(聖像) 파괴 등은 개혁운동의 논리적 귀결이라 하나,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하게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22년의 ‘기사(騎士)의 난’ 농민전쟁(1524∼25)으로 발전하였다. 이 무렵부터 개혁운동은 제2단계에 들어가 루터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再洗禮派)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에라스무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인문주의와도 결별을 하여야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정치정세는 복잡하여서 신성(神聖)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독일과 에스파냐를 지배하고 있던 카를 5세는 로마 교황과 손을 잡고 근대국가로서 급속히 부상한 프랑스와 싸워야 하는 한편, 동방으로부터의 투르크의 침입을 경계하여야만 될 어려운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카를 황제는 독일 국내 제후(諸侯)의 지지를 필요로 하여, 루터에게서 일어나기 시작한 개혁운동을 일방적으로 억제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 국내의 정치세력을 양분하는 결과가 되었다. 황제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양파의 화해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 프로테스탄트측의 제후와 도시는 31년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고 하나로 뭉쳐서 황제 및 교황측과 대결함으로써 이윽고 독일은 종교전쟁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의 내전에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사이 루터파 교회는 점차 발전하여, 루터가 죽은 뒤 ‘순정(純正) 루터파’와 멜란히톤을 지지하는 ‘필리피스텐(필립파)’으로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독일 각지에서 꾸준히 성장하면서 확산되어 갔다.

⑵ 스위스와 프랑스:루터의 개혁운동이 면죄부에 대한 신학적 문제 제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복음의 신앙이라는 종교 고유의 문제로부터 비롯된 데 반해서, 츠빙글리에 의해서 시작된 스위스의 개혁운동은 성직자의 결혼, 육식의 자유, 화상(畵像) 철거 등 휴머니즘적 동기에 바탕을 둔 가톨릭적 미신타파 운동으로 일어났다. 여기에 용병제(傭兵制) 폐지와 독립운동이라는 정치적 성격이 첨가되었다. 츠빙글리는 종군사제(從軍司祭)로서 스위스 용병제의 부패와 비극을 체험하였다. 또한 그는 성지순례(聖地巡禮)나 면죄부 판매 등의 부패상을 낱낱이 보고 교회개혁의 필요성도 통감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개혁운동의 기치를 든 것은 1523년의 ‘취리히 토론’이었는데, 이로써 그는 취리히의 콘스탄츠 주교구(主敎區)로부터의 독립과, 여러 종교적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싸움을 개시하였다. 또한 그는 세속의 정치적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하는 것이지, 교회를 매개로 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속권독립론(俗權獨立論)을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의 주도하에 개혁이 이루어진 교회는 뒤에 제네바의 칼뱅파(派) 교회와 합동해서 개혁파 교회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 특색은 성서주의(聖書主義)와 간소한 예배에 있었다. 그에 비해 루터파 교회는 성화상, 기타 예배양식에 있어서는 가톨릭적 요소를 존속시키고 있다. 양파의 차이점과 분리는 29년의 마르부르크 회담에서의 논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은 독일과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결속을 시도하기 위해 이미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던 성찬문제(聖餐問題)에 관해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회담한 것이었는데,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성체(聖體)의 현존(가톨릭적 해석)을 고수하였고, 츠빙글리는 그 상징설(프로테스탄트적 해석)을 양보하지 않았다. 이로써 루터파와 개혁파가 형성됨으로써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2대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르페브르, 파렐 등의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르페브르는 루터에 앞서 성서적 개혁사상을 품고 있었으나 루터의 개혁사상이 프랑스 국내에 유입된 이래 소르본대학 신학부를 중심으로 찬부 양론이 격렬하게 일었다. 그러나 1521년 4월 소르본측은 결국 루터가 이단임을 단정하고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25년 파리 교외 모에서 있었던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의 모임이 탄압 해산되자, 지도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이 가운데 파렐은 제네바에 가서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그의 개혁운동은 뒤에 칼뱅에게 계승되었는데, 이 칼뱅을 통해 세워진 제네바 교회가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도하게 된다. 칼뱅은 처음에 에라스무스를 숭배하는 인문주의자였으나 루터의 개혁사상에 끌려 복음주의로 전환하였다. 그는 36년 《그리스도교 강요(綱要)》를 출판함으로써 일약 복음주의의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탄압을 피해서 스위스의 제네바에 자주 들렀다가 파렐의 설득으로 개혁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개혁운동은 복음적 신앙의 자유가 방종으로 오해되어, 개혁운동자들을 정치적·도덕적으로 민중을 속박하는 자들로 간주한 세력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하였다. 칼뱅은 한때 스트라스부르에 피신하여 그곳에서 프랑스인 난민교회의 목사로 일했으나 40년 초청을 받고 다시 제네바로 갔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 머물면서 제네바를 프로테스탄트의 일대 근거지가 되게 하였다. 칼뱅은 루터의 의인론(義認論: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주장)을 계승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 복음주의의 기반에 서 있었다. 그러나 칼뱅은 구원을 받은 자는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여야 할 것(실천주의)임을 강조한 점에서는 루터와 다른 특색을 지닌다. 이와 같은 신앙은 뒤에 퓨리터니즘(청교도주의)에서 현세의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의 예정을 확정하려 하는 독특한 직업윤리를 낳았다. 이같은 직업관은 근대 자본주의 성립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⑶ 영국:위클리프 때부터 로마 교황의 세력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완전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이혼문제에는 국왕의 개인적 사정뿐만 아니라 내외의 정치적·종교적 정세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하여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그 교의 내용은 여전히 가톨릭적이었다. 다음의 에드워드 6세 시대에 들어서자 개혁정책이 단행되어 교회는 현저하게 칼뱅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의 치하에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복귀정책이 취해져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같이 영국은 국왕이 바뀔 때마다 그 교회체제에도 크게 변동이 있어 오다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 국운이 융성해지면서 일단 안정을 되찾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입장인 중도적 방향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철저하지 못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장로주의(長老主義)의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1세를 맞이하여 보다 철저한 개혁의 실시를 청원하였으나 이들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탄압을 받았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었던 개혁에 대한 기대는 잉글랜드 대 스코틀랜드의 전쟁을 계기로 촉발하여, 드디어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을 정점으로 하는 청교도혁명에 이르렀다. 이 혁명은 크롬웰의 주도하에 수습되었으나 이 혁명을 계기로 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파가 생겼다. 오늘날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청교도혁명으로 생긴 여러 파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역사적 의의】 종교개혁은 루터의 ‘하느님의 뜻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교의 혁신운동이었으나,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도 세계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근대 세계와 근대인이 탄생하였다. 종교개혁 후에는 계몽주의(啓蒙主義)가 일어나, 언뜻 비종교적 합리주의가 근대사회의 특징이 된 것 같이 보였지만, 근대인을 ‘마술’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킨 것은 단순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합리적·과학적 태도를 표출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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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16세기 M.루터, J.칼뱅 등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립된 그리스도교의 분파. 가톨릭을 구교(舊敎)라고 하는 데 대해 신교(新敎)·개신교라고도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 및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교파를 이룬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프로테스트에서 기원했는데, 이 말은 1529년 2월 21일에 열린 독일 슈파이어 국회에서 루터계 제후(諸侯)와 도시들이 황제 카를 5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의 억압에 항거한 데서 유래하였다.

【역사】 루터가 독일에서 일으킨 종교개혁은 1526년 이후 독일의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30년 독일 루터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된 이후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종교개혁은 스위스에서도 일어났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 슈트라스부르크에서는 부처, 제네바에서는 칼뱅 등이 주로 상공업자와 손잡고 프로테스탄트적 종교개혁에 앞장섰다. 이 같은 일련의 교회개혁 운동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전쟁이, 독일에서는 30년전쟁 등의 종교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유럽의 종교적 통일성은 무너져, 독일에서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유럽에서는 드디어 각 분파가 형성되었는데, 스위스계의 프로테스탄트를 개혁교회(改革敎會) 또는 장로교회(長老敎會)라고 부른다. 이 개혁교회는 프랑스·영국·스코틀랜드·네덜란드·헝가리·폴란드 등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과는 달리 영국성공회(英國聖公會)를 성립시켰는데, 이것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 후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퓨리턴 제파(諸派)로 나뉘어 각각 장로파(長老派)·회중파(會衆派)·뱁티스트파·퀘이커파·메노나이트파 등 여러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들 여러 교회의 신학적 특징은 칼뱅주의뿐만 아니라 교파에 따라서는 재세례파(再洗禮派)나 스피리튜얼리즘의 요소를 간직하기도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 영국 성공회로부터 갈라져 메서디스트 교회가 생겼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가 주종을 이루었다. 미국은 영국의 퓨리턴 제파에서 나온 교회와 메더디스트 교회를 주종으로 하는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로서, 사상적으로나 문화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유럽의 여러 교파가 이식되었고, 기존의 대교파에서 갈라져 나온 많은 교파로 그룹을 형성했다. 이들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 중에서 잉글랜드의 성공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독일의 루터교회, 네덜란드의 개혁파교회 등은 본래 국가와 결부된 국가교회(國家敎會)이지만, 퓨리턴 이후에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시작하여 이른바 자유교회(自由敎會)가 성립하였다. 이와 같은 자유교회 제도가 전형적인 방법으로 시행되고 있는 곳이 미국이며, 따라서 국가교회형의 앵글리칸교회(에피스크탈교회라고도 한다)·루터교회·개혁파교회 등도 미국에서는 자유교회화되어 있다.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는 모두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적극적으로 외국 전도에 힘써 각 교파는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지에 교회와 미션스쿨·사회사업단체 등을 창립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색】 종교개혁은 단순히 가톨릭교회의 타락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신학적인 대립에서 유래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쪽에서 말하는, 루터의 ‘복음의 재발견’이야말로 종교개혁의 출발점인데, 여기서 시작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적인 신학적 특징은 다음의 3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프로테스탄티즘은 ‘오직 신앙에 의하여(solfida)’ 또는 ‘오직 은혜에 의하여’ 의(義)로 인정됨을 강조한다. 물론 가톨리시즘(가톨릭교)에서도 ‘은혜에 의하여’를 주장하지만, 거기서는 은혜에 의하여 의화(義化)가 더해져서 드디어 성화(聖化)에 이른다고 하며, 의화는 구제(救濟)과정의 한 단계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인간은 선업(善業)이 없어도 은혜에 의하여 죄를 용서받는 것인데, 이 같은 죄의 용서가 의인이다. 따라서 똑같은 의인이라도 한편에서는 의화 내지 성의(成義)로 해석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인 내지 선의(善義)로 해석된다. 선업 없이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의(義)로 인정하는 신의 은혜를 거저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에 의한 의인’이며, 이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나타나는 것이 선업이다. 그것은 ‘오직 신앙에 의하여’라고 해도 행위가 무시되는 것은 아니며 신앙과 행위의 관계가 가톨리시즘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② 성서원리(聖書原理):가톨리시즘에서는 권위의 통로로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라는 두 가지를 주장하고, 성서의 해석도 교회의 전통에 따라 규정되므로 결국 교회가 성서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티즘은 권위의 통로를 성서에만 한정한다. 교회는 성서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성서에 기초하여 존재한다. 또한 성서의 정경화(正經化)는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졌으나 성서를 진실로 정경화한 것은 성서 자체의 힘이며, 교회는 그것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③ 만인사제(萬人司祭):가톨리시즘에서는 설교보다도 전례(典禮)가 중요하며, 이것은 담당하는 사제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권위는 사도 베드로에게서 전승된 것으로 되어 있다(使徒傳承).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전례보다도 설교가 중시되어 교직제(敎職制)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직자는 제사라는 성격보다도 설교자·목회자(牧會者)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교직자라고 해도 그 직위에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교직자의 신앙과 인격이 중요해지는데, 엄밀하게는 신의 말씀만이 권위이며 교직자는 신의 말씀을 전도하는 기능이다. 원리적으로는 만인이 설교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제사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만인이 바로 제사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전개】 프로테스탄티즘은 루터·칼뱅 이후 17세기에 정통주의를 낳았는데, 18세기의 계몽주의 이후 근대사상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신학사상의 전개를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상사에서는 정통주의까지의 프로테스탄티즘을 고(古)프로테스탄티즘이라 부르고, 계몽주의 이후에 새롭게 전개된 것을 신(新)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한다. 18세기의 이신론(理神論),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 등이 그것인데, 물론 거기에 대항하는 움직임도 일찍부터 일어났으며, 영국의 메서디즘·옥스퍼드운동, 독일의 신앙각성운동·신(新)루터주의 등에서 신앙의 부흥과 교회의 전통으로의 복귀운동이 일어났다. 근대 프로테스탄트의 역사는 이 양자의 결합으로써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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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독일의 종교개혁자·신학자. 아이슬레벤 출생.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1년 비텐베르크대학으로 옮겨, 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캘빈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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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Jean Calvin, 1509.7.10∼1564.5.27)

 

  프랑스의 신학자·종교개혁자.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는데, 처음부터 신정정치(神政政治)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說敎者)·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 추기경 사드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거기서 《교회규율》(42)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여,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칼뱅이즘(Calvinism)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칼뱅에게서 발단한 프로테스탄트 사상. 칼뱅은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 신앙의 유일한 규준(規準)으로서의 《성서》 등,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고 동시에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신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신관(神觀), 구원을 받는 자와 멸망에 이르는 자는 영원한 옛날부터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예정설(豫定說), 성찬(聖餐)에서는 루터의 말처럼 빵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이 아니며, 츠빙글리가 말하듯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혈육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령(聖靈)의 힘으로써 영적으로 관여한다고 하는 성찬론 등이 칼뱅 신학의 특징을 이룬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자기를 신의 용기(容器)로 보는 루터의 수동적인 경건에 대해, 자기를 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보는 활동주의적 경향을 가졌으며, 사회생활에서의 적극적인 태도를 창출하였다. 또한 루터가 국가권력을 영광화(榮光化)하는 경향을 띤 데 반해, 칼뱅은 저항권을 인정하고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유를 확보하였다. 예배에 관해서도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설교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교회제도에 관해서는 목사·교사·장로·집사 등 4개의 직무를 정하고, 목사와 장로로 이루어진 콘시스토리움에 따라 교회가 운영되도록 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 파급되어 독일·네덜란드 및 기타 국가의 개혁파, 프랑스의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퓨리턴 제파(장로파·독립파·뱁티스트파 등)를 탄생시켰다. 또 이러한 칼뱅주의의 전개 속에서 신학적인 발전과 변모를 볼 수 있는데, 그 주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즉, 신의 예정을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보는 것과 그 이후로 보는 것과의 대립,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원받기로 정해진 자만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과 만인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아르미니우스주의)과의 대립, 천지창조로부터 완성까지를 신과 인간과의 계약의 실현과정으로 보는 계약신학의 성립 등이다. 이와 같은 발전과정에서 칼뱅주의는 근대 서유럽 문화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근대 민주주의 형성과 근대주의 ‘정신’에 대해, 트뢸치나 M.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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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世自然法思想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사회를 풍미한 자연법 사상. 그로티우스의 이성자족론(理性自足論)에서 출발한 합리주의를 기초로 하며, 그 때까지의 자연법이 신(神)의 뜻인 영구법을 전제로 하고 있는 데 반하여, ‘신(神)일지라도 자연법을 변경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신의(神意)보다도 위에 두었다. 이러한 합리주의 외에 근세 자연법에는 또한 개인주의와 급진주의의 특징도 있는데, 개인이 가지고 있는 천부적(天賦的)인 불가양(不可讓)의 자유와 권리를 국가의 권력이 침해하는 경우에는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그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급진적·혁명적인 근세 자연법은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일단 혁명이 성공하자 근세 자연법의 급진성은 점차 사라지고, 법실증주의(法實證主義)가 법이론의 세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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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론(empiricism)

 

  인식·지식의 근원을 오직 경험에서만 찾는 철학적 입장 및 경향. 따라서 초경험적 존재나 선천적인 능력보다 감각과 내성(內省)을 통하여 얻는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하여, 전자도 후자에 의해 설명된다는 사고방식이며, 지식의 근원을 이성에서 찾는 이성론·합리론과 대립된다. 철학이론으로서 경험론은 이미 고대철학의 역사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경험론은 그 역사적 형태에 따라 고대적·근대적 및 현대적인 것으로 구별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 원자론자, 소크라테스파(派)의 일부(퀴닉파·키레네파 등), 에피쿠로스학파 등이 이 경향에 속하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이성주의·초월주의의 경향과 대립된다. 그러나 이 경향이 유력해진 것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경험적 사실이 중시되고, 또 인식론이 철학의 중심 과제가 된 근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영국은 경험론의 전통에 있어 대륙의 이성론이나 독일의 관념론 등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띤다. 이 경향은 중세에 이미 F.베이컨, W.오컴 등에서 뚜렷하였으며, 특히 후자의 비판적 견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영국 경험론의 진정한 기원은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고, 연역적 추리에 대하여 개별적 경험에 근거를 두는 귀납법을 제창한  베이컨이다. 이 경향은  T.홉스를 거쳐  J.로크에 이르러 R.데카르트의 생득관념설(生得觀念說:nativism)을 비판하여 모든 인식의 경험에 의해 설명됨으로써 명확화하였다. 로크는 “마음이란 백지 또는 암실이며, 모든 지식은 감각과 반성을 통하여 외적으로 주어지는 문자이며 빛”이라고 하였다. 로크의 경향은 G.버클리와 D.흄으로 계승되어 영국 경험론의 트리오를 이루었다. 그들은 추상개념, 경험의 배후에 있는 실체개념, 인과율(因果律) 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보였으며, 특히 흄은 추상관념을 비판하여 관념의 기원을 감각인상에서 찾음으로써 위의 경향을 극한으로까지 밀고 가서 I.칸트로 하여금 이성론의 독단이라는 잠에서 깨어나게 하였으나, 상대주의·회의주의적인 결과도 나타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J.S.밀 등도 영국의 고전경험론의 흐름을 따랐다. 경험론이라는 큰 조류가 볼테르를 거쳐 프랑스에 유입되자 프랑스 계몽사상, 특히 프랑스 유물론으로서, 근대 세계사를 비약적으로 전진시키는 일대 격류로 변모·발전하였다. 또 영국 경험론은 이와 같은 프랑스의 계몽사상이나 유물론과 합류, 봉건제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던 독일을 일깨웠는데, 그것은 단순한 충격에 그치지 않고 독일 관념론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철학사상(哲學史上) 유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 경험론으로서의 영국 경험론은 이 동안 프랑스 유물론이나 독일 관념론의 형태로 소멸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영국의 부르주아 라디칼리즘의 철학적 지주가 되었다. 이어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한편으로 유럽 대륙에서 이른바 ‘과학의 철학’의 여러 조류에서 핵심적인 이론이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자 논리실증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한편 미국 대륙에 건너가서는 프래그머티즘이라는 형태로 이론적인 자체 강화를 이루어 오늘에 이른다. 이렇게 경험론의 전통은 헤겔 철학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의 붕괴 이후, 그 반동으로서의 유물론이나 실증주의의 움직임과 결부되어, 19세기~20세기에 서양에 확산되었다. 논리실증주의·프래그머티즘·분석철학 등은 대표적인 현대 경험론이다. 예를 들면, 논리실증주의는 한편으로 사실적(事實的) 여건을 모든 경험과학 이론의 구성과 환원의 기초로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전통적으로 선천적 인식으로 간주되어온 논리·수학 등의 필연성까지도 감각적 기호(記號)에 관한 약정(約定)에 뒤따르게 하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위의 이원론(二元論)에는 비판적이며, 일원적 연속성과 행동심리학에 의한 인식의 동적인 파악을 강조하지만, 한층 철저한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공통된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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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Francis Bacon, 1561.1.22∼1626.4.9)

 

  영국의 철학자·정치가. 런던 출생. 르네상스 후의 근대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임스 1세 치하에서는 사법장관과 기타 요직을 지내 ‘벨럼의 남작’, 이어서 ‘오르반즈의 자작’이 되었다. 1613년에 검찰총장, 18년에 대법관 등 날로 권세가 높아갔으나, 수뢰(收賂) 사건으로 의회의 탄핵을 받아 관직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정계에서 실각된 후 만년을 실의 속에 보내면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냉정하면서도 유연한 지성을 가진 현실파 인물이었으며, 근세 초기의 사상가답게 그 역시 천동설을 신봉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반대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완전히 불식하지 못한 전통적인 구(舊)사상의 영향하에 있던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기본적인 의도는 스콜라 철학의 불비·결함을 비판하고 새로운 경험론적 방법을 발견·제창하려는 데 있었다. 즉, 그는 우주 일체의 활동의 원인을, 특히 우리들 인간이 자유롭게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원인을 규명하려고 힘썼으며, 그러기 위해서 인류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지적 재산의 일람표를 작성하여 거기에 무엇이 결핍되었고 무엇을 보충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저서 《학문의 진보》에서 말하였지만, 처음에 《학문의 대혁신》 전 6부의 집필을 구상하여 그 계획을 대규모로 전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간행된 것은 3부뿐이었고, 특히 제1부의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1605)와 제2부의 《신기관(新機關:Novum Organum)》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서 《오르가논》에 대항하는 것)(20)이 중요하다. 그는 기억·상상·이성이라는 인간의 정신능력 구분에 따라서 학문을 역사·시학·철학으로 구분하였고, 다시 철학을 신학과 자연철학으로 나누었는데, 그의 최대의 관심과 공헌은 자연철학 분야에 있었고 과학방법론·귀납법 등의 논리 제창에 있었다. 그는 우선 인간 지성의 도리의 접근을 방해하는 편견으로서 4종의 이도라(idora:우상 또는 환영)를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① 종족의 우상, ② 동굴의 우상, ③ 시장의 우상, ④ 극장의 우상 등이다. ①은 인류라는 종족에 대한 보편적인 선입관이고, ②는 개인적 편견으로서, 마치 동굴 속에 있듯이 자연의 빛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비유한 것이며, ③은 언어의 부적당한 사용에 기인하는 것으로, 시장에서 있지도 않은 풍설이 나도는 것과 같은 것이며, ④는 논증의 잘못된 규칙이나 철학의 그릇된 학설과 체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서, 마치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가공의 이야기에 비유되는 것과 같은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편견을 일소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삼단논법은 지식의 확장에 소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실험과 관찰에 기본을 둔 귀납적 방법을 중시하였다. 즉, 그것만이 다수의 사례를 모아서 표나 목록을 만들어 사상(事象)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베이컨이 말한 본질은 여전히 중세적 ‘형상(形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자연법칙의 의미도 명확하지 못하며, 수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자연 속의 보편적 법칙을 양적 관계로서 파악하는 수단을 동반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그 이론이 매우 불충분하였지만, 근대과학의 방법의 중요한 일면을 강조한 것만은 틀림없다. 바꾸어 말하면, 베이컨에 있어 ‘형상’의 탐구는 형이상학이었지만, 그 형이상학의 응용부문은 미신적 마술과 구별된 ‘자연적 마술’이었다. 여기에 르네상스적 마술이 근대과학의 공학적 기술로 전신(轉身)하려 한 전환점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그와 같은 새로운 마술, 즉 발명·발견을 뜻하는 대로 성취시킬 수 있는 기계공학적 마술의 달성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뉴 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1627)라는 미완성의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항공기·잠수함·인공의 비·합성금속 등의 과학적 발명을 실현하고 있는 이상국의 꿈을 묘사하여 나타냈다. 이와 같이, 과학의 진보에 장대한 꿈을 싣고 과학연구의 방법을 제창하였지만, 그 방법을 실제로 이루는 데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 중에서 구현된 방법의 정신, 즉 미래를 예견한 광대한 전망적 정신과 그 지적 전망에 의하여 ‘인류의 왕국’을 확대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달성하려고 한 그의 장대한 포부는 그 후에 영국뿐만 아니라 널리 전 유럽의 근대철학에서 그를 선각자 속에 자리잡게 하였다. 베이컨의 실천철학은 그의 문필의 재능을 보인 《수필집》(1597)에서 비체계적으로 논술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기적 충동 외에 사랑이라는 지고(至高)한 덕으로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후자에 의한 실천적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한 점에서 그 후 영국 고유의 사회적·실천적·공리주의적 윤리의 방향을 시사하였다. 저서에, 《학문의 권위와 진보》(1622) 《숲과 숲》(2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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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Thomas Hobbes, 1588.4.5∼1679.12.4)

