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Lent : 四旬節) " 자료

2011. 3. 14. 00:21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사순절(Lent : 四旬節) "

1. 어 원

사순절을 뜻하는 Lent는 앵글로 색슨 족의 언어의 '봄'을 의미하는 Lang에서 유래했으며 독일어 Lenz와 같은 명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했다. 이 절기는 부활절을 위한 신앙의 성장과 참회를 통한 영적 준비의 시기이며 교회력 중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때이다. 이 절기는 AD 325년 니케아 총회(council of Nicea) 부터 시작되었는데 특별한 참회일인 속죄일(Ash Wednesday)에서 시작되어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의 제기(劑期) 즉 부활절 전 6주간으로 거룩한 금요일의 슬픔과 비극 가운데 끝난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는 40일이 아닌 기간 동안 사순절의 의미를 갖는 절기가 지켜지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 동로마 교회에서는 부활절 준비 기간으로 7주를 지키되 토요일은 제외하고 일요일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성 주일'만을 포함해 36일을 이 기간으로 지켰었다. 서로마 교회도 6주간을 지키되 주일을 제외한 36일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정했다. 이런 관습은 니케아 회의 후에도 계속되어 얼마 동안은 오늘날과 같은 40일간의 절기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후 7세기 무렵 서로마 교회가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의 첫 주일까지의 4일을 포함하면서부터 오늘날과 동일한 40일간의 사순절을 철저히 지키게 되었다.

2. 시 기

올해의 사순절의 시작은 2월 13일 수요일부터이다. 사순절은 언제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즉 '속죄일' '성회 수요일'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는 재(Ash)를 슬픔과 죄에 대한 회개를 상징한다. 전년도 종려 주일에 사용한 종려 가지를 태워서 재로 만들어 두었다가 이 재(Ash)를 수요일에 신자들의 이마에 감람나무의 재나 숯덩이로 십자가를 그었다. 이 날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부활절까지 참회가 계속된다. 이 기간 동안 금식하며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으며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다. 40년 간의 광야 교회의 생활, 예수님의 공생애를 위한 광야의 40일간의 금식, 시내산의 모세의 40일 금식과 십계명, 무덤 속에서 40시간을 계신 예수님, 부활에서 승천까지 주님의 사역기간, 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금식으로 준비했다.

3. 유 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준비하면서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40일 동안 금식하였으며 사순절 기간 하루 한 끼, 또는 저녁 식사만 허락하되 육식은 물론 생선 정도의 육식까지도 금하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새 생명의 탄생을 연상케 하는 달걀이나 우유 등의 음식까지도 규제할 정도로 매우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9세기 이후 금식 규정이 완화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와서는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으나 의식적인 금식보다는 성령의 열매인 절제와 경건의 훈련을 통한 내적인 자기 정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접근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맛보며 주님을 본받는데 부적합한 집착들을 제거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성도라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외형적인 형식만을 닮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이면에 숨겨진 내면적인 의미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한 성도들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이 이 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이들을 추천한 보증인들과 함께 두 주간의 준비 기간을 두고 금식과 기도로 죄의 회개와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이때 부활절에 있을 세례식을 준비하는 세례 예비자들은 물론 이미 성도로 영접된 사람들 모두 금식과 기도 생활에 힘썼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행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4. 관 습

1. 금식 기도
요즘 와서는 우리 개신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마치 로마 카톨릭의 의식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는데 물론 역사적으로 동방교회는 7주 동안 금식하게 하였으며 서방교회는 6주 동안 금식하게 하여 의식화되어 내면의 깊은 뜻이 퇴색한 것은 인정하나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 나라의 백성 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작금 은혜를 사모하는 교회들이 신앙의 대 선배들이신 모세(출 24:18; 신 9:9; 10:10) 엘리야(왕상 19:8), 그리고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마 4:2; 눅 4:1-2)의 40일 금식에 대한 믿음의 자세로 이 기간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그의 고난의 의미를 살피며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 가며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성도들의 신앙적인 자세를 가다듬고 절제와 단식을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죄악을 발견하여 자백하고 사함 받는 기회로 삼아 은혜가 더욱 넘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구제와 자선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한편 어떤 곳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3일 정도의 '사육제'(canival)가 거행되었었는데 이 사육제는 원래 '육이여'(carni), '안녕'(val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교적인 영향을 받은 이 축제의 기간 동안에는 금식하는 사순절과는 대조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었으며, 가장 행렬 등의 인간의 쾌락 본능을 자극하는 행사들이 행해졌으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오히려 더 확산되어 수개월 동안 행해지는 유럽 국가들도 있다. 그러나 1517년 종교 개혁 이후 종교 개혁자들은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절차들을 폐지했는데, 이때 사순절에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받아들여 공동기도문 중 사순절 기도문의 주제를 회개로 삼는 등, 계속해서 이 절기를 기념하고 있다.

4. 사순절 행사
그러면 교회들은 사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첫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릴 수 있도록 성결하게 몸과 마음을 준비를 해야 한다. 주일을 범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회개와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으로 죄 자백에 주력하여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 가는 순례의 기간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 죽는 것을 배우는 기간이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특별한 기간을 정해서 금식함으로서 자신을 절제하고,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한다. 오락을 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금식과 절제를 통하여 모아진 금액을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다.
셋째, 원래 사순절이 부활절 세례를 받기 위하여 자원자를 준비시키는 기간인 것을 감안하여 이 기간 동안 성경공부에 빠지지 말고 세례와 학습자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전도를 함으로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친구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고 이웃을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는 일도 바람직하다.

1. 새벽기도회
2. 금식 기도회
3. 주일 시리즈 예배
사순절 절기 안에는 6번의 주일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각 주일에는 단계와 특색이 있다.
첫째 주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받으셨음을 생각하며 지낸다(마 4:1-10).
둘째 주일은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4:11).
셋째 주일은 빛과 어둠의 대립 즉, 빛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둠의 세력인 사단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말씀(요 1:1-18)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
넷째 주일은 사순절 중간에 끼어 있어 '사순절 중절' 또는 '휴양 주일'(休養週日)이라고 불린다. 이 주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고난과 사단과의 싸움 등을 다루는 사순절의 다른 주일과는 달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것으로 말씀을 삼는다(마 14:13-21).
다섯째 주일은 고난 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주일의 명칭은 주님이 자신에게 임할 고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때는 가룟 유다에게 팔리어 고난받으셨던 주님에 대해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20:18,19).
여섯째 주일, 즉 종려 주일(Palm Sunday)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군중들에 관계된 말씀을 본다(마 21:1-11).

 

 


너는 나를 좇으라/마8:18-22
2001-11-21 10:30:45   read : 159

비엔나 의과대학에 이러한 재미있 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유명한 외과 의사이면서 교수가 되는 분이 의과대학을 지망 해서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을 앞에 놓고 첫 번째 강의를 하게 됐습니 다. 첫 번 강의에 들어 온 이 학생 들은 저으기 긴장한 가운데 교수님 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교 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은 이 제부터 책임 있는 훌륭한 외과 의사 가 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 다.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되려면 적 어도 중요한 두 가지 자질이 갖추어 져야 됩니다."

모두가 심각한 얼굴 로 교수를 쳐다보며 경청했습니다.

"첫째는 역겨운 냄새와 더러운 분비 물과 썩은 고름 같은 것에 익숙해져 야 합니다."

참 끔찍하지만은 외과 의사는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학생 들 전부가 인정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예민한 관찰력이 있어야 합 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교 수는 더러운, 냄새 나는, 고름이 담 긴 그릇에 자기 손가락을 푹 담갔다 가 꺼내서 입으로 핥았습니다. 그 리고 나와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앞 으로 나오라고. 역겹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은 여기다가 운명을 걸었기 에 그러해야 될 거라고 생각해서 학 생들은 하나씩하나씩 나와서 그 더 러운 곳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핥게 됩니다. 일이 다 끝난 다음에 교수 님께서 평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첫째 자질에 대해서는 아주 우수하 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 째 자질에 대해서는 형편이 없습니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교수 님은 말하기를

"나는 이 더러운 곳 에 넣었던 손가락은 말고 다른 손가 락을 빤 겁니다. 당신들은 그걸 못 보았습니다."

여러분 제자란 무엇 입니까? 제자란 전적으로 선생님께 헌신하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깊 은 관찰력이 함께 가야됩니다. 물 리적으로 행할 수는 있습니다, 형식 적으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같이 한 평생 따라다닐 수도 있습니다, 같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제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승의 뜻, 스승의 마음, 스승의 그 깊은 의 지를 잘 읽어야 됩니다. 그의 하시 는 일을 깊이 관찰해야 됩니다. 그 리고 저 분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를 알고 그 뜻, 그 깊은 의미에 동 참해야지요. 이에 함께 할 때 비로 소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줄렁줄렁 따라다닌다고 제자입니까? 그의 뜻 을 알고 깨달아야지요. 그래서 예 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첫째 별명이 제자입니다. 복음서에 보는 대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다녔습니 다. 그러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 님을 깊이 이해한 사람이 없고 심지 어는 열두제자마저도 그 당시에는 이 복음서에서 보는 대로 그렇게 깊 이 이해하지 못하고 따랐다는데 문 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째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한 별명이 성도 라고 하는 말입니다. 거룩한 무리, 이것은 선택받은 자의 무리를 의미 하는데 대단히 신학적인 깊은 의미 가 있습니다 만은 일단 예수를 믿 고, 이 속된 세상에서 떠나서 그리 스도를 왕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모 시면서 구별된, 선택된 공동체의 여 기에 일원이 될 때 우리는 성도라고 하는 이름을 합니다. 지극히 교회 론적 의미가 있는 그런 별명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 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크리스치아누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중요한 말 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리스도만 따르고,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그리 스도를 위하여 죽기로 맹세한 사람 들입니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람들, 이래서 초대교회 에서는

"새 술에 취한 자다"

그랬습 니다. 새 술에 취했다. 이 초 이성 적이에요.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가 어려울 정도로 전적으로 주님께 위탁한 생을 사는 그런 사람들을 크 리스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의 영에 이끌린 사람들입니다. 그 래서 로마서 8장 9절에 사도바울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 니다."

이건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 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어 서, 그 영이 내 영을 지배하고, 내 이성을 지배하고, 내 몸을 지배하고, 내 감성을 지배하고, 그리고 그리스 도의 생명력에 이끌리어 사는 그 사 람, 그 사람을 크리스챤, 그리스도인 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그리스도인 에 몇 가지 유형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오 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마 음을 읽으셨던 거 같아요. 딱 보자 마자 이 사람은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을 다 알고 읽 으시고 그리고 적당하게, 그에 합당 하게 말씀을 하셨던 것같이 느껴집 니다. 마태복음 9장 9절에 보면요, 세관에 앉은 세리 마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이 마태복음의 저 자입니다. 이 사람은 세관에 앉은 세리입니다. 어떤 인연이든 간에 상관없습니다. 지금 현재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받고 있습니다. 그 세관 앞을 지나가시면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딱 보고, 보는 순간 눈과 눈 이 마주쳤겠지요. 눈과 눈이 마주 치는 순간 그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가 지금 얼마나 고민하고 있으며, 그가 얼마나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 리고 있는가, 그가 얼마나 신앙적으 로 주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딱 한마디

"너는 나를 쫓으 라."

그 한마디에

"네"

하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그날 당장 자기 집을 열어서 많은 세리들을 데려다 놓고,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초대하게 됩니다. 그 후 로 한 평생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어떻습니까? 긴 얘기가 필요합니 까? 예수님은 그 깊은 마음을 읽었 어요. 그리고

"나를 좇으라"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조금 얘기 가 다릅니다. 서기관이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주여 어디로 가시 든지 나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자원 자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 수님은 여기서 보면 간접적으로 거 절합니다. 직접적인 거절은 아닙니 다. 이제 선택은 이 사람에게 달렸 습니다. 이 무슨 말씀인고 하니, 예 수님께서 아마 그랬던 거 같아요. 이 사람이 부잣집 아들에다가 고생 없이 자랐고, 뭐 편안하게 자랐고, 도대체가 고생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요. 다만 예수님을 따라가면 출세할 거 같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뭔가 화려한 미래가 있을 것같이 생 각해서 지금 청운의 꿈을 꾸고 예수 를 따르겠다고 하시는 것으로 그렇 게 예수님은 저의 마음을 읽으신 것 같아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공중 의 새도 거처가 있고 또 그렇지만은 여우도 굴이 있다. 그러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게 뭡니까? 나는 가난하다. 나를 따라오면 고 생할 것이다. 나는 집이 없는 사람 이다. 오늘 밤 당장 어디에서 자야 할 지 그것도 정함이 없는 그런 사 람이다. 자 이 말끝에 이 서기관이

"주여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디 로 가시든지 따를 겁니다"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만은 고 다음 에는 말이 없어요. 아마 그저 그렇 게 생각하고 그저 돌아갔던 것 같습 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헌신은 하겠다고 하지만은 예수가 누구신지, 그가 어 디로 가고 있는지 관찰하지 못했습 니다. 몸으로서는 따르겠다고 하나 마음으로서는 전혀 따를 준비가 없 습니다. 플러머(Plummer)라고 하 는 유명한 분은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남 의 마구간을 빌려서 세상에 태어났 고, 남의 무덤을 빌려서 생을 끝냈 다."

참 그렇습니다. 세상에 용납 할 곳이 없어서 마구간에 태어납니 다. 예수님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남의 마구간이에요. 예수님 장례 되었지만은 장례 때, 그 무덤이 아 리마데 요셉의 무덤입니다. 자기 무덤이 아닙니다. 잠시 빌린 거지 만은 남의 무덤에 장례 되었었습니 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에게 이 적이 있고, 인기가 있고, 명예가 있 고, 화려한 많은 사람들의 성원이 있는 것을 알고 이 사람은 예수를 따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여러분, 이제 중요한 문 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히 예 수님에겐 이적이 있었습니다. 병을 고쳤고, 바다를 고요하게 했고,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만은 이적의 사 람이나 그는 가난했습니다. 자 생 각해 보세요. 문둥병을 고쳤다, 중 풍병 환자를 일으켰다, 이런 거 하 나만 가지고도 요새 비즈니스마인드 로 생각하면 그 돈벌이 되는 거 아 니에요. 이 많은 환자들이, 아니 조 금씩만 갖다가 사례를 해도 예수님 머리 둘 곳이 없다고까지 하실 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히 기적의 사람이었어요. 확실하게 이적의 사람이었지 만은 그는 가난 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신비가 있는 것이에 요. 예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 말씀하셨고, 지혜로 율법을 해석했고, 이 지혜에 대해서는 예수 님을 박해하는 원수들까지도 깜짝깜 짝 놀랐어요. 예수는 확실히 지혜 로운 분이고 지혜를 말씀하는 분이 요.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배척받았 습니다. 결국은 예수는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지혜에 대하여 감탄 하면서도 예수를 핍박했습니다. 그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도 예수는 배 척 당하는 그런 생을 살게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권능입니 다.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 거는 확실히 인정을 했습니다. 그 러나 그는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거는 크나큰 수수께끼입니다. 그 래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도 하는 말이

"뛰어 내리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

하지 않습니까. 죽은지 나 흘이나 된 나사로를 며칠 전에 살리 신 당신이 왜 말없이 죽어 가느냐는 거지요. 빌라도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 사람을 보라"

이렇 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 는 분이다. 내가 알기로는 굉장한 능력을 가진 분인데 왜 말 한마디 없이, 한마디 반항 없이 이대로 십 자가에 죽어 가느냐는 거죠. 우리 는 능력이 없어서 당하고, 할 수 없 어서 고난을 당합니다 만은 예수님 의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능 력도 있고 지혜도 있어요. 그러나 십자가를 졌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능력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신비로운 것, 이 서 기관은 알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누구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 다. 이것을 알아야지요. 오늘도 마 찬가지입니다. 자 이 서기관은 모 름지기 예수님의 그 화려한 인기만 보고, 그 지혜만 듣고 감탄하면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이것은 오래갈 수가 없고요, 또 하나는 예수를 따르는데 대한 대 가를 지불할 생각을 못했어요. 값 싼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요새도 보면 예수를 믿으면서 싸구려 은혜 를 구하는 분들이 많아요. 가지고 있는 것에 또 은혜, 또 정당화, 또 합리화, 그리고 더 큰 물질적, 세상 적 축복만을 기다리는 이런 답답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걸 분명히 알아야 합 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버 려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로 영접하기 위해선 끊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위해서, 이 귀중한 일을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 를 져야됩니다. 마땅한 값을 지불 해야 되는데, 이 값을 지불함이 없 이, 이 각오가 없이 주를 따르겠다 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란 말이예 요. 또 하나는 여기 있습니다. 그 래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 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 를 쫓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너무 쉽게, 빨리 결정한 것 같아요. 이건 감정적입니다. 깊은 생각도, 깊은 결단도 없이 마치 돌 짝밭에 뿌려진 씨와 같이 급하게 나 서 급하게 자라지만 이런 결심은 곧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예수님은 알 고 계시기에 이 사람, 제자 되겠다 는 것을 사양하셨습니다. 즉흥적이 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은 아니요. 또 다시 그 다음에 말씀이 이어집니다. 또 한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합니다. 따르겠 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조금은 달라 요. 따르기는 따르겠다고 하는데

"부모님을 장례하고 나서 따르겠습 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 연기 신청해 달라는 거죠.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니라고,

"죽은 자는 죽 은 자로 장례케하고 너는 나를 쫓으 라"

말씀하십니다. 아주 박절한 말 씀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엄청 난 진리가 있습니다. Priority가 문 제입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무 엇이 더 중요한 가를 알아야합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여러 가지 일 중에 선과 악 이 있습니다. 물론 선을 따라야겠 죠. 같은 선 중에도 무엇이 더 우 선적인 선이냐, 그것이 문제죠. 절 대 우선,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 기 위해서 우리는 부득불 그 차선, 그 다음 일은 버려야 된다는 것이 죠. 절대 우선! 예수님을 따른다 는 것은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는 것 이에요. 또 하나, 그것이 근본적이 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미룬다고 하 는 것은 그것을 버리는 거나 마찬가 지입니다. 아프리카에 한 청년이 하도 똑똑해서 영국에서 생각할 때, 저 사람을 키워 가지고 아프리카를 앞으로 개발하는데 크게 쓰여질 수 인물이다 하고 생각을 해서 이 사람 에게 장학금을 줬습니다. 장학금 주는 통지를 보내고 속히 와서 옥스 퍼드대학에 와서 공부하시라고 했더 니 이 사람이 Scholarship에 대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가겠습니다. 공 부하러 가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하 고는 하는 말이 거기에 주가 달렸어 요.

"부모님 세상 떠난 다음에 가 겠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다 시 또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부모 님 나이가 지금 얼마입니까?"

그랬 더니

"지금 40입니다"그러더래요. 이 사람 갈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저는 신문에 그런 게 난 걸 보 고, 그 신문에서는 그것을 마치 무 슨 한국적인, 참 지극한 효자인 것 처럼 써 놓은 것을 보고 제 마음이 별로 좋질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 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산에 가서 3년동안 묘살이를 했다는 거 죠. 그래서, 그래 어쩌란 말이요? 이래서 말씀하는 거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케하고 너는 나를 쫓 으라. 그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아 서 못 다한 소원을 내가 나가서 이 룰 생각을 해야지, 그래 묘지 앞에 3년동안 엎드려 있다고 효자더냐고 요.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밖에 못 하니까. 효도가 그것입니까? 저도 절박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 아 버님이 내 앞에 목전에서 총살을 당 했습니다. 북한에서. 멀리서 난 누 군지 모르고 봤는데 마음이 좀 이상 해요. 그러고 총 쏴버리고 그냥 가 버렸어요. 그 다음에 제가 막 달려 갔어요. 좀 어두워질 때 달려가 봤 더니 제 아버님이 거기 쓰러져 있어 요. 다른 분 두 분과 함께. 거기 엎드려서 울고 있습니다마는 저의 아버님이 막 살아서 말씀하는 것 같 아요.