 

  영국의 철학자. 맘즈베리 출생. 무명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스콜라철학을 전공하였다. 스튜어트왕조를 지지하는 정치가로 지목되자, 퓨리턴혁명 직전에 프랑스로 망명하여 유물론자 R.가생디와 철학자인 R.데카르트 등과 알게 되었다. 그 후 크롬웰의 정권하에서는 런던으로 돌아와 정쟁(政爭)에 개입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 힘썼다. 왕정복고(王政復古) 후에도 찰스 2세 통치하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F.베이컨과는 달리 귀납법(歸納法)만이 아닌 연역법(演繹法)도 중시하여, 양자의 상즉적(相卽的) 관계에 의하여 이성(理性)의 올바른 추리인 철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주요저서인 《철학원리》는 제1부 <물체론>(1655), 제2부 <인간론>(58), 제3부 <시민론(市民論)>(42, 47) 등 3부로 나누어졌는데 베이컨 학설보다 더 체계적으로 구축되었다. 제1부 <물체론>에서 그는 자연학(自然學)을 철학의 기초에 두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形相因)·목적인(目的因)을 버리고 전실재(全實在)를 물체와 그 운동이라는 동력인(動力因)만으로 설명하려는 유물론, 즉 자연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자연적 물체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을 인위적 물체인 ‘인간’이나 ‘국가’에도 미치게 하여, 감각·감성(感性) 등의 인식의 이론이나 정념론(情念論), 윤리학, 법·사회의 이론에도 적용하였다. 정신은 미세한 물체이고, 인식은 외계의 운동이 감관(感官)에 주는 인상에서 생기며 실재의 모사(模寫)가 아니고 주관적이라 하였다. 이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으며, 지적인 판단이나 추리는 그 표현수단으로서 언어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후자도 실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의 물체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추상적·보편적 개념은 기호(記號)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중세(中世)의 W.오컴 등에서 현저했고, 또 후일의 영국 경험론에서 보는 고유한 유명론(唯名論)의 전형적인 예이다. 수학(數學)은 앞에서 말한 기호로서의 보편자(普遍者)에 관계되는 지식의 모범이라 하였다. 감정이나 정서에 대해서도 똑같은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외적 자극에 대한 이론적 반응이 감각인 데 반하여, 실천적 반응은 쾌(快)·불쾌(不快)의 감정이다. 선(善)이란 쾌이므로 인간이 바라는 것이고, 악(惡)이란 불쾌이므로 인간이 싫어하는 것이다. 의지(意志)는 외적으로 결정되며 결정론(決定論)은 필연이다. 본질적으로 선한 것은 없고, 선악(善惡)·정사(正邪)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에 그 판정의 기준이 생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자연상태’에서는 아무것도 금할 수 없고, 개인의 힘이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狼]’이기 때문에 자기 보존(自己保存)의 보증마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自然權)’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에서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이상적인 국가형태라고 생각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 《자연법과 국가의 원리》(4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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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John Locke, 1632.8.29∼1704.10.28)

 

  영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 브리스틀 근교의 링턴 출생.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라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소지주·법률가로서 내란 때는 의회군에 참가하여 왕당군과 싸웠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자연과학·의학 등을 배웠고, 한때 공사(公使)의 비서관이 되어 독일 체류 중에 애슐리경(뒤의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어 그의 시의(侍醫) 및 아들의 교사 그리고 고문이 되었다. 백작이 실각되자 반역죄로 몰려,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89년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 《종교 관용에 관한 서한》(1689) 《제2서한》(90) 《제3서한》(92) 《통치이론》(90)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90)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관직에 있었으나 1700년 이후 은퇴하여 에식스의 오츠에서 사망하였다. 데카르트 철학과 I.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反)스콜라적이었다. 《인간오성론》은 그의 영향을 바탕으로 G.버클리, D.흄에게로 계승되었던 경험론과 내재적 현상론(內在的現象論)의 입장에서, I.칸트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되는 인식을 근본 과제로 제기하여 논술한 저서이다. 제1권에서는, 먼저 R.데카르트나 케임브리지 플라톤파(派)의 본유관념(本有觀念)과 원리를 부정하고, 그 위에 제2권에서는, 인지(人智)는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관념에 유래하며, 그로부터의 복합관념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실체(實體)’ 개념도 단순관념의 복합이며, 기체(基體)는 그 배후에 상정되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단, 색(色)·향(香)·음(音)과 같이 감각에 대하여 상대적인 제2성질과, 연장(延長)·운동·고체성(固體性)과 같이 물(物) 자체에 구비된 제1성질과 구별하여, 전자(前者)는 후자가 감각기관에 자극을 줌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과학적 실재론을 전제로 삼았다. 또, 불가지인 물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정신에 대해서도 반성의 관념과 기능적 인격에 의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실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서, 그 문제를 다음의 버클리와 흄에게 남겨 놓았다. 제3권의 언어론은, 스콜라적 실체형상(實體形相)의 비판, 개념론 또는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보편개념의 설명·정의에 대해서의 견해 등 현대 의미론(意味論)에 통하는 중요한 고찰을 포함시켰다. 제4권은 제3권까지 논술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의 확실성·가능성·종류 등을 논했다. 제4권에서 자아의 직각지(直覺知)를 지식의 근원으로 하는 것 등 이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나, 지식을 관념과 대상 간이 아니라 관념간의 일치 또는 불일치의 지각(知覺)이라는, 관념간의 관계라고 한 것은 후의 경험론의 방향을 보인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오성론》에서 단편적으로 취급된 이외에는 정리된 윤리서(倫理書)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심리적 해명 방법이나 쾌락주의·행복주의의 경향과, 도덕을 신(神)의 법, 자연법, 국법과의 일치에서 구하려고 한 방향 등은 영국 고유의 윤리와 공통된 성격을 보인다. 또, 계시(啓示)의 뜻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적 논증(理性的論證)의 한계를 넘는 것을 개연적(蓋然的)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종교상 이신론(理神論)을 조장하는 입장에 섰다. 법·정치 사상에서는 계약설을 취하지만, 홉스의 전제주의(專制主義)를 자연상태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하여 주권재민(主權在民)과 국민의 반항권을 인정하여 대표제에 의한 민주주의, 3권분립, 이성적인 법에 따른 통치와 개인의 자유·인권과의 양립 등을 강조하여 종교적 관용을 역설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예혁명을 대변하고 프랑스혁명이나 아메리카 독립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서유럽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또 교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교육법을 통렬히 비판하여 그리스·라틴어 집중주의, 암기식 주입주의를 반대하고 수학적 추리와 유용한 실제적 지식, 신체·덕성의 단련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그 사람의 소질을 본성에 따라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여 가정교사에 의한 교육을 주장했다. 저서로 《금리저하와 화폐가치와 화폐가치 앙등의 결과에 관한 고찰》(91) 《교육론》(9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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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George Berkeley, 1685.3.12∼1753.1.14)

 

  영국의 철학자·성직자. 아일랜드의 킬케니 출생. 17∼18세기 영국 고전경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1704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1707년에 이 학교의 연구원이 되었으며, 《시각신설론(視覺新說論):An Essay Towords a New Theory of Vision》(1709)과 그의 대표적인 저서가 된 《인지원리론(人知原理論):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10) 등을 저술하였다. 그 후,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복음(福音)을 전하기 위하여 버뮤다섬[島]에 이상적인 칼리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아메리카로 건너갔으나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귀국 후, 33년에 아일랜드 클로인의 주교로 임명되어 지방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저술에도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옥스퍼드로 가서 지내다가 병사하였다. 버클리 철학의 근본명제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知覺)된다는 것(Esse est percipi)’으로 요약된다. 즉, 그는 능동적인 힘, 작용으로서의 정신실체 등과 그것에 지각되어 비로소 존재하는 ‘관념(idea)’만을 인정하였다. 그는 또 지각되지 않는 추상적 관념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며, 추상적 보편관념이란 같은 종류의 개개의 사물을 대표하는 기능을 부여한 개별관념이라고 역설하였다. 또, 색·향기 등 제2성질의 주관성에 대하여, 연장·운동 등 제1성질을 지각하지 않고도 실재한다고 생각한  J.로크의 입장을 부정하고, 나아가 물체적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또한 D.흄에 앞서서 관념 사이의 인과율도 부정하였다. 버클리의 관념 및 정신실체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은 독아론(獨我論)과 내재적 현상론, 이 경향을 모두 수반하고는 있지만, 궁극에 가서는 ‘정신은 개아(個我)를 초월한 신(神)’이라고 생각하여, 말브랑시(1638∼1715)에 가깝고 신(新)플라톤주의의 색채를 띤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으로 발전하였다. 이 경향은 그의 만년의 저작 《알시프런》(1732)과 《사이리스》(44)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의 의도는 신흥 자연과학의 유물론과 동시대의 무신론·이신론(理神論)·자유사상에 대하여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호교론(護敎論)에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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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David Hume, 1711.4.26∼1776.8.25)

 

  영국의 철학자. 에든버러 향사(鄕士)의 아들로 출생. 에든버러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한때 상사(商社)에 근무하였으나, 문학·철학을 지향하여 사직하고 1734∼37년 프랑스에 체재하였다. 그 곳에서 주저(主著) 《인성론(人性論):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집필하여, 39년에 제1권 <오성편(悟性篇)>과 제2권 <감정편>을, 40년에 제3권 <도덕편>을 출간하였다. 이어 당시의 사회·정치·경제에 관한 토픽을 다룬 《도덕·정치철학:Essays Moral and Political》(1741∼42)을 간행하여 호평을 받았다. 한편, 평판이 좋지 않던 《인성론》의 제1권 <오성편>을 개고(改稿)한 《인간 오성에 관한 철학논집: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48)을 내놓았다. 그는 44년 에든버러대학, 51년에 글래스고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했으나, 모두 무신론자라 의심하여 거절당하였다. 52년 에든버러 변호사회 도서관 사서(司書), 63년 주(駐)프랑스 대사의 비서관, 67∼69년 국무차관을 역임한 후 은퇴하였다. 그의 인식론(認識論)의 의도는, J.로크에서 비롯된 내재적 인식비판(內在的認識批判)의 입장과 I.뉴턴 자연학의 실험·관찰의 방법을 응용해서, 인간의 본성 및 그 근본법칙과 그것에 의존하는 여러 학문의 근거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인간정신의 기본적 단위는 ‘인상’과 ‘관념’이며, 그 원천(源泉)으로서 감각과 반성(反省)이 이에 교차(交叉)한다. 원칙적으로 관념은 인상이 그 밑바탕이며 인상의 원인은 미지(未知)이다. 또한, 지식은 관념의 연합에 의해 성립한다. 따라서 이 연합의 3개의 관계(類似, 接近, 原因과 結果), 또는 7개의 철학적 관계(類似, 同一, 空間·時間關係, 量 또는 數, 性質의 程度, 反對, 原因과 結果)의 고찰이 중요하게 되는데, 특히 인과관계는 중요하다. 이 관계는 접근과 계기(繼起)의 관계에 더하여, ‘원인’에서 ‘결과’로의 ‘이행(移行)’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습관’에 의해 확립되며, ‘신념’에 뿌리박힌 것으로 객관적 필연성은 없다. 물체적 실체(物體的實體), 외계의 실재(實在)도 역시 마찬가지로 신념과 습관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G. 버클리가 인정한 정신실체(精神實體)도 ‘지각이 지나가는 무대’ ‘지각의 다발’로서가 아니면 부정(否定)된다. 따라서, 흄의 인식론은 표면상으로는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 결말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내재적 현상학의 한 귀결이며, I.칸트를 이성론(理性論)의 독단(獨斷)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실천철학은 《인성론》의 제2,3편이 ‘감정편’ ‘도덕편’인 것을 보아도 분명한 것처럼, 흄 철학의 목표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유명한 구절이 대표하듯이, 감정은 오성·지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며, 그것이 인상·관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만 인식론에 관계된다. 흄은 도덕의 밑바닥에 ‘공감(sympathy)’을 두고,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은 상호간에 주고받는 쾌락과 고통의 감정과, 상호간의 덕성(德性)을 판정하는 시인(是認) 및 비난의 감정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 주장은 특별한 도덕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자연주의적이고, 또한 사회적 성격을 보여 주는 점에서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이다. 종교도 역시 심리적·역사적 분석 수법에 의해 자연주의적으로 해명되며 이신론(理神論)의 입장이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하는 생활감정에 의해 재해석(再解釋)되고, 기초가 다시 다져진다. 정치·법사상에서는 T.홉스의 ‘자연상태’의 가정(假定)과 계약설을 비판하고, 만인에 공통된 ‘이익’의 감정에서 법의 근거를 구하는 공리주의적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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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합리론(continental rationalism)

 

  17세기의 R.데카르트, B.스피노자, G.W.F.라이프니츠 등과 같은 이른바 유럽대륙의 철학자들에 의해 전개된 철학의 총칭. 유리론(唯理論) 또는 주리론(主理論)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은 이성(理性)에 있으며 인간의 이성은 또한 신의 이성의 일부라는 것을 공통적인 신조로 삼았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확실한 지식은 생득적(生得的)이며, 명증적(明證的)인 원리로부터 유래하거나 그것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후천적 감각경험으로 말미암은 지식은 모두 혼란하고 불확실하다고 본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석하고 분명한 제1명제를 정립하고 연역적 방법에 의해서 자연학(自然學)의 수학화(數學化)를 시도하였으며, 스피노자는 그의 주저 《에티카:Ethica》를 기하학적 질서에 입각하여 서술함으로써 일원론적 범신론(一元論的汎神論)을 수립하였다. 라이프니츠 역시 모든 진리를 몇 개의 근본명제로부터 연역함으로써 보편수학(普遍數學)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대륙합리론자들은 신을 실체(實體)로 보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신이라는 실체를 토대로 하여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신이라는 무한(無限)실체 이외에 정신과 물체라는 유한(有限)실체를 인정함으로써 정신과 물체는 그 속성(屬性)을 달리하며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였으며,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유일하고 무한하여 자기원인적(自己原因的)인 신이라는 실체로부터 일체를 연역함으로써 일원론적 범신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실체를 무수한 모나드[單子]라고 봄으로써 범신론적 다원론을 수립하였으며, 신의 예정조화(豫定調和)에 의하여 세계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대륙합리론 사상은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는 백지(白紙:tabla rasa)와 같은 상태이다가 마치 백지에 글이 씌어지듯이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서 인식이 성립된다고 보는 영국경험론과 대립된다. 대륙합리론은 인간이성의 주권확립이라는 점에서는 시대적 의의가 있으나, 이성의 권능을 과신한 나머지 자칫 독단론에 빠질 우려가 있다. I.칸트의 비판철학은 이러한 대륙합리론과 영국경험론을 지양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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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주의(cartAsianisme)

 

  데카르트의 철학 및 그 계승자의 철학. 데카르트 철학 중에서도 특히 심신문제(心身問題)나 변신문제(辨神問題)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였다.

【데카르트의 철학】 그 내용을 도식적(圖式的)으로 나타내면, 이론적 입장에서는 방법적 회의(方法的懷疑)에 의하여 얻은 코기토(cogito)의 명증적 의식(明證的意識)에서 출발하여 정신의 순수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명석판명지(明判明知)의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규칙과 생득관념설(生得觀念說)에 따라 신(神)과 물질세계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신과 물체는 각각 독립된 실체라는 이원론(二元論)에 도달하였다. 한편, 실천적 입장에서는 반대로 물(物:身)과 심(心)의 합일을 설명하고 그 합일의 결과인 정념(情念)의 통어(統御) 자체 안에 세계의 기계적·법칙적 필연에 대한 인간적 자유의 영역을 인정하였으며, 자유의지의 완성을 이상으로 삼는 도덕설에 이르렀다.

【데카르트학파】 위와 같은 데카르트의 학설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데카르트학파가 고찰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데카르트가 미해결로 남긴 물심이원(物心二元)에 관한 심신문제 및 섭리[神的必然]와 자유의 이원에 관한 변신(辨神)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해결의 주된 시도로서 N.말브랑시로 대표되는 기회원인론(機會原因論)과 S.스피노자로 대표되는 범신론(汎神論)이 있다. 기회원인론은 세계 사상(事象)의 유일한 작용자를 신(神)이라 하고, 피조물로서의 정신이나 물체는 다만 이 신에 의해 작용된 기회인(機會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범신론은 데카르트의 기계적 물질세계를 신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신은 곧 자연이다’라는 견해이다. 피조물의 작용성을 신의 그것으로 대치하려는 이 두 견해 중에서 기회원인론은 신의 작용 또는 신의 대행자로서 세우게 되는 법칙을 일반적인 경우에 한정하고, 이것을 특수화하는 기회인으로서 피조물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범신론은 세계의 법칙적 필연성 자체를 신성(神性)으로 보는 완전한 결정론(決定論)이다. 그런 의미에서 범신론은 데카르트주의의 궁극적인 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기회원인론에서 법칙의 작용성이 피조물에 맡겨지고, 또 범신론에서 물체의 본성을 연장하려는 전제를 버린다면 G.W.라이프니츠의 단자론적 세계(單子論的 世界)로 결론지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데카르트주의의 완전한 종언을 뜻한다. 데카르트가 미해결로 남긴 문제를 계기로 삼아 전개된 위의 세 견해는 근대의 자연학을 인정해야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형태를 거의 거론하였고, 그것이 오늘날에는 현상학·실존주의·마르크스주의 등의 새로운 입장에서 재평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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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1.24∼1677.2.21)

 

  네덜란드의 철학자. 암스테르담 출생. 포르투갈계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 유대교단의 학교에서 헤브라이어와 성전(聖典)을 공부하였고, 카바라의 신비사상에도 접하였으나, 졸업 후에는 고전어를 공부하고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쌓아 점차 이단적인 서구적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수학·자연과학도 공부하였고, 데카르트 철학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으며, 이 학설에 의거하여 성전과 조상의 학문을 대담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슬려 1656년 끝내 파문선고를 받았다. 유대교 광신자 중에는 그의 암살을 기도하는 자까지 출현하였으므로, 그는 각지를 전전하면서 극도로 고립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오히려 한가한 시간이 생겨 연구생활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신(神)·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짤막한 논문》 《지성 개선론: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을 집필하였고, 《데카르트 철학 원리:Renati de Cartes principiorum philosophiae》(1663)를 출판하였다. 63년 폴부르크로 이사하였고, 70년 다시 헤이그로 이사하였다. 7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 정교수로 초청하였으나, 사상의 자유와 《에티카(윤리학)》의 완성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이해에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을 익명으로 출판하였으나, 이것이 신을 모독하는 책이라고 비난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그는 15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주저 《에티카: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75년 완성)를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그 자체가 사후 100년 동안 무용지물로 매장되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명성과는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여가에 렌즈를 갈아서 생활비를 조달하였다. 그는 《국가론:Tractatus politicus》(77)을 마지막 저작으로 남기고 폐결핵으로 죽었다. F.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평하여 ‘신에 취한 사람’이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며, 스피노자는 “모든 것이 신이다”라고 하는 범신론(汎神論)의 사상을 역설하면서도 죽은 후에까지 유물론자·무신론자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신이란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신이 아니고, ‘신은 즉 자연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에 있어 만물은 신의 형태를 빌린 것이고, 자연을 초월한 곳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개물(個物:個體)은 신의 내적 필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와 같이 신에서 유래된 인과(因果)의 사슬에 의해 엄밀히 결정되는 필연(必然)의 세계를 말하면서, 인간의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 스피노자는 사물에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자존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근거로 정치와 도덕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간에게 있어 자율적인 이성의 작용이 자존성(自存性)이며, 도덕의 실제 목적은 이성의 작용으로 생기는 희열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 이성의 최고 작용은 신과의 필연적인 관계에서, ‘영원한 형상 밑에서’ 사물을 직관하는 것으로서 이것에 따르는 자족감이 바로 ‘신의 지적 사랑’이며, 여기에서 도덕의 최고 이상이 추구되었다. 스피노자 자신은 무신론자·유물론자로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지만, 그의 철학 특히 자연이라는 범신론이나 연장(延長)의 속성 사고방식 속에는 이러한 해석을 낳을 소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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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7.1∼1716.11.14)

 