"이놈아 살아야 효자다"그러 더라고요.

"여기 엎드려 있다가 너도 죽을 거냐? 살아야 효자다"

그랬어요. 벌떡 일어나서 도망을 했어요. 그리고 한달 후에야 집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거기 엎드려 있어야 효자입니까? 아버지 시체를 보고 도망가? 이 불 효자식!, 그겁니까? 어떻게 하는 게 효자입니까? 효가 뭡니까? 그걸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또한 자기 나약성을 알아야됩니다. 이렇 게 한번 미루어 놓으면은 미룬 일은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당장 결단을 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자기 일 자기를 다 알잖아요. 일을 미루다 보면은 못하게 되거든요. 우스운 얘기입니다 마는 언젠가 손 녀 아이가 어렸을 때 저희 집에 와 서 놀다가, 아 부모님하고 같이 와 서 놀다가 저녁에 부모님들이

"가 자"

그러니까

"나 오늘 할머니하고 잘래."

떨어졌어요. 그리고 부모님 은 집으로 갔지요. 애가 한잠 자고 나서 깨더니만 앙앙 우는데 엄마 찾 고 우는데 정신없어요. 할 수 없이 제가 차에 태워서 데려다줬어요. 얼마 후에 집에 와서 놀더니 또

"할 머니하고 자고 잘래"

그랬어요.

"애야 내가 너를 믿을 수 있냐?"

했 더니 이 녀석 하는 말이

"할아버지, 나도 나를 못 믿어요"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을 믿습니까? 그래 내일 하겠다고? 얼마 후에 하겠다 고? 그것은 믿을 수 있느냐고? 지금 당장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개 보니까 그렇드만요. 돈 벌어서 헌금하겠다는 사람, 헌금 하는 사람 못 봤어요. 얼마가 됐든 지 지금 딱 잘라서 내려면 내고, 말 려면 말지, 제가 40년 동안 속았는 데 안되더라고요. 밤낮 벌어 가지 고 뭘 한다지, 하긴 뭘해? 쓸데없 는 소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을 해야지요. 너는 나를 쫓으라. 직선적으로. 지금 금방. 이런 얘기 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합니 다.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예 수와 함께 영광을 누립니다. 예수 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부활합 니다. 근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예수와 함께 고난받는 것은 내가 할 일이요, 예수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사입 니다. 그쪽은 생각하지 마세요. 예 수와 함께 고난 당하고 보다 더 많 이 고난 당하고 보다 더 철저하게 고난 당하는 것. 이것만 내가 할 일이요.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 세요. 그런고로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지금 쫓으라. 기도하십 시다.


 


예수의 결심/눅9:51-55
2001-11-21 10:31:14   read : 127

'Thinking'이라고 하는, 즉 '사색'이라고 하는 책의 저자인 한나 아렌트 여사는 그가 만나서 상담했던 많은 범죄자들과의 그런 대화와 그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본래적인 악함의 원인이 있기보다는 애매함과 우유 부단함에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사람은 본래 다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 착함과 진실함과 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선함을 좇지 못하고 악한 욕망, 악한 어떤 요구 앞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거나 또 우유 부단함으로 해서 고만 악에 끌려서 악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자유를 빼앗기게 되고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올시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러한 교훈입니다.

코카콜라 창업자인 아사 D. 캔들러라고 하는 사람은 본래 알코올중독자였습니다. 알코올, 이 술에 중독이 되어서 술을 안 먹으면 살 수 없고 술을 먹지 아니하면 정신이 들지 않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수용소에 끌려가서 오랫동안 여러 차례 고생을 했건만은 술에 대한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갔습니다만은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들려오는 강한 마음속에 있는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거절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속에서 가지는 이 악한 욕구, 이 욕망을 거절해야만 내가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그는 깊이 깨닫고 집에 돌아가 아내의 손목을 잡고 자기가 깨달은 바를 고백하고 같이 울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합니다. 자유인으로 시작합니다. 술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 이제는 자유인으로 그 양심도 그 영혼도 모든 악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바치면서 코카콜라라고 하는 큰 기업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김정일 교수께서는 그의 책 중에서 말합니다. 거절해야 할 일에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부러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막연한 적개심을 가지고 산다.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거절해야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가 놓고는 자기를 망쳐버렸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그 무언가에 대해서 그는 언제나 적개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자기가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자기가 거절하지 못한데 대한 확실한 책임을 지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를 이렇게 속박한 그 무엇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산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스트레스라는 것이에요. 제가 만들어 놓고 제가 빠져놓고는 딴소리하는 거예요. 가끔 보니까 그렇습디다. 제가 연예하고, 제가 죽느니 사느니 하고, 그래서 결혼해 놓고는 그 다음에 "너 때문에 나 망쳤다" 그러더라구요. 꼭 이 꼴이라는 거지요. 인생 파멸을 사는 사람마다 꼭 같은 모양으로 살아갑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인생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싱싱하게 보이는 거예요. 하고싶은 일.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사랑하며 사는 것이죠. 자유인으로 사는 거죠. 그 사람이 가장 싱싱한 것이에요.

자 그런데, 사람을 이렇게 애매하게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왜 초라하게 되는 겁니까? 이에 대하여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저서에서 말합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충고하는 말입니다. 사람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노이즈네스(Noisiness), 소음이라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날 때부터 시작해서 뭘 이렇게 많이 들어요. 라디오, 텔레비전, 뭐 컴퓨터…… 뭐 이 소문 저 소문, 심지어는 이 신문까지도. 요새 신문에 부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정보 많은 소리를 듣는데, 이것이 사람을 그만 미치게 만들어요. 자기 성찰, 침묵과 고요를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지나가는 말로 말씀드립니다만은 주일날 하루는 신문보지 마세요. 웬만하면 전화하지도 말고 전화 받지도 마세요. 좀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좀 귀가 조용했으면 좋겠어요. 계속 소음에 시달리니까 이 그만 내적 존재가 미쳐버리고 마는 거예요.

또 하나는 비즈니스(Business) 올시다. 너무 바쁘게 산다는 것이죠. 아주 빨리 되어야만 효율성이 있다는 철학 속에서 서두르고 있습니다. 시테크를 논하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소용없어요. 얼마나 빠르냐에 따라서 속도감과 생산이 정비례한다 해서 우리는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서두르다 보니까 생각하고 달리는 게 아니라 달리면서 생각하니, 그게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가 있어야지요.

또 하나는 크라우드(Crowd)올시다. 군중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에 너무 신경을 많이 씁니다. 우리는 물건을 팔고 삽니다. 그럴 때에 내가 만든 물건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해 줄까? 다른 사람들의 기호, 선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이러다 보니까 어느 사이에 사람도 못되게 되어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나 여기에 그만 끌려가기 시작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판단 기준에 나를 떠맡긴지 오래됐어요. 그대로 인생관이 표류하게 되었어요. 자기 상실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입니다. 현대인에 대한 진단이올시다.

오늘 분문에 나타난 말씀은 아주 짧은 내용입니다만은 굉장히 중요한, 성경 한 중심부에 있는 핵심적인 메세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이 사실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만큼이나 그 가진 뜻이 깊고 귀중한 핵심적 복음의 말씀이올시다. 여러분, 십자가 사건, 이걸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자가, 예수께서 달리신 이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걸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있기도 하고 사망이 있기도 하고 기독교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문선명 집단, 이제는 자기 자체가 우리는 기독교가 아니라고 선포했으니까 뭐 그대로 얼마든지 비판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도 성경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를 안 믿습니다. 왜? 예수의 십자가를 저들은 무능의 소치로 봅니다. 실수한 것으로 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그만 음모에 걸려서 그만 예수는 끌려가서 죽었다 이거예요.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는데 그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일시적 엑시던트(Accident), 돌발사건이 아니란 말이에요. 성경은 아주 전체성경을 통해서 말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언, 그리고 성취. 성경이 말씀하는데는 우연사란 없어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경륜 속에서 오래 전에 예언하셨어요. 예언하시고 성취하고, 예언하시고 성취되고. 우연은 없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필연적 사건이 있을 뿐이에요. 십자가는 오래 전에 예언하신 사건이 여기서 성취된 것이다.

또 하나는 무지가 아니라는 거죠. 예수님이 몰라서 그만 어느 사이에 그 음모에 말려들어서 십자가를 졌느냐? 뜻도 모르게 애매하게 억울하게 죽었느냐?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또 하나는 무능의 소치냐, 피할 수 없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겁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체포되는 시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를 보내서 저 원수들을 다 진멸할 수 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일이 이루리라" 예언하신 말씀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여러분, 무능해서 십자가를 진 겁니까? 성경은 누누이 증거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죽은지 나흘이 되어서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옵니다. 그 능력을 가진 예수, 그 많은 능력을 가지신 예수가 조용하게 십자가에 죽어요. 그래 능력이 없어서 죽은 겁니까?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되요. 성경이 강하게 증거 하는 것은 바로 그거예요. 누가 병났고, 장님이 눈을 떴고 문둥이가 깨끗하고, 그리 중요한 얘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십자가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 같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말없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거예요. 자, 십자가 사건은 그런고로 선택적이요, 자발적이요, 결단적이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에 라스트 스테이지, 마지막 단계를 설명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병도 고치고 말씀도 하시고 돌아다니면서 역사하시고 이랬지만은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저 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출발합니다. 정면충돌하는 겁니다. 정면 대결하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이걸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 오늘 성경 말씀은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되어있는데요, '프로소폰 에스테리센'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프로소폰'이라는 말이 '얼굴'이라는 말이고, '에스테리센', '굳다'는 것이에요. 원문대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굳게 했어요. 그 마음의 결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쪽을 향해서 마음을 굳게 하시고. 자 이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충분히 알만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 앞에 간사한 무리들이 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결정을 다 해놓고 올라오기만 해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 아시면서 선택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리로 갑니다.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했어요.

또 하나는 '승천할 기약이 차가매' 엄청난 의미가 있는 말씀이올시다. 자 보세요. 예수님의 생애가 있고 십자가가 있고 부활이 있고 승천이 있는 겁니다. 이 세단계를 거쳐가는 겁니다. 십자가, 부활, 그리고 승천입니다. 그런데 승천할 기약이 차가매, 이제 십자가의 길로 갑니다. 영광의 아침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길로 갑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 부활을 통해서 승천이올시다. 저 앞을 바라보면서 오늘 골고다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 예수님의 본래성이 그렇고 주님의 뜻이 그렇고 하나님의 경륜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더욱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언을 기다렸습니다. 이에 주님은 예언을 자기 자신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셨습니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제가 북한에 오고 간다고 해서 가끔 물어봐요. "목사님 북한 문제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전문가일수는 없고, 북한을 늘 생각하고, 그저 기도하고 하는 그런 사람이지요." "그럼 한가지 물어봅시다. 목사님, 언제 통일이 될까요?" 꼭 그걸 물어봐요. 내가 무슨 점치는 사람인줄 아는가봐요. "언제 통일될까요?" 저는 대답합니다.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우리 하기 탓입니다. 누군가가 해주길 바라지 마세요. 당신의 마음속에 통일이 있냐고 묻고싶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누구를 미워하고 있어요. 누가 망하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이러고 되겠어요? 당신하기 탓이요. 천지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지고 뭘 바라고 있는 겁니까? 나라가 달라지고요. 당신하기 탓이요. 나 하나가 오늘 이 엄청난 일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 있어요. 예수님은 예언을 기다리고 기다렸어요. 그러나 기다리기만 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나 자신의 생애 속에서 예언을 성취시키시는 거예요. Here, Now, to me. 지금 여기서 이 현재적 사건 속에서 내가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이죠. 예언을 현실화했습니다. 놀라운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이후로는 마음이 변할 것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너무 오래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끝도 없습니다. 헬라어의 유명한 말이 있어요. '에포케'라는 말이 있어요. 판단 중지. 그건 꼭 필요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저럴까 이럴까… 끝도 없는 생각 그만하세요, 이제는.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 생각하고 앉았노? 이제는 결정을 해야지.

일본사람들의 격언에 재미있는 말이 있어요. "만날까 말까 한 사람을 만나지 말고, 먹을까 말까한 음식은 먹지를 말고,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를 마라. 죽을까 말까 할 땐, 죽어라" 그랬어요. 이거 아주 귀한 말씀이에요. 중요한 결정이 있어야 해요. "굳게 결심하시고"

그 다음에 오늘 본문에 보면 사마리아로 가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니까 유대 사람을 미워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못마땅해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어요. 아, 예수님이 유대나라 왕이 되려고 가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십자가 지러 가는데. 여기에 오해가 있어요. 그러나 나무랄 것 없어요. 오해 하던 말던, 무슨 비난이 있던 나는 내 길을 어엿이 가는 것이죠.

노트르담 대학교수 몰튼 캘시라고 하는 분이 How Can We Love one Another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주의 시대를 사는 인간의 가치관을 몇 가지로 분석을 했습니다. 첫째, 파워게임을 하며 사는 사람들, 권력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생각해서 합법적으로 때로는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며 파워게임에 온 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여러분, 돈버는 것도 권력 때문에, 권력만이 나의 생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생각해서 죽기살기로 권력을 찾아 헤매지만은 여러분, 권력 찾아간 사람들 끝에 보세요. 다 패자로 끝납니다. 승자는 없습니다. 오직 패자예요.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어느 국회의원이 세상을 떠나서 장례식을 하러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손님이 두 사람 밖에 없어요. 우리 교인들 간 사람 몇 사람 외에는 조문객이 둘밖에 없더라고요. 정치하는 사람, 무상하더만요. 그렇습니다. 이건 공연히 으시대는 거지 마지막이 다 비참합니다. 또, 두 번째 사람은 쾌락주의요. 유희적 쾌락을 즐겨요. 이기적으로 나에게는 쾌락만이 남는다. 마지막에는 허무하고 비참해집니다.

또 하나의 사람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만사를 비판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살지만은 결국엔 절망하게 됩니다. 남는 것이 뭐겠습니까? 믿거나 말거나 알거나 모르거나 이것은 진리입니다. 오직 사랑을 위해 사는 것, 그것만이 바로 사는 길이에요. 전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모 대학병원에 간병원으로 사는 사람이 있어요. 자녀도 있어요. 그러나 이제 다 크고 할 일이 없어요. 내가 뭘 할까 하다가 죽어 가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그저 간병원으로 돈 몇 푼 받고 수고를 했어요. 처음에는 돈 받으려고 갔죠. 그러나 거기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보다 보니까 여기에 취미가 붙었어요.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웬 노인이 와서 일년동안을 있는데 간병원으로 정성을 다했어요. 물론 돈 생각 없어요. 자녀들도 다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안돌아봐요. '내가 돌아보지.' 정성을 다했어요. 마지막 세상 떠날 때, 엄청난 돈을 이 사람에게 유산으로 줘 버렸어요. 결혼신고 해버렸어요. 그리고 유산을 주었어요. 그러나 이 돈을 받고도 다시 간병원을 합니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어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자유인이요,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그는 수억 원의 유산을 받아놓고도 여전히 간병원으로 들어갑니다. 삶이 어디있는 겁니까? 얼마나 더 살면 좋을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까?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에도 노예가 되지 마세요. 무엇에 끌릴 것 없어요. 결단이 있는 자는 직선거리를 갑니다. 전후좌우 돌아볼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내가 사도가 되었노라. 내게 주신 경륜,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내가 있음을 알았어요. 나의 존재를 알았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예수는 요한복음 18장 11절에서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십자가요, 이제 전후좌우를 볼 필요가 없어요. 가야바가 어떻든, 뭐 가롯유다가 배반을 하든 말든, 빌라도가 뭐라고 하든, 로마 군인이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거예요. 십자가예요. 이렇게 믿고, 이렇게 선택하고, 이렇게 결정하고 사는 사람 흔들림이 없어요. 자유합니다.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늘 행복하게 삽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무엇에 끌려가면서 노예 생활하는 것처럼 비참한 게 없어요. 굳게 결심하고 선택하고 그리고 남은 생을 사는 거예요. 이러한 자유함이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끌려가며 불평하며 원망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원하오니 이제 은총을 더하사 주께서 저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굳게 결심하시고 줄기차게 골고다로 향했던 것처럼 하나님 우리에게도 확실한 은혜를 주시사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온전히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또 그를 위하여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결단이 있고 선택이 있고 자유가 있는 그런 생을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묵한 웅변/마27:11-14
2001-11-21 10:31:46   read : 66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로잡히신 후 많은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과 천대를 당하셨으며, 특히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는 심한 천대와 매맞음, 그리고 아주 부당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많은 거짓 증인들은 목청 높여 고소하였고 군중들은 소리 높여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한 마디의 반항이나 대꾸 없이 묵묵하실 뿐이었습니다(마 26 : 63, 27-12). 그후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때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다만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바라보실 뿐이었습니다(눅 22:16). 주님께서는 큰 능력이 있었지만 그의 침묵은 아주 굉장한 뜻과 '위대한 웅변'이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으로 저들을 대하셨습니다. 아주 영적이고 신비로운 침묵으로 말입니다.

1. 메시야의 침묵
주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신 것은 아주 권위 있는 웅변이며 절대자의 무서운 침묵이었습니다. 천한 조롱, 악의에 찬 저주, 거짓뿐인 참소에 대하여 일일이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변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신 것입니다. 즉 천만금보다 귀한 보배가 가득 차 있는 귀중한 입을 열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본래 독수리는 파리를 잡지 않으며 학은 좁쌀을 먹지 않는 법입니다. 강아지가 짖는다고 해서 달리던 기차가 멎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입으로 호산나 호산나를 연발했는데 그후 5일 만에 "십자가에 죽여라."고 외치는 저들을 상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멋진 고백과 간증의 말을 다 늘어놓으며 주님을 사랑한다던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거듭 부정하고 나섰는데 거기에 무슨 책망과 권면이 필요합니까? 그래서 묵묵히 저를 바라보실 뿐이었습니다(눅 22 : 61). 이것이 고상하고 권위 있는 왕적 침묵인 것입니다. 역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자들의 수가 참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에게 속한 무리들이 활기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묵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하나님의 종들과 그리스도인들도 이 침묵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말없이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큰일을 치를 사람, 대인(大人)은 잔말이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입을 열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는 심판의 검이 번쩍일 것이며 모든 것은 그 앞에 잠잠해질 것입니다.

2. 뜻이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의 이런 침묵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처신이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고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53 : 7, 10의 예언의 성취였으며, 주께서 친히 가르치신 기도에도 이것을 염원하셨습니다(마 6 : 10). 그는 마지막 겟세마네동산 기도 때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세 번이나 피눈물 나는 애절한 기도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마 26:39, 42, 43).
본래 기다림이란 믿기 때문에 가지는 심정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실 줄'로 믿고 그 뜻을 기다린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서 인류 구속사업을 완수하게 되었고(요 19 : 30),마귀와 지옥 권세를 멸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빌라도의 그릇된 판결, 유대인들의 완악하고 못된 고발, 로마 정부의 폭력 행위 등이 있었으나 그 결과로 빌라도는 몰락하고 로마는 망하고 유대인은 2천년간 망국과 수난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너무 조급하게 눈앞의 것만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신앙이 부족하더라도 예수의 이름, 그의 교회, 하나님의 사람들을 높이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대로 복될 것입니다. 최근 사회 조사에서 나타난 10가지 한국병이 있는데(十大韓國病), 즉 한탕주의, 왜곡된 교육열, 퇴폐향락, 파벌주의, 무질서, 과소비, 조급증, 특권의식, 자기 파시, 음주문화들로 나타났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육욕적 결과에만 집착한 일들로 정신적 여유나 교양 같은 것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비극이 생깁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죽으심, 그리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지만 삼일만에 새 생명과 부활의 역사를 만드셨고 새 기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3. 너희를 사랑하노라.
본래 진리는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나 희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일하면서 원망하거나 투덜대거나 대가를 요구한다면 진정한 사랑도 희생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아의 사랑과 희생을 보이신 것입니다. 옛날 제사장들은 제사를 집계할 때 아무 말 없이 엄숙히 진행하였고 희생양들도 소리 없이 순복하였습니다.(사 53 : 1-12)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그의 침묵하시는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말이 모자라거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일일이 변명하시고 정연한 이론으로 진술하셨다면 당연히 무죄가 되었을 것이며, 얼마든지 이론과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킬 수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류의 죄를 위한 십자가도, 구원의 대속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한 재판을 받으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묵묵하셨습니다. 인류의 잘못이나 죄 된 것을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래 큰사람은 남의 장점만 보고 단점을 자 보지 않습니다. 또 보았다 하더라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라나 졸장부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검사가 아닌 착한 변호사처럼 우리를 옹호하고 계십니다. 이 사회는 너무나 소란하며 남의 결점을 잡아 내기경쟁이나 하는 것 같습니다. 매스컴도 정치인들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는 사랑이 없고 진실과 미더움이 없으며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그 침묵은 뜨거운 사랑의 웅변이었습니다.

아주 중대하고 심각하며 엄숙한 일에는 말이 없습니다. 또한 귀중하고 뜨거운 사랑에도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인을 살리신 때도 주님은 묵묵하셨습니다(요 8 : 3-11). 모든 사람은 거기에 압도되었고 여인은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위대한 웅변, 정말 신적이고 영적인 신비로운 침묵에서 장엄한 음성을 들읍시다. 메시야의 사랑의 목소리, 인류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위대하고 따뜻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읍시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시려는 독생자 예수의 모습과 그 희생을 발견합시다. 비록 우리가 좀 괴롭고 억울해도 묵묵하게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말없이 승리의 열매를 거둡시다.



변화산의 사건적 의미/막9:2-8
2001-11-21 10:32:21   read : 81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은 그의 공생애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신의 가장 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결단이었고, 인류에 대한 최대의 사랑 표현을 위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구원 사역을 위한 새로운 출발이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고난을 최후로 결단하는 시기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복음서의 위치로 볼 때 새로운 의미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획기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변화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없는 높은 산에서 변화하셨다는 데도 큰 의미를 나타냅니다. 오늘의 말씀은 사순절의 시작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1. 상황적 설명
첫째로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옷이 희여졌습니다. 세상 사람이 빨아도 그렇게 희여질 수 없을 정도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했음을 의미하며, 이 상황이 하나님의 준비임을 시사하는 것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이렇게 변화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시위적으로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항상 실제적인 일을 위한 내용을 중요시했습니다. 둘째로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 사람이 대화를 하셨다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이 때가 어떤 상황이었는가 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때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갖고 오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연약함이 발동할런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셋째로 그 자리에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내는 제자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상황입니다. 어디에나 인간의 욕망과 사단의 유혹이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여기가 좋사오니'란 현실주의적 욕망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요구는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2. 결단의 배경
이제 예수님은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요, 엘리야는 예언자의 대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말씀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데 그의 사명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 모세와 엘리야는 적절한 인물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파송된 사람들로서 예수님을 돕기 위하여 왔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모르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나타났듯이 인간의 연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모세와 엘리야가 돕기 위하여 온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가야 할 험난한 길을 바라보면서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으로 올라갔던 험준한 길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상상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최대의 결단이었습니다. 이렇게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생자의 능력이었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협력을 볼 수 있습니다.
3. 출발을 위한 능력
주님은 제자들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씀도 없이 산을 내려가셨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이제까지 있었던 상황과 결단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출발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대장정에 오릅니다. 지금까지 가셨던 예루살렘행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갖고 출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렬입니다.
그의 가시는 모습은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돌아오는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갔으나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실 것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데서 예수님은 혼자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고민 속에서 앞을 향해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인간의 연약함을 배제한 가운데 진행됩니다. 제자들의 동행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여행을 더디게 하고 시험을 주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과 동행한 것은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돕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위대한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변화산에서 출발을 알리신 순간부터입니다. 변화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장면이 계시적이고 환상적이라는 데서만 아니라 그 내면에 있는 영적인 의미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 동아의 사역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의 사역을 그야말로 그의 최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인류역사의 최대 기적이 실행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변화산의 사건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큰 의미를 나타냅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나타낼 것입니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있는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삶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생활입니다. 그의 구원의 사명을 함께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7은 한순간도 무의미하게 사시지 않았습니다. 나의 개인적 욕망이나 이기주의를 위한 삶의 목적을 포기하고 주님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주님의 대열에 참여하는 생활이 바로 사순절을 사는 그리그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신앙적 결단으로 모두가 이 사순절에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난을 예고하심/마17:22-23
2001-11-21 10:32:50   read : 115

사순절이란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 기간이 4순, 즉 40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간으로 하면 6주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항상 여행을 하셨지만 이 기간은 특별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 여행기간에 예수님이 몇 차례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에는 거의 없었던 말씀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옆에 있던 제자들이 근심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수난을 말씀하셔야 했는지 그 필요성을 모두가 뜻밖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이것을 알려야만 하셨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 의미를 여기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난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말씀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런 일이 예수님에게 닥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수난을 멀리하라고 말씀을 드리기도 했었습니다.
1. 사람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이 말은 매우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있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시고,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결코 사람들의 손에 있으면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계셨습니다. 이 말은 성령 충만의 능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에서 오신 분으로 알고 믿었습니 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할 수 없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을 뚜렷이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의 적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요, 로마의 정치가들입니다. 넓게 말하면 모든 군중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넘겨진다는 것은 사람들의 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법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항상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사람들의 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뚜렷이 구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면에서 자신을 세상에게 내맡기셨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류구속의 대사명을 위하여 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인들이 와서 체포하려고 할 때도 베드로에게 하신 교훈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순히 자신을 내맡기셨습니다.
2.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넘겨진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살려 보려고 재판과정에서도 바라바를 내세워서 예수넘을 석방하기 위한 노력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위치에 위험이 올 것을 알고 얼른 그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의 요구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로마법에 의하면 가장 잔인한 사형법이었습니다. 즉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나 외국인에게 주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시민도 아니요, 식민지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표면적인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그 내면적인 뜻을 살피게 됩니다.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십가가였습니다. 이것은 인류를 위한 그의 구속의 희생이었으며, 한번에 드리는 속죄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는 인간의 승리로 나타나고 있지만 예수님의 목적을 달성시켜 주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기독교의 가장 깊은 교리이며 믿음을 가진 각 개인에게는 감격입니다. 그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던들 우리는 아무 가치 없는 인생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로 인하여 오늘 믿음을 소유한 영원한 천국의 사람으로 희망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의 희망은 항상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러한 의미를 깨닫고 살도록 십자가를 명상하는 생활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3. 삼일 후에 살아나십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거기서 끝났다면 그것은 실패요, 절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수난의 예고에서 반드지 따라 나오는 말씀이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입니다(16 :21, 20: 19, 27 .63).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이 있으므로 빛이 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여기서 최대한의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무덤을 돌로 막고 그 곳에 인장을 찍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그 돌을 굴려낼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굴려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보장을 하나님이 허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십니다. 부활은 사람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것을 구경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도 그 자리를 지키다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만나는 데 그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시간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막달라 마리아의 증거를 확인하기 위하여 무덤에 갔었습니다. 그것도 베드로는 들어갔었지만 요한은 무서워서 무덤 안에 들어갈 용기를 갖지 못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구경꾼들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인류의 근본역사를 변화시켰으며,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희망이 무엇인가를 본질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것은 자신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냥 따라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반대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러한 반대에 부딪치는 젓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어느 정도의 각오인가를 타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확고하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비장한 각오였습니다. 그러나 각오가 실천될 때까지는 여러 차례의 결단과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자리에 서야 할 때는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같은 제자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정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수난은 예수님 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게도 수난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자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찬식에서 이것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깊은 자리에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깨달을 때 부끄러운 생각이 들 뿐입니다.



기도의 교훈/눅11:5-13
2001-11-21 10:33:28   read : 66

이 기도의 교훈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던 중에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에 의하여 주기도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기도의 장면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신앙인들은 특별히 기도해야합니다. 본 교훈의 시작도 예수님의 기도의 장면을 보고 제자들에게서 시작됩니다.
사순절이란 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특별한 기도 생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제자들이 기도의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런 것을 본다면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기도의 생활은 필요불가결의 생활습관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해야만 하는 때가 있고 안해도 되는 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호흡과도 같아서 쉬면 죽음을 의미합니다. 항상 어디서나 기도하는 생활은 필요합니다.기도의 필요성은 그 내용이 응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청의 응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필요한 것을 요구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집에 찾아가서 떡 세 덩이를 요구합니다. 왜 잠자기 떡 세 덩이가 필요한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친구가 찾아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먹이기 위하여 떡 세 덩이는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을 자고 있던 친구에게 그대로 수긍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필요한 기도의 내용도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느냐 아니면 거절하실 것이냐 하는 데 직접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없는 요구를 하곤 합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이럴 경우 전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요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신앙적 수준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법입니다. 인간적인 데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편에서 판단하면 과연 이것이 나의 욕망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공적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구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친구의 집에 가서 떡을 요구한 사람의 간절성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친구이지만 떡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서 떡 세 덩이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강청함을 인하여'라 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조건 때문에 기도만 하면 쉽게 요구를 응답해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요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강청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몇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필요한 것을 요구할 때 그 말하는 태도에서 필요의 긴박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반복입니다. 아무리 간절해도 한 번 하는 것과 두 번, 세 번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같은 요구를 반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것과 강조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강조란 필요의 절실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기도를 해야 하니까 하고 그 내용에서도 강조하지 않으며 반복은 더욱 안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기 때문에 한번만 말씀드리면 알아서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왜 합니까? 하나님이 몰라서 알려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필요로 하고 얼마나 간절하고 꼭 이루어져야한다고 믿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나의 정성입니다. 정성이 없는 기도는 결코 응답될 수 없습니다.
3.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마지막 절에서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모든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이요, 하나님께서도 필요한 것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신다고 보장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 가지 말씀하시는 것은 누가 성령을 구했습니까? 여기서 앞에 나오는 말씀 중에 사람들이 성령을 구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불쑥 '성령'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바로 모든 기도를 드리는 데 있어서 성령을 구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기도의 첫째로 구할 것이 성령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다른 기도를 드릴 때 바른 자세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임재는 모든 것을 이루기 전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에서 초대교회에 가장 먼저 성령강림의 체험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 합니다. 성령받은 사람이하는 일은 신앙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앙인들이 늦은 감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순절에 필요한 생활은 기도생활입니다. 예수님쩨서도 이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향하여 가시는 데서 자신이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하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압니다. 그렇다면 오늘 세상에서 사는 것은 고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할 것입니까? 무엇을 구할 것입니까?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 바른 신앙의 태도로 필요한 것을 구하면 그는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기독교인의 필요한 생활습관입니다. 그 생활 자체가 필요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을 바르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대 한국교회의 기도는 다분히 기복주의입니다. 복을 구하는 데에만 열심을 다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기 전 기도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기도를 하려면 성령을 충만히 받은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다시 사셨다/행1:3-
2001-11-21 10:34:04   read : 25

오늘은 예수님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함께 생각하기로 합시다. 두 가지가 우리의 관심거리입니다. 첫째는, 부활이 참으로 있었던 가이며 둘째는, 만약부활이 있었다면 그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입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해 주는 여러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 가지 현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현상은, 시체가 없어져 버린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안에나 가까이에 있었던 제 자라면 누구라도 무덤을 찾아가 보고 이 사실을 스스로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이 놀라운 광경, 즉 무덤은 열려 있고 비어 있는 광경을 보았을 것입니다. 시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살아나셨다는 사실 외에 이 사실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은 없습니다. 주장되고 있는 다른 모든 설명들은 이 의문을 풀기보다는 더 복잡하게 하고 있을 뿐입니 다.
(2) 부활의 두 번째 현상은, 주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무덤 안에서 사라졌다고 주장될 뿐만 아니라 그 몸은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고 주장됩니다. 다시 나타난 그 몸은 새롭고 영광스러운 형체로 바뀌었었지만 말입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소원하기만 할 뿐 별 수 없었던 자들이 아니라 이 놀라운 사실을 믿어야했습니다. 그리고 도마의 고집쎈 불신앙 조차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상과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흥분하기 쉬운 여자였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꿈에 사로잡히거나 환상을 잘 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뚝뚝한 어부들이었읍니 다. 그들은 신경 예민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쉽게 속이는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이 부활의 사실을 자신들이 확신하게 되기까지에는 그들도 분명한 증거를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명심한다면 부활의 모습이 하나의 환각이었다고 단정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부활의 증거가 되는 세 번째 현상은 교회의 출현입니다. 성금요일 밤에 사도들은 걷잡을 수 없는 침울함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서른 여섯 시간이 채 못되어 상태는 아주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셨음을 확신하게 되면서부터 였습니다. 몇 주간이 채 못되어 그들은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숨어 있던 곳으로부터 나와서 그들은 늠름하게 유대인의 공의회를 향하여 도전했습니다. 이 공의회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한 기관입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붙잡히고 매맞고 옥에 갇혔으며 어떤 경우에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수천의 사람들이 개종했습니다 그리고 멸시를 받으셨던 그 나사렛 사람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달라진 모습들, 솟구치는 이 능력, 유대교의 싹에서 피어난 기독교의 꽃,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빼놓으면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2. 우리는 부활의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부활의 의미와 중요성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부활은 그 이전을 돌아다보게 합니다. 부활 이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셨던 그의 생애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의 죽으심은 이 부활에 의해서 정당함이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공공연하게, 그리고 권세 당당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바울은 썼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으로 보여진 이 부활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확신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부활은 나자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들의 구주, 즉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있으심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2) 이제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우리의 생각을 돌립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미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해 줍니다. 특별히 죽음 저 너머의 생명에 관하여 그러합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벧전 1 : 3) . 죽음이란 새로운 생명과 풍성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문입니다 죽음 뒤의 생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대는 단지 생명이 계속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부활입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의 영혼이 어느 날엔 가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영광스럽게 되어질 것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롬 8 : 18-25).
(3) 예수님의 부활은 현재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생명 없는 신학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를 위한 굉장한 메시지입니다. 이 부활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날마다 살아갈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높게 보여 준 사건들로 인정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의 그 능력은 "믿는 우리 안에서" 역사할 수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으로 정복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시험은 없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그 일을 시키신다면, 바로 이 능력으로 이루지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걱정이나 두려움이나 맡은 일 때문에 좌절당하고 짓눌리고 압도당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십시오. 눈을 뜨게 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킨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능력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조용한 가운데, 흔들림이 없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큰 기대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부활의 능력과 꼭 같은 능력을 발견해 낼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눅23:25-
2001-11-21 10:34:33   read : 178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가시던 길에 예수님은 호산나의 찬양과 종려 가지를 흔드는 환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셨던 이 잠시 동안의 개선 환영은 덧없는 것이었습니다. 곧 심히 불행한 밤이 닥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에 우리는 우리들대로 호산나 찬양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드리워져 있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 날 갈보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꼭 같습니다. 누가는 그들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그들은 십자가의 구경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 구경조차도 충분한 시간동안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십자가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 이 갖고 계신 계획의 중심인 것을 알아볼 만큼 구경하지 않았습니다.

1. 인간의 비인간성
(1) 우리가 십자가를 잘 바라보면 그 때의 종교 지도자들이 눈이 멀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더 큰 진리를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 예수님의 대적이 되고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바로 그 신앙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눈은 감겨져 있지 않습니까?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신실하기만 하면 신조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믿습니까 ? 윤리란 상대적이어서 우리의 필요와 관심에 그 윤리를 맞추어야 한다고 믿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진리를 구석진 곳에다 몰아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2) 사업하는 사람들의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의 진리와 순결보다는 물질적인 이득을 얻는 데 더 마음을 썼습니다. 예수 님은 성전 뜰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과 맞부딪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업에 마음을 쓰고 있었던 성전의 지도자들은 예수 님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의 일을 방해하는 자이다"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아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수입을 위협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막 11:15-18). 우리들 가운데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까 ? 돈벌이만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3) 유다의 배신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배반한 그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한다 하드 라도 유다 는 자기의 장래에 관하여 마음을 쓰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죄인을 가까이 따라 다녔던 그는 자기의 장래가 위태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못 박히시게 한다면 자기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4)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은 자기를 가장 가까이 따르던 자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자기들에게 생겨날 일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이 갖고 있었던 믿음보다 더했습니다. 위급할 때 그리고 일어서서 심문을 받아야할 때 애매한 태도를 취한 적은 없습니까? 한사코 피하고자 어물정 거리지는 않았는지요?

(5)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했던 인간들의 비인간성은 군중의 변덕스러운 감정 속에서도 보여집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이니 호산나로 그분을 영접해야지 ! "그러나 목요일 저녁은 어떠했습니까 ? 우리도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합니까? 군중의 감정에 휩쓸려 폭도가 되어야합니까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부르짖음에 우리의 목소리도 함께 해야할까요 ?
(6) 이 무리와 똑같이 되지는 않는다 합시다. 그러나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또 다른 무리 속에 끼는 자들은 아닌지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십자가형은 너무도 자주 듣는 흔한 것 이 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무리는 십자가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의 자기 표현
(1) 만일우리가 십자가 사건 가운데 보여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이 어두운 면 저 너머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기 이 십자가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명과 역사 속으로 친히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상황 안 쪽으로부터 우리들과 같은 인간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죄 때문에 숨이 막히고 쓸쓸하여 비참하게 된 우리들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롬 5 : 8,10).
(2) 십자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에 대한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게 될 그 처지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십자가위에서 나타내어 주셨습니다.
(3) 우리가 십자가를 잘 바라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갖고 계신 큰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그 능력을 말입니다.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역설적입니다.
(4)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자기 표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계기 되고 있습니다. 스탱스터 (W. E. Stangster)는 "십자가가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최고 능력을 보여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십자가가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의 하나님이신 지를 보여 주고 있는지를 말했던 것입니다.
(5) 십자가를 잘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순종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순종을 보면서 우리는 온통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값진 것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할 수만 있으시면 다른 방법이나 수단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사실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의 조건없는 사랑을 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 사랑이 요구하는 바를 위한 예수님의 조건없는 굴복을 봅니다.