  독일의 철학자·수학자·자연과학자·법학자·신학자·언어학자·역사가. 라이프치히 출생. 그리고 외교관·정치가·기사(技師) 등 실무가로서도 유능하였다. 라이프치히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의 장서 중 철학·고전을 탐독하고 논리학에 흥미를 가졌다. 12세 때 거의 독학으로 라틴어에 통달하였고 1661년 15세 때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수학, 이어 예나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쓴 논문 《개체의 원리:De Principio Individui》(1663) 《결합법론:De Arte Combinatoria》(66)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그 내용은 후일까지 그의 사상을 일관하였다. 66년 라이프치히대학에 학위를 신청하였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67년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이 대학이 제공한 객원교수의 자리를 사퇴하고, 그곳에서 연금술사들의 결사 로젠크로이체르에 들어가 비서가 되어 화학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마인츠후국(侯國)의 정치가인 J.C.보이네부르크 남작과 알게 되어 70년 마인츠후국의 법률고문이 되었다. 정치생활에 들어가 마인츠후국의 외교사절로서 72년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였으며, 루이 14세의 침략으로부터 독일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면서도 형이상학을 연구하였다. 또 런던과 파리의 뛰어난 수학자·물리학자들과도 접촉하여 자연과학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구체적 운동의 이론》 《추상적 운동의 이론》은  70년경에 쓴 것으로, ‘불가분의 점(點)’의 가설에 서서, 운동을 물질의 본질인 것으로 보려는 형태를 취하였다. C.호이겐스, A.아르노, N.말브랑슈, R.보일 등과의 접촉에서는 당시의 최고 수준의 수학이나 데카르트 철학을 흡수하여 많은 논문을 쓰고, 영국 왕립학회회원이 되어, 그 후 우수한 계산기를 발명하였다(74). 그러나 보이네부르크나 마인츠 선거후(選擧侯)가 잇달아 죽었으므로 그는 프랑스에 체류한 채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 학술원의 연금을 받으려는 공작도 실패하여, 76년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후(侯) 프리드리히의 초청을 받아들여 하노버로 갔다. 그 도중 스피노자와 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버가(家)에서는 궁정고문이나 도서관리 등의 일을 맡아,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다면적인 활동을 하였다. 거기에는 공법학자·정치가로서의 활동, 독일 통일을 지향하는 신구 양 교회 및 신교 각파의 통일을 위한 노력, 《지구 선사(先史)》를 계기로 한 일반사의 연구, 언어 연구, 광산의 치수(治水)나 거기에 따른 풍차의 설계·건설, 백과전서의 계획, 아카데미 설립의 노력(1700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됨) 등이 포함된다. 이 밖에 그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한 수학·자연과학·철학상의 연구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말년은 불우하였으며, 실의 속에 70세의 생애를 하노버에서 마쳤다.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의 창시(1684∼86)가 유명하다. 이것은 뉴턴과는 별개로 전개된 것이며, 미분 기호, 적분 기호의 창안 등 해석학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역학(力學)에서는 R.데카르트를 비판하여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 개념을 주어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향해 커다란 진전을 남겼으며(86), 위상(位相) 해석의 창시도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이다. 철학에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철학을 극복하고, 거기에 젊을 때부터의 ‘보편학’의 구상을 체계화한 《형이상학서설(形而上學敍說) Discours de M럗aphysique》(86)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통하여 발전시킨 ‘표현’과 ‘표출’ ‘실체’ 개념의 결실인 유고(遺稿) 《단자론(單子論):Monadologia》(1720)이 유명하다. 실체개념을 논한 논문 중에는 ‘예정 조화(豫定調和)’의 개념을 도입(1696)하기도 하여 베일과의 논쟁을 초래하였다. J.로크의 비평으로서의 유고 《신인간오성론(新人間悟性論)》(1765)이나 《변신론(辯神論):Th럒dic럆》(1710)도 유명하다. 그의 지우(知友)였던 프로이센 왕비 조피 샤를로테를 위해서 쓴 《변신론》은 예정 조화의 입장에서 철학과 종교의 융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독창적인 것이었으나, 한편 신학적·형이상학적 요소(신과 예정 조화)를 지님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변증법적 요소(개별과 보편, 유한과 무한의 연관, 실체의 자립 개념 등)를 갖추고, 신앙고백과 논리적 논증이 공존하여, 기계론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모순율을 기초로 하는, 말하자면 모순을 내포한 타협적인 것이었다. 그 배경을 당시 독일의 모순에 가득찬 사회적 생활에서 구하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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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드론(Monadenlehre)

 

  독일의 철학자  G.W.라이프니츠가 만년에 저작한 소품(小品)의 제목. 후에 P.에르트만이 이름을 붙인 것으로 ‘단자론(單子論)’이라고 번역된다. 이 말은 그의 형이상학설(形而上學說) 전체를 나타내는 데도 쓰인다. 모나드(monad)란 원래가 수학상의 용어로 ‘1’ 또는 '단위’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모나스(monas)에서 나온 말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존재의 기본으로서의 실체는 단순하고 불가분(不可分)한 것이며, 이를 모나드라고 이름지었다. 모나드는 원자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실체로 그 본질적인 작용은 표상(表象)이다. 표상에는 의식적인 것 외에 무의식적인 미소표상(微小表象)도 포함된다. 표상이란 외부의 것이 내부의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 모나드는 이 작용에 의해 자신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다양성에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모나드에 의해 표상되는 다양성이란 세계 전체를 말한다. 모나드는 ‘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이라고도 하며, ‘소우주(小宇宙)’를 이룬다. 이들 모나드는 각기 독립되어 있고 상호간에 인과관계(因果關係)를 가지지 않는다. 또 ‘모나드는 창(窓)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창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나드가 각각 독립적으로 행하는 표상간에 조화와 통일이 있는 것은 신(神)이 미리 정한 법칙에 따라 모나드의 작용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예정조화(豫定調和)’의 생각에 따라 라이프니츠는 심신관계(心身關係)를 설명하고 데카르트적 이원론(二元論)을 극복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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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사상(enlightenment)

 

  18세기 프랑스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프랑스혁명에 원리를 제공한 사상. I.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를 저술한 후부터 사상사(思想史)에서의 용어가 되었다. 계몽이란, 아직 미자각상태(未自覺狀態)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理性)의 빛을 던져주고, 편견이나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오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신학(神學)에 대응되는 의미에서 철학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우, 철학이란 좁은 의미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아니라, 널리 인간세계나 자연·인생 등에 관한 지혜와 교양을 나타낸다. 또한 신학이 죽음을 주제로 하는 데 대해서 삶의 실학(實學)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몽사상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원의 물음에다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라는 현세(現世)의 과제가 덧붙여진다. 본류(本流)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J.J.루소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상가, 문학가의 여러 저작·작품에 있으나, 그 원류(源流)는 T.홉스, J.로크를 비롯하여 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T.레싱, J.G.헤르더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사상가에게까지 미쳤다. 이런 뜻에서는 18세기의 모든 문학운동·사상활동의 저류(底流)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각국에 싹트기 시작했던 시민정신의 형상화(形象化)에 있어 매개자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홉스는 프랑스의 R.데카르트와 함께 계몽사상의 원조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로크와 D.흄에서 시작된다. 로크는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하여,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유의 실존이라 규정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복종을 선택한 이상,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 지주(支柱)가 사유재산권의 보유에 있는 이상,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1734년에 출판된 볼테르의 《철학서간(哲學書簡)》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1748)을 지어 삼권분립의 원칙을 밝히고, 절대왕정(絶對王政)에 쐐기를 박았다. 또 D.디드로, J.R.달랑베르, 뷔퐁, E.B.콩디야크, P.H.돌바크 등에 의해서 18세기 중엽부터 《백과전서(百科全書)》가 발간되었으며, 종교나 관습·제도의 주술(呪術)에 묶여 있는 인간을 감성적·심정적으로 해방시키고, 앞으로 꽃필 과학에 대한 꿈을 고취하며,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 위에 서서 새로운 세계관·처세술·창조에의 참가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였다. 볼테르는 《캉디드 Candide》 《자디그 Zadig》를 통하여, 디드로는 《라모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통해서, 문명의 상식에 등을 돌리고, 태어난 그대로인 자연아(自然兒)로 하여금 현실세계 속을 걷도록 함으로써, 사회와 인간 간의 깊은 상대관계를 알아내려고 하였다. 이 주제는 루소에 의해서 더욱 추구되었으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55) 《신(新) 엘로이스》(61) 《사회계약론》(62) 《에밀》(62) 《고백록》(81·88, 사후 출판) 등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계몽사상은 루소에 의해서 인간성의 전가치체계(全價値體系)로 완성되었으며, 18세기뿐만 아니라 널리 근대 시민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 뒤에는 G.B.마블리, J.르나르, M.콩도르세 등이 나와서 진보사상을 주창하였으며, 전제정치와 교회에 대해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계몽사상의 본류는 어느덧 사상을 기술화(技術化)하는 몇 가지 말류(末流)로 갈라졌으며, F.케네, A.R.J.튀르고 등에 의해서 중농주의(重農主義)가 제창되는 한편, 시에예스 등에 의해서 제3신분의 정치론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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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계약설(theory of social contract)

 

  정치사회 성립의 역사적·논리적 근거를 평등하고 이성적인 개인 간의 계약에서 구하려는 정치이론. 17, 18세기 영국 및 프랑스에서 전개된 이론이며, 부르주아혁명 때에는 근대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기둥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 이론은 국가 기타의 정치적 제도는 실제적·실체적 성격을 잃고, 계약을 지탱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그 존재가 좌우되는 인공적 가구물(假構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종래의 지배질서는 모두가 비판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계약설의 혁명적 성격도 이 점에 있지만 동시에 그 이론적 결함도 또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정치사회 성립의 실증성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민주국가의 윤리성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가치는 간과할 수 없다. 이 이론의 전형적 전개론자로는 T.홉스, J.로크, J.J.루소 등을 들 수 있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이 자연권을 지배자에게 위양함으로써 평화적인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여, 17세기 절대왕정제 이론을 성립시켰다. 로크는 계약에 의해서도 생명·자유·재산 등의 자연권은 지배자에게 위양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입헌군주제의 이론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 원인을 사유재산에 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회계약에 입각하여 각인이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자연상태를 구상하였다. 즉 인민의 일반의지로서의 국가가 자유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프랑스혁명의 이론적인 근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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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6.28∼1778.7.2)

 

  프랑스의 사상가·소설가. 스위스 제네바 출생.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工匠)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49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학문과 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de l’in럊alit?parmi les hommes》(1755) 《정치 경제론:De l’럄onomie politique》(55) 《언어기원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Lettre ?d’Alembert》(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자적 입장에 선 루소는 다시 서간체 연애소설 《신(新) 엘로이즈:Nouvelle H럏o븉e》(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민약론(民約論):Du Contrat social》(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긩ile》(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하였는데, 특히 《신 엘로이즈》의 성공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에밀》이 출판되자 파리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Les Confessions》을 집필하였다. 68년 45년 이래 함께 지내온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Rousseau juge de Jean-Jacques》를 쓰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Les R릚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94년 유해를 팡테옹(위인들을 合祀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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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론(idealism)

 

  이론적이건 실천적이건, 관념 또는 관념적인 것을 실재적 또는 물질적인 것보다 우선으로 보는 입장. 실재론 또는 유물론에 대립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드물게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어떤 종류의 관념을 정신과 개체를 초월한 참다운 실재로 보는 입장을 관념론이라고도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중세철학에서의 용법에 따라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관념론이란, 외계 또는 물질적 세계의 실재에 대한 근세 이래의 인식론적 문제에 관한 입장을 나타내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며, 이에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① 외계 또는 물질적 세계의 존재를 사람이 이에 대해서 가지는 관념으로 환원시켜 개인의 정신과 이를 통괄하는 정신으로서의 신에 대해서만 실재성을 인정하는 주관적 관념론이며, G.버클리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② 외계는 인간 주관의 아프리오리적(a priori 的) 인식의 여러 형식에 따라 구성되며, 그러한 입장에서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현상(現象)’이라고 보고, 이 현상의 배후에 참다운 실재로서의 ‘물자체(物自體)’를 상정하면서 그 구체적 인식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I.칸트의 비판적 또는 초월론적 관념론이다. ③ 외계에 대하여 그 자체로서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는 전술한 두 경우와 같지만, 이를 어떤 주관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 관념 또는 정신의 전개라고 보는 절대적 관념론인데, 곧 G.W.F.헤겔의 입장이 전형적인 것이다.

이상의 어느 형의 관념론에서나, 외적(外的) 실재에 대한 내적(內的) 관념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인식의 객관성의 기초를 다지는 데 있어 상대주의(相對主義)에 빠질 위험이 있는 반면에, 실천적 사상으로서는 인간 주체의 자발성·자율·자유를 존중하는 태도를 낳는 결과가 된다. 유럽어의 관념론이 동시에 이상주의를 의미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관념론과 종교와의 친근도 이와 같은 성격의 결과로서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관념론은 극단에 흐르면 현실에 대해서 고의적으로 눈을 감는 이데올로기로서 비판을 받게 되지만, 어떠한 의미로든 인간 쪽의 자발성 없이는 인간의 인식활동·실천활동을 이해할 수 없는 이상, 관념론적인 것은 인간의 현실과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의 구성요소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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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관념론(Deutscher Idealismus)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관념론적 사상운동. ‘독일이상주의’라고도 한다. J.G.피히테, F.J.셸링, G.F.헤겔이 대표하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은 크다. 그 시대는 프랑스에서는 계몽기에서 혁명기로 들어서는 시기에 해당되며, 근대적 인간과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태동을 겪는 때였다. 30년전쟁 이후, 시대의 흐름에 뒤졌던 독일에서도 내면적·사상적인 영역에서 대규모로, 또한 근원적으로 근대적인 인간존재에 대한 반성과 그 구조의 정착이 행하여졌는데 그것이 바로 독일 관념론이었다. 한편 관념론은 이상주의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는데, 사상 영역에서 근대적 인간의 이상이 이상의 이면(裏面)에 내재된 관념성·추상성을 노출시켰다는 점에서 독일 관념론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위대함과 동시에 한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독일 관념론의 시발점인 I.칸트는 계몽시대의 표어였던 ‘이성’에 대하여 전면적인 반성과 비판을 가하였다. I.뉴턴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밝히고, 이론이성(理論理性)으로는 신(神)·자유·영세(永世) 등 종래의 형이상학의 과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또한 칸트는 그것의 최종적인 해결을 근대적인 자율적 인격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실천영역에서 구하면서, 근대적 이성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그 기초적인 구조를 명백하게 하였다. 칸트 철학으로써는 이론과 실천의 세계가 충분히 통일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히테는 통일적 원리로서 ‘자아’를 내세웠고, 또 셸링은 일종의 무한한 신적(神的)·창조적 원리로서의 ‘자연’에 의거하였다. ‘자아’이든 ‘자연’이든 간에 여기에는 선구자인 프랑스의 J.J.루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한한 것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내포되어 있는데, 칸트의 유한적 이성의 입장은 버렸다. 헤겔은 이러한 영향을 받아 역사·자연·사회 등을 비롯하여 유형이든 무형이든 일체의 사상(事象)을 무한한 정신의 변증법적인 자기전개와 자기실현의 과정이라고 보는 이론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와 같이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이원론적 입장을 넘어서서 일원론적인 통일적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각기 다른 입장에서 계속적으로 시도되었으며, 헤겔에 이르러는 극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관념론이 너무 대담하게 이성주의적인 입장에서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치달은 결과, 헤겔 사후에는 그것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나타났는데, 한편에서 A.쇼펜하워 등의 비합리주의적 철학이 발생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헤겔좌파, 특히 L.포이어바흐, K.마르크스, F.엥겔스 등 유물론적 철학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F.W.니체와 S.A.키르케고르를 탄생시키는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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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Immanuel Kant, 1724.4.22∼1804.2.12)

 

  독일의 철학자. 동(東)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그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그 이후의 발전에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 영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으며, 근세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마구(馬具) 제조업자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 두터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루터교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학교에 입학하여 8년 6개월 동안 라틴어 교육을 받은 후 고향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모교의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온 변경(邊境)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적인 시민육성책의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지리적·역사적 조건이 그의 철학으로 하여금 독일적 특수성을 떠나 참다운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되게 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당시의 신사상이었던 뉴턴역학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 모교의 강사직을 얻은 1755년에 《천계(天界)의 일반자연사와 이론: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뉴턴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力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후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星雲說)’로 널리 알려지게 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I.뉴턴의 방법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이 대담한 시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의 귀의(歸依)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그것의 바탕 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일면을 지닌다. 여기의 내포되는 모순이 의식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함을 뜻할 것이다. 이 위기에서 칸트를 구한 것은 J.J.루소이다. 그는 칸트로 하여금 문명에 침식되지 않은 소박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눈뜨게 하고, 여기에다 그 후의 모든 사상적 노력의 숨은 기초를 뿌리박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뉴턴, 루소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D.흄을 부정적 매개체로 하여 중세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그 밑뿌리까지 파고들어 전면적 재편성을 시도함으로써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 에서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神)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이 모두 인간 중심적인, 즉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들고, 나아가 일반적·세계관적 귀결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식이 성립되는 장면을 해명해야 할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새로 수립하는 일을 통하여,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神的形而上學)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제2의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88)에서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율적 인간의 도덕을 논하고, 실천의 장(場)에서의 인간의 구조에 불가결한 ‘요청(要請)’이라는 형태로 신(神)·영세(永世) 등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내실을 재흥시켜 그것이 새롭게 인간학적 철학에서 점유할 위치를 지적하였다. 종교를 도덕의 바탕 위에 두는 이 구상(構想)은 그 후의 《종교론》(93)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상 두 가지 비판서로 명백하게 된 인식과 실천이라는 두 개의 장면을 매개하고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장(場)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인간학적 철학을 종결짓고자 구상된 것이 제3의 비판서인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Kritik der Urteilskraft》(90)이다. 여기서 칸트는 미(美)와 유기체(有機體)의 인식이라는 장면의 분석을 통하여 목적론적 인식의 구조를 명백히 하고, 또한 목적론과 기계론의 관계라는, 일생의 과제이며 동시에 세기적 과제에 비판적 해결을 부여하여 스스로의 철학적 노력을 결말지은 것이다. 이상 3권의 비판서에 의하여 그 토대가 놓여진, 비판철학 사상과 밀접히 관련하여, 또는 그 위에 기초한 사고(思考)를 전개한 기타의 주요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의 해설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83), 《실천이성비판》에 앞서 비판적 논리학의 기본구상을 기술한 《도덕형이상학원론(道德形而上學原論):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85), 이것에 기초한 법철학·도덕철학의 구체적 체계를 전개한 《도덕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97), 그 자매편으로 자연철학의 체계를 전개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Metaphysische Anfangsgr웢de der Naturwissenschaft》(86)가 있다. 또 오랜 기간의 강의를 정리하여 출판한 《인간학》(98) 《자연지리학》(1802)은 칸트의 폭넓은 실제적 지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칸트의 철학은 3권의 비판서 간행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나를 비롯한 몇 곳을 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독일의 대학·논단을 석권하였고, J.G.피히테에서 G.W.F.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선두 주자로서, 또 그 모태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은 다시 영국·프랑스의 이상주의철학까지 미쳤으며, 특히 후일의 독일 신(新)칸트학파의 철학은 칸트의 비판주의의 직접계승을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신칸트학파 퇴조 후에 나타난 수많은 철학 조류도 모두 직접·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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批判哲學(critical philosophy)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에 나타난 I.칸트의 비판주의 입장. 즉, 독단론이나 회의론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이성(理性)의 자기인식을 규명하는 것이 비판주의의 입장으로, 그에 의하면 비판이란 책이나 체계의 비판이 아니라, 일체의 경험에서 독립하여 얻어지는 인식에 관한 이성 능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였다. 19세기 후반 O.리프만의 이른바 ‘칸트로 돌아가라’를 표방한 신(新)칸트 학파는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이 입장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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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5.19∼1814.1.27)

 

  독일의 철학자.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작센주 라메나우 출생. 가난한 삼베직인의 아들로 태어나 예나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 후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전학하였고, 졸업 후 가정교사 시절에 저술한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은 B.스피노자의 결정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1791년에 칸트 철학을 알게 됨에 따라, 특히 그 실천이성의 자율(自律)과 자유(自由) 사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쾨니히스베르크로 I.칸트를 찾아 그의 주선으로 《모든 계시(啓示)의 비판 시도》(92)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이것은 처음에 칸트의 저서로 세인들이 알고 있었으나, 칸트 자신의 정정과 천거에 의해 피히테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92년에 예나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93년 한(Johaanna Hahn)과 결혼하고 97년에 ‘지식학(知識學:Wissenschaftslehre)’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논고를 발표하였다. 98년 《철학잡지》에 포르베르크의 논문에 서문으로 발표한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무신론이라는 의혹을 받아, 유명한 무신론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다음해 예나대학을 물러났다. 그 후 베를린에서 슐레겔 형제를 비롯하여 낭만파 사람들과 교유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신비적·종교적 색채를 더해 갔으나, 동시에 시국(時局) 정치문제에도 활발한 발언을 시도하였고, 특히 나폴레옹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의 위기에 처하여 행한 《독일국민에게 고함》(1807∼08)이란 강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종군간호사가 된 부인에게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었다. 피히테의 철학은, 칸트가 아직도 통일을 얻지 못한 이론이성(理論理性)과 실천이성(實踐理性)을 오로지 후자에 중점을 둠으로써 통일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실천적·주관적 관념론이며, 프랑스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근대적 자아를 자율적인 형이상학적 원리에까지 지양하였다. 그것은 또 F.W.J.셸링에서 G.W.F.헤겔로 계승된 독일 관념론의 발전의 길을 터놓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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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21∼1854.8.20)

 

  독일의 철학자. 뷔르텐베르크주(州) 레온베르크 출생. I.칸트, J.G.피히테를 계승하여 G.W.F.헤겔로 이어 주는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튀빙겐대학에서 신학·철학을 공부하였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열광적 공감의 분위기 속에서 헤겔, 휠덜린 등 동창생과의 교우가 그의 조숙한 천분을 발휘할 통로를 형성하였다. 그는 피히테에 의하여 세계의 궁극적 원리로까지 높여진 근대적인 자유로운 ‘자아’를, 객관적 ‘자연’의 방향으로 심화시킴으로써 거기에 궁극적 통일의 실현을 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점차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인 낭만적 색채를 띠고, 나중에는 종교적·신비주의적 방향으로 변질되어 갔다. 1798년 이래 예나대학 등의 교수직을 역임하고, 헤겔의 사후(1831) 후임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다. 헤겔의 입장을 ‘소극 철학’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대한 ‘적극 철학’을 설파하였는데 여기에는 독일의 현실에 강요된 자아의 내면적 굴절이라는 회로를 통하여, ‘이성(理性)’과 ‘체계’를 깨뜨리는 실존철학에의 길이 열려, 그 선구자로도 지목된다. 주요저서로는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System des transzendentalen Idealismus》(1800)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고찰: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웑er das Wesen der menschlichen Freiheit》(18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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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8.27∼1831.11.14)

 

  독일의 철학자.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슈투트가르트 출생.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무관 아들로 1788년 뒤빙겐대학 신학과에 입학 J.C.F.휠데를린 및 F.W.셸링과 교우하였다. 졸업 후 7년간 베른·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를 한 뒤 1801년 예나로 옮겨 예나대학 강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미 예나대학의 교수로 활약 중이던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 잇달아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셸링적 입장을 벗어나 1807년에 최초의 주저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Ph둵omenologie des Geistes》을 내놓아 독자적 입장을 굳혔다. 이 무렵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예나대학이 폐쇄되자 밤베르크로 가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으며, 이어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이 되었고, 이곳에서 둘째 주저 《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1812∼16)을 저술하였다. 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취임, 그 동안 《엔치클로페디:Enzyklop둪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7)를 발표하였으며, 18년에는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고 곧 마지막 주저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21)를 내놓았다. 베를린 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되었으며, 그의 철학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었으나 31년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헤겔 철학의 역사적 의의는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 데 있다.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머리 속에서 생각한 이상에 치중, 이 이상을 현실로 실현해야 하며 또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 반하여, 헤겔은 현실이란 그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정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써도 그 이상이 역사의 법칙적 흐름에 알맞게 부합되어 있지 않는 한 그 노력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헤겔은 관념론적·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가졌으며, 역사는 절대자·신(神)이 점차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이성(理性)이고 그 본질(本質)은 자유(自由)이다. 따라서 역사는 자유가 그 속에서 전개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며, 단 한 사람 전제군주(專制君主)만이 자유이었던 고대로부터, 소수의 사람이 자유이던 시대를 거쳐 모든 사람이 자유가 되는 시대로 옮아간다. 그리하여 현대는 바로 이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어야 할 시대라고 보았다. 헤겔은 이러한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장대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는데 그 체계는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의 3부로 되었으며, 이 전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展開)를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辨證法)이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이야말로 절대자이며 반면 자연은 절대자가 자기를 외화(外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논리학에서는 자연 및 정신에 대하여 고루 타당한 규정이 다루어졌다. 그의 철학은 그 관념론적 형이상학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과 반발을 받기도 하였지만, 역사를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역사주의적 경향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또 변증법이라는 사상으로도 후세에 다대한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선정한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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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dialectic)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이 말은 그리스어의 dialektike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대화술·문답법이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홀륭하게 전개되고, 그것을 이어받은 플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근세에 와서 변증법이란 말에 다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I.칸트이다. 칸트는 변증법(칸트의 경우 보통변증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뜻은 마찬가지이다)을 우리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推論),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와 같이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矛盾律)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W.F.헤겔이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반(反)·합(合)(정립·반정립·종합, 또는 卽自·對自·즉자 겸 대자라고도 한다)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즉, 아우프헤벤(aufheben:止揚 또는 揚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 그 자체에 모순이 실재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변증법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K.마르크스, F.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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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주의(utilitarianism)