3. 확신과 도전
(1) 여러분과 저는 십자가에 그리스도인이 갖는 희망에 대한 신을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제자정신에 대한 도전을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이 확신과 도전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확신과 도전을 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세상에서 극적인 능력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가장 중심부에 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2) 십자가에는 우리의 혼돈된 세계의 어두움 속에 빛과 희이 있게 되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정오인데도 어두움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 어두움은 부활의 아침에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해가 뜰 때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이미 살아나 계셨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능력과 사랑의 보장을 마음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순종하는 제자의 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제자의 정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보여 주신 희생적인 사랑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생명과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받아들이기 전에는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을 구속하는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사랑과 능력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는 도전의 마음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도전의 마음이란 이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 매일의 생활 형식 속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신이 우리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죄/사53:6-
2001-11-21 10:35:19   read : 120

세상에서 아름답고 가장 감탄하는 행위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고통을 당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져야하는 짐을 대신 지고 다른 사람이 당해야 하는 고통을 대신 당하며 그 고통을 아예 없애버리는 사랑의 행위일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종에 관한 말씀"입니다. 종에 관한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후반 전체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하게 될 역할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당하시게 될 고난의 의미를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에 입각하여 자신의 사명을 알고 계 셨습니다 (마 3 : 17,사 42 : 1). 본문 6절은 인생의 잘못과 해결책 을 말해 줍니다.

1.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그릇 행하여."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는 양들이 어떻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1) 양들이 유혹을 받듯이 우리도 유혹을 받습니다.
먹을 것을 배불리 먹은 양들은 제한된 구역을 넘어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서 먹어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곳의 풀 그 자체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 지역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금지되어 있는 구역의 풀은 허락되고 있는 지역의 풀과 꼭 같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양들은 그곳으로 나가서 쉬이 길을 잃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본능적인 욕망과 의욕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욕망과 의욕은 죄가 아닙니다. 욕망을 느끼고 의욕을 달성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욕망과 의욕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사회의 규범을 지나쳐 유혹을 받아 다른 길로 나가기가 쉽습니다.
(2) 우리는 양이 길을 잃듯이 죄를 짓습니다.
때로 양은 개별적으로 길을 잃습니다. 예수님도 양떼로부터 길을 잃어 나간 한 마리의 양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양은 떼지어 곁길로 나갈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 또한 함께 잘못할 때가 많습니다. 의복, 머리 모양, 자동차, 집, 오락 등에 있어서 우리는 유행을 따라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교묘하게 유혹하여 악으로 끌고 가는, 어떤 믿을 만한 것처럼 들려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조금이 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양은 왜 길을 잃게 됩니까? 목자에게 환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접 적인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양이 길을 잃게 되는 이유는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에 우리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자들에게 유혹을 받아 길을 잘못 들게 됩니다.(3)양이 길을 잃고 고통을 당하듯이 우리도 불순종하면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우리의 원수들에 아무런 방비 없이 자신들을 드러내어 놓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영적 재난의 위험에 서 있읍니 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겠다던 사탄의 그 처음 유혹은 한낱 헛소리였던 것입니다. (잠 16 : 25).

2.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 게 담당시키셨도다. "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행동으로 보여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행동하신 것이었습니다(요10:18).이는 죄 악이 불러 올 수 있는 가장 심한 형벌에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랑이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죄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고후 5 : 21). 칼빈은 "예수님이 정죄받고 잃어버린바된 사람의 두려운 고통을 자신
의 영혼 속에서 참아내셨다" 말했습니다. 이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2)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롬 3 : 25) .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유혹의 위험, 죄악의 가증함, 그리고 길 잃은 재난이 어떠함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할 말은 “참으로 놀랍고, 참으로 신성한 그 사랑은 나의 영혼, 나의 생명, 나의 전부를 원하네 "입니다.



중간에 선 사람/요19:18-
2001-11-21 10:35:52   read : 102

어느 시대에 살았든지 사람들의 기대와 맞추기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중간에 서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성주(聖週)라고 부르는 주간에 예수님은 생명을 건 몸부림 중에서 이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두 강도의 중간에 계셨던 그 위치는 예수님이 강도의 두목으로 인정되시게 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그 생애와 사역 전반에 항상 어떤 위치에 계셨는지에 대한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간에 선 사람이셨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은 옛것과 새것의 중간에 계셨으므로 중간에 선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 "옛 사람에게 말한…것을…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 다른 경우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다 보전되느니라. "

2. 예수님은 교회가 사회적으로 민감하고 책임감을 갖도록 하셨기 때문에 중간에 선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용당하는 사람들과 이용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서 계셨습니다. 어떤 제도를 사람들보다 앞세우려 는 사람들이 있을 때면 그런 성격의 것이면 무엇에나 적용되는 한 원칙을 선언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압제당하는 사람들과 압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것이 예수님이 하셨던 생활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이 말썽 많은 분을 없애기 위한 어떤 방책을 꾸미게 될 만큼 분노를 느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가졌던 신앙의 기반을 그처럼 공격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의 개척자로서 떳떳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대신에 교회의 제도적인 생활에 얽매어 그대로 숨어 살아야 합니까?

3.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세계의 중간에 서 계셨기 때문에 중간에 선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은 이방인의 뜰에서 있었던 사건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 뜰은 성전의 구역 가운데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꼭 한 군데 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 시끄러운 장사들 때문에 예배드릴 장소를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의 설교로 교회가 온 세상 사람들의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천주교인들이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유대인들이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흑인들이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고용주들이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피고용자들이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날이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그렇게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4. (1)중간에 서는 사람만이 사람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께 침을 뱉고 조롱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유대인 폭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쳐 말한 조롱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남을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도다"였습니다. 오늘날 이 같은 조롱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려 하면 다른 이들은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랑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쏟는 사랑입니다. 중간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조정해 주는 일을 해 주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특별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을 모조리 거절하셨습니다. 이 감탄할 만한 정신은 눈에 띄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쓴 서신서들 가운데에서 그가 예수님에 관한 이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 "
(3) 중간에 선 사람의 십자가로부터 나온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자기 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였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겪고 계시는 분이, 도리어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호소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인연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비록 죄중에 있을지라도 사람을 위하여 베푸시는 이 사랑의 은덕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운명을 우리와 꼭 같이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그 어떤 운명을 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운명을 그대로 당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의 사랑 가운데서 해 주신 가장 훌륭한 우리와의 하나되심 입니다. "하나님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사랑의 확신/롬5:6-10
2001-11-21 10:36:36   read : 121

우리는 사순절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더듬어 회개의 기도에 힘쓰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 원합니다. 로마 5 : 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증하셨다'는 원어 수니스테미라는 뜻은 같이 선다, 입증한다, 추천한다는 것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의 사랑은 온 세상 앞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같이 서셔서 드러내 놓고 소개하며 추천하시면서 확실하게 증명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 보여 주는 방법으로 삼중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5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10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이 구절에서 공통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마지막이요, 전적이요, 남은 것 없이 완전히 쏟아 바쳤다는 것인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교훈으로, 모범으로 하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신 것입니다.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때 더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이는 이로 갚고, 눈은 눈으로 갚고, 우리를 멸시하는 사람을 멸시하고, 우리를 조금이라도 학대한 사람들에게는 적대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됨을 너그럽게 보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란 힘이 빠져 헤어날 길이 없을 때, 완전히 길을 잃었을 때, 회복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연약함'의 영어로는 무능력이요(without stength), 신학적으로는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연약함을 로마 7장에서 말하기를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5-17절). 죄가 내 속에 집을 짓고 집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밖에서 괴물처럼 오기보다 뱀이 겨울에 땅 속에 집거하듯 죄가 내 육신 속에 자리를 잡고 거주하고 있다는 인간실존의 연약성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연약성이 그대로 있지 않고 모순과 대립과 투쟁으로 화하여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3-24절). 악이 일정한자리에 앉아서 제동만 거는 것이 아니고 뛰어넘고 싸움을 걸어 쳐들어와서 자기를 사로잡아 가려는 것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갑이 을이라는 적을 넘어뜨리고 목에 창을 들이대고 '꼼짝말고 따라오라.'는 영적 절박성과 패배가운데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고 절교했습니다. 이 부르짖음에 대해 벵겔은 “이런 비참한 인간일 바에는 도리어 인간이 아니였으며 좋았을 것인데"하였고, 데니는 “인간의 고민의 울부짖음이며 도움을 위한 고함소리", 발트는 “드디어 우리는 여기서 종교의 실제를 바라본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할 수 없는 죄인이요, 연약한 인생입니다.
연약한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에 끌리어 변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고 영원하므로 우연히 일어나지 않고, 시작과 마지막이 있고, 계획하고 약속 된 때가 되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툭하면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느니, 조금만 더 기회가 있었더라면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려 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켜 자신들을 구원할 도덕적 능력을 가졌다고 큰소리 치면서 1400년 동안 실험해 보았으나 바울의 말처렇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 즉 때가 차도록 기다렸으나 실패였습니다. 철학도들도 그리스에서 충분한 기회를 누려 보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전성시대도 지나가고 '기약대로' 때 가 찾지만 철학의 지혜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로마의 법률과 문화도 그들 나름대로 기회를 가져 보았고 이집트의 거대한 문명도, 바벨론의 찬란한 문명도, 중국의 문화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사람을 구원할 방법이란 다시 없다고 입증된 때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랑입니다.

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절). 바울은 죄인 된 우리를 위-r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 깨닫게 하려고 7절에 11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뭔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말했습니다. 의인과 선인의 차이가 무엇이냐? 의인은 율법을 잘 지켜서 행동에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인은 의인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사람으로 오리보다 십리를 가는 사람이요, 겉옷까지 주었으므로 받은 사람이 감격하여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죽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사람이 피아노를 옳게 연주하고 있습니다. 바른 음계를 두드리며 박자를 잘 맞춥니다. 그러나 똑같은 악보로 연주하지만 그분에게는 다른 것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는 훌륭한 음악가로서 그 연주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큰 감동을 주는 것과 같이 의인과 선인의 차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옳고 바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인의 사랑에 끌린 나머지 은혜 갚기 위하여 대신 죽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혹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선인을 위하여 죽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명백백하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는데 거기에는 어떠한 의문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의인과 선인의 정반대자이며 가해자입니다. 죄인은 범죄한 책임을 지고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확증이요, 이보다 더 확실한 증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3.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셨다"(10절).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성을 마치 못을 하나하나 박듯이 또박또박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원수'라는 것은 개인적인 관계보다 집단적인 적대관계(enimies)를 의미합니다. 마치 이스라엘군과 블레셋군이 싸울 때 골리앗 장군에게 따르는 블레셋 군사와 같이 사단의 군사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개인이 몰라서 연약해서 죄를 지었다는 것보다 조직적으로 범죄하고 집단적으로 강력하게 하나님께 도전해 오는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2:3 이하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을 근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조롱하고 미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적대시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좋아 난 반대로 말할테야. 이것이 계명인가?
가지려고 한단 말야!" 사람들은 이렇게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사기를 도와서 함께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 율법을 조롱하고 무시하며 제멋대로 제 갈 길로 가버린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도 3 : 3 이하에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3-7절).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의미에서라도 우리 자신의 공로나 행위에 달려 있다면 우리의 입장은 언제나 불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실수하고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렇지 앉기 때문입니다. 비록 연약하고 죄인이며 원수된 자이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의 궁극적인 터가 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터 위에서 내가 구원받은 것을 지금 믿으며 또 앞으로도 구원받을 것을 확신할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 하나님의 자녀와 후사가 되었다는 것과 영화롭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프란세티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을 그리려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되어 화판에 붓을 댈 수 없어 그림을 완성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오직 우리들이 할 말은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다는 것 뿐이요.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히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절기입니다/막10:35-45
2001-11-21 10:37:11   read : 150

* 사순절의 의미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부활주일을 앞둔 40일전 수요일부터 시작한다. 금년 사순절은 지난 2월 21일(수)부터인데 이 날을 성회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한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기간이며 4세기경부터 하루 한끼만 먹는 금식 기간으로 삼았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 예수님의 죽음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분명하다. 그 목적은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주님의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사건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사역의 목적이 죽음에 있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죽음 후에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셨다.
* 우리들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역은 인류 구원의 성취에 있다. 그 구원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때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도 함께 죽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면 새 생명과 새 세계를 갖지 못한다. 나의 전부가 죽어질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는 것이다.
지난 수요일인 2월 21일부터 금년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을 앞둔 40일간을 말하는데 이 시작하는 날을 성회 수요일이라고 합니다. 성회란 거룩한 재라는 뜻입니다. 성회 수요일은 회개의 밤인데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로 얼굴에 십자가를 긋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순절은 40이라는 수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40일이란 수는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날의 수이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시체가 무덤 속에 계셨던 40시간,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금식했으며 엘리야도 40일간 금식한 날수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40년간 배회한 기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40이라는 수는 큰 뜻을 가집니다.
사순절의 의미 :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기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로 연관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기간에는 대체로 금식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4세기경부터는 사순절 기간에 하루 한끼만 식사를 하는 금식기간으로 삼았으며 한끼 식사도 육식을 금했습니다.
사순절 기간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 고난에 참여하려는 신앙적 결단은 매우 귀한 일이며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교만을 꺽고 겸손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고난을 통한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몇일전부터 사순절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사순절 절기는 고난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금식이나 절제를 통한 고난을 겪는 것이 사순절의 깊은 뜻이 아니라 사순절은 죽음의 절기라고 하는 것이 제 마음에 다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도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죽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무엇이며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떻습니까? 우리가 죽겠다든지, 죽고 싶다든지 하는 말은 쉽게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다른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가 죽은 후의 세계를 추구합니다. 그러면서도 죽음을 싫어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불행, 허무의 종착역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후에 다른 세상, 즉 더 좋은 낙원에 간다고 믿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후에 천당에 갈 것을 확신하고 사모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으며 즐거움만 있다고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싫어합니다. 죽는 것은 두렵고 싫습니다. 죽은 후의 세계는 약속일 뿐이요 현실적으로 받아 들이기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니던 때에 이웃집에 믿음이 좋은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그당시 80세가 넘으신 할머니신데 저를 무척 사랑해 주셨습니다. 할머니 곁에 가서 말동무가 되어 주고 함께 있으면 가끔 하시는 말씀이 "나는 빨리 죽어야 하는데", "빨리 죽어야 천당에 갈텐데" 했습니다. 그러면서 먹고 죽는 약을 좀 구해 달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느날 저는 삐콤 몇알을 봉지에 싸서 할머니께 갖다 드리며 이것을 두알씩 세번만 드시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 약 봉지를 빨리 받아 들고서는 야단을 치셨던 기억이 납니다. 더 좋은 세상이 죽은 후에 있다고 믿으면서도 죽음 자체는 싫어하고 두려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후의 천국을 보장하지만 현세에서의 천국을 체험하며 사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천국은 사후에 가는 영혼의 천국만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새로운세계를 누리는 천국을 소유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의 천국은 약속이요 이 세상에서 천국을 앞당겨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죽음이 어떤 것이며 죽은 후 천국의 삶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을 에덴 동산에 살게 했습니다. 그를 에덴에 살게 한 것은 낙원에 살도록 한 것입니다. 에덴이란 뜻이 낙원, 즐거움, 기쁨의 의미로 행복의 동산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랑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했습니다. 그가 잠든후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어 아담이 사랑할 대상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담의 행복한 삶이 시작되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잔다고 하는 말씀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아담은 낙원인 에덴에 있었으나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잠, 즉 죽음 이후에 진정한 에덴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죽게 하신 후 새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그 후에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과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어떤 것이며 그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바로에게 모세를 보내시어 민족을 해방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강팍하여지고 더욱 악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비한 은혜를 주셨으니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집안에 있도록 했습니다. 그날밤 애굽 전역에 장자가 죽는 심판이 임했습니다.
드러나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안전하게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보호를 받은 것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집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죽음의 밤에 구원을 받아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헬라어로 출애굽을 엑소더스(Exodus)라고 하는데 별세, 죽음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이 말은 출애굽은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때 이미 그들은 죽은 것입니다. 어린 양이 피를 흘려 죽었는데 그 어린 양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어린 양이 죽지 않아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장자처럼 다 멸망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여기 살아있음은 어린 양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죽고 이제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만 사신다는 뜻입니다.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육체로 살고 있지만 저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양이 죽었던 것같이 수많은 인생을 살리시기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주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후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없었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를 주시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귀중한 두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마 16:24인데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죽어야 제자가 되고, 죽어야 성도가 됩니다.
또 하나의 말씀은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 즉 새 생명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면 다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 착하게 되는 것, 잘 참는 것,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죽어야 합니다.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교회를 말하고 예수를 말하며 성경을 말하지만 마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찾고 있다면 죽지 않은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진정 존경받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참된 명예를 가진 사람은 자기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입니다. 진실로 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완전히 죽은 사람입니다. 내 의지와 생각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달라는 요구의 기도와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는 죽음의 기도입니다. 요구하는 기도는 자기 뜻을 이루고 죽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우리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죽음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생명을 살립니다. 이런 기도는 영성이 강건해집니다. 이런 기도는 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봉사도 달라져야 합니다. 나 자신의 기쁨과 다른 사람의 만족을 위한 봉사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봉사는 완전히 자기가 죽어야 가능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진정한 섬김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은 교역자가 있는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철저히 죽은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세움을 받아 교회를 받들때 그 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화평이 넘치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곧 항존직 선거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뽑아 세웁니까? 철저히 죽은 성도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 당선이 되었다 해도 옛사람 그대로 있다면 무익한 직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십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에 참예하는 사순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절기입니다/롬5:8-11
2001-11-21 10:37:55   read : 123