 

  행위의 기준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즉 사회의 최대다수 구성원의 최대한의 행복을 구하는 윤리·정치관. 주로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한 윤리로서, 정치학설에서 공중적 쾌락주의(universalistic)와 같은 뜻이다. 목적론적(目的論的) 윤리의 한 형태이지만, 이기적이 아니라 보편적이며, 또 내면적 윤리에 대해서 사회적·외면적 도덕의 경향을 나타낸다. 17∼18세기의 고전경험론(古典經驗論)과 신학자·고전경제학자, 19세기의 급진주의자에게서 이 주의를 찾아볼 수 있으나, 이를 단순명쾌하게 정식화한 사람은 J.벤담이며, J.S.밀 부자(父子)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또 밀 이후에도 진화론적 윤리학 및 H.시지윅, G.E.무어, 현대 영국 분석철학자의 규범의식(規範意識) 속에서도 그 경향이 보인다. 벤담과 밀은 행복과 쾌락을 동일시하였는데, 벤담은 쾌락의 계량가능성(計量可能性)을 주장하고 쾌락계산의 구상을 내건 ‘양적(量的) 쾌락주의자’였으나, 밀은 쾌락의 질적(質的) 차이를 인정하여 ‘질적 쾌락주의’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또 내면적인 동기·양심·자기도야(自己陶冶)의 중요성도 인정하여, 심정도덕(心情道德)·완성설(完成說)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벤담(Jeremy Bentham, 1748. 2.15∼1832.6.6)

 

  영국의 철학자·법학자. 런던 출생. 변호사를 하다가 나중에 민간연구자가 되었다. 인생의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실현에 있으며 쾌락을 조장하고 고통을 방지하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도덕과 입법의 기초원리라고 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하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쾌락의 계산법을 안출하였으며, 쾌락(플러스)과 고통(마이너스)을 강도·계속성·확실성·원근성(遠近性)·생산성·순수성·연장성(延長性)이라는 7개의 척도를 써서 수량적으로 산출하려고 하였다. 쾌락과 부(富)는 양(量)에 비례하지 않으며, 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행복은 부의 양이 늘수록 줄어든다고 보고 한계효용을 내세웠다. 행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자유방임(自由放任)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한계효용이 점감(漸減)하는 이상, 부가 다른 조건상으로 동일하다면, 보다 평등하게 이를 분배하는 편이 전부효용(全部效用)을 증가시킨다 하여, 분배의 평등을 중시하였다. 공리주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의회의 개혁과 같은 정치활동에도 관계하였다. 주요저서는 《정부소론(政府小論)》(1776) 《도덕 및 입법의 원리 서론(序論)》(89, 신판 1823) 등이다.

 

밀(John Stuart Mill, 1806.5.20∼1873.5.7)

 

  영국의 경제학자·철학자·사회과학자·사상가. 런던 출생. 경제학자 J.밀의 장남으로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조기교육을 받았다. 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3세에 라틴어, 8세에 그리스어, 12세에 논리학을 터득하였다고 한다. 이미 10대에 어엿한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아버지가 근무한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면서(1823) 한편으로는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소년기에 읽은 J.벤담의 저서에 영향받고, 공리주의(功利主義)에 공명하여 공리주의협회의 설립에 참가하여 연구·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826년 우울증에 걸린 것이 전기가 되어 감정을 경시하고 이성(理性)을 만능으로 보는 공리주의에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칼라일, 워즈워스, 콜리지 등의 영향을 받아 사상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5∼68년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사회개혁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대표적인 경제학 저서에 《경제학 시론집(試論集)》(1830)과 《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48) 등이 있는데, 그는 A.스미스나 D.리카도 등의 영국 고전파 경제학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경제공황이나 빈곤 등 새로운 역사적 과제에 대해서도 고려하여, 종래의 고전파 이론의 재구성과 보완을 시도하였다. 즉, 자연적인 생산법칙에 의하여 발생한 사회적 곤란을 분배의 인위적 공정(公正)과 사회의 점진적 개혁에 의해서 회피하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반성으로서 저술한 《논리학체계:A System of Logic》(43), 종래의 공리주의적 자유론을 대신하여 인간정신의 자유를 해설한 《자유론:On Liberty》(59), 정치상의 대의제(代議制)와 분권제(分權制)의 의의를 강조한 《대의정체론(代議政體論)》(61) 등이 있고, 그 밖에 《공리주의:Utilitarianism》(63) 《해밀턴 철학(哲學)의 검토:Examination of Sir William Hamilton’s Philosophy》(63)등의 철학적 저서와, 영국의 여성해방사상 기념비적 문헌이 된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69) 《자서전:Autobiography》(73) 《종교에 관한 에세이 3편:Three Essays on Religion》(74) 《사회주의론》(79)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만년에는 점차 사회주의에 가까워져 갔지만, 그의 사회주의는 그 후의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개량주의적 사회주의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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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주의(positivism)

 

  철학의 방법이 과학의 방법과 다른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철학적인 입장이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으로 얻어지는 지식의 총체 이외에 참된 지식은 없다고 하는 입장. 실증주의라는 이름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려고 하였던 생시몽에서 비롯되었고 A.콩트가 실증철학으로서 확립하였다. 그 연원(淵源)은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의 계몽주의 유물론(唯物論)에 있지만, 그 배경에는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공업 사회의 성립이 있다. 실증철학은 프랑스 혁명기의 대표적인 철학이 되었다. 또 E.마하, R.아베나리우스 등의 과학철학도 인식론에서 실증주의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지만, 19세기의 실증주의에서는 논리학이나 수학의 역할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하였다. 1920년대부터 빈 학단(學團) 사람들을 중심으로 제창되기 시작한 새로운 실증주의는 이 점의 결함을 보충하고, 논리학이나 수학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이들 학문이 경험과학과 다르고, 세계에서의 정보를 주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이 새로운 실증주의를 논리실증주의라고 한다. 현재는 논리실증주의도 또 얼마간 비판을 받아 분석철학(分析哲學)이라 불리는 것으로 변신(變身)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미 실증주의라고는 불려지지 않는다. 일상 생활에서는 형이상학이나 종교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고, 오로지 검증이 가능한 증거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풀려고 하는 사람을 실증주의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콩트(Isidore-Auguste-Marie-Franiois-XaviAr Comte, 1798.1.19∼1857.9.4)

 

  프랑스의 철학자·사회학의 창시자. 남프랑스 몽펠리에 출생.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 재학 중 교수 배척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였다. 그 후 수학·물리·화학·생물·정치·도덕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으며, 생 시몽을 알게 되어 그의 잡지 편집을 도우면서 그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 콩트는 여러 사회적·역사적 문제에 관하여, 온갖 추상적 사변(思辨)을 배제하고, 과학적·수학적 방법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절대적인 격률(格率:maxim)은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라는 그의 말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학설의 의(擬)=절대성을 배격하고, 감각적 경험에 의하여 확증할 수 있는 여러 사실과 이것들의 관계에만 전념한다는 과학적이며 실증적인 상대주의(相對主義)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유명한 3단계 법칙에서는, 인간의 지식의 발전단계를 신학적·형이상학적·실증적인 3가지로 구분하고, 최후의 실증적 단계가 참다운 과학적 지식의 단계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실증과학의 체계는 대상의 복잡성에 따라 차례로 수학·천문학·물리학·화학·생물학·사회학(질서에 대응하는 社會靜學과 진보에 대응하는 社會動學으로 구분된다)으로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만년에 클로틸드 드 보 부인과 사귀게 되어, 그녀를 환상적인 애정으로 사랑하였으나, 2년 후 그녀가 죽고, 또 실직하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였다. 그의 까다로운 성품 때문에 친구들이 이반(離反)하는 등, 당시의 상황도 원인이 되어 마침내 신비주의에 빠져 인간성을 숭배하는 인류교(그 자신이 대주교이며, 보 부인은 성녀)를 주창하게 되었다. 즉, 전기의 객관적 과학주의는 주관적·종교적 상징주의로 변모하였는데, 이 모순적인 변모 속에 인간 콩트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서로는 《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6권, 1830∼42)와 《실증정치학 체계:Syst뢭e de politique positive, ou traite de sociologie, instituant la religion de l’humanit렊?4권, 51∼5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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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materialism)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정신을 바로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또는 물질(뇌)의 상태, 속성,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등 여러 입장이 있다.

【용어】 원래 철학용어로서는, 세계의 본성(本性)에 관한 존재론(存在論)상의 입장으로서 ‘유물론’과 ‘유심론(唯心論)’을 대립시키고, 인식의 성립에 관한 인식론(認識論)상의 학설로서 ‘실재론(實在論)’과 ‘관념론(觀念論)’을 대립시키는 것이 올바른 용어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물론’은 ‘관념론’의 대어(對語)로 사용된다. 그 까닭은 근본적으로 근세철학에서 유물론은 실재론적 입장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실체’에 근거를 두고 존재론이라는 형식으로 자기 주장을 해왔던 데 대하여, 관념론은 유심론적 입장이 ‘사고(思考)하는 우리’에게 근거를 두고 인식론적으로 전개하여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유물론’으로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F.엥겔스가 용어법으로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대어를 사용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계승한 N.레닌이 ‘오해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실재론’이라는 용어를 배척하였다는 사정도 있다.

【특징】 ⑴ 과학주의:유물론의 근본적인 주장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물질’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 관해서는 여러 입장이 있다. ‘물질’의 특질은 흔히 질료(質料)·불가입성(不可入性)·타성(惰性) 등 대개 자연과학적으로 기술되고 규정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유물론자는 대체로 그 시대의 자연과학이 이룬 성과를 철학적 입장의 근본으로 하는 ‘과학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물질을 ‘우리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로 보고(물질의 철학적 개념), 물질에 관한 과학적 인식내용에서 원리적(原理的)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그 경우도 자연과학의 성과에 의거한다는 ‘과학주의(科學主義)’로 일관한다.

⑵ 결정론(決定論):유물론에는 이 ‘과학주의’와 관련하여 일종의 ‘결정론’이 있다. 즉 “모든 사물의 변화는 선행하는 물질적 조건과 그것을 포함하는 법칙성을 근거로 결정된다”라는,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과율(因果律)의 지배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다. 한마디로 ‘무슨 일에나 원인이 있다’는 뜻이며 이것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그것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든가 혹은 어떤 법칙성(法則性)에 따른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다”라고 하여 법칙적 필연성 인식에 근거를 두는 법칙성의 기술적 이용을 인간의 자유로 보고 있으나 이 경우도 ‘법칙에 따르는’ 자유이며 근본적으로는 결정론으로 볼 수 있다.

⑶ 감각론(感覺論):유물론은 이러한 법칙성의 인식에 관하여 감각만을 인식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 까닭은 인식내용의 원천을 물질적인 외계에서만 찾고 내적·주관적인 것은 혼입(混入)을 배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선험적(先驗的)인 것의 역할은 부정된다. 유물론자 엥겔스가 영국의 경험론을 평하여 ‘부끄럼쟁이의 유물론’이라고 하였듯이 유물론은 경험론과 같이 감각론의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경험론과 가깝다. 그러나 경험론은 감각의 원인으로 그 자체로서는 비감각적인 실체(유물론이 인정할 수 있는 물질)를 인정하는 일이 없다.

⑷ 무신론(無神論):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질적일 때 신이라든지 정령(精靈)이라는 비물질적인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 게다가 세계의 사상(事象)이 물질적 법칙성에 의하여 결정될 때 세계의 변화를 관장하고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는 신적(神的)인 것은 설명의 편법으로서도 배제된다. 이렇게 유물론은 언제나 무신론을 위한 강력한 논리가 되어왔다. 유물론자는 모두 무신론자이며 사상사(思想史)의 측면에서 볼 때 양자는 거의 구별할 수가 없다.

【역사】 유물론이라는 명칭은 18세기에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고방식은 이미 초기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볼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따르면 원자(原子)와 공간(空間)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사물의 성질은 이러한 사물을 구성하는 원자의 모양·크기·위치 및 그 결합의 밀도(密度)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원자의 기계론적인 작용으로 일어나며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영혼의 작용도 원자의 한 작용으로 생각하였다. 유물론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후, 더욱이 중세에 이르러 쇠퇴하였으나 근세에 이르자 F.베이컨, P.가생디를 선구자로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다. 독일에는 G.W.F.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한 L.A.포이어바흐가 있으며 그 영향을 받아 K.마르크스, 엥겔스가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을 확립하여 현대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항목차례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7.28∼1872.9.13)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바이에른주(州) 란츠후트 출생. 하이델베르크대학·베를린대학에서 수학, 헤겔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1828년 에를랑겐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강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저서 《죽음과 불멸에 대한 고찰:Gedanken 웑er Tod Und unsterblichkeit》(1830)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것이라 하여 교직에서 추방당하였고, 그 후로는 재야(在野) 철학자로서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주요저서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41) 《장래 철학의 근본문제:Grunds둻ze der Phi1osophie der Zukunft》(43) 《종교의 본질:Das Wesen der Religion》(45) 등이 있다. 그의 철학의 공적은 그리스도교 및 관념적인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유물론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제기한 데에 있다. 그의 철학은 후일, K.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

 항목차례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5.5∼1883.3.14)

 

  독일의 공산주의자·혁명가·경제학자. 라인주(州) 트리어 출생.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36년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47년 P.J.프루동(1809∼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50~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64), M.A.바쿠닌(1814∼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85년과 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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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1.28∼1895.8.5)

 

  독일의 사회주의자. 프로이센 라인주(州) 바르멘 출생. 부유한 공장주의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에 전렴하기 위하여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바르멘과 브레멘에서 가업에 대한 수련을 쌓으면서, 틈틈이 평론·시 등을 써 F.오스발트라는 필명으로 신문 등에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자유’라는 청년 헤겔주의자 모임에 가입할 수 있었고, 이 모임에서 철학·종교 논쟁에 대한 무서운 선전가로 인정받았다. 1841년 베를린의 근위포병연대에 복무하면서 베를린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42년 제대 후 아버지가 관계하던 공장에 입사하기 위하여 맨체스터로 가던 도중 쾰른의 《라인 신문》 편집소에서 처음으로 K.마르크스와 만나게 되었다. 영국에 체재하는 동안 사업에 종사하면서 자본주의 분석연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44년 마르크스와 A.루게가 발간하는 《독일-프랑스 연보》에 <국민경제학비판대강(國民經濟學批判大綱)>을 기고하였다. 같이 논문에서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초기 해석과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모순점을 제시하여 마르크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같은해 파리에서 마르크스와 재회,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45년 가출하여 마르크스가 사는 브뤼셀로 가서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여 인간사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인식방법인 유물사관(唯物史觀)을 제시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함과 동시에, 공산주의의 연대와 결집을 목표로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를 창설하였다. 47년 공산주의자 동맹을 창설, 제2차 공산주의자대회의 위촉을 받고 48년 2월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직후인 2월 프랑스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와 함께 파리로 갔다가 다시 쾰른으로 옮겨 독일혁명을 지도하고 같은 해 6월 《신(新)라인 신문》을 발행하였다. 49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런던으로 망명하였다가, 맨체스터에서 다시 사업에 종사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적·실천적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69년 사업을 청산하고 다음해 런던으로 이주, 제1인터내셔널의 총무위원이 되어 국제노동운동의 발전에 진력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83년 마르크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고 정리에 몰두하여 《자본론》의 제2·3권을 편집하는 한편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서 노동운동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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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Marxism)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협력으로 만들어 낸 사상과 이론의 체계. 레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사상과 학설의 체계인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의 3가지 정신적 주조(主潮), 즉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학 및 프랑스의 혁명적 학설과 결합된 프랑스 사회주의를 그 원천 또는 구성부분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체계는 G.W.F.헤겔, L.포이어바흐 등 19세기 독일의 고전철학에서 변증법과 유물론을, 또 영국의 고전경제학 중에서도 특히 D.리카도의 경제학으로부터 노동가치설을,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통일시킴으로써 형성되었다. 소련의 《철학교정(哲學敎程)》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철학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방법론은 그의 학설의 모든 구성부분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며, 레닌은 경제학의 전체를 근본으로부터 개조하는 일, 즉 역사·철학·자연과학·노동계급의 정책과 전술 등에 유물론적 변증법을 적용하는 일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고 하였다. 즉, 마르크스는 철학에 관한 책은 따로 쓰지 않았으나, 자연과 사회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운동·변화한다는 변증법적 견해를 인간사회에 적용함으로써 인간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일반적 법칙을 설명하는 유물사관(唯物史觀)을 정립한 다음 공산주의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도덕적 감정을 근거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경제학을 통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필연적 붕괴 위에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을 설명원리로 삼고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을 분석장치로 삼아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힘으로써 그 필연적 멸망을 증명하는 데에 반생을 바쳤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혁명가가 된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연구의 결과가 아니다. 그가 혁명을 믿고 주장하게 된 것은 이미 1843∼44년이고, 이 혁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경제학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엥겔스에 따르면 유물사관과 잉여가치론은 마르크스가 발견한 것이며 이의 발견으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비하여 이전의 R.오언, F.M.C.푸리에, 생시몽 등의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하였다. 이 같은 이론체계에 입각하여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이야말로 혁명의 유일한 주체세력이라고 믿었으며, 이 계급의 계급투쟁으로 폭력에 의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계급이 없는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사후 K.카우츠키에 의한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에 의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갈라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의 수정과 그에 이은 유러커뮤니즘의 강력한 비판으로 결정적 시련에 봉착하였다. 사회민주주의는 51년 7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계기로 새로 등장한 민주사회주의(民主社會主義)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대치(代置)되었다. 따라서 지난 1세기 이상을 두고 사회사상·정치사상·혁명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온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그 하향길에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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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

 