* 사랑의 위대함과 숭고함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평가되어진다. 헬라어에는 사랑이 네가지 차원으로 나누이는데 에로스(eros)와 필리아(philia)와 스톨게(stolge)와 아가페(agape)이다. 사랑의 질과 사랑의 지혜와 사랑의 도덕성에 따라서 사랑은 위대하고 숭고한 것이다. 선한 사랑이어야 하고 지혜로운 사랑이어야 하며 거듭난 사랑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포용된다.
* 주님은 십자가로 사랑을 실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본을 보이셨다. 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극치요 십자가 진리의 현장이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롬 5:8) 십자가의 길이란 죽음의 길인데 십자가를 통해서만 참 사랑이 실현될 수 있다. 십자가 없는 사랑은 위선적이요 이기적이다. 스데반 집사의 기도인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는 십자가 사랑의 실천이다.
*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부탁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사람인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로서 주어졌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보답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 3:17)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사순절 둘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사순절이란 죽음의 절기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오늘은 사순절이 사랑의 절기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값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많이 안다고 값이 높은 사람입니까?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야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문제이며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사랑할만한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가? 참 사랑을 알고 사는가? 인간의 가치는 이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질과 사랑의 지혜와 사랑의 도덕성이 문제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사람을 악하게 만듭니다. 무모한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잘못된 사랑은 나도 고생이요 남까지 괴롭게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사랑이 변질된 것이 시기요 질투입니다. 이 시기, 질투는 나도 괴롭고 남도 괴롭힐 뿐입니다. 선한 사랑이어야 하고 지혜로운 사랑이어야 하고 거듭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숭고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 네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eros)인데 본능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에로틱하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성간의 애정을 가리킵니다. 둘째로 필리아(philia)가 있습니다. 친구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말하자면 인간적인 사랑이 모두 필리아에 속합니다.
셋째로 스톨게(stolge)가 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곧 혈육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아가페(agape)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독일 윈첼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요하네스 로즈는 이 네가지 사랑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에로스가 필리아를 통하여 정화하고 필리아나 스톨게가 아가페를 통하여 고양될 때에 비로소 건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 네가지 사랑이 다 특성을 갖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지만 아가페 없는 에로스나 필리아는 타락하고 만다] 그런데 "아가페 역시 에로스, 필리아, 스톨게 없이는 개발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나라 사랑한다는 말로 나라를 망칩니다. 애국이라는 말로 민족을 괴롭히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사랑이 아가페 안에서 거듭나지 않고는 나라 사랑이고 형제 사랑이고 다 소용 없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년에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며 강연을 했습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여 강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의 강연에 모두들 큰 감동을 받고 더욱 바르트 교수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강연을 마치자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교수님의 마음을 스쳐간 생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칼 바르트 교수는 깊이 생각한 후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통하여 이 사실을 깨닫고 내 생활을 통하여 이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르침이란 예수님의 사랑을 간증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는 것 이상으로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사랑에 대한 수많은 말씀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사랑의 언어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3:16을 보십시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한다면 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고 왜 독생자를 주셨습니까?
오늘 본문 8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1서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심으로 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산상보훈인 마 5:44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 십자가 상에서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극치였고 십자가 진리의 현장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 마음을 괴롭히고 나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준 사람, 나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대할 수 있습니까?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해 줄 수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관심과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것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를 핍박하고 나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사랑이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둘러 쌓였을때, 저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박을때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건강할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평안과 기쁨이 있을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여유가 있을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허약해졌을때, 평안을 뺏기고 불안할때, 기쁨이 사라지고 역경의 밤을 만났을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해를 입히고 믿음을 방해하는 원수같이 느껴지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십자가의 사랑에 접근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이 겪은 일을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 친정 부모님이 보내주신 돈 30만원을 은행에서 찾아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 타고 보니 그 돈이 사라지고 없어졌더랍니다. 버스를 타기도 전에 소매치기 당한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가슴이 뛰고 버스 바닥에 주저 앉고 싶었답니다.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집에 들어가 방에 앉는데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보다 얼마나 더 어려운 사람이길래 그 돈을 소매치기해 간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그 어려움이 펴지게 하시고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그렇게 평안해지더랍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어떤 생각을 가지며 어떤 말을 내 뱉습니까?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가 구원받고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를 드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장 나에게 해를 끼치고 마음에 큰 분노를 일으킨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믿음이 못된다 하더라도 나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거나 나 때문에 기분 나쁘게 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정중히 사과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도 적은 사랑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뭔가 작은 것이라도 하나 실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날 식당에 가서 네 사람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만두가 든 찌게를 시켰는데 김치 깍두기가 나왔습니다. 그 깍두기가 그렇게 맛있어 보였는데 네 사람이 먹기에는 양이 너무 적어 보였습니다.
봉사하는 아가씨에게 깍두기 하나 더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들은 척도 안 하고 가 버리기에 한참 뒤에 그 아가씨를 불러서 김치 깍두기 하나 더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가씨가 노려보듯이 빤히 쳐다 보고는 가서 하나 더 갖다 주었습니다.
그 사이에 만두찌게가 다 익어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찌게는 양도 많았지만 간도 잘 되어서 누구도 김치 깍두기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 찌게 하나로 저녁밥을 다 먹고도 찌게가 남아 돌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 아가씨에게 퍽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말을 안 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속으로 생각한 것은 그 깍두기는 손도 안댈 것인데 이 사람이 욕심을 부린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식사를 다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가씨가 손님에게 불친절하다고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식사가 끝났는데도 김치 깍두기 그릇에 누구 하나 손도 대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곁을 지나가길래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내가 먹어 보지도 않고 욕심을 부리며 함부로 시킨 것 정말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 아가씨는 괜찮다며 한참 동안 웃고 서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편안해졌습니다. 아마 그 아가씨도 그 이후로 가벼운 마음으로 봉사했을 것입니다.
참 사랑은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자세라고 믿습니다. 권위 의식으로 몰아 부치거나 남을 업수이 여기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끔 3-4천원짜리 밥 한그릇 시켜 놓고도 마치 제왕처럼 군림하여 명령하고 나무랄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무슨 사랑이 있다는 말입니까?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요즘 중국 집에는 주방장보다 철가방 든 사람을 더 우대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주방장은 많은 보수와 주택까지 주면서 모셔 왔으나 지금은 철가방 들고 음식 배달하는 종업원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주방장이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해도 철가방 들 사람이 없으면 그 장사는 헛장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방장도 철가방 직원에게 꼼짝 못하는 시대라는 기사를 보고 웃었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군림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깔보고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작은 사랑이라도 있으면 소자 하나에게도 존경과 관심을 나타낼 것입니다.
지도자와 지배자는 다릅니다. 지배자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싸워 이기고 죽여서 그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요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배자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요 지도자는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참 사랑을 실천하시므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고 그 길을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가난하 자, 소외당한 자,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위로하시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사랑받을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날마다 크신 사랑안에서 호흡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심으로 나에게 가치가 부여된 것입니다.
스웨덴의 감독이었던 니그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가페는 사랑 때문에 가치를 창조하고 에로스는 가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로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가치없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자비이고 거져 주시는 것이므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살아가야 할 뿐 아니라 형제를 사랑할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고 했습니다. 나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입시다. 나의 기도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도해 줍시다.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줍시다. 나의 사과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합시다. 나의 용서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용서의 사랑을 베풉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심 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합시다. 스데반처럼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주의 사랑으로 사랑을 베푸는 사순절 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 기도의 절기입니다/막14:32-42
2001-11-21 10:38:29   read : 447

* 마음을 토하는 기도
기도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다. 끊임없이 부딪히는 문제 앞에서 그 해결을 위해 기도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살과 몸이 찢기셔야 했다. 우리가 이 특권을 누리기 위해 물과 피를 쏟아야 한다. 이 선물에 감격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하며(욜 2:13) 말을 토하지 말고 마음을 토해야 한다. 아름다운 미사어구를 토하지 말고 마음 깊이 도사린 죄악을 토해내야 한다.
* 주의 뜻을 이루는 기도
우리가 드리는 대부분의 기도는 내 뜻을 세워 놓고 그것에 하나님이 동의하여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세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 것에 대한 부단한 포기가 있어야 된다.
* 삶으로 드리는 기도
우리 신앙에 기도가 없어서 무능한 것이라 그 기도와 걸맞는 삶이 없기 때문에 무기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비난을 받는 것은 기도를 잘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는 노동이나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활이어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 일이 아니라 삶의 부분이듯이 기도가 생활이라는 뜻이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기도가 생활이요 생활이 곧 기도인 것이다.
사순절 세째 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은 사순절이 기도의 절기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해 끝없는 갈망을 가집니다. 이 갈망 때문에 이방 신상을 쫓아 가거나, 아무 것도 아닌 미신을 따라 가지만 거기에는 문제 해결이 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하나님께 갖고 나아가 그것을 토로하며 의논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특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 특권이 그렇게 쉽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희생의 댓가로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를 열어 주기 위하여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살과 몸이 찢기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으며 기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문제 해결의 능력이 못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기도에 동참하는 절기요 주님의 기도를 배우는 절기이며 기도로써 승리하는 계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기도에 게으르고 기도없이 살아온 나약함을 깨닫고 사순절 기간 동안 힘써 기도하는 시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기도없이 살아갈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도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이 열여덟번 나옵니다. 공생애 시작하시기 전 40일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고 제자를 택하시기 전 기도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기도하셨고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다음 마을로 가시기 전 기도하셨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기도하시는 주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의 일곱 가지 말씀도 대부분 기도입니다. 원수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이며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기도이며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없이도 승리할 수 있는 분, 기도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신데 기도로 일관하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7) 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무능하여 작은 문제라도 해결할 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지 않을때 많습니다. 기도의 통로를 열어 주셨고 기도 외에는 귀신을 쫓아 내거나 문제 해결의 길이 없음을 가르쳐 주셨는데도 기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는 시간을 잘라 먹지는 맙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특권 때문에 가슴 뿌듯한 감격을 느낀 적이 얼마나 됩니까? 좌절감을 느낄때, 매사가 잘 풀려지지 않을때, 근심, 걱정의 포로가 되어 한숨을 쉬고 낙담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통로에 서서 특권을 활용해야 합니다.
기도를 드리기는 드리는데 응답받지 못한 기도 생활입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도를 하면서도 의심하는 기도는 응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하였으면 받은 줄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 기도해도 받지 못하였다면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인줄 알아야 합니다.(약 4:3) 이러한 잘못된 기도가 아닌 이상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7:11)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의 허물과 죄악을 솔직히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을 담을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간절해야 합니다.
마음을 토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말씀하기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욜 2:13)고 하셨습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간절한 기도를 말합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말을 토하지 말고 마음을 토하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미사어구로 기도하지 말고 마음 깊이 도사린 죄악을 토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없이 하는 말은 사람들도 듣지 않습니다. 마음을 토하지 않는 기도에 주님이 들으시겠습니까?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가 뭐라고 외쳤겠습니까? '주여! 건져 주소서'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토할때 주님이 들으십니다. 마음을 토하는 기도는 지겨운 노동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숨쉬는 것을 일로 생각하거나 노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호흡이 일이거나 노동이 된다면 정말 피곤해서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흡은 일이거나 노동이 아닙니다. 삶의 일부분입니다.
마음을 토하는 기도는 기도할 마음이 있어서 하는 자연스러운 기도입니다. 마음을 토하는 기도는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마음을 토하는 기도는 기쁨이 옵니다. 마음을 토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영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대부분의 기도는 내 뜻을 세워 놓고 그것에 하나님이 동의하여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사업을 할때, 입학 시험을 치를때, 중대한 진로를 결정할때 하나님의 뜻을 많이 찾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대부분 그 길이 안전한 길이요 성공이 보장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했을 경우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서 그렇게 되었다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곤 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 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 편견과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뜻대로 욕심에 끌려 일을 시작해 놓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보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자기 포기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쳐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깨닫기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얼마나 아픔을 겪으며 기도해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며 세번이나 반복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실때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핏방울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핏방울 같은 땀을 쏟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오는 3월 23일부터 제일극장에서 하는 세실 B.데밀 감독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화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간 시사회에 참석하여 그 영화를 보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때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땀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제 가슴에 그대로 와 닿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자], [예수님의 마음을 품자]고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면 진정 주님이 기도하신 그 모습을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기름을 짜듯 내 자신을 짜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은 자기를 포기하는 길입니다. 생명을 버리는 길입니다. 내 유익과 명예를 위한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패배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의 모든 불의한 세력의 패배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승리를 이루어 놓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미가서 6:에 보면 남왕국 유다의 멸망이 임박했을때 유다 백성들은 스스로 묻고 답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갈까? 수양이나 기름을 가지고 나갈까? 또는 맏아들을 가지고 나아가 바칠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고 하셨습니다.
공의와 사랑과 겸손은 물건이 아닙니다. 만약 물건을 원하신다면 어디에 가서 구입하여 원하는 장소에 갖다 놓으면 됩니다. 그러나 공의와 사랑과 겸손은 우리가 받아 들이고 실천해 가야 할 하나님의 인격적 요구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전적으로 포기하고 손해보고 희생되어야 합니다.
찬송가 102장의 내용대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예수 밖에는 없네]라는 찬송이 생활 속에서 풍겨 나오고 이 고백이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삶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기도가 없어서 무능한 것이 아니라 그 기도와 걸맞는 삶이 없기 때문에 무기력한 것입니다. 찬송은 부르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고백과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기도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내 삶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것은 기도를 잘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믿는대로 행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때 그대로 살려고 합니다. 육적인 고달픔과 어려움이 있어도 달게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고후 2:15) 향기는 자연스럽게 풍겨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삶속에 기도가 있는 사람은 어디에선가 영적 향기가 은은히 풍겨납니다. 말과 행동 속에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흘러 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듯 삶속에 나타난 기도가 없다면 그 영은 죽은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호흡한다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삶으로 드리는 기도는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확신하고 주님과 속삭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삶으로 드리는 기도는 요청이 많지 않습니다. 감사가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명령할 것이 아니라 순종할 뿐입니다.
참된 기도의 자세는 마음에 없는 입술의 기도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토하는 기도여야 하며 그 기도한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절기 동안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기도의 계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로 새 힘을 얻고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에 무엇을 할 것인가/창2:7-17
2001-11-21 10:38:59   read : 297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무엇 때문에 선악과를 만들어 오늘 이렇게 고생하게 하셨는가? 라는 원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잘 먹고 잘 살아라 고 하시지 선악과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고통을 받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를 알아보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지으셨으니, 즉 하나님 께서 친히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고, 지혜가 있게하시고, 상당히 높은지능을 갖게 하심으로,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동산 중앙에 선악과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유지를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禁忌사항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우러러 찬양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아담은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동산에서 맛있는 과일을 맛있게 먹고는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쳐다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으며, 나는 그의 피조물임을 생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과 위엄과 권능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피조물로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에빠져 끝내 하나님의 禁忌사항을 어기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17절에서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너와 나와의 관계가 깨어지리라는 말씀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그 좋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에덴을 볼 수 없었고 선악과 나무도 볼 수 없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가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은, 그 관계가 깨어진 후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든지 말씀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 할 수 없었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은혜였고 사람을 위한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깨어진 관계는 세 가지입니다.
1)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2)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3)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니 자연과의 관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또 사람 과의 관계가 계속 허물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살인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다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고후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하나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하나님)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즉 사람이 깨뜨린 관계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회복시켜 화목하게 하셨고 화목케 하는 직책을 우리에게 부여하시므로 사람과의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죄는 모든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요. 그리스도는 관계를 회복시키는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절에 할 일을 생각해 봅시다.

사순절이 왜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라보며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었는데 왜 우리는 또다시 죄와 관계를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있는가? 를 생각하면서 죄를 통회하고 자복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에 꼭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요한일서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으니 죄를 자백하는 일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길입니다.

2) 남에게 많이 베푸는 일입니다.

-야고보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의 욕심은 죄를 낳게 되고 그 죄는 모든 관계를 깨뜨립니다. 욕심부리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많이 이웃에게 베풀면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가 개선되어집니다. 누가복음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불의의 재물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재물을 말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헌혈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3) 자연보호에 힘써야 합니다.

-자연과의 관계개선은 우리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지금 자연은 사람들에 의해 너무나 많이 파괴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자연재해로 인한 큰 재앙이 올 수 있음을 현재 우리는 감지하고 있습니다. 세계곳곳에 나타나는 이상기온현상, 물의 오염, 공기의 오염 등은 아주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관계는 깨어지면 질수록 사람에게 손해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에 자연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자연자원을 절약하고, 쓰레기 줄이고, 분리수거 철저히 하고 세제 적게 쓰고, 산불 조심해야 해야 합니다. 사순절에 자연보호가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위의 것을 지킴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가치를 나타냅시다.


사순절의 메시지/마6:1-6
2001-11-21 10:39:43   read : 453

사순절이란 부활절 전에 금식하는 40일간을 말한다. 사순절을 가리킨 듯한 40일간이라는 용어 '테사라코스테'의 최초의 언급은 니케아 교회법(AD 325: 교회법 5조)에서 나온다. 이 관습은 본래 세례 예비 자들에게 규정된 금식에서 유래된 듯 하다. 그리고 40이라는 숫자는 모세, 엘리야 그리 고 예수 자신이 40일간의 금식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금식의 준수는 대단히 엄격하 였고 회개적 성격의 전례에서 다양한 특성들이 반영되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사순절은 축제들 을 금하고 자선을 베풀고 평소보다도 더 많이 종교적 행사들에 참여함으로 회개의 절기를 지켜가 고 있다. 여기에 상응한 사순절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난을 축복 으로 믿는 바로 그 마음이다. 고난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과 그 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겪는 고 난이다. 어두운 역사와 냄새나는 구조에 의해 억울하게 학대받는 하나님의 백성과 구원과 해방을 위해 노력하고 싸우다가 당하는 고난이다. 이 같은 고난이 값진 은혜요 가장 영광스런 축복이다. 이것을 축복으로 보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곧 의롭고 자유롭고 보다 밝은 새 역사와 구조를 만 들려고 하는 마음과 같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자세를 가질 때 어두운 역사는 바꾸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비뚤어진 구조는 온전케 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의 힘 이 있다.
예수의 산상수훈 가운데서 중반부를 차지하는 본 장의 강화(講話)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말함이다. 즉 마태복음 5장이 하나님의 백성될 자의 자격에 대한 원론적인 강화였다 면 본 장은 그러한 원리에 입각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실천적인 문제에 대한 말씀이다. 유대 교 경건의 3대 요소는 본문이 제시한 기도와 금식과 구제행위를 말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선교사 의 파송이라든지 장로의 임명 등 교회의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주님의 뜻을 전적으로 구할 때 금 식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주님께서도 공생애의 사역을 앞두고 40일간의 광야 금식 기도를 했던 것이다. 그런즉 금식기도 자체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요 고도의 경건의 행위로서 뜨겁고 깨어있는 신앙생활에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적인 금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금식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재를 뒤집어쓰는 흉한 모습으로, 되도록 침울하고 괴로운 듯한 얼굴 모양을 지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이나 큰길거리 를 방황하였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금식이 나쁘다고 금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금식의 고통으로 절박하게 간구하며 매달리는데, 또한 그것이 옳다고 필요한 일 이라고 판단 될 때 어느 아버지가 모르는 척 하겠는가?
지금 한국 사회는 IMF관리체제하에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경제가 흔들리고 있고 실업대란 으로 실직자가 수백만에 달하고 연쇄부도로 기업들이 무너지고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 그래서 불안 공포 자살 증후군이 생기고 집단 우울증 환자가 양산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8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오늘의 위기는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지난해 동안 양적 경제성장 에 몰두한 나머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노동 등 사회전반의 개혁과 시민덕성 및 공동체 윤리의 함양에 소홀한 결과 직면한 국가체제의 총체적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총체적 위기 극복은 무엇인가? 고통분담이라는 나눔의 철학은 우리 현실의 당위이지 않는가?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이고 손가락질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한 자기 개혁은 스스 로 이루어가야 하지 않는가? 나부터 금욕적 생활로 합리적 소비 생활을 위한 근검절약의 정신이 사순절의 생활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명과 역사 그 안에서 친히 들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상황 안쪽으로부터 우리들과 같은 인간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듣는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죄 때문에 숨이 막히고 쓸쓸하여 비참하게 된 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들로 바꾸어 놓는 사건이 다. 또한 십자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상징이 되고 있다. 예수는 우리가 당하게 될 그 처지에 계셨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나타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갖고 계신 초능력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악을 선으로 바꾸 시는 그 능력이다. 하나님의 자기 표현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계시가 되고 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의 순종의 모습을 보게된다. 그러면 우리는 헌신 하고 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능력과 사랑의 보장을 마음속에 받아 들여 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순종하는 제자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제 나의 정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보여주신 희생적인 사랑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사랑과 능 력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는 도전의 마음도 받아 들여야 한다. 이 도전의 마음은 우리들의 매일 생활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예수의 정신이 우리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사순절을 앞두고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주 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좀더 수고하고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좀 더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고난의 종이 되었던 주님과 같이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 어야 한다. 두 번째는 주일을 지키는 힘은 영적인데 있고, 주일은 소망의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날이기에 주일을 지켜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얻게 되는 영광과 보상에 관한 말씀에 귀를 기울 여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뜨거운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세 번째는 겸손을 배 워야 한다. 자기를 비우는 일이다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비우어야 한다. 학벌, 인맥, 지 방색, 지식, 재산, 지위, 명예, 공적, 경험, 기술 모두 다 비워야 한다. 그리고 종의 입장으로 내려 가야 한다. 나의 생각, 계획, 야망, 공로 모두를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 굴복시켜야 한다. 그것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일이다. 목숨까지 주께 드리는 낮아진 자가 되어야 한다. 사순절은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헌신의 날들이다. 그러나 영광스런 부활절이 약속되어 있는 소망의 날들이다.