  N.레닌이 볼셰비키당(黨)의 교조(敎條)로 만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교조 및 그것을 다시 공식화한 I.V.스탈린의 유물론 사상. K.마르크스와 F.엥겔스의 사상 영향을 받은 레닌은 당의 세계관적 교조를 만듦에 있어 주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사상과 러시아의 G.V.프레하노프의 유물론을 도식화하고 통속화함으로써 이 교조의 모형을 형성하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주장하면서도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존재론의 형성을 조심스레 기피했고, 변증법의 논리를 사회와 역사 영역에만 적용하였다. 철학과 과학의 혼효물(混淆物)인 자연변증법을 구성한 엥겔스의 유물론적 진화론은 프레하노프와  K.J.카우츠키를 거쳐 레닌과  N.I.부하린에 의해 변증법과 유물론의 억지결합인 이 교조로서 발전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술어를 마르크스는 전혀 사용한 바 없고, 1891년 프레하노프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교조의 체계화 과정에서 볼셰비키당의 세계관적 도그마로 공식화되고 이 공식화된 국정철학(國定哲學)이 곧 1936년 스탈린의 저작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이었다. 이 공식화로 스탈린에 의한 철학의 1인 독점이 이루어지고, 그 이후 소련학계에서는 이 철학교조 이외의 모든 철학적 논의가 전면적으로 금지되고 대용종교(代用宗敎)의 도그마로서 스탈린철학의 독점적 지배가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결국 스탈린의 국정철학이요, 그 밖의 모든 철학사상의 연구와 토론을 불모화시킨 철학의 1인 독점체제가 된 것이다. 이 철학교조는 소련 공산당의 공식적 철학 이데올로기로서 반복적인 학습을 위한 사상 강제주입의 교정이었고, ‘DIAMAT’라는 약칭으로 통용되는 ‘공산경전(共産經典)’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56년 6월 6일 소련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에 내려진 ‘DIAMAT의 교정에 관한 당중앙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이 스탈린 교정은 폐지되고, 58년 콘스탄티노프 편(編)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초》와 60년 쿠시넨 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를 거쳐 그 후로도 수정이 거듭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선 이 교조는 마르크스와 특히 엥겔스의 유물론을 계승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마르크스의 철학을 부당하게도 자연계에까지 확대적용하여 진화론적인 유물론 형이상학으로 만든 것은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물질을 제1차 실재(實在)로 보고 물질의 물질적·화학적 변화마저도 변증법적 변화와 발전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모든 철학문제를 아주 단순하게 유물론과 관념론의 2분법으로 이해했고 철학자들도 이에 대응되는 2대 진영으로 대립되어 있다고 전제하였다. 즉, “자연에 대해서 정신이 근원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따라서 결국에 가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세계는 정신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관념론 진영에 속한다. 자연을 근원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유물론의 갖가지 학파에 속한다”(엥겔스의 포이어바흐論)라고 하였다. 엥겔스의 유물론이 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물질을 상정한 진화론적 특성이 가미된 점이다. 레닌은 의식에서 독립된 물질의 선차성(先次性)을 제시하고 사유는 물질인 뇌수의 분비물인 듯이 표현하였다. 레닌의 유물론은 E.마하나  R.아베나리우스의 감각주의적 실증철학으로 인해 그 지위가 위태로워진 물질의 카테고리를 수호하기 위해 감각이나 경험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을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인식론으로는 반영론적(反映論的) 실재론을 마련하였다. 그의 반영론에 의하면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거나 불완전한 모사(模寫)에 불과한 것이 된다. 레닌은 “유물론은 대개 의식·감각·경험 등과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를 인정한다.… 의식은 다만 존재의 반영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명제(의식은 물질의 불완전한 반영이다)는 그 명제 자체의 진리성(眞理性)조차도 인정할 수 없게 하는 패러독스에 빠져 있다. 즉, 수학적 지식이나 그 밖의 온갖 과학이론들이 물질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면, 예를 들어 0의 개념은 물질의 어떤 반영이며 만유인력은 어떤 반영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적 전제가 아주 소박한 반영론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가장 심각한 약점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스탈린도 유물론 면에서는 레닌의 통속적 유물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즉,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 “물질·자연·존재는 의식 밖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다. 물질이 1차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감각·관념·의식의 근원이며 따라서 의식은 2차적·파생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고 존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론은 G.W.F.헤겔의 변증법과 결합됨으로써 L.A.포이어바흐의 기계적 유물론을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엥겔스의 변증법적 자연철학은 의식의 자각과정에 적용되어 온 변증법을 물리적 자연이나 무생물의 영역에까지 잘못 적용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K.뒤링은 마르크스사상 속의 헤겔 변증법 부분을 비판하면서, 모순은 논리적 관계이므로 자연계에는 모순이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엥겔스는 그의 저서 《반(反)뒤링론(論)》(1878)에서 정곡을 찌른 비판을 가한 뒤링의 논점을 반박하기 위해 자연 속에도 모순이 있다는 실례를 제시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물질의 운동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수학의 +와 -, 물리학에서의 작용과 반작용 등을 들어 자연 속에 모순이 내재함을 인정하려 했고, 특히 직선과 곡선이 동일한 것일 수 있는 고등수학에도 진정한 모순이 있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리알이 썩어서 다시 새싹이 나오는 예를 들어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의 법칙을 설명했고, 달걀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 껍데기와 그 속의 병아리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어 달걀이 병아리로 질적(質的) 비약을 한다는 예를 들어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이행(移行)하는 법칙’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런 모든 설명에서 생명 있는 물질을 전제하게 됨으로써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사상은 유물론에서 변질되어 보리·달걀 등 생명체를 기체로 한 진화론적 생명론이 되었다. 레닌도 ‘운동은 물질의 존재방식이다’라고 규정하면서 엥겔스의 자연철학을 계승하여 운동의 범주를 무생명적 물질에서 생명·의식·사유까지 포괄하여 설명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범주로 사용하였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변증법 부분을 전개한 것도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첫째, ‘양에서 질로의 전화(轉化)와 그 역(逆)’의 법칙에 대해서 양적 규정(量的規定)이 일정한 한계점에 도달하면 그 존재의 질은 새로운 질로 전화한다고 하였다. 물은 0 ℃에서 온도가 증가하여 100 ℃에 이르면 비등점에서 수증기로 전환된다는 것, 그리고 빙점과 비등점 사이에서만 물이 물로서 존재하는데 이것이 도량(度量)이다. 이처럼 양과 질의 변증법적인 통일로서 도량관계가 성립된다고 했고 새로운 질이 생기는 질적 비약을 일으키는 한계점을 결절점(結節點)이라 했다. 둘째, ‘제대립(諸對立)의 침투’의 법칙에 대해서도 생명은 스스로의 부정(否定)인 죽음을 본질적으로 내포하면서 삶과 죽음의 모순으로서 자기를 지양한다는 것이다. 셋째,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대해서도 유기적 생명체의 형태변환(形態變換)을 들어, 씨앗으로부터 그 부정으로서 성장체가 생기고 다시 그 성장체로부터 자기부정에 의해 씨앗이 생기는 과정을 그 예로 들었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 변증법의 법칙을 4가지로 공식화하여 ① 제현상의 보편적 관련과 상호의존성, ② 자연과 사회에서의 운동·변화·발전, ③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移行)으로서의 발전, ④ 대립물의 투쟁으로서의 발전 등 네 가지를 들고 ‘부정의 부정’법칙을 삭제하였다. 공산당의 정치적 신조로서 주로 엥겔스, 레닌, 스탈린 등에 의해 교조화된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의 변증법과 유물론의 강제적인 결합, 자연과 사회의 구별 없이 적용된 실증주의적 방법과 존재론화(存在論化), 당적 실천을 위한 이념도구화 등으로 철학적인 반성과 비판 없는 통속화의 표본이 되었다. 비(非)스탈린화(化) 이후 이 ‘DIAMAT’의 교조는 소련과 그 밖의 공산권 내에서마저도 수많은 철학논쟁을 통해 그 이론적 허점과 허위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성이 드러났고, 이 교조의 당적 권위를 장악하고 있던 소련 관학계(官學界)에서도 수차에 걸친 자기 수정에 의해 많은 부분에 걸쳐 대폭 수정되어 변증법적 유물론의 중핵이 크게 변조되었다. 이 교조의 철학적 기초를 동요케 한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현대물리학의 발전으로 유물론의 실재개념이던 ‘물질개념의 소멸’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과 당의 정치적 실천과정에서 이 교조가 현실과 괴리되어 대내적으로 많은 이념분쟁을 야기시켰고, 특히 G.루카치는 스탈린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의 객관주의에 대해 반기를 들고 계급의식 등 의식의 적극적 의의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의식은 물질에 의해 규정된다는 물질결정론적인 유물론은 ‘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해 온 레닌주의 이래로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인 혁명적 실천과 갈등을 일으켰고, 먼저 볼셰비키당과 그 이데올로기가 정치권력의 장악을 통해 사회주의적 경제토대로 만든 볼셰비키혁명도 유물론적인 토대결정론으로는 이론적 합리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50년대의 토대·상부구조논쟁을 통해 소련철학은 토대결정론을 바꾸어 오히려 상부구조인 사회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토대에 ‘반작용’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립성’ 체제를 들고 나와 변증법적 유물론의 유물론적 기초를 흔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소련의 철학교정에서는 물질에 대한 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역설하는 새 경향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이 교조를 결정적으로 혼란에 몰아넣은 것은 55∼58년의 ‘사회주의하의 모순논쟁’이었다.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주된 모순인 계급적 모순이 해소되었다고 전제할 때 모순이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유물변증법의 법칙에 따라 소련은 이제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잃고 침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역설적 상황이 야기되었다. 한편으로는 ‘소련과 공산권 내에도 모순대립이 상존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왕의 변증법교조를 고수해 보려는 보수파와 ‘모순은 오히려 발전의 장애물이다’라고 해서 모순의 지향이나 통일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여 ‘통일·단결·일치’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관학파가 대립한 것이다. N.S.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도 공산권과 자본주의 제국과의 관계를 서로 용인할 수 없는 모순대립(따라서 전쟁불가피론)으로 파악하지 않고 경쟁적 공존관계로 인정한 점에서 ‘현대판 수정주의’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다. 스탈린시대에는 자연과학자도 그의 과학연구에 ‘DIAMAT’의 인용이 의무화되었으나 흐루시초프는 물리학 연구 등 자연과학 연구에 그 강제적용을 면제케 하였다. 맥심 미클루크는 소련 과학문헌의 조사연구를 통해서 소련 과학자들이 그들의 전문적 저작 속에서 변증법적 사고의 법칙을 이용한 단 1건의 예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해서 I.V.미추린, 리솅코 등의 경우와 같이 과학연구에 ‘DIAMAT’의 철학이 도움이 된 예가 없음을 입증하였다.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철학교조였던 ‘DIAMAT’는 공산권 내부에서도, 그리고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 속에서도 이제 퇴조·사멸되고 말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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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마르크스주의의 근거가 되는 역사관. 유물사관이라고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역사에의 적용이며, 그 근본 사상은 역사가 발전하는 원동력은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라고 하는 데 있다. 즉, 사회사(社會史)로서의 역사의 실체가, 자연과 노동에 의해서 자연에 작용하는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생산 관계 등, 물질적인 것으로 성립되며 그것이 자기를 발전시킨다는 생각이다.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역사관에서는 역사의 추진력을 운명·섭리·세계정신 등 초자연적 관념에 두거나, 영웅이나 천재의 정렬이나 능력 등 개인적·우연적 요소로써 역사과정을 설명하는 관념적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아니면, 기후·풍토 등에 의해서 사회적 사상(事象)들이 결정되어 있는 지리적 결정론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사적 유물론에서는 인간의 존재에 필요 불가결한 물질적 생활의 생산이 정치·경제·법률·종교·학문 등의 관념을 발달시킨 기초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제한다”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규정적, 제1차적인 것으로서의 토대,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照應)하는 생산 관계’와 이 실제적 토대 위에 성립되는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로써 이루어지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가 거기에 조응한다’. 그러나 상부구조는 토대로부터 직선적·일방적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대의 법제적·정치적인 여러 관계 및 과학·종교·예술 등 이데올로기의 여러 형태는 동시에 갖가지 모멘트(계기)에 의해서도 규정되어 있다. 나아가 상부구조, 이데올로기의 여러 형태는 하부구조에 대해서 능등적으로 작용한다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사회혁명의 시기는 다음과 같은 경로에 의해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물질생산력이 일정한 발전적 단계에 이르면 현존하는 생산 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이것을 그 법제면에서의 현상에서 보면 그 때까지의 사회생활이 영위되어 온 소유관계와 모순되어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큰 장애가 된다. 그리고 경제적 기반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가 무너진다. 이것은 급속히 이루어지기도 하고 완만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리하여 역사상의 여러 시대가 형성되며, 새로운 생산양식이 이루어져 간다. 인류가 거쳐온 기본적 생산양식의 형태는 원시공산제·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민주주의인데, 여기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移行)되는 시기로서 현대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적 유물론이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상형성사 가운데서 명확한 형태에 달한 것은 1845∼46년에 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였다고 본다. 그의 소위 《소외론》에서는 G.W.F.헤겔과 헤겔좌파(左派)의 관념사관을 ‘자연적 인간의 노동’을 기초로 하는 사회파악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넘어서기는 했지만 사유재산제의 역사적 성립을 대상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역사사회의 형성을 파악하는 방법으로서의 사적 유물론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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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대

 

현대 철학(contemporary philosophy)

 

  현대의 철학사상은 이미 19세기 중엽의 헤겔 철학에 대한 반동에서 서서히 태동하였고, 1930년대를 전후하여 그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내었다. 19세기 독일 철학의 정상이었던 헤겔 철학의 붕괴는 헤겔학파 내에서 L.포이어바흐의 헤겔 반박을 거쳐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탄생시켰고, G.W.F.헤겔의 합리주의적인 절대관념론에 반발하고 나선 S.A.키르케고르와 A.쇼펜하우어의 비합리주의 철학은 F.W.니체를 통해서 현대의 생의 철학과 실존 철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경험주의를 토대로 한 신실재

론(新實在論)과 분석 철학에서는 빈의 논리실증주의가 결합되어 발전해 갔다. 헤겔 철학의 반박에서 시작된 철학의 여러 경향과 함께 신(新)칸트주의 철학은 20세기 철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현대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상가들은 1930년대까지 출판된 저서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무렵에는 M.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 K.야스퍼스의 《철학》(32), J.러셀과 A.N.화이트헤드의 《수학원리》(1910∼13), R.카르나프의 《세계의 논리적 구성》(18), L.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21)를 비롯하여 J.듀이, E.카시러, H.베르그송, E.후설, G.E.무어, G.루카치 등 현대철학자들의 핵심적인 사상을 담은 저서들이 출판되었고 이들이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 오늘날까지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현대철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자연과학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플랑크의 양자물리학을 비롯한 현대과학의 성과들은 근대철학이 기반으로 삼았던 뉴턴 물리학에 도전하게 되었다. 실체개념이나 절대시공(絶對時空)의 관념 위에 세웠던 근대철학의 절대이념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또한 생물학의 발전은 인간 이해에 대한 새로운 측면을 제시하였고, 특히 S.프로이트나 C.G.융의 심리학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의 탐구를 토대로 지금까지 신뢰해 왔던 이성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하였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수학의 발전은 철학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철학 형성에 영향을 끼친 다른 요인은 정치사회적인 변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인간존재의 생존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양극현상을 심화시켰다. 이에 따른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좀더 구체적인 인간문제와 사회문제로 집중되어 갔다. 이와 동시에 산업혁명 이후 가속화된 공업화는 현대사회에 필연적인 부조리를 안겨주어 이 문제의 극복이 철학적 관심의 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건 아래 현대철학은 근대철학에서와는 전혀 다른 자기 모습의 새로운 전개가 요청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의 철학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 이유로서는 현대의 철학사상들이 점진적으로 유럽 중심에서 탈피하여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발전해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며, 또 모든 철학사상간의 상호영향 관계가 밀접하게 이루어져 한 철학사상을 어떤 뚜렷한 철학사적인 입장에 고정시켜서 이해할 수만은 없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현대철학의 유형은 대체로 지역에 따라 유럽 철학과 영미 철학(英美哲學) 및 동유럽 철학으로 나누어 이해한다. 유럽 철학에는 삶의 철학과 실존철학, 구조주의철학과 네오 마르크스주의(비판이론)를 포함시켜 논의하고, 영미 철학 영역에는 실용주의와 논리실증주의 그리고 분석철학과 신실증주의(비판적 합리주의)철학 등을 포함시킨다. 동유럽 철학은 국가철학이 되어버린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의미한다.

【신칸트주의】 낭만적 형이상학의 사변(思辨)이 유행하고 있을 무렵, 비판적 사고의 가치를 되찾기 위하여 ‘칸트로 돌아가자’는 구호와 함께 일어난(1865년경) 신칸트주의는 I.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토대에서 인식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서남독일학파와 마부르크학파로 나뉘어 발전한 신칸트주의는 모두 칸트의 사상을 출발점으로 한다. 서남독일학파의 W.빈델반트는 철학을 보편타당한 가치에 관한 비판적 과학이라고 하여 자연과학적인 관찰방식과 역사적인 관찰방식을 대립시키고 자연과학이 법칙설정적인 데 비하여 정신과학은 개성 기술적(個性記述的)이라고 하면서 정신과학의 의미를 더 중요시하였다. H.리케르트도 문화업적에 실현된 가치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구분을 제창하였다. 이들 사상은 현대의 과학방법론에 대한 중요한 이론근거를 제시하였다. 마부르크학파의 대표자들은 코엔, P.G.나토르프, 카시러 등이며 칸트의 인식이론적인 관념론을 더 심화시켰다. 이들은 칸트가 인식할 수 없다고 한 물자체(物自體)를 부정하며 사물은 우리들의 의식 속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카시러는 인간의 정신적인 작용에는 인식하는 것 외에 언어와 신화적인 사고가 우리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참여한다고 말하여 언어와 문화연구에 대한 현대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들 신칸트주의 철학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의 공격과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특히 H.라이헨바흐, 카르납, 빈학단의 M.슐리크와 O.노이라트는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지식론을 발전시켜 칸트의 선행주의를 반박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식론은 경험적인 인식이론과 수학에서 개발된 논리학을 기초로 삼는다. 이같은 대립은 아직도 현대철학의 중요한 논쟁대상이 되고 있다.

【생의 철학과 해석학】 헤겔의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비합리주의의 경향 속에 이미 생의 철학의 출발이 내재해 있었다. 생의 철학은 현대사회 속의 계산하는 오성(悟性)의 우월한 역할에 반발하여 생동적인 삶의 의미를 보존하려는 철학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기계화나 물상화에 대항하며 인간을 합리적인 도식에 의해서 파악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해서 저항한다. 근대철학의 R.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합리성만을 강조해 온 사조를 거부하고 개념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주제로 삼는다. 니체, 딜타이, 베르그송 등이 이러한 철학사조에 속한다. 니체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본능, 욕구나 활력적인 힘의 해방으로서 삶을 이해했으며, 딜타이는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서 파악될 수 없는 인간의 내적인 체험의 지속적인 흐름을 삶이라고 하였다. 베르그송은 생동적인 것은 동적인 흐름에 속하기 때문에 추상적·정적인 공식들에 의해서 사멸될 수 없는 것을 삶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생의 파악은 오직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들의 입장은 대체로 주지주의와 이성주의, 실증주의 그리고 신칸트학파와 대립해 있으며 인간의 생에 대한 고정불변의 이념을 설정하는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특히 W.딜타이의 생의 철학은 인식이론에 공헌한 바가 크다. 그는 생의 철학적 인간학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삶을 파악하는 방법은 대상을 보편적인 법칙에 귀속시키는 자연과학적인 방법과는 달리 이해(理解)의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을 그는 해석학의 이론에서 다룬다. 해석학의 기원이 성서 문헌의 해석에 있었지만 딜타이는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 연구를 토대로 생의 해석학의 방법론적 체계를 처음으로 세웠다.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생활을 이해한다”라는 명제에서 설명과 이해를 대립시키고 있으며 인간의 정신생활이 표현된 모든 정신과학의 대상들은 이해의 방법에 따라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체험, 표현, 이해를 해석학적인 순환관계로 보고 이해는 정신과학의 기초가 되며 지금까지의 철학적 인식론을 해석학이 대행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해석학은 하이데거에 이르러 이해의 개념이 존재론적인 의미를 얻어 철학적 해석학의 체계를 갖추게 되고 H.G.가다머에서 선입관의 해석학으로 발전하였다. 현대의 해석학 논의는 J.하버마스에게서 수용되고 사회철학과 관련되어 보편적 방법으로서의 해석학을 요청하며 또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과 관계를 지은 P.아펠의 선험적인 해석학으로 발전하였다. 이제는 해석학이 단순한 정신과학의 방법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의 방법을 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현상학과 실존철학】 현상학은 생의 철학이나 해석학과는 달리 철학의 과학적인 토대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E.후설에 의해 시작된 현상학은 그 당시 유행하는 실증주의와 유물론에 의해서 상실될지도 모를 철학의 중요관심인 이성과 정신을 본질인식과 본질파악으로 구제하려 하였다. 그가 말하는 제일철학(第一哲學)의 구성은 현상학의 기본과제였는데, 이는 수학적 보편성의 토대 위에서 인식하고 가치평가하며 실천하는 이성의 보편이론으로 삼으려 하였다. 과학의 객관성을 의식의 주관성으로 전환시키면서도 의식의 상호주관성[間主觀性]을 확보하는 길을 현상학적 방법이 보장한다고 보았다. 이 방법은 의식의 현상에서 주관성을 배제하는 환원(還元)의 과정을 거쳐 순수의식의 인식에 도달한다. 후설은 철학이 곧 현상학이라고 하여 본질적인 것으로의 전환을 ‘사실자체로’라는 구호에서 밝혀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과 본질의 문제는 내적 의식현상의 주체성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후설의 현상학은 하이데거에 이르러 실존철학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현상학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방법론이 철학 이외의 영역에 끼친 영향도 매우 크다. 비록 현상학이 실증주의와 대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학과 같은 계통에 서 있지만 해석학이 비합리주의적인 심리주의에 서 있다는 점에서 해석학과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실존철학의 연원은 헤겔의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나선 키르케고르와 니체에서 그 근거가 주어지지만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기초존재론 없이는 실존철학이 그 체계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비록 스스로를 실존철학자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야스퍼스와 함께 실존철학의 중요한 개념과 체계를 만들었다. 잘 알려진 실존철학자로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이외에도 J.P.사르트르와 G.마르셀 등이 있다. 이들은 주체로서의 인간의 고유한 존재를 다른 사물의 존재와 구별시켜 ‘실존’이라고 부르는 한편, 실존은 순수한 인격이기 때문에 자유의 핵심이며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인간일 수 있음은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흔히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와 유신론적인 실존주의를 구별하기도 하며 독일의 실존주의와 프랑스의 실존주의를 구별하기도 하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그들의 내적인 연관 때문에 엄밀한 구분이 힘들다. 야스퍼스의 실존은 한계 상황(죽음·죄책·고뇌·싸움) 속의 인간을 말하며 한계상황의 극복은 사랑과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존재론은 현존재의 분석에서 출발하며, 현존재의 기본존재방식을 ‘세계 안에 있음’과 ‘서로 어울려 있음’에서 찾아 관심과 불안을 현존재의 기본정서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실존은 휴머니즘이며, 비록 인간은 절대적인 자유를 보장받았지만 이웃을 위한 책임 속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철학의 결합을 성취시켰고, 사회비판이론에 속한 H.마르쿠제는 하이데거와 마르크스주의의 종합을 시도하였다.

【비판이론과 네오마르크시즘】 좁은 의미의 문화비판과 사회비판의 문제가 제기된 것은 그다지 오래지 않다. 현대의 사회비판(소위 프랑크푸르트학파)은 종래의 사회비판과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비판은 F.퇴니에스에서 비롯하여 W.좀바르트, A.겔렌, 셸스키 등으로 이어졌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시작된 비판이론은 사회구조와 경제체제·정치체계의 근본적인 개혁을 의도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원은 1920년대의 독일적인 정치사회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M.호르크하이머와 T.W.아도르노에 의해 시작된 비판이론은 헤겔의 철학사상과 관련된 마르크시즘을 출발점으로 삼아 독일의 곤궁한 상황을 구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이 야기한 현대사회의 비합리성과 현대에 와서 도구화된 합리성이 파시즘의 정치체제를 굳힌다고 보아 기존하는 체제의 전적인 부정을 주장하였다. 이들이 모두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A.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비판이론의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H.마르쿠제와 E.프롬 등이 이 비판이론에 참여하였고, 이들 사상은 60년대의 미국과 유럽에서 학생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철학의 참다운 기능을 기존하는 것의 비판에 두고 점진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체제가 결국 혁명을 필연적으로 요청한다고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고 하버마스의 등장으로 비판이론의 체계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그들의 초기이론을 포기하였으므로 60년대 말의 비판이론은 하버마스와 미국으로 귀화한 마르쿠제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후 하버마스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고 마르쿠제가 죽으면서 비판이론은 퇴조하고 말았다. 60년대의 ‘사회과학 방법론 논쟁’에서 변증법과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 간의 대결은 아직도 해소되지 못하였다. 비판이론이 마르크스철학에 기초하기 때문에 신좌익(新左翼) 또는 네오마르크시즘이라고 불리며,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에서 프로이트 좌파라고도 한다. 이들 모두 비판이론이라는 이름 아래 총괄되지만 관심영역과 방법에서 서로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 이와 같은 사조는 주로 영미 철학의 특징적인 경향에 속한다. 현대의 영미 철학은 여러 가지 사상적인 연원을 가지며 거기에는 영국의 전통적인 경험주의의 바탕과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미국인의 태도, 그리고 유럽 대륙의 사상원천인 독일·폴란드의 수리논리학과 빈학파의 사상이 융합되어 있다.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에서 비롯되었다. 러셀은 독일의 논리학자이며 수학자인 G.프레게의 영향을 받아 영미철학의 중요한 토대를 구축하였다. 논리실증주의는 낡은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의 전통을 20세기로 옮겨 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신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낡은 실증주의와는 달리 현대논리학에 관심을 갖고 경험과학적인 방법(귀납법)과 논리적·수학적 방법을 엄밀하게 구별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입장을 논리적 실증주의(에이어) 또는 논리적 경험주의(모리스)라고 일컫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환상과 같이 애매모호한 말로써 철학적 사색을 즐기는 일체의 전통철학을 부정하고 논리적인 엄밀성이라든지 명료한 철학적 개념의 사용과 구성을 강조한다. 분명하고 간결한 진술을 추구하는 이들은 어떤 철학적인 진술이거나 그것은 근거가 있어야 하며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는 진술이나 명제는 의미없는(sinnlos) 명제로 판정한다. 전통적 형이상학의 문제(신의 존재, 영혼불멸 등)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상의 문제(Scheinproblem)가 된다. 그러므로 논리실증주의가 말하는 철학의 과제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논리실증주의자는 세계와 인간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려는 입장이라기 보다는 이들의 방법, 곧 분석적인 방법에 관심을 둔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인 것이다. 분석철학은 빈학단과 무어의 케임브리지분석학파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빈은 오랜 기간 동안 이름 있는 과학자들을 배출한 곳이어서 실증주의 전통에 익숙해 있었으며, 이와 같은 분위기가 분석철학의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원래 물리학자였던 슐리크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모여 논리학을 통한 철학의 부흥을 꾀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학자들은 카르나프, 노이라트, 파이글, 카우프만 등이었고, 이들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영향 속에서 새로운 사고 혁명을 설계했다. 카르나프는 세계의 논리적 구성에서 전통형이상학을 무의미한 진술이라고 부정하였고, 노이라트는 과학적인 진술은 물리학의 언어로 옮겨질 수 있다고 보아 과학적인 보편언어를 주장하였다. 1938년 빈학단의 학자들은 대부분 미국과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빈학단은 사실상 해체되었으나 영국이나 미국에서 분석철학의 사조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카르나프는 인공언어의 도움으로 과학적인 철학은 그의 문제를 엄밀하게 해결할 것이라고 보았다. 영국의 라일은 R.툴민, 오스틴 등과 함께 일상용어를 통해서 철학적인 문제를 구성하였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의도하였다. 빈학단의 경향과는 달리 포퍼는 탐구의 논리에서 귀납법에 근거한 검증원리를 연역적인 반증원리에 대립시킴으로써 현대 영미철학 방법론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영미철학의 경향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과 현상학 및 분석철학의 방법적인 접근에 대한 논의가 주목할 만하다.