사순절 기간에 힘쓰고 배울 것/히12:1-13
2001-11-21 10:40:12   read : 430

오늘 본문을 보면 [참고 인내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인내란 소극적으로는 [참고 견디는 것]이요, 보다 적극적으로는 [극복하고 승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특징 중 하나로써 [조급함]을 지적하고 있다.(딤후3:4)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조금도, 잠시도 인내하지 못한다.인스탄트 문화와 함께 쉽게 조급함을 드러낸다. 그래서 사순절 마지막 주간인 이번주는 [인내에 힘쓰고 배우는 ]특별한 기회가 되시기를 바란다.

1. 경주자의 모습에서 인내를 배우자.(1절)
본문1절을 보면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하셨다. 즉 인생의 경주장에서 [최후의 승리자로서 테이프를 끊을 때까지]인내로써 달려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오늘 '동아국제마라톤'이 열리고 있다.마라톤의 스타들에게"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사람 다 [인내심]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튼튼한 다리와 강화된 심폐기능이 중요하고,경주 당일날의 컨디션도 중요하며 날씨조건도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백리 길을 달리다 보면 중도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겠는가? 특히 오르막 길에서는 그런 마음이 더할 것이다. 실제 인생의 오르막길을 달리다가 넘어지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인내하고서 달린 사람에게만 최후의 승리자가 될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430년간의 노예생활로 노예근성에 젖어 버린 동족을 인도하여 내는 사명을 받아서 광야 40년의 생활을 함께 동고동락했다. 노예근성은 범사를 부정적으로 대하며 불평과 불만을 앞세우는 특징이 있는데, 430년 동안 젖어버린 것이 40년 사이에 고쳐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너무나도 어려운 인도자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 40년 사이에 당장 때려 치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인내로써]어려운 40년을 잘 달려서 [인내로써 승리한 인생]이 되었다. 이번 한 주간을 지내면서 다같이 마라톤 선수와 모세를 기억하고 인내를 배우시기 바란다.

2.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인내를 배우자 (2,3절)
십자가을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인내를 배우자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거역한 무리들에 대하여 일절 참으시고 ,게다가 그들을 용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인내를 배워야 할 것이다. 비록 내가 오해를 받거나 배신을 당하여도 모세가 당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요,또한 모세가 제 아무리 많은 거역과 배신을 당했었어도 예수께서 당하신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살다보면 때로는 온갖 오해와 배신과 거역함을 겪게 되는 것이 우리들 현실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참고 인내하면, 참고 인내하는 그만큼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고 이 한주간 특별히 인내를 배우시기 바란다.

3.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를 받으면서 인내를 배우는 성도가 되자.(5,6절)
5절 이하를 보면 [징계]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온다. 우리 모두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그러나 내게는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부분들이 남아 있다. [징계]란 [자녀를 자녀답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그분의 자녀답게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 징계는 다름아니라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나를 더욱더 복되게 하려고 주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징계를 받는 것이 다름아닌 자녀된 특권인 것이다. 그러므로 징계를 감사히 받으며 징계 받을 때에 인내하라는 것이다. 물론 징계 받는 그 당시에는 심히 고통스럽다. 하지만 징계의 훈련과정을 잘 마치면 그 결과는 [의의 평강한 열매]로써 주어진다 (11절) 정원사의 가위가 나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나무가 바르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그것처럼 꼭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징계받는 것이 사랑받는 것이요 복받는 것임을 알고, 징계의 과정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4. 교회생활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자.
어떤 교우는 주일예배만 드리고는 쏜살같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 교우에게 심방이나 상담을 통하여 [좀더 적극적으로 교회생활을 하라]고 권면하면, [그래봐야 사람들끼리 부딪쳐서 문제만 생기고 상처만 받게 된다]고 하면서 권면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물론 교회일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 낙망하거나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싫다고 해서 교회생활을 소극적으로 하게 되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실망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입을 때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된다. 또 내게 상처를 입히는 그가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온전히 주님만 의지하는 신앙인으로 변화를 받게 되며, 그러는 중에 [인내]를 배우게 된다. 예배만 드리고 교회생활을 제쳐버리면 [인내]를 배우지 못하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내게 고통을 주는 그 사람이 너무나도 불쌍하게 여겨지는 그 때에, 나는 이미 교회생활을 통하여 많은 인내를 배운 것이다.

맺음말 : 하나님은 내게 인내하는 훈련을 시키셔서 더 강하고 성숙한, 복된 자녀로 만들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마라톤에 경주자를 보면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면서, 징계를 통하여 그리고 교회생활을 통하여 참고 인내하는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하겠다. 이런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아멘



사순절, 말씀 안에서 내 자신부터/대하7:11-18
2001-11-21 10:40:49   read : 336

철학자들은 현대를 가리켜 혼란의 시대, 불안의 시대, 혹은 불확실성의 시대 등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정의들이 확실히 말하는 한가지는 곧 현대가 병 든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병의 원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료하기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에릭프롬은 이렇듯 건강하지 못한 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곧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나 원수로 대한다는 것과 서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사임에도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판단케 하는 '불신'과 사람을 사랑과 인격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는 수단으로 곧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생산과 향락의 방편으로 수단화하는 '도구화'라는 것이 병 든 사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병으로 가득 찬 시대가 오늘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질병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요즘에 와서 지진이나 홍수, 또는 새로운 질병, 혹은 이상 기후 등의 천재지변과 불안한 소식들을 자주 접합니다. 이렇다면 이러한 사건들이 과연 단순한 자연재앙에 불과한 것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치리라.' 병 든 현실을 보며, 많은 천재지변과 불안한 소식들을 들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건들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닫는 겸손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원인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모든 병의 원인은 인간의 도덕성과 인간성에 있기에 모든 것이 내 자신의 문제임을 깨닫고 영적인 각성을 촉구해 나가는 진실하고 겸손하며 신실한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내 자신과의 문제입니다. 주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다면 보다 근원적인 병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하거나 현상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보다 깊은 곳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사람을 몸과 정신과 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영은 하나님의 지배를, 정신은 영의 지배를, 몸은 정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세상 만물은 사람의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세계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관계 속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디 세상은 평화로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정상일 때만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할 인간의 영이 그만 육체의 노예가 되어버리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조화로운 화평의 관계는 깨어졌습니다. 이에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서로 보복하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모든 병리현상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병의 근원은 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이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히 병의 근원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요, 죄를 반복하고 회개치 않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죄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교만이라는 죄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마치 우상과 같은 과학주의라고 하는 지적인 교만과 권력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권력의 교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도덕적인 교만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종교적인 교만으로 팽배해 있습니다. 이러한 죄들로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인간이 병이 들고, 온 세상이 병이 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병에 대한 치유를 위해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여기에는 네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곧 네 가지의 회개를 뜻합니다. 첫째는 '겸비하라'는 겸손입니다. 스스로를 낮출 때 우리는 모든 문제의 진실을 알게되어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고 알라는 것입니다. 또한 '내 얼굴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는 회개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회개하는 바가 자신의 삶 속에서의 열매로 맺어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악에서 떠날 때, 하늘에서 보시고 들으시며 죄를 사해 주신다고 오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바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내 안에 있는 죄를 살펴야 합니다. 이러기에 죄를 모르는 것이 우리의 문제요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겸손이 없음이 현대의 불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 선지자 역시 지난날의 죄가 많더라도 회개하면 그 지은 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며, 오늘 행한 의로 살게 되리라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겔18:21-22). 스스로 겸비하고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회개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에 귀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을 지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바로 이 회개의 역사가 사순절을 맞이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래적인 자세입니다. 말씀 안에서 내 자신을 성찰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회개의 역사가 있는 사순절의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릎을 꿇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민족을 고치시고 이 나라를 고치실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눅23:13-25
2001-11-22 00:55:18   read : 77

사도신경에 대표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마리아와 빌라도입니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일 뿐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그들의 위치와 존재 의미에 있 어서 전혀 반대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므 로 하나님의 구원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야망과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 기 위해 세상과 야합하므로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예 수의 잉태를 받아들이므로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거부하므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지극히 존귀한 인간성을 대표합니 다. 그러나 빌라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한 비참한 인간성을 대표합니다.

빌라도는 AD26-36까지 팔레스타인을 다스린 로마 제국의 제5대 총독입니다. 그는 로마 총 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빌라도 는 로마기를 거룩한 도시로 가져와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했다고 말해 줍니다. 그뿐만 아니 라 그는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조각된 황금 방패를 성전 안에 걸기도 했고, 수도를 건 설하기 위해 성전세를 전유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빌라도 치정하에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로마 병정들이 그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일까지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눅 13:1)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통치지역 가운데 시리아 지역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시리 아 지역에 속한 유대 지역 행정 대리인으로 있으면서 그 지역 행정 책임과 재판권을 맡았습 니다. 본래 그의 근무처는 가이샤라 빌립보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 렘에 와 있을 때 예수께서 유대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빌라도에게 끌려오게 되 었습니다. 그 때 빌라도는 예수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 ○ 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 자칭 왕이라고 했다.

빌라도는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그때 역시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 주인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사건을 떠맡기려 했습니다. 헤롯은 오래 전부터 예수의 소문을 듣고 보기를 원하던 차에 예수를 직접 뵙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뵙기를 원했던 것은 인간적인 호기심에서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 켜 주지 않자 조롱하고 모욕한 뒤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본래 빌라도와 헤롯의 사이 가 좋지 않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해 모의를 꾸몄다는 시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시 2:2)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기력하게도 예수를 십자 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무릎 꿇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빌라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빌라도에 관한 전설 두 가지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디베리우스에게 자신이 심문했던 예수의 행적, 그가 운명할 때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에 대해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디베리우스 황제는 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보고 한 대로라면 그는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너는 당연히 그를 죽이 지 말고, 안전하게 나에게 데려 왔어야했다."고 했습니다. 그후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와 제 옆에 서있는 제 아내 프로클라(Procla)를 사악한 유대인들의 수에 넣어 계 수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든 세대와 모든 이방의 가족들이 너를 복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날에 나에 관해 예언된 모든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다시 올 때 나의 증인으로 서야 할 것이 다. 그때 나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와 나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자살하였고, 그의 아내도 함께 죽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전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스위스의 루체른이라는 도시는 매우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 도시에 필라투스(Pilatus)라는 해발 2121m가 되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필라투스라는 이름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는 의미 입니다. 이것은 빌라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황제 디베리우스가 병들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예수를 로마 로 보내 달라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고백 했습니다. 사자는 예루살렘에 사는 베로니카(Veronica)라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와 관련된 전설의 주인공으로 친절하고 자비심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베로니카는 예 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가시면서 땀을 흘리는 것을 목격하고 그의 손수건을 예수께 건네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손수건을 다시 베로니카에게 주었을 때 그 손수건에 예수님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가 디베리우스 황제의 사자에게 그 손수건을 주었습니다. 디베리우스는 그 손수건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디베리우스는 빌라도를 심문하기 위해 로마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입었던 솔기없는 옷을 입고 디베리우스 앞에 나타났습니다. 빌라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빌라도에 대한 디베리우스의 분노는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를 보냈습니다. 그 후 다시 빌리도를 불러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후 즉시 빌라도는 자살했습니다. 디베리우스는 빌라도의 목에 맷돌을 달아 티베르(Tiber) 강에 던졌습니다. 그 러자 곧 풍랑이 일고 비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그 시신을 건져 비엔나로 보내 로네 (Rhone) 강에 던졌습니다. 역시 똑같은 재난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루체른(Lucerne)으 로 보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연못에 던졌습니다. 그 연못은 아직도 거품이 일고 끓고 있 다고 합니다. 그 연못은 필라투스 산에서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와 관련된 이러한 전설에서 우리는 빌라도 치정 때에 빌라도가 예수의 사건에 분명히 연루되어 있었다는 확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설을 통해 예수의 사건이 공허하게 지 어낸 이야기가 아닌 지난 역사의 한 시점에 분명히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 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빌라도가 등장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부 터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자리를 확보해 두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매우 깊은 신학적인 배려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역사적인 관계성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고백에 서 무시간적인 일반 역사를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일반 역사의 한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펼쳐졌다는 사실을 중요시 합니다. 그 구원사가 펼쳐진 그 때와 그 시대 상 황은 도저히 무시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반사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그 때에 있었던 하 나님의 구원의 사건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반 역사가 중요시 됩니다.

한 자연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으 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백성의 계약의 역사 안으로, 해방의 역사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역사는 저 피안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에 서 일상적인 삶의 상황 안에서 전개됩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의 자리가 확보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해방의 역사가 이 현실의 역사 안에서 분명히 펼쳐졌습니다. 그것을 보증해 주고 확증해 주는 것이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역사적 인 인물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 의미는 신앙과 역사의 관계에서 구원사의 시간을 확증시켜 주는 의미 가 있는 동시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에는 거 룩하고 순결한 동정녀 마리아와 같은 사람만 관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구원사의 무대에 지성인이나, 엘리트나, 신분이 있는 사람만이 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 서의 족보에 나타난 대로, 변변찮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구원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신앙은 역사를 꾸며 내거나, 비현실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안에서 현실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다시 이해해 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와 연관되어 주목해야 할 중요한 의미 한 가지 더 있습니 다. 그것은 빌라도는 자연인이 아니고 그 시대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의 권세 아래서 한 지 역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사도신경에 정치적인 영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는 "위로부터 온 권세"를 불행하게도 그 본래의 목적대로 사 용하지 못하고 잘못 오용했습니다. 빌라도라는 한 인격에서 위로부터 온 권세는 매우 왜곡 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그 시대 로마에 항거한 열심당원도 아니며, 무정부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난 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소식을 전한 구원자였습니다. 빌라도는 질서를 수호하는 자로서 그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르게 세우는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질서를 파괴하는 불의의 세력과 손잡으므로 그의 권좌를 유지해 가려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빌 라도에게서, 또는 밑에서라는 말에는 이러한 정치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고난 받으사"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아래서 그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살았다거나 우울증 환자로, 금욕주의자로, 염세주의자로 살아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현실의 역사에서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셨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의 삶으로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의 삶이 무엇을 목적으 로 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의 고난의 삶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고난, 실패, 죽음의 현실에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증하게 됩니다. 예수의 고난에 서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삶의 현실로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 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믿으면 고난, 질병, 죽음에서 면제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고난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고난의 현장에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 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해 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시하는 회개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삶에서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책임 과 죄를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비참한 현실에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혼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관심 하고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운명으로 받아 들이거나, 고난 가운데서 자기 학대를 하지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의 근원은 인간 스스로 심신의 수양을 쌓아서 신비의 경지에 도달해 가는 무 시간, 무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지 난 날 역사의 한 시점 빌라도의 치정 때에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를 해방의 삶으로 부 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의 삶의 역사는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역사 안에서 새 로운 생의 패러다임을 갖게 되고, 삶의 새로운 원리들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게 됩니 다. 우리는 그 역사 안에서 낡은 것들을 하나 하나 벗어놓고 새로운 문화의 옷을 갈아입어 가게 됩니다. 그 새로운 역사의 지평에서 우리는 이 현실을 넘어서 영원한 본향을 우리의 생의 목적지로 삼게 됩니다.

이 현실의 역사 안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지평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창 녀도 있고, 마태와 같은 세리도 있고, 베드로와 같은 어부도 있고, 바울과 같은 박해자도 있 습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라합과 같은 기생도 있고 다말과 같은 여인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이 현실의 역사의 그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빌 라도는 이 구원사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 스스로 이 때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의 한 시점에서 예수를 직접 대면한 빌라도는 예수보다는 자신의 야망과 안전을 더 중 요시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와 함께 그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현재와 영원 모두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며, 자신 이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 서 자기를 위해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참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그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생의 여정에서 의도적이건 우연이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때의 선택은 그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사53:4-9,고전1:21-24
2001-11-22 00:56:06   read : 96

오늘은 사도신경 두 번째 명제 예수님에 관한 내용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대 목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십자가는 고대 사회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비극적인 형틀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 형 틀이 널리 사용되었던 국가들은, 이집트, 페니키아, 칼타고, 페르시아, 앗시리아, 인도, 그리 스, 로마 등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적인 형틀은 아닙니다. 본래 유대적인 사형집행 제도는 목매다는 것 (민25∼ 4), 불살라 죽이는 것 (레20:14), 돌로 쳐 죽이는 것 (레20:27)등입니다. 유대 관습에서 사람 을 나무에 달 때에는 죄지은 사람을 죽인 후에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신21:22∼23)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의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신21:23) 밤 동안 반드시 나무에 달린 자를 끌어내려 땅에 묻었습니다. 유대 관습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 (신명21:23)였습니다.
십자가 형틀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무섭고, 수치스러운 형틀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 가형은 주로 정치법, 반사회적인 범에게 집행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로마 황제와 로마에 반역한 죄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보고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가 전 하는 십자가에 관한 기사에서는 예수께서 운명의 순간에 하나님과 단절로 깊은 고통을 느끼 셨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습니다. 그 때에 총독의 군인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로 들어가서, 예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힌 다음에,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였습니다. 얼마동안 예수를 희롱한 다음에 다시 예수가 입었던 옷을 갈아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서,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 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들은 골고다(해골)라는 곳에 이르러,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 께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 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 때에 강도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달렸습니다.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세 시 쯤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셨는데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운명하셨습니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는 지진이 일어났 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아리마대 출신으로 요셉이라고 하는 한 부자가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예수 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삼베로 싸고, 바위를 뚫어서 만든 자기 새 무덤에 모신 다음에, 무덤 문에다 큰 돌을 굴려 놓고 갔습니 다." 이상이 마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율법에 충성을 기울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와 잘 계몽된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그 어리석게 여 겨지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사도신경 고백에서 예수와 관련된 이 명제를 빠트리지 않고 고백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한 인간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십자 가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늘 저는 십자가를 통해 비춰지고 있는 그 신비스러운 능력과 지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 다. 만약 저의 눈에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이었다면, 이 시간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 다. 저에게서 십자가는 희망의 문이며, 저의 미래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저의 삶은 희망 이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저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희망이며, 인류의 미래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인간 예수의 생의 역사와 전기적인 면에서 그가 누구였으며, 그가 무엇을 목 적으로 하고 살았는가? 를 말해주는 확증의 표식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나사렛 예수가 십 자가에 처형된 사실은 역사적으로 잘 보증된 예수의 역사에 속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가 완전히 인간이었다는 것은 이미 예수의 탄생에서 확증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의 십 자가 사건에서 예수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의 생을 살았던 인물임을 더욱더 확증해 줍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그 죽음에서 그의 인간성과 인간 존재 자체가 엄숙히 궁극적으로 고려된다."고 했습니다.

이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삶의 과정을 빠트리지 않고 연대하여 살아가셨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예수의 삶의 역사 의 절정이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가 어떻게 인간과 연대 가운데서 살아가셨는 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 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인간이 겪은 모든 고난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경험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타적인 사람일 수록 다른 사 람과의 연대 가운데서 그들의 고통에 참여합니다. 어린아이를 극진히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 린 아이가 아플 때 함께 아픔을 느끼고, 아이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합니다. 그것은 아이와 사랑의 연대감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인간과 연대에서 살아가신 예수의 생의 역사에서 절정입니다. 십자가는 예수가 어떤 생을 살아 가셨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증해주고 있 습니다.
하인리히 포겔(Heinrich Vogel)은 이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없는 자리가 어디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면 그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만 있는 병동, 아우슈비치와 같은 집단 수용소, 죽음의 가스실, 죽음을 기다리며 서있는 감옥의 행렬, 평생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히로시마의 희생자들, 혹은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다른 자리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 상에서 가장 깊은 절망의 자리는 하나님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던 그 인간이 하나님 자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달려있는 곳이다."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자리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의 역사에서 그 누구나 이 절망의 자리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의 자리며, 죽음의 자리 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자리에까지 내려가셔서 인간 존재의 삶과 자신을 연대시키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과 단절을 체험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 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그러한 예수의 삶의 역사의 절정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연적이거나 돌발적이거나 예정된 것 이라기 보다 인간 예수의 삶의 역사의 마감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해의 자리며, 속죄의 자리, 새로운 희 망의 문, 그 자체입니다.
어떤 여의사가 의과 대학생 시절부터 호기심에서 복용하던 마약이 나중에는 완전히 습관이 되어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문의가 되고 나서 점점 마약으로 깊이 빠져 들 어가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어느 비오는 날 저녁 강가 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과 좌절의 자리에서 죽음을 체험하며, 마지막으로 하나님 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잠시 후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임하면서 자신이 마 약의 힘에서 풀려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평생을 마약 중독자 갱생을 위해 헌 신하며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절망과 단절,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한편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부활의 아 침이 내다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십자가 형틀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단정해 버 리거나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 비젤은 그 절망 의 자리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 십자가에 달려 고통하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 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고난에서 찾은 해답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인간은 그 자리를 피해갈 수 없습 니다. 인간의 삶의 그 어둡고 절망적인 부분을 체험해가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하고, 깊은 허무와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유토피아와 허무주의 사이에 놓여있는 매우 좁은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유토피아나, 허무주의라는 허구적인 생의 환상 의 길에서 가 아닌 , 십자가의 좁은 길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 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로흐만 교수는, 십자가는 유일한 우리의 필요이며, 우리의 희망 을 세우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희망은 권력의 사랑 안에 있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사랑의 능력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희생적 삶, 자기를 내놓는 삶,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인간의 현실적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드리고 체념 가운 데서 살아가는데서 십자가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 삶은 악, 불의, 억압에 대해 저항하고, 의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결단의 삶, 그리고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의 삶과 자신을 연대시키는데서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가 계속해서 불의에 대해 저항해 오고, 디아코니아를 포기 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에쿠아돌의 로메로 신부는 매우 사색적이며, 독서를 즐기며, 조용히 살아가는 명상적인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그 지역을 담당하는 주교직 책임을 맡아 현실에 동참했을 때, 그의 앞에 전개된 세상은 도저히 침묵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정의, 공 의, 사랑,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는 군사 독재 치하에서 무참히 죽어가며, 고통당하는 민중들 과 함께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암살되었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의 희망 이며, 미래입니다. 성 금요일은 인류 역사의 동터오는 부활의 새 아침을 알리는 거룩한 날입 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반드시 죽 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잠깐 기절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예 수의 하나님께 복종의 삶, 헌신의 삶, 사랑의 삶의 마지막 마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서 그의 삶을 끝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인간 의 마지막 것까지 감수하심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 고 죽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 이상 더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자신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 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끓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분명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여겨지는 것 자체가 인간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 인가를 모른 다는 것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 의 생각대로 고상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고, 도적으로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라는 절망의 자리는 우리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 나 있다는 것, 우리는 결국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 는 인간의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이 허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십자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사 랑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갈6:14-
2001-11-22 00:57:08   read : 166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도록 하신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생각할 때, 신자들이 제일 먼저 생각 하는 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죽음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상당히 많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성격을 구분하자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말씀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에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로마서 5:8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라는 표현입니 다. 특히 "아직" 이라는 표현은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때는 여전히 우리가 죄인의 상태에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선인이나 의 인을 위해서 죽는 자는 혹 있을지 몰라도 죄인을 위해서 죽은 사람은 한 분을 제외하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아직 죄인 있 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심은 정말로 죄인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그 바탕을 이루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 습니다.

2)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확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를 향한 긍휼과 사 랑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우리로 하여금 멸망을 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자기의 독생자를 세 상에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 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깊고도 넓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옛날 어느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하나님은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분반공부를 하고 있었습 니다. 선생님이 한참 설명을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잊어버리고 계신가봐요, 그러니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옷도 누더기를 입고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살게 되지요." 그 때 또 다른 아이가 일어섰습니다. 그 아이도 역시 가난하여 헌 누더기를 입고 있었습니 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모두 기억하고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좋은 부모님을 주시고 행복한 가정을 주신 것이 아니겠어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믿 으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2. 인류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 님의 능력이라. 고 했습니다.

1)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으로 인해서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 으로 자신을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원에는 필연적으로 죄사함을 동반하는 희생이 뒤따라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숨어버리자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지어 입히셨으 며, 구약에서는 족장시대와 왕정 시대에 걸쳐 동물이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피 흘림을 동반한 희생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죄사함입 니다. 이 죄사함을 위해서는 피흘림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에서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2)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피흘림을 동반하였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죄사함, 그것은 구원을 이루는 선결 조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피흘리심으로 죄사함을 가져다 주셨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을 곧 우 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 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대학 친구인 두 젊은이가 같이 졸업하고서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려고 세상으로 나섰습니다. 한 친구는 유명한 판사가 되었고, 다른 친구는 사업가가 되어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사업가가 된 친구는 증권에도 손을 대어 짭짤한 재미를 보았지만, 어느 날 그만 주식이 폭 락하여 모든 재산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위치를 다시 회복하고자 많은 돈을 횡령하였다는데, 그만 그 일이 발각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죄상을 인정하였고 판사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려 줄 것을 호소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재판을 담당한 판사가 바로 대학시절 함께 공부했던 옛 친구 였습니다. 법정 안은 온통 과거의 우정이 판사의 선고에 어떤 영향을 미칠는지 에 대한 추 측으로 술렁거렸습니다.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할 때, 장내에는 방청객들이 숨을 죽이고 판결 내용을 기다리고 있었 습니다. 판결 내용은 법이 정한 가장 무거운 벌금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실의에 빠진 피고인이 법정을 막 떠나려 하자, 판사인 옛친구는, 옛 친 구는 자신의 법복을 벗고 피고인에게 달려가 그를 얼싸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자네 벌금을 지불하겠네." 그러고는 그 죄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결국 친구의 벌금을 대신 지불함으로 인해 판사는 심각한 재정적인 위기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악된 행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 받고 정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 로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값비싼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십자가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 라. 고 했습니다.

1)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영광과 권능의 자리입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고난이며 저주의 자리였 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권능과 영광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 님의 뜻에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리스 도를 부활시키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심으로 모든 영광과 권능을 누리게 하셨고, 모 든 만물로 예수님께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고난이 없는 승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 난 후에 얻은 승리라야 참다운 승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으려 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2)주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의 십자가도, 부끄러움의 십자가도 아닙니다. 그것은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심으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한 분 외에 어느 누구도 우리의 구원을 담당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외에 어떠한 것도 우리의 구원을 보장할 수 없습니 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온전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믿음의 주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된 우리를 향한 하 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이 표현된 것이며, 우리에게 죄사함과 구원 을 가져다 주며,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란 무엇인가/골1:20-
2001-11-22 00:58:06   read : 222

오늘날 교회의 표시와 사랑을 나타내는 십자가는 본래 사형도구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페르 시아에서 저항하는 외국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주로 탈주 한 노예, 비밀폭로, 내란선동, 살인, 반역 등의 중죄인에게 적용되었습니다. 특히 팔레스틴에 서는 십자가형이 정치적인 폭도들의 소요억제책으로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요세푸 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잦은 반란과 항거가 일어나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 던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반역죄로 기소된 예수님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형이 집행되던 골고다 언덕에는 세로 기둥 몇 개가 항상 세워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가로 기둥을 메고 골고다까지 걸었습니다. 이때 죄인의 가슴에는 죄목을 쓴 명패를 붙이는데 나중에 십자가의 머리 부분에 달게 됩니 다. 예수님의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쓰여 있었습니다. 한편 죄인이 십자가를 지고 가기 힘들 경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지게 할 수 있다.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의 시몬은 마침 그 곁에 있다가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 는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수태하지 못하는 이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자식이 없는 것을 최고의 저주로 여기는 유대에서 이런 표현은 장차 다가올 예루살 렘 멸망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말해고 있습니다. 한편 골고다에 도착한 예수님께 로마 병사들이 쓸개 탄 포도주를 주었는데 이는 사형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종의 마취제로 제공되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몸서리쳐지는 사형도구였습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이후로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의 표시입니다. 신 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 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1)십자가는 하나님의 형벌로 여겼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죄를 죄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출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 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저주를 받는 것은 저주받을 일에 했기 때문에 그 일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여 겨지고 있습니다(슥5:1-3).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축복과 저주 중 의 하나를 선택하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습니다(신27:13-26). 이와 같이 저주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저주로서의 율법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짊 어지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인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갈3:13). 율법의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써 구체화된 것입니다(신27:26). 율법의 저주는 곧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벌인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2)십자가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죽은 사람의 시 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음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수10:26).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한번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는 영원한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며 인간으로부터도 버림받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천국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으므로 하나님의 규정대로 율법의 저주 아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저주는 속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 었습니다. 율법을 위반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저주인 영원한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형벌과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검상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은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형벌과 죽음을 대신해서 십 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음과 형벌에서 살아나 하나 님의 기뻐하시는 신실한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십자가는 속죄의 표시입니다. 롬 3: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 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라고 했습니다.

1)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율법의 저주에 의하여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이 세 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들이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 리를 위하여 주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5)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 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1:7)라고 고백했습니다. 예 수님의 십자가는 수많은 제물로써 속함을 받아야 했던 구약시대의 제사를 폐하고, 예수님이 친히 제물이 되심으로 단 한번에 우리의 죄를 사하는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히10:4-14). 그 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속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입니다.

2)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구원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 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고 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이로서는 구 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4:12)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 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요3:14,15). 그에 비하여 자신의 임의대로 세상과 벗하 며 살던 자들은 주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속죄 행위 를 배반하고 주님의 구원을 불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은 것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나를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골 2:13-15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 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 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 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1)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는 치욕과 절망의 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 니다. 그들이 따르던 메시아라고 하는 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 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십자가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 니다. 성경은 분명히 "또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라고 했습니다. 또한 본문의 말씀은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1:20)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치욕과 패 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는 가교가 된 것입니다.

2)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단의 권세를 이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계속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일회적인 승리가 아닙니다. 물론 우 리는 세상에서 계속 사단과 대적하겠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승리에 대한 보증이 되시 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사단의 권세를 영원히 이기는 역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 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고전1:23). 또한 "예수 그리 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습니다. 주님은 사단의 악랄한 정체를 드러내시고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절망과 죽 음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좌절의 상징이 아니라 승리와 영생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원수 되어 마귀의 권세 아래 살다가 멸망할 존재를 살려주셨습 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서 놓여 자유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친 히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화목하 게 되었습니다. 죽음에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 혜가 늘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신자의 삶에 원리/빌1:12-26
2001-11-22 00:59:40   read : 151

여러분, 하루 하루를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십니까? 하루를 살고 잠자리에 들 때 하루를 돌 아보면 후회 없는 삶을 사셨습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부족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늘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써보낸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 은 주안에서 기쁨을 가지고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4장으로 된 짧은 성경 입니다. 그런데 기쁨이라는 말이 16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는 가목에 있 을 때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쁨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 신자의 삶은 항상 기뻐하며 살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 야 합니다. 미국 프린스톤 대학교 총장을 지낸 죠나단 에드워드는 평생토록 다음과 같은 생활원리를 따 라 살았다고 합니다. "①교만치 말자. ②복수하지 말자. ③범사에 감사하고 살자. ④임종에도 결코 후회치 않을 일을 하자."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철학이 있고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신자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삶의 원칙이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인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살펴보고 우리도 삶 의 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2-18).

사도 바울이 빌리보서를 쓸 당시는 옥중에 갇힌 몸이지만 자신의 매임이 도리어 복음의 진 보가 된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빌 1 : 12).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다가 옥중에 갇 혔을 때 원망이나 시비에 빠지지 않고 좌절과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고난 받음으로 도 리어 예수님을 전하는 효과가 있었음을 생각하고 기뻐했다는 것은 바울이 얼마나 예수님 중 심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난이 많은 믿음의 형제에게 용기가 되어서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말 씀을 전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빌 1: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 다. 어떤 사람은 순전한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나 어찌되 었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진 것을 기쁘게 여기고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순전치 못한 생각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 이 있었으나 바울은 주의 복음이 전해짐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을 보면 자신이 비난을 당 하고 시기와 질투를 당하여도 복음이 전해짐을 기뻐함을 그가 얼마나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9 : 16절에 말한 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으로 생각한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우리 검상교회 성도의 삶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으며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살아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자신에 게는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0여년 전 미국의 무디 선생이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던 한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무 디는 하루종일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버스를 기다리던 그 사람에게도 "예수 믿으시 오." 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건 안 믿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하고 서 있던 사람 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퉁명스럽게 무디는 "당신이 나에게 화내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은 믿 어야 합니다." 하고 자꾸 강조했습니다. "당신,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요." 하고 그가 묻 자. 무디는 "그것이 내 직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서 있던 그 사람이 "아. 당신 이 바로 무디 선생이시군요." 하더랍니다. 이렇게. 무디를 알아볼 정도로 그는 어디에서나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에 사람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무 식하니 그만두고. 저 사람은 유식해서 곤란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전도할 상대가 없습니다. 반대하는 자나 무식한 자나 지식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가릴 것이 없습 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형상. 즉 속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므로 외형적인 것에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바울처럼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다 빚진 자라는 태도를 가 져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복음을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누구에게나 빚 을 졌기에 이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보상 없이 당연한 일로써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 니다. 전도는 직접전도와 간접전도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직접전도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 해서 노방전도가 있습니다. 거리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 집집마다 다니며 하는 전도,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는 것등 직접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간접전도는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빛 과 소금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 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느 때 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삶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9-21).

바울 사도는 사나 죽으나 즐거우나 고난이 오거나 예수님을 존귀히 되게 하려고 산 사람입 니다. 빌 1 : 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 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 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고전 6 :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했 습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가로 산 것이니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라. 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소요리 문답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사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는 길이 무엇인가? ①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②하나님을 제일로 경건히 섬겨야 합니다. ③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④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봉사와 섬김의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삶 이란 주님 영광을 들어내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도는 말하기를 "현대인의 정신적인 최대의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에 성실할 때 주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계에 서 가장 빠른 여자" 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 라는 선수입니다. "그리피스 조이너" 가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가 운데 미국의 NBC방송의 한 기자가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녀 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 으로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이긴 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인생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인생의 살맛 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복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립니까? 학생들은 공부해서 다 일등하고 서울대에 수석 으로 합격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니까? 여러분의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이 번창해서 돈을 많이 하나님께 바쳐야 영광이 됩니까? 도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세상에서는 무엇이든지 잘되면 자신이 잘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잘못되면 조상을 탓합니다. 심지어 조상의 묘까지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 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검상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은 검상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24-26).

사도 바울은 현재의 삶보다는 천국의 삶을 더 소원하였습니다(빌 1:23). 그는 사는 것도 그 리스도요 죽음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의 사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다고 여겨진 까 닭에 삶을 바랐고 또한 살게 될 줄로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개인의 유익이나 이해관계로 처신하지 아니하고 오직 교회를 위하여 도움이 되고 유 익을 위해서 살았고 그와 같이 살았습니다(행 20 : 20-21).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도 있고 거침돌이 되는 자도 있습니 다. 우리는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들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하고 남을 위 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학자 본 훼퍼는 신자는 남을 위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님처럼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합니 다. 그렇게 살 때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교회가 은혜롭고 자기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주변에 술집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시끄럽고 풍기가 문란해서 교인들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 술집이 불이라도 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오는데 천둥과 벼락이 치더니 그 술집에 벼락이 느닷없이 때려서 그만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난 후 술집 사람이 교회에서 불이 나라고 기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법원에 고소를 했습니다. 교인들과 술집사람이 법정에 서는데 재판관이 교인들에게 묻 기를 "정말 술집이 불타기를 기도했습니까?" 했더니 "천만에요. 우리는 기도를 전혀 안했습 니다." 재판관이 술집 사람에게 물으니 "저 사람들이 기도해서 불탔습니다. 정말입니다." 라 고 답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재판관이 빙그레 웃으며 판결을 내렸습니다. "교인은 믿음이 없고 술집 주인은 믿음이 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를 통해서 살고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고 믿음이 커가고 교회를 통해서 하 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의 양식의 창고입니다. 축복의 보고입니다.