【실용주의와 도구주의】 실용주의는 특히 미국의 철학정신을 반영하는 사조로서 실제(practice)에 관심을 둔다. 여기서 말하는 실제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는 행위의 실제로서 실험적인 과학에 입각하여 사회적·경제적인 활동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의 발전과 문화의 진보에 공헌하는 유용성이나 적용가능성으로서의 실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고는 행위로 옮겨갈 수 있는 활동이다. 사고는 자기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실용주의의 창시자인 C.S.퍼스에게서 ‘무엇을 아는가(know-what)’보다 ‘어떻게를 아는 것(know-how)’, 곧 실제적인 결과에 우월성을 두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퍼스 자신은 실용주의의 체계를 세우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수학과 논리학자였기에 현대의 기호이론(semiotics)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의 논문 <어떻게 우리의 관념을 명료하게 하느냐>가 제임스에 이르러 실용주의를 체계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W.제임스는 그의 심리학적인 관심 때문에 과학이론의 실용원칙보다는 형이상학과 종교·도덕에 이 실용적인 원칙의 적용을 강조하였다. 참이란 제임스에게 있어 사고와 사실의 합치이기보다는 실적 가치(power to work)나 유용성에서 판정된다. 듀이의 도구주의는 실용주의의 특별한 변용이다. 듀이는 자신의 이론을 실험적 과학에 적용되는 방법으로 이해했고, 어떤 진술이 참이라는 판정을 받으려면 진술의 기능이 성취되고 욕구가 충족되며 경험적으로나 실험적으로 확증되었을 때라고 하였다. 마르크스주의에서처럼 듀이는 인간의 사고나 의식은 행위와 실제를 위해서 성장한다고 본다. 분석적인 방법을 토대로 듀이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해서 도구주의는 열광주의나 신비주의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훌륭한 무기라고 본다. 실용주의나 도구주의는 미국인의 생활철학과 개척정신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결론적으로 현대의 산업화시대에 철학의 가치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능주의와 실용성만을 의미 있는 판단기준으로 행사하는 현대사회에서는 흔히 철학의 무용성이 논의된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문화와 사회 발전에 대해서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새롭게 반성하도록 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현대사회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기초로 진보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에 도취해 사회발전의 방향이 필연성의 노예로 전락해 가고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자기실현과 사회 전체의 행복과 꿈을 보장해 줄 이성적인 사회가 되도록 철학은 끊임없는 비판정신을 발휘해야 하며 이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탐구하는 철학정신은 효용이 없는 듯한 효용성을 갖게 된다. 반박과 비판이 거듭되는 이론적 논의 속에 현대철학의 미래가 있다.

 항목차례

신칸트학파(Neo-Kantians/Neukantianer)

 

  19세기 말부터 I.칸트의 비판주의 정신을 되살려 그 발전을 목표로 하였던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상의 학파. 19세기 말에 이르러 지나친 유물론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높아지자, 물질에 그대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의 의의는 또다시 학자들에 의하여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 중에 그 철학적인 거점을 칸트에서 구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통 신칸트학파라고 하였다. 그들은 칸트에 의하여 확립된 비판주의를 더욱 철저히 하는 동시에, 그것을 널리 모든 문화영역에까지 확대하여 적용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신조는 “칸트를 이해하려는 것은 칸트를 극복하려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학파는 두 개의 분파로 갈린다. H.코엔과  P.나토르프는 순수논리와 순수윤리의 개념 확립에 공헌하였는데, 그들은 마르부르크대학에서 활약하였으므로, 이것을 마르부르크학파라고 부른다. W.빈델반트와 H.리케르트는 가치와 문화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는데, 그들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활약하였으므로 이것을 서남 독일학파라고 부른다. 신칸트학파는 법철학의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마르부르크학파의 진영에서는 비판주의 법철학을 완성시킨 R.슈탐러가 나왔고, 순수법학의 창시자인 H.켈젠도 이 진영에 속한다. 서남 독일학파의 진영에서는 법학방법론 확립에 공이 큰 E.라스크와 법의 가치철학을 확립한 G.라트브루흐가 배출되었다. 이들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켈젠이 주장한 순수법학이다. 여기에서는 당위(當爲)와 존재(存在)를 엄밀히 구별하면서, 여하한 종류의 자연법론도 배척하는 철저한 법실증주의(法實證主義)가 주장되었다. 오늘날 신칸트학파는 철학 일반으로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초의 30년 동안 법철학 분야에서 크게 활약한 사람은 주로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었고, 그들이 남긴 업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E.카우프만은 신칸트학파의 법철학 형식주의를 비난하지만, 아직 그것에 대신할 만한 체계적인 법철학이 나오지 않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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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철학(philosophy of life/Lebensphilosophie)

 

  실증과학(實證科學) 발달에 영향받은 실증주의와 과학비판철학의 성행에 대립하여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철학의 총칭. A.쇼펜하우어, F.W.니체, W.딜타이, G.지멜, H.베르그송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공통 특징은 인간 또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 나아가서는 우주 전체의 ‘생’은, 실증과학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는 파악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은폐되어 버린다고 생각한 점에 있다. ‘생’의 실체를 놓고, ‘생’의 철학의 시조 쇼펜하우어는 ‘생에의 맹목적 의지’,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 딜타이는 ‘정신적·역사적 생’, 지멜은 ‘초월의 내재’, 베르그송은 ‘생명의 비약’이라 파악하여 같은 생의 철학이라 해도 각각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그러나 합리적·과학적 사고의 그물을 피하는 것, 오히려 어떤 종류의 직관, 또는 직접적 체험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비로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일관되고 집요한 주목이라는 점에서는 궤도를 같이하며, 거시적으로 볼 때 하나의 조류를 이룬다. 생의 철학이 지닌 의의는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서구문명 전반에 확대되는 생의 모든 영역에서의 합리화 경향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 근저에 있는 생의 비합리적 기반에 소행(遡行)하여 그 존재를 적시한 데 있다. 그러나 반면에 그것은 ‘비합리적’인 ‘직관’의 지시로 끝나기 쉽다는 점에, 다시 말해서 철학이 나쁜 의미에서 문학으로 해소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 생의 영역에서 고유한 논리를 찾으려고 한 딜타이의 역사적·해석학적 방법은 뒤에 E.후설의 현상학(現象學), K.야스퍼스, M.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또 미국에서는 W.제임스나 프래그머티즘의 사상가에게서, 또 에스파냐에서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 M.우나무노 등에서 생의 철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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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2.22∼1860.9.21)

 

  독일의 철학자. 염세사상의 대표자로 불린다. 단치히 출생. 은행가와 여류작가인 부모 덕택에 평생 생활에 걱정 없이 지냈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병합되자 자유도시 함부르크로 이사하였고, 1803년에는 유럽 주유의 대여행을 떠났다. 1805년 그를 상인으로 만들려던 아버지가 죽자, 고타의 고등학교를 거쳐 1809년부터는 괴팅겐대학에서 철학과 자연과학을 배우고, G.E.슐체의 강의를 들었다. 이어 11년에는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J.G.피히테와 F.E.D.슐라이어마허를 청강하였으며,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냕er die Vierfache Wurzel des Stazes vom Zureichenden Grunde》(13)로 예나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 때를 전후한 사교가인 모친 요한나와의 불화·대립은 유명한데, 이로 인해 햄릿과 같은 고뇌에 빠졌고, 그의 독특한 여성혐오, 여성멸시의 한 씨앗이 싹텄다. 바이마르에서 살면서 J.W.괴테와 친교를 맺었고, 그에게서 자극을 받아 색채론(色彩論)을 연구하여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냕er das Sehen und Farben》(16)를 저술하였다. 또한 동양학자 F.마이어와의 교우(交友)로 인도고전에도 눈을 뗬다. 드레스덴으로 옮겨 4년간의 노작인 저서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9)를 발표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20년에 베를린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G.W.F.헤겔의 압도적 명성에 밀려 이듬해 사직하고, 22∼23년의 이탈리아 여행 후 31년에는 당시 유행한 콜레라를 피해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옮겨가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철학은 Ⅰ.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피히테, F.W.J.셸링, 헤겔 등의 관념론적 철학자를 공격하였으나, 그 근본적 사상이나 체계의 구성은 같은 ‘독일 관념론’에 속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론(論) 및 인도의 베다철학의 영향을 받아 염세관을 사상의 기조로 한다. 즉, 그는 칸트와 같이 인간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는 시간·공간·카테고리(category), 특히 인과율(因果律)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의 형식으로 구성된 표상일 뿐,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 전체는 우리들의 표상이며 세계의 존재는 주관에 의존한다. 세계의 내적 본질은 ‘의지’이며, 이것이 곧 물(物) 자체로서, 현상은 이 원적(原的) 의지가 시간·공간인 개체화(個體化)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에 의하여 한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물 자체를 인식불가능으로 한 칸트와는 달리, 그는 표상으로서의 현상세계(現象世界) 배후에서 그것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는 물 자체를 의지로써 단적으로 인식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 세계의 원인인 이 의지는 맹목적인 ‘생에 대한 의지’ 바로 그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형이상학설을 배경으로 할 때, 인간생존의 문제는 이 의지에서 출발하여 인과적 연쇄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는 욕구의 계속이며, 따라서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로부터 해탈(解脫)하는 데는 무욕구의 상태, 즉 이 의지가 부정되고 형상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열반(涅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그는 이와 같이, 엄격한 금욕을 바탕으로 한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해탈과 정적(靜寂)의 획득을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로서 제시하였고, 또한 그렇게 하여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 즉 동고(同苦:Mitleid)를 최고의 덕이자 윤리의 근본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그의 철학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염세관의 사조(思潮)에 영합하여 크게 보급되었는데, 의지의 형이상학으로서는 F.W.니체의 권력의지에 근거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의 사상으로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밖에도 W.R.바그너의 음악, K.R.E.하르트만, P.도이센의 철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분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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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0.15∼1900.8.25)

 

  독일의 시인·철학자.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쉊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73~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Unzeitgem둺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Morgenr쉞e》(81) 《환희의 지혜:Die fr쉎iliche Wissenschaft》(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83∼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Jenseits von Gut und B쉝e》(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系譜學):Zur Genealogie der Moral》(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Wille zur Macht》(84∼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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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존주의(existentialism)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존주의 철학을 초기에 수립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를 오늘날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실존이란 말은 원래 철학용어로서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여, 옛날에는 모든 것에 관해 그 본질과 실존(존재)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는 실존이란 특히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의 선구자로서는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하고(키르케고르), 따라서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음을 주장했으며(포이어바흐),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을 예로 들면,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超越者)와 관계되는 것’이지만, 한편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多義的)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분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초월자 또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은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이고, 사르트르 자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을 주장한다. 즉 사르트르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자유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실존주의의 한 파(派)는 사르트르의 아류(亞流)로서, 사르트르의 자유에 관한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이 밖에 L.셰스토프, N.A.베르자예프, 부버를 들 수 있고, 문학자로는 사르트르 이외에 카뮈, 카프카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존주의의 시조(始祖)로서는 F.W.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나아가서는 B.파스칼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르트나 불트만 등의 변증법 신학자가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한다는 점일 뿐, 그 사상 내용에는 상당한 차가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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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5.5∼1855.11.11)

 

  덴마크의 철학자. 코펜하겐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이것이 특이한 교육으로 배양되어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중(辨證)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1841년에 논문 《이로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에, 1837년경 그가 스스로 ‘대지진(大地震)’이라고 부른 심각한 체험을 하였다. 그 내용은 아버지가 소년시절에 유틀란트의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자기자신이 결혼 전에 아이를 밴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 등을 안 사실로 죄의식이 심화되었고, 인생을 보는 눈과 그리스도교를 보는 눈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겼다. 한편, 37년 당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41년 가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른바 레기네 사건이며, 이 때에 체험한 정신적인 갈등이 훗날 미적 저작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한때 베를린에 나가 당시 명성을 떨치던 철학자 F.W.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돈 죠반니》 《파우스트》 등 많은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하다가 이듬해인 42년에 귀국하여 저술을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활발하여 43~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43) 《반복:Gjentagelsen》(43) 《공포와 전율:Frygt og Baeven》(43)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44)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45) 등과 같은 이른바 미적 저작과 《철학적 단편:Philosophiske Smuler》(44) 《철학적 단편을 위한 결말의 비학문적 후서(非學問的 後書):Afsulttende uvidenskabelig Efterskrift til de Philosophiske Smuler》(46) 등의 철학적 저작을 모두 익명으로 출판하였고,이 밖에도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인 강화(講話)를 발표하였다. 그 후 저술에 싫증이 난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풍자신문 《코르사르》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하여 오해에 찬 비평이 실려, 그것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사이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새로운 정신활동과 저술을 향한 의욕이 용솟음쳤다. 그는 신문의 무책임한 비평과 세간의 비웃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1 D풼en》(49) 《그리스도교의 수련:Indoevelse i Christendom》(50) 가운데에서 추구하였다. 그는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으며 《순간》 등의 팸플릿을 통한 공격은 매우 격렬하였다. 그런 와중인 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달 병원에서 죽었다. G.W.F.헤겔의 범논리주의를 배제하여 불안과 절망 속에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탐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국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09년부터 독일에서 C.슈램프가 키르케고르의 번역집을 내어 당시 신진이었던 P.바르트, J.H.하이데거, K.야스퍼스 등의 변증법 신학자와 실존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로부터 그의 명성은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과 실존사상의 선구자로서 세계에 알려졌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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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2.23∼1969.2.26)

 

  독일의 철학자. 오르덴부르크 출생. 하이델베르크대학·뮌헨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이어 괴팅겐 및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수학하였다. 1910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심리학과 조교로 있으면서, 13년 《정신병리학 총론:Allgemeine Psychopathologie》을 써서 여러 가지 심리학적 방법의 검토를 통해 종래의 독단론을 비판하고 상대화(相對化)된 과학적 인식의 방법을 제기하였다. 16년 이 대학 심리학 교수로 승진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관의 심리학:Psychologie der Weltanschauungen》을 출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심리학에서 철학으로 관심을 돌렸고, 스스로도 이 책을 ‘최초의 실존철학적 저작’이라고 주장하였다. 21년 철학 교수로 전임한 뒤에 I.칸트, S.A.키르케고르, F.W.니체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E.후설의 영향까지 곁들였다. 그는 더욱 철학에 진력하여 마침내 그의 최대의 저서인 《철학:Philosophie》(3권)을 펴내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체계적 전개의 배경에는 《현대의 정신적 상황:Der geistige Situation der Zeit》(1931)에서와 같이 20세기 서구사회가 제기하는 기계문명, 대중사회적 사회, 정치상황,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가치전환적인 사상적 위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기조를 이루었다. 또한, 그는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인 과학에 대한 과신(過信)을 경고하고, 근원적인 불안에 노출된 인간의 비합리성을 포착하여 본래적인 인간존재의 양태를 전개하는 ‘실존철학’을 시대구원의 한 방법으로서 제시하였다. 인간존재를 규명하는 철학적 사색은 그 전과 같이 세계의 조감도를 얻는 그런 단순한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근원에 파고드는 활동이며, 철학은 ‘철학한다(Philosophieren)’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철학적 사색은 순차로 3개의 존재의 차원(世界·實存·超在)을 거치는데, 이에 따라서 철학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① 우선, 구래(舊來)의 과학적·철학적 세계인식(世界定位:Weltorientierung)을 가지고는 인간의 현존재를 포함하는 세계의 전체적 인식은 불가능하며, 또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존재 또는 초재(超在)를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도 없다. 이 인식활동의 한계를 규명하고 거기로 이끌어가는 것이 ‘철학적 세계정위’이다. ② 그러나 존재의 탐구는 이 한계에서 반전(反轉)하여 자기의식으로 내향(內向)한다. 인간은 그 세계존재를 자기를 초월하며 거기서 자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실존을 모색한다. 이것이 ‘실존개명(實存開明)’이다. 인간의 실존에서의 불가시적(不可視的)인 궁극의 자기존재는 항상 어떤 것을 향한 약진인데, 인간은 단순한 세계존재, 즉 공리성(功利性)과 안이성으로 타락의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 본래적인 자기존재는 인간의 깊은 상호교섭(通心:Kommunikation)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며, 더욱이 이 통심에서 인간의 ‘자유’가 ‘결단’의 순간에 강하게 자각된다. 실존은 자유 때문에 가능적 실존으로서 미완(未完)인데, 더욱이 역사적으로 과거로부터 한정(限定)되어 있는 현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필연성의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놓여 있다. 또한 그 밖에 죽음·고뇌·투쟁·죄책 등 숙명적인 한계상황을 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한계상황을 감내하여 세계에 버티어 내는 각오가 실존의 본질이며, 이 한계상황에서의 좌절 가운데서 실존은 보다 깊게 개명(開明)·조파(照波)되는 것이다. ③ 이와 같은 실존은 유한적이며, 이러한 유한성을 지양하는 절대적 존재(超在)가 추구된다. 즉, 위와 같은 객체적인 세계존재와 주체적인 자기존재를 초월하여 하나의 이념 가운데 주객(主客)의 긴장·갈등이 지양된다. 이러한 초재는 좌절의 암호(暗號) 가운데 모습을 나타낸다. 형이상학이란 일자(一者)를 초월적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일이 아니라 실존과 초월자와의 만남으로써 아는 일이다. 인류의 가장 심각한 체험은 형이상학과 종교의 역사에 암호문자로 쓰여진 것이며, 형이상학은 초재 현현(顯現)의 ‘암호해독(Chiffrelesen)’인 것이다. 1937년 부인이 유대인이라 하여 교직에서 쫓겨났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그 철학적 정신은 흐리지 않았으며, 전후에는 곧 복귀하여 대학의 부흥에 힘썼다. 전쟁 중의 경험을 통하여 《전쟁죄책론》의 반성이 나와 전후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48년 바젤대학 교수가 되었고, 61년 은퇴 후에는 47년에 제1권을 내어 자기 체계의 재구축을 시도한 《철학적 논리학:Philosophische Logik》의 속권 집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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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9.26∼1976.5.26)

 

  독일의 철학자. 20세기 독일의 실존철학의 대표자. 바덴주(州) 메스키르히 출생.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E.후설에게 현상학(現象學)을 배웠다. 1923년 마르부르크대학 교수, 28년 후설의 뒤를 이어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수, 33∼34년 총장을 지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스에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전후에 한때 추방되었다. 후에 다시 복직하여 강의를 하였지만, 전전·전후를 통틀어 그의 사색의 대부분은 슈바르츠발트의 산장(山莊)에서 이루어졌다. 하이데거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주요저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1927) 때문이며 이것은 전체 구상의 전반부(前半部)에 해당하며, 처음에 후설이 편집하는 현상학에 관한 연구연보(硏究年報)에 발표되었다. 여기에서는,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현존재)의 존재(실존)가 현상학적·실존론적 분석의 주제가 되고,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규정인 ‘관심’의 의미가 ‘시간성’으로서 확정되는 데서 끝맺고 있다. 그는 거기에서 《존재와 시간》의 본래의 주제인 ‘존재’와 ‘시간’의 관계로 되돌아가 현존재의 시간성(時間性)을 실마리로 해서 존재의 의미를 시간에 의하여 밝히는 동시에 역사적·전통적인 존재개념을 역시 시간적인 지평(地平)에서 구명(究明)할 예정이었으나, 이 후반부는 미발표로 그쳤다. 즉, 그가 실존사상의 대표자로 간주된 것은, 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 부분 때문이며, 여기에서는 불안·무(無)·죽음·양심·결의·퇴락(頹落) 등 실존에 관계되는 여러 양태(樣態)가 매우 조직적·포괄적으로 논술되었다. 현존재의 존재의미가 과거·현재·미래의 삼상(三相)의 통일인 시간성으로서 제시된 것도, 인간이 시간적·역사적 존재라고 하는 ‘삶의 철학’ 이래의 사상을 실존의 시점(視點)에서 다시 포착한 것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의 현존재 분석의 수법은 정신분석에서 문예론(文藝論), 더 나아가 신학(神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1935년 전후를 경계로 해서 하이데거의 사색은 존재 그 자체를 직접 묻는 방향으로 향한다. 존재는 개개의 존재자와 동렬(同列)에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들을 저마다의 존재자로 존재하게 하는 특이한 시간·공간이며, 인간은 거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개존(開存:Eksistenz)’이다. 서양의 철학은 예로부터 존재를 존재자로서 파악하는 ‘형이상학’인 것이며, 거기서부터 하이데거의 역시 특이한 사관(史觀)이라 할 수 있는 존재사관이 탄생한다. 존재자를 인간의 객체로서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인간중심적인 ‘폐존(閉存:In-sistenz)’의 입장은 이 형이상학에, 즉 존재의 망각(忘却)에 유래한다. 현대에 필요한 한 가지 일은, 형이상학의 역사적 유래를 앎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 역사를 지배하는 존재 그 자체에 청종(聽從)하면서 그것을 지키고 간직하는 일이다. 하이데거의 이와 같은 존재의 사색이 《존재와 시간》의 목표였던 존재 그 자체의 해명과 연속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인간 본연의 자세에 대한 견해가 변화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며, 그런 의미에서는 후기(後期)의 하이데거를 이를테면 J.P.사르트르 등과 동렬의 실존주의자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 밖에 주요 저작으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29)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29) 《휴머니즘에 관하여:냕er die Humanismus》(47) 《숲 속의 길:Holzwege》(50) 《휠데를린의 시(詩)의 해명》(50) 《니체》(6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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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6.21∼1980.4.15)

 

  프랑스의 작가·사상가. 파리 출생. 2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외조부 C.슈바이처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나병 환자의 구제사업을 벌여 노벨평화상을 받은 A.슈바이처는 사르트르 어머니의 사촌이다.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다녔는데, 동급생 중에는 M.메를로 퐁티, E.무니에, R.아롱 등이 있었다.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소년시절부터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평생의 반려자가 된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해후도 그 때의 일이다.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후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루아브르의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다. 이 포구는 후일 《구토:La Naus럆》(1938)에서 묘사된 부비르라는 도시의 모델이라 한다. 1933년 베를린으로 1년간 유학, E.후설과 M.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저서 《자아의 극복:Transcendance de l’Ego》(34) 《상상력:L’Imagination》(36)은 당시 사르트르의 현상학에 대한 심취가 낳은 철학논문이다. 38년에는 소설 《구토》가 간행되었는데, 존재론적인 우연성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한 듯한 이 작품의 특수성은 세상의 주목을 끌어 신진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39년 9월 참전하였다가 이듬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41년 수용소를 탈출, 파리에 돌아와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장편소설 《자유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렊?45∼49)의 대부분과 《시튀아시옹:Situations》(47∼65)에 들어 있는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도 전시하의 산물이었으나, 특히 43년에 발표한 대작 철학논문 《존재와 무:L’?re et le N럂nt》(43)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전개한 존재론으로서 결정적인 작업이었고, 세계적으로 보아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중부터 전후에 걸친 그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웅대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노작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메를로 퐁티 등의 협력을 얻어 《레탕모데른:Les Temps Modernes》지(誌)를 창간하여 전후의 문학적 지도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르트르의 문학적 주장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46)에서 밝혀 두었는데, 그가 말하는 ‘문학자의 사회 참여’란 그 이전의 《구토》나 《존재와 무》에서 볼 수 있었던 니힐리즘의 그림자가 짙은 세계관과의 사이에 비약을 느끼게 하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는 역시 전쟁의 체험에 따른 사르트르 자신의 주체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전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사르트르의 발자취는 이른바 ‘사회참여’ 사상으로 일관해온 것이라 하겠으나, 특히 40년대부터 50년대에 걸쳐 그는 그 때까지의 개인주의적인 실존주의에 의한 사회참여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더욱 경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생 즈네:Saint Genet》(52)는 《도둑 일기》의 작가 즈네의 평전(評傳)으로 쓰면서도 개인적인 실존의 한계를 밝힘으로써 그러한 세계로부터의 탈피를 지향한 듯한 의미를 내포한 작품이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60)은 그의 사상적 발전을 보여 주는 노작인데,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동맥경화증에 빠져 있는 양상에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자기모순적인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오래 전부터 친교를 맺어 왔던 친구들이 계속하여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카뮈와도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사르트르는 전쟁 중에도 많은 극작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는데, 《파리:Les Mouches》(43) 《출구 없음:Huis-clos》(44) 《무덤 없는 사자:Mort san s럓ulture》(46) 《더럽혀진 손:Les Mains sales》(48) 《악마와 신:Le Diable et le Bon Dieu》(51) 《알토나의 유폐자들:Les S럔uestr럖 d’Altona》(59)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 때마다 사르트르의 사상을 현상화한 것으로 주목된다. 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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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머티즘(pragmatism)

 

  현대 미국의 대표적 철학. 관념이나 사상을 행위(그리스어로 pragma)와의 관련에서 파악하는 입장으로 실용주의(實用主義)라고 번역된다. 1870년대에 C.S.퍼스에 의해 주장되었고 19세기 말에 W.제임스에 의해 전세계에 퍼졌으며 20세기 전반(前半)에 와서 G.H.미드와 J.듀이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퍼스에 의하면 관념의 의미는 그 관념의 대상이 행위와 관련이 있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에 있다. 예컨대 ‘가소적(可塑的)’이라고 하는 관념의 의미는 그렇게 표현되는 것, 예를 들면 찰흙을 손가락으로 누르면 그것은 손가락이 누른 대로의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념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는 관념의 대상에 실험을 가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실험을 생각할 수 없는 관념은 무의미한 관념으로서 철학상의 논의에서 제외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은 관념의 의미를 밝히는 방법으로서 제기되었는데, 이 방법을 진리의 문제에 응용한 것이 제임스 프래그머티즘이다. 제임스에 의하면 관념의 의미는 그 대상이 초래하는 결과에 있으므로, 예컨대 신(神)이라고 하는 관념도 신을 믿음으로써 용기가 생긴다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의 관념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갖는 한도 내에서 신의 관념은 진리이며 더욱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떠한 관념이라도 그것이 유용(有用)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 관념은 진리라고 제임스는 말한다. 이 주장이 전세계에 퍼지면서 프래그머티즘은 유용한 것이야말로 모두 진리라는, 즉 유용설(有用說)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① 한정적(限定的) 진리를 인정함으로써 설령 사실에 어긋나는 신앙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믿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일이며, ② 그리고 가령 “지금 몇 시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오늘은 일요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을 때, 그 대답이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진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처럼, 진리가 진리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목적에 맞지 않으면 안되며, 인간생활이나 행위에서의 유용성을 떠나서는 진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F.C.S.실러나 이탈리아의 G.파비니는 이러한 제임스의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듀이는 관념의 의미는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있다고 하는 퍼스나 제임스의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관념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명확한 상황을 결과로서 낳게 하기 위한 실험적인 가설(假說)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관념은 상황을 바꾸기 위한 도구로 취급되었다. 이 밖에 제임스의 영향을 받고 자아와 사회와의 관련을 논하여 이론사회학(理論社會學)의 길을 연 미드, 논리학의 영역에서 퍼스와 듀이의 영향하에 있는 콰인 등을 프래그머티스트에 포함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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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듀이(John Dewey, 1859.10.20∼1952.6.1)

 

  미국의 철학자·교육학자. 버몬트주(州) 벌링턴 출생. 버몬트대학을 졸업하고, 존스흡킨스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미네소타·미시간·시카고·컬럼비아 각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컬럼비아대학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차차 W.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에 끌려,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실용주의(實用主義)’ 또는 ‘도구주의(道具主義)’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그의 《논리학적 이론의 연구》(1903) 《실험적 논리학 논문집》(16) 《사고의 방법》(33) 등에 의하면, 모든 사고(思考)는 혼탁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명확한 상황으로 개조(改造)하는 노력, 다시 말하면 ‘탐구(探求)’인 것이다. 관념이란 이를 위한 실험적인 가설(假說)이며 도구이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이것은 오렌지의 일종이 아닐까 하고 잘라 보고 맛봄으로써 오렌지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실험적인 가설로서의 관념은 상황을 개조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칼의 좋고 나쁨이 잘 드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듯이, 관념의 좋고 나쁨(진위)은 상황을 개조할 수 있는지의 유효성(有效性)에 의하여 판정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에서, 논리학은 모든 분야에서의 탐구 규범과 생차를 분명히 함으로서 앞으로의 탐구를 보다 더 유효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학―탐구의 이론》(1938)을 저술하였다. 또한 《경험으로서의 예술》(34)에 의하면, 경험은 인식(認識)의 한 형식일 뿐만 아니라, 반성이 가미되기 전에 느껴지며 살아 있는 것으로서 널리 해석된다. 인간생활은 혼탁하고 불확정(不確定)한 경험에서 통일적인 경험으로 이행하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전자에서 후자에 이를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와 충족감이 주어진다. 이러한 이행(移行)의 달성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적인 작용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교육에 대해서는 《학교와 사회》(1899) 《민주주의와 교육》(1916)에 의해서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교육이란 경험의 끊임없는 개조(改造)이며, 미숙한 경험을 지적인 기술과 습관을 갖춘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거나, 반대로 학생들의 자발성(自發性)에만 의존하면 불충분하므로 여러 가지 경험에 참여시킴으로써 창조력을 발휘시킬 수 있는 계획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학교는 현실사회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사회개조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이상사회로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92세라는 그의 생애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고, 미국이 최대강국으로 부상한 시대였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무너져가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제퍼슨과 링컨의 고전적인 이상을 새로이 개조하고, 서민의 경험을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에 의해 소화하여 보편적 교육학설을 창출하여 세계 사상계에 기여하였다. 1932년 ‘전국교육협회’ 명예회장, 39년 중국에서 제이드 훈장, 49년 칠레에서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터키·러시아 등을 방문하여 교육혁명을 지도하였다. 46년 87세에 42세인 로버타와 재혼, 52년에는 뉴욕주(州) 자유당 명예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그의 이상을 배반하고 힘과 금력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려 하였다. 여기에 그의 사상의 비극적인 성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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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1924년경 M.슐리크를 중심으로 결성된 빈학파(Wien 學派)의 실증주의 철학. 빈학파에 의해 제기된 일련의 철학적 명제들로 된 이 철학은 B.A.W.러셀의 논리적 원자론, L.비트겐슈타인의 일상언어철학, K.R.포퍼의 비판적 합리론, 그리고 기타 여러 사람의 과학철학과는 구별되면서도 또한 이들과 더불어 넓은 의미에서 분석철학(分析哲學)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 이 학파는 M.슐리크와 R.카르납을 중심적인 지도자로 하여 H.한, O.노이라트, P.프랑크, F.바이스만, H.파이글, K.멩거, K.괴델을 회원으로 하여 1922년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하다가 30년대에 들어서 죽는 사람도 생기고 나치의 탄압으로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38년에 해체되었다. 빈학파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학자·물리학자·경제학자 등 다양한 전공의 배경을 가진 회원들로 구성되어 과학이라는 것을 수학과 논리학, 그리고 이론물리학의 종합적인 관점에서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과학체계를 구성하기 위하여 이 학파는 그 체계의 언어관을 제안하였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명제(命題)의 의미는 그 명제를 검증(檢證:verification)하는 방법과 동일하다”라는 문장에 의하여 표현된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에 의해 채택된 것으로서 명제는 그 명제를 참이 되게 하는 경험들의 총체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실제적일 필요는 없고 다만 원칙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이것을 검증가능성원리(檢證可能性原理)라고 한다. 이 원리가 가정하는 것은 어떠한 명제도 만일 그 참인 조건과 거짓인 조건이 알려질 수 없을 때 어떠한 의미로서 파악해야 하는가의 표준의 제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원리에 의하면 검증할 수 없는 명제는 무의미하게 된다. 즉, “절대자는 시간 밖에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검증될 수 없으므로 무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A.콩트의 실증주의가 위 명제를 거짓이라고 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또한 윤리적 명제도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으므로 사실의 명제가 아니라 다만 우리의 자세나 태도를 표현하는 몸짓과 비슷한 행위의 명제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검증원리가 너무 엄밀하여 자연과학의 법칙명제까지도 제외하는 데 있다. “모든 황새는 빨간 다리를 가지고 있다”라는 생물학적 명제는 일반적이므로 미래의 경우까지 포함한다. 현재의 경우는 실제적으로 모두 검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미래의 경우는 본질상 원칙적으로도 검증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검증원리를 확인 가능성(確認可能性)으로 대치한다. 그러나 후자는 너무 느슨하여 제외하고자 하는 명제들까지도 지나쳐버리게 된다. 또한 이들은 경험을 개인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경험과 실재(實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여야 하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빈학파가 해체됨에 따라 그러한 문제들은 하나의 강력한 철학적 입장으로서 논리실증주의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는 그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분석철학으로 알려진 20세기의 경험주의(經驗主義) 발전에 기여하였다. 의미론(意味論)을 통한 논리와 세계의 관계, 수학과 논리명제 이해의 시도 등은 후세대의 작업에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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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

 

  현대 영미철학(英美哲學)의 주류. 20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되어 오늘날 미국 및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영어권, 그리고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에서 지배적이며, 그 영향권을 확대해가고 있다. 분석철학이라는 이름 속에는 다양한 경향이 포괄되어 있다. B.러셀에서 시작, L.비트겐슈타인, R.카르납과 그 후의 일부 언어학자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형식언어(形式言語)의 구축을 통한 의미분석, G.E.무어의 철학적 언어의 명료화에 대한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일상언어의 의미분석을 시도하는 G.라일, J.오스틴 등 일상언어학파(日常言語學派)의 활동, 검증 원리를 토대로 하여 철학의 과학화를 시도하는 M.슐리히, F.바이스만, H.파이글 등의 논리실증주의자들, 그리고 W.V.O.콰인, P.스트로슨 등 논리학과 언어학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진리에 관한 새로운 의미론적 접근을 시도하는, 최근 20여 년 간의 철학적 업적들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다양하고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들 철학적 활동은 모두가 논리적·언어적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데 공통점이 있고,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이들은 모두 분석철학이라고 불린다. 자연과학의 압도적인 업적은 철학자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자기반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R.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이 그 고유한 탐구 영역으로 삼아왔던 정신(精神)이 실험심리학의 발달로 자연과학화함으로써 철학은 정체위기에 부딪히게 되었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언어학이나 심리학 등의 분과학문들을 모두 경험적으로 포착되는 세계의 어느 한 부분을 탐구 대상으로 하는 l차학문이라고 한다면, 철학은 이들 l차학문들의 논리적·개념적 체계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2차학문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이 대두된다. 그런데 l 차학문들의 논리적·개념적 체계는 언어로 구성된 진술체계이다. 따라서 2차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지적 행위는 l차학문들의 진술체계, 즉 언어체계에 대한 분석을 그 핵심적인 내용으로 한다. 철학에서의 이러한 혁명을 최초로 강령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이다. 1921년에 발간된 《논리철학논고(論理哲學論考)》에서 그는 “철학의 모든 것은 언어비판(言語批判)이다”라고 선언하였으며, 이 선언이야말로 철학의 새로운 자기이해, 즉 분석철학의 가장 집약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언어는 그 다의성과 애매성으로 하여 언어가 가지는 참된 논리적 구조를 감추고 있으며, 따라서 언어의 외형만 가지고는 그 참된 의미를 알아낼 수 없으므로, 언어현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참된 논리적 구조를 드러내는 인위적 언어가 필요하다. 이러한 인공적으로 구성된 이상언어(ideal language)에서는 모든 애매성과 다의성이 배제되며, 언어적 표현의 표층적인 문법적 형식은 그것의 심층적인 논리적 구조와 일치한다. G.프레게나 B.러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한 많은 철학자들은 진리함수적 논리(眞理函數的論理:Truth-functional Logic)야말로 언어의 참된 심층구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일상언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공언어(人工言語)로 옮겨놓아 감추어진 논리적 구조를 명백히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철학자들의 이른바 환원적 분석(還元的分析:Reductive)의 핵심이다. 그러나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환원적 분석관에 대하여 여러 가지 문제점이 제기된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은 인공언어가 과연 일상언어의 골격을 만족스럽게 나타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일상언어의 기능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환원적 분석관을 정초했던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종전의 입장을 번복하면서 어떠한 완벽한 인공언어도 일상언어의 기능을 대신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라일, 오스틴 등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면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씌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테두리, 즉 삶의 양식(form of life)을 떠나서는 논의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지난 80여 년 간 분석철학은 서양철학의 발전에 실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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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4.26∼1951.4.29)

 

  영국의 철학자. 오스트리아 빈 출생. 1920년대에는 오스트리아에서 빈학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무렵의 사상은 논리적 원자론(原子論)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B.러셀과의 상호 영향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점차 인공언어(人工言語)에 의한 철학적 분석방법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39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상언어(日常言語) 분석에서 철학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생존 중에 출판된 저작은 21년에 간행된 《논리철학론(論理哲學論)》뿐이지만, 구두논의(口頭論議)로 영국의 분석 철학계(分析哲學界)에 끼친 영향이 크다. 최근에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1953) 등 많은 유고(遺稿)가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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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phenomenology)

 

  현상학이라는 용어는 철학사상(哲學史上) 많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여 왔다. 1764년 《신기관:Neues Organon》에서 현상학이란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독일의 철학자 J.H.람베르트는 본체(本體)의 본질을 연구하는 본체학과 구별하여 본체의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현상학이라고 하였다. 그 후 I.칸트는 물자체(物自體:본체)에 관한 학문과 구별되는 경험적 현상의 학문이라 하였고, G.W.F.헤겔은 감각적(感覺的)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절대지(絶對知)에 이르기까지의 의식의 발전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라 하여 이것을 특히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이라 불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E.후설을 중심으로 하여 잡지 《철학 및 현상학적 연구 연보(年報)》에 참가한 M.가이거, A.펜더, A.라이나흐, M.셸러, M.하이데거, O.베커 등 이른바 현상학파라고 불리는 학자들의 철학운동을 뜻한다. 이 운동은 당초 ‘사상(事象) 그 자체로’라는 표어와 같이 의식에 나타난 것(현상)을 사변적(思辨的) 구성을 떠나서 충실히 포착하고, 그 본질을 직관(直觀)에 의하여 파악, 기술한다는 공통적인 지향성(志向性)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기술적 현상학(記述的現象學)은 19세기 후반의 신(新)칸트학파와는 달리 그 주관적인 구성주의(構成主義)를 배제하여 ‘객관(客觀)으로의 전향(轉向)’을 의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사실에 한정시키는 것을 근본적 입장으로 하는 실증주의(實證主義)에도 반대된다. 현상학자들은 본질 파악의 방법에 의하여 논리학·윤리학·심리학·미학·사회학·법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후 주창자인 후설이 선험적(先驗的) 현상학의 입장을 취하여 학문의 기초를 자아(自我) 의식의 명증성(明證性)에 구하는 데카르트의 사고방식과 칸트적인 구성주의에 접근하게 됨으로써 학파로서의 공통적인 일치는 무너졌다.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이 순수의식(純粹意識)의 현상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같이 사물의 존재를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고,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를 괄호(括弧) 속에 넣은 다음[現象學的判斷中止], 남아 있는 순수의식의 본질을 기술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해 현상학자 사이에서도 비판이 일어났으나 의식의 본질을 지향성에서 구한 후설의 생각은 현대철학, 특히 실존철학(實存哲學)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의식의 지향성이란, 의식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임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식이 대상과 관계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대상이 의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상관관계(相關關係)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 상관관계의 분석은,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에서는 오로지 인식론적 시야(視野)에서 의식과 대상과의 관계에, 더구나 자아의 의식이라는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버렸으나, 그 후 인간학적·존재론적 시야에서 인간과 세계와의 본질적인 존재구조를 밝히는 유력한 방법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인간존재를 ‘세계 내 존재’로 파악하는 M.하이데거나 J.P.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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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설(Edmund Husserl, 1859.4.8∼1938.4.26)

 

  독일의 철학자. 체코 프로스테요프 모라비아 프로스니츠 출생. 라이프치히대학·베를린대학·빈대학에서 수학·철학을 공부하였다. F.브렌타노의 영향을 받은 후 할레대학 강사를 거쳐 1901년 괴팅겐대학 조교수, 1906년 동대학 교수, 16∼28년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처녀작 《산술의 철학:Philosophie der Arithmetik》(1891)에서는 수학적 인식의 기초를 잡을 것을 지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리주의적 경향을 취하고 있었으나, 뒤이은 《논리학 연구:Logische Untersuchungen》(2권, 1900∼01)에서는 순수논리학, 논리주의적 현상학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1907년 괴팅겐대학 강의에서, 처음으로 이 현상학적 환원(還元)에 언급하였으며, 현상학적 환원으로 도출(導出)된 ‘순수의식의 직관적인 본질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이념은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Philosophie als strenge Wissenshaft》(10∼11)을 거쳐 《순수 현상학 및 현상학적 철학을 위한 여러 고안:Ideen zu einer reinen Ph둵omenologie und ph둵omenologischen Philosophie》(13)에 이르러 대체적인 완성(完成)을 보았다. 그 후 《데카르트적 성찰:Cartesianische Meditationen》(31)에서는 상호 주관성의 문제가, 더 나아가 《유럽 여러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 :Die Krisis der europ둰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둵omenologie》(36)에서는 일체의 인식이 성립되는 궁극의 장(場)으로서의 ‘생세계(生世界:Lebenswelt)’의 문제가 논술되는 등, 후설의 사상은 그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어 나갔다. 그 양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간행되기 시작한 유고집(遺稿集)에 의하여 밝혀졌으며, 그와 더불어 근래에는 ‘후설 르네상스’의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현상학은 시대의 사상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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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hermeneutics)

 

  문헌은 물론 널리 인간정신의 소산(所産)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기술론. 해석학의 사상은 멀리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학(學)으로서의 체계화는 19세기에 와서 A.뵈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의 저작 《문헌제학(文獻諸學)의 총람(總覽) 및 방법론:Enzyklop둪ie und Methodologie der philologischen Wissenschaften》(1877)은 이 학문의 고전이 되었다. 그 동안 우화(寓話) 해석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고대의 해석학에서 중세에 조직화된 교부신학적 해석학을 거쳐, 성서나 고전의 올바른 해석을 중시하는 근대의 신학적·인문주의적 해석학이 성립되었고, 뵈크, F.슐레겔, F.슐라이어마허 등에 의하여 이해와 해석의 보편적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해석학은 그대로는 반드시 철학의 문제가 될 수 없음에도 슐라이어마허와 뵈크의 영향을 받은 W.딜타이에 의하여 역사적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기초로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E.후설의 현상학(現象學)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존재론을 구축한 M.하이데거는 그의 존재론의 방법을 ‘해석학적 현상학’이라 부르고, 해석학을 인간의 역사적 세계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딜타이의 방법에서 존재의 의미를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는 철학 자체의 방법으로 심화시켰다. ‘선(先) 이해’를 적극적으로 해석의 전제로 인정하는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순환’ 사상을 H.G.가다머는 그의 《진리와 방법》(1960)에서 ‘전통’의 적극적 이해에 적용하여 일반적인 해석학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그 후 K.O.아펠, P.리쾨르 등의 활동에 힘입은 해석학은 고전학·정신분석학·교육학·법학·신학 등 넓은 영역에 영향을 주는 동시에 분석철학(分析哲學)이나 이데올로기 비판과의 대결을 거쳐 역사와 실존 양면에 걸쳐 언어를 넓고 깊게 묻는 현대의 가장 새로운 철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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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Leninism)

 

  러시아혁명의 지도자인 V.I.레닌의 사상과 이론. 좁은 의미로는 20세기 초 레닌에 의하여 러시아에 적용된 마르크스주의를, 넓은 의미로는 제국주의시대의 보편적 프롤레타리아혁명이론을 가리킨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제국주의시대의 러시아 현실에 맞는 독창적인 혁명이론을 개발하였다. 그의 사상과 이론은 나로드니즘, 카우츠키의 경제주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멘셰비즘 등에 대한 치열한 이론투쟁을 거쳐 형성되었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서 자연성장성과 조합주의적 경제투쟁을 비판하고 의식성과 정치투쟁을 강조하면서 소수정예의 전위당(前衛黨) 건설을 주장하였다. 《두 가지 전술》(1905)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노동자·농민의 계급동맹을 실현함으로써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에서 불가지론을 비롯한 관념론 철학을 비판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제국주의론》(17)에서 초기의 자유경쟁적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하였음을 논증하고, 제국주의를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의 최고이자 최후의 단계로 규정하였다. 《국가와 혁명》(17)에서 폭력혁명을 통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폐지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레닌의 사상과 이론은 1917년의 2월혁명과 11월혁명을 통하여 러시아에서 현실로 입증되었다. 그 후 레닌이 죽자 스탈린·트로츠키·부하린·지노비예프 등이 권력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저마다 자신을 레닌의 정통계승자로 자처하면서 ‘레닌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결국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에 의하여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시대의 보편적인 프롤레타리아혁명이론’으로 격상되었다. 이 때부터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까지 레닌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동유럽과 중국의 사회주의국가들에 널리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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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Stalinism)

 