여러분, 검상 교회를 부흥하도록 기도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 교회를 여러분의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 께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 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 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 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 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 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톤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 창조' 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 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 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자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 들을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셨 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라고 했습니 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말 중에 "사람이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 다." 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일정한 나이에 다다르면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 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이야말로 우리의 작품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신자의 삶의 원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살고 주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살며 교회 유익을 위해 봉사하고 섬 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책임지시고 도와 주시고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리자/막14:3-9
2001-11-22 01:00:29   read : 162

주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시몬 의 집을 형제처럼 자주 찾으셔서 식사를 하시거나 쉬기도 하셨습니다. 시몬의 집은 축복 받 은 집입니다. 주님이 부담없이 오가며 들려 쉴 수 있는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문둥병 을 고침 받기는 했으나 추해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는 문둥병을 하늘의 저주받은 병으로 생 각했으며 또 더러운 병이기에 사람들이 시몬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시몬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불쌍한 사람, 슬픔에 잠긴 사람, 소외당 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를 옥합에 담아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 습니다. 주님은 이런 일을 아름답게 보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이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바로 섬기는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 다. 이 여인처럼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고 우리도 옥합을 깨뜨리는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옥합을 깨뜨림은 최상의 것을 드려서 섬겨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최상의 것이라야 합니다. 중간쯤의 것이거나, 찌꺼기, 혹은 죽은 재물이나 병든 재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온전한 재물이어야 합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쭉정이가 아니라 알곡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부어 진 향유는 나드라라는 향유로 인도에서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인데 작은 옥합에 담긴 것이 300데나리온 (현 시대도 약1,500만원 정도)이었으니 이 여인에게 있어서 그것이 아마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귀한 향유가 옥합을 깨뜨릴 때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귀하고 값진 것을 드리려면 욕심의 벽과 인색의 벽이 옥합이 깨어지듯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향유처럼 귀한 것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 명예, 지식, 기술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께 쏟아 놓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의 껍데기인 옥함이 아직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 주위에는 이 여인 외에도 향유를 가진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이 여인만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린 것은 주님께 은혜를 받고 그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음으로부터 주님께 받은바 은혜를 깨달아 드리고 헌신하고 싶은 감동이 우러 나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 앞에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서 그 속에 든 향유를 쏟아놓지 못하 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죄와 죽 음에서 살리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 크신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은혜를 느끼고 감사하면서 우리의 옥합을 깨드려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순간 나 자신의 향유는 무 엇입니까? 생명입니까? 지식입니까? 지위 또는 물질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주님을 위 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을 드릴 때 그것은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축복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림은 전부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향유는 한두 방울 뿌리는 것이 향유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그 안에 들어 있는 향유 전부를 부었습니다. 깨어진 옥합에 향유가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 는 대상을 위해 그 분의 뜻을 위해 최대의 가치를 가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기를 "율법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하고 물었을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 중에 "다하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일부분 이 아닌 최선의 것으로 숨기는 것이 없이 그대로의 것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중대한 일일수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하는 일은 중대한 일입니다. 이 중대 한 일을 위하여 우리의 전부를 드리며 자기의 귀한 옥합을 깨뜨릴 때 축복된 결과가 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되어 주인이 맡기신 일을 최 선을 다해서 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주님께 인정 받게 되는 것입니 다. 주인이 맡기신 일을 소홀히 한다면 주인이 와서 엄하게 때리고 벌을 주실 것입니다.(마 24:48-51)

옥합을 깨뜨림은 주님만을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만 부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쓰 지 않았습니다. 주님만 섬기고 싶은 감동된 마음이 있어서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우리가 섬길 대상은 주님뿐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서 헌신하고 경배 할 대상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선 나의 것, 가족의 것부터 생각한 다음에 주님을 위해 사용할 때가 많이 있 습니다. 우리의 귀한 것들이 주님만을 위하여 주님의 선하신 뜻만을 위하여 쓰여져야 하겠 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기쁘고 가치있는 일이겠 습니까? 이러한 자세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축복된 감동입니다. 우리는 무거운 죄악의 짐을 내려놓게 하신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게 되었 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자녀가 받는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 므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주님을 기쁘게 한 여인처럼 지금 우 리도 옥합을 준비합시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아까워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깨뜨려 주님께 드리십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귀한 행실에 대하여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눅12:13-21
2001-11-22 01:01:28   read : 61

지난주간 우리 나라의 최대 재벌 중에 한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조객들이 줄을 이었고, 그의 생존의 명성과 함께 각계 각층으로부터 문상 행렬이 장관 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그도 모든 인생의 가는 공도(公道)를 가고야 말았습니다. 즉 땅에 묻히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공도입니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에는 그에 대하여 평가가 내립니다. 벌써 어느 대학에서는 그의 <경영 철학>을 강의하겠다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사람들은 그것을 배워보겠다는 말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한번 왔던 인생, 한번 가는 것은 정해진 일이지만, 그러나 가고 난 후에 는 두 가지로 평가가 나올 것입니다. 얼마나 유익 된 삶을 살고 갔는가? 아니면 얼마나 어리석게 살고 갔는가? 이 두 가지로 평가 될 것입니다.

1. 그러면 성경은 어떤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였습니까? 오늘 본문을 흔히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주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게 된 동 기는 이러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형에게 명하여 자신에게 돌아올 부모의 유산을 나누어주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요구를 받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말씀하였습니다.

비유의 내용인즉 이러합니다. 어떤 곳에 한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게 되어 자신의 수확을 쌓아둘 곳이 없어 그래서 창고를 더 크게 지어 거기에 쌓아두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 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富饒)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 다. 즉 재물을 모아놓고 자기의 향락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가는 인생이 바로 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의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버십시오. 그리고 그 돈을 주님을 위해 쓰십시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을 버 는 자체가 나쁘거나 어리석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평가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재물이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이상한 특성이 있습니다.

2. 즉 자기를 위하여 쌓아놓은 재물에는 만족과 감사가 없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더 욕심이 생기기 때 문입니다. 이제 나는 이만큼 벌었으니 만족하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재물이 갖고 있 는 특성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물질과 부가 얻어졌다고 그렇게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노력과 능 력으로 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누구인들 돈을 벌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또한 재물이 갖고 있는 특성입니다. 소출의 풍성함은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농사를 짓는 경우에서도 풍우(風雨)외 날씨와 기온(氣溫)의 조화(調和)가 있어야 합니다. 인 간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번에 폭설(暴雪)로 특용작물을 하던 농민들을 보십시오. 이상 기온으로, 지진으로, 화재로, 홍수로, 구제역(口蹄疫)으로, 광우병(狂牛病)으로 세계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고기집들이 울상이라고 합니다. 광우병의 공포로 전 세 계가 떠들썩합니다. 그래서 생선 집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누가 그렇게 될 줄 예측이나 하였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은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장사 도, 무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신의 것을 팔아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이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인간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최고의 선행입니다. 재물은 자기만을 위하여 쌓아두면 이렇게 만족과 감사가 없습니다.

3. 또 자기만을 위해 쌓아놓은 재물이기에 어리석다고 하였습니다. 옛 글에 돈은 선비의 마음도 흐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황금(黃金)은 흑사심(黑士心)이라고 했습니다. 재물이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붙잡 아놓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쌓아두기를 원합니다. 부자들이 왜 부자들이 되었습니까? 대부분 안 먹고 안 쓰고 모아놓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절약(節約)과 검소(儉素)는 미덕입니 다. 그러나 인색과는 다릅니다. 자기를 위하여 쌓아두면 인색한 사람들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에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표준역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이 이와 같은 사람 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재물은 필요한 것이지만 자기를 위하여만 쌓아둘 때 어리석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재물을 바르게 쓸 줄 아는 사람 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에 주님의 사랑을 묵상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재물이 다 있습니다. 비단 물질적 재물만이 재물이 아닙니다. <지식의 재물>, <기술의 재물>, <건강의 재물>, 모든 것이 다 재물입니다. 내 자신만을 위하여 쌓아둔 재물이 무엇인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만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정이 없습니다. 얼마나 더 큰 창고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오늘 우리 나라의 형편을 보면, 모두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더 큰 창고만 지으려고 하다 이 렇게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돈을 벌었으면 쌓아놓으려고만 했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쓰려고 하지 아니 했습니다. 그래서 욕심으로 더 벌려고만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돈의 절반이 서울에서 거래 되고, 서울에서 거래되는 절반 이상이 모두 기독교인들의 의하여 거래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만큼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 손에서 움직인다는 말일 것입니다. 가만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지혜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물질도 주십니다. 그러 나 그 물질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시험해 보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가 증명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형편을 보면 돈과 권력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창고만 더 크게 지을 생각들 뿐이었기에 이런 결과 가 초래되었다고 봅니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요 경제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유럽 사회가 어떻게 저렇게 자본이 형성되고 복지국가를 형성하였는가?' 그것은 기독교인 마음 속에 재 물의 주인이 하나님이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처럼, 오늘 우리 한국의 크리스천 들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필요합니다. 돈을 벌어도 그것이 내 것이 아니란 생각들이 있 어야 합니다. 주인은 하나님이란 생각입니다. 나는 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월급 사장이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기독교인의 생활 윤리가 바로 정립되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이 청지기직 의식이 바로 서면 자연히 정직해지고, 근면해지고, 검소해지고, 절약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어떻게 저렇게 자본이 축적되고 복지국가들이 되었는가 하면 재물은 나의 것이 아니란 그 의식에서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필요한 사 람들을 위하여 골고루 혜택을 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각종 사회보험과 생 활보장제도입니다. 그러므로 돈 번 사람들 이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왜 재벌들에게 곱지 못한 눈길을 돌립니까? 모두 자기만을 위해 더 큰 창고만 늘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부정직한 방법으로 말입니 다.

실이 그렇습니다. 돈은 나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돈이 왜 돈이라고 합니까? 돈은 주인이 없이 돌고 돌기 때문입니다. 돈은 이 지갑에서 저 지갑으로 항상 주인이 바뀝니다. 잠시 머 물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돈을 자기 앞으로만 쌓아 놓으려고 합니 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쩌면 더 돈을 밝히는지도 모릅니다. 재물은 자기만을 위해 쌓아놓으면 어리석게 됩니다. 서양 속담에 자식을 망하게 하려면 재 물을 물려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물과 함께 신앙을 물려주지 않으면 자식은 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재벌 이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물려지지 않고 재물만 물려주면 얼마 못 가서 다 말아버립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필요하기에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 쌓아두면 어리석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였습 니다. 십일조 정신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 손으로 벌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버리게 하 는 정신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쓰라는 것이 십일조 정신입니다. 그런데 그 정신이 훼 손되었을 때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치 (懲治)하시곤 하였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저들의 재물을 적군에게 빼앗기게 하였고, 불타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반복된 교훈입니다.

중세기는 교회가 세상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로마 교황 중에 <노켄티어스>(1243-1254 재직)는 금은보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 같습니 다. 하루는 그가 금과 은으로 된 식기들을 감상하면서 당시 유명한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 스>(1224-1274)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하고 말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지 않소이까?' 아퀴나스가 대답하였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라 하고 말할 수 있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이 대화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한 말을 인용하 는 대화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은 황금을 좋아하는 교황에게 충고한 말입니다. 즉 물질을 쌓아놓기만 하면 기적도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 마음에 재물에 대한 집착이 그 어느 때 보다 강하다보니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가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도 지났다는 말처럼, 신앙적 모험과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크리스천들에게는 은과 금은 있지만 예수의 능력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에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 주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나만을 위해 쌓아놓은 재물이 있다면 이제 하나님을 향해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더 큰 창고를 지을 생각보다는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 겠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내 재물과 함께 역사 하실 것입니다. ♣


대속의 고난/마26:57-68
2001-11-22 01:02:17   read : 181

오늘부터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지내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이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당한 고난이 특별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여러가지입니다.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로 당하는 고난이 많습니다. 즉 가난 때문에 겪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질병으로 인한 고난도 있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사고로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사고없이 하루를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루에도 교통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에도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보면, 하루하루를 무사고, 무병으로 건강하게 지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 르겠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고난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의 삶인지도 모릅니다. 그러 나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당한 그런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이 당한 고난은 특별한 고난입니다.

1. 주님이 당한 고난은 대속(代贖)의 고난이었습니다. 대속(代贖)의 고난이란 대신 받은 고난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받지 않을 고난임에도 불구하고, 대신 그 고난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세상 에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두 자기와 관계되는 고난입니다.

가끔 남의 잘못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도 있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데 와서 들이받아 뇌를 다쳐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고통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이라도 그것은 그 한 사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지만 예수 그리 스도의 고난은 모든 인류의 범한 죄와 관계된 고난입니다. 즉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고 난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당한 고난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고, 주님의 당한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을 받은 것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 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면서 세상과 깊이 짝했 던 생활에서 다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으로 되돌아서야 하겠습니다.

2. 먼저 주님이 당한 고난은 불의한 재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이 당한 재판처럼 불의한 재판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미리 각본에 의하여 짜여진 요식 행위의 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벌써 죽이기로 마음먹고 재판하는 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과 같은 그러한 재판을 일컬어 빌라도 법정의 재판이라고 하는 말이 생 겼습니다.

과거 민주화 투쟁을 하던 시대에 이렇게 짜여진 재판을 받아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 니 어쩌면 지금도 그런 경우가 없다고 누가 단정하겠습니까? 세상의 불의한 정권은 언제나 그 권력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빌라도의 재판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도 지구촌 어디에서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경우들이 모두다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법정의 판결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제사장과 로마인의 총독에게 끌려 다니면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 먼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갔습니다. 이것도 절차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대제사장의 장인에게 먼저 예수를 끌고 가도록 했겠습니까? 그 만큼 원로 안나스의 입김이 강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율법에 저촉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숨어서 말한 일이 없고 공중 앞에서 드러내놓고 하였으니, 내게서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안나스의 부하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면서 네가 대제사장에게 그렇게 불 손하게 답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실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누구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말하던 자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지칭하였는가? 두 말할 것 없이 나사렛 예수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자이었습니다. 재판할 것도 없이 그는 예수를 로마관청으로 넘겼습니다. 로마 관청으로 끌고 가게 한 것은 유대인에게는 사형권이 없음으로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판결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죽을 죄인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민 심을 의식하여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나는 이 사람의 피와 상관이 없으니 너희 마음대로 하 라고 책임을 넘겨버렸습니다. 뻔히 죽을 죄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자신의 권좌의 유지를 위하여 비겁하게 빌라도는 예수 를 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빌라도의 법정은 불법의 법정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 다. 오늘도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로부터 매번 예배시 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 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라 는 말을 듣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일입니까? 그러기에 권력의 책임의 자리가 그렇게 두렵다는 것입니 다. 이렇게 주님은 불의한 재판으로 인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을 재판한 법정은 거짓이 진리를 죽이기로 한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정식 재판의 절차도 없이 일사천리로 죽이도록 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은 갖은 모욕과 천대를 다 받으면서 사형틀을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 니다. 세상에 이런 고난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직도 북한의 인민재판을 본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의 재판을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 동분자>라는 낙인을 찍고는 인민의 이름으로, 공개처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당했던 불의한 재판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재판을 우리 주님이 먼저 당했다는 것 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받으면, 주님과 함께 면류관을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의 행렬에서 우리는 불의한 재판의 희생자들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바 라보면서 참고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불의한 세력은 반드시 꺾어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3.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이 당한 고난을 보면, 로마의 세력 앞에 힘없이 죽어간 예수님처럼 보이지만, 주님은 자 신의 죽음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것을 위 하여 내가 세상에 왔다고 여러번 말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였고,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요10:11)고 하였습니다. 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다'(요12:24)고 하였습니다. 또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 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5-7)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자기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고난임을 제자들에게 때마다 순간마 다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 말이 과연 무슨 뜻인지 잘 모 르고, 십자가 없는 영광만 바라보면서 그를 따랐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운명하였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성부 하나님의 속죄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당한 고난은 이렇게 대속의 고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심판했던 불의한 세력들은 지금도 잔존해 있습니다. 주님을 사형에 처했던 로마의 창검은 지금도 그 위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만이 승리의 월계관을 쓸 것입니다. <네로> 황제의 명령 한 마디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어야 했고, 십자가의 못박는 로마의 군인들의 당당했던 모습 앞에 우리 주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초라했지만, 오늘 날 어떻게 되 었습니까? 대속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위력은 총검의 위력보다 더 강합니다.

영국의 아프리카 탐험가 중 두 명의 탐험가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실 로이드>이고, 다른 하나는 <데이비드 리빙스톤>입니다. <로드>는 남아프리카에서 소위 황금전쟁(Boer War)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 수십만명을 학살하고 황금과 다이아몬드을 벌어들임으로써 당시 영국 의 훈장과 애국자 칭호를 받았습니다. 반면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제도와 영국의 침략정책을 반대하고 식민지 압제 정치를 비판하면서 싸워 그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조국의 반역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로드>는 무덤조차 없지만, <리빙스톤>은 영국 국립묘지에 안 장되어 많은 방문객이 지금도 그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의 차이를 낳게 하였습니까? 하나는 총칼의 힘으로 정복하고 빼앗았지만, 다른 하나는 대신 고난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희생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렇게 대속의 고난은 위대한 결과를 낳게 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묻히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 주님의 고난은 한 알의 밀 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주님의 대속의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형벌에서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는 낳음을 얻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채찍에 맞음 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 생명의 삶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옛 구습을 좇아 살던 생활은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주님으로 옷 입고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의의 옷으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의 행위로는 모두 죽을 존재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사람의 신분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세상 끝날 까지 동행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20-23
2001-11-22 01:03:19   read : 115

1. 하나되는 것이 축복이고 행복이다.

오늘 아침에는 만남도 중요하지만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더 중요 합니다. 창2:24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자가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만나서 한 마음과 한 뜻과 한 몸 을 이루었을 때 저들에게는 기쁨과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향해서 이 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행복은 하나가 되는 데 있고 기쁨은 하나가 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갈라지는 데서 옵니다.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갈라지는 데서 영적 비극 이 초래되었고 아담이 하와에게서 갈라지는 데서 가정의 비극이 초래되었으며 가인이 아벨 에게서 갈라지는 데서 사회의 비극이 초래되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 가정과 사회의 모든 문 제도 서로 갈라지는 데서 초래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고 자식이 부 모와 갈라지며 남편이 아내와 갈라지고 아내가 남편과 갈라지는 데서 모든 비극이 초래됩니 다. 동서와 남북의 갈라짐이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일 것입니다. 갈라짐은 곧 죄요 멸망 입니다. 하나됨은 곧 구원이요 생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존재가 본래 하나님으로 부터 왔고 그리고 인간의 피와 살을 서로 나눔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 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갈수록 존재가 충만해지고 하나님에 게서 멀어질수록 비존재가 된다.

2.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아침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요점은 "저희로 하나가 되 게 하옵소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 고 오고 오는 수많은 신자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드린 대제사장의 기도는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였습니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내가 아버지 안 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21).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이 기도를 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왜 예수님께서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렸습니까?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 는 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 에게서 갈라 놓았고 우리를 서로 서로에게서 갈라 놓았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시 회복시 키시고 원상 복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셨고 성자 예수님도 그것을 원하셨고 성령님도 그것을 원하셨습 니다. 고후5:19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했습니다. 엡2:13에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갈4:3에 보면 성령은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되 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기쁘게 만드시기를 원하시고 우 리를 행복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고 우리를 서로 서로 하나되게 하시는 데 있었습니다. 엡2:14을 다시 읽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는 하나됨의 상징입니다. 수직적인 하 나됨과 수평적인 하나됨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우리로 하나되게 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날 부터 지금까지 우리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 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 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시고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한국의 신자들과 일본의 신자들이 하나되게 하시고 남한의 신자들과 북한의 신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김 장로와 그 부인이 하나되게 하시고 이 권사와 그 남편이 하나되게 하옵소 서." 예수님은 지금 인간에게 있어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인 제자들이 이방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 너무도 어렵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에 서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 기도는 애절한 기 도요 처절한 기도입니다.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기도입니 다. 이 기도는 종말론적 완성을 바라보는 인내와 소망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용서 와 사랑에 근거한 구속주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이 기도가 아직도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이 기도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에는 놀라운 하나됨의 운동이 때마다 일어나곤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예루 살렘교회의 태동은 하나됨의 운동이었습니다. 행10장의 고넬료 집의 부흥도 하나됨의 운동 이었고 행13장의 안디옥 교회의 부흥도 하나됨의 운동이었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 던 부흥운동도 실상은 하나됨의 운동이었습니다. 주님의 애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남편과 아 내가 눈물로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부모와 자녀들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화목의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가정과 사회와 교회 안에서 하나됨의 운동이 새롭게 일 어나야 할 때입니다.

3.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아침 우리는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비결 세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창2:18에 나타난 창조의 비결입니다. 즉 우리의 존재가 "서로 돕는 배필"이란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 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서로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존 재가 나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쉽게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 못을 모두 "내 탓이라"고 돌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나 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 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도와 가며 살아 가야할 지체들입니다. 둘째는 요17장에 나타난 구속의 비결입니다. 여기 "우리와 같이" 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를 구속하고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자기와 화목시키기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신 것처럼, 아들이 세상을 아버지와 화목시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 신 것처럼, 그리고 성령께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서 죄인들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내어 주면서 하나되라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 님을 모델로 삼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자신을 내어 줄때, 자신을 희생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했습니 다. 주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한가 될 수 있고 부모와 자녀가 하나가 될 수 있고 상전과 종 이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주님의 마지막 기도 소리때문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저 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시고 기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 소리를 듣기 때문 에 하나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고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는 기어 코 응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와 소원이 우리 가운데 그 대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생동하는 교회,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연합운동을 펴 나아가는 우리 강변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