  I.V.스탈린의 집권기인 1920년대부터 30년간을 통하여 소련공산당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해 온 스탈린의 정치노선. V.I.레닌의 사후 스탈린은 그 후계자로서 l국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논한 레닌의 노선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l국사회주의의 건설을 모든 것에 우선시킴으로써 코민테른의 활동까지를 소련 l국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소련중심주의의 경향을 낳게 하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소련의 대(對)동유럽정책에도 현저하게 나타나서, 동유럽 제국(諸國)의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화가 아닌 소련형의 사회주의를 강제하였으며, 또 각국 공산당의 자주성을 압박하여 그 내부적 인사문제에까지 간섭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의 이탈(1948)을 자초하였다. 소련 국내에서는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농업의 집단화, 국가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지도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는 조국방위전쟁의 수행을 지도하여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인민에 의거하기보다는 당기구나 관료조직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당의 인민으로부터의 유리(遊離)를 야기하였다. 또한 당사(黨史)를 마음대로 개편하여, 이른바 개인숭배의 단서를 만들었으며, 고참 볼셰비키나 다수의 무고한 당원을 계급투쟁격화론에 근거하는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 아래 숙청함으로써 당내 민주주의와 소비에트법에 중대한 침범을 감행하였다. 이와 같이 스탈린주의라는 말은 스탈린시대의 어두운 면을 가리키는 경우에 많이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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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澤東思想(Maoism)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인 마오쩌둥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킨 독자적인 혁명사상. 1920년대부터 치열한 혁명투쟁과정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마오쩌둥사상은 징강산[井岡山] 유격투쟁, 장시[江西] 소비에트 임시정부 수립, 대장정(大長征), 국공합작과 항일전,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 내용에는 마오쩌둥이 전개한 유격전술, 대중조직방법, 토지개혁정책,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신민주주의론, 사상개조운동, 실천론과 모순론, 영구혁명론, 사회제국주의론을 포함하고 있다. 요컨대 마오쩌둥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반(半)봉건적이고 반식민지적인 후진국 중국사회에 접목시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를 실현하려는 데서 전술상의 요청으로 나온 혁명이론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오쩌둥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구별된다. ①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의 계급동맹을 중심으로 민족자본가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농촌을 혁명근거지로 장기간의 유격전을 전개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② 인간의 인식은 생산활동·계급투쟁·과학실험 등의 실천과정에서 형성되며, 실천을 통하여 이론은 그 정확성이 검증되고 확대된다고 하여 실천을 중시하였다. ③ 모든 사물의 발전과정에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을 확대시켜 모순을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으로 구별하고, 사회주의사회에서의 인민 내부의 모순을 비적대적 모순으로 규정하여 그 해결방법으로 비판·설득·사상개조·교육 등을 제시하였다. ④ 자본주의사회가 전복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수립된 후에도 계급·계급적 모순·계급투쟁, 사회주의노선과 자본주의노선 간의 투쟁, 자본주의 복구의 위험성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모순은 혁명을 계속함으로써만이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사상이라는 용어는 45년 중국공산당 제7전대회에서 당규약에 삽입되었다가, 그 후 56년 스탈린격하운동이 시작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중국공산당 제8전대회 때 당규약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66년 5월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사상은 당규약뿐만 아니라 헌법서문에까지 삽입되었다. 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과 함께 4인방이 숙청되면서 마오쩌둥사상의 권위는 격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사상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중국공산당의 정신적 기반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55년 이후 마오쩌둥의 정책과 문화대혁명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이 사상의 가치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4대 현대화’정책의 추진과 함께 마오쩌둥사상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의 독특한 모순론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비롯한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의 신민주주의론은 제3세계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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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마르크스주의(Neo-Marxism)

 

  1920년대 이탈리아의 A.그람시, 헝가리의 G.루카치 등의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의 별파(別派). 특히 30년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불리는 M.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한 T.아도르노, E.프롬, 폴락, H.마르쿠제 등에 의하여 오늘날 계승된 K.마르크스와 S.프로이트의 이론적 접촉을 주장하는 학파 등의 신좌익(new left)사상을 네오마르크시즘이라고 하며, 신좌익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22∼1937.4.27)

 

  이탈리아공산당 창설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토리노대학 재학하던 중에 이탈리아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21년에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립하여 코민테른에서 지도하게 되었다. 26년에는 파시스트 당국에 체포되어 죽기 직전까지 감옥생활을 계속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해석과 B.크로체의 관념철학에 반대하여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통일을 주장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약점이었던 상부구조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시민사회에서 사회혁명이 일어나는 조건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성(헤게모니)의 논리와 그 실천적 기구(당)에 대해서 참신한 이론을 전개하였다.

 

루카치(Lukccs Gyrgy, 1885.4.13∼1971.6.4)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문학사가(文學史家). 부다페스트 출생. 부다페스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베를린대학에서 G.지멜에게,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M.베버에게 사사했다. 그 후에 사상적 전환기를 겪어, 1918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A.히틀러 등장 후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과학학사원 철학연구소에서 미학·문학사를 연구했다. 44년 귀국 후 《젊은 헤겔》(1948) 《이성(理性)의 파괴》(52)를 발간했다. 56년의 동란에는 페트위단(團)의 지도자로서 반소파(反蘇派)의 입장을 취하고, 한때는 나지 이무레 정권의 문화장관이 되었다가, 루마니아로 추방되었다. 57년 사면되어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그후는 미학(美學) 연구에 전념했다. 유고로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Zur ontologie des gesellschaftlichen Seins》과 《윤리학:Ethik》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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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

 

  M.호르크하이머가 지도하기 시작한 후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참가한 호르크하이머, T.W.아도르노, H.마르쿠제, W.벤야민, E.프롬, F.L.노이만 등을 비롯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재건된 동 연구소에서 배출된 J.하버마스, A.슈미트 등 제2세대의 연구자를 포함한 총칭(總稱). 그들은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반대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든 마르크스의 동기(動機)를 계승, 그것을 S.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미국 사회학의 방법을 결합시켜 현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비판이론을 전개하였다. 나치스로부터 탈출,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기관지 《사회연구》를 통하여 파시즘에 대한 사상적 저항을 관철하였고, 《권위와 가족》(1938) 《권위주의적 퍼서낼리티》(50) 등의 뛰어난 공동연구를 이룩한 외에, 서유럽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省察), 예컨대 《계몽의 변증법(辨證法)》(48)을 시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관리사회(管理社會)의 문화라든가 지배적인 실증주의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고, 60년대의 국제적인 학생소요 때에는 마르쿠제를 비롯하여 신좌익적(新左翼的)인 현대사회비판론(現代社會批判論)으로 일약 각광을 받았다. 아도르노의 《부정적 변증법》(66),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41), 노이만의 《비히모스》(42),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64), 하버마스의 《이론과 실천》(63) 《인식과 관심》(68) 등은 이들 연구성과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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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5.6∼1939.9.23)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로 정신분석의 창시자. 모라비아(당시는 오스트리아, 현재 체코)의 프라이베르크 출생. 빈대학 의학부 졸업 후 얼마 동안 뇌의 해부학적 연구, 코카인의 마취작용 연구 등에 종사하였다. 1885년 파리의 사르베토리에르 정신병원에서 샤르코의 지도 아래 히스테리환자를 관찰하였고, 89년 여름에는 낭시(프랑스)의 베르넴과 레보 밑에서 최면술을 보게 되어, 인간의 마음에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 즉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J.브로이어는 히스테리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잊혀져 가는 마음의 상처(심적 외상)를 상기시키면 히스테리가 치유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그 치유의 방법을 연구, 93년 카타르시스(Katharsis:淨化)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치유법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최면술 대신 자유연상법을 사용하여 히스테리를 치료하고, 96년 이 치료법에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후에 그가 수립한 심리학의 체계까지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900년 이후 그는 꿈·착각·해학과 같은 정상심리에도 연구를 확대하여 심층심리학을 확립하였고, 또 1905년에는 소아성욕론(小兒性慾論)을 수립하였다. 그의 학설은 처음에는 무시되었으나, 1902년경부터 점차 공명하는 사람들(슈테켈, 아들러, 융, 브로일러)이 나타났으며, 1908년에는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가 개최되어 잡지 《정신병리학·정신분석학연구연보》(1908∼14) 《국제정신분석학잡지》(1913∼) 등이 간행되었다. 또 1909년 클라크대학 20주년 기념식에 초청되어 강연한 일은 정신분석을 미국에 보급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사변적 경향을 강화하여 이드(id)·자아·상위자아(上位自我)와 같은 생각과, 생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라는 설을 내세웠다. 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나치스에 쫓겨 런던으로 망명하고, 이듬해 암으로 죽었다. 20세기의 사상가로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으며, 심리학·정신의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학·사회심리학·문화인류학·교육학·범죄학·문예비평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저서에는 《히스테리의 연구》(1895) 《꿈의 해석》(1900) 《일상생활의 정신병리》(1904) 《성(性) 이론에 관한 세 가지 논문》(1905) 《토템과 터부》(13) 《정신분석입문》(17) 《쾌감원칙의 피안(彼岸)》(20) 《자아와 이드》(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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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

 

독일의 철학자·사회학자.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공부한 후, 1925년 I.칸트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얻었다. 30년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철학교수가 되어 대학 부속 사회문제연구소장을 지냈으며, E.프롬, H.마르쿠제 등과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루었다. 나치스 정권 수립 후에는 스위스로 이주했다가 미국으로 망명,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 되돌아왔다. 미국 체류 중 T.W.아도르노와 함께 한 인종적 편견의 연구는, 인종적 편견을 의식의 심층에까지 추구한 점에서 사회심리학사상 하나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연구의 성과는 5권의 《편견연구(偏見硏究)》에 나타나 있다. 사상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자이며, 학문적으로는 헤겔철학의 소양과 정신분석학의 지식을 결합시킨, 현대의 특색 있는 사회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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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9.11∼1969.8.6)

 

  독일의 철학자·미학자·사회학자. 프랑크푸르트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에는 빈에서 음악에 종사하였으나, 1931년 모교의 철학강사로 취임하였다. 34년 나치스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49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다시 독일로 귀국, 벤야민 및 홀크하이머와 함께 사회조사연구소(社會調査硏究所)를 개설하였다. 50년에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파시즘 연구를 주제로 한 《권위주의적 인간(權威主義的人間)》을 간행하는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체계성을 거부하고, 각 이데올로기 영역에 내포된 정신의 변질적 경향을 날카롭게 분석해 내는 데 특색이 있으며, 근대문명에 대하여 독자적인 비판을 제시하였다. 또 그는 현대음악의 성격에 대해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주요저서로는 위에 기술한 것 이외에 《현대음악의 철학》(1949) 《Soziologica》(62) 《부정적 변증법(否定的辨證法)》(6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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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7.19∼1979.7.29)

 

  독일 출신의 미국의 철학자·사회사상가. 베를린 출생.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가로서 T.W.아도르노, M.호르크하이머와 병칭(竝稱)된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베를린대학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 1922년 철학학위를 받았다. 그 후에도 E.후설과 M.하이데거 밑에서 철학을 계속 연구하였으며, 30년 호르크하이머가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사회연구소’를 설립하자 아도르노와 E.프롬 등과 함께 참가, 사회철학자·사상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33년 나치스정권의 대두로 스위스의 제네바로 망명, 34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적(的)인 문화·사상구조의 분석방법을 바탕으로 나치스가 대두하게 된 사회심리적 기초인 권위주의(權威主義)를 연구한 《권위와 가족》(프롬과 공저, 1936), 《사적 유물론(史的唯物論)의 기초를 위한 신자료(新資料)》(32) 등 초기 마르크스 연구의 논문, 또 헤겔철학을 ‘부정의 철학’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 근대 합리주의의 연장선상에 파시즘의 좌표를 잡은 《이성(理性)과 혁명》(41) 등의 주요저서를 내놓았다. 41∼50년까지 미국 국무성에 근무하였고, 52년부터는 컬럼비아대학에서 러시아 연구에 종사하였다. 54년 매사추세츠주(州) 브랜다이스대학 교수가 되었고, 65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 철학교수가 되었다. 50년대 이후의 업적으로는 특히 고도산업사회에 있어 인간의 사상과 행동이 체제(體制) 안에 완전히 내재화(內在化)하여 변혁력을 상실하였음을 예리하게 지적한 《일차원적 인간》(64)을 꼽을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최대의 걸작이다. 그 밖의 저서로는 《에로스적 문명》(55)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58) 등이 있다. 그의 ‘절대거부(絶對拒否)’의 정신에 바탕을 둔 문화·사회이론은 많은 학생과 젊은이들의 공감을 얻었으며, 신좌익운동(新左翼運動)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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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롬(Erich Fromm, 1900.3.23∼80.3.18)

 

  미국의 신프로이트학파의 정신분석학자·사회심리학자.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출생.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대학·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사회학·심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에서 근무하고, 1929∼32년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강사로 있다가 나치스의 대두로 33년 미국으로 망명, 귀화하였다. 이 후 컬럼비아대학·베닌튼대학·멕시코 국립대학·예일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S.프로이트와 K.마르크스의 영향하에서 출발한 프롬은, 파시즘의 선풍에 대중이 말려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체험을 통해 ‘근대인에게서의 자유의 의미’를 추구하는 데에 그의 사색활동의 전부를 바쳤다. 현대에 와서 일반화되어 가는 신경증상이나 정신적 불안은 개인적인 정신분석 요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프랑크푸르트학파에 프로이트 이론을 도입하여 사회경제적 조건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그 나름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이 3자의 역학에 의해 사회나 문화의 변동을 분석하는 방법론을 제기하였는데, 그것이 즉 ‘인간주의적 정신분석’이다. 저서에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인간의 자유》(47) 《건전한 사회》(55) 《선(禪)과 정신분석》(60) 《인간의 승리를 찾아서》(61) 《의혹과 행동》(62) 《혁명적 인간》(6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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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structuralisme, 構造主義)

 

  사회과학상의 한 유파(流派). 1960년대에 들어와서 K.마르크스, M.하이데거, S.프로이트 등의 견해에 대립하여 프랑스에서 새로이 형성된 사상적 조류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실존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명확한 형태를 갖춘 사상적 경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류학자·사회학자인 크로도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M.푸코, 리시안 세바크, 경제학자·정치가 L.알투세르, 정신분석학자 J.라칸 등이 구조주의를 주창한 주요 멤버인데, 그들 사이에서도 통일된 의견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공통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나 실존주의 등 이제까지의 사상적·사회과학적 업적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현대과학의 종합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특징으로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 점에 있고,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를 전개하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에 대해서, 그리고 의미론(意味論) 등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현재 마르크스주의의 한계성에 주요 공격이 가해지며, 아울러 실존주의·인간주의에 대해서 현대적인 통렬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사조(思潮)로서 앞으로도 여러 문제를 제기하게 될 것이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Claude, 1908.11.28∼1991)

 

  프랑스의 인류학자. 브뤼셀 출생. 1927~32년 파리대학에서 철학과 법률을 공부한 뒤 중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재직하였다. 35년 상파울루대학 사회학 교수로서 브라질에 초빙되고부터 원주민과 접촉, 민족학자로서 실제조사에 종사하였다. 41~45년 뉴욕시 사회연구학교 객원교수, 50~74년 파리대학 민족학 연구소장을 지냈으며, 59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되었다. 영국·미국 민족학자의 영향을 받고, 프랑스에서는 M.모스가 남긴 업적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문화체계를 이루는 요소들의 구조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문화체계를 분석하는 구조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가 내놓은 새로운 방법은 미국에서 알게 된 야콥슨의 언어학설에서 시사받은 바 크다. 일반적으로 소쉬르 이후의 근대 언어학에서는 음운이나 어휘, 신택스의 시스템으로서의 랑그(코드)와, 이 시스템에 입각하여 언어 공동체 성원간에 교환되는 파롤(메시지)을 구별하여 언어의 구조를 분석하는데, 레비스트로스는 이와 같은 생각을 적용하여, 집단간의 혼인 시스템이나 신화의 구조를 해명하여 문화연구에 새로운 면을 열었다. 46년 대작 《친족의 기본구조》를 완성, 48년 문학박사가 되고, 그 저작은 인류학계뿐만이 아니라 일반 사상계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요저서로 《슬픈열대:Tristes tropiques》(1955) 《구조인류학:Anthropologie structurale》(5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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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1960년에 일어난 문화운동이면서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는 한 시대의 이념. 이 운동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여성운동·흑인민권운동·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전위예술, 그리고 해체(Deconstruction) 혹은 후기구조주의 사상으로 시작되었으며, 70년대 중반 점검과 반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대라고 하면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니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거친 후 포스트모던 시대는 J.데리다, M.푸코, J.라캉, J.리오타르에 이르러 시작된다.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해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해왔는지 드러낸다. 데리다는 어떻게 말하기가 글쓰기를 억압했고, 이성이 감성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는지 이분법을 해체시켜 보여주었다. 푸코는 지식이 권력에 저항해왔다는 계몽주의 이후 발전논리의 허상을 보여주고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말하였다. 둘다 인간에 내재된 본능으로 권력은 위에서의 억압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생겨나는 생산이어서 이성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합리적 절대자아에 반기를 들고 프로이트를 귀환시켜 주체를 해체한다.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되어 있고 그 차이 때문에 이성에는 환상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 역시 숭엄(the Sublime)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합리주의의 도그마를 해체한다. 따라서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도그마에 대한 반기였다. 문화예술의 경우는 시기구분이 좀더 세분화된다.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Modernism)이었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실주의는 대상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믿음으로 미술에서는 원근법을 중시하고 어떻게 하면 실물처럼 그릴까 고심했다. 문학에서는 저자가 객관적인 실재를 그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스토리가 인물을 조정하여 원근법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런 사실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 베르그송의 시간의 철학·실존주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 객관진리,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면서 도전받는다.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도 미술에서는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입체파 등 구상보다 추상으로 옮아가고 문학에서는 저자의 서술 대신 인물의 서술인 독백(‘의식의 흐름’이라고도 함)형식이 나온다. 모더니즘은 혁신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에 대한 회의로 개성 대신에 신화와 전통 등 보편성을 중시했고 피카소, 프루스트, 포크너, 조이스 등 거장을 낳았으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대중과 유리되었다. 개인의 음성을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상황이 반발의 측면이 강하지만 예술에서는 연속의 측면도 함께 지닌다. 비록 이성과 보편성에 의지했지만 이미 재현에 대한 회의가 모더니즘(현대성)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각 영역에서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술에서는 추상 대신에 대중성을 띄고 다시 구상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팝아트처럼 같은 대상을 여러 번 찍어 ‘다르게 반복하기’를 선보이는 경우, 모나리자 등 친숙하고 고유한 원본을 패러디하여 ‘다양한 재현들’을 선보이는 경우, 예술가의 권한을 축소한 미니멀 아트 등, 단 하나의 절대재현을 거부한다. 문학에서는 인물의 독백이 사라지고 다시 저자가 등장하는데 더이상 19세기 사실주의와 같은 절대재현을 못 한다. 작가가 자신의 서술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자의식적 서술(메타 픽션), 현실과 허구의 경계와해, 인물과 독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열린 소설, 보도가 그대로 허구가 되는 뉴저널리즘, 작가의 권한을 최소화한 미니멀리즘 기법 등이 쓰인다. 영화와 연극 역시 사실주의의 패러디로서 환상적 기법, 자의식적 기법을 사용한다. 무용에서는 토슈즈를 신었던 19세기 발레에서 맨발의 자유로움과 기법을 중시한 모더니즘, 그리고 다시 운동화를 신는 포스트모던 댄스로 대중성과 개성이 중시된다. 서사(narrative), 기호학 등 비평이론의 경계와해는 공연예술에서 탈장르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던 건축은 기능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밋밋한 건축에서 장식과 열린 공간을 중시하고 분산적이며 옛것에 현대를 접합시킨 패러디가 유행한다. 개성·자율성·다양성·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산업사회는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이제 컴퓨터·서비스산업 등 정보화시대에 이르면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광고와 패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추겨진다. 빗나간 소비사회는 때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탈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등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정치현상은 한국사회와도 무관하지 않다. 미술·건축·무용·연극에서는 실험과 저항이 맞물려왔고 80년대 말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과 문민정부의 출현은 한국 문학과 예술에도 포스트모던 바람을 일게 하였다. 근대나 현대는 서유럽에 비하여 짧고 급속히 이루어졌기에 시민의식과 기술산업사회가 균형을 이룰 수 없었다. 서유럽과 한국사회를 똑같이 볼 수 없는 여러 상황에 의해 한국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영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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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Jacques Derrida, 1930.7.15∼)

 

  프랑스의 철학자. 알제리 엘비아르 출생. 파리의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고등사범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부터 이 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쳤다. E.후설의 현상학(現象學)을 배운 후, 구조주의의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였다. 언어의 기호체계(記號體系)가 자의적인 것이라는 인식에서 언어 위에 조립된 논리학을 재검토하였다. 특히 서기언어(書記言語) 에크리튀르가 수행하는 역할을 중시하였다. 한편, 시차성(示差性)이라고 하는 개념을 도입하고, 실체(實體)와 직결된다고 생각되어온 개념들이 시차적 특징에 의해서만 뜻을 지니는 것이며, 차이를 재확인하고, 그 행위에 의한 지연과 우회를 거친 뒤에 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저서에 《근원 저편에:De la grammatologie》(1967) 《에크리튀르와 시차성:L’긟riture et la diff럕ence》(6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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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Michel Paul Foucault, 1926.10.15∼1984.6.25)

 

  프랑스의 철학자. 구조주의의 대표자로 파리대학 반센 분교 철학교수를 거쳐 1970년 이래 콜레지 드 프랑스 교수를 지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그 이론과 임상(臨床)을 연구하는 한편, 정신의학의 역사를 연구 《광기(狂氣)와 비이성(非理性)―고전시대에서의 광기의 역사》(1961)와 《임상의학의 탄생》(63) 등을 저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각 시대의 앎[知]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가 있다는 사상에 도달하였다. 거기에 바탕을 두고 《언어와 사물》(66)과 《앎[知]의 고고학(考古學)》(69)에서 무의식적인 심적 구조(心的構造)와 사회구조, 그리고 언어구조가 일체를 결정하며,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든가, 자아라고 하는 관념은 허망이라고 하는 반인간주의적(反人間主義的) 사상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구조주의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 《광기와 문화》(62) 등의 저서가 있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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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Jacques Lacan, 1901. 4. 13∼1981. 9. 9)

 

  프랑스의 철학자·정신분석학자. 파리 출생. 고등사범학교에서 처음에는 철학을 배웠으나 후에 의학·정신병리학을 배웠다. 1932년 학위를 취득한 후 평생을 정신과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지냈다. 66년 논집 《에크리:Ecrits》의 간행으로 갑자기 유명해졌으며 M.푸코 등과 함께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라캉은 말년까지 무려 4백만 명이 넘는 환자를 상담하고,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하여 ‘프로이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것이다. 말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고 하여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언어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것은 환자를 치료하는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되었다. 그의 사후 E.루디네스코가 쓴 《자크 라캉:삶의 개요, 철학체계의 역사》(파야르 간행)가 방대한 분량(700면)으로 출간되었다. 저자는 라캉의 학문적인 업적은 인정하나 그의 거칠고 차가운 성격에다 여성편력이 심했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이론에 집착하여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하였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그를 ‘프랑스 인텔리겐치아의 마지막 거장’이라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